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처에, 당신, 당신, 당신들 뿐


(연구집단 CAIROS)



 태초에 말이 있었다.

 나는 항상 이 문장이 궁금했지만, 왜냐는 물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어떤 말이었을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내게 일어났던 ‘어떤 일들’,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내 ‘감정들’까지 나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말하지 마. 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십 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금기는, 내게 사랑하는 것보다도 먼저, 나를 사랑해주는 모두에게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르쳤다. 단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숱한 사례로 교육받아왔다. 나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나 자신, 그리고 아무도 없는 어둠 속ㅡ장롱 안 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장롱 안에 있었다. 장롱 안에서 말을 던지면, 목소리는 뿌연 안개와 같은 메아리로 내게 돌아왔다. 나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자주 나에게 묻고, 나에게 대답하는 식으로 어둠에 대화를 걸었다.
 장롱 안은 어두웠지만, 문틈의 빛줄기가 칼날같이 날카롭게 반을 가르는 곳이기도 했다. 장롱 안에서 나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는데, 가끔 누군가에게 발칵 문이 열릴 때면, 하릴없이 튀어나와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혹시나 백마 탄 왕자님이 마음 넓게 귀를 쫑긋 세워줄지도 모르니까. 빛줄기가 문 앞에 선 누군가에게 가려져 완전한 어둠이 될 때, 나는 공포와 설렘으로 마음이 뛰곤 했다.

 죽음과 삶이 있다.
 언제나 단절된 것이었을까. 나는 이것도 궁금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어둠 속이었으므로, 나는 생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는 죽음이 내게 가까웠고, 나는 장롱 속에 들어가듯 죽음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죽음을 동반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알지 못했지만, 확실히 삶은 죽음보다 훨씬 먼발치에서 그 자신을 방조하고 있었다.

 삶은 언제나 나를 짓눌렀지만, 죽음은 늘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죽음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 죽음은 슬그머니 다가와 내게 말을 들려주었는데, 그건 반쯤은 우렁찬, 검은 강의 물소리였다.

 
1.

 여자의 강이었다. 《The Hours》(스티븐 달드리, 2003)의 강이라거나, 《시》(이창동, 2010)의 강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는. 두 여자가 내처 몸을 맡긴 것만큼 중요했던 건, 그들의 편지였다. 각각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세상과, 그녀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는 《The Hours》에서 낭송되었던 것과는 다른, 버지니아 울프의 실제 유서 중 한 단락이다.

“(전략)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했고, 당신[각주:1]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애를 느껴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건, 정신병 때문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죽어갈 생명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강물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와 함께 했던 건 단 한 장의 편지-그리고 편지를 읽는 하나의 목소리, 그러니까 내게 다가온 ‘말’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저작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을 상상했었다. 셰익스피어만큼의 열정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의 ‘불우한 성별’은 그녀를 예술가로 만들어줄 수 없었고, 끝내 그녀는 이름 없는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상상은 단지 비극으로 그치지는 않았다. 오히려는 희망찼는데, 그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에게 언젠가 이름을 불러줄, 그리고 이름을 넘어 그녀 자신만의 방, 누구에게도 점유되지 않는 그녀만의 온전한 몸을 돌려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만약 한 세기가 더 지난 후, 우리 모두에게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신만의 방이 주어지고, 우리가 자유를 습관으로서 가지고, 또한 생각하는 그대로 글로 써내는 용기를 지닌다면, 현실 속 서로의 관계에서 인간을 파악하고, 사실을 사실로서 바라보고, 우리를 이끌어줄 팔은 없으니 결국 홀로 걸어가야 하며, 현실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인식한다면,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었던 죽은 시인은 그녀의 버림받았던 육신을 다시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 믿습니다.[각주:2]

 여기에 하나의 진실이 있다. 버지니아는 글로써 저항하다가 절필과 동시에 몸을 던졌고, 그것은 분명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삶들을 사랑하는 의미였다. 그녀에게 ‘몸’은 매초마다 펌프질하는 심장이 아니었다. 오히려는 언제든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물로) 걸어가는 것은 오로지 ‘홀로’였음에도, 걸어갈 ‘육신’은 다른 이들의 자가 인식을 통하여, 그러한 인식들이 뒷받침되는 세상을 통하여 다시금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생명을 위한 자살’이라는 건 결코 모순이 아니었다. 온몸을 던진 그녀의 투쟁을 통해, 그녀는 재차 반전과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들에 대한 인식의 울림, 거듭된 각성에의 요청이었다. 오로지, 생(生)들을 위한.
 이러한 맥락에서, 《시》의 <아네스의 노래>는 물에 뛰어든 소녀의 육신을 되살려냈던 진정 시/노래였다. 누구의 귀에도 와 닿지 않았던 소녀의 말은 무던히 허공을 떠돌다가 이윽고 미자(윤정희 역)와의 시/노래로 드러난다. 그제야 그녀는 그녀의 사랑했던 것들과 작별 인사를 건넬 목소리를, 그리고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미자는《시》에서 항상 두 차원의 공간을 떠돌아다닌다. 남성성이 지배하는 일방적 권력의 현실과, 그녀와 사물이 편견 없이 공존하는 시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양 쪽 모두 언어의 장이었고, 실제로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도록 혼재되어 있었지만, 양쪽의 경계가《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던 건 미자의 망각 덕택이었다. 그녀는 현실을 끊임없이 망각했고, 그 망각의 순간동안 대신 그녀는,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집중했다. 꽃, 새소리, 나무, 살구…미자는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피며 글들을 메모했고, 그것은 바로 그녀가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 방법이었다. 동백꽃을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짙은 고통으로 보고, 살구를 땅으로 뛰어들은 하나의 몸으로서 대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소녀가 뛰어들었던 강을 만났을 때 그녀의 메모지를 채운 건 어떤 글귀가 아니라, 단지 물방울이었다. 침묵이 아닌 깊은 애도, 말로서 꺼내질 수 없는 하나의 슬픔을 그녀는 마주쳤던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는 그녀와 소녀의 고통으로 탄생한 노래다. 생전에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여성이, 서로의 고통이 겹쳐지는 순간, 현실과 시 양자의 관계를 뒤바꾸어 놓는 몸의 말을 발화하는 것이다. 시는 작중에서 언제나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 어떤 논리로도 접근 불가능한 것, 즉 정복할 수 없는 잉여의 것으로 남는다. 시를 쓰기 위해서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강사의 말은 “어렵다”에 내포된 논리와 해석의 위계들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바로 이 안에서 ‘말’이 떠오른다. 어떤 이해관계에도 포섭되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관계를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의 몸 저 쪽 끝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통의 소리.
 성서의 누가복음 7장에는 한 청년이 등장한다. 과부의 아들로 지칭되는 이 청년은 죽어 관에 실려 나가는 중이었다. 예수가 관에 손을 대고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했을 때, 청년은 일어나 앉아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음에서 막 깨어난 그가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각주:3] 
 과부의 아들로서 어떤 삶을 살아냈을 지, 그 이른 나이에 어떤 이유로 죽었을 지, 아무도 몰랐지만, 예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 고통들을 감싸 안고,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을 때, 그는 이윽고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몸의 일어남과 동시에 터져 나왔던 그 말들은, 어떤 말이었을지 감히 추측할 수도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은 바로 고통 자체, 몸 자체인 말이었다는 사실이다.

2.

 그리고 말은 흐른다. 편지가 끝난 후에도 강은 여전히 흐른다.
 여기에서 물음은 남는다. 이 물소리는 왜 미자에게만 들렸을까. 소녀의 어머니조차 다가서지 않았던 곳에, 소녀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미자가 그 자리로 다가갔을까. 혹은, 왜 버지니아 울프가 죽었어야 했을까. 전쟁터와는 다소 먼 시골에서 살았던 그녀가, 그녀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던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왜 그녀를 던져야 했을까. 혹은…그 청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 것이 왜 예수였던 것일까. 잉여의 물음에 잉여의 언어로 대답한 것은, 이 ‘강’에 대해 오래 생각했던 유하였다.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서둘러 노을의 하늘을 갈아치우는 잠자리의 눈동자
흔들릴 때마다 나뭇잎 속에 깃드는 푸른 신성같은 것,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
덧없는 물살에 덧없는 마음의 지느러미만
하릴없이 놓아 주다가

다만 물고기는 간데없고 남아 있는
비늘의 번득임만 안타까이 건져 올리듯
기어코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릴 때,
사라짐보다 더 아픈 정지의 순간이 오고
치자꽃 향기 밟으며
온 강에 멎을 듯 내려앉는 별빛의 나비떼

스쳐가는 바람이 거기 없었다면
송두리때 제 넋을 흔들어 구원받는 갈대를
누가 알기나 했으리[각주:4]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의 목소리가 도저히 사회의 그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에서 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숨 막힐 듯 사방을 가로 막은 남성들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미자의 말은 어디에도 가 닿을 수 없었다. 실은 버지니아 울프와 미자도, 전쟁터에서 죽어갈 사람들, 그리고 강으로 뛰어든 소녀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조차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도처에 흐르고 있지만 여전히 들리지 않았던 말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단지 스쳐지나갈 뿐, 어느 순간 있었는지도 모르게 잦아들을 뿐인 바람이 있었기에 갈대가 보였던 것처럼.


3.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다시 읽는다. 여기에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나는 내 몸의 상처를 자극적인 서사로 재구성해 던지곤 했는데, 그건 타인을 향한 발화의 두려움에서 발로했던 자기방어였다. 어이없게 웃으면서 술안주 삼아 던지는 이야기들에는 내 감정이 없었고, 따라서 내 말도 없었다. 모든 고통을 배제시키고 사건들만 부각시키는 서사적 말하기는, 여전히 나의 고통을 진짜 ‘고통’으로 수용하기를 보류하고 있었다.
 고통을 말하기. 고통으로서 말하기. 그리고 고통을 위해 말하기.
 장롱에서 말하고 장롱에서 돌아오는 내 자폐적 서사를 깨뜨렸던 건 오로지 그녀의 말이었다. 한 세기를 건너 나와 공감할 수 있었던 그녀의 말은 나로서 내 고통마저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 상처들로 인해서 말할 수 없었지만, 말할 수 없었기에 그녀의 말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녀의 말은 한 세기를 건너, 그보다도 더 멀리 계속해서 살아 숨 쉬고 있던 것이다. 더 넓은 진폭으로, 보다 많은 생을 만나기 위해. 그렇다면 FTA를 반대하는 말들, 쌍용차의 해고를 규탄하는 말들을 포함하여, 전-지구적으로 외쳐지는 반(反)생명에 대한 우리의 울림들도 결코 공중에서 흩어지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든 말들은 강물처럼 도처에 흐르고 있다가, 또 다시 말 못하는 이의 귀에 희망으로 닿으리라.


4.


 태초에 말이 있었다.
 몸이 태어날 말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고통이, 사무치는 아픔들이.

 그러므로 내가 만났었던 것처럼, 그 어떤 죽음에도 침묵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생보다도 훨씬 가까운 곳에서, 생만큼이나 우렁차게 외쳤던 볼륨이었다. 오로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하여, 더 큰 삶을 사랑하기 위하여 말이다. 그리고 그 말 안에서 바로 내가, 우리가, 태어났던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편지는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 직전, 그녀 인생의 동반자였던 레너드에게 부친 것이었다. [본문으로]
  2.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본문으로]
  3. 2010년 9월, 충정로 맑은샘교회의 렉시오디비나 성서 나눔에서 공유된 이야기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4. 유하, 「7월의 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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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예술적 <자기만의 방>

김현화
(연구소 회원, 영국 Emerson College에서 설치미술 전공)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내놓은 이후, 많은 여성들은 남성지배문화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넘어서고 탈출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다양한 사적문화로 가득 채워진 많은 방들을 만들어내기에 분주했다. 이런 흐름은 지배문화에서 배제된 수많은 주변문화를 가진 이들에게로도 이어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세상 모든 이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 아니 적어도 자격이 주어진 듯 보이며, 중심과 주변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낯선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중 많은 부분이 지배 문화가 내는 확성기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리지만 적어도 이들은 발설할 장소와 기회를 가졌고 들어줄 마음이 있는 청중들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쯤해서 내가 하려는 말을 꺼내보자. 나는 아동들이 ‘예술의 봉사’를 받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한 사람으로, 아이들에게 미술, 특히 조각의 기초재료인 진흙으로 무언가 빚어내는 시간 사이사이에서 그들 삶의 중요한 흔적들을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돕고 싶다. 여러 핑계로 현재는 아이들이 아니라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조각 수업을 소개하고 그 강한 영향력에 대해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성인인 교사들 몸과 마음에 오롯이 살아있는 그들의 유년을 실감나게 만나는 중이기도 하다.

앞서 지배문화에 저항하며 ‘자기’를 찾아나서는 많은 목소리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나 여기 저항문화의 내용에도 역시 ‘성인’이라는 지배적 입장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간혹 청소녀/소년 문화를 걱정하는 제스쳐들이 나오고, 각종 아동권리선언문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내용은 이들의 의식주를 채워주고 일상생활이 제대로 영위되도록 하기 위한, 그리고 아동들을 사회화할 교육을 위한 걱정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분명 성인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를 아동들의 ‘자아 조우’(encountering the self), 자기만의 방 혹은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한 사유나 논쟁 등은 필자의 얕은 정보력 때문인지 그 시도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통상 아동들은 시간을 두고 자라나야 할 대상, 그리하여 미래에나 의미를 갖추게 될 존재로 취급되는 통에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기 전에는 이들이 현재 얼마나 섬세하고 드라마틱하게, 얼마나 깊고 심각하게 자아와 대면하며, 말하자면 예술의 서비스를 통해 자기만의 집 한 채를 스스로 지어낼 수 있는지 관심을 갖는 이가 소수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아동들의 권리 문제가 의식주와 돌봄, 미래의 삶과 사회를 위한 교육에만 집중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들의 깊은 내면을 제대로 무시하는 길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예술에 대해 작지만 중요한 예를 하나 들어 이야기해 보자. 이것은 우리에게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벽에 걸려 구경 당하는 죽은 미술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조력자로서의 미술이 가능한지, 아동과 청소년의 삶에 불가피한 예술 체험이 교실 내에서 실현될 수 있는지를 타진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흙으로 지어 올리는 빈 방 혹은 집

교과 과정으로 진흙 조소(clay modelling)수업을 하는 학교가 있다. 1학년(만 7세)은 2차원 평면 위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한 작은 진흙 조각들을 한 점 한 점 붙여가며 원형과 직선 형태를 만들어간다. 점차 이 형태를 발전시켜 집이나 성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 성의 문이나 집 창문은 진흙을 붙이지 않고 비워두어 비록 평면상이긴 하나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작업을 잊지 않고 하게 된다.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볼륨감 있는 기둥을 단단히 세우고, 만족할 만큼 두터운 벽을 만드는 동시에 아이들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며 채움과 비움 사이를 오가는 행복한 숨을 쉰다. 2학년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평면위에서 채움과 비움을 반복해 창조한다. 그러다가 아홉 살, 3학년(만9세)이 되면 평면에 있던 공간에서 좌-우, 위-아래, 앞-뒤가 있는 3차원적 공간,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공간을 만드는 작업으로 들어가게 된다. 평면 바닥에 누워있던 기둥들은 작은 발바닥을 굳게 땅에 대고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는 일어선 두 기둥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아치형 다리가 놓여진다.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무너져 내릴 듯한 위기를 몇 고비 넘긴 후 문틀이 준비된다. 벽체는 더욱 단단하게 그러나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게 두 기둥에 붙어있어야 한다. 그리고나서 드디어 돔 같은 지붕이 무겁게 내려앉으면서 가로질러 하늘을 잘라낸다. 드디어 진짜 공간, 내부와 외부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아이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다. 이때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듯이 아이들은 자신의 온 존재를 동굴 같은 그 집 안으로 들여 놓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기만의 공간 속으로 멜랑콜리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누워있던(horizontal) 기둥들을 일으켜 세우는(vertical) 일은 인간 직립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만)아홉 살 인생’의 중요한 획을 긋는다. 실제 이 시기의 아동들은 신체적으로도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인다. 오랫동안 학교 주치의로 지내며 조사를 해온 이들의 보고에 의하면, 아이들은 유독 이 시기에 맥박이 갑작스럽게 증가하여 심장의 중요성이나 그 역할이 어느 시기보다도 올라가게 되며, 이와 함께 혈중 당의 양이 급감하는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아동들은 성장과 함께 서서히 혈당이 올라감에도 유독 이 나이가 되면 상승 곡선이 일시적으로 하강하게 된다. 이는 병적 증상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치 않은 자연스런 감소로, 이 시기를 지나면 다시 자연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튼 (이를 원인으로 혹은 그 결과로) 자주 우울감과 허약함, 고독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감정을 감출 수 없게 되며 급기야 죽음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 이 시기 아동들의 성향이다. 물론 다양하게 표출되고 (학교거부, 복통, 짧은 호흡, 어지럼증 호소 등),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재미나게 시선을 빼앗아가는 게임과 TV 프로그램이 아이들의 표현을 막아서기도 하지만, 주의 깊은 귀와 눈을 잠시라도 그들에게 고정한다면 그들이 토해내는 급박한 단어와 몸짓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아이들은 이러한 신체적 위기와 함께 자신이 누구누구의 딸, 아들이 아니며 오직 ‘자기 자신’임을 처음으로 직감하게 된다. 밥상에 같이 앉아 식사를 하는 그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그런 길에 자신이 외롭게 들어섰음을 감지한다. 아직까지는 유아기의 흔적이 남아있던 1, 2학년 시기에 보았던 것과는 무섭도록 다르고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싶다. 혼자이고 싶다. 집을 짓고 싶다.

누구도 도움이 되어주지 않을 듯한 상황, 모두에게 버려져 내동댕이쳐진 숨 막히는 상황에서 그러나 다행이도 예술은 아이들을 기억과 자유의 공간,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창조하는 공간으로 이끌며 사랑스런 조력자가 되어준다. 더 이상 ‘인간’이 어떤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서서히 나타난 예술은 사마리아인처럼 아홉 살 인생들을 일으켜 세워준다. 그러다가 드디어 3학년이 끝날 무렵 문을 열고, 내/외를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 바깥으로 나오게 될 때, 혼자 들어가 침묵으로 세상을 맞으며 버티게 했던 자기만의 방은 당장은 빈 집 혹은 해체된 방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수년 후, 아이와 함께 같이 변하고 자라나 수많은 이웃들이 초대되는 공간으로 다시 살아날 것임이 분명하니 여기서 우리는 예술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는 예수를 떠올려 봄직하지 않은가.

현란하게 눈속임하는 듯 펼쳐지는 미술교육에 제동을 걸고, 소리 없이 의미 없는 듯 무심히 다가와, 행하는 자가 예술가인지 예술이 예술가인지 모르는, 예술주체가 전복되는 드라마가 아무 일 아닌 듯 교실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시끄러운 미술 교과서를 뒤로하고 소박한 나무판 하나와 진흙 한 덩이만 남겨놓으라. 그러면 그들이 모두 조각가 될 것이다. 아마도 요셉 보이스는 여전히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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