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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삽질과 그 대응에 관한 단상

정혁현
(한살림교회 목사 | 본 연구소 운영위원)


이 땅을 흐르는 가장 큰 네 개의 강이 온통 파헤쳐지고 있다. 이른바 ‘4대강 살리기’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공사판 때문이다. 삽질이다. 토건행위로서의 삽질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삶의 환경을 구축해온 인간에게는 앞으로도 일정하게 필수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삽질이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 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정도로까지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4대강 살리기’란 강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강의 죽음, 혹은 심각한 질환이란 무엇인가? 또한 강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면 대체 강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녹색성장’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진행되는 4대강 사업의 핵심은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강 자체를 관광 생태 사업의 소재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 때 강의 생명이란 인간에게 필요한 물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강의 능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을 대량으로 필요로 하는 산업자본, 나아가 강의 풍광을 상품으로 만들어 낼 관광자본의 요구에 부응하는 강의 능력이다. 강이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여 어서 건강해져서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 부응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좋다. ‘4대강 살리기’가 그간 강이 우리에게 제공해왔던 것을 초과하여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면 왜 공연히 시비를 걸겠는가?

그런데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주체인 MB정부가 정말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지 말이다. 정말 그들은 믿고 있는 것일까? 강의 환경이 좋아져 깨끗한 물이 넉넉하게 흐르게 될지, 그리하여 온 국민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하여 기꺼이 찾을만한 환경상품이 될지를 말이다. 그들이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할 만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결정적 증거’는 사업의 졸속성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4대강을 살리는 사업은 좋은 일이다. 정말 그렇다면 시간과 노력만 들인다면 얼마든지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4대강은 한반도의 생명줄이라고 할 정도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물론 다양한 생명들에게도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 하더라도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물은 더 깨끗해질지, 이 사업의 결과가 미치는 인간의 삶의 질과 다양한 생명체들의 환경 조건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따지고 또 따져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수정되고 또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바람직한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면 그들이 확신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이 세운 계획이 조금도 수정되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삽질이다. 여기서 삽질이란 허튼 짓, 곧 뻘짓한다는 말이다.

그들의 이 ‘무대뽀’ 확신과 뻘짓거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이러한 판단이 생태적 판단에서도, 산업이나 복지적 판단에서도 심지어 경제적 판단에서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확신은 오직 정치적 판단에서 온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4대강사업은 MB정권에게 결코 삽질이 아니다. 다시 말해 4대강 사업의 진정한 성격은 MB정권의 성격 그 자체로부터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전선의 강화이다. 신자유주의는 투기적 금융자본의 무한자유와 노동자 저항의 분쇄를 통해 자본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노동자 착취동맹이자 축적위기 대응동맹으로서의 정체체제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4대강사업은 20조가 훨씬 넘는 세금을 건설자본에 이양하는 폭력적 축적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 자금은 다시 부동산을 비롯한 다양한 투기산업으로 넘어가 또 다시 인민의 재산을 손도대지 않고 등쳐내는 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다. 투기적인 금융활동이 경제지표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사회, 부가가치의 대부분이 성실한 노동과 열정적인 연구개발에서 오지 않고 투기활동에서 오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남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재산을 후려내는 정신성이야 말로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칭송될 것이다. 즉 4대강 사업은 MB정권과 같은 반민주적 신자유주의 정권의 지속을 위해 가장 적절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적 조건을 창출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MB정권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사업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4대강사업을 되돌릴 수 없도록 저질러 놓으려는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자연환경이 아니라 정치환경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4대강사업은 ‘자연환경파괴’가 아니라 ‘정치환경파괴’ 사업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사업의 목적은 온 국민의 정치의식을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에 포섭 혹은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 사업의 문화적, 생태적 측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결정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이들의 구호가 온통 환경과 생명의 문제에 집중되어있는 현상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4대강사업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 ‘살생금지’를 주요계율로 받아들이는 불교인들을 중심으로 종교인들이 포진해있다는 점은 이를 반증한다. 또한 진보적인 매체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기 위해서 취하는 주요 선전 전략은 지금 현재의 4대강이 ‘있는 그대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리는 것이다. MB정권은 4대강사업의 진정한 성격을 감추고 있고, 반대세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읽지 못하고 있다. 이래저래 4대강사업의 진정한 성격은 애매모호한 자연과 영성이라는 주제의 한계 속에서 은폐되고 있다. 자연과 영성이라는 이슈의 탈정치적 성격이 결국에는 현실타협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의 아름다움, 즉 강의 의미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할 수 있을까? 생활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강의 아름다움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인간의 환경조건을 결정하는 강은 결코 ‘있는 그대로’ 아름다울 수 없다. 강은 어떤 이에게는 마실 물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공장이나 농장에서 활용할 공업 및 농업용수이다. 또 매년 범람을 겪어야 하는 어떤 이에게는 끔찍한 재앙이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경치이자 휴식의 공간이다. 또한 생명 그 자체의 절대적 무의미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이들에게 강의 의미는 종교적인 것으로 고양되기도 한다. 강의 의미는 다양하며 이 의미들 사이에는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성이 가로 놓여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강이 그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는 정치적으로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자연으로서의 강은 엄밀하게 말해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4대강사업은 바로 강이 가지고 있는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정치적으로 독점하여 배타적으로 활용하는 행위로 파악되어야 한다. 결국 4대강문제는 자연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에게 전개되어야 할 사회적 정의의 문제이다. 즉 강의 다양한 의미를 일정한 보편성을 갖고 분배하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의 문제라는 것이다.

조금 더 복잡한 문제로 들어가 보자. 4대강사업으로 파헤쳐지는 강과 연안에서 다양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그 곳을 떠나간다. 만일 4대강사업이 정부원안대로 완성된다면 강과 그 주변의 종다양성은 분명 빈곤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생명체들의 생명권을 위해서 이 사업에 반대하는 것인가? 우리는 강을 생명의 어머니, 초월적인 신화적 존재로 모시기 위해서 환경파괴에 반대하는 것인가? 나는 인간의 인권과 생명체들의 생명권을 평등이라는 동일한 지평에서 파악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문명은 혼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이 인간의 혼란이 회복불가능한 생태계 파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문명은 바로 이러한 자연과 문화의 폭력적인 단절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프로이트가 『문명과 그 불만』에서 통찰한 바가 아닌가?

물론 나는 다른 생명체들의 생명가치가 인간 생명의 가치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인 반면, 자연 그 자체는 인간의 의미의 잣대로 파악 불가능한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은 결코 동일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하지만 대개의 인간들은 자연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영화 <아바타>가 보여주듯이 인간과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오인한다. 이런 오인은 물론 인간의 인식조건인 ‘동일시’에서 온다. 그러나 동일시 할 수 있는 능력도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자연은 결코 인간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자연은 오직 물리화학의 법칙, 그리고 생명 그 자체의 동인에 의해 생존하고 사멸할 뿐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물학적 존재로서 생태계의 사슬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슬 안에서만 그 생물학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의미는 그 생태적 존재에서 파악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만일 우리가 이 초과분이 갖는 의미를 가볍게 여긴다면 시쳇말로 “인생 뭐있어?”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삶의 의미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는 결정적인 문제인 반면 다른 생명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이 시대의 웰빙 열풍이 이와 같은 인간 삶의 의미가 갖는 독특한 차원에 대한 몰인식 혹은 근원적인 회의에서 오는 일종의 허무주의라고 생각한다. 웰빙이라는 구호의 근원적인 허무주의는 그것의 관심이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과 건강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웰빙 열풍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인생 뭐있어? 건강하고 오래 살면 되지.” 물론 자본주의 시대에서 인간의 건강과 장수의 강조는 고급 상품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주체를 훈육한다는 의미에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이 생물학적 생명을 넘어서는 초과적 삶의 존재라는 이중성 속에서 자연과 관계 맺을 수밖에 없다. 순수하게 인간적인 삶의 의미는 바로 이 초과적인 삶에 있다. 그러나 이 초과적인 삶은 생물학적 존재로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로서만 초과적인 삶을 살 수 있음에도, 역설적으로 초과적인 삶이 결코 자신을 생물학적 생명의 법칙에 종속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인간의 이중성 사이의 관계는 결코 평화롭지 못하다. 결정적인 시점에서, 즉 생명의 요구가 초과적인 삶의 포기를 강요할 때, 이 둘의 관계는 적대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초과적인 삶은 자신의 근거인 생물학적 생명을 배신하거나 파괴하기도 한다. 최근 4대강사업에 반대하여 자신의 몸을 불사른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은 그 단적인 실례가 아닌가?  어떤 생명도 자의로 이렇게 하지 못한다. 물론 인간은 대체로 이 초과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생물학적 존재로서 자연의 풍요로운 존속 가능성에 유의한다. 하지만 다른 생명체들은 자연과 이렇게 관계 맺지 못한다. 그들은 어떤 생명체이든 조건만 허락한다면 다른 생명의 존속 가능성에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종을 파국에 이를 때까지 확장시킬 것이다. 공룡의 멸종은 그 단적인 예가 아닌가?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지구상의 일정 지역에서 탄생하여 자신과 함께 다른 종을 파국에 이르게 한 생명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조건만 되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인간이 바로 이러한 조건을 스스로, 곧 인공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점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오로지 종의 존속과 확산에 눈먼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인간과 자연의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미를 구성하는, 자연을 초과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자신의 생물학적 생명을 삶의 의미를 향한 기반인 동시에 도구로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로서의 인간 말이다. 인간은 오직 자연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존재로서만 인간이 만든 생태적인 재앙에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의미를 정의롭게 분배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간을 자연의 청지기로 자리매김하는 창조신학의 본뜻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창세기의 사유를 ‘인간중심주의적’이라고 매도한다. 이러한 입장은 창조신학에 대한 사유의 빈곤이거나 오늘날 세계가 봉착한 위기의 ‘속죄양’을 찾으려는 책임회피일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을 초과하는 존재로서 생태의 폐쇄회로 속에 있는 자연의 의미를 개방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자연은 비로소 전혀 새로운 가능성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배타적인 ‘인간중심주의’ 안에서는 파멸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자연의 돌출점이라는 특이성을 갖는다. 인간은 자신의 통합 불가능한 이중성 안에서, 이 이중성을 부정적인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의 터전으로 인식하는데, 하느님은 이와 같은 부정이 긍정으로 변화하는 기적적인 도약의 순간에 관한 이름이기도 하다. 그 역도 가능하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적’ 긍정이 무의미의 심연으로의 전락하는 순간, 즉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로 깨닫는 부정적인 순간에 관한 이름이기도 하다.

파괴적인 4대강 사업은 물론, 인류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신화적 상상력이나 동일시의 환상에 기초한 자연과의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동일한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근원적인 차이이다. 원시 혹은 고대적 사유로는 우리가 직면한 위기에 결코 대응할 수 없다. 그것이 ‘오래된 미래’라는 생각은 치명적인 망상이다. 대량파괴 테크놀로지를 가진 원시 혹은 고대인을 상상해보라. 돌아갈 길은 없다. 이 위기를 낳은 것도 인간의 지성이지만 이 위기를 돌파할 인간적 능력 역시 오직 끝까지 사유하고 행위 하는 지성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환경위기에 관한한 이러한 지성은 정치적인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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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서 욥은 누구인가?
 - 최형묵 목사의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을 보고 

정혁현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이라 하면 대개 잠언과 전도서 또는 시편을 떠올린다. 물론 『욥기』도 지혜문학에 포함되지만 대중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전도서나 잠언은 솔로몬, 즉 성서의 인물 중 가장 지혜로울 뿐 아니라 가장 큰 영화를 누린 인물이 쓴 문서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도서의 저자, 즉 ‘전도자’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전도서와 잠언은 이른바 ‘성공한 사람’의 인생관과 처세술이다. 적어도 솔로몬의 영화를 욕망하는 성공시대의 독자들은 이 지혜서들을 그렇게 읽는다. 그러므로 지혜서들은 요즘 서점에 가면 소위 ‘실용서’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책들, 대개 성공에 따른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실패자들에게 너그럽게 충고 한 마디 하는 책들의 반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성공’이라고 알려진 삶을 간절히 욕망하는 독자들은 그런 책들을 읽으며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찾아내고 다시금 성공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곤 한다.

대체로 그런 책들은 성공한 자가 자신의 삶을 성공 이후의 시점에서 ‘사후적으로’ 돌아보며 정당화하는 형식을 가진다. 이런 식으로 보면 과거의 선택은 대부분 성공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현존하는 질서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조건이었을 뿐 결코 변화시켜야 할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적 양극화가 점점 더 극심해지는 요즈음의 상황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현상을 보면 씁쓸하다. 성공의 문은 좁아지며 남루한 삶은 늘어만 가는 현실에서 이런 실용서들이 실패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패한 이들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성공한 소수의 영광을 더욱 더 빛내는 주제넘은 봉사활동만 하고 마는 격이 되는 것이다.

파이를 나눌 생각을 하지 말고 키울 생각을 하라는 신자유주의의 지혜는 가진 자, 성공한 사람에게 실패하고 가난한 사람의 몫까지 몰아주라는 말에 다름 아님이 밝혀졌다. 더욱이 글로벌 금융위기는 커진 것처럼 보이던 파이가 실상은 불면 꺼지는 투기 거품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이라면 허황된 성공신화에서 깨어나 비록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맡은 바 직무를 기쁘고 성실하게 수행하며 소박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대다수 찌질이들의 삶을 재평가하고, 이들의 생활을 지속가능하며 발전 가능한 궤도에 올려놓는 일이 전사회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여전히 성공신화가 정치권력까지 틀어쥐고 양극화를 극단까지 몰아붙이는 굿판으로 난리법석이다. 성공한 자, 가진 자들이야 이런 현실이 그 자체로 잔치 마당일 터이지만, 대체 실패한 이들은 왜 남의 잔치에서 춤을 추는 것인가? 문제는 맘몬에 현혹된 정신이다.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참 지혜의 모범을 『욥기』에서 찾고자 한다. 그런데 『욥기』는 결코 쉽게 읽히는 문서가 아니다. 『욥기』는 구약성서 지혜전승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혜전승 중의 다른 문서들, 예를 들어 전도서나 잠언 등은 딱히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읽어보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만한 내용들이다. 그런대 『욥기』는 그렇지가 않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내용은 대개 욥을 비난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뿐이다. 더욱이 친구들이 욥의 회개를 촉구하며 던진 이런 발언들은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어리석다”(42:8)는 핀잔을 듣는다. 반면 주인공 욥의 발언들은 감히 입에 올리기도 불경스러운 경우가 많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6:4)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7:16) 심지어 하느님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주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10:3) 도저히 의로운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들이다. 사정이 이러니 상식적인 수준에서 『욥기』를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이내 혼란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다. 대체 『욥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저자 최형묵 목사에게 『욥기』는 성공한 자들의 지혜가 아니라 실패한 자들의 지혜이다. 욥이야말로 한 순간에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배척되었으며, 심지어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자신의 육체로부터도 괴롭힘을 당하는 찌질이 중에서도 상 찌질이로 전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대 저자에게 욥은 성공한 사람들을 선망하면서, 그들의 충고에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욥의 정체는 “도발과 항변”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과 항변이야 말로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과의 대면,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희망의 언어”이다.  

『욥기』는 지혜문학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 때문에 구약신학은 물론이요, 신학 전반을 넘어 철학과 문학 분야에서 방대한 연구와 해석이 축적되어 있는 문서이다. 이 모든 자료들의 성격을 함부로 싸잡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욥기』에 대한 관심은 대개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신학적 주제에 집중되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리신다면 왜 이 세계에 악과 불의가 존재하는가?” 이러한 신정론의 질문은 자비로운 하느님의 통치를 믿는 기독교 신앙을 궁지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악과 불의가 현존하는 것은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 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며. 결국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기 때문이다. 『욥기』에 관한 신학적 연구는 대개 이러한 궁지를 돌파하여 ‘전능한’ 동시에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신 개념을 수호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노력은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논리를 돌파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평신도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고도의 추상적이며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최형묵 목사의 책 역시 신정론의 문제의식 안에 있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전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욥기』가 지혜문학 중에서도 독특한 문서인 것은 사실이지만, 욥이 처하게 된 상황, 즉 의로운 사람이 고통에 빠지는 삶의 상황은 오래전부터 보편적인 것임에 착안한다. 그 이유는 신정론이 제기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삶의 현실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최형묵 목사는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의 문제에 애써 눈감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 온몸으로 저항하고 항변하는 욥 같은 인물에게서 기독교 신앙인의 한 모범을 본다. 따라서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전능한’ 동시에 ‘자비로운’ 하느님 개념을 수호하는 일에 조금도 애쓰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욥기』 안에서도 이러한 신학적 개념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모두 욥을 비난하는 그의 친구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욥기』 안에서도 하느님의 핀잔을 듣는다.

반면 저자의 관심은 어떻게 이처럼 부조리로 꽉 막힌 현실에서도 결코 저항과 항변을 포기하지 않는 욥의 태도가 어떻게 기대할 수 없었던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내는가에 집중된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신 욥의 신앙은 주어진 현실 자체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현실에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음을 통탄하고 이를 저항과 항변을 통해서 구현하고자하는 불굴의 정신이다. 아마도 이러한 불굴의 정신이야말로 창조세계의 청지기 정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신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반전의 희망 욥: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은 그 연구 대상인 『욥기』와 동일한 관심사와 방법을 가진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함부로 『욥기』를 요약 정리하여 그 핵심을 추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욥기』의 서술을 따라가면서 이 구약성서의 독특한 지혜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 시대의 상황이라는 증폭기를 통해 말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욥기』를 우리 시대라는 맥락에서 다시 쓴 2009년 판 『욥기』, 혹은 신자유주의 양극화 시대의 『욥기』라 할 수 있다. 연구가 연구 대상과 동일한 시야를 확보했기 때문에 분출되는 생산성은 다양하지만, 이 책의 경우 두드러지는 것은 여느 『욥기』 연구서보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동시대적 울림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반전의 희망”은 결코 주어진 현실에서 찌질이가 결국 ‘운 좋게’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는 성공신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전은 욥의 저항과 항변이 초래한 현실 그 자체의 뒤집힘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기독교 신앙의 ‘회개’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회개는 단순히 신앙인이 주어진 현실 내부에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뒤집히는 사건, 지혜로운 것들이 어리석어 보이고, 높고 거룩했던 것들이 천하고 하찮아 보이는 세계 그 자체의 뒤집힘이 아닌가?

기독교인의 성서 읽기는 대체로 자기 확신의 재확인에 그치는 수가 많다. 이 때 성서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거울처럼 사용하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며 이를 하나님으로 착각한다. 이를 나르시스의 성서읽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때 우리의 “아멘”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이런 성서 읽기는 폭 넓은 성서이해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씀, 듣기 좋은 말씀만 반복적으로 읽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성서를 이런 식으로 읽는 신앙인들에게 『욥기』는 불편한 책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식당개업식 문구가 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욥기』 안에서 결국 하나님의 핀잔을 듣는 발언을 마치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웃지 못 할 오해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성서를 읽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침묵시키고 나의 욕망이 원하는 발언을 하나님에게서 강탈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조심하려 하지만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훈련이 충분하지 않아 성서 읽기를 매우 어려워하는 신앙인들 또한 적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최형묵 목사의 책은 하나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 책은 현직 목회자로 천안살림교회를 담임하는 저자가 교인들과 함께 『욥기』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초보적인 신앙인의 수준에서 『욥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욥기』를 통해 신앙인이 들어야 할 말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의 탄탄한 민중신학적 입장과 목회적 경험을 버무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고도 명확하게 표현해내는 깔끔한 문체 덕분일 것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총체적인 위기의 시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에 살면서도 창조질서를 거슬러 맘몬의 질서를 강요하는 배반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창조질서는 인내의 임계점에 서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위기를 깊이 자각하는 신앙인들조차 어디에서부터 출구를 찾아야하는지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희망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절망의 장벽 앞에 선 인간이 세계와 함께 파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 최형묵 목사는 『욥기』를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신실한 신앙인의 씨름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세계에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신앙적인 삶의 구체적인 의미를 묻는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 <기독교사상> 2009년 12월호 서평
자료 출처
 : 천안살림교회 홈페이지




연구소가 기획하고 도서출판 동연이 펴내는 <성서_현대를 읽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됐습니다. 성서와 더불어서 현대를 살고 있는 나를 살피고, 오늘의 인간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이 시리즈는 욥기를 새롭게 읽는 첫 번째 책에 이어 앞으로 다음과 같은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깊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권 『무덤에서 모태로 - 생명을 살리는 성서의 지혜』(저자 : 구미정)
            3권 『다니엘과 함께』(저자 : 김응교)
            4권 『구약에서 영성 읽기』(저자 : 김은규)
            5권 『'나는 누구인가' - 성서에서 이웃에 관한 질문들』(저자 : 정혁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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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 성서_현대를 읽다 1

『반전의 희망, 욥 - 고통 가운데서 파멸하지 않는 삶』

지은이_ 최형묵
펴낸곳_ 도서출판 동연
펴낸날_ 2009년 9월 6일
쪽수_ 272쪽
크기_ 148×210mm
장르_ 종교 / 기독교신학 / 구약학
값_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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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선』

지은이_ 브라이언 다이센 빅토리아
옮긴이_ 정혁현
펴낸곳_ 인간사랑
펴낸날_ 2009년 11월 20일
크기_ 223*152mm (A5신)
값_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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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인가 귀환인가?
- 임필성의 <헨젤과 그레텔>에 관한 신학적 읽기

정혁현
(한살림교회 목사 | 본 연구소 운영위원)

한 편의 영화가 시대의 예표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지난 17대 대선이 지난 며칠 후 개봉되었던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영화를 검토하면서 이러한 질문에 답을 구해볼 수 있다. 이 대선을 통해 온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여기저기서 87년 이전의 군사독재상황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이 재연되고 있다. 재벌 등 가진 자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한계상황에 몰리고 있으며, 인사에서 입법에 이르기까지 공영방송과 인터넷의 비판 기능을 제거하려는 집요한 언론 통제 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의 거의 모든 정책을 토론과 합의 과정을 최소화 한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일관된 통치 태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폭력적인 국가 기구, 특히 경찰이 그 폭력적 속성을 감추지 못하고 전면에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거꾸로 흘러 8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고 탄식한다. 이러한 탄식에는 어떤 역사철학이 있다. 시간은 미래로 흐를 때 자연스러우며, 이러한 흐름 자체가 진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관에서는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만사형통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임필성 감독의 <헨젤과 그레텔>은 전혀 다른 시간 의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 역시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연관 관계를 사유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결코 흘러가버릴 수 없는 과거가 반복적으로 오늘로 ‘귀환’한다.

영화의 원작인 그림형제의 동화는 전 세계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작품이지만, 사실 상당히 어둡고 엽기적이다.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깊은 숲 속에 유기된다. 뜻밖에도 숲 속에서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하여 버려진 슬픔을 잊는가 싶지만 과자의 집은 식량을 구하는 마녀의 미끼였다. 아이들은 마녀와 먹느냐 먹히느냐는 처절한 생존의 쟁투를 벌여야 한다. 살벌하고 가혹한 세계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 동화를 읽어주며 아이들이 과자의 집이라는 환상에 빠질 것을 예상하며 흐뭇해 하지만, 아이들의 내면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임필성 감독은 원작의 기괴한 상상력에 기대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낸다. 영화 <헨젤과 그레텔>의 시공간적 배경은 오늘의 한국이다. 은수(천정명)는 깊은 산에서 차를 몰다가 부주의로 사고를 당한다. 골짜기에 떨어져 정신을 잃었던 그가 깨어났을 때. 그 앞에 동화 속의 소녀 같은 아이 영희(심은경)가 서있다. 은수는 몸도 불편하고 밤도 깊어 우선 아이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져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즐거운 아이들의 집’. 간판 그대로 집은 꿈과 환상의 공간처럼 지어졌다. 그러나 이 과도하게 환상적인 외양은 그 공간이 겪고 있는 비극을 감추는 가면일 뿐이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모범적인 엄마 아빠와 세 아이가 사는 집. 너무나 완벽해서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의심스러운 이 공간은 은수가 이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존재했던 세계와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 분명한 것은 두 세계가 공간물리학적으로 연속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이튿날 아침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의 다음날에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즐거운 아이들의 집’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세계의 공간은 중심에서 멀어지는 방식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중심으로, 다시 말해 공간의 진실 속으로 파고들어가야 한다. 교과서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아이들의 부모는 친부모가 아니었다. 물론 양부모도 아니었다. 그들 역시 은수처럼 자신들도 모르게 이곳으로 끌려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이곳으로 끌려 들어온 어른들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홀려 들어와 아이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사연이 좀 상투적이기는 하다. ‘즐거운 아이들의 집’은 원래 고아원이었다. 부모에 의해 버려진 아이들이 기거하는 곳. 그만큼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했으나 원장 변집사(박희순)는 불쌍한 아이들을 이용해 치부를 하는 더러운 인간이었을 뿐 아니라 무기력한 아이들에게 갖가지 폭력을 행사하면서 변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악한 악마였다. 악마에 맞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랬던 것일까? 함께 생활하던 아이들이 원장의 폭력과 착취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던 세 아이에게 파괴적인 능력이 생긴다. 마침내 원장을 죽인 아이들은 ‘즐거운 아이들의 집’을 그들이 꿈꾸던 동화의 세계와 같은 세상으로 꾸미고는 이 세계와 단절된 공간으로 폐쇄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아이들은 공간과 함께 응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죽었으나 죽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것이 모든 귀신들의 운명이다. 귀신들은 단순한 혼령이 아니다. 귀신들은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육체적인 존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적인 존재들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지만 상징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삶, 지젝은 이러한 상태의 존재를 ‘산 죽음’(living dead)이라고 지칭한다. 그들은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서 존재하면서 두 세계를 매개한다. 상징계가 인간의 언어를 통해 구성된 세계라고 한다면, 실재계는 언어의 불완전성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인간의 언어로 포섭하지 못한 세계, 혹은 인간의 의미체계가 흘리거나 잊어버리거나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세계가 그것이다. 구태여 돌아갈 것 없이 노골적이며 분명한 예를 들어보자. 지난 1월 20일의 ‘용산참사’는 이명박 정부가 구축한 상징계, 즉 “경제 선진화를 통한 고품격 일류국가”의 실패와 불가능성이 뚜렷이 가시화된 ‘실재의 침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 자체가 하나의 실재일 수 있다. 1987년의 민주화 투쟁이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 민주주의에 돌이킬 수 없는 성과를 낳았다는 지난 20여 년간의 진보담화를 하나의 상징계로 본다면 말이다. 실재의 침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사회적인 차원에서든 언제나 섬뜩하고 끔찍한 사건이다. 그것은 언제나 개인이나 사회가 터하고 있는 상징체계 자체를 붕괴시키면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실재는 우리를 순식간에 암흑, 무의미, 혼돈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실재는 왜 나타나는 것일까? 과거는 왜 귀환하는 것이며, 영화 속의 아이들은 왜 다른 공간의 존재들을 자신들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이들 역시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원장을 죽이고 폭력을 중지시켰지만 그들이 끊어버린 폭력의 흐름을 자신들이 소망했던 새로운 흐름으로 전개시키지 못하고, 중지 그 자체에서 멈춘 채 환상의 세계 속으로 스스로를 폐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폭력을 중지시켰던 아이들의 능력은 창조적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끊었던 원장의 폭력을 스스로 대행하는 반복강박의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소망 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가족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아이들이 자신들을 폐쇄시킨 비현실과 소망의 구체적인 무대여야 할 구체적인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메울 수 없는 심연으로 인해 실패로 귀결될 뿐이다.

우리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80년대가 귀환하는 이유를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의 이행기적 성찰성을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김소연의 연구1)는 핵심을 찌른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영화의 시대성을 회복한 80년대적 비판적 성찰성과 미학적 실험성의 성과이자 90년대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끈 동력으로 평가받던 이 영화들을 단호하게 “이중의 실패”로 규정한다. “일차적으로는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들이 80년대성과 90년대성의 이접을 거쳐 결국은 80년대성의 폐기 혹은 순화로 나아감으로써, 영구히 반복되어야 할 생생한 80년대적인 혁명성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80년대의 히스테리적 혁명성 자체도 구조적으로 대타자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내속적인 위반이나 주변적 전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즉 아직은 온전한 여성적 윤리의 추구에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는 점이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의 일차적 실패에 가중치를 부여한다.”2)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에서 예표적으로 드러난 1990년대의 정신성은 80년대로부터의 도피, 나아가 80년대의 성과를 즐기기 위해 ‘미완을 완료로 규정하기’였다고 할 수 있다. 패배자의 내러티브를 성급하게 승자의 내러티브로 변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90년대는 <헨젤과 그레텔>의 아이들처럼 자신을 87년에 폐쇄시키고 환상 속에 유토피아를 건설해 안주해버린 시대가 아닐까? 그리하여 80년대성은 죽었으나 죽지 못하고 산죽음의 상태에서 끊임없이 오늘날의 세계 속으로 그 끔찍한 얼굴을 시도 때도 없이 들이미는 것이다. ‘완료’ 상태로 방부처리된 80년대가 박물관 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를 탈출하여 돌아다님으로써 ‘민주화, 선진화’ 담화의 실패와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섬세하게 영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은수는 어떻게 하다가 실재와 대면한 것일까? 물론 자동차 사고 때문이다. 그리고 사고는 운전 중 통화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자 친구 혜영과 통화하고 있었다. 영화는 명료한 상황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녀는 아마도 임신중절을 결심한 것으로 보였으며, 은수는 이를 “무책임한 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지에 빠진 여자 친구의 상황이 보여주듯 은수는 그 “무책임한 일”에 공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도입 장면을 근거로 우리는 <헨젤과 그레텔>이 어린이 착취 유기라는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게 만나는 지점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의 실재라는 개념은 단적으로 말해 프로이트의 ‘증상’ 개념과 통한다. 증상을 구성하는 것은 과거에 상징화되지 못하고 억압된 트라우마 사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사건이 언제나 현재로 귀환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징화 흐름이 잠시 어긋나는 어떤 지점에서, 예를 들어 영화 속의 은수처럼 여자 친구를 “무책임하다”며 과잉규정함으로써 자신의 공모를 감추려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트라우마의 과거는 현재로 귀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비극적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아니 이러한 악순환을 낳는 에너지를 어떻게 억압하지 않는 방식으로 승화할 수 있을까? <헨젤과 그레텔>이 예표적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이 영화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시점에서 이명박 시대를 앞서 보여준다는 것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트라우마를 성급하게 규정하고 응결시켜버리는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나 트라우마 앞에서 상대주의적 절망으로 도피하는 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3)와 달리 비억압적 승화를 향한 어떤 길을 모색하고 있다. 영화의 어느 시점에서 은수는 ‘밖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을 중단하고 ‘안으로’ 파고 들어가 ‘즐거운 아이들의 집’이라는 공간과 세 아이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하며, 성취되지 못하고 동결된 공간과 아이들의 소망을 ‘구원’하기 시작한다. 이는 동시에 은수 자신의 무의식적 내면을 향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비난했던 “무책임”과 폐쇄된 공간과 아이들의 진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로마서의 유명한 구절을 기억해야 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서 8: 19). 모든 피조물 속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바로 이 신음소리로부터 세계를 보는 것. 이는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시도했던 것이다. “과거에 불완전한 운명으로 고통을 당했던 영혼의 행복과 완성을 증진하지 않는 것은 진보일 수 없다.”4) 벤야민은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 “근대성에 본래적으로 포함된 유토피아적 잠재력과 근대성이 보여주는 파국적·야만적인 작금의 현실을 병치하는 역사 이미지를 구성하려”하였다. 이렇게 병치된 이미지가 “혁명적 각성을 추동할 것”5)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명박 시대에 80년대가 귀환하는 것은 여전히 오늘의 세계가 80년대의 트라우마의 자장권 안에서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다시 성찰하는 데 다양하고 섬세한 지각과 재사유의 촉수를 뻗어야 한다. ⓒ 웹진 <제3시대>

* 이 글은 <세계와 선교> 198호(2009.3.1)에 수록될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와 <세계와 선교> 측 양해를 얻고 웹진 <제3시대>에 싣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1)김소연, 『실재의 죽음: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의 이행기적 성찰성에 관하여』, 2008. 도서출판b. 김소연은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라는 범주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범주로 나눈다. 넓은 의미의 범주는 ‘현실에 대한 성찰성’을 공유하는 1980년 대 말에서 1990년 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라고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으며, 좁은 의미의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들을 소재에 따라 다시 네 개의 하위 범주로 분류된다.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당대 한국사회의 모순들을 폭로하는 영화들로서 <성공시대>, <칠수와 만수>. <구로 아리랑>,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며, 둘째는 충분히 공론화 되지 못했던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적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영화들로서, <남부군>, <부활의 노래>, <은마는 오지 않는다>, <개벽>, <하얀 전쟁>, <그 섬에 가고 싶다>, <태백산맥>, <꽃잎>이고, 셋째는 삶의 본질에 관한 다분히 종교적인 성찰을 담은 영화들로서 <아제아제바라아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화엄경>이며, 넷째는 연애담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는 <우묵배미의 사랑>, <경마장 가는 길>, <너에게 나를 보낸다>이다. 151쪽 참조. (본문으로)

2)김소연, 같은 책, 246. 여기에서 80년대의 ‘히스테리적 혁명성’이라는 개념은 80년대 진보운동이 지배 그 자체를 의문에 부치지 않고, 지배의 성격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뜻이며, 여성적 윤리라 함은 법 외부에서 자유롭게 향유하는 예외자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법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남성적 윤리와 달리, 예외에 대한 환상 없이, 법이라는 보편성에 기대지 않고 삶을 주체적으로 재정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최근에 번역 소개된 세 권의 책, 즉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2008, 새물결),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2007, 길),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2008, 코나투스)는 바울의 메시지를 라캉의 여성적 윤리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있다. (본문으로)

3)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란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나타난 신경향의 영화들을 지칭한다. 대중성을 가진 범주인 장르의 미학을 수용하면서 가급적 매개된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성찰한다. <파이란>, <박하사탕>, <초록물고기>, <아름다운 시절>,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동감>, <시월애>, <번지 점프를 하다> 등의 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본문으로)

4)발터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Lotze, Microkosmos(1858)를 인용하고 있다.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4, 325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수잔 벅 모스, 위의 책, 326(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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