빌라도를 위한 변명[각주:1]

: 유대인의 왕,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기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빌라도는“나는 쓸 것을 썼다”하고 대답하였다. (요한복음 19: 19-22)



01. 빌라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인식이 안 좋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보통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데, 빌라도라는 이름은 매주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런 사도신경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역사가 계속되는 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아주 나쁜 놈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빌라도에게 그런 오명이 생기게 된 결정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예수를 심판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과연 빌라도가 이렇게 사도신경에까지 올라 대대로 죽일 놈이라고 지탄받고 저주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빌라도에 대한 나름의 변명을 오늘 하늘 뜻 시간을 통해 시도하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로마가 이스라엘에 파견한 총독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옛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했을때 조선총독부를 두어 총독을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로마의 종교는 다신교입니다. 로마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많은 땅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렸지만 식민지 통치에 있어 종교적으로는 관대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종교였던 유대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거리가 등장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 (대제사장, 바리새파 등등)과 로마의 관계가 어떠했는냐? 하는 점이죠. 로마의 총독들은 식민지 국가의 민족지도자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부여하여 그들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여 밀약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직 목표는 원활한 세금징수와 노동력 제공입니다. 반란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고 평온한 임기를 보내는 것도 로마의 식민지 총독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02. 빌라도의 어록

그런 빌라도가 지금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나이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처형하라고, 예수를 살려두면 민심이 이반될 것이라고 그러니 그 자를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지금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는 장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다 나오는 장면이고, 예수의 죄목으로 십자가 위에 달린 죄패 “유대인의 왕”에 대한 기사 역시 4복음서에 다 등장합니다. 아래 각주에 빌라도가 재판에서 한 어록을 복음서 별로 달아놓았습니다. 아래 각주에 빌라도가 재판에서 한 어록을 복음서별로 달아놓았습니다.[각주:2] 마태, 마가,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의 빌라도 재판 사이에 있는 빌라도의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과 심정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요한복음이 좀 더 질문의 층이 다양하고 심층적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대한 차이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를 다른 복음서에서는 누가 썼는지 불분명한데,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예수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위한 것이었다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빌라도가 선택한 ‘유대인의 왕’은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빌라도는“나는 쓸 것을 썼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What I have written, I have written)입니다. 카톨릭 성경에는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총독인 내가 이렇게 쓰겠다는데 왜 이렇게 토를 달지, 총독인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라고 해석할 수 있고, 심문 과정에서 예수를 대면하고 대화하면서 그 아우라와 품격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면서 정말 예수가‘유대인의 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이라면.... 빌라도가 한“나는 쓸 것을 썼다”라는 답변은 그래서 많은 상상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03. '노르웨이의 숲' 혹은 '노르웨이산 가구'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올 무렵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젊은 청춘들의 사랑, 이별, 죽음, 삼각관계, 허무...이런 감정들이 하루키의 특유의 문체로 잘 전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앓이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상실의 시대’의 원제가 <노르웨이 숲>입니다. 이 책의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지금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비틀즈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틀즈가 1965년에 본인들의 여섯 번째 앨범(Rubber Soul)을 출시합니다. 그 앨범에 수록된 곡 중 <노위전 우드>(Norwegian Wood)라는 곡이 있습니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Norway(노르웨이)라는 나라 아시죠. Norweigian는 형용사로 쓰일때는 노르웨이의, 명사로 쓰일때는 노르웨이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Norwegian Wood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노위전 우드>(Norwegian Wood)는 1987년에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이기도 합니다. 하루키는 Norwegian Wood를 ‘ノルウェイの森 ’, 즉 ‘노르웨이의 숲’이라 옮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노르웨이의 숲>으로 알려 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번역이라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통상 Wood 나무(혹은 가구로 해석되기도 함), Woods 가 숲(林)입니다. Norwegian Wood는 ‘노르웨이 나무 or 가구’로 번역하는 것이‘노르웨이 숲’으로 번역하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이죠.

제가 아래에 비틀즈의 Norwegian Wood 가사를 한글로 달아드리겠습니다. Norwegian Wood 나오는 부분만 영어로 남겨 둘께요.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주십시오. <노르웨이 숲>이 좋은지, <노르웨이 가구>가 좋은지를: “한때 난 사귀는 사람이 있었지. 아니 그 사람이 나랑 사귀어준 거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은 방을 보여줬어. Isn’t it good? norwegian wood. 편히 있다 가라며 아무 곳에나 앉으라고 했지. 그래서 둘러보았지만 의자가 없더군. 바닥 깔개에 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시간을 죽였어. 2시까지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 그 사람이 말했어. 이제 잘 시간이야. 자기는 아침에 근무라며 웃기 시작하더군. 난 아니라고 말하고는 욕조로 기어들어가 잤지. 눈을 떴을 때는 혼자였고 새는 날아가버렸더군. 그래서 난 불을 질렀어. Isn’t it good? norwegian wood.”

영어로 쓰여져 있는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솔직히 둘 다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갑자기 노르웨이 가구와 숲 이야기를 왜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택일을 하라면 둘 다 써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멋지지 않아(짱이지, 좋지 않아) 노르웨이 가구 or 노르웨이 숲”. 저는 다 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냥 후렴구처럼 “멋지지 않아요. 노르웨이 숲”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자기 집에 있는 노르웨이 가구를 자랑하면서 “멋지지 않아요 (우리집) 노르웨이 가구”라고 말할 수도 있죠.

어떤 문학작품을 해석하려면 당시 문화와 관습과 그 사회의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죠. 비틀즈 전문가들에 의하면 1960년대 영국에서 노르웨이산 가구(Norwegian Wood)가 인기였다는 겁니다. 이 노래에서는‘노르웨이 숲’ 보다는 ‘노르웨이 가구’가 더 맞는 해석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노르웨이 숲’이든 ‘노르웨이 가구’든 간에 그 부분의 가사가 이 노래 전체에서 이질적인 그로테스크한 불순물 같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습니다.


04. 돌발, 우연 그리고 진실

하루키는 영미소설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하루키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 누구보다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이 사실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왜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번역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한마디쯤 답변을 했을법도 한데 별다른 하루키의 대응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이영미 역, 비채)에 보면 ‘노르웨이의 나무는 보고 숲은 못보고’라는 글에서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번역한 ‘노르웨이의 숲’은 오역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하루키는 No, 나는 잘못 번역하지 않았다, 라고 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하루키의 변론이유입니다. 실제로 비틀즈 노래를 들어보면, Isn’t it good? Norweigan Wood가 들릴 듯 말 듯 애매하게 들립니다. 전체적으로 곡을 지배하는 메시지는 모호하고 몽롱하고 흐릿합니다. 그 노래 가사 중 배치된 돌출적인 Isn’t it good? Norweigan Wood 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루키는 그 모호함과 불편함이 이 곡의 생명이고 메세지라 말합니다. 자기가 번역한 ‘노르웨이의 숲’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노르웨이산 가구’역시 맞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루키는 말합니다. 그 정답을 말해버리는 것이 이 곡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정답을 말해버리면 이 곡의 생명은 끝난다는 것이죠. 그냥 답답하고 뭔가 풀리지 않는 불쾌함과 군더더기를 남기면서 그 곡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하루키는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비틀즈 멤버가 4명이었죠.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스타). 조지 해리슨 사무실에 있었던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제목이‘Knowing s/he Would’였답니다. 문제가 되는 가사도 “Isn‘t it good? knowing s/he would”였다는 거죠. “멋지지 않아? 그(녀)가 하려는 것을 안다는 건 말이야.” 전체적인 노래 가사가 몽환적이고 약간 썸타는 분위기도 있고, 무슨 로맨틱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을 전제로 하는데, 서로 호감이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할 것 같은 아찔한 순간을 예상하는 말이 바로 knowing s/he would입니다.

그런데 음반 회사 측에서 가사가 선정적이어서 검열에 걸릴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자, 존 레넌이 홧김에 knowing s/he would 를 Norweigan Wood로 바꿔버렸다는 겁니다. 어쩌면 Norweigan Wood, 즉 <노르웨이의 숲> 혹은 <노르웨이산 가구>는 뻥카입니다. 그렇다고 한 세대가 흐른 시점에서 모두가 Norweigan Wood로 불렀던 노래가사를 knowing s/he would로 바꿔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죠. 지금까지 저는 Norweigan Wood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Norweigan Wood는 무엇일까요?


05. 진리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하여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를 쫓아가면서 하루키도 생각이 났고, 존 레논 생각도 났습니다. 하루키가 생각이 난 이유는 Norweigan Wood를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번역해놓고 그것이 틀리지 않느냐는 지적에 정답이 없으므로 나의 번역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버리는 배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쿨함. 그래도 그때는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라고 밝히는 그의 솔직함 때문이었습니다. 존 레논이 생각나는 이유는 원래는 knowing s/he would 였는데, 검열당국의 성화에 못 이겨 비록 가사를 Norweigan Wood로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계속 불명확하게 Norweigan Wood를 읊조리면서 knowing s/he would로 부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아죠. 우리가 처한 압제와 구속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의 도래를 유대인들은 대망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 하에서는 그런 메시아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내란죄, 국가보안법에 저촉을 받는 큰 죄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조롱하면서 예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 써서 붙입니다. 네 주제에 우리의 왕이라니. 어림없는 소리고 웃기는 소리다, 라는 경멸의 메시지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전하는 빌라도가 직접 써서 붙인 ‘유대인의 왕’은 좀 느낌이 다릅니다. 빌라도는 ‘어쩌면 이 자가 정말 유대인의 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빌라도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죄패에 쓰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굳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면서 “나는 쓸 것을 썼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어쩌면 유일하게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던 최초의 인물은 스승이 잡히고 뿔뿔이 흩어졌던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라 빌라도 아니었을까. 진짜 메시아는 이렇게 남루하고 초라하게 우리 곁에 머물다 가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빌라도 혼자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진심을 담아 정말로 예수가 메시아였다, 라는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라 썼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빌라도를 소환하여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이 썼던 ‘유대인의 왕’은 무슨 의미였고, 당신이 만났던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냐고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다시 존 레논이 생각났습니다. knowing s/he would를 Norweigan Wood로 부르는 존 레논, 아니 Norweigan Wood를 knowing s/he would 부르는 존 레논. 어쩌면 이런 교란이 존 레논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교란의 방식이 Norweigan Wood가 텍스트로 작동하면서 살아남았던 이유입니다.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의 왕(메시아), 유대인들이 예수를 조롱하면서 그의 십자가 위에 죄패로 붙인 유대인의 왕(메시아), 빌라도가 예수를 대면한 후 쓴 유대인의 왕(메시아), 어쩌면 빌라도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왕(메시아) 서사를 교란시키면서 유대인의 왕(메시아)에 대한 서사를 다시 써 내려갔던 인물은 아닐까. 저자가,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면서 절규하지만 자기 목숨 하나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저 사람이 진짜 메시아라고 말입니다. 이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빌라도는 사도신경에 등장하여 그 후로 2000년이 흐른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원성과 아우성을 받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렇듯 빌라도가 말한 ‘유대인의 왕’은 우리의 (신앙, 혹은 신학의)경계를 교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어쩌면 그 경계에 대한 교란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전달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예수가 존재했던 방식과 그의 행위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절정이 십자가 사건이고요. 유대인들의 메시아주의가 지배했던 세상은, 로마의 평화가 제국을 지배했던 세상은 온갖 경계로 가득했던 세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도그마가 만든 경계였고, 제국의 질서가 만든 경계였습니다. 그로부터 2천년이 흐른 21세기, 자본이 지배하는 지구촌의 상황도 그리 이전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 정상인/장애인, 남자/여자, 백인/흑인, 내국인/난민, 이성애자/동성애자, 제국의 시민/ 그 밖의 인간>이라는 이항 대립의 원칙으로 구성됩니다. 빌라도가 물었던, 그리고 직접 예수의 십자가위 죄패로 썼던‘유대인의 왕’은 그 나누어진 경계를 교란시키고 흔들고, 결국에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표가 아닐는지.


06. 지금은, 2018 사순절

저는 빌라도가 자기의 목숨을 구하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그 사람이, 군중들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받는 저자가 진정한 메시아라는 비밀을 알았고, 그리고 예수와 만났던 그 순간이 자신에게 자유와 해방이 임했던 경이적이고 매혹적인 한 순간이었다, 라고, 그 찰나의 변화가 사실은 내 모든 선택의 순간과 삶의 고비마다 다짐과 결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고 간증하지 않았을까, 라는 순진하고 나이브한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사건이, 그 실패한 메시아 사건이 예수의 죽음으로 사라지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당장에 급한 불만 끄면 위기를 모면할 것이라고 빌라도는 생각했겠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 불은 꺼지지 않고 불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또 다른 메시아 사건의 원인이 되었고 그곳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기재가 되었습니다. 예수에 의해 감행되었던 실험은 유일회적인 실패한 기억으로 화석이 된 채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계속 역사에서 재생 반복되면서 더 큰 음모와 반란, 그리고 변혁의 시나리오가 되어 지금까지 유전되면서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빌라도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출발한다고 봐야겠죠. 그것에 대한 해석은 <노르웨의 숲>을 독해하는 방식처럼 지난하겠지만,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사건의 의미와 그것의 현재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고민과 기도를 회피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저는 신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과 부활절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교가 갖는 신비를 묵상하는 기간이고, 그것에 참여하는 시간이구요. 지금 우리는 2018년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2018년 3월 11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본문으로]
  2. 1) 마태복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27:11),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27:13), "여러분은,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27:17),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27:21),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27:22),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27:23),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27:24) 2) 마가복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15:2),"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 (15:4), "여러분은 내가 그 유대인의 왕을 여러분에게 놓아주기를 바라는 거요?" (15:9), "그러면, 당신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그 사람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15:12),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15:14), 15절에 가서 넘겨줌. 3) 누가복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23:3),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23:4),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오?" (23:6), "그대들은, 이 사람이 백성을 오도한다고 하여 내게로 끌고 왔으나, 보다시피, 내가 그대들 앞에서 친히 신문하여 보았지만, 그대들이 고발한 것과 같은 죄목은 아무것도 이 사람에게서 찾지 못하였소. 헤롯도 또한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를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이오. 이 사람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하고, 놓아주겠소."(23:14-16),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나는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까 하오." (23:22) 후에 백성의 아우성이 너무 커서 넘겨줌 4) 요한복음: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18:35),“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18:35),“당신은 왕이오?”(18:37), “진리가 무엇이오?”(18:38),“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18:38-39), "보시오, 내가 그 사람을 당신들 앞에 데려 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오." (19:4), "보시오, 이 사람이오" (19:5),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19:6), "당신은 어디서 왔소?"(19:9),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9:10),"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 (19:14),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19:15), "나는 쓸 것을 썼다"(19: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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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Rahab)의 스캔들(scandal)로 바라본 Me Too[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그들이 나간 뒤에, 라합은 홍색 줄을 창에 매달았다. (여호수아 2:21)


01. 1968세대 vs 2018세대


올해는 68혁명이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1968년 3월 미국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자 그 해 5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서 권위주의와 보수체제 등 기존의 사회질서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반전, 히피운동 등 사회전반의 문제로 확산되었습니다. 68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독일 등 국제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소련 위성 국가였던 체코에서도 68년 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모토로 공산주의 내에서의 개혁이 도모되었습니다. 하지만 8월에 소련에 의해 진압당하죠. 유명한 ‘프라하의 봄’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체코 출신의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프라하 젊은이들의 방황과 좌절과 희망을 누설한 바 있습니다.

20세기 말은 68을 분기점으로 그 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어도 현대사상의 지형도를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68을 분기점으로 각종 post 담론들이 분출하게 됩니다.(Post 맑시즘, Post 모더니즘, Post 구조주의, Post 콜로니얼니즘, Post 페미니즘 등) 68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냉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강력하게 작동되었던 대타자의 목소리, 하나는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소련과 동부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된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교조적 공산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럽의 지성과 젊은이들은 “양자에게 우리는 속았다. 이제 그 푸닥거리를 멈춰라!” 이것이 68이 우리에게 선사했던 선물이었습니다.

68혁명은 우리가 페미니즘, 동성애, 인종주의와 같은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68 이후 적어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누구도 여성차별 혹은 비하, 인종주의나 동성애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내면 지식인의 범주에 끼지 못하는 수준이하의 사람으로 시민사회에서는 낙인이 찍힙니다.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라는 낙인만큼 서구의 성숙한 시민사회 분위기에서 반동성애자, 인종주의자, 여성비하론자로 찍히면 살기 피곤합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 것이 68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68혁명이 지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68혁명 50주년이라는 시의적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부각되는 것은 요 근래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이 각종 시위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8세대와 지금 젊은이들, 그들을 밀레니얼 세대(밀레니얼 세대란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 사이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2010년 이후 사회의 주역으로 점점 대두하고 있다)라고 부르는데, 양자 간의 차이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진보진영의 운동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울러 요 근래 번지는 Me too 운동은 이런 흐름 속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물론, 이런 세대론적 접근은 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이죠. 출생, 지역, 계급, 거주지 등과 같은 것들이 그 변수들입니다. 미국 남부 농촌지역인 경우는 젊은이들의 투표경향은 대체로 부모세대와 같습니다. 미국 남부 같은 경우는 이런 세대론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대론적 분류가 유효하지 않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유명 사립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청년들의 진보정당 지지율은 거의 바닥일 확률이 높습니다. 서구사회 상위 5% 이내에 속하는 고소득자들의 진보정당 지지율은 어느 사회이건 얼마되지 않습니다. 즉 경도된 근본주의와 최상위 계급에게는 세대론적인 접근이 무용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중산층이하 밀레니얼 청년 세대들과 이전 세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68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간 운동의 차이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68은 이데올로기의 세대라 할 수 있고, 현재는 생계형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미국 플로리다 고등학교에서 총기사고가 있었죠. 그래서 미국 고등학생들이 백악관 앞에서 행진을 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것의 구호가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Our Lives)'이었습니다. 21세기 청년들이 거리로 나오는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숭고한 이데올로기를 이땅에서 실현하기 위한 강철 같은 의지와 투철한 신념 때문에 거리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힘들어서, 최소한의 삶의 안전함을 위해서 거리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럽 전역에서 청년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17~18세부터 23~24세 까지 대표적인 밀레니얼 세대 청년들입니다. 주된 이슈는 세계평화, 민주주의 만세, 인류의 존엄 뭐 그런 거창한 구호들이 아닙니다. 유럽 전역으로 지지를 넓혀가는 보수당 정권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공공의료 서비스에 대한 민영화반대, 각종 복지정책 축소에 따른 불만으로 촉발된 삶에 대한 위기감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이탈리아 총선이 있었는데 보수우파가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복지 정책에서 축소지향의 시행이 예상되면서 역시 이탈리아 젊은이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하네요.


02. 생계형 좌파의 탄생, 그러나 조용한 (한국) 청년들


현재의 밀레니얼 세대들은 전후 최고의 스팩을 갖춘 세대들입니다. 지난 주 김진호 목사님이 하늘 뜻 나누면서 오늘 날 청년을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라 명명한다는 소개를 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스팩을 보유한 세대들이 자신을 부르는 방식이 ‘획득’이 아니라 ‘포기’라는 절망의 아이콘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지옥의 묵시록 아닐까 라는 말도 했습니다.

현재 청년세대들은 6.25이후 최초로 부모세대보다 못사는 세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과 유럽의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샌더스 후보를 많은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들이 지지했습니다. 그들의 실질임금이 부모세대에 비해 20% 낮을 것이라고 여러 경제지표들이 가리키고 있는 상황에서 샌더스의 발언과 정책이 미국 밀레니얼 세대들의 호응을 얻은 것입니다. 현재 미국 밀레니얼 세대 청년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평가는 회의적입니다. 거의 과반이 자본주의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분배와 완전고용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미국이 이 정도이면 좌파의 입김이 강한 유럽은 어떨지 짐작이 갑니다. 이렇듯 68 이후 50년이 되는 시점에서 68 때와 맞먹는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징이 이데올로기적 좌파가 아니라, 생계형좌파라는 것이죠.

우리나라 청년들도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임금, 부채, 불안정노동과 주택 마련·양극화에 대한 불만과 제도권에 대한 불신을 한국 밀레니얼들이 해외 밀레니얼들과 그대로 공유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역사는 찬란했죠. 4.19부터 70,80년대를 거쳐 9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의 대학은 실로 사회 변혁의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어쩌면 70,80년대 상황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보기에는 민주화도 되었고 자유롭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은 상위 10%가 전체 부의 50%를 넘게 소유한 파렴치하고도 부도덕한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의 이력의 화려했던 한국의 대학가는 오히려 조용합니다. 전 세계 밀레니얼 청년들이 봉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당연히 레드컴플렉스 때문이다 라고 변명을 할 수 있겠으나 그건 너무 오래 우려먹는 핑계입니다. 지금 밀레니얼 청년들은 연애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시간과 여유도 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알바를 해야 하는 까닭에 정치에 참여할 시간이 실질적으로 없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로 행동하지 않는 청년들을 탓하기에는 어딘가 좀 궁색합니다.

저는 여기에다 한 가지 더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국내 거의 대다수의 단체(그것이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간에)들이 갖는 조직 문화의 경직성과 보수성, 폐쇄성, 무감각한 젠더감수성이 더 이상 청년들로 하여금 어떤 희망과 의지를 가질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밀레니얼들은 수평적 평등적 관계를 지향하며 젠더감수성이 발달한 세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의 다수 진보 조직들조차(보수는 말할 필요도 없고) 여전히 8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위계질서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보스(들)를 정점으로 하는 서열의 논리로 조직이 돌아가고 그런 까닭에 성추행 등과 같은 일상적 인권 문제에 무감각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안희정, 이윤택의 예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청년들이 왜 행동 안하는가를 지적하기 이전에 한국의 모든 기관과 조직들은 인권과 젠더감수성에 대한 환골탈퇴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금의 세태에 대해 겉옷을 찢으면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 번지고 있는 Me Too 운동이 한국사회를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고, 이는 With You로 들불처럼 번져 삶의 정치, 삶의 윤리로 까지 나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03. 라합을 아시나요?


오늘 하늘 뜻 본문을 여호수아에 나오는 라합 이야기로 골랐습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Me Too 운동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Me Too와 With You 운동을 위한 신학적 상상력을 선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여러분, 라합을 아시나요? 마태복음 1장에 예수의 족보가 나오는데 거기에 5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한명이 라합입니다. 라합의 여호수아서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여리고의 창녀입니다. 모세가 죽고나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요단강 건너 가나안 진출을 도모하는데 가나안 입성의 첫 관문이 바로 여리고성입니다. 라합은 그 여리고성의 여관집주인이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주막집의 주모를 연상하면 될 것 같네요.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이 여리고성을 정탐하고 하필 숨어들어간 곳이 라합의 주막이었다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전조를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당시 전체적으로 가나안 땅은 중앙집권체제라기 보다는 성읍국가체제입니다. 지형적으로 가나안 지역은 북쪽 갈릴리 호수에 발원한 요단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사해까지 이릅니다. 거기만이 유일한 수원지입니다. 그로부터 멀수록 건조한 고원지대입니다. 그마저도 물에 염분이 포함되어 있어 농업용수로는 부적합니다. 이런 이유로 오아시스나 우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살았습니다. 그것이 성읍국가가 발달하게 된 원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 여리고는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큰 샘을 소유한 풍요로운 성읍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가나안은 또한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느슨하게 가나안을 관리하였습니다. 성읍국가 영주의 권력을 보장해 주는 대신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식민지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는 다문화 포용정책을 펼치는 듯 하지만, 반란이나 조세의 원칙을 어겼을 경우 철저한 응징이 따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나안 민중들은 영주와 이집트 파라오에게 이중으로 약탈의 대상이었고, 라합은 그중에서도 최하층 계급의 여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여호수아 2장은 첩보영화의 대본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긴장과 서스팬스가 넘칩니다.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이 여리고 침공에 앞서서 여리고를 정탐하러 온 상황입니다. 가나안의 비밀경찰 조직이 라합의 집에 숨은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의 냄새를 맡고 라합의 집에 들이닥칩니다. 그러자 라합이 그 스파이들을 다락방에 숨기고 나서 태연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저에게 오기는 했지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난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날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빨리 사람을 풀면 아마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여호수아 2;4-5) 아주 대담한 거짓말 입니다. 범인 은닉죄, 불고지죄, 허위진술까지. 여리고의 경찰과 사법부의 입장에서 볼때는 아주 중형에 처할 범죄입니다. 어쩌면 내란죄 죄목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이고 조국인데 무슨 이유로 이런 대담한 거짓말을 했을까요.

요령껏 왕의 병사를 따돌리고 지붕에 마련해둔 은신처로 올라가 정탐꾼들과 대화를 나누는 라합의 목소리는 아주 분명하고 단호합니다.“우리는 출애굽하면서 이적을 행하시고 당신들을 구한 야훼의 위대함을 안다..... 그러니 우리를 구해달라. 우리를 죽지 않도록 우리의 생명을 구해달라.”(2:9) 자기가 살고 있었던 공동체 여리고의 위기를 라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으면 내가 죽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라합을 계속 짓누르고 있던 때에 라합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버리고 하느님께 자신의 운명을 의지하였던 것이죠. 그리고 나서 도망칠 방도들 정탐꾼들에게 일러줍니다.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은 라합의 성의에 감사의 말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약조를 합니다. “여기 홍색줄이 있으니 우리가 이 땅으로 들어올 때, 당신이 우리를 달아 내렸던 그 창문에 이 홍색 줄을 매어 두시오. 그리고 당신의 식구들 모두 당신의 집에 모여있게 하시오. 그러면 살 것이다...”(2:18-20) 그리고 나서 등장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하늘 뜻 본문입니다. “그들이 나간 뒤에, 라합은 홍색 줄을 창에 매달았다.”입니다.


04. Me Too 운동, 그리고 반론들


라합이 주홍색 줄을 창에 매달았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다니엘 호돈의 <주홍글씨>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주인공(헤스터 프린)과 목사(딤즈테일)의 불륜을 다룬 소설이죠. 작년(2017년) 10월 한백 창립 30주년 기념 연극으로 올린 보스톤 마녀사냥을 주제로 했던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시련 Crucible>과 소설 <주홍글씨>는 엄격한 청교도 사회에서 성직자의 불륜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단 주홍글씨 A는 간음을 뜻하는 Adultery의 머리글자입니다. 당시 청교도의 가혹하고도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엄숙성, 광기를 나타내는 장치입니다. 주홍색 줄을 자기 창가에 내건 라합과 주홍글씨를 가슴에 단 헤스터 프린이 오버랩되면서 그들이 겪어야 했을 고초가 생각이 났습니다. 자칫 발각되면, 자기만 살겠다고 나라를 배신한 요부!, 라는 죄목으로 라합은 죽임을 당했겠죠. 그렇게 죽은 후에도 라합과 라합이 창에 단 주홍색 줄은 인구에 회자되면서 배신과 탐욕과 욕망과 저주의 아이콘으로 전승되었을 것 입니다.

내부에서 외부를 관조하면서 자기의 관점으로 대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 외부에서 안을 폭넓게 살피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속한 집단과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비판하고 잘못된 점을 발언하는 일은 어지간한 용기와 다짐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라합은 내부고발자이고 국가를 배신한 반역자입니다. 지금 Me Too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 역시 그들이 속한 공동체와 집단의 시각에서 볼 때는 내부고발자이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관습을 전복시키는 파국적이고 위험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된 Me too 운동이 안희정 수행비서인 김지은씨의 발언으로 지난 주에 정점을 찍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요? Me Too 운동을 둘러싼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진보분열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발언도 있었고, 근대적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의 인격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봉건시대 인권에 대한 접근이고 근대 이후 시민사회로 접어들어서는 인격 전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으로 인권을 대하는 태도가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성폭력을 저지른 인물은 전적 악마와 괴물 취급하면서 마녀사냥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좀 더 냉철한 접근 방법과 태도는 우리사회에서는 요원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엊그제 발생한 조민기씨의 자살소식은 이런 우려가 현실화된 경우라 개운치 않습니다.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이런 성폭력만을 소재로 한 선정적 이슈들이 페미니즘을 호도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페미니즘은 단순한 육체적 성과 억압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과 관습과 권력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이고 대안인데, SNS상에서 돌아다니는 Me Too 소식은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흐르고 있다. 자칫 이런 선정성이 페미니즘의 진면목을 가리고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으로 나가는데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은 항상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같이 정통 맑스주의 계열의 입김이 센 곳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시선이 우호적이지 만은 않습니다. 현재 진행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과도한 열풍이 중산층, 혹은 고학력 페미니스트들의 전유물 아닌가. 더 가난하고 약한 여성들, 페미니즘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여성들을 배제한 페미니즘 아닌가. 지금 Me Too 운동도 검사, 유력 대통령 후보의 비서 등 상층부 여성들의 입을 통해서만 들려지지 않느냐. 이것은 그동안 페미니즘 운동이 변혁의 기본인 계급성을 담보하지 못했던 결과라고 반박합니다.

맑스주의는 계급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계급으로만 포획되지 않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여성문제, 소수자문제, 문화적 문제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정통 맑스주의 운동권에서는 비계급적 좌파라고 하지요. 범박하게 말하면 계급 좌파는 급진적인 노동운동가를 말하는 것이고, 비계급적 좌파들은 급진적 페미니스트, 퀴어운동가, 급진적 생태주의자, 급진적 문화운동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좌파의 외연이 넓어질수록 제대로 된 세상, 세련된 세상이 되리라 생각하는데...이 문제를 갖고 제 오래된 지인과 얼마 전 Me Too 운동을 놓고 이야기를 하다 설전을 벌인바 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단체에서 오래동안 일을 했던 그 친구는 저의 발언이 비계급적 좌파의 계급적 좌파에 대한 비난이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친구의 오해에 약간 빈정이 상해‘그런 굳어있고 화석화된 교조주의적 운동의 형태가 얼마나 혁명을 거칠고 무자비하게 만들었는가. 그래서 지금의 사태에 이른 것 아닌가,’라고 말을 해 버렸습니다. 그 다음 분위기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짐작하십시오.

Me Too를 둘러싸고 현재 다양하게 전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보기에 따라서는 맞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Me too 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하고, 거리두기도 필요하고, 좀 더 냉철해 질 필요도 있겠죠.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하고 종합하면서 좀 더 큰 틀에서 지금의 현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식자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합리적인 설명들을 들으면서도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고통의 문제는 몸이 기억하고,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면서 진정되지 않은 채 귀환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05. With You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라합이 주홍색 끈을 자기 창에 매단 후에 Jtbc 손석희 사장을 만나 지금의 심정을 말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한국땅에 벌어지고 있는 Me too 운동의 증언자들과 라합 사이 놓여 있는 2500년 이상의 시간의 차를 뛰어넘어 이원으로 생중계를 하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조민기, 이윤택, 조재현, 김기덕, 안희정 등을 고발했던 미투 동참자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지금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혹은 후배들을 위해 나섰다”고 하면서 어렵게 자신들이 당했던 일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속한 법조계, 극단, 학교, 교회, 정치적 동지를 배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자기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면서 까지 지금 이렇게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고발과 반역은 개인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고, 화제의 인물에 오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굴욕적이고도 비참한 삶을 수백 수천년 동안 참고 견디면서 살아왔던 전체 여성들이 마지막으로 우리사회에 던지는 경고이자 절규의 메시지다’라는 생각이 저는 듭니다. 그래서 백만 스물 한번, 백만 스물 두번, 백만 스물 세번의 고통과 굴욕을 참아왔던 그녀들에게 백만 스물 네 번째 고통을 왜 못참느냐고 이번에도 조용히 넘어가자고 저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준 그분들을 지지합니다.

어떻게 그들이 용기를 내고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라합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고, 그 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 신이 우리가 겪고 있는 압제와 아픔과 절망을 끊어줄 것이고,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의 창에 주홍색 줄을 내린다!” 안희정 전지사의 성폭행을 고발했던 김지은씨는 인터뷰 말미에서“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게 방송이라고 생각”해 출연을 결심했고,“국민들이 저를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국민들이 저를 지켜줬으면 좋겠다”라는 대목에서 울컥했습니다. 라합이 했던 “주께서 저를 지켜주십시오, 주께서 저를 지켜주실 것을 믿기에 저는 주홍색 줄을 창에 내걸겠습니다”라는 말과 겹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국민을 믿고, 우리를 믿고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국민이 답을 할 단계이죠. 그것이 With You 운동의 시작 아닐까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백 식구들 한분 한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06. 에필로그


한국 현대사에서 4.19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 세대가 나누어지듯, 80년 광주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누듯, 97년 IMF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누듯, 2014년 세월호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누듯이, 역사는 분명 2018년 Me Too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눌 것 입니다. 저는 민주주의만 이룩하면, 경제정의만 이룩하면, 통일만 되면 세상이 바뀌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미완으로 남아있는 현재 진행형의 과제이지만, 그것들의 성취를 위해, 그런 대의를 위해 한국의 여성인권은 그동안 정상적인 가치를 누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억압되어 왔고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은폐되어 왔습니다. 남성과 더불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인권이 이정도인데, 성소수자들의 인권은 오죽하겠습니까. 어쩌면 Me Too 운동은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여성(타자)에 대한, 여성(타자)에 의한 자기 목소리가 날(生)로, 집단적으로 울려 퍼지는, 그리고 그 파급력에 있어서 최초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생활을 청산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척 중요한 신앙적, 역사적, 정신사적 전환의 사건이었습니다. 광야시대에서 가나안 시대로 넘어가는 연결지점에 여리고가 있었고, 여리고는 자신의 창에 홍색줄을 길게 내린 고난 받는 여성의 끝판왕 라합에 의해 무너집니다. 지금 이어지고 있는 Me Too 운동이 홍색띠로 길게 이어져 대한민국이라는 성에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이곳에 새로운 기운과 분위기가 조성될 것입니다. 그 싸움은 우리가 그동안 민주주의와 통일과 정의와 자유를 추구했던 가치와 투쟁과 노력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하고 급하고 간절하다는 사실을, 저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2018년 3월 11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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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이 이끄는 삶[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보시기에 참 좋았다 (it was very good).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창 1:31)


00.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새해를 어떻게 시작하시고 계신가요? 문득 제가 서른 살이 되던 해가 생각납니다. 스물 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던 12월 31일 날 밤에 대학로에 있는 어느 맥주집에서 스물 아홉이었던 내 후배와 맥주를 먹으며 엉엉 울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저 보다 한 살 적었던 그 후배는 지금은 꽤 알려진 독립다큐멘터리감독이 되었는데, “형 울지마!” 라고 저를 위로 할 때, “야, 스물 아홉이 뭘 알어?” 하면서, 저의 지나간 20대를 하염없이 애도했었습니다. 그때로부터도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저는 올해 오십이 되었습니다. 사십이 되던 해는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어떻게 사십을 맞이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십을 맞는 올해는 느낌이 좀 다르네요. 스물 아홉에서 서른을 맞이하던 그 해와 비슷하게 좀 우울하고 맬랑콜리 합니다.

   제 기분을 더 안 좋게 만든 것은, 제가 새해시작하자마자 감기가 걸렸는데, 저는 보통 감기 걸려도 약 안 먹고 인삼차나 비타민 먹고 잠 자고 일어나면 나았는데, 이번에는 낫지가 않는거예요. 그래서 병원갔더니 폐렴까지는 아니지만 기관지염으로 발전했다고, 하면서 주사 맞고 약먹고 해서 지금은 겨우 잡혔습니다. 오십이 되니까 감기까지도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구나, 라는 씁쓸함이 밀려왔습니다.

   더욱 저를 심란하게 만든 것은, 오십은‘지천명’이라고 하죠. 하늘의 명을 안다는 나이가 지천명 아닙니까. 그런데 오십이 된 저는 하늘의 뜻은 커녕 내 마음 하나도 제대로 알지도 다스리지도 못하는 나 아닌가, 라는 회의와 반성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오십이라는 삶의 무게에 아직 저는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암튼 저는 이렇게 썩 유쾌하지 않게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좀 나아지겠죠.


01.

   새해가 되면 결심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죠. (새해들어 여러분들은 무엇을 결심하셨습니까?) 담배를 피시는 분들은 금연을 결심하고,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는 올해는 성경을 반드시 일독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교회에서는 새해가 되면 일일성경 통독표 같은 거 나누어 주면서 매일매일 읽을 성경을 읽도록 유도합니다. 대개의 경우 창세기 출애굽기까지는 잘 따라가다가 레위기 민수기가 나오면 거의 반 이상의 사람들이 포기합니다. 저는 이런 식의 성서 통독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용과 의미가 단절되잖아요. 별로 재미도 없습니다.

    성서를 읽는 (제 견해로) 좋은 방법은 사건의 단위별로 성서를 읽는 겁니다. 성서를 이야기의 단위별로 끊어 읽는거죠. 예를 들어 창세기를 읽을 때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삭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가 창세기의 내용이면, 아브라함으로 시작했으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다 읽는거죠. 아브라함 이야기가 창 12장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아브라함이 죽는 기사가 창 25에 나오는데, 거기까지 원샷으로 읽는 것입니다. 한 시간 정도면 됩니다. 물론 매일 한 시간 오로지 성경 읽는데 시간내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가끔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는 이벤트를 올 한해 몇 번 만들어 보기를 권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새해가 되어도 별다른 결심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올해 오십도 되고, 제가 한백교회 담임목사 취임한지 횟수로는 4년차, 만으로도 3년을 맞이하면서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성경을 좀 정해진 시간에 주기적으로 읽자, 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하늘 뜻 준비할 때, 논문을 쓸 때나 원고를 쓸 때 자주 성경을 보지만, 그런 목적이 있는, 직업으로서의 성서읽기 말고, 그냥 단백한 성서읽기를 해 본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실험 중입니다. 언제가 가장 일정하게 아무런 구애 받지 않고 시간을 낼 수 있을까, 실험중인데 만만치 않네요. 어쨌든 저는 지금 2018년 새해가 되어 단백한 성서읽기를 시작했습니다. 벌써 창세기를 다 읽고 출애굽기을 읽고 있습니다. 일단 레위기- 민수기를 넘어가는 것이 목표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02.

    오늘 하늘 뜻 나누기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읽다가 들었던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단백한 성서읽기를 한다고 했는데 어느덧 목적이 있는, 직업으로서의 성서읽기가 되어버렸네요. 창세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2장 4절까지가 첫 번째 창조이야기라면, 창세기 2장 4절부터는 두 번째 창조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 내용은 첫째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와 2장부터 등장하는 창조이야기 사이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신이 창조하기 전에 세상이 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 1:2) 반면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메마른 광야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창 2:5-6)  

   이러한 차이는 창조 이야기가 쓰여지던 시기와 공간적 배경을 암시하는 단서입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는, 즉 물로 가득찼던 세상에서부터 창조가 시작되는 이야기는 바벨로 강가로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때 형성된 이야기입니다.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 비옥한 초승달지역은 인류 4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죠. 앗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 제국들이 이 강가에서 발원하고 성장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강들이 홍수가 나서 범람하면 온통 물난리가 나서 모두가 쓸려내려 갔습니다. 이런 배경속에서 포로로 잡혀와 이방땅에서 살고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신은 우리를 위해 물과 물 사이를 갈라 하늘을 내고 길을 내고 땅을 마련하여 우리를 안전하게 만드는 신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에는 이렇게 창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때 위로는(에누라 엘리쉬) 하늘이 이름 지어지지 않았고, 밑으로는 마른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들(신들)의 아버지 압수(남신, 지하수 상징)와 그들 모두를 낳을 모체 티아마트(여신, 바닷물 상징)는 자기네들의 물을 하나로 섞고 있었다.”창세기 1장과 굉장히 유사하죠. 


03.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메마른 광야 지대인 가나안땅을 배경으로 합니다. 가나안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가나안땅은 메마른 척박한 해발고도 800미터되는 산지가 중앙에 버티고 있는 척박한 땅입니다. 그나마 그 지역에서 살만한 땅은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해안지대,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그 땅이 유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메마른 광야지대에서 살았다고 보면 맞습니다. 물이 귀한 곳이었기에 땅에서 물이 솟아나 온 땅을 적셨으면 좋겠다, 라는 환상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볼 때 바벨론 포로기때 형성된 첫 번째 창조설화보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가 역사적으로 더 오래된 창조이야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의 핵심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 역시 고대 메소포타미아 창조 이야기에 거의 공통되게 언급되는 점이라고 고고학자들은 말합니다. 최초의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수메르의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처음에 큰 신과 작은 신이 살았다고 해요. 작은 신들이 노동을 담당했고, 큰 신들은 작은 신들이 노동하는 것을 보고(감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작은 신들이 점점 불평불만이 늘어나면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큰 신들이 작은 신들의 불평소리가 시끄러워 자기들이 쉴 수가 없게 되자, 작은 신들의 우두머리를 처형하고 그의 피를 흙과 섞어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작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지게 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는 큰 신들이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반역한 신들의 피를 흙과 섞어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속에 인간을 바라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관점이 들어있는 거죠. 인간은 반역의 DNA를 타고 났다는. 창세기 2장에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역시 당시 퍼져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인간 창조설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DNA에 반역의 인자만이 섞여 있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살아있는 따듯한 인간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왜 어떻게 언제부터 이런식 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일어났을까...이 부분은 다각도에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두 번째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첫 번째 창조이야기입니다.


04.

    창세기에 등장하는 두 개의 창조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은 어쨌든 신이 인간에게 살만한, 아니 살기 아주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을 생각해보세요.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씩 만들어가면서 “좋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빛을 만들고 나서,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지는 것을 보시고, 땅에서 온갖 생명이 돋아나는 것을 보시고, 창공에 빛나는 것이 땅을 환히 비추는 것을 보시고, 물과 하늘에 생명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신은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최종적으로 “참 좋았다”라는 여느때보다도 더 강한 감탄을 합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만들었을 때랑은 달리 인간을 만들고 나서‘좋았다’에서 ‘참 좋았다’로 신의 표현이 격상된 이유는 무엇일까, 를 둘러싼 엉뚱한 호기심, 그리고 발칙함 같은 것이 작동하더군요. 과연, 신은 무엇 때문에 ‘참’ 좋았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창세기 1장31절인데, 그 앞 창세기 1: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the image of God, eidos)대로 사람을 창조하였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른 것 들을 만들었을때는 안 그랬는데, 유독 인간을 만들 때 신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성서는 강조합니다. 신이 태양을 만들든, 달을 만들든, 동물을 만들든, 식물을 만들든지 간에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대상 사이는 명확한 간극이 있었습니다. 그것을‘주체/객체’라 부르든, ‘대상/실재’라 부르든, ‘주관/객관’이라 부르든 명확한 간극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있었습니다.


05.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신의 형상대로 그것들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독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이 주입된 것이죠. 그렇다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실체로 존재했던 신이 당신의 독특함(전지전능함)을 버리고, 신과 인간 사이 존재하는 간극을 뚫고 우리(인간)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론의 독특함이고, 그것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고, 예수가 당했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죠.

    인간 세계속으로 들어온 신은 한마디로‘고통받는 신’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Moltmann)은 그 신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슬라보예 지젝(Zizek)은 하이데거(Heidagger)의 발언인“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를 “고통받는 신 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는 말로 바꿉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라는 말은 신이 인간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 같지 않은 신이 된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특수한 신적인 특징이 투입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 속으로 들어온 신은 단순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으로 우리를 구성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간 안에 어떤 다른 공간이 생긴 것이죠. 그것을 X라고 했을 때, 그것을 데리다(Derrida)는‘차연’으로, 레비나스(Levinas)는‘타자’로, 들뢰즈(Deleuze)는‘홈’으로, 지젝(Zizek)은 틈과 균열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06.

    그럼, 여러분들은 그 빈 공간 X 를 뭐라 부르겠습니까? 인간 안에 있는 인간 이상의 그것, 인간을 인간이 아닌(Not All) 어떤 것으로 만드는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 물음에 대해 자끄 라깡(Lacan)은‘충동(drive)’을 말합니다. 충동과 본능은 다릅니다. 본능은 살고자 하는 에너지죠. 하지만, 라깡에서의 충동은 기본적으로 ‘죽음충동’입니다.

    인간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모두 쾌(기쁨)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본능이죠. 하지만 충동은 죽음을 무릅쓰고 가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죽음충동을 갖습니다. 죽음충동을 이야기 할때마다 언급되는 인물이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나오는 안티고네입니다. 국가에 대해 이적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법(크레온)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지시키고, 애도로 못하게 하죠. 여기서 윤리의 문제, 행위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반역자에 대해서는 장례와 애도를 표할 수 없다는 법을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이든 지켜져야 한다는 (실정)법 밖의 그것을 지켜야 할까요? 안티고네의 문제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실정)법을 지키면 안락하고 편합니다. 이것이 쾌락의 원칙, 본능에 합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금지된 애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국법으로 다스려집니다. 죽음이 예상되는 그것을 강행하는 것이‘충동(drive)’이고, 그래서 모든 충동은 ‘죽음충동’이 되는 것입니다.

    칸트(Kant)는 이것을‘자유’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현실의 원칙(현실계)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지만 그 너머의 세계(가상계)를 바라보면서 나가는 존재인데, 그 힘이 자유이고 그 자유를 향한 행위가 도덕이 되는 것이죠. 즉 자유란 인간이 기표화, 의미화, 법질서에 충실한 존재로만 국한될 수 없다는 마지막 저항지점이고, 그 공간이 바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교두보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07.

    어쩌면 역사는 충동의 역사였고, 자유를 향한 역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쾌락의 원칙에 만족하지 않았던 충동적이었던 사람들, 현실을 지배하는 법의 목소리가 부자유스러워 자유를 외쳤던 사람들, 현실을 지배하는 욕망의 법칙을 거슬러 올라갔던 무수한 쾌락의 원칙을 넘었던 사람들의 외침과 몸부림이 점점이 박혀 선을 이루고 그 선을 연결하면서 역사는 이어져 왔던 것 아닐까요. 이런 충동의 역사와 자유를 향했던 역사는 너무나 많아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범위를 좁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벌어졌던 사건들만 생각해도 지금 당장 다음과 같은 사건들과 인물들이 떠오릅니다. 1987년 6월 항쟁이 그랬고, 80년 광주가 그랬고, 문익환과 장준하가 그랬고, 4.19가 그랬고, 3.1 만세운동이 그랬고, 상해임시정부의 인물들이 그랬고, 동학의 전봉준이 그랬습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보시기에 참 좋았다(it was very good)... 과연, 무엇이 좋았을까?” very good에서 very가 들어간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개입했기 때문일텐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drive를 지닌, 즉 충동적인 존재들 아닐까. 그래서 신이 drive를 지닌 인간들이 앞으로 일으킬 사건들을 미리 내다보시고 좋았던 것 아닐까. 이것이 신이 인간을 만들고 그렇게 좋아했던 이유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2018년이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시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보기에 참 좋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저는 이 말이 2018년 한해를 살아 갈 우리들에게 각자가 거하고 있는 삶의 공간속에서‘충동적’으로! 살라는 말로 들립니다. 올 한해 주께서 주시는 한없는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Happy New Year!


ⓒ 웹진 <제3시대>



  1. 1월14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보시기에 참 좋았다... 과연, 무엇이 좋았을까?”를 수정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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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순종의 마리아가 아닌, 반역의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눅 1:46-55)


00. 나의 크리스마스 산타이야기


    여러분은 산타클로스에 대한 믿음이 언제 깨졌나요? 저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여섯 살에서 일곱 살로 넘어가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어떻게 내가 바라는 선물을 콕 집어서 잠자는 사이에 갖다 놓는지. 그해 크리스마스도 그랬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오매불망 내가 바라던 장총을 내 머리맡에 놓고 가다 그만 내 팔을 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잠이 깼는데 본능적으로 아는 척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보면 안 될 것이라는 두려움. 마치 타지 않는 떨기나무 속에 있는 야훼를 고개들어 보지 못하는 모세처럼, 신의 얼굴을 보면 다 죽는다고 하죠. 그래서 저는 어린 나이에 잠에서 깼지만 눈을 뜨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금기를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산타클로스의 얼굴은 못 봤지만 문을 스르르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시죠. 모세에게. 나의 얼굴은 못 보지만 나의 등을 볼 수 있다, 고 말입니다.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산타의 뒷모습과 아빠의 뒤태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저는 그것을 지금까지 구태여 확인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01.


   슬라보예 지젝이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가지고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현대인들의 믿음은 세속화된 사회에서의 믿음입니다. 세속화된 사회란 신화와 주술이 지배했던 고.중세가 근대를 지나면서 더 이상 신화와 주술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成人이 된 시대이죠. 세속화된 사회속에서 어른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내가 바보냐?”고 비웃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삽니다. 어린이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니?”라고 말하면 “저는 바보가 아니예요. 단지 부모님이 실망할까봐 믿는 척 하는 거예요”라고 답한다는 겁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그랬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제 팔을 밟고 갖던 그해부터, 아니 아빠가 내 팔을 밟았던 그 크리스마스때부터 저는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산타의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는 아빠의 순진하고 해맑은 마음을 어린 상철은 굳이 훼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산타가 없다는 섬뜩한 사실보다 아빠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되겠다, 라는 갸륵한 효심이 산타의 진실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죠.


02.


    21세기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보다 먹고 죽는 사람(과체중)이 더 많은 시대로 기록될 것입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하거나 당뇨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경험과 기술과 지식으로 인류는 지금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 태어나는 아기의 기대수명은 140살이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대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 (Yuval Harari)는 이렇듯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을 극복한 인류의 다음 목표는 인류를 신적인 존재로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유전공학, 인공지능, 재생의학, 그리고 나노기술의 발전의 힙 입어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Homo Deus), 즉 신적 인간으로 바꾸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모두가 성인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아니 모두가 어쩌면 사이보그가 되어버리는 세상속에서, 아니 인간이 신이 되어버리는 세상 속에서 크리스마스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03.


    냉정하게 말해 성서는 예수의 탄생을 그리 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탄생기사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탄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예수의 탄생이 워낙 하찮은 기사라 눈에 보이지도 않지 않았나.

   예수의 탄생설화를 포함하고 있는 두 복음서의 상황도 그리 녹녹치는 않습니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와있는 크리스마스 기사를 읽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가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아기 예수 탄생기사는 주된 스토리가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오는 가운데, 헤롯왕에게 잠시 들렀다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마치 신문기사를 쓰는 것처럼, 6H 원칙에 의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적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에 갔다는 이야기,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방을 구하러 다녔는데 못 구했다는 이야기, 아기를 구유에 눕혔다는 이야기, 천사들이 목동에게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아주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복음서의 말이 진정한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일까요. 이런 것을 목사님들에게 물으면 믿음이 부족하다, 는 답변만을 할 뿐입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최종결론은 서로 다른 마태와 누가의 판본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하여 동방박사와 목동을 다 같이 모아 놓고 양들과 선물들도 다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중앙에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정말 한가운데 아기예수가 있는 모습입니다. 그 풍경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입니다. 과연 이 모습이 진정 예수가 태어나던 그 날 밤 광경이었는지는 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04.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크리스마스를 다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예수탄생 기록이 마가, 요한복음에는 왜 없는지,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탄생의 목격자는 다른지? 목격자가 다를 뿐 아니라 이야기도 전혀 다릅니다. 어째서 이런 차이는 발생하는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복음서의 장르적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전기가 아니죠. 위인전이나 자서전, 요즘 유행하는 평전도 아닙니다. 즉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그의 생애를 추적하며 분명하고 정확한 역사적 예수의 정보를 남기려고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복음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독자들을 상대로 들려준 서로 다른 예수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야 옳습니다.

    그러므로 2천년이 지난 시점에서 복음서들을 읽는 독법은 복음서에 적혀있는 내용들이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에 각기 다른 그 이야기들이 지금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를 추적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서를 바라보는 해석의 기본이라고 (지금 저 뒷자리에 앉아 계신) 김창락 교수님이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05.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대목이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마태와 누가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다르지만 공통점, 즉 교집합적인 요소가 있죠. 마리아와 요셉, 베들레헴, 그리고 동정녀 탄생입니다. 그 내용은 사도신경에 분명하게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어쩌면 우리는 모두 다 속았다, 라는 것입니다. 마태와 누가 어디에도 동정녀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동정녀는 마리아의 임신사실을 전하면서 인용하는 이사야 7장 14절 내용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마 1:22-23). 무척이나 억지로 과거로부터 전거를 끌어와서 현재의 사건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습니다.


06.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복음서보다 훨씬 앞서 쓰여진 바울의 서신에는 동정녀, 처녀를 뜻하는 ‘파르테소스’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라디아 4:4) 이때 쓰인 여자는 ‘구네’는 여자 일반을 뜻하는 말입니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크리스마스의 오래된 주제는 교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앙의 산물, 믿음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복음서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바울서신에도 없었던 내용이었고, 복음서가 쓰여지던 시기에는 어느 정도 초기교회의 형태들과 움직임들이 조성되던 시기였다는 점, 나중에 만들어진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산물이라는 점 등 그런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오히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복음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보다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누가 1:35) 

     왜 예수의 탄생에 성령(프뉴마)을 끌어들였을까?


07.


    이 시점에서 우리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무렵 이스라엘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전 4년, 헤롯이 사망하자 그 동안 억눌렸던 이스라엘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합니다. 시리아 총독 바루스(Varus)가 이끄는 로마군은 저항의 본거지인 나사렛(예수공생애의 주무대) 부근의 세포리스를 초토화시켰습니다. 로마군은 반란에 관여된 지역을 모두 소탕했으며, 약 2천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아기 예수 탄생할 때 한 밤중에 나타난 천사들이 나타나 이렇게 찬양을 했다고 하죠.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눅2:14)"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 전에는 이 찬양이 그저 신비롭고 아름답고 목가적이고 평온한 노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서는 천사들의 노래가 달리 들렸습니다. 로마군의 살육으로 쌓인 시체들 앞에서, 어떤 희망이라고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던 그 참혹한 땅에서, 지옥같은 나날들을 살아야만 했던 민중들 가운데서 조용히 아기 예수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08.


    오늘 읽은 성서본문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고지를 한 후에 등장하는 마리아 찬가입니다. 예수가 태어나던 무렵 역사적 정황을 생각하면 마리아의 찬가도 달리 읽힙니다. 흔히 우리는 마리아를 순종의 대명사로 여깁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직접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눅1:30-31) 이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한 순종의 화신이 마리아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정말 천사의 말대로 은혜였을까요?

    당시 유대 사회 상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남자없이 미혼모로 아들을 낳는 박복한 팔자가 되는 것 아닌가요. 평생 주홍글씨가 마리아에게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마리아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조금만 뒤집어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마리아의 다짐은 절대로 순종적인 당시의 여성라면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 질서를 뛰어넘어 파국으로 가겠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 찬가’는 순종적이고 신앙적인 글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모럴과 관습과 이데올로기의 강제를 뚫고 나가겠다는 반역의 구절로 읽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09.


    마리아 찬가를 가만히 읽어보면 마리아는 자신의 운명과 이스라엘의 운명을 동류항으로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제국의 힘과 논리속에서 휘둘리는 억압받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노래 중에 나오는 “힘센 분이 내게 행한 큰 일”은 단순히 아기를 잉태한 것, 이라고 축소적으로 해석할 수 만은 없습니다. 그 큰 일이란 뒤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끌어내리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 큰 일이란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힘센 분이 행하는 큰 일입니다. 이 얼마나 위험하고 반역적인 정치적 메시지입니까. 노골적으로 체제전복적인 노래를 지금 마리아가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순종의 노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마리아의 찬가가 담고 있는 당시의 유대사회를 향한 사회 정치적 차원의 메시지를 생략한 채 채, 단순히 신앙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마리아 찬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마리아 찬가는, 아니 어쩌면 복음서에 예수의 탄생 기사가 배치되어 있는 이유는, 무수한 정복과 학살과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던 시절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유포하기 위한 성서 저자들의 교묘한 전략 아니었을까요.


10.


    성서에 있는 예수 탄생의 기사는 놀랍게도 당대의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오늘 여기"의 사건으로 끊임없이 해석되면서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재현되었습니다.

    도르트 죌레는 ‘마리아의 노래’를 이렇게 각색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기록되기를,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다고 마리아가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르게 표현해서, 우리의 가진 자들의 소유권을 빼앗고, 여성을 안다고 주장하는 자를 비웃고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시대가 끝나고 객체가 주체가 되어 보다 낳은 권리를 성취하리라. 기록되기를, 그가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다고 마리아가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르게 표현해서, 여자가 달나라에 가고 국회 의석에 않아 자결권이 실현되고 권세를 갈망하는 마음은 무시될 것이며 두려움은 사리지고 착취가 끝날 것이다.”

    비단 여성신학뿐만이 아닙니다.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포스트콜로니얼, 퀴어신학 등 억압과 착취와 배제와 폭력을 경험했거나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전 세계 모든 민중들에게 ‘마리아 찬가’의 메시지는 새롭게 각색되어 불려졌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마리아의 노래는 어느 한 시골 소녀의 신을 향한 순종적 메시지라기 보다는, 과격하게 말하면 어느 여전사의 체제전복을 향한 권력의지로 읽어내는 것이 더 문맥상으로는 맞습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낭송되고 묵상되고 노래로 불려지면서 마리아 찬가는 변혁을 소망하는 전 세계 모든 인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11.


    이 물음이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오늘,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로마의 폭정 앞에 공포에 떨었던 우리들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이후의 우리는 주께서 행하시는 큰일을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이전과는 다른 우리들입니다.

    주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은 분명합니다. 그가 오늘 오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줄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며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 이후를 보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가 되게 하였고,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크리스마스날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할 수 있게 한 것은 아닐런지요. 그래서 저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없어도 이제는 슬프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스스로 산타가 되어 어떤 사람을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선물을 주거나 방문하는 것, 혹은 고난 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그 곁을 지켜주는 것, 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에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가 주는 평화가 이 지구상에 분쟁있는 지역, 폭력이 있는 지역, 아픔이 있는 그곳에 함께 하기를, 그리고 우리 한백교회 위에도 함께 하기를 손 모아 기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웹진 <제3시대>



  1. 2017년 12월 24일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 원고 “예수는 순종의 마리아가 아닌, 반역의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를 수정하였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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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왕의 탄생,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탄생[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마가복음 1:17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에 끌려갈 때 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Intro


    하늘 뜻 제목을 “춤의 왕의 탄생, 호모 루덴스의 탄생”이라고 지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과연 신이 인간이 된 사건은 무엇일까, 를 고민하다가 떠오른 단어가 ‘호모 루덴스’이고, 이것을 “춤의 왕”이라는 한백이 즐겨 부르는 노래와 연결시키면 크리스마스를 바라보는 창을 하나 더 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이러한 호기는 언제나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초를 합니다. 미흡한 부분들은 여러분들이 나중에 체워주시기 바랍니다.  


‘호모 루텐스’Vs.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호모 루덴스>(1938)는 네델란드의 문화인류학자 요한 하위징아(1872-1945)가 1938년에 지은 책 제목입니다. <호모 루덴스>는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놀이’에 두고 다양한 지식을 동원하여 인류의 문화를 놀이적 관점에서 고찰한 책으로, 하위징아는 놀이에 따르고, 놀이에 승복하며, 놀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명을 빛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실증주의와 과학적 역사학을 지향하던 당대의 지성사적 흐름을 거슬러 구조주의적으로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레비스트로스(1908-2009, 100세때 사망) <슬픈 열대>(1955)[각주:2]를 쓰면서 구조주의의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했던 것이 저는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구조주의적으로 인간을 바라본다고 함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정체성, 그것을 인간性이라고 합시다. 그 인간성이라는 것의 이데아는 없다는 거죠. 그 인간적인 것이 있다면 play of difference(차이들이 놀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인간에 대한 물음의 폭을 넓히는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모 루텐스>가 출판된 해가 1938년입니다. 1933년에 집권한 히틀러의 나치는 빠르게 독일을 극우 전체주의 국가로 변모시켰습니다. 1938년은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해이고, 1939년 독일은 드디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킵니다. 하위징아는 나치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반체제 지식인으로 몰려 옥고를 치루고 고생을 하다 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에 죽고 맙니다. 나치체제 속에서는 오직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만이 통용됩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목표를 향하고 일사분란한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않는 사람은 반동분자라 낙인이 찍혀 제거되고 처단됩니다. 그 나치를 대표하는 인간상이 호모 파베르(Homo Faber, 노동하는 인간)입니다. ‘호모 루덴스’는 ‘호모 파베르’와 정확히 대척점에 위치하는 인간상입니다.

    ‘호모 파페르’는 산업혁명이후 전개된 근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한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찍이 푸코는 『광기의 탄생』, 『임상의학의 탄생』, 『감시와 처벌』 등에서 근대적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체제가 어떤 식으로 노동에 장애가 되는 불필요한 인간들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분류하고 배제하는지를 다룬바 있습니다. 자본주의 등장 이후 노동이 미덕이 되어버린 사회속에서 ‘호모 루덴스’적인 인간은 노동이라는 신성함에 찬물을 끼얹는 불순한 존재이고, 그들의 속삭임은 악마의 유혹일 따름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걸려있는 문구가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문구였다고 하네요. ‘호모 파베르’적인 인간상을 미화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유대인을 동원하는 나치에 맞서 하위징아가‘호모 루덴스’를 이야기 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분명 ‘호모 파베르’와 ‘호모 루덴스’는 서로가 대척점에 서있는 인간상임은 분명합니다.


춤추는 신


    인간을 호모루덴스로 규정한 하위징아의 발언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후에 영향을 끼쳐‘춤추는 신’에 대한 서사를 낳는데 일조합니다. 하버드에 있었던 '샘 킨'(Sam Keen) 교수가 쓴 『To a Dancing God』 (Harper and Row, 1970) 입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하느님이 춤을 춘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춤을 추기는커녕 온 몸에 깁스를 한 것처럼 경직되어 있고 엄숙하기만 한 분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해 온 독자들에게 샘 킨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또 춤도 함께 추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현대의 영성가 헨리 나우엔이 타계한 후인 2001년도에 티모시 존스가 헨리 나우엔의 글을 편집해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습니다. "Turn My Mourning Into Dancing: Finding Hope In Hard Times" 내 슬픔을 춤으로; 어려운 날의 소망발견하기". 카렌 베이커 플레처(Karen Baker Fletcher)가 낸 (2006)은 삼위일체를 역동적으로 풀어낸 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습니다. 

    물론 이런 신학책들이 저에게 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insight를 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춤추는 하나님에 대한 영감을 강렬하게 주었던 사건이 바로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한신대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투쟁이 11월 달에 있었습니다. 33명이 자퇴를 하고 3명의 학생이 삭발 후에 종로 5가에서 천막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교회 진유경 청년도 그 천막 안에 있었드랬습니다. 단식 5일차 주일(11월 12일)에 한백은 천막으로 들어가 학생들과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한백 예배가 끝난 후 오후 늦게 한신대 신학과 학생들의 지지방문이 있었고, 그때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춤추는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영상 한번 보시겠습니다.)  




예수의 족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첫 페이지를 열면 등장하는 예수의 족보 맨 마지막구절입니다. 이 족보는 예수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 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슈퍼 히어로입니다. 슈퍼맨 배트맨 터미네이터 람보와도 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다윗 아닙니까. 저는 예수를 유대인들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력한 왕으로 존재했던 다윗과 연결시키려는 마태저자의 의도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이런 저의 해석에 갇히는 성서는 아닙니다. 왜 마태의 저자가 굳이 예수를 다윗과 연결시키려 했을까, 물론 지금 앞서서 한 설명이 가장 근거있는 주장이겠지만,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설사 마태의 저자가 예수를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웅 다윗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손 치더라도, 여러분 함부로 이런 해석과 결정들에 동의하지는 마십시오. 마태의 의도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오늘 이 시대 속에서 마태복음을 읽는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인 진리해석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so What? 그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 며 따지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마태를 보겠다”, 라고 우기는 태도가 어쩌면 성서를 더 풍부하게 보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를 읽는 방법에는‘천 개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마태복음 1장1절부터 17절까지 나오는 예수의 족보 중 맨 마지막에 족보를 정리하는 문구입니다. 밑에 있는 예수의 족보를 빠르게 스캔해주십시오. 

   [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


    제가 밑줄을 그어놓은 인물들이 보이시나요. 이들은 예수의 족보에 오른 이방의 여인들입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시아버지 유다와 성관계를 하여 아들을 낳은 다말, 창녀 라합, 과부로서 재가한 롯, 다윗은 유부녀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얻었습니다. 마리아는 저주받은 땅 갈릴리 출신의 여인입니다. 여성신학자들이 그동안 남성신학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의 족보에 오른 이 다섯 여인을 호명하였습니다. 왜 그동안의 신학은 예수의 족보에 오른 여인들을 주목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교회의 남성 목회자들이, 그리고 신학교의 남성 신학자들이 예수를 단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다윗 왕조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강조하기에 급급해서 족보에 명시된 여자들을, 이러한 훌륭한 예수의 혈통에 걸림이 된다고 생각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간과해온 때문 아닐는지.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마태복음 저자의 숨은 뜻을 모르고 속아왔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마태의 저자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명문가의 전통에 예수를 위치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타자 중의 타자, 호모사케르 중의 호모사케르, 민중 중에서도 가장 미천한 자의 후손으로 예수를 배치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는지. 고대 가부장제 사회속에서 여성, 철저한 율법주의 속에 이방인, 완고한 엄숙주의와 순결주의 속에서 불륜에 휩싸인 여성들을 통해 예수의 족보가 이어졌고, 그 불순함과 비극과 불결함과 불륜의 결정판이 예수였다, 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이유 때문에 당대의 절망과 실의와 낙담에 빠진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있고 친근하고 희망적으로 예수가 먹힐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물론 마태복음은 그것을 전면에 내걸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당시 마태복음을 읽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렇게 읽었으리라 보고, 그래서 마태가 전한 글이 복음이 되었던 것 아닐런지요. 여러분은 어떤 해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호모 루덴스, 다윗


    하지만, 이 해석이 오늘 제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주제는 아닙니다. 저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 본문을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예수와 다윗의 연결점을 찾아야 할까요. 그래서 고민 끝에 저는 예수와 다윗을, “...민중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그런 거대서사의 완성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투쟁하고 고투하는 왕의 이미지가 아닌, ‘호모 파베르’적인 인간이 아닌 ‘호모 루덴스’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정치가로서의 다윗은 뱀같이 지혜롭고 독수리같이 날카로왔던 현실정치인었습니다.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에의 의지가 충만했던 현실정치가 다윗에 대해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정치가로서의 다윗에 대해 저는 별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무척이나 매력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그는 혜성과도 같이 등장한 이슬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양치기 출신인 그는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 용기와 지혜와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사무엘상 6;12 에 보면 다윗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솜씨도 출중했죠. 수금을 치는 솜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왕이 있는 궁에 들어가 사울의 궁중 악사가 되었겠습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당대 최고의 딴따라가 다윗이었던 셈이죠. 더군다나 그는 말까지 잘합니다.(삼하 6:18). 그뿐 만이 아니라, 시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윗은 훌륭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풍류에 능했던 다윗이었습니다. 정열적으로 시를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에서 저는 호모 루덴스의 모습을 봅니다.


호모 루덴스, 예수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계층의 사람과도 막힘없이 어울렸던 예수의 삶을 회고할 때 저는 예수가 근엄하고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열일하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죽 놀고 먹었으면 그의 별명이‘먹보에 술꾼’(마11:19, 눅 7;34) 이었겠습니까. 그 별명이야 말로 예수가 지니는 호모 루덴스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 주변에는 여성과 어린이, 세리와 창녀들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무리 능력이 있었더라도 호모 파베르적인 인간이었다면 그처럼 예수 주변에 사회적 약자들이 모였을까. 기계적인 위로와 치유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자신들의 아픈 마음과 경직된 상황을 녹이는 매력이 예수에게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유독 예수가 어린이를 환대하는 장면이 특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마9:14, 막 10:14, 눅 18:16).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18:3) 왜 어린이일까요? 내가 보기에는 어린이야 말로 진정 100% 전심과 전력을 다해 놀 줄 아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이야 말로 철저하게 놀이의 주체이고 놀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줄 아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어렸을 적에 노느라고 밥 때도 건너뛰기도 했던 기억, 로봇 태권 V를 보고 하늘을 날았던 기억, 내가 공주가 되기도 하고 왕자가 되기도 했던 기억을 여러분들 간직하고 있지 않나요. 그 시간과 공간이 초월의 영역 아니었나 싶습니다. 적어도 제 경우 어린 시절 놀던 때처럼 완벽한 초월의 경험은 없었습니다.


대림절 메시지


    하위징아에 의하면 진지함과 엄숙함의 건너편에 놀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굳이 아폴론적인 것 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니체처럼 엄격히 구분짓지 않더라도, 하위징아의 문제의식은 근대적 이성주의를 바라보는 니체류의 그것과 일면 겹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지금 돌이켜보니 하나 같이 진지하고 근엄하고 엄숙했던 사람들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랬고, 서기관들이 그랬고,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질문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심각하고 진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예수와 예수의 적대자들 사이의 차이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일 수 있고, 가벼운 놀이정신對 진지한 엄숙주의 간의 대결 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적으로 돌이켜 봤을 때 놀이하는 인간이기를 망각한, 시종일관 진지하고 엄숙하기만 한 역사는 그 끝이 야만과 광기와 혐오와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랬고, 나치가 그랬으며, 한국 개신교의 모습이 또한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 개신교 만큼 엄숙하고 열일하고 근엄한 집단이 어디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한국개신교 만큼 타자에 대한 혐오와 광기로 가득한 집단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런 상황속에서 우리는 2017년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입니다. 사전적으로는‘출현.도래’의 뜻이지만, 신앙적으로는‘기다림’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의 출현과 도래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신의 등장을 상상하면서 2017년 대림절을 보내야 할까요. 모쪼록 2017년 대림절에 우리 한백 교우들은 ‘춤의 왕’으로 탄생한 아기 예수를, ‘호모 루덴스’로 탄생한 아기 예수를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놀고 먹었던 예수, 상처받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했던 노닥거렸던 예수, 절망의 공간과 고독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던 그런 예수가 지금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하고, 춤의 왕 예수처럼, 호모 루덴스 예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기가 이 대림절 기간이 아닐까합니다. 모두에게 미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합니다. Merry Christmas!


ⓒ 웹진 <제3시대>



  1. 12월 10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본문으로]
  2.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에서 브라질 내륙지방에 살고 있던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 등 원주민 사회의 문화를 소개.분석하면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릇된 관념으로 서구인의 사유방식을 지배해 온 '문명'과 '야만'의 개념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또한 서구사회가 세계의 다른 나머지 부분에 대해 그 자체의 기준을 부여하는 오만하고도 잘못된 전통에 대해 반대한다. 원주민들의 사회는 오직 서구사회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일 뿐 이 세상에 더 '우월한'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원주민들이 나무뿌리.거미.유충들을 먹기도 하고, 벌거벗은 채로 생활하는 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사회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그리고 만족스럽게 사회조직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음을 보고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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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7.12.26 20: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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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마지막 웹진이 발간되었습니다. 올해는 100호(1.9)부터 122호(12. 20)까지 총 23호를 발행했습니다. 30명이 넘는 필자들에 의해 150편에 이르는 글이 웹진을 타고 전파되었습니다. 하나같이 주옥과도 같은 글들이었고, 많은 인터넷 매체들이 저희 웹진 <제3시대> 글들을 퍼 날랐습니다. 특별히 올해에는 청년필진들의 영입이 활발했던 관계로 한층 웹진이 젊어졌다는 평입니다. 한해동안 글을 보내주신 필자 선생님들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내년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만나 뵙겠습니다. 복된 새해 되십시오. Peace.


몸으로 드리는 예배 공동체[각주:1]

- 한백교회 창립 30주년 메시지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로마서 12:1-2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1.


    한백교회가 출발한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 온지 3년 밖에 안되었는데. 30년 전 한백교회 첫 예배를 드렸던 분들이 이곳에 계시죠? 그 당시 예배를 드리면서 30년이 지나면 어떤 교회 모습일까 하고 상상을 했을 텐데... 지금과 같은 한백의 모습을 상상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백교회 초기 훌륭하신 지도자 두 분 계셨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박성준 선생님과 돌아가신 안병무 선생님이십니다. 안병무와 박성준이라는 두 분의 이름이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함의, 그 기표가 지니고 있는 기의를 감안했을 때, 그 후로부터 전개되는 한백의 30년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달간 30주년 예배와 행사 관계로 교회가 분주했습니다. 저는 30주년 예배 하늘 뜻을 준비하면서 한백교회의 역사를 뒤적이고, 기록들, 사진들을 한번 훑어 보았습니다. 한백이 걸어왔던 지난 30년은 87년 시민혁명부터 2017년 촛불혁명까지 한국사회 격동의 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격한 시절을 한백은 흔들거리면서, 물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좌절과 시련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습니다.

   문득 이 순간 한백 초기에 함께 나누었던 기도문을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거친 세월 헛된 역사 무너뜨리며 닫힌 가슴들 다 열리고 쓰러진 이들 다 일어나 대동춤으로 어우러질 그 날을 기다립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큰 강으로 흐를 그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작은 소리가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우리 겨레의 큰 함성으로 하나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작은 몸짓이 사람의 세상을 만드는 작지만 굳센 손들의 하나 된 염원이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의 길을 따르는 늘 새로운 시작이 되도록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나눕시다.”

   80,90년대의 시대적 화두가 물씬 느껴지는 기도문이죠. 한백이 처음 탄생하던 87년 그해는 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그 해였고, 한편으로는 혁명의 헛헛함을 맛보기도 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거대하고 우람한 진리들이 광장을 메우던 그 시기에 작지만 묻혀있는 진실들을 발견하고,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생각, 거대담론의 홍수속에서 간과되었던 작은사연과 이야기들을 이제부터는 따뜻하게 환대하자는 다짐, 위의 기도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어떤 오만도 편견도 억압도 없는 세상에 대한 바람, 아마도 그것은 한백이 30년 전에 꿈꿨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한백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2.

    이렇게 한백 30년을 회고하면서 한백의 지난날을 한마디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백, 몸으로 드리는 예배 공동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듣기에 따라서는 위험하고 불순한 발언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인간의 몸은 신학적 성찰과 신앙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몸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기원은 플라톤으로 올라갑니다. 플라톤은 세상을 이데아와 코라(Chora)로 나누고 이데아는 하늘, 정신, 형상, 남성, 이성, 코스모스로, 코라는 땅, 육체, 질료, 여성, 감성, 카오스로 분류합니다. 우주의 법칙과 질서는 이데아가 코라에 이식될 때, 코라가 이데아속으로 들어갈 때, 혹은 이데아가 코라를 품을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몸이 죄악시 된 이유는 이원론에 기초한 그리스 철학이 신학의 패러다임이 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육체성에 대한 경멸은 모든 것들 중 끝판 왕, 깔데기의 끝에 위치합니다. 특별히 중세이후 전개된 금욕주의 전통은 육체적 욕망의 억압을 정당화했고, 육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의식을 분열시켰습니다.

    육체성을 죄악시한 것은 중세 이후 신학만이 아닙니다. 근대 철학도 탈육체화 되었습니다. 근대 철학의 탈육체화는 코기토(cogito)를 추구하는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주의, 경험을 초월하는 의식의 선험성을 주장했던 칸트의 인식론, 세계사를 의식의 자기전개과정이라 주장했던 헤겔의 관념론에서 절정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몸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여성신학, 생태신학, 퀴어(Queer)신학 등이 등장하기 전까지 신학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성경본문,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논쟁거리를 선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성서구절의 배후에는 죽은 어린 양과 송아지의 피로 물든 제단 밑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살아 있는 제물로서의 우리 몸이 드리는 예배를 의식적으로 대립시키려는 사도 바울의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피 흘흘려 죽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의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제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성전이데올로기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성전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권력의 카르텔에 대해 바울이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으로 오신 신을 조롱하는 것이고, 참된 예배는 마음과 뜻과 행위로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지금 강변하고 있습니다.


3.

   사실 돌이켜보면 사도바울만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제자가 아닙니다. 바울은 살아있는 예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에 머물렀던 유대교 갱신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을 그리스도교라는 세계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세운 공로는 혁혁합니다. 어쩌면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이런 운명적인 역설 위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자기 식으로 재구성하고 변질시켰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운동이 지녔던 역동성, 즉흥성, 우발성을 교리화, 체계화, 교조화 시킨 인물로, 입체적인 예수를 화석화시키고 교조화 시킨 인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헤겔이나 니체, 톨스토이, 슈바이처, 막스베버, 하이데거, 현대 가장 핫한 철학자인 지젝, 아감벤, 바디우, 테리 이글턴, 테드 제닝스 같은 수많은 사상가들이 예수에서 바울로 전환되는 그 변곡점에 주목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 변곡점을 혁명을 위한 모티브로 차용하고, 어떤 이들은 그 변곡점을 수구적인 것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스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슬라보예 지젝(Zizek)은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반했다”고 말하면서 바울을 맑스에 대한 레닌으로 비유합니다. 즉 레닌이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를 자신의 혁명을 위한 이론으로 삼았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바울 역시 예수를 그렇게 차용했다는 것입니다. 지젝은 바울과 레닌의 상동성에 주목하면서 바울로부터 레닌이 지녔던 혁명의 기운을 상상하고 소환합니다.

    또한 해체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면 바울은 원전(元典), 즉 예수에 대한 해체의 아주 훌륭한 사례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데리다(Derrida)의‘차연(差延, defferacnce)’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는 者가 바울이 아닐까 합니다. 데리다의 차연이란 원전과 기원이 가지고 있는 존엄과 가치에 대한 딴지죠. 텍스트의 기원과 가치란 텅 비어있는 것이고 지연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공백을 유지하는 힘, 의미의 결정을 유보시키고 지연시키는 힘이 진리이고 자유이고 그것이 진정한 텍스트의 면모입니다. 이러한 해체주의의 차연의 전략이 적절하게 작동되는 지점이 바로 바울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요즘 바울읽기의 새로운 트랜드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복음은 그 자체가 예수에 대한 다른 해석 즉, 예수운동을 자기식으로 해석한 결과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바울, 즉 예수에 대한 다른 판본을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끔 허용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서의 텍스트성이라 저는 믿습니다. 단일하고 수미일관된 방식으로 엮이는 것이 성서가 아니라, 무언가 불쑥 개입하고 일탈하고 변주되고 왜곡되는 가운데 성서는 텍스트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갑니다. 보편적 진리란 어쩌면 하나의 우연하고 주관(주체)적인 사건에 근거하는 것 아닐런지요?

    알랭 바디우(Badiou)는 <사도 바울>이라는 책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리는 다마스쿠스에서 그가 겪었던 사건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그 사건은 환상일수 있고, 계시일 수 있고, 우연일 수 있고, 꿈 일 수도 있고, 도착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어떤 보편적(Universal) 교리와 선포와 강론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singularity) 어떤 환상, 믿음, 체험에 의해 고백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입니다. 그것이 사건이고 그 사건을 감행하는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바디우는 주장합니다. 그런 주체에 의해 혁명은 다시 상상되고 감행됩니다.


4.

    바울이 말하는 몸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통로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재산을 다 처분하고 산속으로 올라가 휴거가 올 때까지 세상과 등진 채 황홀경 속으로 빠져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금욕주의적 삶을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금욕적 삶은 인간의 욕망이 지닌 물신성을 경계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겠지만, 금욕주의적 삶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몸을 파괴하고, 특별히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타자에 대한 혐오의 매커니즘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몸도 파괴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여성에 대한 혐오, 동성애에 대한 혐오의 발동이 근본주의적인 금욕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고 금욕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우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과 종교적 영이 각각 분리된 따로국밥이 아닙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는 종교적인 삶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역시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는 특정한 공간에,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종교적 행위로써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과 더불어, 세상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얻으려고, 구원을 얻으려고, 해탈을 하고자 여러분의 일상을 떠나 어디론가 훌쩍 점프하여 고행하고 좌선하고 기도하면서 그것들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보내신 이곳, 바로 이 지저분하고 찌질하고 허접한 세상 밖 어디에도 우리가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 밖 어디에도 우리가 바라는 구원과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자는‘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풍조는 무엇일까요? 이 시대의 풍조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봅니다. 그것은 맘몬에 대한, 자본에 대한 숭배일 수도 있고, 생명에 대한 경시일 수도 있고, 소수자에 대한 집단적 폭력의 정당화일 수도 있고, 전쟁을 조장하는 군대귀신 일수도 있고, 세상 부정의와 불합리에 대한 냉소적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자는 이러한 이 시대의 풍조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가로지르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고 공동체입니다. 저는 한백교회가 그런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던 공동체이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5.

    한백이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을 때, 한국교회는 이미 고도성장의 궤도로 진입하여 무서운 속도로 배가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이미 무수한 교회의 샘플과 전통과 권위들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다시 교회를 세우고자 했을까요? 그토록 많은 교회 중에 교회 하나를 더 보태기 위해 한백이 태어나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분명 눈부시고 박수를 받을만한 성령의 역사였지만, 그 이면에는 말 못할 아쉬움 또한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불을 안 가리는 교회성장주의 일 수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의 패턴 일 수 있으며, 가부장적인 권위의식에 입각한 교회운영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 만큼 온갖 혐오의 인큐베이터 같은 곳이 또 어디있습니까? 빨갱이 혐오, 여성혐오, 동성애 혐오, 이슬람 혐오...등 온갖 혐오의 숙주가 자라고 있는 곳이 한국교회라고 한다면, 한국교회에 대한 무례한 평가일까요?

    한백은 이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방식과 율동으로 우리의 교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인가? 현존하는 교회질서와 세상의 법칙에 불화하는 힘으로서의 교회의 가치를 한백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지난 30년 동안 한백은 다양한 방식과 실험으로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대답해 왔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제도와 시스템을 흠모했고 그 길을 따라 걸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법 밖의 정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제도와 시스템 밖에 묻혀 있는 진리를 향해 뛰쳐나갈때 교회의 교회다움이 선포되는 것 아닐까요? 민중신학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 아래서 한백은 겁 없이 우리의 교회를 실험해왔습니다. 평신도 위주의 교회 운영방식, 하늘 뜻을 나누는 방식, 목회자와 장로의 임기제, 평등과 소통을 지향하는 예배를 위한 공간의 재구성, 예배의 곳곳을 매우는 한백의 노래와 고백,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시대에 맞게 복음을 재해석하는 신학적 작업 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한백性은 그런 가시적인 것보다는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한백을 언제든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한백의 신앙을 굳이 예수가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의 질문을 받고 성령을 설명하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 그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고 한 선문답과도 같은 발언과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백은 겉으로 보기에는 쿨하고 시크한 것 같지만, 한꺼풀 벗기면 솜털같이 섬세해서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도드라지는 한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백은‘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지만, 불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대지의 촉촉함와 대기의 훈훈함을 다 느끼는 바람입니다. 한백의 지난 30년은 남들처럼 급하게 어딘가를 향해 마구 불어갔던 바람이 아니라, 마지막 날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처럼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감싸는 허세와 권위와 위엄과 폭력에 눈치보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모아갔던 바람이었고, 그런 공동체였기에 지금까지 한백이라는 고유명사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해 주십시오. 지난 30년 동안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한백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그러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서 앞으로의 30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30년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30년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10월 22일 한백교회 30주년 기념예배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하였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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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교회 탐방기[각주:1]



박제우*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신 박성준 교수(성공회대)와 고 박영숙 전 민주당 최고위원의 남편이신 고 안병무 교수(한신대) 등이 주축이 되어 민중신학을 목회철학의 기초로 삼고 1987년 10월에 설립한 나눔과 섬김의 예배공동체 한백교회(한라산의 한과 백두산의 백)에서 예배를 드렸다.


   지난 5월 오늘교회에 탐방을 갔을 때 멤버 중의 한 분인 최규창 대표가 강력하게 추천했던 교회인데, 마침 지난 주일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신 김진호 목사님께서 새길교회에서 설교하신 덕에 미리 탐방하고 싶다고 말씀 드릴 수 있었고, 오늘 11시에 시작하는 주일예배를 함께 하게 되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2번 출구 사이에 있는 골목길로 한 50 m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엔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실이 있는 빌딩이 있고, 길 왼쪽 편엔 1층에 안병무홀이라고 쓰여 있는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는 걸 지난 8월 교회개혁실천운동 회원과의 티타임 때 알았는데, 아무래도 주차가 용이하진 않을 것 같아서 경의선 전철로 공덕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왔다.


   전철 시간 계산을 잘 못해서 일찍 도착하질 못하고 정확히 11시에 예배처소인 안병무홀에 도착하니 예배 때 함께 부를 노래를 미리 불러 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친절하게도 남자 성도 한 분이 바로 옆 자리로 오셔서 예배 순서 중에 어떻게 노래집과 주보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 지 간단하고 빠르게 안내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상철 목사님이셨다는...)


    한백교회의 trade mark에 해당하는 한라산의 검은 돌(좌측)과 백두산의 검은돌(오른쪽) 그리고 한반도 어느 지점에서 주워 온 아주 흔한 흰색 조약돌 두개가 그 사이에 담겨 있는 접시가 예배 인도자 뒷쪽 벽에 놓은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언젠가 부터는 노란 리본도 얹혀져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예배 인도를 맡은 자매님과 하늘뜻나누기(설교)를 해 주실 정나진 목사님, 그리고, 한백교회의 담임을 맡고 계신 이상철 목사님께서 자리 배치의 앞부분에 앉으셨다. 찬양인도를 해 주신 장로님과, 삶의 고백을 해 주신 분들은 목사님 맞은 편에 앉으셨다. 한백교회의 예배는 주보의 순서대로 진행이 되었는데, 평균 출석 예배자가 50명 안팎인 정도의 규모이다 보니 새길교회 처럼 매주 주보, 광고 사항, 예배 실황 등이 정기적으로 잘 update되지는 않았다. 특히 요즈음엔 창립 30주년 기념 활동들을 준비하느라 많이 분주한 것 같다. 오늘의 주보는 아래의 사진과 같고, 홈페이지에 올려진 가장 최근 주보는 9월3일자 주보였다.




    예배 중의 노래는 대부분 "한백의 노래"라는 자체 제작한 노래집에 있는 것을 불렀는데, 한백의 노래는 그동안 7차례 개정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교회 홈페이지 한백과 찬송에 게재되어 있다. 이제 청년들이 많아지고, 새롭게 증보하고 싶은 노래도 많이 있어서 조만간 몇 곡을 추가하는 증보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예배는 일전에 섬돌향린교회 예배 시에 보았던 울림주발(Singing Bowl)이 맑은 울림 소리를 내면서 시작되었다. 첫 순서인 묵상 후에 기도라는 노래를 기리는 노래로 함께 불렀다. 나는 (부끄럽지만) 처음 접한 노래라 함께 부르질 못하고 멜로디를 들어가며 가사를 읽었는데,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사랑과 신에게 간구함과 이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 노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검색을 해 보니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1집에 실린 노래이다. 가사는 김소월 시인의 싯구이고, 곡은 노찾사에서 지은 것 같다. 이런 좋은 글과 멜로디의 노래가 찬송가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민중가요를 부르던 노래패가 불렀다고 찬양이 아니고, 예배 때 부르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깔뱅이 시편찬송만 불렀듯이 지금도 시편찬송만 예배 중에 부르는 교회가 있듯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만들어진 이런 노래를 예배 찬송으로 부르는 교회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각각의 교회는 각자의 신앙고백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노래하고 예배하면 되는 것이리라.




    일반 교회에서는 교독문을 주로 읽는 순서에 한백교회에서는 마침 오늘이 추석 연휴에 있는 주일인 까닭에 (천상병 시인이 아마 1070년 가을에 지은 시인 것 같은데...) "소릉조 - 70년 추일에"라는 시를 교독하였다. 누가 이런 참 적절한 시를 찾아 내어서 선정하는 지 모르겠는데 역시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한백교회 다운 글 선택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소릉조(小陵調)> - 70년 추일에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시집 <새>(1971) -  


   이어서 삶의 고백 시간에는 최근예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시고, 많은 생각을 하시고 계신 형제님께서 정말 진실한 문체와 내용으로 자신의 삶을 함께 나누어 주셨다.


   일반 교회에서 설교라고 하는 "하늘뜻나누기"는 이번 주 중에 3년 간의 박사 논문 작성과 학위 취득을 목표로 다시 독일로 돌아가는 정나진 목사님이 고별 설교로 본인이 박사 학위 논문으로 준비하는 Autoethnogaphy(자아문화기술지)와 관련된 내용을 ['사건'으로서의 환대와 민중메시아]라는 제목으로 하였다. 최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해서 미리 모든 예배자에게 주보와 함께 배포된 설교문을 중심으로 최근 6개월간 탈북자 정착도우미로 섬겼던 사건과 창세기 31장 1~2절의 말씀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이 야곱에게 들렸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재산으로 저처럼 큰 부자가 되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펴보니, 자기를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을 기반으로 한 민중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환대 태도, 그 과정에서 직접 체험하는 당사자들과 민중의 상호 변화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셨다. 하늘뜻나누기 시간 후반부엔 정목사님의 발표에 대해 궁금한 점과 추가적인 토론을 하고 싶은 것들을 예배 참여자들이 함께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건 정말 여느 교회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새로운 시도이다. 이런 예배 순서를 언제부터 해 왔는 지는 모르겠지만 30년 된 교회에서 이런 순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설교 후에는 설교 중에 언급되었던 김민기 작곡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함께 불렀다. 유일하게 나도 익히 알고 불러 보았던 노래이다.


   이어서 물질을 드림(봉헌) 시간이 있었고, 예배 인도자인 자매가 드리는 기도를 했는데, 이 자매는 한백교회에서 오늘 처음 예배 섬김이로 봉사를 하게 된 것 같다. 자매님의 기도를 통해서 자매님이 새롭게 안착한 한백교회의 교회 공동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일면을 알 수 있었다. 의외로 많은 청년들이 함께 예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자매님도 이들과 함께 한백교회를 통해서 믿음과 세상 속에서의 삶 모두 하나님의 은혜 속에 나눔과 섬김의 삶을 더 활짝 펴며 살기를 기도한다.

   예배는 12시 45분이 넘어서야 한백신앙고백으로 공동체의 다짐을 하고, 마침 묵상을 한 후 마치게 되었다. 마침 묵상 후에 친교 마당 시간에 이상철 목사님께서 몇 가지 안내 말씀을 해 주시면서 나에게도 소개할 시간을 주셔서 짧게 내 소개와 교회 탐방을 하게 된 과정을 말씀 드렸고, 가능하다면 이후의 모임에도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후엔 기존 보수교회에서 40년 넘게 섬기시다가 40대 후반(그러니까 지금의 내 나이 대에...) 한백교회로 오신 후 지금은 한백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시는 오늘 예배 전에 찬양 인도를 해 주신 장로님의 도움을 받아 점심 식사(애찬)를 함께 하였다. 4개 조로 나눠진 성도들의 모임이 매주 돌아가면서 (즉, 한 달에 한 번 씩) 애찬 준비와 배식과 설거지를 섬긴다고 한다. 애찬 전에 아래 동영상과 같이 아주 재밌는 애찬 노래를 배설된 음식을 보면서 함께 불렀다. 그리고, 이번 주에 생일을 맞으신 여성도님을 축하하는 시간도 있었다.



   점심 식사 중엔 김진호 목사님께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주셔서 한백교회의 창립 때부터 자신이 담임목사로 섬기신 때부터 양미강 목사님과 지금의 이상철 목사님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백교회가 이사한 얘기, 계속 향린교회를 섬기신 박영숙 최고위원께서 정말 요리를 잘 하셨고 손이 크셔서 한백교회 식구들 전체에게 맛난 요리를 자주 해 주셨다는 얘기, 박성준 교수님과 안병무 교수님 모두 목사는 아니셨다는 얘기, 최근에 이상철 목사님께서 젊은이들과 소통을 잘 하시고 잘 챙겨 주셔서 한동대 출신 청년들과, 한신대 신학생들, 그리고 이런 저런 교육과 강연을 통해 한백교회를 접한 많은 청년들이 합류하면서 교회가 많이 젊어 지고 있다는 얘기 등을 해 주셨다.


   애찬을 얼추 마친 후엔 (좀 재미있게 표현해서 1부 예배, 2부 점심 식사에 이어) 3부 순서로 수다를 떨기 위해(주보 광고에는 장년부의 대화모임이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안병무 홀에서 약 200 m 정도 길 위로 올라가면 있는 "Caffe Cammello"로 시간 여유가 있는 교인들과 함께 갔다. 이 카페의 주인이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한백교회 분들을 좋게 보아 주셔서 매주 이렇게 장소를 편하게 쓸 수 있게 배려해 주신다고 한다.


   이 카페의 안쪽 방에서는 10월28일(토) 저녁 6시에 공연할 창립 30주년 기념 연극 준비팀이 대본 강독을 하고 있고, 내가 앉은 테이블에서는 2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의 청장년들 10여 명이 함께 앉아, 동성애, 외국인 노동자, 정나진 목사님의 설교 내용, 앞으로 펼쳐질 독일 생활, 한 자매님의 액티브한 유럽 1달 여행기, 한동대의 보수성과 개혁성 등 등 이야기 주제가 따로 정해진 것 없이 흘러가는 대로 참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다. 이상철 목사님으로부터는 주날개늘교회의 남오성 목사님을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에 서로 알고 지냈다는 반가운 얘기도 들었다. 시간은 어느새 5시가 넘어가고...


  헤어지기 전에 이상철 목사님과 찰칵!


오늘 애찬 시간부터 나를 살뜰하게 챙겨 주신 김진호 목사님과도 찰칵!



   한백교회는 10월에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몇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다른 모든 교회 활동과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담임목사나 누구의 강력한 인도나 요청이 없는데도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여러가지 활동들을 준비하고 있고, 그 중에 가장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것은 역시 10월마지막 토요일(10/28) 저녁 6시에 안병무홀에서 공연되는 연극인 것 같다. 50명 안팎의 출석 교인들의 절반 정도가 참여한다는데, 정말 기대가 된다.


   오늘 이목사님께서 10월22일(주일)에 있을 창립30주년 기념 감사예배나 28일(토요일)에 있을 연극 공연에 또 와 보라고 초청해 주셨는데, 정말 여건이 되는대로 한백교회를 궁금해하는 지체들과 함께 다시 와 보고 싶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이날 함께 하고 싶은 분은 02-364-6355로 문의전화 해 보시면 된다. (연결이 안되면 저에게 연락 주세요. 010-7180-9492) 오후 5시가 넘에 카페에서 헤어진 나는 원래 계획대로 작년에 못다녀본 안산의 남쪽 지역(경기대학교 쪽에서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을 산책할 목적으로 램블러 앱을 작동시킨 후 경기대 쪽에서 올라갔다가 추계예술대 쪽으로 내려오는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


    마지막으로... 인터넷에 한백교회를 검색해 보면, 기존 보수교단이나 번영신학에 물든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백교회의 정체성과 예배에 대해 깎아 내리는 글을 쓴 걸 많이 발견하게 된다. 참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생각이나 신앙관과는 다르다 정로만 써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많은 악담과 저주의 말을 다분히 왜곡된 정보와 판단을 기반으로 해서 써 놓은 걸 보면 내가 그들과 같은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참 부끄럽다. 부디, 한백교회의 정체성과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사랑을 위해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사는 한백교회 공동체를 존중하고, 폭 넓은 신앙의 모습에 대해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갖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요수엘(박제우)의 블로그에 실린 글 '한백교회 탐방기'를 편집하여 옮겼습니다. http://yosuel.tistory.com/71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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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7.10.12 09:3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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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서 한백교회를 검색하면 온갖 음해성 기사들로 넘쳐난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 퀘이커교도인 박성준이 세운 교회, 민중신학의 괴수 안병무가 실세인 교회, 온갖 운동판의 배후들이 득실거리는 교회, 한라산의 돌과 백두산의 돌을 섬기는 교회, 심지어 지난번 박근혜 탄핵 주문을 낭독한 이정미 재판관이 다니는 교회, 작년 박근혜 탄핵 정국당시 검찰 내부 게시판에 박근혜 구속을 주장했던 이00 검사가 다니는 교회, 비전향 장기수 빨갱이들을 지원하는 교회 등...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웃기기도하고 슬프기도 한 한백을 둘러싼 유령과도 같은 루머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3년차를 보내고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 위에서 언급한 한백을 둘러싼 유령들의 실체를 접한 적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백을 향한 정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음해성 보도들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교인들은 나보다 익숙하고 대범하고 내공이 세서 그런지 “목사님, 차차 적응되실 거예요”라고 하면서 내 어깨를 다독인다. 한백교회에는 거의 매주 교인이 아닌 낯선 분들이 예배에 참여해 섞여 있다. 일부러, 우연히, 지나가다, 계획하여, 소문(?)을 들어, 교수님들이 한번 탐방하라고 하여, 오늘 갈 교회가 없어서...이유도 각양각색이다. 기윤실에 계시는 박제우 선생님도 그 중 한분이셨다. 종종 한백교회가 어떤교회인지 알려달라는 주문을 받는데 그런 분들에게 이 기사를 토스해주면 되겠다 싶다. 귀한 기고 감사합니다.
  2. 최재훈
    2017.10.25 18: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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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말씀처럼 저도 소문(?)을 듣고 8월의 어느 비오는날 찾아간 낯선(?) 사람입니다..^^ 감사하게 잘 예배드렸습니다. 다시 한국들어갈때 또 찾아가겠습니다


호모 포비아, 그 오역과 치욕의 역사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동성애 광풍이 한국교회를 뒤덮다


    올 여름 한국개신교계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지난 6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이단대책위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에게 ‘이단사상 조사연구에 대한 자료요청의 건’이라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7월 20일 한국교회 8개 교단 이단대책위원장 연석회의는 ‘퀴어신학'을 내세우며 동성애를 감싸는 임보라 목사가 이단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8월8일 기장 ‘교회와 사회위원회’에서 반박성명을 발표하면서 퀴어신학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중세시대나 있을 법한 보수개신교단들의 임보라 목사에 대한 여론 몰이식 ‘마녀사냥’이 21세기 한국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난 주간에 열렸던 대부분의 교단 총회에서 동성애 이슈는 예상한 대로 가장 센세이션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국 최대교단인 장로교를 양분하는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의 목소리는 동일했다. 분열되었던 장로교가 동성애 문제로 다시 하나로 뭉칠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예장통합의 결정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은 교역자는 물론 교회 중직(장로, 집사)자가 될 수 없을뿐 아니라, 신학생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진보적인 교단인 기장은 총회 마지막날(9월 22일) ‘성소수자인 목회를 위한 연구위원회 구성과 활동 헌의’의 건이 올라왔다. 이 안건은 찬성 159와 반대 90표로 기각이 결의되었으나, 총대 총수가 682명이며 과반수는 341명이다. 그러므로 찬성표 159는 341명의 과반수를 충족하지 못하고 미달인 것이다. 성소수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거나 세례를 주거나 교인으로 정식으로 인정하자는 헌의안도 아니었다. 교단차원에서 성소수자인 목회를 위해 공부를 해보자는 모임도 만들 수 없는 분위기인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라 자부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자들 조차 동성애 문제를 피해가려는 경향이 역력하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남한 땅에서 개신교의 권위와 종교성이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지는 오래된 사실이다. 특별히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고, 다름을 배제와 제거의 메커니즘으로 삼는 능력에 있어서 한국의 극우적 개신교도가 보이는 강도와 민첩성은 강하고도 빠르다. 빨갱이 혐오, 외국인 혐오, 여성 혐오, 이슬람 혐오, 그리고 동성애 혐오까지. 한국 사회를 휩쓰는 온갖 종류의 혐오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한국의 대형 극우 보수개신교회들이 있다. 사랑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에서는 혐오와 적대의 종교가 되었나?


아니, 그들은 원래 그랬다


   해방 후 한국개신교는 빨갱이 혐오의 메카였다.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월남한 개신교도들이 자신들과 정치적 입장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단에 앞장섰던 기억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개신교는 나름의 체제정비와 내부 결속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외부의 적을 상정하면서 자신들의 균열과 부조리를 감추고, 희생양을 선정해 제거함으로 내부의 문제를 일단락짓는 극우적인 한국 개신교의 문법은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남북한 사이 이데올로기 대결과 군사정부의 개발독재와 맞물리면서 개인구원과 축복일변도의 신앙으로 고착화되었다.

    지난 20세기에 자행되었던 빨갱이 혐오와 종북 몰이가 한국개신교의 정체성의 정치를 위한 토대였다면, 동성애 혐오는 가히 21세기 한국형 종교재판, 혹은 마녀사냥이라 부를만하다. 중세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 정점에 달했던 마녀사냥의 열풍이 한국교회의 위기가 선언되는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나타났던 고전적 방식의 체제유지법, 혹은 위기타개법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개신교는 자신들의 부도덕과 부패로 자초된 교회의 위기를 타파하고자 동성애 혐오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또한 그 동력으로 이탈하고 있는 신도들을 다시 결집시키고자 한다. 마치 십자군 원정의 패배와 페스트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전 유럽을 휩쓸 무렵, 흔들리는 교회의 권위와 위상을 회복시키고자 마녀사냥을 통해 체제의 위기를 수습하려 했던 중세교회의 발악처럼 말이다.‘마녀사냥’식 동성애혐오는 쇠락하는 한국 보수 개신교의 위기감와 초조감이 드러난 성급하고 서투른 결정이라 볼 수 있다.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서는 정말 그들의 주장처럼 동성애를 혐오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다. 만약 성서의 일부 구절들이 동성애 혐오를 위한 각주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성서를 모독하는 후안무치한 사람들이고, 성서의 하나님이 동성애를 벌하는 신이라고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들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성서는 동성애를 혐오하기 위해 쓰여진 책도 아니고, 일부 보수적 개신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를 벌하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크리스챤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예수가 걸어갔던 삶을 기억하면서 예수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항상 본인에게 다가오는 실존에서의 선택과 갈등, 그리고 행위의 순간마다‘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를 물어야한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일부 한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에게 나는 이 질문을 되돌려 들려주고 싶다: “예수라면 과연 성소수자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동성애를 저주하는데 동원되는 성서의 구절은 대략 손으로 꼽는다. 창세기 19장(소돔과 고모라), 레위기 18:22, 레위기 20:13, 로마서 1:27, 고린도전서 6:9~10, 디모데전서 1:10, 히브리서 13:4 등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성애 혐오를 주장하는 데 끌고 들어오는 성서구절 중 예수의 입에서 나온 것은 한 구절도 없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하는 사실은 성서에는 게이에 대한 언급은 등장하나 레즈비언, 양성애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는 성서가 쓰여지고 편집되던 시대가 가부장제적인 시절이었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서무오설, 즉 문자적으로 쓰여진 성서의 기록만을 맹신하는 사람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서에는 레즈비언, 양성애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적혀 있지 않으니 그것은 괜찮은 것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문자적으로 성서를 믿는 그들은 뭐라 답을 할까.

    텍스트를 근거로 어떤 대상을 논하고 반박할 때 텍스트에 적혀있는 문자와 내용에 대한 공부는 필수적이다. 그 다음 텍스트가 구성되고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와 해석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텍스트 안에 있는 다양한 결을 살피고 성찰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텍스트를 대면하는 자세이고 원칙이다. 텍스트는 학과의 교재일 수 있고,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소설이나 시집일 수 있고, 내가 만나고 있는 애인일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일 수 있다. 성서는 인류의 소중한 텍스트이다. 텍스트인 성서에 적혀있다는 동성애 관련 구절 몇 개를 끌어와 일방적으로 교회의 동성애 혐오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보수적 그리스도교인들의 행태는 텍스트 읽기와 해석의 원칙조차 모르는 천박하고 후진 한국교회이 민낯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고, 성서에 기록된 동성애 관련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동성애를 둘러싼 성서의 정황들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성애를 반대할 때 인용되는 성서의 구절은 여섯 곳이다(창19:1-11; 레18:22, 20:13; 롬1;18-32; 고전6:9, 딤전1:8-11). 구약에 세 곳, 신약에 세 곳이 나온다. 1) 창세기 19장은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이고, 2) 레위기 18장은 성관계에 대한 규례가 적혀있는 장인데, 그중에서 18:22절에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라고 적혀있다. 3) 레위기 20장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들의 항목이 나열되는데 그 중 20:13에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면 ... 사형에 처한다”라고 쓰여있다.

    남성 동성애와 비슷한 급들의 죄의 항목들이 레위기에는 적혀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상을 섬기는 것(지금으로 따지면 자본을 섬기는 것), 근친상간을 하는 것, 불륜을 저지르는 것,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것,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이나 마법을 쓰는 사람(레20:27)도 이 항목에 들어간다. 즉 남성끼리 동침하는 것에 특별한 강조가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쏟는 것(우상을 섬기는 것), 정의가 실현되고 있지 않는 현실을 외면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와 형벌이 더 자주 빈번하게 강조되면서 등장한다.

    이러한 경향은 신약성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동성애에 대한 발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신약성서에서 동성애를 둘러싼 발언은 바울서신에 딱 세 번 나온다. 신약성서의 동성애 발언 역시 구약성서와 같은 맥락이다. 동성애가 그 수많은 죄악들 중에 one of them이라는 것이다. 4) 롬1;18-32 사람이 짓는 갖가지 죄들 중에 하나로 동성애가 나온다. 그 죄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한 사람,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한 사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 불손한 사람, 오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꾸미는 묘략꾼,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신의가 없는자, 무정한 자, 부자비한 자 ... 그리고 욕정에 불타는 자인데, 그 욕정에 불타는 자에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5) 고전6:9 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 구절이다. 음행을 하는 사람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 간음을 하는 사람들, 도둑질을 하는 사람, 탐욕을 부리는 사람, 술 취하는 사람, 남을 중상하는 사람,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과 더불어 동성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등장한다. 6) 딤전1:8-11 율법을 어기는 사람을 분류하는 장면인데,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 경건하지 않는 자, 죄인과 거룩하지 않을 자,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와,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같은 라인에 남색하는 자를 두고 있다.

   당신이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한다면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인간들을 마찬가지로 비난해야 한다. 당신이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한다면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탐욕을 부리고, 술 취하고, 남을 중상하고,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맹렬하게 비난해야 한다. 당신이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한다면 오만하고, 비겁하고, 신의 없고, 시기와 분쟁과 미움으로 가득 찬 인간들 모두를 똑같이 비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우리는 동성애만을 부각시켜 모든 악행의 끝판왕 인양 거품을 물고 짖어대는 것일까? 한국의 모든 수구적 근본주의 세력들이 자기들의 허물과 죄악을 다 털어 동성애 포비아에 덮어씌워 번제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호모포비아의 자리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기독교 역사에서 정당화되어 왔다. 첫째, 동성애자는 ‘창조의 법칙’을 거스르는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정상 Vs.비정상’이란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며,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상 Vs.비정상’의 범주들은 많은 경우 한 사회에서 ‘권력’을 지닌 주류 집단들에 의하여 결정되곤 한다. 만약 불변의 ‘정상-비정상’있다면 그것은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존중이이야말로 ‘절대적 정상’이며, 반대로 그들에 대한 ‘혐오’야 말로 ‘절대적 비정상’ 아닐런지?

    둘째, 도덕적 순결에 대한 유지와 강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동성애 혐오는 요청되어 졌다. 역사적으로 ‘순결주의’ 논리는 인종학살의 도구로 심심치 않게 사용되었다. 나치의 유대인과 동성애자들에 대한 말살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내내 지속되었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도 마찬가지다. 나치가 동성애자들에 대한 말살정책을 펼 때 등장한 것이 ‘도덕적 순결성’과 ‘기독교정신’이었고, 그 구호 아래 동성애자들로 의심되는 독일남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여 사살하거나 가스실에서 죽였다. 표면적으로는 ‘도덕적 순결성’강화가 동성애 혐오의 근거였으나, 실질적으로 동성애 혐오는 ‘인종적 번식’의 측면에서 다루어진 측면이 강하다. 독일인 게이들을 향해서는 독일의‘출산 잠재성’을 감소시키는 ‘인종적 위험’으로 간주한 반면, 레즈비언들이나 비독일인 게이들은 박해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말이다.

    기독교 근본주의 전통에서 작동하는 창조보존의 법칙과 순결주의는 어처구니 없는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어딘가 오리지널한 원본과 원형이 있으며 그것들은 훼손되지 않게 잘 보존되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incarnation) 했다는 것 자체가 순수하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신의 원형에 불순물을 주입하고, 흠집을 내고, 틈과 균열을 조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오히려 당신의 완정성과 순수성과 순결성을 세상에 내어주고 훼손함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증언하는 정직한 신에 대한 고백 아닐까?

    나는 성서에 나오는 정결한 것, 부정한 것이라는 말 대신 다수자, 소수자라는 말로 그것들을 대체하고 싶다. 성서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인권과 평등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꿈꾼다. 도덕적 순결성, 관습과 전통,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다수에 의한 소수를 향한 혐오와 폭력은 그래서 성서적으로 죄이다. 성서가 지니는 해방적 전통이 작동되는 지점은 차이가 차별이 되어 왜곡과 폭력과 불평등이 정당화 되는 그곳이다. 성의 차이, 인종차이, 계급의 차이, 종교의 차이, 부의 차이, 학력의 차이, 지역의 차이...등 온갖 차이와 다름으로 인한 적대와 차별이 이루어지는 그곳을 향해 변혁적인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달려왔다. 동성애혐오에 대한 저항은 이러한 성서가 지닌 해방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맨끝, 즉 화살촉과 같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을 둘러싼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Are You Ready?


ⓒ 웹진 <제3시대>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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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7.09.28 09: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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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한신학보 547호(2017년 9월 1일), 548호(9월 25일)에 게재된 <소통관에서 온 편지> “너희가 그들을 아느냐? : 한국보수개신교의 성소수자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독설”을 웹진에 맞게 수정했음을 밝힙니다.
  2. 주안
    2017.10.05 09:3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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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꼭 집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특히 <동성애를 둘러싼 성서의 정황들>은 성서를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본인들의 "허물과 죄악을 다 털어 동성애 포비아에 덮어 씌워 번제를 드리고 있는" 현상은 한국 밖의 기독교 세계에서도 보여집니다.
    주위의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평소에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들도 동성애가 "창조의 법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더군요. 창조의 법칙에 가장 근본이 된다는 '남녀간의 결혼'을 통한 '가정'이란 것이 깨진다는 두려움이지요.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을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호모 후마니타스(Homo-Humanitas)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인문학 위기의 요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유학 10년을 마치고 돌아온 고국은 놀라우리만큼 변해 있었다. 우선 표면적으로 정권이 바뀐 것이 가장 큰 낯섦이었다. 미국으로 갈 때는 노무현 정권이었는데 돌아와보니 이명박을 거쳐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보수정권이 연거푸 집권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정권들 아래에서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본고장인 미국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착실하게 신자유주의를 이행하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장 같았다. 구조조정이 상식이 되어버렸고, 계약직과 비정규직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갑/을 관계의 냉엄함과 잔혹함은 하늘을 찌른다. 연일 신문지상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민중들의 비관 자살보도가 넘쳐나고, 20.30대들 사이에서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세대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10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하게 발견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이다.

   “무한경쟁”, “누구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마누라와 자식들 빼고는 다 바꿔라”... 이상은 신자유주의가 휘몰아치던 1990년대 광고카피들이었다. 무한경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기억되지 않는 2등을 면하기 위하여,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을 했다.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체험하면서 나는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파토스와 인문학 사이에 모종의 결탁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와 질서 속으로 인문학이 녹아들어 가면서 신자유주의화 된 인문학, 신자유주의를 위해 봉사하고 협력하는 인문학이 한국 땅에서 돌연변이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문학이 신자유주의 이론을 축조하고 견고하게 하는데 일조했다는 말이 아니다. 인문학이 신자유주의 논리를 학습하고 내재화했다는 말이다. 실례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인문학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논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문학의 위상이 막강하다. 각종 인문학 프로젝트들과 인문학 강좌들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서점을 둘러보면 온통 제목에 인문학字 붙은 책들이다. 10년 동안 국외자의 입장에 있다가 내부자의 시선으로 이런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흥미로왔다. 그간에 고양된 한국인들의 인문학을 대하는 자세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불편해지더니 요즘은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이 모욕적이고 심지어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일까.


스펙(Spec) 우선주의


   지금까지 살펴본 바, 현재 진행 중인 인문학열풍은 한국인들에게 잠재해 있는 두 가지 욕망과 모종의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하나는 스팩(Spec) 우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힐링(Healing) 지상주의다.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인문고전 독서법』, 『동서양 천재들의 사색공부법』,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CEO가 읽는 인문학』 같은 제목의 책들이 인문학 관련 서적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높은 순위에 등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인문학 풍토에서 스펙 우선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부가가치가 높고 효율적인 스팩을 쌓은 사람을 신자유주의형 인간이라고 했을 때, 인문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최적화된 인간을 양성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지닌 불패의 정신으로 무장된 주체를 이 시대로 다시 소환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와 더불어 등장한 21세기형 주체는 너무나도 무력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액체근대’[각주:1]를 패러디하여 21세기 신자유주의형 인간을 ‘액체화된 주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시대 우리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 공동체, 대의, 국가, 체제 등과 같은 굳건했던 숭고함들은 전 지구적으로 몰아닥친 자본의 열풍에 녹아내려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바우만의 ‘액체화된 근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이후 변화된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액체화된 시대 속에서 강철과도 같은 의지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무장된 근대적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액체화된 시대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전과 같은 공동체 의식 혹은 투철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삶의 무게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 되었고, 그것에 대한 결과 역시 오롯이 개인의 책임이다. 우주와 세상 앞에서 개인은 홀로 이 모든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그런 개인인 내가 우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런 개인인 내가 세상을 지배하는 0.1%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잘 나가는 CEO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인문학은 더 이상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묻지 않는다. 전체 안에 깃들어 있는 부조리의 문제를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문제로 치환시키거나, 젊은 시절 감내해야만 하는 통과의례적인 과정 혹은 개인의 자기계발의 문제로 전환시키면서, 시스템의 균열과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만든다. 대신에 아프니까 청춘이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다, 라는 말로 우리를 우롱하고, 아직 2%가 부족하다, 열심히 살다보면 내일의 태양의 뜰테니 ... 그러니 열심히 뺑이쳐라. 그러면 대박 날지도 모른다, 라는 말로 희망을 고문한다. 이것이 오늘의 인문학이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속삭임이고, 그러면서 인문학은 시장의 언어가 되었다.


힐링(Healing) 지상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말하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균형, 신앙과 이성 사이의 긴장, 믿음과 논리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 말이라 하겠다. 바르트의 말을 빌어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풍자하자면, 현재 한국인의 손에는 한 쪽에는 Spec, 다른 한 손에는 Healing 관련 서적이 쥐여져 있다. 아침 출근길에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쟁취하고 다시 도전하고 마침내 승리한다는 내용의 책을 읽고, 저녁 퇴근길에는 상처받고 좌절당한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힐링 관련 서적을 읽는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풍속의 단상이라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앞서 언급했던 Spec 우선순위와 더불어 한국 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을 담당하고 있는 또 하나의 축은 Healing 지상주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상처극복 시리즈, 분노와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둘러싼 내면 강화시리즈, 희망과 행복을 상상하고 꿈꾸게 하는 환타지 같은 성격의 책들이 대표적인 힐링 관련 서적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한국인들은 Healing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한국의 힐링 열풍은 지나친 과잉이다. 어쩌다 우리사회가 힐링을 갈망하고 욕망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물론, 한국사회 전체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 아프고, 1등이 못되어서 좌절하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아 아프고,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에서 실업자로 추락하는 바람에 우리는 아프다. 그래서 모든 감기 증상들을 단번에 달려버리는 종합 감기약처럼, 우리 역시 모든 슬픔을 모아 단번에 달려버리는 종합처방전이 필요하다. 그것이 힐링지상주의의 요체라 한다면 너무나 과문한 진단일까.

    연대하는 공동체, 굳건한 이데올로기가 녹아내려 액체로 화한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액체로 된 세상 속에서 홀로 외로이 유영하면서 자기경영에 매진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허락한 문법이고 그곳의 개인은 한번 몰락하면 재기 불가능하다. 존재 전체를 걸고 전력투구를 해야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은 항상 불안과 공황과 우울의 상황과 직면해 있다. 힐링은 대타자 신자유주의의 추하고 타락한 몰골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려는 체제의 전략이고, 또한 그것은 자본의 문제를 저격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자본이 저지른 만행을 최대한 감추고 그것을 한 개인의 몫으로 전가시키려는 신자유주의가 고안한 간교한 계략이다.

    이것은 마치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교통사고로 인해 응급외상센터로 후송된 중환자에게 외상(外傷)은 크지 않아 네 마음이 그것을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 문제야, 라고 속삭이면서 몰핀을 계속 투여한다면 환자는 어떻게 될까. 여기서 교통사고를 신자유주의로, 환자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민으로, 몰핀을 힐링담론으로 치환하면 정확한 우리의 현실이 된다. 힐링은 쌓이고 쌓인 자본의 문제를 개인 내면의 문제로 변질시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술책이다. 힐링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숭고하고 따뜻했던 의도와는 별개로 신자유주의 시대 힐링 열풍의 이면에는 이러한 음모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인문학의 기원, 혹은 전통


   그렇다면 우리는 스팩과 힐링에 갇혀버린 인문학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 대한 답을 르네상스시대에 부활한 인문정신을 복기하면서 찾고자 한다. 십자군 원정의 패배와 패스트의 창궐로 인해 중세유럽을 지배했던 교회의 권력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고,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에 대한 요청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신과 교회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성에 대한 재발견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두되면서 유럽은 중세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 근대를 향한 발돋움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발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동서무역로가 확보되면서 지중해무역권이 형성되었고 그 통로에 위치했던 이탈리아의 도시들, 예를 들면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도시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특히 동로마제국이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이어받았던 동로마의 학자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유입되었고, 동서문화가 다시 한번 대융합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고대 그리스 고전에 대한 복기가 시작되었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로마시대의 자유학문(liberal arts)을 복원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필요를 수용하면서 새롭게 학문체계를 재구성하였다. 중세 대학은 고대 로마의 9 자유학문(문법, 수사학,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론, 의학, 건축학)에서 의학과 건축을 제외한 7과목을 삼학(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사학(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으로 구성하였다.[각주:2] 이러한 학문분류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로 상징되는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studia humanitatis(인문학)라는 이름 아래 재편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논리학이 위축되었고 수사학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역사학, 시학, 윤리학, 정치학 같은 학문들이 새롭게 부상하였으며 라틴어와 헬라어 원전에 대한 독해가 요구되어졌다.

    이 대목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다. 르네상스의 모토로 알려진 ‘고전으로의 복귀’가 미래를 향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전통(경험)으로 돌아가다는 복고주의가 아닌가, 라는 의혹이 그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의 생각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고대의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여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 신화적 이야기를 현재를 위한 창조적 상상의 원천으로 소급하기 위해서 르네상스는‘고전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것이다. 변화된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시대는 요청하였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변화의 동력을 고대 그리스로의 복귀를 통해 탐색하였던 셈이다.

    이는 인문학의 위기론 속에서 인문학의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선사한다. 인문학이 스팩과 힐링, 즉 현실정복과 현실도피의 도구로 전락한 한국사회에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충고는 인문학이란 상상력과 관계한다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매몰과 현실에 대한 적응에 목적을 두는 인문학이 아니라, 현실과의 거리두기, 현실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통해 현실에 대한 변혁을 꿈꿨던 사람들이 르네상스 시절 휴머니스트들이었고, 그들로 인해 유럽은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인문(人文), 인간의 무늬


    이 글은 스팩과 힐링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인문학 풍속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다. 천문(天文)이 ‘하늘의 무늬’이고, 인문(人文)을 ‘인간의 무늬’라고 할 때[각주:3],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배려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스팩 강화와 자아의 상처 극복을 테마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동시대 한국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욕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에 마냥 호의적일 수는 없다.

    인문을 인간들이 이루는 무늬라고 했을 때, 인문학은 그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이 된다. 무늬를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전체를 봐야 무늬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리므로 ‘인간의 무늬’라는 말 안에는 인간은 복잡다단하여서 두부모를 자르듯 인간에 대해 재단할 수 없다, 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인간을 쉽게 판단할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인문학은 사회 속에서 쉽게 환호 받으며 유통되고 소비되다 폐기되는 개념과 풍조에 대해 어김없이 삐딱한 태도로 회의하고 그것을 응시하면서 넌 누구니, 넌 어디서 왔니, 라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볼 때 현재 한국사회에서 스팩과 힐링으로 포장되어 열렬히 환호받으며 유통되는 인문학 풍속도는 인문학적으로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된다. 모든 사안과 문제 앞에 인문학이란 단어가 차고 넘치지만 실상은 인문학적 태도가 전무한 한국의 인문학 열풍, 그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문정신은 없다. 비행기 타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볼 때 보이는 빨간 십자가의 풍년이 오히려 한국 개신교의 타락과 부패를 상징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의 인문학 열풍 또한 그런 처지로 타락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사회가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그러다가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울분을 품고 살다 고공농성을 할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하면 안 된다. 대한민국 사회가 인문학, 즉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중시하는 열풍에 빠져있었다면 어린 학생들이 물에 빠져 죽어간 세월호에 사건에 대해 그리 무능한 대처와 무책임한 행보를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 땅의 학부모들이 진정 인문학적이라면 인문학적 상상력 대신 점수따기식 학습과 수량화된 현재 학생 평가 시스템 안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밀어넣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무늬를 존중하는 인문학은 인간 현존 하나하나의 삶과 호흡에 관여하고 그 아우성과 몸짓에 일일이 반응하면서 최대한 성심껏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공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인문학이다


    결론적으로 인문학이란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강박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나의 아픔을 치유받을 수 있을까를 둘러싼 집착도 아니다. 오히려,“세상이 이렇게 불합리 한데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이것은 죄악이 아닐까?”를 묻는 것이 인문학이고, 타인의 불행과 나의 행복사이에 있는 함수와 변수를 계산하여 내 행복의 정체를 의심하고 타인의 불행에 대해 면목없어해 하는 마음이 인문학이다. 물론, 인문학은 나의 아레테를 발견하고 계발하여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는 긍정의 정신이고, 고통과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것으로 인한 상처로 부터의 회복을 바라는 희망의 변증법을 포함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인문학적 의제는 우리시대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함께 힘을 모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비참과 탄식을 극복할 방도를 모색하는 비판의 정신이어야 맞다. 그 마음으로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불편한 진실과 타협하지 말고 우리 시대 가장 비천한 이들과의 연대에 동참하는 것, 우리사회 속에서 잊혀지고 가려지는 진실들을 외면하지 않고 들춰내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진정한 우리의 스팩이고, 그 순간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힐링을 맛보게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액체근대』 (서울: 강, 2009). [본문으로]
  2. 서보명 지음, 『대학의 몰락』 (서울: 동연, 2011). 65-81 [본문으로]
  3. 『周易』 「賁卦」. “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_ 천문을 살펴서 시간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문을 살펴서 천하를 화성한다.”- 이승환,“동양의 학문과 인문정신”, 『인문정신과 인문학』(한국학술협의회 편, 아카넷, 2007), 29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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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퀀스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2016년 가을,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논단이 불러온 파국의 정치는 한국사회를 급속도로 촛불정국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하였다. 2016년 10월 29일(토) 1차 촛불집회부터 2017년 4월 29일(토) 23차 마지막 촛불집회까지 1600만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광장에 참여하였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2016년 12월 9일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인용처리 하였다. 그로부터 2개월 후 2017년 5월9일에 치루어진 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도 현 정부를 촛불집회로 이룬 혁명의 정부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보면 촛불은 새로운 정치적 해석과 상상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촛불의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촛불정국이 일단락이 된 현 상황에서 촛불이 지닌 의미를 다시한번 복기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고, 그 과정에서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정치적 상상과 윤리적 결단의 지점을 역으로 추적해 보는 기회가 된다면 글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다.


1. 촛불, 비정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


   현대국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비정상이다.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된 국가 권력 아래서 국민 개개인이 지니는 차이는 선거를 통해 결정된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고 무시된다. 서로 다른 개인과 우리는 국민이라는 집합명사 안에서 하나가 된다. 차이가 국가권력이라는 동일성 안으로 스며드는 밀도가 현대의 민주주의는 고.중세의 봉건제 보다 오히려 세고 견고하다. 이런 이유로 대의제 민주주의를‘동일성의 정치(Politcs of Identity)’라 부른다. 일찍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그들이 공저한 『계몽의 변증법』에서“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동일성에 의해 지배받는 사회”[각주:1]라 지적하면서, 이를 가능하게 했던 근대적 (도구적)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이성은 스스로를 보편적 주체로 서게 함과 동시에...이성은 자기 보존을 위해 세계를 제어하는 계산적인 측면도 갖는다.”[각주:2] 근대성이 지닌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꼬집는 날카로운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정치적 보편주의로 자리매김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근대성의 대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동일성에 기초한다. 동일성의 정치는 모든 국민에게 한 표가 있다는 평등성,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는 원칙성, 그리고 소수인 우리가 내일의 다수가 되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낙관성을 축으로 작동하는 환상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현실의 민주주의에서 평등성은 형식상의 평등성이고, 다수가 지니는 정당성은 한국 국정원 댓글 조작사건에서 보듯이 모략과 음모의 결과물이며, 내일 태양이 뜬다는 희망과 가능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인민들에게는 절대로 실현되지 않는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서구 시민사회의 발전은 대의제 민주제의 등장과 그로 인해 등장한 문제점을 치유해나갔던 역사였다. 서구의 경우와 다르게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았다. 촛불이 요구했던 것은 이런 비정상적인 민주주의의 정상화였다. 물론, 촛불의 요구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실현 불가능한 요구였다. 국가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과 그들의 출몰로부터 야기되는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원치 않는다. 어쩌면 국가는 기득권세력의 부와 권력의 유지를 보장하는 기능과 새로운 질서의 등장을 억제하는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민주주의가 지녔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직접적인 시민 민주주의를 외쳤던 것이 촛불이다. 촛불은 대의에 묻혀왔던 개개인의 목소리와 색깔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국가에 의해 정리되고 관리되고 배제되어 왔던 개별자들을 셈하여 줄 것을 국가에 당당히 요청했던 사건이 촛불이었다는 말이다.

    문득 지난 촛불집회 기간 중 불렀던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이 말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권력을 강조하는 말이겠지만, 한편으로 문장의 주어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대한민국에게 잃어버린 민주와 공화를 찾아 돌려주자는 것이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 모든 사회 구성원들끼리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 서로 조화를 이루는 대한민국을 되찾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의 대의였다.


2.  촛불,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


    매주 토요일마다 23차례에 걸쳐 1600만명이 넘는 시민을 광장으로 모이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촛불은 과거 정치적이지 않았던 일상들이 정치의 모습으로 소환된 사건이었다. 일상의 정치화가 진행되었기에 촛불은 계속 광장에서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었다. 중고등학생 연합이 자기네들끼리 목소리를 내면서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그들의 언어로 시국에 대해 발언하고,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촛불현장에서 벌어지는 가부장제적인 현상을 비판한다. 광장으로 유모차를 대거 끌고 나오는가 하면, 시민들은 각자의 기억 속 인물들을 불러내서 광장에서 만났다.

    광장에는 수없이 많은 깃발들이 휘날렸는데 과거와 같이 웅장한 거대서사의 메시지가 깃발에 적혀있지는 않았다. 소소한 개인들의 치기와 풍자가 어린 작품들이 깃발의 형태로 전시된 케이스라고 해야 옳다. 장수하늘소 연구소, 91학번 별 보이는 모임, 끝나고 치맥한잔 등 소소한 일상들이 깃발로 등장하면서 촛불 광장은 예전의 피끓는 투쟁, 강철같은 투쟁을 연호하며 치열하게 싸웠던 전선이 아니라, 일종의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무대이자 마당이되었다. 과거 1980년대식 운동권 투쟁방식에 익숙해 있던 필자로서는 분명 촛불은 낯선 풍경이었다. 10년(2004~2014) 동안 유학을 핑계로 한국을 비웠던 지라 그동안 한국사회의 변화상을 내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구나, 라는 자조 섞인 탄식도 내안에서는 분출하였다.

    시위의 풍경이 예전과 달랐다는 점은 지도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누가 23차례 집회를 주도하는지, 누가 1600만명을 조직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혹 누군가 과거처럼 큰 목소리로 가열차게 선동적으로 구호를 외치거나 자극적인 발언을 남발하면 광장의 촛불은 그들을 외면하였다. 연차를 거듭하면서 촛불집회가 청와대 인근까지만 행진하고 돌아가는 무력한 시위로 전락하지 않을까, 라는 위기감이 잠시 돌았다. 그래서 비폭력적인 집회방식에 대한 논쟁이 잠시 있었다. 청와대까지 진출해야하고 청와대를 넘어야 되는 것 아닌가, 라는 문제제기 말이다. 그 말은 경찰과의 대치와 폭력까지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익숙한 변증법적 논리학의 문법, 양적 축적에 따른 질적 승화의 단계가 무르익었고 지금이 바로 행동을 해야하는 그때이다, 라는 주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2016~17 촛불광장에서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았다. 촛불은 과거와 같은 방식의 정세분석과 인정투쟁을 허락하지 않았다.

    촛불광장은 이념적인 구호를 외치면서 거대한 대의를 실천하는 슈퍼에고(Super ego)의 집결지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각각의 개인들이 그동안 상실했던 본인들의 쾌락을 찾아 몰려드는 이드(Id)의 각축장이었다. 광장으로 몰려든 개인들은 자신들과 소통하지 않는 권위적인 정부에 대해, 자기들을 집합명사 취급하면서 관리하고 제어하려 했던 정부를 향해 난장을 피웠던 것이다. 그러면서 신화화 되어있고 이데올로기화 되어있었던 제도로서의 정치는 깨어졌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일상이 정치의 역역으로 출현하였다. 촛불은 이렇듯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라는 새로운 환타지를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3. 촛불, 법 밖의 정의를 향하다


   비정상적인 민주주의를 고발하고,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를 실현시켰던 촛불이 최종적으로 겨냥한 목표점은 정의로운 대한민국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서 정의란 법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경제적으로는 뿌리깊은 정경유착이, 사회적으로는 세월호에 대한 은폐와 조작이, 문화적으로는 블랙리스트 작성으로 대변되는 획일주의와 검열이 한국사회를 지배하였다. 그 안에 정의는 없었다. 정의는“법 밖의 정의”[각주:3]다. 촛불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 법 밖에 위치했던 정의를 다시 현실의 법 테두리 안으로 정상화시키려고 했던 몸부림이었다.

    “법 밖의 정의”를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 유대 사회의 법이었던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파국을 향해 달려갔던 예수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는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법 밖의 정의’를 끝까지 주장하며 행동했던 인물이었다. 배고픈 사람들이 밀 이삭을 좀 뜯어먹었다고 안식법 위반을 운운하고, 병자들을 안식일에 고쳤다는 이유로 도덕적 규범을 어겼다고 몰아붙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는 분노하였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마15:3)”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도 예수는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예수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 한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타자이다. 역사적으로 양자 간에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골이 패여 있는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은 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초죽음이 된 유대사람을 섬김을 받아 마땅한 이웃으로 대접한다. 타자의 신음에 무조건적인 환대로 반응하면서‘법 밖의 정의’를 실현한 것이다.

    예수의 윤리에서 법 밖에 위치하는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가장 도르라지는 대목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최후의 심판’비유이다. 최후 심판 날 인자는 양을 자기 오른쪽에 염소를 자기 왼편에 세운다. 양과 염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상징한다. 이 심판은 지켜보는 청중이나 오른쪽에 있는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의 판정 기준 떄문이었다:“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마 25:35-36).

    마지막 날 판정기준이 유대교의 법을 잘 지킨 순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법 밖에 위치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예수가 추구했던‘법 밖의 정의’는 유대율법에 대한 해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율법 안에 숨어있는 진정한 의미, 즉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인간 사회에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는 율법 본연의 정신을 회복시켰다. 이렇듯 예수는 성서 안에 숨겨져 있는 명백한 진리를 다시 조명하면서 정도(正道)를 따라 정직하게 걸어간 인물이었다.

    촛불은 ‘법 밖의 정의’를 갈망했던 예수의 정신과 공명한다. 촛불은 자본의 법칙 안으로 함몰되어버린 법질서를 고발하고,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힌 정부 여당의 독선에 당당히 맞섰다. 또한 촛불은 진도 앞바다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세월호의 어린 생명들에 대한 애도를 불허하는 부도덕한 정권을 소환하였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세력과 집단을 검열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배제하려 했던 후안무치한 정부를 법정에 세웠다. 그렇게 23주간 광장을 밝힌 촛불로 인해 마른 뼈와 같이 앙상했던 대한민국에 혈기와 온기가 돌기 시작했고, 붕괴되었던 민주주의는 회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촛불의 윤리는 상징적 체계, 즉 법을 위해 봉사하는 수동적 윤리일 수 없다. 촛불은 상징적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법 너머의 행위까지를 겨냥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21세기 법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법칙에서 배제된 자들을 향하는 윤리이고, 우리시대 악법이라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혐오주의로 부터 차별받고 억압받는 타자들, 즉 난민, 여성, 동성애자,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해 달려가는 윤리이다. 이렇듯 2016-17년 대한민국을 밝힌 촛불은‘법 밖의 정의’를 여전히 믿고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 불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고, 현실을 강제하는 체제와 시스템과 도그마를 향해 절단선을 그을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하였다. 그리하여 촛불은 대한민국의 실추된 존엄과 명예를 회복시켰고, 이러한 촛불의 기억은 대한민국이 정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상상해야하는 그때마다 귀환하여 우리의 귓전에서 그날의 추억을 들려주며 우리를 깨어있게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M. Horkheimer and T.Adorno, Dislectics of Enlightment (New York: Herder and Herder,1972), 7 [본문으로]
  2. Ibid., 83-84. [본문으로]
  3. Theodore Jennings,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cis of Paul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3); 올해 오랫동안 제직했던 시카고 신학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은퇴한 테드 제닝스 교수는 예수의 메시아 운동을 재해석한 바울신학의 핵심을“법 밖의 정의(Outlaw Justice)”라 정의하면서 요즘 급격하게 일고 있는 바울에 대한 현대철학의 해석과 대화를 시도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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