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이 이끄는 삶[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보시기에 참 좋았다 (it was very good).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창 1:31)


00.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새해를 어떻게 시작하시고 계신가요? 문득 제가 서른 살이 되던 해가 생각납니다. 스물 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던 12월 31일 날 밤에 대학로에 있는 어느 맥주집에서 스물 아홉이었던 내 후배와 맥주를 먹으며 엉엉 울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저 보다 한 살 적었던 그 후배는 지금은 꽤 알려진 독립다큐멘터리감독이 되었는데, “형 울지마!” 라고 저를 위로 할 때, “야, 스물 아홉이 뭘 알어?” 하면서, 저의 지나간 20대를 하염없이 애도했었습니다. 그때로부터도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저는 올해 오십이 되었습니다. 사십이 되던 해는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어떻게 사십을 맞이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십을 맞는 올해는 느낌이 좀 다르네요. 스물 아홉에서 서른을 맞이하던 그 해와 비슷하게 좀 우울하고 맬랑콜리 합니다.

   제 기분을 더 안 좋게 만든 것은, 제가 새해시작하자마자 감기가 걸렸는데, 저는 보통 감기 걸려도 약 안 먹고 인삼차나 비타민 먹고 잠 자고 일어나면 나았는데, 이번에는 낫지가 않는거예요. 그래서 병원갔더니 폐렴까지는 아니지만 기관지염으로 발전했다고, 하면서 주사 맞고 약먹고 해서 지금은 겨우 잡혔습니다. 오십이 되니까 감기까지도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구나, 라는 씁쓸함이 밀려왔습니다.

   더욱 저를 심란하게 만든 것은, 오십은‘지천명’이라고 하죠. 하늘의 명을 안다는 나이가 지천명 아닙니까. 그런데 오십이 된 저는 하늘의 뜻은 커녕 내 마음 하나도 제대로 알지도 다스리지도 못하는 나 아닌가, 라는 회의와 반성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오십이라는 삶의 무게에 아직 저는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암튼 저는 이렇게 썩 유쾌하지 않게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좀 나아지겠죠.


01.

   새해가 되면 결심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죠. (새해들어 여러분들은 무엇을 결심하셨습니까?) 담배를 피시는 분들은 금연을 결심하고,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는 올해는 성경을 반드시 일독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교회에서는 새해가 되면 일일성경 통독표 같은 거 나누어 주면서 매일매일 읽을 성경을 읽도록 유도합니다. 대개의 경우 창세기 출애굽기까지는 잘 따라가다가 레위기 민수기가 나오면 거의 반 이상의 사람들이 포기합니다. 저는 이런 식의 성서 통독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용과 의미가 단절되잖아요. 별로 재미도 없습니다.

    성서를 읽는 (제 견해로) 좋은 방법은 사건의 단위별로 성서를 읽는 겁니다. 성서를 이야기의 단위별로 끊어 읽는거죠. 예를 들어 창세기를 읽을 때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삭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가 창세기의 내용이면, 아브라함으로 시작했으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다 읽는거죠. 아브라함 이야기가 창 12장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아브라함이 죽는 기사가 창 25에 나오는데, 거기까지 원샷으로 읽는 것입니다. 한 시간 정도면 됩니다. 물론 매일 한 시간 오로지 성경 읽는데 시간내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가끔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는 이벤트를 올 한해 몇 번 만들어 보기를 권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새해가 되어도 별다른 결심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올해 오십도 되고, 제가 한백교회 담임목사 취임한지 횟수로는 4년차, 만으로도 3년을 맞이하면서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성경을 좀 정해진 시간에 주기적으로 읽자, 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하늘 뜻 준비할 때, 논문을 쓸 때나 원고를 쓸 때 자주 성경을 보지만, 그런 목적이 있는, 직업으로서의 성서읽기 말고, 그냥 단백한 성서읽기를 해 본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실험 중입니다. 언제가 가장 일정하게 아무런 구애 받지 않고 시간을 낼 수 있을까, 실험중인데 만만치 않네요. 어쨌든 저는 지금 2018년 새해가 되어 단백한 성서읽기를 시작했습니다. 벌써 창세기를 다 읽고 출애굽기을 읽고 있습니다. 일단 레위기- 민수기를 넘어가는 것이 목표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02.

    오늘 하늘 뜻 나누기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읽다가 들었던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단백한 성서읽기를 한다고 했는데 어느덧 목적이 있는, 직업으로서의 성서읽기가 되어버렸네요. 창세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2장 4절까지가 첫 번째 창조이야기라면, 창세기 2장 4절부터는 두 번째 창조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 내용은 첫째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와 2장부터 등장하는 창조이야기 사이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신이 창조하기 전에 세상이 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 1:2) 반면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메마른 광야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창 2:5-6)  

   이러한 차이는 창조 이야기가 쓰여지던 시기와 공간적 배경을 암시하는 단서입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는, 즉 물로 가득찼던 세상에서부터 창조가 시작되는 이야기는 바벨로 강가로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때 형성된 이야기입니다.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 비옥한 초승달지역은 인류 4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죠. 앗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 제국들이 이 강가에서 발원하고 성장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강들이 홍수가 나서 범람하면 온통 물난리가 나서 모두가 쓸려내려 갔습니다. 이런 배경속에서 포로로 잡혀와 이방땅에서 살고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신은 우리를 위해 물과 물 사이를 갈라 하늘을 내고 길을 내고 땅을 마련하여 우리를 안전하게 만드는 신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에는 이렇게 창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때 위로는(에누라 엘리쉬) 하늘이 이름 지어지지 않았고, 밑으로는 마른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들(신들)의 아버지 압수(남신, 지하수 상징)와 그들 모두를 낳을 모체 티아마트(여신, 바닷물 상징)는 자기네들의 물을 하나로 섞고 있었다.”창세기 1장과 굉장히 유사하죠. 


03.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메마른 광야 지대인 가나안땅을 배경으로 합니다. 가나안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가나안땅은 메마른 척박한 해발고도 800미터되는 산지가 중앙에 버티고 있는 척박한 땅입니다. 그나마 그 지역에서 살만한 땅은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해안지대,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그 땅이 유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메마른 광야지대에서 살았다고 보면 맞습니다. 물이 귀한 곳이었기에 땅에서 물이 솟아나 온 땅을 적셨으면 좋겠다, 라는 환상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볼 때 바벨론 포로기때 형성된 첫 번째 창조설화보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가 역사적으로 더 오래된 창조이야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의 핵심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 역시 고대 메소포타미아 창조 이야기에 거의 공통되게 언급되는 점이라고 고고학자들은 말합니다. 최초의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수메르의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처음에 큰 신과 작은 신이 살았다고 해요. 작은 신들이 노동을 담당했고, 큰 신들은 작은 신들이 노동하는 것을 보고(감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작은 신들이 점점 불평불만이 늘어나면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큰 신들이 작은 신들의 불평소리가 시끄러워 자기들이 쉴 수가 없게 되자, 작은 신들의 우두머리를 처형하고 그의 피를 흙과 섞어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작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지게 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는 큰 신들이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반역한 신들의 피를 흙과 섞어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속에 인간을 바라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관점이 들어있는 거죠. 인간은 반역의 DNA를 타고 났다는. 창세기 2장에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역시 당시 퍼져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인간 창조설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DNA에 반역의 인자만이 섞여 있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살아있는 따듯한 인간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왜 어떻게 언제부터 이런식 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일어났을까...이 부분은 다각도에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두 번째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첫 번째 창조이야기입니다.


04.

    창세기에 등장하는 두 개의 창조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은 어쨌든 신이 인간에게 살만한, 아니 살기 아주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을 생각해보세요.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씩 만들어가면서 “좋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빛을 만들고 나서,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지는 것을 보시고, 땅에서 온갖 생명이 돋아나는 것을 보시고, 창공에 빛나는 것이 땅을 환히 비추는 것을 보시고, 물과 하늘에 생명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신은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최종적으로 “참 좋았다”라는 여느때보다도 더 강한 감탄을 합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만들었을 때랑은 달리 인간을 만들고 나서‘좋았다’에서 ‘참 좋았다’로 신의 표현이 격상된 이유는 무엇일까, 를 둘러싼 엉뚱한 호기심, 그리고 발칙함 같은 것이 작동하더군요. 과연, 신은 무엇 때문에 ‘참’ 좋았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창세기 1장31절인데, 그 앞 창세기 1: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the image of God, eidos)대로 사람을 창조하였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른 것 들을 만들었을때는 안 그랬는데, 유독 인간을 만들 때 신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성서는 강조합니다. 신이 태양을 만들든, 달을 만들든, 동물을 만들든, 식물을 만들든지 간에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대상 사이는 명확한 간극이 있었습니다. 그것을‘주체/객체’라 부르든, ‘대상/실재’라 부르든, ‘주관/객관’이라 부르든 명확한 간극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있었습니다.


05.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신의 형상대로 그것들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독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이 주입된 것이죠. 그렇다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실체로 존재했던 신이 당신의 독특함(전지전능함)을 버리고, 신과 인간 사이 존재하는 간극을 뚫고 우리(인간)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론의 독특함이고, 그것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고, 예수가 당했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죠.

    인간 세계속으로 들어온 신은 한마디로‘고통받는 신’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Moltmann)은 그 신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슬라보예 지젝(Zizek)은 하이데거(Heidagger)의 발언인“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를 “고통받는 신 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는 말로 바꿉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라는 말은 신이 인간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 같지 않은 신이 된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특수한 신적인 특징이 투입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 속으로 들어온 신은 단순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으로 우리를 구성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간 안에 어떤 다른 공간이 생긴 것이죠. 그것을 X라고 했을 때, 그것을 데리다(Derrida)는‘차연’으로, 레비나스(Levinas)는‘타자’로, 들뢰즈(Deleuze)는‘홈’으로, 지젝(Zizek)은 틈과 균열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06.

    그럼, 여러분들은 그 빈 공간 X 를 뭐라 부르겠습니까? 인간 안에 있는 인간 이상의 그것, 인간을 인간이 아닌(Not All) 어떤 것으로 만드는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 물음에 대해 자끄 라깡(Lacan)은‘충동(drive)’을 말합니다. 충동과 본능은 다릅니다. 본능은 살고자 하는 에너지죠. 하지만, 라깡에서의 충동은 기본적으로 ‘죽음충동’입니다.

    인간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모두 쾌(기쁨)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본능이죠. 하지만 충동은 죽음을 무릅쓰고 가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죽음충동을 갖습니다. 죽음충동을 이야기 할때마다 언급되는 인물이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나오는 안티고네입니다. 국가에 대해 이적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법(크레온)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지시키고, 애도로 못하게 하죠. 여기서 윤리의 문제, 행위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반역자에 대해서는 장례와 애도를 표할 수 없다는 법을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이든 지켜져야 한다는 (실정)법 밖의 그것을 지켜야 할까요? 안티고네의 문제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실정)법을 지키면 안락하고 편합니다. 이것이 쾌락의 원칙, 본능에 합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금지된 애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국법으로 다스려집니다. 죽음이 예상되는 그것을 강행하는 것이‘충동(drive)’이고, 그래서 모든 충동은 ‘죽음충동’이 되는 것입니다.

    칸트(Kant)는 이것을‘자유’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현실의 원칙(현실계)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지만 그 너머의 세계(가상계)를 바라보면서 나가는 존재인데, 그 힘이 자유이고 그 자유를 향한 행위가 도덕이 되는 것이죠. 즉 자유란 인간이 기표화, 의미화, 법질서에 충실한 존재로만 국한될 수 없다는 마지막 저항지점이고, 그 공간이 바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교두보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07.

    어쩌면 역사는 충동의 역사였고, 자유를 향한 역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쾌락의 원칙에 만족하지 않았던 충동적이었던 사람들, 현실을 지배하는 법의 목소리가 부자유스러워 자유를 외쳤던 사람들, 현실을 지배하는 욕망의 법칙을 거슬러 올라갔던 무수한 쾌락의 원칙을 넘었던 사람들의 외침과 몸부림이 점점이 박혀 선을 이루고 그 선을 연결하면서 역사는 이어져 왔던 것 아닐까요. 이런 충동의 역사와 자유를 향했던 역사는 너무나 많아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범위를 좁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벌어졌던 사건들만 생각해도 지금 당장 다음과 같은 사건들과 인물들이 떠오릅니다. 1987년 6월 항쟁이 그랬고, 80년 광주가 그랬고, 문익환과 장준하가 그랬고, 4.19가 그랬고, 3.1 만세운동이 그랬고, 상해임시정부의 인물들이 그랬고, 동학의 전봉준이 그랬습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보시기에 참 좋았다(it was very good)... 과연, 무엇이 좋았을까?” very good에서 very가 들어간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개입했기 때문일텐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drive를 지닌, 즉 충동적인 존재들 아닐까. 그래서 신이 drive를 지닌 인간들이 앞으로 일으킬 사건들을 미리 내다보시고 좋았던 것 아닐까. 이것이 신이 인간을 만들고 그렇게 좋아했던 이유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2018년이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시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보기에 참 좋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저는 이 말이 2018년 한해를 살아 갈 우리들에게 각자가 거하고 있는 삶의 공간속에서‘충동적’으로! 살라는 말로 들립니다. 올 한해 주께서 주시는 한없는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Happy New Year!


ⓒ 웹진 <제3시대>



  1. 1월14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보시기에 참 좋았다... 과연, 무엇이 좋았을까?”를 수정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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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순종의 마리아가 아닌, 반역의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눅 1:46-55)


00. 나의 크리스마스 산타이야기


    여러분은 산타클로스에 대한 믿음이 언제 깨졌나요? 저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여섯 살에서 일곱 살로 넘어가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어떻게 내가 바라는 선물을 콕 집어서 잠자는 사이에 갖다 놓는지. 그해 크리스마스도 그랬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오매불망 내가 바라던 장총을 내 머리맡에 놓고 가다 그만 내 팔을 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잠이 깼는데 본능적으로 아는 척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보면 안 될 것이라는 두려움. 마치 타지 않는 떨기나무 속에 있는 야훼를 고개들어 보지 못하는 모세처럼, 신의 얼굴을 보면 다 죽는다고 하죠. 그래서 저는 어린 나이에 잠에서 깼지만 눈을 뜨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금기를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산타클로스의 얼굴은 못 봤지만 문을 스르르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시죠. 모세에게. 나의 얼굴은 못 보지만 나의 등을 볼 수 있다, 고 말입니다.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산타의 뒷모습과 아빠의 뒤태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저는 그것을 지금까지 구태여 확인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01.


   슬라보예 지젝이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가지고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현대인들의 믿음은 세속화된 사회에서의 믿음입니다. 세속화된 사회란 신화와 주술이 지배했던 고.중세가 근대를 지나면서 더 이상 신화와 주술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成人이 된 시대이죠. 세속화된 사회속에서 어른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내가 바보냐?”고 비웃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삽니다. 어린이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니?”라고 말하면 “저는 바보가 아니예요. 단지 부모님이 실망할까봐 믿는 척 하는 거예요”라고 답한다는 겁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그랬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제 팔을 밟고 갖던 그해부터, 아니 아빠가 내 팔을 밟았던 그 크리스마스때부터 저는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산타의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는 아빠의 순진하고 해맑은 마음을 어린 상철은 굳이 훼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산타가 없다는 섬뜩한 사실보다 아빠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되겠다, 라는 갸륵한 효심이 산타의 진실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죠.


02.


    21세기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보다 먹고 죽는 사람(과체중)이 더 많은 시대로 기록될 것입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하거나 당뇨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경험과 기술과 지식으로 인류는 지금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 태어나는 아기의 기대수명은 140살이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대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 (Yuval Harari)는 이렇듯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을 극복한 인류의 다음 목표는 인류를 신적인 존재로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유전공학, 인공지능, 재생의학, 그리고 나노기술의 발전의 힙 입어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Homo Deus), 즉 신적 인간으로 바꾸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모두가 성인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아니 모두가 어쩌면 사이보그가 되어버리는 세상속에서, 아니 인간이 신이 되어버리는 세상 속에서 크리스마스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03.


    냉정하게 말해 성서는 예수의 탄생을 그리 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탄생기사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탄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예수의 탄생이 워낙 하찮은 기사라 눈에 보이지도 않지 않았나.

   예수의 탄생설화를 포함하고 있는 두 복음서의 상황도 그리 녹녹치는 않습니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와있는 크리스마스 기사를 읽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가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아기 예수 탄생기사는 주된 스토리가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오는 가운데, 헤롯왕에게 잠시 들렀다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마치 신문기사를 쓰는 것처럼, 6H 원칙에 의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적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에 갔다는 이야기,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방을 구하러 다녔는데 못 구했다는 이야기, 아기를 구유에 눕혔다는 이야기, 천사들이 목동에게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아주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복음서의 말이 진정한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일까요. 이런 것을 목사님들에게 물으면 믿음이 부족하다, 는 답변만을 할 뿐입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최종결론은 서로 다른 마태와 누가의 판본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하여 동방박사와 목동을 다 같이 모아 놓고 양들과 선물들도 다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중앙에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정말 한가운데 아기예수가 있는 모습입니다. 그 풍경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입니다. 과연 이 모습이 진정 예수가 태어나던 그 날 밤 광경이었는지는 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04.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크리스마스를 다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예수탄생 기록이 마가, 요한복음에는 왜 없는지,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탄생의 목격자는 다른지? 목격자가 다를 뿐 아니라 이야기도 전혀 다릅니다. 어째서 이런 차이는 발생하는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복음서의 장르적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전기가 아니죠. 위인전이나 자서전, 요즘 유행하는 평전도 아닙니다. 즉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그의 생애를 추적하며 분명하고 정확한 역사적 예수의 정보를 남기려고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복음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독자들을 상대로 들려준 서로 다른 예수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야 옳습니다.

    그러므로 2천년이 지난 시점에서 복음서들을 읽는 독법은 복음서에 적혀있는 내용들이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에 각기 다른 그 이야기들이 지금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를 추적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서를 바라보는 해석의 기본이라고 (지금 저 뒷자리에 앉아 계신) 김창락 교수님이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05.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대목이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마태와 누가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다르지만 공통점, 즉 교집합적인 요소가 있죠. 마리아와 요셉, 베들레헴, 그리고 동정녀 탄생입니다. 그 내용은 사도신경에 분명하게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어쩌면 우리는 모두 다 속았다, 라는 것입니다. 마태와 누가 어디에도 동정녀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동정녀는 마리아의 임신사실을 전하면서 인용하는 이사야 7장 14절 내용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마 1:22-23). 무척이나 억지로 과거로부터 전거를 끌어와서 현재의 사건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습니다.


06.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복음서보다 훨씬 앞서 쓰여진 바울의 서신에는 동정녀, 처녀를 뜻하는 ‘파르테소스’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라디아 4:4) 이때 쓰인 여자는 ‘구네’는 여자 일반을 뜻하는 말입니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크리스마스의 오래된 주제는 교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앙의 산물, 믿음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복음서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바울서신에도 없었던 내용이었고, 복음서가 쓰여지던 시기에는 어느 정도 초기교회의 형태들과 움직임들이 조성되던 시기였다는 점, 나중에 만들어진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산물이라는 점 등 그런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오히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복음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보다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누가 1:35) 

     왜 예수의 탄생에 성령(프뉴마)을 끌어들였을까?


07.


    이 시점에서 우리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무렵 이스라엘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전 4년, 헤롯이 사망하자 그 동안 억눌렸던 이스라엘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합니다. 시리아 총독 바루스(Varus)가 이끄는 로마군은 저항의 본거지인 나사렛(예수공생애의 주무대) 부근의 세포리스를 초토화시켰습니다. 로마군은 반란에 관여된 지역을 모두 소탕했으며, 약 2천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아기 예수 탄생할 때 한 밤중에 나타난 천사들이 나타나 이렇게 찬양을 했다고 하죠.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눅2:14)"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 전에는 이 찬양이 그저 신비롭고 아름답고 목가적이고 평온한 노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서는 천사들의 노래가 달리 들렸습니다. 로마군의 살육으로 쌓인 시체들 앞에서, 어떤 희망이라고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던 그 참혹한 땅에서, 지옥같은 나날들을 살아야만 했던 민중들 가운데서 조용히 아기 예수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08.


    오늘 읽은 성서본문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고지를 한 후에 등장하는 마리아 찬가입니다. 예수가 태어나던 무렵 역사적 정황을 생각하면 마리아의 찬가도 달리 읽힙니다. 흔히 우리는 마리아를 순종의 대명사로 여깁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직접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눅1:30-31) 이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한 순종의 화신이 마리아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정말 천사의 말대로 은혜였을까요?

    당시 유대 사회 상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남자없이 미혼모로 아들을 낳는 박복한 팔자가 되는 것 아닌가요. 평생 주홍글씨가 마리아에게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마리아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조금만 뒤집어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마리아의 다짐은 절대로 순종적인 당시의 여성라면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존 질서를 뛰어넘어 파국으로 가겠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 찬가’는 순종적이고 신앙적인 글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모럴과 관습과 이데올로기의 강제를 뚫고 나가겠다는 반역의 구절로 읽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09.


    마리아 찬가를 가만히 읽어보면 마리아는 자신의 운명과 이스라엘의 운명을 동류항으로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제국의 힘과 논리속에서 휘둘리는 억압받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노래 중에 나오는 “힘센 분이 내게 행한 큰 일”은 단순히 아기를 잉태한 것, 이라고 축소적으로 해석할 수 만은 없습니다. 그 큰 일이란 뒤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끌어내리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 큰 일이란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힘센 분이 행하는 큰 일입니다. 이 얼마나 위험하고 반역적인 정치적 메시지입니까. 노골적으로 체제전복적인 노래를 지금 마리아가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순종의 노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마리아의 찬가가 담고 있는 당시의 유대사회를 향한 사회 정치적 차원의 메시지를 생략한 채 채, 단순히 신앙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마리아 찬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마리아 찬가는, 아니 어쩌면 복음서에 예수의 탄생 기사가 배치되어 있는 이유는, 무수한 정복과 학살과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던 시절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유포하기 위한 성서 저자들의 교묘한 전략 아니었을까요.


10.


    성서에 있는 예수 탄생의 기사는 놀랍게도 당대의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오늘 여기"의 사건으로 끊임없이 해석되면서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재현되었습니다.

    도르트 죌레는 ‘마리아의 노래’를 이렇게 각색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기록되기를,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다고 마리아가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르게 표현해서, 우리의 가진 자들의 소유권을 빼앗고, 여성을 안다고 주장하는 자를 비웃고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시대가 끝나고 객체가 주체가 되어 보다 낳은 권리를 성취하리라. 기록되기를, 그가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다고 마리아가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르게 표현해서, 여자가 달나라에 가고 국회 의석에 않아 자결권이 실현되고 권세를 갈망하는 마음은 무시될 것이며 두려움은 사리지고 착취가 끝날 것이다.”

    비단 여성신학뿐만이 아닙니다.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포스트콜로니얼, 퀴어신학 등 억압과 착취와 배제와 폭력을 경험했거나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전 세계 모든 민중들에게 ‘마리아 찬가’의 메시지는 새롭게 각색되어 불려졌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마리아의 노래는 어느 한 시골 소녀의 신을 향한 순종적 메시지라기 보다는, 과격하게 말하면 어느 여전사의 체제전복을 향한 권력의지로 읽어내는 것이 더 문맥상으로는 맞습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낭송되고 묵상되고 노래로 불려지면서 마리아 찬가는 변혁을 소망하는 전 세계 모든 인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11.


    이 물음이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오늘,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로마의 폭정 앞에 공포에 떨었던 우리들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이후의 우리는 주께서 행하시는 큰일을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이전과는 다른 우리들입니다.

    주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은 분명합니다. 그가 오늘 오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줄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며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 이후를 보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가 되게 하였고,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크리스마스날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할 수 있게 한 것은 아닐런지요. 그래서 저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없어도 이제는 슬프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스스로 산타가 되어 어떤 사람을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선물을 주거나 방문하는 것, 혹은 고난 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그 곁을 지켜주는 것, 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에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가 주는 평화가 이 지구상에 분쟁있는 지역, 폭력이 있는 지역, 아픔이 있는 그곳에 함께 하기를, 그리고 우리 한백교회 위에도 함께 하기를 손 모아 기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웹진 <제3시대>



  1. 2017년 12월 24일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 원고 “예수는 순종의 마리아가 아닌, 반역의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를 수정하였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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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왕의 탄생,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탄생[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마가복음 1:17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에 끌려갈 때 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Intro


    하늘 뜻 제목을 “춤의 왕의 탄생, 호모 루덴스의 탄생”이라고 지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과연 신이 인간이 된 사건은 무엇일까, 를 고민하다가 떠오른 단어가 ‘호모 루덴스’이고, 이것을 “춤의 왕”이라는 한백이 즐겨 부르는 노래와 연결시키면 크리스마스를 바라보는 창을 하나 더 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이러한 호기는 언제나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초를 합니다. 미흡한 부분들은 여러분들이 나중에 체워주시기 바랍니다.  


‘호모 루텐스’Vs.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호모 루덴스>(1938)는 네델란드의 문화인류학자 요한 하위징아(1872-1945)가 1938년에 지은 책 제목입니다. <호모 루덴스>는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놀이’에 두고 다양한 지식을 동원하여 인류의 문화를 놀이적 관점에서 고찰한 책으로, 하위징아는 놀이에 따르고, 놀이에 승복하며, 놀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명을 빛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실증주의와 과학적 역사학을 지향하던 당대의 지성사적 흐름을 거슬러 구조주의적으로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레비스트로스(1908-2009, 100세때 사망) <슬픈 열대>(1955)[각주:2]를 쓰면서 구조주의의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했던 것이 저는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구조주의적으로 인간을 바라본다고 함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정체성, 그것을 인간性이라고 합시다. 그 인간성이라는 것의 이데아는 없다는 거죠. 그 인간적인 것이 있다면 play of difference(차이들이 놀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인간에 대한 물음의 폭을 넓히는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모 루텐스>가 출판된 해가 1938년입니다. 1933년에 집권한 히틀러의 나치는 빠르게 독일을 극우 전체주의 국가로 변모시켰습니다. 1938년은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해이고, 1939년 독일은 드디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킵니다. 하위징아는 나치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반체제 지식인으로 몰려 옥고를 치루고 고생을 하다 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에 죽고 맙니다. 나치체제 속에서는 오직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만이 통용됩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목표를 향하고 일사분란한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않는 사람은 반동분자라 낙인이 찍혀 제거되고 처단됩니다. 그 나치를 대표하는 인간상이 호모 파베르(Homo Faber, 노동하는 인간)입니다. ‘호모 루덴스’는 ‘호모 파베르’와 정확히 대척점에 위치하는 인간상입니다.

    ‘호모 파페르’는 산업혁명이후 전개된 근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한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찍이 푸코는 『광기의 탄생』, 『임상의학의 탄생』, 『감시와 처벌』 등에서 근대적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체제가 어떤 식으로 노동에 장애가 되는 불필요한 인간들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분류하고 배제하는지를 다룬바 있습니다. 자본주의 등장 이후 노동이 미덕이 되어버린 사회속에서 ‘호모 루덴스’적인 인간은 노동이라는 신성함에 찬물을 끼얹는 불순한 존재이고, 그들의 속삭임은 악마의 유혹일 따름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걸려있는 문구가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문구였다고 하네요. ‘호모 파베르’적인 인간상을 미화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유대인을 동원하는 나치에 맞서 하위징아가‘호모 루덴스’를 이야기 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분명 ‘호모 파베르’와 ‘호모 루덴스’는 서로가 대척점에 서있는 인간상임은 분명합니다.


춤추는 신


    인간을 호모루덴스로 규정한 하위징아의 발언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후에 영향을 끼쳐‘춤추는 신’에 대한 서사를 낳는데 일조합니다. 하버드에 있었던 '샘 킨'(Sam Keen) 교수가 쓴 『To a Dancing God』 (Harper and Row, 1970) 입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하느님이 춤을 춘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춤을 추기는커녕 온 몸에 깁스를 한 것처럼 경직되어 있고 엄숙하기만 한 분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해 온 독자들에게 샘 킨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또 춤도 함께 추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현대의 영성가 헨리 나우엔이 타계한 후인 2001년도에 티모시 존스가 헨리 나우엔의 글을 편집해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습니다. "Turn My Mourning Into Dancing: Finding Hope In Hard Times" 내 슬픔을 춤으로; 어려운 날의 소망발견하기". 카렌 베이커 플레처(Karen Baker Fletcher)가 낸 (2006)은 삼위일체를 역동적으로 풀어낸 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습니다. 

    물론 이런 신학책들이 저에게 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insight를 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춤추는 하나님에 대한 영감을 강렬하게 주었던 사건이 바로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한신대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투쟁이 11월 달에 있었습니다. 33명이 자퇴를 하고 3명의 학생이 삭발 후에 종로 5가에서 천막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교회 진유경 청년도 그 천막 안에 있었드랬습니다. 단식 5일차 주일(11월 12일)에 한백은 천막으로 들어가 학생들과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한백 예배가 끝난 후 오후 늦게 한신대 신학과 학생들의 지지방문이 있었고, 그때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춤추는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영상 한번 보시겠습니다.)  




예수의 족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첫 페이지를 열면 등장하는 예수의 족보 맨 마지막구절입니다. 이 족보는 예수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 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슈퍼 히어로입니다. 슈퍼맨 배트맨 터미네이터 람보와도 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다윗 아닙니까. 저는 예수를 유대인들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력한 왕으로 존재했던 다윗과 연결시키려는 마태저자의 의도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이런 저의 해석에 갇히는 성서는 아닙니다. 왜 마태의 저자가 굳이 예수를 다윗과 연결시키려 했을까, 물론 지금 앞서서 한 설명이 가장 근거있는 주장이겠지만,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설사 마태의 저자가 예수를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웅 다윗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손 치더라도, 여러분 함부로 이런 해석과 결정들에 동의하지는 마십시오. 마태의 의도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오늘 이 시대 속에서 마태복음을 읽는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인 진리해석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so What? 그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 며 따지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마태를 보겠다”, 라고 우기는 태도가 어쩌면 성서를 더 풍부하게 보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를 읽는 방법에는‘천 개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마태복음 1장1절부터 17절까지 나오는 예수의 족보 중 맨 마지막에 족보를 정리하는 문구입니다. 밑에 있는 예수의 족보를 빠르게 스캔해주십시오. 

   [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


    제가 밑줄을 그어놓은 인물들이 보이시나요. 이들은 예수의 족보에 오른 이방의 여인들입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시아버지 유다와 성관계를 하여 아들을 낳은 다말, 창녀 라합, 과부로서 재가한 롯, 다윗은 유부녀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얻었습니다. 마리아는 저주받은 땅 갈릴리 출신의 여인입니다. 여성신학자들이 그동안 남성신학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의 족보에 오른 이 다섯 여인을 호명하였습니다. 왜 그동안의 신학은 예수의 족보에 오른 여인들을 주목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교회의 남성 목회자들이, 그리고 신학교의 남성 신학자들이 예수를 단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다윗 왕조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강조하기에 급급해서 족보에 명시된 여자들을, 이러한 훌륭한 예수의 혈통에 걸림이 된다고 생각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간과해온 때문 아닐는지.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마태복음 저자의 숨은 뜻을 모르고 속아왔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마태의 저자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명문가의 전통에 예수를 위치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타자 중의 타자, 호모사케르 중의 호모사케르, 민중 중에서도 가장 미천한 자의 후손으로 예수를 배치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는지. 고대 가부장제 사회속에서 여성, 철저한 율법주의 속에 이방인, 완고한 엄숙주의와 순결주의 속에서 불륜에 휩싸인 여성들을 통해 예수의 족보가 이어졌고, 그 불순함과 비극과 불결함과 불륜의 결정판이 예수였다, 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이유 때문에 당대의 절망과 실의와 낙담에 빠진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있고 친근하고 희망적으로 예수가 먹힐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물론 마태복음은 그것을 전면에 내걸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당시 마태복음을 읽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렇게 읽었으리라 보고, 그래서 마태가 전한 글이 복음이 되었던 것 아닐런지요. 여러분은 어떤 해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호모 루덴스, 다윗


    하지만, 이 해석이 오늘 제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주제는 아닙니다. 저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 본문을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예수와 다윗의 연결점을 찾아야 할까요. 그래서 고민 끝에 저는 예수와 다윗을, “...민중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그런 거대서사의 완성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투쟁하고 고투하는 왕의 이미지가 아닌, ‘호모 파베르’적인 인간이 아닌 ‘호모 루덴스’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정치가로서의 다윗은 뱀같이 지혜롭고 독수리같이 날카로왔던 현실정치인었습니다.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에의 의지가 충만했던 현실정치가 다윗에 대해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정치가로서의 다윗에 대해 저는 별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무척이나 매력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그는 혜성과도 같이 등장한 이슬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양치기 출신인 그는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 용기와 지혜와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사무엘상 6;12 에 보면 다윗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솜씨도 출중했죠. 수금을 치는 솜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왕이 있는 궁에 들어가 사울의 궁중 악사가 되었겠습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당대 최고의 딴따라가 다윗이었던 셈이죠. 더군다나 그는 말까지 잘합니다.(삼하 6:18). 그뿐 만이 아니라, 시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윗은 훌륭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풍류에 능했던 다윗이었습니다. 정열적으로 시를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에서 저는 호모 루덴스의 모습을 봅니다.


호모 루덴스, 예수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계층의 사람과도 막힘없이 어울렸던 예수의 삶을 회고할 때 저는 예수가 근엄하고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열일하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죽 놀고 먹었으면 그의 별명이‘먹보에 술꾼’(마11:19, 눅 7;34) 이었겠습니까. 그 별명이야 말로 예수가 지니는 호모 루덴스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 주변에는 여성과 어린이, 세리와 창녀들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무리 능력이 있었더라도 호모 파베르적인 인간이었다면 그처럼 예수 주변에 사회적 약자들이 모였을까. 기계적인 위로와 치유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자신들의 아픈 마음과 경직된 상황을 녹이는 매력이 예수에게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유독 예수가 어린이를 환대하는 장면이 특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마9:14, 막 10:14, 눅 18:16).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18:3) 왜 어린이일까요? 내가 보기에는 어린이야 말로 진정 100% 전심과 전력을 다해 놀 줄 아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이야 말로 철저하게 놀이의 주체이고 놀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줄 아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어렸을 적에 노느라고 밥 때도 건너뛰기도 했던 기억, 로봇 태권 V를 보고 하늘을 날았던 기억, 내가 공주가 되기도 하고 왕자가 되기도 했던 기억을 여러분들 간직하고 있지 않나요. 그 시간과 공간이 초월의 영역 아니었나 싶습니다. 적어도 제 경우 어린 시절 놀던 때처럼 완벽한 초월의 경험은 없었습니다.


대림절 메시지


    하위징아에 의하면 진지함과 엄숙함의 건너편에 놀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굳이 아폴론적인 것 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니체처럼 엄격히 구분짓지 않더라도, 하위징아의 문제의식은 근대적 이성주의를 바라보는 니체류의 그것과 일면 겹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지금 돌이켜보니 하나 같이 진지하고 근엄하고 엄숙했던 사람들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랬고, 서기관들이 그랬고,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질문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심각하고 진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예수와 예수의 적대자들 사이의 차이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일 수 있고, 가벼운 놀이정신對 진지한 엄숙주의 간의 대결 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적으로 돌이켜 봤을 때 놀이하는 인간이기를 망각한, 시종일관 진지하고 엄숙하기만 한 역사는 그 끝이 야만과 광기와 혐오와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랬고, 나치가 그랬으며, 한국 개신교의 모습이 또한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 개신교 만큼 엄숙하고 열일하고 근엄한 집단이 어디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한국개신교 만큼 타자에 대한 혐오와 광기로 가득한 집단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런 상황속에서 우리는 2017년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입니다. 사전적으로는‘출현.도래’의 뜻이지만, 신앙적으로는‘기다림’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의 출현과 도래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신의 등장을 상상하면서 2017년 대림절을 보내야 할까요. 모쪼록 2017년 대림절에 우리 한백 교우들은 ‘춤의 왕’으로 탄생한 아기 예수를, ‘호모 루덴스’로 탄생한 아기 예수를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놀고 먹었던 예수, 상처받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했던 노닥거렸던 예수, 절망의 공간과 고독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던 그런 예수가 지금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하고, 춤의 왕 예수처럼, 호모 루덴스 예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기가 이 대림절 기간이 아닐까합니다. 모두에게 미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합니다. Merry Christmas!


ⓒ 웹진 <제3시대>



  1. 12월 10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본문으로]
  2.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에서 브라질 내륙지방에 살고 있던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 등 원주민 사회의 문화를 소개.분석하면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릇된 관념으로 서구인의 사유방식을 지배해 온 '문명'과 '야만'의 개념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또한 서구사회가 세계의 다른 나머지 부분에 대해 그 자체의 기준을 부여하는 오만하고도 잘못된 전통에 대해 반대한다. 원주민들의 사회는 오직 서구사회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일 뿐 이 세상에 더 '우월한'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원주민들이 나무뿌리.거미.유충들을 먹기도 하고, 벌거벗은 채로 생활하는 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사회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그리고 만족스럽게 사회조직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음을 보고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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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7.12.26 20: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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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마지막 웹진이 발간되었습니다. 올해는 100호(1.9)부터 122호(12. 20)까지 총 23호를 발행했습니다. 30명이 넘는 필자들에 의해 150편에 이르는 글이 웹진을 타고 전파되었습니다. 하나같이 주옥과도 같은 글들이었고, 많은 인터넷 매체들이 저희 웹진 <제3시대> 글들을 퍼 날랐습니다. 특별히 올해에는 청년필진들의 영입이 활발했던 관계로 한층 웹진이 젊어졌다는 평입니다. 한해동안 글을 보내주신 필자 선생님들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내년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만나 뵙겠습니다. 복된 새해 되십시오. Peace.


몸으로 드리는 예배 공동체[각주:1]

- 한백교회 창립 30주년 메시지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로마서 12:1-2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1.


    한백교회가 출발한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 온지 3년 밖에 안되었는데. 30년 전 한백교회 첫 예배를 드렸던 분들이 이곳에 계시죠? 그 당시 예배를 드리면서 30년이 지나면 어떤 교회 모습일까 하고 상상을 했을 텐데... 지금과 같은 한백의 모습을 상상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백교회 초기 훌륭하신 지도자 두 분 계셨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박성준 선생님과 돌아가신 안병무 선생님이십니다. 안병무와 박성준이라는 두 분의 이름이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함의, 그 기표가 지니고 있는 기의를 감안했을 때, 그 후로부터 전개되는 한백의 30년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달간 30주년 예배와 행사 관계로 교회가 분주했습니다. 저는 30주년 예배 하늘 뜻을 준비하면서 한백교회의 역사를 뒤적이고, 기록들, 사진들을 한번 훑어 보았습니다. 한백이 걸어왔던 지난 30년은 87년 시민혁명부터 2017년 촛불혁명까지 한국사회 격동의 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격한 시절을 한백은 흔들거리면서, 물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좌절과 시련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습니다.

   문득 이 순간 한백 초기에 함께 나누었던 기도문을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거친 세월 헛된 역사 무너뜨리며 닫힌 가슴들 다 열리고 쓰러진 이들 다 일어나 대동춤으로 어우러질 그 날을 기다립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큰 강으로 흐를 그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작은 소리가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우리 겨레의 큰 함성으로 하나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작은 몸짓이 사람의 세상을 만드는 작지만 굳센 손들의 하나 된 염원이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의 길을 따르는 늘 새로운 시작이 되도록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나눕시다.”

   80,90년대의 시대적 화두가 물씬 느껴지는 기도문이죠. 한백이 처음 탄생하던 87년 그해는 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그 해였고, 한편으로는 혁명의 헛헛함을 맛보기도 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거대하고 우람한 진리들이 광장을 메우던 그 시기에 작지만 묻혀있는 진실들을 발견하고,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생각, 거대담론의 홍수속에서 간과되었던 작은사연과 이야기들을 이제부터는 따뜻하게 환대하자는 다짐, 위의 기도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어떤 오만도 편견도 억압도 없는 세상에 대한 바람, 아마도 그것은 한백이 30년 전에 꿈꿨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한백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2.

    이렇게 한백 30년을 회고하면서 한백의 지난날을 한마디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백, 몸으로 드리는 예배 공동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듣기에 따라서는 위험하고 불순한 발언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인간의 몸은 신학적 성찰과 신앙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몸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기원은 플라톤으로 올라갑니다. 플라톤은 세상을 이데아와 코라(Chora)로 나누고 이데아는 하늘, 정신, 형상, 남성, 이성, 코스모스로, 코라는 땅, 육체, 질료, 여성, 감성, 카오스로 분류합니다. 우주의 법칙과 질서는 이데아가 코라에 이식될 때, 코라가 이데아속으로 들어갈 때, 혹은 이데아가 코라를 품을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몸이 죄악시 된 이유는 이원론에 기초한 그리스 철학이 신학의 패러다임이 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육체성에 대한 경멸은 모든 것들 중 끝판 왕, 깔데기의 끝에 위치합니다. 특별히 중세이후 전개된 금욕주의 전통은 육체적 욕망의 억압을 정당화했고, 육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의식을 분열시켰습니다.

    육체성을 죄악시한 것은 중세 이후 신학만이 아닙니다. 근대 철학도 탈육체화 되었습니다. 근대 철학의 탈육체화는 코기토(cogito)를 추구하는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주의, 경험을 초월하는 의식의 선험성을 주장했던 칸트의 인식론, 세계사를 의식의 자기전개과정이라 주장했던 헤겔의 관념론에서 절정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몸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여성신학, 생태신학, 퀴어(Queer)신학 등이 등장하기 전까지 신학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성경본문,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논쟁거리를 선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성서구절의 배후에는 죽은 어린 양과 송아지의 피로 물든 제단 밑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살아 있는 제물로서의 우리 몸이 드리는 예배를 의식적으로 대립시키려는 사도 바울의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피 흘흘려 죽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의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제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성전이데올로기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성전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권력의 카르텔에 대해 바울이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으로 오신 신을 조롱하는 것이고, 참된 예배는 마음과 뜻과 행위로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지금 강변하고 있습니다.


3.

   사실 돌이켜보면 사도바울만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제자가 아닙니다. 바울은 살아있는 예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에 머물렀던 유대교 갱신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을 그리스도교라는 세계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세운 공로는 혁혁합니다. 어쩌면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이런 운명적인 역설 위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자기 식으로 재구성하고 변질시켰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운동이 지녔던 역동성, 즉흥성, 우발성을 교리화, 체계화, 교조화 시킨 인물로, 입체적인 예수를 화석화시키고 교조화 시킨 인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헤겔이나 니체, 톨스토이, 슈바이처, 막스베버, 하이데거, 현대 가장 핫한 철학자인 지젝, 아감벤, 바디우, 테리 이글턴, 테드 제닝스 같은 수많은 사상가들이 예수에서 바울로 전환되는 그 변곡점에 주목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 변곡점을 혁명을 위한 모티브로 차용하고, 어떤 이들은 그 변곡점을 수구적인 것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스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슬라보예 지젝(Zizek)은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반했다”고 말하면서 바울을 맑스에 대한 레닌으로 비유합니다. 즉 레닌이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를 자신의 혁명을 위한 이론으로 삼았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바울 역시 예수를 그렇게 차용했다는 것입니다. 지젝은 바울과 레닌의 상동성에 주목하면서 바울로부터 레닌이 지녔던 혁명의 기운을 상상하고 소환합니다.

    또한 해체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면 바울은 원전(元典), 즉 예수에 대한 해체의 아주 훌륭한 사례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데리다(Derrida)의‘차연(差延, defferacnce)’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는 者가 바울이 아닐까 합니다. 데리다의 차연이란 원전과 기원이 가지고 있는 존엄과 가치에 대한 딴지죠. 텍스트의 기원과 가치란 텅 비어있는 것이고 지연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공백을 유지하는 힘, 의미의 결정을 유보시키고 지연시키는 힘이 진리이고 자유이고 그것이 진정한 텍스트의 면모입니다. 이러한 해체주의의 차연의 전략이 적절하게 작동되는 지점이 바로 바울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요즘 바울읽기의 새로운 트랜드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복음은 그 자체가 예수에 대한 다른 해석 즉, 예수운동을 자기식으로 해석한 결과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바울, 즉 예수에 대한 다른 판본을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끔 허용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서의 텍스트성이라 저는 믿습니다. 단일하고 수미일관된 방식으로 엮이는 것이 성서가 아니라, 무언가 불쑥 개입하고 일탈하고 변주되고 왜곡되는 가운데 성서는 텍스트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갑니다. 보편적 진리란 어쩌면 하나의 우연하고 주관(주체)적인 사건에 근거하는 것 아닐런지요?

    알랭 바디우(Badiou)는 <사도 바울>이라는 책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리는 다마스쿠스에서 그가 겪었던 사건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그 사건은 환상일수 있고, 계시일 수 있고, 우연일 수 있고, 꿈 일 수도 있고, 도착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어떤 보편적(Universal) 교리와 선포와 강론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singularity) 어떤 환상, 믿음, 체험에 의해 고백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입니다. 그것이 사건이고 그 사건을 감행하는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바디우는 주장합니다. 그런 주체에 의해 혁명은 다시 상상되고 감행됩니다.


4.

    바울이 말하는 몸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통로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재산을 다 처분하고 산속으로 올라가 휴거가 올 때까지 세상과 등진 채 황홀경 속으로 빠져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금욕주의적 삶을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금욕적 삶은 인간의 욕망이 지닌 물신성을 경계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겠지만, 금욕주의적 삶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몸을 파괴하고, 특별히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타자에 대한 혐오의 매커니즘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몸도 파괴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여성에 대한 혐오, 동성애에 대한 혐오의 발동이 근본주의적인 금욕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고 금욕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우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과 종교적 영이 각각 분리된 따로국밥이 아닙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는 종교적인 삶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역시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는 특정한 공간에,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종교적 행위로써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과 더불어, 세상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얻으려고, 구원을 얻으려고, 해탈을 하고자 여러분의 일상을 떠나 어디론가 훌쩍 점프하여 고행하고 좌선하고 기도하면서 그것들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보내신 이곳, 바로 이 지저분하고 찌질하고 허접한 세상 밖 어디에도 우리가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 밖 어디에도 우리가 바라는 구원과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자는‘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풍조는 무엇일까요? 이 시대의 풍조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봅니다. 그것은 맘몬에 대한, 자본에 대한 숭배일 수도 있고, 생명에 대한 경시일 수도 있고, 소수자에 대한 집단적 폭력의 정당화일 수도 있고, 전쟁을 조장하는 군대귀신 일수도 있고, 세상 부정의와 불합리에 대한 냉소적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자는 이러한 이 시대의 풍조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가로지르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고 공동체입니다. 저는 한백교회가 그런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던 공동체이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5.

    한백이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을 때, 한국교회는 이미 고도성장의 궤도로 진입하여 무서운 속도로 배가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이미 무수한 교회의 샘플과 전통과 권위들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다시 교회를 세우고자 했을까요? 그토록 많은 교회 중에 교회 하나를 더 보태기 위해 한백이 태어나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분명 눈부시고 박수를 받을만한 성령의 역사였지만, 그 이면에는 말 못할 아쉬움 또한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불을 안 가리는 교회성장주의 일 수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의 패턴 일 수 있으며, 가부장적인 권위의식에 입각한 교회운영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 만큼 온갖 혐오의 인큐베이터 같은 곳이 또 어디있습니까? 빨갱이 혐오, 여성혐오, 동성애 혐오, 이슬람 혐오...등 온갖 혐오의 숙주가 자라고 있는 곳이 한국교회라고 한다면, 한국교회에 대한 무례한 평가일까요?

    한백은 이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방식과 율동으로 우리의 교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인가? 현존하는 교회질서와 세상의 법칙에 불화하는 힘으로서의 교회의 가치를 한백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지난 30년 동안 한백은 다양한 방식과 실험으로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대답해 왔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제도와 시스템을 흠모했고 그 길을 따라 걸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법 밖의 정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제도와 시스템 밖에 묻혀 있는 진리를 향해 뛰쳐나갈때 교회의 교회다움이 선포되는 것 아닐까요? 민중신학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 아래서 한백은 겁 없이 우리의 교회를 실험해왔습니다. 평신도 위주의 교회 운영방식, 하늘 뜻을 나누는 방식, 목회자와 장로의 임기제, 평등과 소통을 지향하는 예배를 위한 공간의 재구성, 예배의 곳곳을 매우는 한백의 노래와 고백,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시대에 맞게 복음을 재해석하는 신학적 작업 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한백性은 그런 가시적인 것보다는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한백을 언제든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한백의 신앙을 굳이 예수가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의 질문을 받고 성령을 설명하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 그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고 한 선문답과도 같은 발언과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백은 겉으로 보기에는 쿨하고 시크한 것 같지만, 한꺼풀 벗기면 솜털같이 섬세해서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도드라지는 한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백은‘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지만, 불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대지의 촉촉함와 대기의 훈훈함을 다 느끼는 바람입니다. 한백의 지난 30년은 남들처럼 급하게 어딘가를 향해 마구 불어갔던 바람이 아니라, 마지막 날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처럼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감싸는 허세와 권위와 위엄과 폭력에 눈치보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모아갔던 바람이었고, 그런 공동체였기에 지금까지 한백이라는 고유명사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해 주십시오. 지난 30년 동안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한백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그러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서 앞으로의 30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30년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30년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10월 22일 한백교회 30주년 기념예배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하였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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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교회 탐방기[각주:1]



박제우*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신 박성준 교수(성공회대)와 고 박영숙 전 민주당 최고위원의 남편이신 고 안병무 교수(한신대) 등이 주축이 되어 민중신학을 목회철학의 기초로 삼고 1987년 10월에 설립한 나눔과 섬김의 예배공동체 한백교회(한라산의 한과 백두산의 백)에서 예배를 드렸다.


   지난 5월 오늘교회에 탐방을 갔을 때 멤버 중의 한 분인 최규창 대표가 강력하게 추천했던 교회인데, 마침 지난 주일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신 김진호 목사님께서 새길교회에서 설교하신 덕에 미리 탐방하고 싶다고 말씀 드릴 수 있었고, 오늘 11시에 시작하는 주일예배를 함께 하게 되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2번 출구 사이에 있는 골목길로 한 50 m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엔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실이 있는 빌딩이 있고, 길 왼쪽 편엔 1층에 안병무홀이라고 쓰여 있는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는 걸 지난 8월 교회개혁실천운동 회원과의 티타임 때 알았는데, 아무래도 주차가 용이하진 않을 것 같아서 경의선 전철로 공덕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왔다.


   전철 시간 계산을 잘 못해서 일찍 도착하질 못하고 정확히 11시에 예배처소인 안병무홀에 도착하니 예배 때 함께 부를 노래를 미리 불러 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친절하게도 남자 성도 한 분이 바로 옆 자리로 오셔서 예배 순서 중에 어떻게 노래집과 주보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 지 간단하고 빠르게 안내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상철 목사님이셨다는...)


    한백교회의 trade mark에 해당하는 한라산의 검은 돌(좌측)과 백두산의 검은돌(오른쪽) 그리고 한반도 어느 지점에서 주워 온 아주 흔한 흰색 조약돌 두개가 그 사이에 담겨 있는 접시가 예배 인도자 뒷쪽 벽에 놓은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언젠가 부터는 노란 리본도 얹혀져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예배 인도를 맡은 자매님과 하늘뜻나누기(설교)를 해 주실 정나진 목사님, 그리고, 한백교회의 담임을 맡고 계신 이상철 목사님께서 자리 배치의 앞부분에 앉으셨다. 찬양인도를 해 주신 장로님과, 삶의 고백을 해 주신 분들은 목사님 맞은 편에 앉으셨다. 한백교회의 예배는 주보의 순서대로 진행이 되었는데, 평균 출석 예배자가 50명 안팎인 정도의 규모이다 보니 새길교회 처럼 매주 주보, 광고 사항, 예배 실황 등이 정기적으로 잘 update되지는 않았다. 특히 요즈음엔 창립 30주년 기념 활동들을 준비하느라 많이 분주한 것 같다. 오늘의 주보는 아래의 사진과 같고, 홈페이지에 올려진 가장 최근 주보는 9월3일자 주보였다.




    예배 중의 노래는 대부분 "한백의 노래"라는 자체 제작한 노래집에 있는 것을 불렀는데, 한백의 노래는 그동안 7차례 개정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교회 홈페이지 한백과 찬송에 게재되어 있다. 이제 청년들이 많아지고, 새롭게 증보하고 싶은 노래도 많이 있어서 조만간 몇 곡을 추가하는 증보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예배는 일전에 섬돌향린교회 예배 시에 보았던 울림주발(Singing Bowl)이 맑은 울림 소리를 내면서 시작되었다. 첫 순서인 묵상 후에 기도라는 노래를 기리는 노래로 함께 불렀다. 나는 (부끄럽지만) 처음 접한 노래라 함께 부르질 못하고 멜로디를 들어가며 가사를 읽었는데,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사랑과 신에게 간구함과 이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 노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검색을 해 보니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1집에 실린 노래이다. 가사는 김소월 시인의 싯구이고, 곡은 노찾사에서 지은 것 같다. 이런 좋은 글과 멜로디의 노래가 찬송가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민중가요를 부르던 노래패가 불렀다고 찬양이 아니고, 예배 때 부르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깔뱅이 시편찬송만 불렀듯이 지금도 시편찬송만 예배 중에 부르는 교회가 있듯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만들어진 이런 노래를 예배 찬송으로 부르는 교회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각각의 교회는 각자의 신앙고백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노래하고 예배하면 되는 것이리라.




    일반 교회에서는 교독문을 주로 읽는 순서에 한백교회에서는 마침 오늘이 추석 연휴에 있는 주일인 까닭에 (천상병 시인이 아마 1070년 가을에 지은 시인 것 같은데...) "소릉조 - 70년 추일에"라는 시를 교독하였다. 누가 이런 참 적절한 시를 찾아 내어서 선정하는 지 모르겠는데 역시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한백교회 다운 글 선택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소릉조(小陵調)> - 70년 추일에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시집 <새>(1971) -  


   이어서 삶의 고백 시간에는 최근예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시고, 많은 생각을 하시고 계신 형제님께서 정말 진실한 문체와 내용으로 자신의 삶을 함께 나누어 주셨다.


   일반 교회에서 설교라고 하는 "하늘뜻나누기"는 이번 주 중에 3년 간의 박사 논문 작성과 학위 취득을 목표로 다시 독일로 돌아가는 정나진 목사님이 고별 설교로 본인이 박사 학위 논문으로 준비하는 Autoethnogaphy(자아문화기술지)와 관련된 내용을 ['사건'으로서의 환대와 민중메시아]라는 제목으로 하였다. 최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해서 미리 모든 예배자에게 주보와 함께 배포된 설교문을 중심으로 최근 6개월간 탈북자 정착도우미로 섬겼던 사건과 창세기 31장 1~2절의 말씀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이 야곱에게 들렸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재산으로 저처럼 큰 부자가 되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펴보니, 자기를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을 기반으로 한 민중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환대 태도, 그 과정에서 직접 체험하는 당사자들과 민중의 상호 변화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셨다. 하늘뜻나누기 시간 후반부엔 정목사님의 발표에 대해 궁금한 점과 추가적인 토론을 하고 싶은 것들을 예배 참여자들이 함께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건 정말 여느 교회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새로운 시도이다. 이런 예배 순서를 언제부터 해 왔는 지는 모르겠지만 30년 된 교회에서 이런 순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설교 후에는 설교 중에 언급되었던 김민기 작곡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함께 불렀다. 유일하게 나도 익히 알고 불러 보았던 노래이다.


   이어서 물질을 드림(봉헌) 시간이 있었고, 예배 인도자인 자매가 드리는 기도를 했는데, 이 자매는 한백교회에서 오늘 처음 예배 섬김이로 봉사를 하게 된 것 같다. 자매님의 기도를 통해서 자매님이 새롭게 안착한 한백교회의 교회 공동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일면을 알 수 있었다. 의외로 많은 청년들이 함께 예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자매님도 이들과 함께 한백교회를 통해서 믿음과 세상 속에서의 삶 모두 하나님의 은혜 속에 나눔과 섬김의 삶을 더 활짝 펴며 살기를 기도한다.

   예배는 12시 45분이 넘어서야 한백신앙고백으로 공동체의 다짐을 하고, 마침 묵상을 한 후 마치게 되었다. 마침 묵상 후에 친교 마당 시간에 이상철 목사님께서 몇 가지 안내 말씀을 해 주시면서 나에게도 소개할 시간을 주셔서 짧게 내 소개와 교회 탐방을 하게 된 과정을 말씀 드렸고, 가능하다면 이후의 모임에도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후엔 기존 보수교회에서 40년 넘게 섬기시다가 40대 후반(그러니까 지금의 내 나이 대에...) 한백교회로 오신 후 지금은 한백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시는 오늘 예배 전에 찬양 인도를 해 주신 장로님의 도움을 받아 점심 식사(애찬)를 함께 하였다. 4개 조로 나눠진 성도들의 모임이 매주 돌아가면서 (즉, 한 달에 한 번 씩) 애찬 준비와 배식과 설거지를 섬긴다고 한다. 애찬 전에 아래 동영상과 같이 아주 재밌는 애찬 노래를 배설된 음식을 보면서 함께 불렀다. 그리고, 이번 주에 생일을 맞으신 여성도님을 축하하는 시간도 있었다.



   점심 식사 중엔 김진호 목사님께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주셔서 한백교회의 창립 때부터 자신이 담임목사로 섬기신 때부터 양미강 목사님과 지금의 이상철 목사님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백교회가 이사한 얘기, 계속 향린교회를 섬기신 박영숙 최고위원께서 정말 요리를 잘 하셨고 손이 크셔서 한백교회 식구들 전체에게 맛난 요리를 자주 해 주셨다는 얘기, 박성준 교수님과 안병무 교수님 모두 목사는 아니셨다는 얘기, 최근에 이상철 목사님께서 젊은이들과 소통을 잘 하시고 잘 챙겨 주셔서 한동대 출신 청년들과, 한신대 신학생들, 그리고 이런 저런 교육과 강연을 통해 한백교회를 접한 많은 청년들이 합류하면서 교회가 많이 젊어 지고 있다는 얘기 등을 해 주셨다.


   애찬을 얼추 마친 후엔 (좀 재미있게 표현해서 1부 예배, 2부 점심 식사에 이어) 3부 순서로 수다를 떨기 위해(주보 광고에는 장년부의 대화모임이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안병무 홀에서 약 200 m 정도 길 위로 올라가면 있는 "Caffe Cammello"로 시간 여유가 있는 교인들과 함께 갔다. 이 카페의 주인이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한백교회 분들을 좋게 보아 주셔서 매주 이렇게 장소를 편하게 쓸 수 있게 배려해 주신다고 한다.


   이 카페의 안쪽 방에서는 10월28일(토) 저녁 6시에 공연할 창립 30주년 기념 연극 준비팀이 대본 강독을 하고 있고, 내가 앉은 테이블에서는 2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의 청장년들 10여 명이 함께 앉아, 동성애, 외국인 노동자, 정나진 목사님의 설교 내용, 앞으로 펼쳐질 독일 생활, 한 자매님의 액티브한 유럽 1달 여행기, 한동대의 보수성과 개혁성 등 등 이야기 주제가 따로 정해진 것 없이 흘러가는 대로 참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다. 이상철 목사님으로부터는 주날개늘교회의 남오성 목사님을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에 서로 알고 지냈다는 반가운 얘기도 들었다. 시간은 어느새 5시가 넘어가고...


  헤어지기 전에 이상철 목사님과 찰칵!


오늘 애찬 시간부터 나를 살뜰하게 챙겨 주신 김진호 목사님과도 찰칵!



   한백교회는 10월에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몇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다른 모든 교회 활동과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담임목사나 누구의 강력한 인도나 요청이 없는데도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여러가지 활동들을 준비하고 있고, 그 중에 가장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것은 역시 10월마지막 토요일(10/28) 저녁 6시에 안병무홀에서 공연되는 연극인 것 같다. 50명 안팎의 출석 교인들의 절반 정도가 참여한다는데, 정말 기대가 된다.


   오늘 이목사님께서 10월22일(주일)에 있을 창립30주년 기념 감사예배나 28일(토요일)에 있을 연극 공연에 또 와 보라고 초청해 주셨는데, 정말 여건이 되는대로 한백교회를 궁금해하는 지체들과 함께 다시 와 보고 싶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이날 함께 하고 싶은 분은 02-364-6355로 문의전화 해 보시면 된다. (연결이 안되면 저에게 연락 주세요. 010-7180-9492) 오후 5시가 넘에 카페에서 헤어진 나는 원래 계획대로 작년에 못다녀본 안산의 남쪽 지역(경기대학교 쪽에서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을 산책할 목적으로 램블러 앱을 작동시킨 후 경기대 쪽에서 올라갔다가 추계예술대 쪽으로 내려오는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


    마지막으로... 인터넷에 한백교회를 검색해 보면, 기존 보수교단이나 번영신학에 물든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백교회의 정체성과 예배에 대해 깎아 내리는 글을 쓴 걸 많이 발견하게 된다. 참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생각이나 신앙관과는 다르다 정로만 써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많은 악담과 저주의 말을 다분히 왜곡된 정보와 판단을 기반으로 해서 써 놓은 걸 보면 내가 그들과 같은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참 부끄럽다. 부디, 한백교회의 정체성과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사랑을 위해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사는 한백교회 공동체를 존중하고, 폭 넓은 신앙의 모습에 대해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갖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요수엘(박제우)의 블로그에 실린 글 '한백교회 탐방기'를 편집하여 옮겼습니다. http://yosuel.tistory.com/71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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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7.10.12 09:3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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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서 한백교회를 검색하면 온갖 음해성 기사들로 넘쳐난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 퀘이커교도인 박성준이 세운 교회, 민중신학의 괴수 안병무가 실세인 교회, 온갖 운동판의 배후들이 득실거리는 교회, 한라산의 돌과 백두산의 돌을 섬기는 교회, 심지어 지난번 박근혜 탄핵 주문을 낭독한 이정미 재판관이 다니는 교회, 작년 박근혜 탄핵 정국당시 검찰 내부 게시판에 박근혜 구속을 주장했던 이00 검사가 다니는 교회, 비전향 장기수 빨갱이들을 지원하는 교회 등...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웃기기도하고 슬프기도 한 한백을 둘러싼 유령과도 같은 루머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한백교회 담임목사로 3년차를 보내고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 위에서 언급한 한백을 둘러싼 유령들의 실체를 접한 적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백을 향한 정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음해성 보도들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교인들은 나보다 익숙하고 대범하고 내공이 세서 그런지 “목사님, 차차 적응되실 거예요”라고 하면서 내 어깨를 다독인다. 한백교회에는 거의 매주 교인이 아닌 낯선 분들이 예배에 참여해 섞여 있다. 일부러, 우연히, 지나가다, 계획하여, 소문(?)을 들어, 교수님들이 한번 탐방하라고 하여, 오늘 갈 교회가 없어서...이유도 각양각색이다. 기윤실에 계시는 박제우 선생님도 그 중 한분이셨다. 종종 한백교회가 어떤교회인지 알려달라는 주문을 받는데 그런 분들에게 이 기사를 토스해주면 되겠다 싶다. 귀한 기고 감사합니다.
  2. 최재훈
    2017.10.25 18: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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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말씀처럼 저도 소문(?)을 듣고 8월의 어느 비오는날 찾아간 낯선(?) 사람입니다..^^ 감사하게 잘 예배드렸습니다. 다시 한국들어갈때 또 찾아가겠습니다


호모 포비아, 그 오역과 치욕의 역사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동성애 광풍이 한국교회를 뒤덮다


    올 여름 한국개신교계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지난 6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이단대책위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에게 ‘이단사상 조사연구에 대한 자료요청의 건’이라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7월 20일 한국교회 8개 교단 이단대책위원장 연석회의는 ‘퀴어신학'을 내세우며 동성애를 감싸는 임보라 목사가 이단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8월8일 기장 ‘교회와 사회위원회’에서 반박성명을 발표하면서 퀴어신학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중세시대나 있을 법한 보수개신교단들의 임보라 목사에 대한 여론 몰이식 ‘마녀사냥’이 21세기 한국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난 주간에 열렸던 대부분의 교단 총회에서 동성애 이슈는 예상한 대로 가장 센세이션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국 최대교단인 장로교를 양분하는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의 목소리는 동일했다. 분열되었던 장로교가 동성애 문제로 다시 하나로 뭉칠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예장통합의 결정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은 교역자는 물론 교회 중직(장로, 집사)자가 될 수 없을뿐 아니라, 신학생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진보적인 교단인 기장은 총회 마지막날(9월 22일) ‘성소수자인 목회를 위한 연구위원회 구성과 활동 헌의’의 건이 올라왔다. 이 안건은 찬성 159와 반대 90표로 기각이 결의되었으나, 총대 총수가 682명이며 과반수는 341명이다. 그러므로 찬성표 159는 341명의 과반수를 충족하지 못하고 미달인 것이다. 성소수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거나 세례를 주거나 교인으로 정식으로 인정하자는 헌의안도 아니었다. 교단차원에서 성소수자인 목회를 위해 공부를 해보자는 모임도 만들 수 없는 분위기인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라 자부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자들 조차 동성애 문제를 피해가려는 경향이 역력하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남한 땅에서 개신교의 권위와 종교성이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지는 오래된 사실이다. 특별히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고, 다름을 배제와 제거의 메커니즘으로 삼는 능력에 있어서 한국의 극우적 개신교도가 보이는 강도와 민첩성은 강하고도 빠르다. 빨갱이 혐오, 외국인 혐오, 여성 혐오, 이슬람 혐오, 그리고 동성애 혐오까지. 한국 사회를 휩쓰는 온갖 종류의 혐오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한국의 대형 극우 보수개신교회들이 있다. 사랑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에서는 혐오와 적대의 종교가 되었나?


아니, 그들은 원래 그랬다


   해방 후 한국개신교는 빨갱이 혐오의 메카였다.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월남한 개신교도들이 자신들과 정치적 입장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단에 앞장섰던 기억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개신교는 나름의 체제정비와 내부 결속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외부의 적을 상정하면서 자신들의 균열과 부조리를 감추고, 희생양을 선정해 제거함으로 내부의 문제를 일단락짓는 극우적인 한국 개신교의 문법은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남북한 사이 이데올로기 대결과 군사정부의 개발독재와 맞물리면서 개인구원과 축복일변도의 신앙으로 고착화되었다.

    지난 20세기에 자행되었던 빨갱이 혐오와 종북 몰이가 한국개신교의 정체성의 정치를 위한 토대였다면, 동성애 혐오는 가히 21세기 한국형 종교재판, 혹은 마녀사냥이라 부를만하다. 중세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 정점에 달했던 마녀사냥의 열풍이 한국교회의 위기가 선언되는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나타났던 고전적 방식의 체제유지법, 혹은 위기타개법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개신교는 자신들의 부도덕과 부패로 자초된 교회의 위기를 타파하고자 동성애 혐오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또한 그 동력으로 이탈하고 있는 신도들을 다시 결집시키고자 한다. 마치 십자군 원정의 패배와 페스트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전 유럽을 휩쓸 무렵, 흔들리는 교회의 권위와 위상을 회복시키고자 마녀사냥을 통해 체제의 위기를 수습하려 했던 중세교회의 발악처럼 말이다.‘마녀사냥’식 동성애혐오는 쇠락하는 한국 보수 개신교의 위기감와 초조감이 드러난 성급하고 서투른 결정이라 볼 수 있다.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서는 정말 그들의 주장처럼 동성애를 혐오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다. 만약 성서의 일부 구절들이 동성애 혐오를 위한 각주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성서를 모독하는 후안무치한 사람들이고, 성서의 하나님이 동성애를 벌하는 신이라고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들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성서는 동성애를 혐오하기 위해 쓰여진 책도 아니고, 일부 보수적 개신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를 벌하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크리스챤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예수가 걸어갔던 삶을 기억하면서 예수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항상 본인에게 다가오는 실존에서의 선택과 갈등, 그리고 행위의 순간마다‘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를 물어야한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일부 한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에게 나는 이 질문을 되돌려 들려주고 싶다: “예수라면 과연 성소수자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동성애를 저주하는데 동원되는 성서의 구절은 대략 손으로 꼽는다. 창세기 19장(소돔과 고모라), 레위기 18:22, 레위기 20:13, 로마서 1:27, 고린도전서 6:9~10, 디모데전서 1:10, 히브리서 13:4 등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성애 혐오를 주장하는 데 끌고 들어오는 성서구절 중 예수의 입에서 나온 것은 한 구절도 없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하는 사실은 성서에는 게이에 대한 언급은 등장하나 레즈비언, 양성애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는 성서가 쓰여지고 편집되던 시대가 가부장제적인 시절이었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서무오설, 즉 문자적으로 쓰여진 성서의 기록만을 맹신하는 사람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서에는 레즈비언, 양성애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적혀 있지 않으니 그것은 괜찮은 것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문자적으로 성서를 믿는 그들은 뭐라 답을 할까.

    텍스트를 근거로 어떤 대상을 논하고 반박할 때 텍스트에 적혀있는 문자와 내용에 대한 공부는 필수적이다. 그 다음 텍스트가 구성되고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와 해석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텍스트 안에 있는 다양한 결을 살피고 성찰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텍스트를 대면하는 자세이고 원칙이다. 텍스트는 학과의 교재일 수 있고,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소설이나 시집일 수 있고, 내가 만나고 있는 애인일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일 수 있다. 성서는 인류의 소중한 텍스트이다. 텍스트인 성서에 적혀있다는 동성애 관련 구절 몇 개를 끌어와 일방적으로 교회의 동성애 혐오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보수적 그리스도교인들의 행태는 텍스트 읽기와 해석의 원칙조차 모르는 천박하고 후진 한국교회이 민낯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고, 성서에 기록된 동성애 관련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동성애를 둘러싼 성서의 정황들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성애를 반대할 때 인용되는 성서의 구절은 여섯 곳이다(창19:1-11; 레18:22, 20:13; 롬1;18-32; 고전6:9, 딤전1:8-11). 구약에 세 곳, 신약에 세 곳이 나온다. 1) 창세기 19장은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이고, 2) 레위기 18장은 성관계에 대한 규례가 적혀있는 장인데, 그중에서 18:22절에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라고 적혀있다. 3) 레위기 20장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들의 항목이 나열되는데 그 중 20:13에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면 ... 사형에 처한다”라고 쓰여있다.

    남성 동성애와 비슷한 급들의 죄의 항목들이 레위기에는 적혀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상을 섬기는 것(지금으로 따지면 자본을 섬기는 것), 근친상간을 하는 것, 불륜을 저지르는 것,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것,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이나 마법을 쓰는 사람(레20:27)도 이 항목에 들어간다. 즉 남성끼리 동침하는 것에 특별한 강조가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쏟는 것(우상을 섬기는 것), 정의가 실현되고 있지 않는 현실을 외면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와 형벌이 더 자주 빈번하게 강조되면서 등장한다.

    이러한 경향은 신약성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동성애에 대한 발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신약성서에서 동성애를 둘러싼 발언은 바울서신에 딱 세 번 나온다. 신약성서의 동성애 발언 역시 구약성서와 같은 맥락이다. 동성애가 그 수많은 죄악들 중에 one of them이라는 것이다. 4) 롬1;18-32 사람이 짓는 갖가지 죄들 중에 하나로 동성애가 나온다. 그 죄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한 사람,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한 사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 불손한 사람, 오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꾸미는 묘략꾼,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신의가 없는자, 무정한 자, 부자비한 자 ... 그리고 욕정에 불타는 자인데, 그 욕정에 불타는 자에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5) 고전6:9 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 구절이다. 음행을 하는 사람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 간음을 하는 사람들, 도둑질을 하는 사람, 탐욕을 부리는 사람, 술 취하는 사람, 남을 중상하는 사람,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과 더불어 동성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등장한다. 6) 딤전1:8-11 율법을 어기는 사람을 분류하는 장면인데,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 경건하지 않는 자, 죄인과 거룩하지 않을 자,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와,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같은 라인에 남색하는 자를 두고 있다.

   당신이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한다면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인간들을 마찬가지로 비난해야 한다. 당신이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한다면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탐욕을 부리고, 술 취하고, 남을 중상하고,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맹렬하게 비난해야 한다. 당신이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한다면 오만하고, 비겁하고, 신의 없고, 시기와 분쟁과 미움으로 가득 찬 인간들 모두를 똑같이 비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우리는 동성애만을 부각시켜 모든 악행의 끝판왕 인양 거품을 물고 짖어대는 것일까? 한국의 모든 수구적 근본주의 세력들이 자기들의 허물과 죄악을 다 털어 동성애 포비아에 덮어씌워 번제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호모포비아의 자리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기독교 역사에서 정당화되어 왔다. 첫째, 동성애자는 ‘창조의 법칙’을 거스르는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정상 Vs.비정상’이란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며,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상 Vs.비정상’의 범주들은 많은 경우 한 사회에서 ‘권력’을 지닌 주류 집단들에 의하여 결정되곤 한다. 만약 불변의 ‘정상-비정상’있다면 그것은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존중이이야말로 ‘절대적 정상’이며, 반대로 그들에 대한 ‘혐오’야 말로 ‘절대적 비정상’ 아닐런지?

    둘째, 도덕적 순결에 대한 유지와 강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동성애 혐오는 요청되어 졌다. 역사적으로 ‘순결주의’ 논리는 인종학살의 도구로 심심치 않게 사용되었다. 나치의 유대인과 동성애자들에 대한 말살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내내 지속되었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도 마찬가지다. 나치가 동성애자들에 대한 말살정책을 펼 때 등장한 것이 ‘도덕적 순결성’과 ‘기독교정신’이었고, 그 구호 아래 동성애자들로 의심되는 독일남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여 사살하거나 가스실에서 죽였다. 표면적으로는 ‘도덕적 순결성’강화가 동성애 혐오의 근거였으나, 실질적으로 동성애 혐오는 ‘인종적 번식’의 측면에서 다루어진 측면이 강하다. 독일인 게이들을 향해서는 독일의‘출산 잠재성’을 감소시키는 ‘인종적 위험’으로 간주한 반면, 레즈비언들이나 비독일인 게이들은 박해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말이다.

    기독교 근본주의 전통에서 작동하는 창조보존의 법칙과 순결주의는 어처구니 없는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어딘가 오리지널한 원본과 원형이 있으며 그것들은 훼손되지 않게 잘 보존되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incarnation) 했다는 것 자체가 순수하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신의 원형에 불순물을 주입하고, 흠집을 내고, 틈과 균열을 조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오히려 당신의 완정성과 순수성과 순결성을 세상에 내어주고 훼손함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증언하는 정직한 신에 대한 고백 아닐까?

    나는 성서에 나오는 정결한 것, 부정한 것이라는 말 대신 다수자, 소수자라는 말로 그것들을 대체하고 싶다. 성서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인권과 평등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꿈꾼다. 도덕적 순결성, 관습과 전통,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다수에 의한 소수를 향한 혐오와 폭력은 그래서 성서적으로 죄이다. 성서가 지니는 해방적 전통이 작동되는 지점은 차이가 차별이 되어 왜곡과 폭력과 불평등이 정당화 되는 그곳이다. 성의 차이, 인종차이, 계급의 차이, 종교의 차이, 부의 차이, 학력의 차이, 지역의 차이...등 온갖 차이와 다름으로 인한 적대와 차별이 이루어지는 그곳을 향해 변혁적인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달려왔다. 동성애혐오에 대한 저항은 이러한 성서가 지닌 해방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맨끝, 즉 화살촉과 같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을 둘러싼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Are You Ready?


ⓒ 웹진 <제3시대>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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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7.09.28 09: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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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한신학보 547호(2017년 9월 1일), 548호(9월 25일)에 게재된 <소통관에서 온 편지> “너희가 그들을 아느냐? : 한국보수개신교의 성소수자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독설”을 웹진에 맞게 수정했음을 밝힙니다.
  2. 주안
    2017.10.05 09:3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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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꼭 집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특히 <동성애를 둘러싼 성서의 정황들>은 성서를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본인들의 "허물과 죄악을 다 털어 동성애 포비아에 덮어 씌워 번제를 드리고 있는" 현상은 한국 밖의 기독교 세계에서도 보여집니다.
    주위의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평소에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들도 동성애가 "창조의 법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더군요. 창조의 법칙에 가장 근본이 된다는 '남녀간의 결혼'을 통한 '가정'이란 것이 깨진다는 두려움이지요.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을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호모 후마니타스(Homo-Humanitas)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인문학 위기의 요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유학 10년을 마치고 돌아온 고국은 놀라우리만큼 변해 있었다. 우선 표면적으로 정권이 바뀐 것이 가장 큰 낯섦이었다. 미국으로 갈 때는 노무현 정권이었는데 돌아와보니 이명박을 거쳐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보수정권이 연거푸 집권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정권들 아래에서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본고장인 미국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착실하게 신자유주의를 이행하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장 같았다. 구조조정이 상식이 되어버렸고, 계약직과 비정규직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갑/을 관계의 냉엄함과 잔혹함은 하늘을 찌른다. 연일 신문지상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민중들의 비관 자살보도가 넘쳐나고, 20.30대들 사이에서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세대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10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하게 발견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이다.

   “무한경쟁”, “누구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마누라와 자식들 빼고는 다 바꿔라”... 이상은 신자유주의가 휘몰아치던 1990년대 광고카피들이었다. 무한경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기억되지 않는 2등을 면하기 위하여,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을 했다.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체험하면서 나는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파토스와 인문학 사이에 모종의 결탁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와 질서 속으로 인문학이 녹아들어 가면서 신자유주의화 된 인문학, 신자유주의를 위해 봉사하고 협력하는 인문학이 한국 땅에서 돌연변이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문학이 신자유주의 이론을 축조하고 견고하게 하는데 일조했다는 말이 아니다. 인문학이 신자유주의 논리를 학습하고 내재화했다는 말이다. 실례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인문학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논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문학의 위상이 막강하다. 각종 인문학 프로젝트들과 인문학 강좌들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서점을 둘러보면 온통 제목에 인문학字 붙은 책들이다. 10년 동안 국외자의 입장에 있다가 내부자의 시선으로 이런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흥미로왔다. 그간에 고양된 한국인들의 인문학을 대하는 자세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불편해지더니 요즘은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이 모욕적이고 심지어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일까.


스펙(Spec) 우선주의


   지금까지 살펴본 바, 현재 진행 중인 인문학열풍은 한국인들에게 잠재해 있는 두 가지 욕망과 모종의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하나는 스팩(Spec) 우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힐링(Healing) 지상주의다.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인문고전 독서법』, 『동서양 천재들의 사색공부법』,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CEO가 읽는 인문학』 같은 제목의 책들이 인문학 관련 서적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높은 순위에 등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인문학 풍토에서 스펙 우선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부가가치가 높고 효율적인 스팩을 쌓은 사람을 신자유주의형 인간이라고 했을 때, 인문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최적화된 인간을 양성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지닌 불패의 정신으로 무장된 주체를 이 시대로 다시 소환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와 더불어 등장한 21세기형 주체는 너무나도 무력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액체근대’[각주:1]를 패러디하여 21세기 신자유주의형 인간을 ‘액체화된 주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시대 우리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 공동체, 대의, 국가, 체제 등과 같은 굳건했던 숭고함들은 전 지구적으로 몰아닥친 자본의 열풍에 녹아내려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바우만의 ‘액체화된 근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이후 변화된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액체화된 시대 속에서 강철과도 같은 의지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무장된 근대적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액체화된 시대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전과 같은 공동체 의식 혹은 투철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삶의 무게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 되었고, 그것에 대한 결과 역시 오롯이 개인의 책임이다. 우주와 세상 앞에서 개인은 홀로 이 모든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그런 개인인 내가 우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런 개인인 내가 세상을 지배하는 0.1%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잘 나가는 CEO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인문학은 더 이상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묻지 않는다. 전체 안에 깃들어 있는 부조리의 문제를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문제로 치환시키거나, 젊은 시절 감내해야만 하는 통과의례적인 과정 혹은 개인의 자기계발의 문제로 전환시키면서, 시스템의 균열과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만든다. 대신에 아프니까 청춘이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다, 라는 말로 우리를 우롱하고, 아직 2%가 부족하다, 열심히 살다보면 내일의 태양의 뜰테니 ... 그러니 열심히 뺑이쳐라. 그러면 대박 날지도 모른다, 라는 말로 희망을 고문한다. 이것이 오늘의 인문학이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속삭임이고, 그러면서 인문학은 시장의 언어가 되었다.


힐링(Healing) 지상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말하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균형, 신앙과 이성 사이의 긴장, 믿음과 논리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 말이라 하겠다. 바르트의 말을 빌어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풍자하자면, 현재 한국인의 손에는 한 쪽에는 Spec, 다른 한 손에는 Healing 관련 서적이 쥐여져 있다. 아침 출근길에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쟁취하고 다시 도전하고 마침내 승리한다는 내용의 책을 읽고, 저녁 퇴근길에는 상처받고 좌절당한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힐링 관련 서적을 읽는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풍속의 단상이라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앞서 언급했던 Spec 우선순위와 더불어 한국 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을 담당하고 있는 또 하나의 축은 Healing 지상주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상처극복 시리즈, 분노와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둘러싼 내면 강화시리즈, 희망과 행복을 상상하고 꿈꾸게 하는 환타지 같은 성격의 책들이 대표적인 힐링 관련 서적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한국인들은 Healing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한국의 힐링 열풍은 지나친 과잉이다. 어쩌다 우리사회가 힐링을 갈망하고 욕망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물론, 한국사회 전체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 아프고, 1등이 못되어서 좌절하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아 아프고,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에서 실업자로 추락하는 바람에 우리는 아프다. 그래서 모든 감기 증상들을 단번에 달려버리는 종합 감기약처럼, 우리 역시 모든 슬픔을 모아 단번에 달려버리는 종합처방전이 필요하다. 그것이 힐링지상주의의 요체라 한다면 너무나 과문한 진단일까.

    연대하는 공동체, 굳건한 이데올로기가 녹아내려 액체로 화한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액체로 된 세상 속에서 홀로 외로이 유영하면서 자기경영에 매진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허락한 문법이고 그곳의 개인은 한번 몰락하면 재기 불가능하다. 존재 전체를 걸고 전력투구를 해야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은 항상 불안과 공황과 우울의 상황과 직면해 있다. 힐링은 대타자 신자유주의의 추하고 타락한 몰골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려는 체제의 전략이고, 또한 그것은 자본의 문제를 저격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자본이 저지른 만행을 최대한 감추고 그것을 한 개인의 몫으로 전가시키려는 신자유주의가 고안한 간교한 계략이다.

    이것은 마치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교통사고로 인해 응급외상센터로 후송된 중환자에게 외상(外傷)은 크지 않아 네 마음이 그것을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 문제야, 라고 속삭이면서 몰핀을 계속 투여한다면 환자는 어떻게 될까. 여기서 교통사고를 신자유주의로, 환자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민으로, 몰핀을 힐링담론으로 치환하면 정확한 우리의 현실이 된다. 힐링은 쌓이고 쌓인 자본의 문제를 개인 내면의 문제로 변질시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술책이다. 힐링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숭고하고 따뜻했던 의도와는 별개로 신자유주의 시대 힐링 열풍의 이면에는 이러한 음모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인문학의 기원, 혹은 전통


   그렇다면 우리는 스팩과 힐링에 갇혀버린 인문학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 대한 답을 르네상스시대에 부활한 인문정신을 복기하면서 찾고자 한다. 십자군 원정의 패배와 패스트의 창궐로 인해 중세유럽을 지배했던 교회의 권력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고,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에 대한 요청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신과 교회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성에 대한 재발견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두되면서 유럽은 중세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 근대를 향한 발돋움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발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동서무역로가 확보되면서 지중해무역권이 형성되었고 그 통로에 위치했던 이탈리아의 도시들, 예를 들면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도시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특히 동로마제국이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이어받았던 동로마의 학자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유입되었고, 동서문화가 다시 한번 대융합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고대 그리스 고전에 대한 복기가 시작되었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로마시대의 자유학문(liberal arts)을 복원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필요를 수용하면서 새롭게 학문체계를 재구성하였다. 중세 대학은 고대 로마의 9 자유학문(문법, 수사학,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론, 의학, 건축학)에서 의학과 건축을 제외한 7과목을 삼학(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사학(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으로 구성하였다.[각주:2] 이러한 학문분류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로 상징되는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studia humanitatis(인문학)라는 이름 아래 재편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논리학이 위축되었고 수사학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역사학, 시학, 윤리학, 정치학 같은 학문들이 새롭게 부상하였으며 라틴어와 헬라어 원전에 대한 독해가 요구되어졌다.

    이 대목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다. 르네상스의 모토로 알려진 ‘고전으로의 복귀’가 미래를 향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전통(경험)으로 돌아가다는 복고주의가 아닌가, 라는 의혹이 그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의 생각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고대의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여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 신화적 이야기를 현재를 위한 창조적 상상의 원천으로 소급하기 위해서 르네상스는‘고전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것이다. 변화된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시대는 요청하였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변화의 동력을 고대 그리스로의 복귀를 통해 탐색하였던 셈이다.

    이는 인문학의 위기론 속에서 인문학의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선사한다. 인문학이 스팩과 힐링, 즉 현실정복과 현실도피의 도구로 전락한 한국사회에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충고는 인문학이란 상상력과 관계한다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매몰과 현실에 대한 적응에 목적을 두는 인문학이 아니라, 현실과의 거리두기, 현실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통해 현실에 대한 변혁을 꿈꿨던 사람들이 르네상스 시절 휴머니스트들이었고, 그들로 인해 유럽은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인문(人文), 인간의 무늬


    이 글은 스팩과 힐링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인문학 풍속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다. 천문(天文)이 ‘하늘의 무늬’이고, 인문(人文)을 ‘인간의 무늬’라고 할 때[각주:3],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배려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스팩 강화와 자아의 상처 극복을 테마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동시대 한국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욕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에 마냥 호의적일 수는 없다.

    인문을 인간들이 이루는 무늬라고 했을 때, 인문학은 그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이 된다. 무늬를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전체를 봐야 무늬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리므로 ‘인간의 무늬’라는 말 안에는 인간은 복잡다단하여서 두부모를 자르듯 인간에 대해 재단할 수 없다, 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인간을 쉽게 판단할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인문학은 사회 속에서 쉽게 환호 받으며 유통되고 소비되다 폐기되는 개념과 풍조에 대해 어김없이 삐딱한 태도로 회의하고 그것을 응시하면서 넌 누구니, 넌 어디서 왔니, 라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볼 때 현재 한국사회에서 스팩과 힐링으로 포장되어 열렬히 환호받으며 유통되는 인문학 풍속도는 인문학적으로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된다. 모든 사안과 문제 앞에 인문학이란 단어가 차고 넘치지만 실상은 인문학적 태도가 전무한 한국의 인문학 열풍, 그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문정신은 없다. 비행기 타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볼 때 보이는 빨간 십자가의 풍년이 오히려 한국 개신교의 타락과 부패를 상징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의 인문학 열풍 또한 그런 처지로 타락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사회가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그러다가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울분을 품고 살다 고공농성을 할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하면 안 된다. 대한민국 사회가 인문학, 즉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중시하는 열풍에 빠져있었다면 어린 학생들이 물에 빠져 죽어간 세월호에 사건에 대해 그리 무능한 대처와 무책임한 행보를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 땅의 학부모들이 진정 인문학적이라면 인문학적 상상력 대신 점수따기식 학습과 수량화된 현재 학생 평가 시스템 안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밀어넣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무늬를 존중하는 인문학은 인간 현존 하나하나의 삶과 호흡에 관여하고 그 아우성과 몸짓에 일일이 반응하면서 최대한 성심껏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공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인문학이다


    결론적으로 인문학이란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강박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나의 아픔을 치유받을 수 있을까를 둘러싼 집착도 아니다. 오히려,“세상이 이렇게 불합리 한데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이것은 죄악이 아닐까?”를 묻는 것이 인문학이고, 타인의 불행과 나의 행복사이에 있는 함수와 변수를 계산하여 내 행복의 정체를 의심하고 타인의 불행에 대해 면목없어해 하는 마음이 인문학이다. 물론, 인문학은 나의 아레테를 발견하고 계발하여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는 긍정의 정신이고, 고통과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것으로 인한 상처로 부터의 회복을 바라는 희망의 변증법을 포함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인문학적 의제는 우리시대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함께 힘을 모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비참과 탄식을 극복할 방도를 모색하는 비판의 정신이어야 맞다. 그 마음으로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불편한 진실과 타협하지 말고 우리 시대 가장 비천한 이들과의 연대에 동참하는 것, 우리사회 속에서 잊혀지고 가려지는 진실들을 외면하지 않고 들춰내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진정한 우리의 스팩이고, 그 순간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힐링을 맛보게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액체근대』 (서울: 강, 2009). [본문으로]
  2. 서보명 지음, 『대학의 몰락』 (서울: 동연, 2011). 65-81 [본문으로]
  3. 『周易』 「賁卦」. “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_ 천문을 살펴서 시간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문을 살펴서 천하를 화성한다.”- 이승환,“동양의 학문과 인문정신”, 『인문정신과 인문학』(한국학술협의회 편, 아카넷, 2007), 29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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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퀀스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2016년 가을,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논단이 불러온 파국의 정치는 한국사회를 급속도로 촛불정국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하였다. 2016년 10월 29일(토) 1차 촛불집회부터 2017년 4월 29일(토) 23차 마지막 촛불집회까지 1600만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광장에 참여하였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2016년 12월 9일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인용처리 하였다. 그로부터 2개월 후 2017년 5월9일에 치루어진 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도 현 정부를 촛불집회로 이룬 혁명의 정부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보면 촛불은 새로운 정치적 해석과 상상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촛불의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촛불정국이 일단락이 된 현 상황에서 촛불이 지닌 의미를 다시한번 복기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고, 그 과정에서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정치적 상상과 윤리적 결단의 지점을 역으로 추적해 보는 기회가 된다면 글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다.


1. 촛불, 비정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


   현대국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비정상이다.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된 국가 권력 아래서 국민 개개인이 지니는 차이는 선거를 통해 결정된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고 무시된다. 서로 다른 개인과 우리는 국민이라는 집합명사 안에서 하나가 된다. 차이가 국가권력이라는 동일성 안으로 스며드는 밀도가 현대의 민주주의는 고.중세의 봉건제 보다 오히려 세고 견고하다. 이런 이유로 대의제 민주주의를‘동일성의 정치(Politcs of Identity)’라 부른다. 일찍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그들이 공저한 『계몽의 변증법』에서“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동일성에 의해 지배받는 사회”[각주:1]라 지적하면서, 이를 가능하게 했던 근대적 (도구적)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이성은 스스로를 보편적 주체로 서게 함과 동시에...이성은 자기 보존을 위해 세계를 제어하는 계산적인 측면도 갖는다.”[각주:2] 근대성이 지닌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꼬집는 날카로운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정치적 보편주의로 자리매김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근대성의 대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동일성에 기초한다. 동일성의 정치는 모든 국민에게 한 표가 있다는 평등성,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는 원칙성, 그리고 소수인 우리가 내일의 다수가 되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낙관성을 축으로 작동하는 환상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현실의 민주주의에서 평등성은 형식상의 평등성이고, 다수가 지니는 정당성은 한국 국정원 댓글 조작사건에서 보듯이 모략과 음모의 결과물이며, 내일 태양이 뜬다는 희망과 가능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인민들에게는 절대로 실현되지 않는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서구 시민사회의 발전은 대의제 민주제의 등장과 그로 인해 등장한 문제점을 치유해나갔던 역사였다. 서구의 경우와 다르게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았다. 촛불이 요구했던 것은 이런 비정상적인 민주주의의 정상화였다. 물론, 촛불의 요구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실현 불가능한 요구였다. 국가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과 그들의 출몰로부터 야기되는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원치 않는다. 어쩌면 국가는 기득권세력의 부와 권력의 유지를 보장하는 기능과 새로운 질서의 등장을 억제하는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민주주의가 지녔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직접적인 시민 민주주의를 외쳤던 것이 촛불이다. 촛불은 대의에 묻혀왔던 개개인의 목소리와 색깔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국가에 의해 정리되고 관리되고 배제되어 왔던 개별자들을 셈하여 줄 것을 국가에 당당히 요청했던 사건이 촛불이었다는 말이다.

    문득 지난 촛불집회 기간 중 불렀던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이 말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권력을 강조하는 말이겠지만, 한편으로 문장의 주어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대한민국에게 잃어버린 민주와 공화를 찾아 돌려주자는 것이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 모든 사회 구성원들끼리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 서로 조화를 이루는 대한민국을 되찾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의 대의였다.


2.  촛불,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


    매주 토요일마다 23차례에 걸쳐 1600만명이 넘는 시민을 광장으로 모이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촛불은 과거 정치적이지 않았던 일상들이 정치의 모습으로 소환된 사건이었다. 일상의 정치화가 진행되었기에 촛불은 계속 광장에서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었다. 중고등학생 연합이 자기네들끼리 목소리를 내면서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그들의 언어로 시국에 대해 발언하고,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촛불현장에서 벌어지는 가부장제적인 현상을 비판한다. 광장으로 유모차를 대거 끌고 나오는가 하면, 시민들은 각자의 기억 속 인물들을 불러내서 광장에서 만났다.

    광장에는 수없이 많은 깃발들이 휘날렸는데 과거와 같이 웅장한 거대서사의 메시지가 깃발에 적혀있지는 않았다. 소소한 개인들의 치기와 풍자가 어린 작품들이 깃발의 형태로 전시된 케이스라고 해야 옳다. 장수하늘소 연구소, 91학번 별 보이는 모임, 끝나고 치맥한잔 등 소소한 일상들이 깃발로 등장하면서 촛불 광장은 예전의 피끓는 투쟁, 강철같은 투쟁을 연호하며 치열하게 싸웠던 전선이 아니라, 일종의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무대이자 마당이되었다. 과거 1980년대식 운동권 투쟁방식에 익숙해 있던 필자로서는 분명 촛불은 낯선 풍경이었다. 10년(2004~2014) 동안 유학을 핑계로 한국을 비웠던 지라 그동안 한국사회의 변화상을 내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구나, 라는 자조 섞인 탄식도 내안에서는 분출하였다.

    시위의 풍경이 예전과 달랐다는 점은 지도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누가 23차례 집회를 주도하는지, 누가 1600만명을 조직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혹 누군가 과거처럼 큰 목소리로 가열차게 선동적으로 구호를 외치거나 자극적인 발언을 남발하면 광장의 촛불은 그들을 외면하였다. 연차를 거듭하면서 촛불집회가 청와대 인근까지만 행진하고 돌아가는 무력한 시위로 전락하지 않을까, 라는 위기감이 잠시 돌았다. 그래서 비폭력적인 집회방식에 대한 논쟁이 잠시 있었다. 청와대까지 진출해야하고 청와대를 넘어야 되는 것 아닌가, 라는 문제제기 말이다. 그 말은 경찰과의 대치와 폭력까지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익숙한 변증법적 논리학의 문법, 양적 축적에 따른 질적 승화의 단계가 무르익었고 지금이 바로 행동을 해야하는 그때이다, 라는 주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2016~17 촛불광장에서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았다. 촛불은 과거와 같은 방식의 정세분석과 인정투쟁을 허락하지 않았다.

    촛불광장은 이념적인 구호를 외치면서 거대한 대의를 실천하는 슈퍼에고(Super ego)의 집결지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각각의 개인들이 그동안 상실했던 본인들의 쾌락을 찾아 몰려드는 이드(Id)의 각축장이었다. 광장으로 몰려든 개인들은 자신들과 소통하지 않는 권위적인 정부에 대해, 자기들을 집합명사 취급하면서 관리하고 제어하려 했던 정부를 향해 난장을 피웠던 것이다. 그러면서 신화화 되어있고 이데올로기화 되어있었던 제도로서의 정치는 깨어졌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일상이 정치의 역역으로 출현하였다. 촛불은 이렇듯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라는 새로운 환타지를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3. 촛불, 법 밖의 정의를 향하다


   비정상적인 민주주의를 고발하고,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를 실현시켰던 촛불이 최종적으로 겨냥한 목표점은 정의로운 대한민국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서 정의란 법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경제적으로는 뿌리깊은 정경유착이, 사회적으로는 세월호에 대한 은폐와 조작이, 문화적으로는 블랙리스트 작성으로 대변되는 획일주의와 검열이 한국사회를 지배하였다. 그 안에 정의는 없었다. 정의는“법 밖의 정의”[각주:3]다. 촛불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 법 밖에 위치했던 정의를 다시 현실의 법 테두리 안으로 정상화시키려고 했던 몸부림이었다.

    “법 밖의 정의”를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 유대 사회의 법이었던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파국을 향해 달려갔던 예수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는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법 밖의 정의’를 끝까지 주장하며 행동했던 인물이었다. 배고픈 사람들이 밀 이삭을 좀 뜯어먹었다고 안식법 위반을 운운하고, 병자들을 안식일에 고쳤다는 이유로 도덕적 규범을 어겼다고 몰아붙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는 분노하였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마15:3)”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도 예수는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예수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 한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타자이다. 역사적으로 양자 간에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골이 패여 있는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은 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초죽음이 된 유대사람을 섬김을 받아 마땅한 이웃으로 대접한다. 타자의 신음에 무조건적인 환대로 반응하면서‘법 밖의 정의’를 실현한 것이다.

    예수의 윤리에서 법 밖에 위치하는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가장 도르라지는 대목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최후의 심판’비유이다. 최후 심판 날 인자는 양을 자기 오른쪽에 염소를 자기 왼편에 세운다. 양과 염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상징한다. 이 심판은 지켜보는 청중이나 오른쪽에 있는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의 판정 기준 떄문이었다:“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마 25:35-36).

    마지막 날 판정기준이 유대교의 법을 잘 지킨 순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법 밖에 위치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예수가 추구했던‘법 밖의 정의’는 유대율법에 대한 해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율법 안에 숨어있는 진정한 의미, 즉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인간 사회에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는 율법 본연의 정신을 회복시켰다. 이렇듯 예수는 성서 안에 숨겨져 있는 명백한 진리를 다시 조명하면서 정도(正道)를 따라 정직하게 걸어간 인물이었다.

    촛불은 ‘법 밖의 정의’를 갈망했던 예수의 정신과 공명한다. 촛불은 자본의 법칙 안으로 함몰되어버린 법질서를 고발하고,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힌 정부 여당의 독선에 당당히 맞섰다. 또한 촛불은 진도 앞바다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세월호의 어린 생명들에 대한 애도를 불허하는 부도덕한 정권을 소환하였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세력과 집단을 검열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배제하려 했던 후안무치한 정부를 법정에 세웠다. 그렇게 23주간 광장을 밝힌 촛불로 인해 마른 뼈와 같이 앙상했던 대한민국에 혈기와 온기가 돌기 시작했고, 붕괴되었던 민주주의는 회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촛불의 윤리는 상징적 체계, 즉 법을 위해 봉사하는 수동적 윤리일 수 없다. 촛불은 상징적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법 너머의 행위까지를 겨냥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21세기 법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법칙에서 배제된 자들을 향하는 윤리이고, 우리시대 악법이라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혐오주의로 부터 차별받고 억압받는 타자들, 즉 난민, 여성, 동성애자,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해 달려가는 윤리이다. 이렇듯 2016-17년 대한민국을 밝힌 촛불은‘법 밖의 정의’를 여전히 믿고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 불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고, 현실을 강제하는 체제와 시스템과 도그마를 향해 절단선을 그을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하였다. 그리하여 촛불은 대한민국의 실추된 존엄과 명예를 회복시켰고, 이러한 촛불의 기억은 대한민국이 정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상상해야하는 그때마다 귀환하여 우리의 귓전에서 그날의 추억을 들려주며 우리를 깨어있게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M. Horkheimer and T.Adorno, Dislectics of Enlightment (New York: Herder and Herder,1972), 7 [본문으로]
  2. Ibid., 83-84. [본문으로]
  3. Theodore Jennings,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cis of Paul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3); 올해 오랫동안 제직했던 시카고 신학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은퇴한 테드 제닝스 교수는 예수의 메시아 운동을 재해석한 바울신학의 핵심을“법 밖의 정의(Outlaw Justice)”라 정의하면서 요즘 급격하게 일고 있는 바울에 대한 현대철학의 해석과 대화를 시도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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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관하여[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어느 신학교 노교수의 자살


    1973년부터 2012년 까지 40년 동안 시카고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프로이트와 융을 가르치면서 정신분석학과 신학 사이 학제간 연구를 주도했던 로버트 무어 교수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내게 전해졌다. 시카고 신학대학원이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퀴어신학, 흑인신학, 포스트콜로니얼니즘 등 진보적인 색깔로 유명한 학교이지만, 원래 이 학교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목회상담 때문이다. 100년 전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는 최초로 임상목회실습(CPE)과정을 실시하면서 신학의 대중화 내지 현장화를 이끌어 낸 학교가 시카고 신학교였다. 미국 목회상담의 아버지라 평가받는 안톤 보이스(Anton T. Boisen)가 시카고 신학교에 근무하면서 이 운동을 이끌었고 지금도 학교 도서관의 한 방은 안톤 보이슨 Room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에 사망한 로버트 무어(Moore) 교수는 시카고 신학교의 심리신학을 담당하던 교수이고, 특별히 그는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분석심리학을 만든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전문가로 미국에서 손꼽히는 학자다. 무어 교수는 시카고에 있는 융 연구소를 이끌었고, 융의 집단 무의식과 신학자 폴 틸리히의 궁극적 실재를 연결하여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구성하려 했던 창의적 신학자였다. “네가 아직 알지 못하는. 네 안에 있는 그것을 발견해라! 그것이 궁극적 실재이고, 그것이 신과 만나는 통로이다!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라!”를 외치면서 많은 신학도들과 수많은 내담자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학자이자 상담가였던 로버트 무어 교수는 늘 매니아들을 거느리고 다녔던 스타강사이기도 했다.

   2012년 은퇴 후에도 학교는 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연구실도 그대로 남겨두었고, 교수 명단에서도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그만큼 시카고 신학교에서 로버트 무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2016년 6월 22일 시카고 경찰은 로버트 무어 교수가 부인과 함께 총에 맞은 채 발견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아직 사고의 원인은 조사중이다’라고 브리핑하였고, 다음 날 로버트 무어 교수가 부인을 권총으로 쏴서 먼저 죽이고 본인도 바로 스스로 자살했다고 공식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알콜, 약물중독, 마약에 의한 혐의는 밝혀진 바 없 다”라는 소견을 달았다.

   교수님이 왜 자살했을까? 한동안 내가 10년 동안 봐 왔던 무어 교수가 했던 말과 그의 모습 을 되살리면서 무어교수의 죽음을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려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자료들을 가지고는 온전히 그것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어떤 사건과 인물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 ‘무어 교수가 발견한 당신 안의 그것이 과연 무엇이엇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얼마나 그것이 매혹적이고 좋았으면 선생은 이생에서의 삶을 그리 서둘러 단축했을까.

    하지만, 이런 결정은 내가 아는 무어 교수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그렇게 폭력을 혐오하고, 폭력에 저항했던 선생이었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그리고 자신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며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나로서는 당혹스럽다.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일단, 지금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무어교수는 나에게 신학이 얼마나 매력적인 학문인지, 아니 신학이 얼마나 불안하고 균열이 가득한 학문인지를 일러준 스승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2016년 6월 30일 일기 中에서


   자살에 대한 해석


    사건 직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수소문을 해봤지만 사건에 대한 자세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시카고 지역 신문에서 사건에 대해 몇 차례 보도되어 약간 술렁이는 듯 하더니 그것으로 끝이다. 시카고 신학교 차원에서 유감의 표현과 추모예배를 드렸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 건이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소식은 들은바가 없다. 무어 교수 부부의 소장품들이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다는 소식, 무어 교수 집 앞에서 책이랑 생활용품을 펼쳐놓고 무슨 업체 같은 데서 나온 사람들이 garage sale 하는 것을 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마 도 두 노부부의 유품을 정리하고 처분해 줄 가족조차 없어 그런 일을 대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뒷처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며, 무어 교수 집 근처에 사는 옛 동료가 귀뜸해 주었다. 와이프가 심각한 건강 이상에 시달렸다는 소식, 무어 교수가 2012년 돌연 학교에 사의를 표하 고 사라졌는데 그 무렵부터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는 소문까지... 그 누구도 무어 교수에 대해 아무것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무어 교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아내를 먼저 총으로 쏴서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신학교수를 말이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가고, 중세 때는 자살을 시도한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었으며, 자살자의 교회 예식에 따른 장례식은 로마 카톨릭에서는 거부되고 있다. 왜냐하면 자살이 회개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자살에 대한 그 리스도교 차원에서의 공식적 반대의견은 중세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에 와서 정교하게 완성되었다. 아퀴나스가 자살을 반대한 이유는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인간의 자기 사랑과 자기 보전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의무이며, 둘째, 인간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 고, 셋째, 생명의 권한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교리적이고 율법적인 잣대로 자살자의 입장과 처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없이 자살을 반대하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너무나 무지하고 폭력적이다.

    이것보다는 좀 나아 보이는 그리스도교의 자살에 대한 이해가 있다. 그리스도교가 자살을 거부하는 이유는 복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 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것이 된 존재, 이것이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고 이것을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챤 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법칙과 강제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들이고,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온갖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이 말은 크리스챤은 세상의 명령과 육신의 명령에 따라 살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현실의 어려움과 절망과 환난 가운데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괴로운 질문으로부터 해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현실의 환난에 처한 크리스챤들에게 현실을 견디는 희망으로 작동할 수도 있 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복음의 능력으로 자살의 충동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정신의학에서 일탈적 행위를 보이는 개인이 치료를 통해 사회로 복귀하는 것과 같다. 사회, 즉 대타자는 완벽하다. 완벽한 대타자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순응하지 못하는 개인이 문제다. 정신병 걸린 사람이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신병원에서 하는 것이다. 이를 자살과 복음의 관계에 적용하면 이렇다. 복음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완벽하다. 자살은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과연 복음이 완벽한 균열이 없는 매끈한 진리인가. 어처구니 없게도 20세기 내내 전 세계적으로 복음전파의 모범으로 군림했던 대한민국이 압도적으로 자살율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자살공화국


    2014년 2월 2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서 엄마 박모(60) 씨와 장녀 김모(35) 씨, 차녀 김모(32) 씨가 번개탄을 이용 동반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현장에서는 현금 7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다음과 같은 메모가 발견되었다; “주인 아주머니께...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건은 생활고에 시달 리던 선량하고 정직한 서민이 시스템이 정해 놓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힘겹게 살다가 그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 법의 명령을 어길까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이 발생했던 2014년 그해 우리나라 자살율은 세계 최정상급이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통계청 2014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은 10만 명당 28.7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이는 하루에 40명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2003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 1위다. OECD 평균이 12명인데 한국은 두 배가 넘는 수치다. 헝가리(19.4명)와 일본(18.7명), 슬로베니아(18.6명), 벨기에(17.4명) 등이 자살율이 높은 나라들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하지만 한국의 자살률이 처음부터 고공행진을 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만 해도 자살률은 8.8명으로 당시의 일본(17.5명)과 독일(17.1명)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랬던 한국의 자살률은 1997년 IMF와 2008년 미국발 금융대란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며 급증했다. 자살률은 IMF이후 서서히 증가하여 2000년 13.6명, 그리고 2003년 22.6명으로 껑충 뛰었다. 2009 년 31.0명, 2010년 31.2명, 2011년 31.7명으로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2012년 28.1명으로 줄어든 이후 2013년 28.5명으로 다시 상승했다.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자살의 원인은 고령화와 경제난이라고 한다. 인구 고령화 시대로 치닫는 사회적 추이속에서 노인들의 삶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고, 노인들을 섬기고 대우해주었던 공동체는 파괴된 지 오래다. 전 세대 전 연령층에서 자신들에게 닥쳐온 현실적 삶의 무게 를 견디느라 모두가 아우성이고 그런 까닭에 우리 이웃을 돌아볼 물리적, 감정적 겨를이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나라 살림도 어려워 각종 복지정책은 뒤로 밀리고 있고 그에 따라 사회적인 안전망이 제거되는 상황속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위험사회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은 압도적 자살국의 지위로 등극하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살율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 시간당 시급을 만원으로 올리고, 기초생활 수급자 대상의 층과 범위를 확장하고, 임시직.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70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50만원 정도씩 보장하고, 치매와 암, 그리고 기타 불치병 희귀병의 치료와 후원에 국가가 전면적으로 개입하면 자살문제는 해결될까? 그렇다면 분명 자살율은 감소할 것이고, 그러한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우리의 권리를 부르짖으며 사회적 안전망을 다시 재건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물리적인 노력들을 실천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살에 대한 공부다. 우리는 그동안 진지하게 자살을 다루어 본 적이 없다. 자살은 감추고 숨기고 피해야 하는 마치 주홍글씨 같은 낙인과 같아서 자살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 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자살에 대한 객관적 안내를 제공하는 자료가 지금 소개할 뒤르겜의 『자살론』이다. 100년도 훨씬 전에 뒤르겜의 자살에 대한 통계를 바탕 으로 작성한 이 책은 희미하고 불명확했던 자살의 현상학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빛나는 성과라 할 수 있다.


   뒤르겜의 '자살론'


    자살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 성과물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에밀 뒤르겜의 ‘자살론’[각주:2]은 자살을 둘러싼 현상학 혹은 종교사회학에서 이룩했던 성과 중 단연 빛나는 저작으로 지금까지 손꼽힌다. 뒤르겜은 우리가 생각하는 여러 자살의 요인들, 예를 들어 정신질환, 유전적 요소, 인종적 특징, 계절과 자살의 관계, 알콜과 자살, 빈곤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후에 “자살은 사회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다”[각주:3]라고 말하였다. 뒤르겜의 발언은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이 근대성의 일면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렸고, 그것은 현대의 자살현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고. 중세 시대에도 물론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당대의 봉건적인 이데올로기와 종교가 내세우는 강압 속에서 수치스럽고 욕된 삶을 산다고 생각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어 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끼리의 관계가 촘촘히 얽히기 시작하면서 자살율은 가파르게 상승하였다. 봉건사회보다 근대사 회는 사회적인 끈끈함(social cohesion)이 느슨한 이기적(egoistic) 사회이다. 뒤르겜은 이기주의를 자살의 중요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지나친 이기주의는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을 촉 발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자살을 유도하는 원인이다.”[각주:4] 근대로 접어들면서 개인주의적인 삶이 고착화되면서 공동체를 바탕으로 했던 삶의 원리는 점차 사라져갔고,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정글속에서 홀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뒤처지고 도태되는 개인이 다시 사회로 편입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근대적 삶의 패턴과 자살율의 증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뒤르겜은 최종적으로 사회적 통합의 정도가 자살율의 감소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상하 였다: “자살은 종교 사회의 통합, 가족사회의 통합, 정치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한다.”[각주:5] 뒤르겜에 의하면 자살율 1위를 자랑하는 한국사회는 종교의 사회 통합 기능면에서 실패하였고, 가정의 붕괴와 정치의 상실 또한 이미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실제로 한국은 전체 가구 중에서 1인 가구의 비중이 30%에 접근해가고 있고, 서울시의 1인 가구비율은 30%를 훌쩍 넘었다. 개인의 삶을 지탱한다는 최소 단위인 가정이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또한 한국 국민의 성직자, 특별히 개신교 목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의 수준은 밑바닥이고,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도 성직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한국사회의 현실은 뒤르겜의 자살률 증가원인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측면에서 눈여겨 볼만 하다.

    뒤르겜의 『자살론』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종교별 자살율 추이다. 종교별 자살율은 개신교-카톨릭-유대교 순으로 개신교가 월등히 높다.[각주:6]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우선 개신교는 가톨릭과 유대교에 비해서 응집력이 느슨하다. 유대교와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훨씬 조직의 힘이 강하고 뚜렷하다. 예전과 교회법을 중시하는 면에서도 개신교를 월등히 압도한다. 유대교와 카톨릭에 비해 개신교는 훨씬 개인적이다. 개인의 결단이 구원의 필수요소이고, 신과의 접촉도 사제라는 매개없이 직통으로 가능하고, 경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평신도 각자가 말씀에 대한 이해를 갖고 신 앞으로 나간다. 신과 개인 사이 일대일 관계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격이 가장 강한 종교가 개신교라는 것이다. 개인의 탄생이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때, 개신교는 근대정신과 부합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성향의 개신교도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은 한국의 높은 자살률을 이해 하는데 있어 중요한 포인트이다. 한국 개신교도들의 자살률만을 따로 떼어 연구한 결과물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의 신앙패턴이 자살율과 상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나는 자살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뒤르겜의 『자살론』을 토대로 자살이라 는 현상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자살에 대해 유독 거부반응을 보이는 그리스도교의 자살 해석에 대한 반론이 도모될 것이다.


   신의 음성, 신의 위로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보고 있다”(이사야 49:16)


    이사야서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예언서이다. 이 책은 바벨론 포로기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이사야서는 66장까지 있는데, 흔히 1-39장을 제1이사야, 40-55장을 제2이사야, 56-66장을 제3이사야서라 부른다. 제 1이사야는 바벨론으로 잡혀가기 이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사야 예언자가 하나님을 대신해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고, 제 2이사야는 바벨론으로 잡혀가 절망과 슬픔과 비탄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제 3이사야는 새로운 희망을 선포하는 메시지다. 위에 적혀 있는 이사야 49장은 위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제 2이사야 중 한 대목 이다.

    고대시대 전쟁에 패한 국가의 백성들은 포로의 신세로 전락하였고, 포로들의 삶이 어떠했는 지는 미루어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남자들은 끌려가서 고된 일과 또 다른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패전국의 여인들은 승전국 남자들에게 의해 온갖 고초와 능욕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더러는 모진 노동에 시달리다 죽을 것이고, 더러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진 운명에 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자기의 존엄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람들 향해, 그렇게 주변에서 사라진 형제, 자매와 부모, 자식을 기억하고 있는 살아남은 자들을 향해 신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들의 이름을 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이다.

    극심한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 말이 무슨 소용이 있나, 라는 부정적 마음이 들다가도 한편으로는 이 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애도한다는 신의 위로가, 삶의 공포와 절망에 지쳐 생을 포기한 이들 하나 하나의 이름을 다 기억하겠다는 신의 다짐이, 욕된 세월을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이렇게 말하는 신이 자살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었으리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은 그 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 하나하나의 이름 을 당신의 손바닥에 꾹꾹 눌러 새기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신이라면 오히려 “너를 쓸쓸히 혼자 내버려 둬서, 너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자살을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사를 찾아와 상담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첫째는 목사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한국교회가 보여 온 번영지상주의, 축복 일변도의 신앙패턴도 영향이 있다. 축복받은 삶만이 신앙의 결실이자 열매라는 잘못된 신앙이 어느 때부터 주입된 관계로, 실패한 사람이나 삶이 주는 무게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은 믿음 이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받기에 교회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신은 정 말로 번영과 축복만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만을 칭찬하고 반기는 신인가?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나기 전에 모세가 신에게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33:18)라고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러한 모세의 요청 에 신은 이렇게 답하였다.“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33:23) 멀리 길을 떠나는 친구에게,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가정과 새로운 다짐을 굳게 하는 친구가 찾아와 복을 빌어달라고 요청한다면 여러분은 뭐라 말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될거야, 넌 할 수 있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의 뜰거야...”등의 온갖 긍정 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그렇게 일이 술술 잘 풀리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길을 떠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축복을 빌어주십시오”라는 요청에 하나님은 가장 정직한 답변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 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너희들이 원하고 생각하는 축복을 내게서 보이라면 난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무심하지만, 항상 없는 듯 너희 곁에 있다”고 말이다. 다석 유영모는 이런 하나님을 “없이 계시는 분”이라고 말하였고, 디트리 히 본회퍼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라는 아포리즘으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표현하였다.

    나는 신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인도 하시지만, 우리 앞에서 그 빛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빛은 우리 앞에서 비추는 빛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등 뒤에서 길을 비춘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강렬한 빛이 내 눈 앞에 있으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눈이 멀고 만다. 빛은 오직 등 뒤에서 비출 때 우리가 갈 길을 밝힐 수 있다. 그리고 그 빛이 우리 등 뒤에서 비추는 까닭에 그림자가 우리 앞에 있다. 그 그림자는 물론 우리 자신의 그림자이다. 신이 인도하는 삶, 빛으 로 밣히는 길 위에도 어둠과 그림자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인생의 그림자를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던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를 좀 더 나의 문제와 현실로 받아들 일 수 있지 않을까. 자살한 사람들의 결정에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라고 한 신의 자비만을 구할뿐이다.


   신정론(Theodicy)에서 인정론(Anthropodicy)으로


    정신과 의사들에 의하면,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살에 대한 죄악성 유무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다. 만일 자살의 원인이 온갖 숨겨진 폭력에 기인한다면, 자살의 동기가 경제적 위기, 혹은 외로움과 고독 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모두가 자살의 잠재적 가해자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은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 대목에서 자살에 대한 문제는 신정론에서 인정론으로 넘어온다.

    이유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해석은 모든 종교들이 최종적으로 고심하는 난문제이다. 고통에 대한 정의가 어려운 이유는 고통에 대한 이해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수 만큼 이나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고, 각 종교 전통마다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 다.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고통과 악에 대한 신학적 답변이다. 신정론은 의인에게 닥치는 고난과 악의 명백한 현존 속에서도 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한 다는 사실, 그런 신의 전능과 계획에 의해 악과 고난은 현실적 차원이 아닌 신의 섭리가 작동 하는 영역으로 고양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론이다. 현재의 고난은 미래에 도래할 축복의 징 표, 라는 신정론적 위안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알 수도 없고 설명도 불가능한 고난 속에서 흔들리는 믿음과 신앙을 지켜주었던 강력한 신학적 근거였다.

    레비나스는 그리스도교의 신정론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지난 20세기에 발생한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원폭 등으로 대표되는 대학살의 기록은 더 이상 고난의 유의미성을 내세우는 신정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정론이 내세우는 고난의 낙관성, 즉 신적 섭리로서의 고난, 고난의 유미성에 대한 해석이 고난 자체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길을 막는다고 하면서 신정론의 폐기를 선언하였다.[각주:7]

    자살의 문제는 원인과 이유도 모른 채 다가오는 우리시대 대표적인 고통의 현상학이다. 기존의 신정론은 자살의 유의미성과 자살 뒤에 숨겨진 신의 섭리에 대해 주목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너의 (개인)구원에 몰두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고통 의 당사자 혹은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일 뿐 아니라,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과 책임에 대 한 방임과 면책의 사유가 된다.

    이 대목에서 자살에 대한 신정론적 회피는 인정론적인 대응으로 전환된다. 인정론은 고통과 탄식 가운데서 발견해야 할 인간의 몫에 대한 문제이다. 신정론이 고통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신을 향한 인간의 질문에서 비롯된다면, 인정론은 고통에 직면했을 때 역으로 등장하는 인 간을 향한 신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신정론의 질문이 “왜 내게 이런 고난이 발생합니까?”라면, 인정론적 질문은 “거기 너 있었는가?”이다. 성서에 나오는 신의 인간을 향한 질문들, 예를 들어 에덴에서 범죄를 저지른 아담을 향한 신의 질문인 “네가 어디있느냐?” 복음증거를 핍박하는 사울을 향한 신의 음성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를 떠올려보면 신을 향한 우리 들의 질문 못지않게, 신 역시 우리를 향해 묻는다: “이 고난의 현장에서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결국 인정론은 고통의 시대, 죽음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질문하는 신의 물음이라 할 수 있겠다.

    자살에 대하여 내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자살을 향한 인정론적 개입이다. 신정론적 낙관 혹은 관조로 한국사회 자살 현상학을 바라보지 말자.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고, 그렇게 대응하다 우리 모두는 한국 사회 자살열풍의 부역자 내지 당사자가 될 수 있 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살에 대한 책임적인 물음과 자세를 가질 때만 이 죽음의 대열이 잠잠해 질 것이다. 우리시대 고통의 요체가 무엇인지, 자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살에 맞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것이 살아남은 우리들이 던져야 하는 질문이고 행동의 원 칙이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켜켜이 쌓인 고통의 결을 드러내고 그 진실의 힘으로 죽음을 생산하는 매커니즘을 해체하는 것, 그것이 인정론적인 개입 안에 담겨진 기대이고 요청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2017년 6월 25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 원고를 각색했습니다. [본문으로]
  2. 에밀 뒤르겜 지음, 황보종우 옮김, 『자살론』 (파주: 청아출판사, 2008) [본문으로]
  3. Ibid., 129. [본문으로]
  4. Ibid., 251. [본문으로]
  5. Ibid., 249. [본문으로]
  6. Ibid., 173~185. [본문으로]
  7. Emmanuel Levinas, “Useless Suffering” in Entre Nous: On Thinking-0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srshav.(New York: Columbia Uiversity Press, 1998), 97.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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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는 곳[각주:1]

성령을 둘러싼 세 가지 에피소드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 1:2)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다.”(요3:8)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행 2:4) 



프롤로그 


    키에슬로브스키라는 폴란드 영화 감독이 있습니다. <십계>(1988) <살인에 관한 짦은필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88),<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세 가지 색: 블루(1993), 화이트(1994), 레드(1994)>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초기 작품들에서는 동구권 특유의 사회주의적인 리얼리즘에 입각한 사회적 문제를 영화화 하였고,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이야기, 선 굵은 주제의식보다는 단일한 해석으로 묶일 수 없는 사건과 의미의 유동성, 혼종성으로 주제를 옮겨갑니다. 특별히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색> 시리즈에서는 이데올로기적인 허위의식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보다는, 우연과 improvisation (즉흥성)이 어쩌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고 영위케하는 본질 아닌가, 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우연과 즉흥성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들끼리의 관계, 사랑과 미움들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 바로 <세 가지 색: 블루> <세가지 색: 화이트> <세가지 색: 레드>입니다. 블루에는 ‘뽕네프의 연인들’로 막 뜨기 시작한 즐리엣 비노쉬가 나왔고, 화이트에는 비포선 라이즈에 나왔던 쥴리델피가 나오죠. 레드에는 이렌느 야곱이 나옵니다. 블루(자유), 화이트(평등), 레드(박애) 프랑스 혁명의 3대정신인데, 영화가 이것을 제목으로 삼은 이유는 역으로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 구속이고, 불평등 관계이며, 미움과 증오가 작동하는 이드(Id)의 장인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순수하고 절대적 이상과 가치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인간사이 부자유한 관계 속에, 불평등한 관계 속에, 평화롭지 못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그것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자유와 평등과 사랑은 불가능한 가능성의 형태가 아닐런지요.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늘 뜻 초반에 한 이유는, 제가 오늘 하고 싶은 성령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의 도입을 이끌어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늘 뜻 제목을 <성령에 대한 세 가지 에피소드> 라 붙였습니다. 과연 성령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면 성령이 손에 잡힐까요. 그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Episode 1 : 빛과 성령


   여러분 성령받으셨나요? (보통 영화에서는 아멘 합니다) 성령이 무엇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 혹은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성령체험의 상태는 무엇인지, 뭐 이런 것이 성령론의 주된 테마입니다. 90년대부터는 영성이라는 말로 진화되어 사용되었고, <사회적 영성>에 대한 책도 나왔죠. 흔히 ‘성령을 받았다’함은 종교적으로‘깨달음을 얻었다’라는 말로도 전환이 가능할 것 습니다. 각 종교마다 ‘깨달음’을 중요시 하죠. 일시적. 찰나적 깨달음을 중시하는가, 아니면 깨달음의 수행적 측면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종교적 파벌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제가 2주전에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주기도문을 테마로 한 마지막 하늘 뜻을 나누면서 악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가 거라사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 축귀하는 사건을 통해 악의 전체성, 집단성에 대해 밝혔습니다. 이 구절 이외에도 성서에서 악이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구절은 곳곳에 많이 분포합니다. 그것은 창세기를 펼치자마자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 2-3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혼돈, 공허, 어둠, 깊음>의 단어는 악이 삶에서 출몰할 때 벌어지는 악의 현상학이 아닐까 합니다. 혼돈과 공허는 일종의 쌍입니다. 혼돈은 형태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겠고, 공허는 비어있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둘 다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 구분이 되지 않고, 판단이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이죠. 인간은 모르면 불안해하고, 형체나 대상을 짐작할 수 없을 때 공포를 느낍니다. 유령은 바로 형상이 없는 존재입니다. 형상과 질서가 있어야 세계와 자연은 안정을 찾고, 그 안정된 터전위에서 비로소 생명은 피어나고 활동을 개시합니다. 혼동과 공허, 카오스적인 상태에서는 불안과 공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의 저자들은 혼돈과 공허를 악의 근원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다음 창세기 구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루아흐 엘로힘; a wind from God)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깊음> 이 가득한 곳에 하나님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공식적으로 한 첫 번째 음성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빛이 생겨라”, 그 다음 구절에 보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적혀있고,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고 어둠을 밤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사실은 영을 빛과 연관시키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정신사에서 진행되어 왔던 온갖 종류의 빛의 해석학과 현상학의 기원이 됩니다.

    빛(밝음, 이데아, 근원적 진리)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형이상학의 동심원적 구조에서, 변방과 주변은 빛의 효력이 비치는 않는 영역입니다. 그것은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 주의서부터 근대의 계몽주의까지. 계몽주의를 Enlightment라고 하죠. 가운데 빛(Light)배치되어 있습니다. 몽매한 중세의 어둠을 빛(light)의 명증성으로 밝히겠다는 의지가 계몽이성입니다.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서구 역사에서 대상들은 타자로 설정되었고, 빛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상은 타자화되어 정복과 계몽과 타도와 착취와 훈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은 곧이어 등장하는 ‘빛의 탄생’과 연동되어 빛과 어둠을 나누어 배제와 혐오의 메카니즘을 작동시키는 처음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라는 불순한 생각을 들게 합니다.


Episode 2 : 성령의 유령성(Haunting)


    두 번째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성경구절은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대 사람의 지도자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는 구원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달려온 니고데모에게 “그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와같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이때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바람이 불어가는 곳은 ‘어디(Where)’라는 의문사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goes). 예수에게 있어 바람이란 과거의 어디론가 부터 불어오는 바람이고, 또 그것은 어딘가를 향해 불어가는 바람입니다.

    의문사 where로 처리된 공간과 시간은 메시아의 때이고 메시아의 공간임을 암시합니다. 성서는 그 시간과 공간을 빈 시간과 공간으로 남겨둔 채, 즉 메시아의 도래를 텅빈 기표로 남겨둔 채, 바람이 들고 날 수 있도록 허락 하였습니다. 그 바람이 어딘가에서부터 불어와 우리를 감싸고 우리를 데리고 어딘가로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는 이것을 ‘바람이 분다!’라는 시적인 문장으로 진술하였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성령은 빛의 명증성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오히려 어떤 진리에 대한 강박과 히스테리에 빠져있는 니고데모를 향해, 성령충만을 갈망하고 그것을 향해 질주하는 오늘의 신앙인들을 향해 찬물을 끼어얹는 듯합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성령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에 대해 딴지를 걸면서, 현실에서 불순물과 균열과 틈으로 존재하는 성령의 유령(Haunting)성에 대해 요한복음은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 대목에서 나는 또다시 데리다를 초대합니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리다는 잘 아시다시피『맑스의 유령들 Specters of Marx』(1993)을 출판하였습니다. 당시는 1990년 사회주의 멸망 이후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왕성하게 진행되던 무렵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유령론에 대한 모티브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 있는 한 구절,“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에서 빌어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자본주의가 본 궤도에 진입하고 있을 무렵,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마로 공산주의를 도모했던 자들(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가상적 시나리오가 작성되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가 그 운명을 다하고 사라진 후에 유령이 되어 전 유럽을 떠돌아다닌다는 상상이었습니다. 그들의 치기어린 생각은 얄궂게 현실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실제로 1990년도에 공산주의는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20세기 내내 실험되었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1993년에, 세계를 평정한 자본주의에 대한 송가가 흘러넘치던 그 무렵, 생뚱맞게 데리다가 『맑스의 유령들』을 들고 나오면서 다시금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도래를 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 지구적으로 승리한 자본의 제단에 재를 뿌리는 역할을 한 셈이죠.

    본래 유령에 대한 논의는 심령과학 혹은 환타지 소설에나 등장하는 것이지, 철학과 담론의 장에서는 한 번도 정중히 다루어진 적이 없는 소재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분명한 언어와 개념을 지향하는 학문인 관계로, 유령과 같은 불확실하고 초현실적인 개념은 취급불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유령을 끌어들여 현실의 법칙이 되어버린 전지구적 자본에 흠집을 내려는 데리다의 시도에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유령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대한 기억과 애도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제거되거나 억제될 때, 현재로 도래하는 무엇이 바로 유령입니다. 데리다는 <맑스의 유령들>에서 햄릿에 등장하는 죽은 아버지의 유령을 거론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한을 햄릿에게 갚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말입니다. 비단 햄릿에서뿐 아니라, 동서양 문학작품들에는 이런 유령이 현실로 귀환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얼마 전 공유와 김고은이 나왔던 <도깨비>도 유령의 귀환이고. <장화.홍련>도 그렇습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론의 핵심은 “time is out of joint. 시간은 탈구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혼종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변증법적 인과율과 시간의 흐름(과거-현재-미래)이 지배하는 현실의 질서가 뒤틀리고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 유령론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 2016년 늦가을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데리다의 유령론이 실재가 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월호의 유령이 대한민국의 정의와 진실을 밝히는데 있어 원동력이 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구천을 떠도는 세월호의 영령들이 우리를 지치지 않게 하였고, 그리하여 수백, 수 천만명의 시민들이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내내 광화문에서 촛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봄에 대통령 박근혜는 탄핵되었고, 5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정권은 교체되었습니다. 데리다가 살아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당신이 말했던 유령론이 한국에서 실재가 되고, 역사가 되었다”고 저는 자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주의하여야 합니다. 유령은 중심이 꽉 찬 기표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텅 비어 있는 기표와 같습니다. 바람이 우리의 손에 잡히지 않듯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성령을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라고 규정을 한 후에,“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부연설명을 하는 것 아닐런지요. 결국 성령이란 역사의 어느 풀리지 않는 매듭에서 메시아적 계기를 불어넣고 정작 자기는 어떤 체계에 갇히지 않고 불고 싶은 곳으로 사라지는 새로움 이어야 함을 예수는 말하고자 했던 아닐까요.


Episode 3 : 소통의 영


    사도행전 2장은 유명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한 성령강림에 대한 기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 보면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2:2)이 내려온 이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2:3) 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언의 은사가 발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리 한 것은 그 다음구절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2장 6절-7절).

    이 본문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간단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남왕국 유다가 587년에 망한 후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60-70년 세월이 흐른 후 에스라-느헤미아때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죠. 하지만, 그때 돌아오지 못하고 바벨론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일제시대를 연상하면 됩니다. 해방이 된 후에 일본으로, 만주로, 연해주로, 중국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거나 흩어졌던 조선백성들이 해방 후에 한국으로 모두 돌아오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부터 500년 이상 흐른 시간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오백년이면 세대로 따져도 15세대 이상이 흐른 다음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어언 70년이 되어갑니다. 지금 각지로 흩어져사는 한민족들이 이민 2세대, 혹은 3세대까지 생겨났습니다. 사할린에, 일본에, 만주에, 중국본토에, 러시아에,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잘 구사할까요?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 자제들인 경우 대부분 영어만 사용할 줄 알았지 한국말 구사는 못하는 경우가 거의 다반사입니다.

    이렇듯 2세대 3세대까지 흘러도 모국어를 잃어버리는데, 바벨론 패망 이후 500년이 넘게, 15세대, 16세대, 17세대 넘게 이방 땅에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 경우가 아니었을까요. 그들 역시 흩어져서 지금 거하고 있는 그 땅의 풍토와 문화와 언어에 동화된 채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국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다행히 야훼 신앙을 간직했던 사람들이 있어 그들 가운데 있어, 민족의 명절인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바대인, 매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보도와 아시아….등지에서 몰려들었다고 적혀있습니다(사도행전 2:9-11). 우리로 따지면 재일교포 15세, 재미교포 16세, 재중 교포 16세, 재러시아 교포 17세, 재멕시코 교포 15세, 재하와이 교포 16세, 재타슈겐트 교포 15세, 재사할린 교포 15세가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이 말을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복음을 전했겠죠: “내가 만났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그 분은 우리 같은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내가 곧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그 분이 말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뭐가 그리 놀랍다는 거죠? 내가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미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멕시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한국말을 모르죠. 그런데 성령의 바람이 임하니까 내가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나라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너무 놀라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냐? what does this mean?”

    “저 사람이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난 영어밖에 모르는데, 나는 일본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중국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한국 말은 배워 본 적도 없는데, 어찌하여 한국말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야? What does this mean?”“나는 메소보다미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갑바도기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아라비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로마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이스라엘 말을 모르는데 어찌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하는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우리가 출신 성분도 다르고, 자라온 배경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해서 그 모든 차이와 다름이 극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

    여러분 성령을 체험했다는 것은 무슨 마술적인 신비체험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와 차별을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는 공동체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순과 분열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게끔 하는 공동체 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상처와 아픔을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공동체 입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강림사건을 종합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방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치유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며, 예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성령의 능력은 차이와 다름을 매개하는 의사소통의 성령, 대화적 성령인 셈입니다.


에필로그


    제가 오늘 하늘뜻 이야기에서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다음 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한지 오십일이 되는 날 마가의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일반인들이 달력을 쓰듯, 교회전통에서는 교회력을 씁니다. 오늘이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이고, 다음주일부터 교회력상으로는 성령강림 첫 번째 주일이 시작됩니다. 성령강림이 교회역사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예수의 부재이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어왔고, 그것들은 당연히 잘 정리되지 못한 채 균열과 틈이 가득 찬 채 그대로 봉합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였다는 것이죠. 그것이 초대교회의 고백입니다. 그 성령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질문과 의혹은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성령에 대한 세 가지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성령이 제일 본인에게 맞습니까? 세 가지 성령을 우리가 다 받으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까? 어쩌면 성령이 지금 말한 저 세 가지 범주 밖 어딘가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어쩌면 성령은 성령의 텍스트성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작동하는 컨텍스트를 들여다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성령의 법칙성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문득 이 순간 지난 30년 동안 한백을 한백이게 했던 성령의 역사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창립 30주년을 맞는 올해 한백의 영성에 대해 각자가 한번 쯤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고백해보는 시간들이 가끔씩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1. 한백교회 5월28일 ‘하늘뜻 나누기’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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