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그러진 인문학



심범섭



   최근에 우연한 계기로 대중 인문학 서적인 윤소정의 <인문학 습관>(다산호당, 2015)과 박웅현의 <다시, 책은 도끼다>(북하우스, 2016)를 읽게 되었다. 윤소정은 “나의 잠재력을 깨워 본인의 길을 만들어가는 교육”을 지향하는 교육기업 인큐의 대표이며, 박웅현은 광고인으로서 TBWA KOREA 크리에이티브의 대표이다. 윤소정은 책에서 고전을 읽는 인문학에서 벗어나 자신의 물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주체적으로 답하면서 성장하는 “실용 인문학”을 하라고 권유한다 (p.51). 이 책은 이런 목적을 위해 어떤 구체적인 습관을 어떻게 형성해야할 지를 이야기하는데, 앞 표지에 씌여 있는 “나만의 업을 만들어가는 인문학 트레이닝북”이라는 표현이 이런 성격을 간명하게 전달한다. 박웅현의 책은 “박웅현 인문학 강독회”에서 그가 책읽기에 대해 강연한 내용을 글로 옮긴 것인데, 자신이 감명깊게 인문서적의 장점과 의미있게 다가왔던 이런저런 구절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책의 주제는 책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읽는 것이고 “천천히” 읽어야한다로 요약된다고 말한다 (p.5).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젊은이에게 인문학 멘토로 인식되고 있는 두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답답함과 우려를 느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제시하는 인문학의 모습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의 대중 인문학 담론을 좀더 비판적으로 살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비록 이 글이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중 인문교양서가 보이는 전체적인 경향을 다루지는 못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인문학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를 환기하는 기능은 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는 ‘사람의 무늬를 배움’이요, 지식의 분야로는 ‘문학, 역사, 철학’ 세 분야라고도 하고, 여기에 ‘언어, 예술, 종교’를 덧붙여 여섯 분야라고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 근본에서부터 이해하려는 공부’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열 여덟 살 때 형 미하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썼다는 다음 구절을 우리는 인문학 선언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다.


인간은 불가사의이다. 만일 그대가 이 수수께끼를 풀면서 일생을 다 보내버렸다고 해도 시간을 낭비했다고는 말하지 말라. 이제 나는 이 불가사의에 나를 바치겠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윤소정은 그의 책에서 인문학을 여러 번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정의하는데 “인생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는 표현이 그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 (p.29). 박웅현은 그의 책에서 인문학을 명시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지만 책의 내용을 고려할 때 그가 생각하는 인문학이 위의 일반적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두 저자가 인문학을 정의하는 방식에 이미 어떤 파격적이거나 문제되는 요소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 공통된 문제점으로는 적어도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인문학의 목표와 이상을 온전히 논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이상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자아실현과 세계개선이라고 생각한다. 곧 내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 이 세상을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것이다. 세계를 개선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우리 후손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을 뜻하고, 우리 시대에는 이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 자연환경과 인간 아닌 생명체에 대한 배려도 첨예하게 요구된다. 윤소정와 박웅현의 책은 세계개선의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인문학은 자아실현의 인문학에 머물고 만다.  

    세계개선이라는 거시적이고 범인류적인 지향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하신 말씀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김용옥이 그의 책 <중용, 인간의 맛>에서 동양철학의 ‘우환’ 개념을 정의하는 대목이다. 대인이 우환하는 다섯 가지 중 마지막 두 가지가 세계개선에 관련된다고 본다.  


입에 풀칠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이쁜 새악씨 못 얻을까 걱정하고, 벼슬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가계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 . . 이런 걱정은 “우환”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소인의 근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환이란 무엇인가? 우환이란 반드시 대인의 우환이다! 대인의 우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요, 배우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요, 덕을 닦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요, 천지가 바르게 자리잡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요, 만물이 잘 자라나지 못할 것을 우환하는 것이다. (p.124)  


    흥미로운 사실은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 이러한 인문학의 이상에 해당하는 내용이 한번씩, 그리고 두 경우 모두 교육과 관련하여 등장한다는 점이다. <인문학 습관>에서 윤소정은 자신이 운영하는 교육기업에서 일하는 교사들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큐는 ‘진짜 선생’이 되고 싶다며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가고 있답니다. ‘교육만이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일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선생님들이시죠. (p.169)  


    박웅현도 자신의 교육관을 피력하면서 본질적으로 같은 생각을 말한다.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고,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p.199). 이 두 인용문에 나타난 교육 철학에는세계개선이라는 인문학의 한 이상과 본질적으로 같은 목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서 한 고립된 언술로만 존재하지 책 전체의 큰 의미축에 포섭되지 못한다.  

    이때 이런 이의 제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인문학의 이상에 세계개선이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이를 포함시키는 것은 당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닌가? 이 중요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인문학의 이상은 그 성격이 종교와 교육의 이상과 같다. 인문학은 인간과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종교와 같고, 가르치고 배우는 ‘학’이라는 점에서 (역시 종교 그리고) 교육과 연결된다. 그리고 종교와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류 사회에서 이미 상당히 객관적인 대답이 확보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철학자 안병욱 선생이 종교의 목표를 규정하면서 쓴 표현을 빌리면 “자아완성과 인류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영성계발만을 강조하거나 나 한 사람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일부 기독교의 흐름을 비판한다. 그리고 위에서 인큐 교사들과 박웅현의 교육철학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라기보다는 교육의 이상에 객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책이 공유하는 또 다른 문제점은 인문학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저자는 인문학을 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새로운 기쁨과 만족을 알게되는 것만 말하지 새로운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윤소정의 경우 새로운 습관을 통해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이 고통은 내가 말하는 고통과는 그 종류가 다르다.) 두 책에서 인문학의 긍정적 효과는 일상, 곧 평범하고 익숙한 세계를 주체적으로 세밀하게 탐구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박웅현은 이런 과정에서 몰랐던 기쁨을 느끼리라고 말하고, 윤소정은 이런 실천이 새로운 평안과 활력을 가져오며 더불어 이 시대의 훌륭한 “인재”가 되는데 유효하다고 말한다 (p.10). 그러나 박웅현의 말대로 “늘 거기 있는 것을 주목해보”면 “또 하나 삶의 즐거움”만이 얻어지는 것일까? (p.48)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을 잘 들여다볼 때 우리는 몰랐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몰랐던 추함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쁨뿐만 아니라 새로운 슬픔과 분노와 억울함과 역겨움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폭력과 모순과 마비가 편만하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늘상 쓰는 치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는 불편해지고 또 두려움을 느끼게 되지 않는가? 이보다 더 심각한 차원의 문제로서 미국의 윤리학자 제임스 레이철스(James Rachels)가 쓴 <도덕 철학의 요소(The Elements of Moral Philosophy)>(McGraw-Hill, 2003)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예로 들고자 한다. 지금 우리는 몇 백 년 전에 노예제도가 있었음에 대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놀라와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후 후손들은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그때에는 온 인류가 다 먹고 남을 만큼 식량이 있었는데 어떻게 다른 대륙에서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하고 놀라와할 지도 모른다. 레이철스의 이런 지적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슬프게 한다. 우리 현재를 성찰할 때 이런 괴로움도 같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온전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박웅현의 책 제목에 나오는 ‘책은 도끼다’라는 표현은 카프카의 말 “책이라는 것은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에서 유래한다. 윤소정도 그의 책에서 이 말을 언급하며 “이 문장이 너무나 좋은 나머지 늘 영어 문장까지 달달 외우고 다닌”다고 말한다 (p.23).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 비유 자체의 논리 안에 ‘깨어지는 아픔’이 있음을 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까? 독서 차원에서 이 깨어지는 아픔을 정확히 포착한 예를 우리는 이상민의 <나이 서른에 책 3,000권을 읽어봤더니>(대림북스, 2015)에서 만난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 좋은 책은 큰 충격과 혼란을 준다. . . . 좋은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내가 모르고 있던,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이 바로 잡히기 때문에 당연히 명현 현상이 올 수 밖에 없다

. . . .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하고 괴롭지 않다면 어쩌면 제대로 된 독서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은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라는 진실과 맞닥뜨려 보면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9-30) 


    우리가 인문학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책읽기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이상민이 말하는 명현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이 인문학의 위로와 기쁨만을 말하고 아픔과 고통에는 침묵한다는 비판에 대해 이러한 변론도 가능할 것 같다. ‘이 두 저자도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이 가능함을 알지만 고통이 결국에는 기쁨으로 귀결되거나 고통의 기저에 기쁨과 평안이 깔려있다고 생각해서 굳이 고통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누구든 기쁨과 고통 사이에 이렇게 어떤 연관을 설정하여 결국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고통 자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언급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고통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삶에서 실천하는 인문학의 고통이 특히 가치있게 되는 것은 그것이 세계개선의 노력을 낳을 때이다. 세상의 추하고 어두운 면을 발견하고 이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은 이를 없애려는 결심과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런 실천은 많은 경우 고독하고 위험한 가시밭길이다. 이렇게 인문학 하는 사람은 때로 따돌림 당하고 때로 박해 받고 때로는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고 디트리히 본회퍼가 그랬고 마틴 루서 킹이 그랬다. 인문학을 제대로 하는 것은 때로 목숨을 거는 용기와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진실을 말한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0:34-39) 


    윤소정과 박웅현은 인문학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이러한 위험 또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저자들이 인문학의 고통과 위험을 외면하는 것은 그들이 애초부터 세계개선의 지향을 외면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윤소정과 박웅현의 책에서 이렇게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지만 동시에 두 책은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관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윤소정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주창하는 실용 인문학을 습득하면 세속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유비로써 말하자면 윤소정은 이른 바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을 설파하는 기독교 목사와도 같다. 그의 책에서 윤소정은 유용한 습관을 제시할 때 거의 언제나 이 습관을 실천한 사람이 성공한 사례를 언급한다. 이 예로 등장하는 사람은 소박하게는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 인정받는 청년이지만 많은 경우 한국적인 또는 세계적인 거물이다. 그리고 “배움의 주체가 비로소 내가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이 시대가 원하는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다고 (p.249) 믿는 사람으로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기도 한다. 


사실 잘된 사람들을 보면 출중한 능력이나 뛰어난 성적 때문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단련’되었기 때문에 성공을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p.241) 

저의 또 다른 선생님은 노력하면 바로 성과가 나온다는 말은 뻥이라고 말씀하시며 ‘끓는점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똑똑한 친구들이 성공을 못하는 이유, 바보 같은 친구들이 목표를 결국 이루는 이유 또한 이 원리 때문이랍니다. (p.332) 

앞서 말한 유석환 대표님은 어느 날 제 어깨를 두들기며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윤 대표, 힘들지? 그래도 그냥 무식하게 끝까지 해야 해. 끓는점에 도달할 때까지. 결국 성공은 똑똑한 놈들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처럼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 (p.333) 


    이런 예들과는 달리 겉으로 금방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윤소정의 성공주의 인문학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도 있다. 책의 3부 “인문학은 해석이다”의 7장 “나를 타인에게 각인시킨다”에서 저자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특정한 이미지로 계속 인식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달리 말해 그는 퍼스널 브랜딩이라고 하는 분야에서 쓰는, 개인 마케팅의 한 기법에 불과한 것을 인문학 습관으로 제시한다 (pp.220-32). 이 둘이 다름은 호박과 오이가 다름과 마찬가지인데 윤소정은 이 차이를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인문학 습관이란 사회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아 성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박웅현은 이러한 성공주의에서 자유롭다. 그가 독서로써 지향하는 “풍요로운 삶”은 삶과 인간과 세계를 더 이해하면서 더 위로와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는 삶이다. 아래 인용문이 그의 이러한 철학을 대변한다.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 . 가족이나 친구처럼 생각해보면 내 삶의 전부인 사람들, 아침밥, 새소리, 햇살, 늘 거기 있지만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들, 그런 것들이 즐거움의 대상이 되면 행복하겠구나. (49) 

별 볼 일 없는 풍경, 그것을 주목하는 힘. 그게 삶의 지혜이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자 . . . (54) 

현재를 돌아보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고,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보내려는 태도가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삶의 자세라는 말입니다. (88) 


    종교적 인물로 유비하자면 박웅현은 느긋한 마음으로 모든 순간의 충일함을 깨달으라고 권하는 뉴에이지 신비주의 구루 같다고 할까? 박웅현 인문학의 이런 특성을 인상적으로 알려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수 년 전 박웅현이 어떤 라디오 방송에서 인문학의 필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청취자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한 사람이 좀 삐딱하게 이렇게 물었다.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옵니까?” 박웅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밥이 나오지는 않지만 밥맛이 좋아집니다.” 인문학이 밥맛을 더 좋게 한다는 말을 그는 2011년에 출간된 베스트셀러 <책은 도끼다>에서도 언급했고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도 다음과 같이 인유한다. 


오늘 소개해드린 두 권의 책 어떠셨는지요?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보시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시선을 만나고, 지혜를 얻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시면 다른 건 몰라도 밥이 정말 맛있어질 겁니다. (p.43) 


    우리가 이 밥 비유의 의미 구조 안에 들어가 말한다면 윤소정은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온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소정과 박웅현 두 사람을 놓고 비교하자면 박웅현 인문학이 한 차원 더 높다고 하겠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틀렸다. 인문학을 하면 때로는 밥맛이 좋아지지만 때로는 밥맛이 떨어지고 때로는 아예 밥숟갈을 놓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사실 이 두 저자가 인문학을 표방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들의 책에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윤소정이 자기 책을 성공학 습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고 박웅현이 자기 책을 독서법 강독이라고 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따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책을 인문학 책으로 규정하므로 나는 인문학의 좋은 이름을 지키고 싶어 이렇게 수다스러워졌다. 

    사실 이 두 사람의 책 <인문학 습관>과 <다시, 책은 도끼다>에는 삶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가르침이 많이 있다. 나 자신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새롭고 소중한 통찰을 많이 배웠다. 그러나 근본 인식의 틀을 볼 때 이 책들에는 인문학 하는 삶의 고통과 위험, 그리고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세계개선의 이상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도 왜 이 책들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서 그렇게 높은 인기를 누릴까?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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