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접경지대(Frontier Distirics)

① Prologue - 지구화시대, 황새들과 함께 살기




정나진



      ‘난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특별히 ‘시리아’ 난민들에 관한 뉴스가 연일 언론매체에 등장하고 있다.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 이후 일이다. 아일란의 죽음은 역사적 죽음이 되었다. 그후 유럽연합은 지지부진하던 ‘난민쿼터제(유럽연합 회원국의 인구와 경제력 등에 따라 난민을 강제로 할당하는 제도)’ 시행에 합의했고, 난민 추가 수용 불가 입장이었던 영국의 총리도 “시리아 유엔 캠프에 있는 난민 수천 명을 추가로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개개인들의 관심 또한 높아졌다. 시민들은 난민 루트에 서서 “웰컴”이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환영하기도 하고 축구팀은 “Wir helfen(우리가 돕겠습니다)”이라는 완장을 차고 경기를 뛰기도 했다(독일의 대표적인 우파 잡지 <Bild>의 파퓰리즘적 후원 광고라는 비난이 거세지만). ‘난민’이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어하던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서도 ‘국내 난민 신청 승인 빈도와 난민들의 처우’ 등에 관한 분석과 르포 기사가 빈번해졌다. 

터키의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 아기 

난민 아일란 쿠르디(Eilan Kurdi) 를 추모하며 

(그림의 글씨 내용은 터키어로 

“인권이 더 이상 유린되어서는 안된다!”)




            독일 뮌헨의 한 역 앞에서 난민들을 환영하고 있는 독일 시민들                     독일 분데스리가 축구팀이 차고 있는 "Wir helfen" 완장

                              (출처 : 짤쯔부르쿠자이퉁)


      난민의 비극적 희생은 계속 있어왔다. 아일란의 죽음 한 주 전에는 역시 시리아 난민들로 추정되는 71구의 시신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지대의 버려진 냉동차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 시신들 중에는 4명의 아동도 있었다. 브로커들을 통해 무리하게(사실 자국으로부터의 탈출을 선택한 이후 무리하지 않은 루트는 없다) 탈출하다 배가 전복하는 등의 사고로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달리하는 일들도 빈번히 있어왔다. 북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의 가장 짧은 루트인 일부 지중해 구간은 사고가 하도 많이 나서 ‘통곡의 바다’, ‘난민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이다. 내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동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은 정착국에 와서 난민 지위를 받기까지 수많은 위험과 생존의 위기를 겪기 마련이다. 최근 들어 이러한 난민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식어가고 처우 또한 미비해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세 살배기 난민 아일란의 조용해보이는 듯 하지만 그래서 더 충격적이고 처참했던 죽음은, 난민들을 서로에게 떠밀기에 바빴던 유럽 각국에게, 또 일상의 거리에서 난민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개인들에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난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그동안 지각하지 못했던 일상이라는 그림의 ‘난민’이라는 배경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에 대한 갑작스런 자각의 표출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주국에서 ‘난민’이 ‘난민’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고 정착을 하기까지는 참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국제협약 상의 ‘난민’에 대한 규정[각주:1]부터가 그 판단을 모호하게 한다. 규정에 따르면 난민은 망명자인데,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박해로부터의 망명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 자국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난민은 1차적으로는 차별 없이 난민보호소에 가게 되겠지만, 거기서 망명 신청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자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이유들 중 하나로 박해를 받았다는 지난한 자기변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들은 이주국의 주관에 따라 난민 지위 획득 적격자/부적격자로 판단된다.(난민 자격 획득의 문은 종종 이주국의 예산과 사회분위기 등의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커지기도 좁아지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독일이 난민의 급속한 유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난민 수용 방안을 다시 정하고 있다는 기사가 새로 뜨고 있다.[각주:2])


                 북아프리카에서 바라본 유럽의 모습

   (‘2006 세계보도사진전’ 사진 부문 1등 작품 ‘빛과 그림자’)


       난민 지위를 인정 받았다 해도 그 사회에서 어울려 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미 난민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은 시작부터 따가울 때가 많다. 수없이 떠도는 이주자들 중에 도대체 어디까지가 ‘난민’인가 하는 물음을 묻는 순간, 눈앞의 난민에 대한 관심과 관용은 멈칫하게 된다. 연민과 관용은 보통은 ‘나보다’ 불쌍하고 처참함 앞에서만 발휘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보는 터키 해변가의 아기의 사진과는 달리, 내 삶의 현실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이방인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냉정해지기 일쑤이다. 내가 낸 세금이 허비되고, 나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존재는 아닌지, 더 나아가서 그들이 정말로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박해를 피해 온 자들인지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심사한다. 난민을 비꼬는 말로 ‘이주쇼핑’이라는 말이 있다. 현대의 난민들은 이동하면서 어디가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보호국이 될지 정보를 얻으며 움직인다. 과거의 보트피플이 일단 바다로 나가서 외국국적의 배를 무작정 기다렸던 때와는 달리, 요즘에는 GPS와 핸드폰으로, 그리고 산업화된 브로커들을 통해 그러한 정보를 확인하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시선과 문화적 이방인으로서의 여러 제약들은 그들이 사회 안에 쉽게 어우러지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종의 게토 현상에 대해 사회는 또다시 그 그룹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가지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황새 두 마리(사진: 김성호(한겨레신문))


    얼마 전 신문에서 충남 예산에서 멸종 위기에 놓인 황새를 다시 번식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기사[각주:3]를 읽은 적이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황새의 습성과 황새가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의미였다. 텃새이면서 철새이기도 한 황새는 한국전쟁을 치르며 아름드리 나무가 많이 파괴되어 둥지를 틀 곳이 적어지고,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이 늘면서 환경이 파괴되어 그 수가 점점 더 줄어들다가, 1971년을 끝으로 멸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황새는 일본에서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다.(텃새인 황새는 한국과 일본을 한 터전으로 삼으며, 때로는 철새로 조금 멀리 러시아 연해주 지방 등지에서 날아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황새를 복원하는 일이 곧 전원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황새는 날개를 펴면 2미터나 되는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 포자식자[각주:4]로, 생물다양성이 풍부해야만 서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황새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황새를 방사하는 것을 넘어 농약을 쓰지 않는 생태적인 농사를 지어야 하고, 하천이나 습지 같은 자연환경도 친환경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결국 황새가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지역의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지 않고 다른 다양한 종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며 황새의 야생복귀는 황새 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건강한 자연 환경 전체를 만드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황새 이야기를 읽으며, 난민을 포함한 이주자들이 곧 황새 같은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이들이 선택해서 찾아온 곳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만큼의 가치가 이루어진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황새가 사는 마을이 풍요로운 생태계의 상징인 것처럼 이주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 또한 풍요와 환대의 표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의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마치 황새가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서 단순한 황새 방사를 넘어서서 생태계 복원이 먼저 되어야 되는 것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온 이주자들이 자국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제도적 장치와 함께, 이주자들에 대한 자국민들의 시선과 의식도 함께 변해가야 할 것이다.  

      세 살 배기 난민 아기의 죽음에 눈물을 흘릴 관용과 연민의 준비가 된 마음이라면, ‘타인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적대[각주:5]’일 때 그 반대로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인 환대는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각주:6]여야 한다. 난민 ‘조차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국가적 상황에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제도적 난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일상에서 만나는 개인의 삶에게라도 한 발짝 나아간 질문을 하고 싶다. 왜 ‘난민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우리)는 타자의 욕망의 실현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고 판단할 자격이 있을 만큼 (하늘 아래) 타자에 대한 존재 우위를 가지고 있는가?  

      독일의 지르마르 가브리엘 부총리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난민들에 대한 대응과 정착에 대한 정책을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그 도전은 정책과 제도를 넘어서는 환대와 통합[각주:7]의 문제를 포함한 것일 것이다. 환대와 통합의 문제는 제도와 정책이라는 거시적인 내용도 포함하겠지만, 그러나 시작은 개인이 마주치는 일상적인 미시의 공간에서부터일 것이다. 2009년 이후 한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한 이가 만이천여명이나 된다. (그러나 그들 중 4.2% 만이 난민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한국에는 이미 약 200만 명의 이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제는 길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젠가는 어쩌면 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어느 곳의 이주민이 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우리는 지구화 시대 ‘황새’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 필자소개

  글쓴이는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을 전공으로 지구화, 공간, 이주 등에 관심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과 오순도순 함께 사는 것이 꿈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의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이거나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위험 때문에 국적국 외에 있는 자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 또는 받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 자, 및 상거소(常居所)를 가지고 있던 국가 외에 있는 무적 국자로 그 국가에 돌아갈 수 없는 자, 또는 돌아가기를 희망하지 않는 자(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IA(2) 참조) [본문으로]
  2. http://news1.kr/articles/?2447094 [본문으로]
  3. “조홍섭의 물바람 숲: 황해도 연백평야에도 황새 복원을”, 한겨레신문, 2015년 9월 14일자. [본문으로]
  4. Berger의 종의 분류(1997)에 따르면 우산종(umbrella Species)이라 한다. 몸집이 큰 종이 필요로 하는 면적의 서식지를 보전함으로서 그 서식지에 함께 살고 있는 수가 많고 크기가 작은 다른 종들이 자연적으로 함께 서식할 수 있으므로 종 다양성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개념이다. [본문으로]
  5. Karl Smith, 『정치적인 것의 개념』, 7장 정치이론과 인간론 [본문으로]
  6.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209쪽. [본문으로]
  7. 사실 ‘통합(Integr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조차도 불편하다. 그동안의 대부분의 다문화 정책의 내용이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동화(assimilation)’를 요구해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서로의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뒤섞임’을 뜻하는 우리말 ‘어우러짐’을 지향하고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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