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간략한 윤리학史, 그리고 레비나스의 위치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살펴보기 이전에 서양윤리사상에서 발생했던 굵직한 윤리적 원칙인 목적론적 윤리, 의무론적 윤리, 그리고 책임윤리에 대한 이해를 먼저 살펴본다. 좋음과 기쁨,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론적 윤리의 계보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에피쿠르스학파, 영국의 경험론, 공리주의로 이어지면서 행위의 결과에 주안점을 두는 윤리학설이다. 이런 까닭에 좋은 결과를 위한 개인의 혹은 공동체의 목적, 이상, 목표 등이 윤리적 이슈로 등장한다. 비록 중세 기독교 문명과 근대의 이성주의를 거치는 동안 그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이는 니체 이후 다시 복권되어 푸코와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면서 억압되고 압제되었던 노예의 도덕이 아닌, 명랑하고 유쾌한 주인의 도덕을 꿈꾸며 21세기 사상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의무론적 윤리는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동기에 무게를 둔다. 칸트가 대표적 인물이고, 목표와 이상에 따라 행위가 달라지는 목적론적 윤리와는 달리 조건에 관계없이 내가 따라야 할 최고법칙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들에 의하면 선이란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선이란 바른 행위를 가능케하는 동력이다.

예를 들어, 현상금 1000만원이 붙은 국가보안법을 어긴 시국사범이 경찰에 쫓기다가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경찰이 문을 두드리면서 지금 누가 들어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이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목적론적 윤리에 따른 행위를 하는 사람은 행복의 기준이 문제가 될 것이다. 1000만원이 주는 물질적 기쁨이 신고를 하는 불쾌보다 큰 사람은 신고를 할 것이고 (양적공리주의), 물질적 기쁨보다 정신의 평온을 중시하는 사람(질적공리주의)은 그 도망자를 숨겨줄 확률이 높다. 의무론적 윤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칸트의 표현대로라면 보편 타당한 입법에 맞게 행위하는 사람이므로 거짓말을 하지마라, 현실의 국가보안법이 보편입법이기에 신고하는 것이 본인의 신념에 맞는 행위이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 이외에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책임윤리를 들 수 있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가 윤리적 판단기준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외삽적 논리싸움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에 대한 문제제기가 발생한다. 이는 윤리 본연의 쟁점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다시 숙고케한다. 책임윤리는 개별적 인간들이 자아내는 관계들에 주목하면서, 결국 윤리적 행위란 관계속에서 발생하는 물음들과 아픔과 상처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입법이 과연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중시하는 책임윤리 안에서는 윤리적 주체와 윤리적 대상간의 관계가 주된 행위의 기준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위에서 살펴본 윤리방법론에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목적론과 의무론, 책임의 원칙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위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윤리적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So What?, 즉 ‘네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 앞으로 우리를 내몬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굳이 이 세가지 범주에서 분류하자면 책임윤리라 부를 수 있겠지만,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라는 레비나스의 발언 속에는 이러한 기계적 분류보다는 더 복잡한 함의가 깔려있다.

레비나스의 사상속에는 서양철학에 대한 안티테제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칸트, 헤겔 또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에 공통으로 깔려있는 존재중심의 사고, 주체 중심의 자율성은 ‘나는 타자를 나의 동일성안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근대의 도그마를 전제한다. 그들에게 있어 타자는 또 하나의 자아이다. 남을 자아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기특한 것이다. 내가 나를 생각하고 배려하듯 타자를 그렇게 대한다는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 사고와 교양으로 채색된 근대인들이 지니는 자기교만이다. 내가 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듯이 남에 대해서도 주체는 나를 알듯이 속속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의 도그마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야만의 근거가 되었다.[각주:1] 레비나스는 이를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서구의 도덕과 책임은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서구철학을 지배했던 유령, 즉 개인(타자)을 전체(동일성)로 환원시키려했던 돌림병 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고, 이를 ‘힘의 철학’[각주:2], ‘전쟁의 존재론’[각주:3]이라 비난한다. 홀로코스트는 이런 서구형이상학의 실재가 돌출하여 인류전체를 베었던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는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론을 펴는 첫 번째 단계에서 동일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타자를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의 얼굴’은 동일성의 폭력에 반대하면서 윤리학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으로의 전환을 도모하려는 레비나스에게 중요한 사유의 거점이 된다. 전통적으로 레비나스를 공부할 때 ‘타자의 얼굴’을 설명하는 대목에 이르면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 그리고 양자를 극복해나가는 레비나스 현상학의 독특함을 거론한 후 ‘타자의 얼굴’에 이르는 순서를 밟는다. 필자는 이런 도식보다는 복음서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환대가 드러난 기사(예수의 비유에 나타난)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상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서고자 한다.

타자의 얼굴_ 예수의 비유를 중심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민중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하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그릇이 사용되어지는가에 따라 음식의 종류와 맛을 상상할 수 있듯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도 몇 가지 종류의 그릇에 담겨 전달되어져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맛과 향을 달리 느끼게한다. 예수가 민중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그릇에 담겨 배달된다. 하나는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가?’, 즉 하나님 나라의 때(시간)와 관련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와 현실세계와의 차이점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이다. 지금부터 언급하려고 하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비유는 대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를 언급하는 본문임과 동시에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예수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받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준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타자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사마리아인에게는 더러운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사회는 사마리아산 포도주나 기름의 사용을 금지하였고,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고기를 먹는 자와 같다’라는 속설이 유대사회 전체에 퍼져있었다.[각주:4] 이렇듯, 유대인에게 있어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율법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우리 인식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타자다. 그런데, 그토록 격멸했던 타자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나 초죽음이 된 유대인을 받아들인 것이다. 본문이 처음 읽혀지고 유포될 당시 유대인 독자들은 모두 의아했을 것이다. 유대사회의 지도층을 대변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피해갔는데 왜 하필 사마리아인가? 이 비유 안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내가 알 수 없는 존재, 내가 모르는 존재에 대한 응답을 의미한다. 타자란 나의 앎과 계산에 의해, 나의 율법과 관습에 의해 선택되고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내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내가 즉각적으로 응답을 해야 할 대상인 셈이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인자는 심판 날에 양을 자기 오른쪽에 염소를 자기 왼편에 세운다. 양과 염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상징한다. 이 심판을 지켜보는 청중이나 오른쪽에 있는 양, 왼쪽에 있는 염소 모두에게 인자의 판정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유는 그 판정기준 때문이었다. 김창락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놀라운 것은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비신자가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무슨 악행을 저질렀거나 의식적으로 범죄를 하였기 때문에 멸망을 선고 받은 것이 아니라 이름없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선고 받았다는 것입니다.”[각주:5]

판정의 기준 못지않게 논란이 되는 대목은 인자의 자기인식이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 23:35-36). 김창락은 이 구절에 기대어 인자가 당대의 타자였음을 분명히 한다: “인자는 자신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완전히 동일시 하였다.”[각주:6] 인자가 타자라는 사실, 즉 내가 모르고 있었고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각주:7] 결국, 위의 예수의 비유를 통해 확인된, 인자가 나의 인식과 나의 결단과 신앙의 도그마 안으로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통해 어느 순간 내게 확 다가와 응답을 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은[각주:8]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레비나스의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각주:9]은 한마디로 타자의 얼굴에 반응하는 것이다. 요즘 같이 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 되고, 신체와 몸과 얼굴이 자본화 권력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시대착오적발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레비나스의 얼굴은 단순히 눈, 코, 입이 조합된 성형외과에서 개조의 대상이 되는 즉물적 개별적 얼굴이 아님은 당연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에서 강조하는 점은 타자의 얼굴로부터 호명되어진 무엇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생채기가 생겨 ‘내가 여기 있나이다’[각주:10]라는 답변을 지닌 채 타자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이다(face to face).[각주:11]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윤리는 새롭게 태어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동일자에 대한 의심, 즉 동일자의 자기중심적 자발성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이 일이 타자(타자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를 통해 일어난다. 타자의 현존으로 인해 나의 자발성에 문제제기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각주:12]

위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주체, 즉 동일자의 자기의식 안에 갇혀있는 그 주체로는 우리가 타자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 이 말은 또한 주체이전에 타자가 먼저 상정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타자를 먼저 인식하고, 그런 타자의 얼굴에 반응(응답)하는 윤리적 주체로 자기를 정립하게 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의 미래, 가능성이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론에 우선하는 윤리학,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다.

사실, 기존의 윤리는 타자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말한다고 하지만 주체중심의 인식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타자에 대한 윤리는 실상은 나의 의지, 판단, 결정의 소산이고, 주체의 그것을 돋는 기저에는 항상 권력관계가 작동한다고 푸코는 비판한 바 있다. 레비나스 역시 푸코가 같은 문제의식을 지녔으나 양자가 취했던 방법은 다르다. 푸코는 주체 대신 자기를 발견하면서 내면으로의 수렴을 강화한 반면, 레비나스는 주체를 향한 수렴대신 초월을 향한 발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가 지녔던 서구윤리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구철학 깊숙히 문신처럼 베어있는 주체중심의 인식론 바깥에 새로이 윤리학을 위치시킬 수는 없을까?” 이러한 전환은 헤겔식의 근대적 주체, 그리고 그 주체가 지녔던 무한한 자유에 대한 반성이자 폐기선언이라 할 만하다.[각주:13] 인간은 근대가 이룩한 정신의 성취가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로부터 비로소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는 존재이다. 그것을 레비나스는 존재론 혹은 주체중심의 인식론에 선행하는 인간이라 표현하였고, 그 결과 윤리학은 레비나스에 와서 제일철학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87-88. [본문으로]
  2. Ibid., 44. [본문으로]
  3. Ibid., 22 [본문으로]
  4. 조태연 외.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84. [본문으로]
  5. 김창락. 『귀로 보는 비유의 세계』 (천안:한국신학연구소,1997), 392.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Messianism is that apogee in Being-a reversal of being persevering in his being”-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60. [본문으로]
  8.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199-200. [본문으로]
  9. Levinas, Emmanuel. Levinas Reader. Edited by Sean Hand, (MA: Balckwell, 1989), 75-87. [본문으로]
  10.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2000), 136. [본문으로]
  11. Ibid., 99. [본문으로]
  12. “A calling into question of the same-which cannot occur within the egoist spontaneity of the same- is brought about by the other. We name this calling into question of my spontaneity by the presence of the Other ethics.”-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43. [본문으로]
  13. Ibid., 196-1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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