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널:김주온(녹색당), 이건민(기본소득네트워크), 이성영(토지+자유연구소)
사회 :유승태, 정용택(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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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가을 회원강좌> 역사로 읽는 성서 II

부족사회와 군주제사회 야훼신앙의 역사


• 강의 구성

제1성서(구약성서)의 기초가 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유다 왕국 말기인 히스기야 왕 혹은 요시아 왕의 왕실 서기관들에 의해 왕국의 역사 편찬의 일환으로 저술되었다. 그러므로 유다왕국의 역사와 제1성서의 많은 부분은 내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유다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 그리고 군주제 이전 시대인 부족연합사회의 여러 설화들로부터 왕국 역사의 큰 빚을 지고 있다.

이 강의는 팔레스티나의 두 군주국과 그 이전 부족연합사회의 역사와 제1성서를 함께 공부함으로써, 야훼신앙의 뿌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 강의 구성

첫째 마당(10.22) |  유다의 역사의 시작
둘째 마당(10.29)  |  다윗은 존재하였는가?
셋째 마당(11.5)   |  이스라엘 왕국
넷째 마당(11.12)  |  유다 왕국
다섯째 마당(11.19) |  예언자들
여섯째 마당(11.26) |  부족동맹에서 왕국으로의 역사


강사_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당대비평』 편집주간, 한백교회 담임목사 역임
                  『예수의 독설』 『반신학의 미소』 『예수역사학』 등

• 교재_매 시간 배부

• 참고자료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J. M. 밀러 & J.H. 헤이스 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W. 슈니디윈드 저; 에코리브르)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I. 핑컬스타인 저; 까치)

• 일 시: 2009.10.22~11.26(매주 목) 저녁 7:30~9:30

• 장 소: 한백교회당
        (5호선 서대문역 1또는 2번 출구, 신한은행-우체국 사이골목 30미터. 좌측 안병무홀<1층>)

• 수강료: 6만원(이 강좌는 회원강좌이므로 CMS 후원 신규 신청자와 기존 후원자는 무료입니다.)

• 신청방법: 02-363-9190으로 전화하시거나 yminjung@chol.com으로 신청 메일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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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가을 일반강좌>

전철의 [과학신학] - 21세기 과학시대를 대면하는 신앙

• 일자 : 2009년 10월 20일-11월 24일 (6강)
• 장소 : 서울 서대문 안병무홀
• 시간 : 오후 7시

강의일정/개요 (클릭하면 세부정보가 제공됩니다)

 | 10월 20일 1. 과학과 신학 - 자연학과 신학의 관계
 | 10월 27일 2. 근대적 과학정신의 거장 -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 11월 03일 3. 물질에서 마음으로 - 베이트슨의 정신의 생태학
 | 11월 10일 4. 지식과 지혜의 두 전승 - 몰트만의 자연신학
 | 11월 17일 5. 물리학자에서 신학자로 - 폴킹혼의 과학신학
 | 11월 24일 6. 헤겔, 백두, 루만의 변증법 - 미하엘 벨커의 창발성신학
 |
 | 신학동네 참고자료

• 강의목적 : [과학신학] 강의는 21세기의 과학시대에 있어서 신학은 어떠한 방식으로 신학적 세계상을 구축하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과학을 통해서 제시되는 자연학적 지식은 신학에 어떠한 의미를 미치는지를 여러 사상가들의 사유를 검토하면서 추적하는 것이 이 강의의 과제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강의는 화이트헤드, 베이트슨, 폴킹혼, 몰트만, 그리고 미하엘 벨커의 과학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그간의 성과들을 점검하려 한다.

이 강의는 우리의 중요한 논쟁거리인, 창조론과 진화론, 마음과 물질, 태초와 종말, 그리고 자연과학의 시대에서의 신앙과 신학의 근본적인 지위를 성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 저자소개
전 철 | 한신대학교 신학부와 대학원(Th.M)을 졸업하였다. 한신신학연구소, 한국신학연구소, 기장신학연구소를 거쳐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미하엘 벨커 교수의 지도하에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개념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받았다. 현재는 한신대 외래교수이며 신학동네(http://theology.kr) 운영자이다.

• 수강료_ 6강 6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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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우리신학』2009년 통권 8호

펴낸곳 : 우리신학연구소
출간일 : 2009-07
정   가 : 10,000원

             * 구매하러 가기

이번 8호에서는 특집으로 2008년 10월 15일에 아시아신학연대센터(CATS)가 진행했던 종교간 열린 토론회의 결과를 담았습니다. 당시 주제는 “지금 여기, 구원은 어떻게?: 종교다원시대 구원의 의미”였지만 열린 토론회 안에서는 종교간 대화의 문제가 주로 다뤄졌습니다. 아시아의 시선으로 신학 활동을 하는 베트남계 미국인 피터 C. 판 신부, 가톨릭 정양모 신부, 불교 도법 스님, 개신교 이현주 목사가 함께 대화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사목조사컨설팅센터(PRCC)에서는 2000년대 이후 발표된 한국 천주교회 각 교구 연두사목교서를 분석하여, 교구장 사목교서가 형식적인 발표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의미를 주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2008년에 아홉 차례 진행된 달맞이 나눔 ‘평상’의 이야기 중에서는 문화학을 공부하고 있는 엄기호 연구위원이 사람에 대한 감각을 상실시키는 신자유주의 문제를 성찰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시대를 성찰하기 위해 새롭게 마련한 ‘우리시대’에서는 2000년대 이후 점점 체감되는 교회의 보수화를 화두로 삼았습니다. 2008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촛불의 의미를 통해 한국 가톨릭교회의 보수화의 현실과 대안을 짚어보는 한상봉 연구위원의 글을 실었고, 김진호 목사의 글을 통해 보수적인 개신교 대형교회가 형성한 ‘사회적 착함’이라는 미학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

번역글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시 보는 해방신학을 주제로 다룬 인도의 안토니 칼리아트 신부의 긴 글을 부분부분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서평은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를 분석한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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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2)
: 죽음의 고고학 考古學

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죽음의 극복과 근대의 탄생

중세 말 ‘죽음의 무도’는 죽음의 일상성, 죽음의 편재라는 절망적 상황을 춤판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와 결합시켜 그 비극미를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비록 대단한 권력과 인기를 가진 왕이나 교황, 혹은 유명한 슈퍼스타라 할지라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메멘토 모리’라는 짧은 경구로 대변되는 삶에 대한 허무와 죽음의 공포는 시대에 따라 그 모양새와 강도가 다르긴 했지만 인류역사의 발생과 더불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는 근대 이후 전통적 서구기독교 가치의 몰락이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허무를 선물했다고 증언하지만, 서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기독교의 가치가 팽배했던 시절에도 그러한 감정이 여전히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중세 말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싶다.

죽음의 테마가 중세 말을 휩쓴 이유들 중 하나는 페스트의 창궐에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437년에 발생한 페스트는 3년 만에 대륙전체를 휩쓸면서 유럽전체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후에도 페스트는 10년 혹은 12년을 주기로 비록 소규모였지만 지속적, 국지적으로 발생하였다. 그 당시 유럽인들에게 있어 삶은 어쩌면 눈앞에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푸닥거리를 필요로 했고, 그 푸닥거리에 쓰일 제물로 유대인들이 낙점되었다. 이는 유럽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 쌓여왔던 유대인들에 대한 앙심이 폭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세가 진행되면서 도시가 발생하고 수공업과 시장경제의 초기 형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고리대금등 지금으로 따지면 악덕 기업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 이러한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던 차에 일반 유럽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집에서 고양이를 많이 기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페스트로 인한 사망률이 적었다. 그 무렵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자들의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을 향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공포의 함량에 걸맞는 희생제의를 필요로 했고, 그 희생은 다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르는 광기의 연속이 중세 말 유럽을 휩쓸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급속히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만다. 전능한 하나님이 다스리는 합리적이고 질서있는 우주적 질서와 은총이 넘치는 신의 섭리는 죽음의 공포, 지옥의 공포로 전환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이제 곧 자신에게 닥칠 심판과 죽음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럴수록 로마교황청은 교회로부터 이탈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더욱 죽음의 공포를 강조하면서 기독교 특유의 회개(고백, 고해성사)의 교리를 강요한다. 이는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던 면죄부 판매로 이어지면서 중세는 서서히 몰락의 수순을 밟아가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중세 말 유럽에 휘몰아친 죽음의 테마는 정반대에 놓여있는 이성주의를 앞당기는 계기가 된다. 존재론적으로 느끼는 삶에 대한 허무와 죽음의 공포를 인간들이 인식론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하면서 근대(성)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중세 철학을 마감했다는 평가를 받는 ‘모든 것을 회의한다’고 외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후에 근대철학을 열었다는 칸트의 ‘주체 철학’은 결국 중세 말 죽음의 테마로부터 시작된, 존재에 대한 알 수 없는 허무와 보이지 않는 공포를 극복하려는 회의와 반성적 사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세력을 뚫고 피어 오르는 인간정신의 합리성! 근대는 이렇게 우리의 무지와 그 무지로 인한 공포에 한 줄기 빛을 비추며 시작된다. 그렇다면 근대(성)는 죽음을 정복했는가?
아니, 더 근원적으로 인간 정신은 어떻게 죽음을 사유하여 왔는가?

죽음에 대한 생각들 I: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부활사상과 맞물려 다루어지는 죽음 이외에 서양의 철학과 종교에서 죽음이 독자적인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대 철학으로 넘어와서 주로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을 덕목으로 가져오는 학자들과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번져나갔던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죽음이 다루어지고 있을 뿐, 서양철학사에서 죽음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졌던 기억은 실로 미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직면했을 때 그 논의의 시작은 플라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플라톤에게 있어 죽음은 없다. 그는 영혼 불멸설을 주장하며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 말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현실의 삶이란 영혼이 육신의 감옥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죽음은 다시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어 원래의 자리, 즉 이데아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적 도식은 서구 형이상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이데아의 세계’와 ‘물(物)의 세계’가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 이데아의 세계는 자신의 속성을 물의 세계로 내어준다. 그것이 플라톤에게 있어 영혼개념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영혼을 물질에 구현한다. 그것이 현실의 삶이고, 현실의 삶 속에 구현되었던(갇혀있었던) 영혼이 다시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헬레니즘적인 사유와 기독교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견해들은 플라톤적인 급격한 초월이 후에 서구 기독교의 발전과정에서 절묘한 대칭을 이루며 그리스도교 도그마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태초에 신이 있었다. 신이 인간세계 (피조세계)를 구원하려고 자신을 내어준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는 철저히 인간이라는 물질 안에 구현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망과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여 하늘로 귀환한다. 그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론적으로는 크리스챤을 하나님에게로 이어주는 탯줄과도 같은 역할을, 인식론적으로는 신의 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플라톤의 영혼개념은 이와 너무나 닮았다. 영혼은 존재론적으로 인간이라는 물의 세계에 구현된 이데아의 역할을 하고, 인식론적으로 이데아를 밝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죽음의 의미는 플라톤의 그것과는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현실적 삶 속에서 자기라는 것은 육신과 영혼이 현실적 시간과 공간안에 합치되어 하나가 되어있는 것이므로, 이것들이 분리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있어서는 파국이 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문한다: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간 영혼이,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몸을 입고 있었던 자기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무슨 근거로 보장받을 수 있는가?”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나의 개별적 영혼이 나의 생물학적(물리적) 신체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분명한 사실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나의 육신을 입고 개별적 나의 영혼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이 생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합일이 깨어지는 죽음은 비록 영혼의 죽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나로서 인지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스승이었던 플라톤과는 달리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현실의 개체에 주목한다. 영혼은 자연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위치한다. 즉, 그는 영혼과 육체를 독자적 실체로 보지 않고 분리될 수 없는 두 측면으로 본 셈이다. 이렇듯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는 전향적인 영혼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신체와 결합한 영혼, 즉 개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선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적인 영혼의 굴레로부터(예를 들어, 영혼의 선재성과 영혼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는 점)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후 서구 정신사에서 영혼에 대한 논의는 플라톤적인 초월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내재를 사유하는 경향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나타난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내재 역시 엄격히 말하면 초월적 요소를 상당부분 함축하고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플라톤적인 과격한 초월보다 약하다는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재를 완만한 초월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근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수 천년 동안 서구 역사에서 영혼에 대한 논의는 전체적으로 초월적 사유로 이어져 갔다고 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 II: 근대철학에서 실존주의로, 그리고 임마누엘 레비나스를 향하여

이 글의 초반부에 중세의 붕괴와 근대 탄생의 시나리오에 대해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 이후에 철학자들 (예를 들어 영국의 경험주의, 칸트, 분석철학, 논리 실증주의 등)에게 있어 죽음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 철학에서는 경험이나 관찰을 통해서 증명해낼 수 없는 것들을 철학적 화두에서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이나 죽음, 천국 등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이슈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고, 우리 감각에 포획되는 확실한 것, 드러난 것, 자명한 것,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들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철학 안에서 죽음의 테마는 다시 새롭게 사유된다.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 믿었던, 근대적 이성에 기반한 기술문명이 전체주의와 결합되면서 어떻게 인류를 재앙에 이르게 했는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한 민족을 향한 말살이 어뗳게 계몽의 시대를 거치며 진화를 거듭해온 인간 의식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지? 이러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트라우마는 단순히 유태인 혹은 게르만족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20세기 후반 서구 철학, 신학, 사회학, 문학 등 인문학 전반에 원죄의식처럼 새겨져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다음의 문제들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집단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터로 내몰리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누구를 죽여야하고 누군가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혹, 인간 삶의 형태와 내용이 다른 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한 고귀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은, 사실은 인류전체가 저질러 왔던 집단 사기극 아니었던가?

장 폴 샤르트르는 봇물터지듯 폭로되고 있는 인간 삶 전반에 대한 실존적 물음에 대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대답을 던지며 인간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시도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오던 서구 전통의 존재론도 아니고, 칸트가 내세웠던 선험적 주체도 아닌, 신으로부터 어떤 선험성도 부여받지 않은 인간 ! 다시 말해 실존주의적 인간이란 신적 디자인에 의해 움직여 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현실을 향해 내던지면서 그 궤적을 따라 미래를 만들어가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이 부분은 레비나스와 겹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후에 레비나스와 실존주의를 구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 웹진 <제3시대>

<* 다음 호에는 ‘타자의 윤리학’으로 널리 알려진 레비나스의 죽음에 대한 논의들과 자살이 범람하는 사회에서의 자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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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문범
    2009.07.23 03:2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잘봤습니다.
    그런데 이 싸으트를 여니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는 군요. 트로이 목가 하이재커라는 바이러스가 감염됩니다.
    조사해보시기 바랍니다

삼손에 관한 짧은 이야기

김현숙
(Ecole supérieure des beaux-arts de Marseille에서 비디오아트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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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남자가 아내를 거칠게 밀쳤다. 아내는 계단 밑 길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녀의 아기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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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부르스 리 되기를  욕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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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에로틱한 여성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늘 사진으로만 그의 옆에 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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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삼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늘 격투에서 악당을 이기는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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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실에선 그의 동거녀가 그를 칼로 찔렀다.
그는 아이가 되어 성모 마리아와 여전사 뒤에 숨어 있다.

그는 그렇게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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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는 자라매  아버지께서  복을 주시더니...
- 판관기 13장 24절



작업일지

2008년 가을, 마르세이유에서 우연히 어떤 남자를 알게 되었다.  남미 출신이지만 대부분의 시절을 스페인에서 보냈으며 지금은 프랑스에서 기초생활 수급자들이 받는 수준의 연금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는 일을 하지 않는다. 기타 하나만 들고 여기 저기 떠돈다.
그의 팔엔 흐릿한 칼 자욱이 몇 군데 나 있었다. 무례하게도 난 주저 없이 사연을 물었다. 그의 강한 자의식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간단한 메모를 남긴다.

탄생내력 - 동거녀한테 맞은 얘기 - 삼손이라는 이름- 건장한 체격 - 그의 악세서리들 - 그리고 빈민이라는 것 - 사회로부터 스스로 격리시키는 삶의 태도 - 부르스 리(이소룡)와 동일시 하는 모습 - 칼로 누군가를 찌르는 장면을 그림 - 삶 자체가 폭력 – 폭력의 산물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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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트 : 자명한(doubtless) 것을 의심(doubt)하라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다우트(doubt)’.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의 제목이다. 유명한 연기파 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플린 신부 역)과 메릴 스트립(알로이시스 수녀 역)이 열연했다는 것이 무색하게도, 올해 초 개봉했던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그러니 이 영화가 ‘망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블로그나 여러 인터넷 글들을 살펴보니 그 반응이 흥미롭다. 마치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 일종의 합의가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본 영화평들의 공통점을 요약하면, 애초부터 잘못된 믿음에 근거해 누군가를 의심(doubt)하던(유죄를 확신하던) 원장수녀가 결국 자신의 확신을 회의(doubt)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청년부 사람들과 이 영화에 대한 인상을 함께 이야기했을 때 나왔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대다수 사람이 이 영화를 읽는 방식에 일종의 ‘합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꼭 ‘오버’는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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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은 의심할 필요 없이 자명해(doubtless) 보이는 ‘교훈’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라는 단어를 ‘삶’이라는 단어로 바꿔 보면,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수용하고 있는 삶의 전제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는지, 그리고 그 전제들을 성찰하지 않는 것이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지 사유할 수 있는 단초를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플린 vs. 알로이시스, 당신은 누구에게 끌리는가?

이 영화의 스토리 전개를 끌고 나가는 주된 동력은 한 카톨릭계 학교에서 벌어지는 주임신부 플린과 원장수녀 알로이시스의 갈등과 대립이다. 이들의 갈등은 새내기 수녀 제임스가 자신이 목격한 플린 신부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원장수녀에게 고백하면서 수면 위로 부상한다. 제임스 수녀는, 수업 중 도널드 밀러를 사제관으로 불렀던 주임신부가 도널드의 속옷을 사물함에 갖다 놓는 것을 목격하고 원장수녀에게 이를 이야기한다. 도널드가 사제관에 다녀온 후 ‘겁에 질린 듯 이상한 자세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술냄새가 났다’는 의혹 혹은 의견도 이야기에 덧붙여졌다. 제임스 수녀의 말을 듣고 ‘이제야 확실한 것을 잡았다’고 확신한 원장수녀는 주임신부를 ‘권력형 아동성추행범’이라 단정 짓고 그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임신부가 ‘설마 이렇게 좋은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을 만큼 타인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말과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반면, 원장수녀는 주임신부와 대조적으로 말과 행동이 차갑고 권위적인, 한마디로 ‘비호감’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의심을 증명할 ‘직접적’ 증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도 않는다. 비호감 원장수녀가 ‘증거’도 없이 호감형 주임신부를 몰아붙이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기본 얼개이다. 원장수녀의 ‘쥐몰이’같은 공격에 질린 주임신부는 마치 자신이 큰 양보를 하듯 학교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학교를 떠난 주임신부는 더 좋은 직위로 ‘승진’해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원장수녀는 “나에게 (믿음에) 회의가 생겼다”는 절규를 한다.(그녀는 ‘진실은 승리한다’는 믿음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결부시키고 있었던 듯하다.)

이 영화는 절묘한 대사의 배치와 장면 구성으로 인물들의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으므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의 느낌을 도저히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정식화하는지를 보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정식화하는 가장 흔한 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편들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방식은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의 갈등관계에서 어느 쪽이든 한쪽이 ‘옳은 편’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영화의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 영화는 원장수녀의 의혹을 정당화해줄 증거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원장수녀는 터무니없는 의혹을 진실인 양 여기며 엄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인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블로거들이 자신의 영화해석을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오버랩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쉽게 확인된다. 한 블로거는 미네르바 사건과 용산참사를 예로 들며 이명박 대통령과 경찰 등이 보이는 행태를 원장수녀의 그것과 동일시하고 ‘도덕적 확신범’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했던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는 한국 보수세력의 터무니없는 태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편들기’가 실패하는 지점

그런데 사실 영화에서 제시된 ‘불충분한 증거’를 문제 삼는다면, 의혹을 제기한 원장수녀만 비난할 수는 없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의혹의 당사자인 플린 신부도 자신의 결백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보이는 몇몇 태도는 그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원장수녀의 면담 요청으로 학교를 방문한 도널드의 어머니(밀러 부인)를 보고 긴장하는 장면, 알로이시스 수녀가 플린의 예전 교구 수녀에게 그에 대해 묻기 위해 전화를 했다는 말을 듣고 ‘왜 주임사제가 아니라 수녀에게 전화했냐’며 흥분하는 장면, 알로이시스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다그치자 ‘수녀님도 죄를 지은 적 있으시죠?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라고 딴소리 하는 장면 등이 그 예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나 플린 신부나 모두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우리는 명확하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편드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도 쉽게 정당화될 수 없는 읽기 방식인 것은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영화를 다시 살펴보면, 이 영화는 오히려 애초부터 특정한 이를 편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이 영화가 은유와 생략을 무수히 나열하는 방식으로 장면들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원장수녀와 제임스 수녀의 대화, 원장수녀와 주임신부의 논쟁, 원장수녀와 밀러 부인의 대화 등에서 대화의 주체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명확하게 지칭하기를 회피하며 끊임없이 은유적인 표현과 암시들을 나열한다. 가령,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의 혐의가 ‘권력형 아동성추행’임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밀러 부인도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는 식이다. 오히려 자신의 결백을 정돈된 언어로 명확히 지칭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알로이시스가 플린에게 두는 혐의는 더 짙어진다. 때문에 이 영화 속의 대화들은 의미를 고정시키고 의사소통을 순조롭게 하기보다는 모호함만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들의 대화나 표정, 몸짓 등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의 경향성 안에 포섭된다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의미의 공백을 만드는 방식으로 서사가 구성되나, 영화를 보는 이는 그 공백을 채우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해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를 채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편들기’를 하게 된다.

‘호감=진실’ vs. ‘비호감=거짓’ 구도 뒤틀기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영화가 초반 장면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호감 vs. 비호감’과 ‘옳은 것 vs. 그른 것’의 배열을 의도적으로 교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앞부분은 알로이시스와 플린의 갈등이 시작되기 전 이들이 각기 어떤 캐릭터인지를 묘사하는 데에 치중하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 교차하며 두 인물에 대한 묘사가 대립되는데, 두 인물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기 전까지 전개됐던 장면에 편의상 이름을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플린의 강해>-<등교 시간>-<교실>-<수녀들의 식사>-<학생 식당>-<교실>-<농구장>-<신부들의 식사>. 이러한 배열 이후 알로이시스는 자신과 플린의 대립을 ‘진실 대 거짓’의 구도로 보고 플린이 은폐하고 있는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표독스럽게 몰아간다. 반면 플린은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진실의 자리에 있고 알로이시스가 거짓의 자리에 서 있다고 항변한다. 아마 위에서 이야기한 장면들 중 <신부들의 식사> 장면이 없었다면 플린의 시각으로만 이 영화의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별 문제가 없었을 수 있다. <신부들의 식사> 장면은 핏물 흐르는 고기를 탐욕스럽게 먹으며 뚱뚱한 모녀에 대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플린과 두 명의 나이든 신부를 담고 있다. 장면 배치 속에 호감=플린, 비호감=알로이시스의 순서를 분명하게 지켜오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 장면은 분명 이물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이물질 같은 장면 때문에 우리는 ‘부당하게’ 누군가를 편들지 않고도 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로이시스 수녀가 부당한 의혹을 전제로 한 신부를 괴롭혔으나, 결말에서 플린 신부가 오히려 승진이라는 보상을 받고 알로이시스는 자신의 확신에 회의를 품게 된다고 보는데,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플린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엇이 ‘사실’인지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서로 자기가 옳다며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한쪽의 주장에 쉽게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이 진실일 가능성은 거의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무서운 상상을 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플린은 이곳저곳 자신이 옮겨온 곳마다 거기서 따돌림 당하기 쉬운 아이를 보호하는 척하며 사실은 성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권위적이지 않고 사교적이며 언변도 좋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윗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평소 비호감이던 한 수녀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플린이 성범죄자라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 사람들은 그 수녀를 더 미워하게 되고 나아가 그녀를 학교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플린을 지지하는 사람이 바로 ‘나’일 가능성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공감의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죽임의 질서’

<신부들의 식사> 장면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가 이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에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우리가 내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들은 우리에게 내면화된 ‘선호’ 또는 ‘공감’의 체계와 칼로 자른 것처럼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가 옳다고 굳게 믿고 했던 행동들을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아보면 그다지 일관성 있지도 않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지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일관성 있게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우리의 ‘올바른 행위들’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플린 신부의 시선을 빌려 현 정권과 보수세력의 아집과 편견을 비판하며 그들을 ‘적’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이 내면화한 아집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위들은 이 사회 보수층의 ‘아집과 편견’을 옹호하고 있다. ‘뉴타운’과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혹은 정책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같은 편’들은 광우병에 반대하며 ‘미친소, 너나 처먹어’라는 공통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말을 따라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기도 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지못미’를 부르짖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편’들이 마치 용산참사는 ‘그런 일이 있었나’ 생각하는 듯 조용하다.

이 글의 논지를 이해하는 이라면, 지금 용산참사를 언급하는 것이 단순히 용산참사 현장에 나가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할 것이다. 또한 이 글의 목표가 현 정권과 보수세력의 편에 서서 그들에 대한 비판에 반비판을 하거나,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에게 편드는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도 이해할 것이다. 요점은, 상대가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을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세대, 계급, 이념적 성향의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사람마저 그에 대한 추모 의례에 참여했던 것을 돌이켜볼 때, 세대, 계급, 이념, 이해관계 등을 기준으로 나뉜 ‘적’은 ‘나’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적과 동지의 명백한 대립이 은폐하는 ‘공감의 체계’, 그 공감의 체계가 있기 때문에 작동하는 ‘죽임의 질서’, 그리고 죽임의 질서에 ‘공모하는 자로서의 나’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까지 이르지 않는 한 ‘참사’는 계속될 것이다.(‘참사’의 의미는 여러분 각자가 채우시라. 우선 나는 그 자리에 ‘이명박 정권’을 두겠다. 바꿔 말하면, ‘이명박 정권’은 ‘적’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참사’(=사건)이다.)

결론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가 자신의 패배에 절규하는 장면을 보며 통쾌함을 느낄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서사를 모호하게 하고 교란하는 그 지점에 착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굳게 믿는 ‘편들기’의 기준들이 어느 지점에서 교란되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 우리가 죽임의 질서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 구원과 해방의 과정인 것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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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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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열매실
    2009.07.22 17: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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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어내려 가면서 "공감"이 갔다, 안 갔다 했는데,
    "마지막에 엘로이시스가 자신의 패배를 절규하는 장면"이라는 지점에 와서는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본 바로는, 엘로이시스의 마지막 대사는
    "나는 너무 의심스러워!"였던 것 같습니다.
    (명확하진 않지만 그런 뜻이었다고 봅니다.)
    여기서의 의심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이 말이 많은 것을 내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이 어떤 사람의 편에 섰느냐에 따라서
    엘로이시스 자신의 확신이 될 수도 있고
    플린 신부의 행동일 수도 있고, 둘 다 일수도 있겠지요.
    심각하게 말하면 옳고 그름, 윤리와 비윤리 혹은
    자신이 절대화하고 있는 신앙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엘로이시스 비호감, 플린 호감이라는 구도도
    내키지 않습니다.
    겉보기에 냉정하고 완고한 종교인 같지만
    적어도 엘로이시스는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고자 했고
    자기 나름의 정당한 절차를 밟으려 했습니다.
    플린 신부에게 직접적으로 물었고, 아이의 어머니에게 충고했으며
    플린 신부의 직설적인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서 해야 할 바를 한 것이지요.
    플린 신부가 부드럽고 따뜻하고 원장 수녀에 비해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 중요한 식사 장면'에서 보듯이
    비만하지만 단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기가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는 약자처럼 보이지만, 남자의 특권인 강론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왜 신부에게 묻지 않고 수녀에게 물었느냐고
    따지기도 하고, 너는 죄 지은 것이 없느냐고 강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신부들의 회의를 통해 영전해 갑니다.
    하지만 그의 영전이 그의 결백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로 인하여 엘로이시스의 "의심", 그리고 관객인 저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제 생각엔 감독이 비교적 이 두 상반된 인물의 됨됨이와
    사건의 전개 과정을, 그 어느쪽의 편도 들지 않고
    공평하게 전개시키며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편을 들고 공감하는 건 관객의 자유겠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를 어느 한 사람의 승리로 읽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결국 "인간의 의심"에 관한 영화이고
    진실에 관한 영화이고, 더 나아가 과연 그 진실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용산도 마찬가지겠지요.
  2. 유승태
    2009.07.22 21: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열매실님께..

    답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다 써놓고 보면 꼭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열매실님께서 이야기해주신 것들의 대부분은 저도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열매실님께서 '문제화'해주시니 이렇게 더 해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군요.

    제가 보기에, 열매실님은 제가 '영화의 메시지를 어느 한 사람의 승리로 읽'고
    있다고 보셔서 그것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글은 기본적으로 '대다수가 플린에게 공감한다'는 전제(혹은, '상상')에서
    논의를 시작했으니 이 전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아마 그 뒤에 이어진 논의가
    대부분 수긍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알로이시스의 패배' 운운한 것이 제 생각이
    아니라 플린의 시선을 통해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저는 오히려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제가 문제 삼고 있는 건 왜 다수의
    사람들이 플린에게 쉽게 감정이입하고 그에게 공감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감상하냐는
    것이지요.

    <신부들의 식사> 장면을 언급한 것도 플린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이들이 많다고
    생각해서 언급한 것일 뿐입니다. 사실 열매실님이 동의할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제 생각에도 알로이시스가 '비호감'으로만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점점 눈이 멀어가는
    연배 높은 수녀님을 돌봐드리는 행동이라든가 제임스 수녀에게 냉정한 듯하면서도
    그를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은 보기에 따라 '비호감'이 아닐 수도 있지요. '비호감'이라는
    표현도 플린에게 공감하는 많은 이들이 다양하게 표현한 것들을 제 나름 요약한
    것일 뿐입니다. 제게도 알로이시스는, 물론 끌리지 않는 면이 더 많았지만, 나름
    공감도 가고 이해도 되는 인물입니다.

    다만 열매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알로이시스를 '그녀는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서
    해야 할 바를 한 것'이라고 보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한백교회
    청년들과 이야기할 때 나왔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이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아니, 꼭 그런 식으로 해야 해?' 이 질문이 나온 건 알로이시스에게
    공감이 가지 않아서이기도 했을 것이고, 알로이시스가 '객관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플린과 권력을 두고 다투는 '욕망'도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플린과 알로이시스가 서로 상석(?)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 장면이
    이 점을 드러내는 좋은 장면일 것 같습니다.)

    플린과 마찬가지로, 알로이시스를 '우리편'으로 여기는 것도 문제가 많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플린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거나, 알로이시스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게 아니냐는 거지요. 이 지점에서 약간 비약이 있긴 했습니다만,
    우리가 당파성을 전제하고 사안이나 사태를 보려 하는 태도 때문에 서로의 '적대'를
    무화시키는 '공감의 체계'는 쉽게 가시화되지 않고, 이 때문에 '죽임의 질서도'
    작동할 수 있다는 거지요.

    때문에 저는 이 영화가 '인간의 의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감독이 의도했든 안했든, 이 영화는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에 우리의 정치적 '습속'이 배어나오고 있음을
    이 영화는 사고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물론 여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사실 마지막 장면에서 일종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 강인하고 자기절제의
    화신 같았던 알로이시스가 왜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렸는가 생각해보면,
    바로 앞 장면의 대사를 볼 때 그녀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 은폐와 속임수의
    달인 같던 플린이 학교를 떠남으로써 그의 유죄를 인정하는 행동을 이끌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플린이 일종의 승진을 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믿던 신의 '정의'가 관철되지 않는 학교 밖 세계의 권력을 감지하면서
    무기력과 절망감에 "I have such a doubt!"라는 절규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플린에 대한 알로이시스의 의심이 명확하게 규명된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플린에게만 의심이 깊어질 특별한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알로이시스의 의심이 '허구'로
    밝혀지는 것으로 읽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용산에 대해서도, 개인적 차원에서의 반성이 있었든 어떻든 그건 제가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일 것입니다. 다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용산참사를
    둘러싼 '사회적 행위'의 의미를 어떻게든 규명하고 그것이 개인적 차원의 확인되지
    않는 반성만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죽임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나는 그 작동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닐까 반성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답글이 주저리주저리 또 길어졌네요. 이 답글 때문에 오히려 논쟁거리만 더
    확대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영화평 밖에서 영화평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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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서남동과 오늘의 민중신학』
- 죽재 서남동 서거 25주기 추모논문집

엮은이 : 죽재서남동기념사업회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출간일 : 2009-07-18
페이지 : 352쪽
정  가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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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육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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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식
(대한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지도사제)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경우는 과연 어떤가?

필자의 제자 한 사람이 모 고등학교의 선생님으로 있는데 학생 중 하나가 유난히 말을 안 듣고 수업시간에도 딴청을 부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나무라다 지친 선생님이 도대체 네 부모님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으니 상의를 해보게 전화번호 좀 알려달라고 했단다. 사실 그 정도 되면 덜컥 겁이 나면서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꼬리를 내려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사과는커녕 요 맹랑한 녀석이 ‘저도 선생님의 부모님이 선생님을 어떻게 키웠기에 이 모양인지 알아보게 부모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맞받아치더란다. 아마 주변의 친구들 앞에서 우쭐한 기분에 그랬을 테고 여선생이라서 얕잡아 보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튼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 선생님은 한 가지 이야기를 또 해 주었다. 체육시간에 시험을 보는데 어느 여학생이 선생님에게 와서 사정이 있으니 순서를 앞당겨 달라고 부탁했다. 형평의 원칙상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여학생이 돌아서면서 선생님 들으라는 듯 쌍 시옷이 들어가는 육두문자를 내뱉었고 화가 치민 체육선생님은 출석부로 여학생의 머리를 한 대 쳤는데, 여학생이 즉시 선생님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었다는 뜻 아닌가?

과연 선생님은 이 같은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제자들에게 교육적인 효과를 줄 수 있을까? 같이 맞받아쳐야 하는가, 교무실로 따로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쪽 뺨까지 내밀어야 할까?


‘자녀를 키우면서 가장 바라는 게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아마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은 ‘공부 좀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몸 튼튼 운동도, 머리 튼튼 독서도, 교양 튼튼 봉사도, 다 부질 없는 짓이고 오로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 자식이 설혹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일단 공부부터 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손자 얼굴을 보기위해 방문했어도 마침 손자가 학원에 가는 길이라면 할아버지는 쓸쓸히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게 요즘 이치다. 아니면 며느리의 세모눈을 견디면서 손자가 돌아오는 새벽 1시까지 기다리고 있던지.......

사실 공부에 대해 이 정도 열의를 갖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매년 노벨상을 도맡아놓고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무척 다르다.

‘구약성서의 이해’라는 과목을 강의 했던 적이 있다. 기말시험에서 어떻게 하면 창조적인 답안을 유도할까 싶어 다음과 같은 문제를 냈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조상이자 민족의 조상이다. 이 한 문장을 30문장으로 늘여보시오.” 그랬더니 대혼란이 발생했다. 혼란의 발생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답안지의 수준이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한 경우도 있고, 불과 열 문장을 못 채운 경우도 있었다. 아마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갖는 다섯 가지 의미를 나열하시오.”라는 문제를 냈으면  비교적 양질의 답안지들이 제출되었을지 모른다. 사실은 같은 문제인데 말이다.

성적을 학교에 제출한 다음 날 어느 남학생이 손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이 C+를 맞은 이유가 몹시 궁금하니 교수님이 답안지를 찾아 자신의 잘못을 하나하나 짚어준 후 어떻게 하면 앞으로 좋은 점수를 맞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자세히 써서 이메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 ‘도대체 누가 교수인가? 자네인가 나인가?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네!’라고 답을 했더니 ‘다음 학기에 군대를 가니까 군대 갔다 와서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기고 그 학생은 전화를 끊었다. 그런 통화가 있은 지 2년이 지난 요즘은 슬슬 겁이 나고 있다.


얼마 전부터 정부의 학원 정책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학생에겐 혼란을, 일선교사에겐 낙담을, 학부모에겐 분노를, 학원에겐 희소식으로 다가오는 정책들이다. 하지만 진짜 겁나는 일은 교육현장이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 상황이다.

학생들의 윤리의식이 통째로 사라지고 있다. 최소한의 예의나 스승에 대한 존경이나 청소년으로서 가져 마땅한 겸양의 덕은 ‘대학부터 보내놓고 이야기하자.’는 입시논리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어차피 교실에서 잠이나 자는 게 공교육이라면 잠이라도 실컷 자게, 아예 공교육을 밤에 하고 사교육을 낮에 하면 어떻겠는가?”라는 제안마저 나오고 있단다. 거꾸로 가는 교육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청소년 시절에 심하게 망가지면 회복불능이라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대학 이후로 모든 것을 미루어 넘긴 학부모거나, 학부모들을 부추겨 가능한 한 복잡한 교육구조를 부채질 한 사교육 학원이거나, 사교육 현장에 끼어들어 줏대 없이 흔들리는 정부거나, 자신도 할 말 있다며 일선행정에 나선 대통령이거나, 아무튼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언젠가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미국 교육계에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다. 그 양반 한국의 교육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기에 그런 소리를 한 것이다. 2009년 7월 현재 우리 교육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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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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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8 20:1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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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성공회 교회를 다니고 있는 평신도입니다. 신부님께서 쓰신 특히 성공회신문에 연재하시는 성서이야기들을 진지하게 잘 읽고 있는데, 이렇게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웹진에도 글을 올려주시니 반갑습니다.
  2. 김근옥
    2009.07.16 21:5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교육의 미래를 염려하시는 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학생들의 태도도 잘못되고, 그런 상황을 겪은 선생님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두 분 선생님의 경우 접근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의 잘못을 부모님과 상의하는 것은 좋지만 "네부모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 그런 식의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체벌, 일면 필요하기도 하지만 여학생의 머리를 출석부로 때리는 일 또한 학생에게 심한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일이므로 역시 다른 방법으로 학생을 지도하셨어야 되지 않을까 싶네요. 성적 때문에 전화를 걸어 온 학생 역시 그의 요구가 잘못된건지 잘 이해가 안되네요. 태도가 얼마나 불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e-mail comment가 본인의 교수방법이 아니라면 기분이 좀 언찮으셨다더라도 '권위'를 앞세우시는 듯한 표현보다는 그것이 본인의 option이 아니라는걸 말씀하시는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고... 저도 사십대 중반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아이보다 어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게 쉽고. 요새 애들 무섭다는 소리도 많이 듣기도 했고 위와 같은 상황에서 감정처리가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예로 드신 학생들이 잘했다는게 아니라 선생님들께서도 이제는 좀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셔야 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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