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대항하는 도구로서의 이상 단편소설(2)


: 식민지 조선 근대에 대한 이상의 인식  



신윤주*


    촌과 들은 마치 白晝의 슬픈 점괘에 서버린 채 굳어버린 畵幅이다.

 昏睡와 같은 문명의 魔術에 드디어 꾸벅꾸벅 조는 것일까. 

이 촌에 행복 있으라.[각주:1]


    명백한 담론으로 등장한 적은 없었지만 문인들은 1930년대에 이르러 대중사회 속에서 문학의 자리에 관해 고민해야 했다. 이즈음 독자층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있었고, 문학 작품 뿐 아니라 다양한 잡문을 생산해야 하는 ‘문필가’의 위치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문인들은 고급과 저급, 문학과 비문학 등의 층위를 벗어나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일군의 고급독자가 아닌 최소한의 문자해독력만을 가진, 취미와 인식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저급한 수준의 대중을 상대해야 했다.[각주:2]

    이상이 수필을 발표할 당시에 수필은 하나의 장르로서 ‘隨筆’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았으되,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적 입지는 갖지 못한 상태였다. 더욱이 이상 자신이 문학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이상[각주:3]이 높았던 만큼 그에게 수필은 대중문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상의 시에서 나타나는 실험적인 성격과 압축적인 표현, 소설에서 사용된 고도의 은유와 상징 뒤에 가려져 수수께끼처럼 건네지는 작가의 진의와 정서를 짐작하는 일이 수필에서는 한결 수월하다는 면에서 이상의 수필은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참조점으로 기능할 것이다.

    1934년 6월에「혈서삼태」로 첫 수필 작품을 선보인 이후 『매일신보』에 1937년 4월과 5월에 걸쳐 「공포의 기록」을 연재하기까지 이상은 생전에 15편의 수필을 발표했고, 사망 직후에「권태」와 「슬픈이야기」가 추가로 발표되었다. 이 중 이상이 단편소설 창작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기 시작한 1936년 6월 이전에 발표된 수필들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논의를 전개하고자 하는데, 이는 이상이 단편소설 창작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기 시작하기 이전 시점에 발표된 수필들에서 이후 단편소설로 이어지게 될 이상의 문제의식을 발견하고자 함이다.

    이상은 시를 연작으로 즐겨 썼던 것처럼 수필 역시 연작으로 쓰거나 몇 개의 조각으로 나눈 단락들을 시의 연처럼 연결하는 방식으로 수필을 구성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후행하는 조각 혹은 연재글에 이르렀을 때 이전에 언급했던 대상에 대한 시선이나 판단을 전복하여 보여주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강점을 지닌다. 이상은 다음 단락 혹은 연작 수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차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고 새로운 서사의 장을 제시한다. 하나의 관점에서 이미 다룬 대상을 후행하는 글에서 다른 관계 속에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평가를 유도하기도 하고, 대상의 포지션이 행위의 대상에서 행위의 주체로 바뀌었을 때 드러나는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관찰하여 기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방식은 사물의 의미나 속성이 사물들 간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보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견지를 빌어 설명하면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상 수필 속의 대상이나 사건은 의미의 관계망 안에서 사물이 지니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궁극적으로 이상이 쓴 텍스트에서는 그것을 부분으로 삼는 전체 체계와 구조 안에서 대상이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령 산촌의 ‘색시’는 도회지의 여인과 비교 선상에 놓였을 때는 가난하지만 무명같이 튼튼한 존재로 인식되었다가, 그 다음 장에서는 뽕잎을 따기 위해 조이삭을 짓밟는 존재로 뒤집힌다. 또 종로 거리를 오가다가 적선을 베풀면서 인간 노릇을 한다고 느끼던 ‘화자’가 다음 순간 자신보다 상위의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바로 거지와 같은 존재로서 인식될 수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이것은 이상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자 텍스트를 통해 세계를 제시하고자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식민지성과 근대성은 이상에게 주변을 둘러싼 모든 물질과 상황으로 파편화되어 존재하며 고정되어 있지 않다. 파편들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의 의미는 가변적이다. 또한 대상은 홀로 놓여있지 않다.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있으며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 놓여있다. 그것이 이상이 시와 수필을 연속해서 쓰는 것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효과이다.

    이상 수필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은 ‘현대’이고 ‘문명’이다. 또한 이상의 수필에는 이야기가 일어나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중요하게 다루는데 즉, 시간성보다는 공간성이 두드러지는 편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무대는 근대적인 것들이 담겨있는 ‘도회지’이거나 도회지와의 대조 속에서 근대성을 비추는 ‘산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도회지에서 일어나는 전근대적인 일들과 산촌에서 일어나는 현대 문명의 흔적들을 다루며 외떨어진 곳까지 침투해가는 문명과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신화적 무지와 인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인습의 흔적을 다루는 동안에도 이상은 그것과 상응하는 근대의 산물을 떠올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더러 죽은 어머니를 살리는 수가 있다니 그것을 의학이 어떻게 교묘하게 설명해 줄지는 모르나 도무지 신화 이상의 신화다. 원체가 동양 도덕으로는 신체발부에 창이를 내는 것을 엄중히 취체한다고 과문이 들어왔거든 그럼 이 무시무시한 훼상을 왈, 중에도 으뜸이라는 효도의 극치로 대접하는 역설적 이론의 근거를 찾기 어렵다. …… 일종의 무지한 만적 사실인 것을 부정키 어렵다는 것 외에는 취할 것이 없다. 알아보니 학교도 변변히 못 가본 규중처녀라니 학교에서 얻어 배운 것은 아니겠고 그렇다면 어른들의 옛이야기나 …… 아 전설의 힘이 이렇듯 큼이여. …… 이 양이나 다름없이 부드럽게 생긴 소녀가 제 손가락은 넙적한 식도로 덱걱 찍어내었거니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다만 그의 가련한 무지와 가증한 전통이 이 새악씨로 하여금 어머니를 잃고 또 저는 종생의 불구자가 되게 한 이중의 비극을 낳게 한 것이다. 「조춘점묘 2-단지한 처녀」 중에서


    「조춘점묘 2」의 주인공인 ‘단지한 처녀’는 이상의 막내 동생 옥희의 친구였는데, 그 처녀가 어머니를 여의고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식도로 자신의 왼손 무명지를 찍어 잘라낸다. 간혹 그렇게 해서 어머니를 살려내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믿은 것이다.

   이 글에서 이상은 이토록 독하고 한편 도덕적인 행위의 저변에 깔려있는 “전설”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과 동시에 그녀에게 “학교” 교육의 부재했음을 같은 선상에서 보여준다. 손가락을 잘라내는 효의 실천은 “오늘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생활 시스템이나 사상적 프로그램으로 재어보아도” 안타깝지만 무지하고 미개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상은, “무슨 물질적인 문화에 그저 맹종하자는 게 아니라 시대와 생활 시스템의 변천을 좇아서 거기 따르는 역시 새로운, 즉 이 시대와 이 생활에 준구되는 적확한 이론적 척도”를 “의식적으로 입법해 내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겨야 할 것”이라는 말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근대성을 선취하고자 하는 이상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의 눈에 이 단지한 처녀는 불행히도 “시대에서 비켜선 지고한 효녀”다. 그녀의 효심이 공경받아 마땅한 정성인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손가락을 잘라냈다는 사실은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오히려 단지를 미워하는 심사 저 뒤에는 아주 근본적으로 미워해야 할 무엇이 가로놓여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지식이 아닌 신화와 전설을 상식으로 삼는 사회의 여전함을 못내 미워하는 마음이 나타난 이 글을 통해 이상은 그가 속한 세계에 결핍된 ‘현대성’을 요청한다.

    그러나 현대성을 성취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일리는 없다. 현대성의 어떤 면을 어떻게 취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이상이 ‘골동품’을 소재로 삼아 쓴 수필에서는 특히 “현대 자본주의”와 더불어 부상한 사물의 ‘교환가치’ 덕에 생기는 일들이 그려진다.

    이 글에서 이상은 골동품을 다각도에서 살펴본다. 골동품은 선대와의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고, 예술품으로 인식될 수도 있으며, 고고학적 지식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고, 거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위조하여 거래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가끔 아는 이에게서 자랑을 받는다. 내 이조 항아리 좋은 것 우연히 싸게 샀으니 와보시오-다. 싸다는 그 값이 결코 싸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보면 대개는 예술적 가치도 없는 태작인 경우가 많다. 그야 오늘 우리가 미쓰꼬시 백화점 식기부에서 살 수 없는 물건이니 볼 점이야 있겠지, 하지만 그 볼 점이라는 게 실로 하찮은 것이다. 「조춘점묘 6~7-골동벽」 중에서


    이상의 눈에 그다지 예술적 가치도 없는 이조 항아리를 “얼싸안고 혀로 핥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진부한 “커트 글래스 그릇” 하나를 만들어내는 부지런함과 비교되는 나태한 습성일 뿐이다. 그는 골동품이라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 되려면 “같은 시대 것, 같은 경향 것을 한데 모아놓고 봄”으로써 구체적인 역사지식을 얻을 수 있을 때이며 어느 시대의 “생활양식, 민속, 민속예술”을 알고자 함이 없을 경우에는 골동품의 존재 이유가 소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상이 ‘사용가치’라는 개념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골동품들을 모아놓음으로써 그것이 속한 시대와 경향을 알게 하는 박물관과 병존할 때에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된다고 역설하는 것은 골동품의 쓰임에 주목한 것이므로 사용가치에 제한하여 가치를 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각주:4] 사용가치의 강조는 다음에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골동품이 ‘교환가치’를 지닌 사물로 작동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전혀 오 전에 사서 백 원에 파는 것으로 큰 미덕을 삼는 골동가가 있으니 실로 경탄할 화폐제도의 혼란이다. 모씨는 하루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요전에 샀던 것 깜빡 속았어, 그러나 오 원만 밑지고 겨우 다른 사람한테 넘겼지 큰일 날 뻔했는 걸-이다. 위조 골동품을 모르고 고가에 샀다가 그것이 위조라는 것을 알자, 산값에서 오 원만 밑지고 딴 사람에게 팔아먹었다는 성공 미담이다. 「조춘점묘 6~7-골동벽」 중에서


    박물관에 기부하기도 애매한 위조 골동품을 유통하는 도회지의 세태[각주:5]는 ‘금융조합 선전 활동사진회’가 열리는 산촌의 어느 밤 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산촌의 “시민”들은 ‘금융조합 선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활동사진회’에만 대단한 호응을 보인다. 그들의 무지는 그들 자신을 “경탄할 화폐제도의 혼란”에서 구원해주는 역설적 무기가 되었다. ‘금융조합 선전 활동사진회’로 시작한 모임은 “영화 감상의 밤”으로 끝났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작입니다. 부산 잔교가 나타납니다. 평양 모란봉입니다. 압록강 철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 태서의 명감독이 바야흐로 안색이 없었습니다. 10분 휴게 시간에 조합 이사의 통역부 연설이 있었습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사람도 박수치 않습니다-. 「산촌여정 <6>」 중에서


    ‘성천기행 중의 몇 절’이라는 부제가 붙은「산촌여정」이라는 수필은 이상이 자신의 보성고보, 경성고공 동기였던 원용석이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지역인 성천에 가서 며칠 지내며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각주:6] 이상이 ‘도회지’라고 부르는 ‘경성’에서 경험하는 근대성에 비해 산촌인 성천에 들어와 있는 근대성은 얼개가 허술한 채 존재하는 파편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오히려 “세숫비누에 한 겹씩 한 겹씩” 해소된다는 도회의 육향을 이상 자신이 묻혀내지 않았다면 드물게 발견되었을 근대의 파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특성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한다.


옥수수 밭은 일대 관병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카마인’ 빛 꼬꼬마가 뒤로 휘면서 너울거립니다. 팔봉산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장엄한 예포 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곁에서 소조의 간을 떨어뜨린 공기총 소리였습니다. 「산촌여정<3>」 중에서


    고요한 밭, 바람에 옥수수가 서로 부딪혀 만드는 우수수 소리라야 겨우 적막을 깨는 공간에 장엄한 예포 소리가 들려온다. 산 너머 어딘가에서 흘러온 소리에 작은 새의 간이 떨어졌다. 이상은 작은 새의 두려움을 통해 현대식 무기가 조장하는 공포를 드러낸다. 그것이 아무리 누군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발사한 공포탄일지라도 여전히 막강한 화력을 보유한 무기인 것이다.

    현대적 이론과 생활 시스템은 신화와 전설의 세계에 빠져있는 무지한 대중을 구원할 수 있는 해법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또한 사물의 사용가치를 가리는 왜곡된 화폐제도나 침입의 형태로 나타나는 공포스러운 무기와 연동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성은 이상에게 온전히 추구할 수도 추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양가적인 대상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파시즘적 요소와 뒤섞여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각주:7] 근대의 이미지는 다면적이며, 근대는 다면성을 극에 달할 수 있게 하는 ‘위조’에 능하다. 이상은 백화점에서 안내방송을 맡은 라디오를 점원의 대표라고 보았다. 라디오에서 대표로 안내 방송을 하면 점원들은 일일이 손님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점원 개개인의 위조이다. 


비오는 백화점에 적! 사람이 없고 백화가 내 그림자나 조용히 보존하고 있는 거리에 …… 라디오는 점원 대표 서럽게 애수를 높이 노래하는 가을 스미는 거리에 …… 「산책의 가을」 중에서


    「산책의 가을」에는 ‘산보가을예’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글에서 이상은 가을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마주치는 것들을 하나 하나 나열한다. 근대의 징후들의 예다. 캔음료의 따개를 열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장소를 따라 흘러간다. 백화점에서 과일가게로 다시 인쇄소로, 청계천으로, 맨 마지막은 롤러 스케이트장이다.

    백화점에는 사람이 없다. 백화가 ‘나’의 그림자를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점원의 대표는 라디오다. 쇼윈도우 안에는 마네킹이 서 있는데, 마네킹에는 살결이 없다. 마네킹은 모델의 위조다. 유니폼을 입은 소녀들에게 볼 수 있는 피부는 포장지보다 온전한 포장지이지만, 유니폼은 피부보다 온전한 피부다. 유니폼은 피부의 위조다. 윈도우는 백화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일가게에도 있다. 과일가게의 내부를 들여다보니 과일 호흡이 어린 유리창 너머로 살짝 향초(바나나)와 복숭아가 보인다. 복숭아와 향초, 혹은 복숭아와 바나나다. 인쇄소로 넘어가자 직공들 얼굴이 모두 거울 속에 있고 모든 것이 다 ‘좌’다. 그렇기에 그들과 좌된 지식으로 대화하려 했더니 웬일인지 그들의 서술은 ‘우’다. ‘나’는 이렇듯 방대한 좌와 우의 교차 속에서 졸도할 것 같아 뛰쳐나왔다. 그러자 직공은 일제히 우로 돌아간다. 거울 속의 인쇄소 직공은 나의 위조다. 청계천에 이르렀다. 상공에는 비행기가 광고 삐라를 뿌리고 있다. 향국의 아이들(동해)은 삐라같이 삐라를 주우려고 모였다 흩어졌다 한다. 마지막으로 롤러스케이트장에 이른 이상은 겨울을 위조하는 빙판을 바라본다.


롤러 스케이트장의 요란한 풍경, 라디오 효과처럼 이것은 또 계절의 웬 위조일까. 월색이 푸르니 그것은 흡사 교외의 음향! 그런데 롤러 스케이트장은 겨울- 이 땀 흘리는 겨울 앞에 서서 찌꺼기 여름은 소름끼치며 땀 흘린다. 어떻게 저렇게 겨울인 체 잘도 하는 복사 빙판 위에 너희 인간들도 알고 보면 인간 모형인지 누가 아느냐. 「산책의 가을」 중에서


    내가 너와 비슷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너보다 낫지 않느냐고 아우성치는 위조들의 틈을 지나는 동안 차곡차곡 쌓인 문제의식은 “너희 인간들도 알고 보면 인간 모형인지 누가 아느냐”는 질문에 이른다. 근대 초기의 징후들이 자연으로부터 존재했던 것들을 대체할 수 있는 위조들을 늘어놓은 가운데 진정성에 대한 질문은 인간 존재에게까지 향한다. ‘너희 인간들도 알고 보면 인간 모형인지 누가 아느냐’는 질문은 인간 존재와 인간의 위조를 구분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지만, 한편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무엇으로 그 존재의 인간됨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떻게 ‘인간 모형’과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마꾸닝 회충 구제 그러나 한 동해도 그것을 읽을 줄 모른다. 향국의 동해는 죄다 회충이다. 그래서 겨우 수채 구녕에서 노느라고 배 아픈 것을 잊어버린다. 동해의 양친은 쓰레기라서 너희 동해를 내어다버렸는지는 모르지만 빼빼 마른 송사리처럼 통제 없이 왱왱거리면서 잘도 논다.[각주:8] 「산책의 가을」 중에서


    아이들은 마치 뱃속의 회충처럼 내몰려져있다. 이상은 아이들을 내다버린 부모들을 쓰레기에 비유한다. 가장 약한 인간 존재인 어린이들이 유기된 상황을 통해 인간됨에 관한 질문을 끌어낸다. 인간이 위조한 사물들에 소외된 인간은 또한 서로를 소외시킨다. 「조춘점묘 5-도회의 인심」에서는 그런 도회의 인심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상의 단편소설 속에 종종 등장하는 룸펜 이미지는 흔히 이상 자신의 일상을 그린 것이었다고 읽히지만 「조춘점묘 5」에 묘사되고 있는 개개인의 모습을 바탕으로 고찰한다면, 룸펜 이미지는 도회지에 사는 소외되고 고립된 개인의 이미지를 끝까지 밀어붙인 인물형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조춘점묘 5」는 이상이 전해들은 일화로 시작된다. 상해에서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상해에서는 아이(보통은 죽은 아이)를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다고 한다. 새벽이면 쓰레기 치우는 인부가 일을 하는데 휘파람을 불며 쓰레기를 치우다가 죽은 아이를 발견해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쓰레기만 걷어 가느라 아이의 시체를 이리 저리 비켜놓고 하다가 그냥 놔두고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이 주목한 것은 아이를 버리는 일이 아닌 미화원에 반응, 곧 “다만 이것은 쓰레기는 아니니까 내가 치워 가지 않을 따름 어떻게 되는 걸 누가 알겠소” 하는 듯한 태도다. 쓰레기를 치우는 인부는 쓰레기만 치우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고도의 분업화의 부산물이다. 한편 버려진 아이는 그것이 유기된 사체일지라도 간단히 쓰레기로 분류되기에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흔적을 여전히 지닌 복잡한 대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도회의 인심이 “어느 만큼이나 박하고 말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말로 뭉뚱그려진 문장 속에는,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죽은 아이의 몸처럼 다루기 힘들고 그래서 그저 그렇게 방치되어있는 산적한 도회적 과제들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숨어있다.

    이상은 이사한 지 일 년쯤 되어가는 ‘나가야’에서의 생활에 대한 회고로 이야기를 이어간다.「날개」의 33번지 18가구를 떠오르게 하는 이 ‘나가야’의 한 들보 한 지붕 밑에는 박 서방, 김 씨, 이상, 최 주사 등 여러 사람이 칸칸이 산다. 칸마다 크고 작은 문패도 붙었다. 다닥다닥 붙은 옆 방을 옆 집 삼아 지내는 사이이지만 이들은 서로 사귀지 않는다. 특히 직업은 절대 비밀이다. 한 젊은 세대는 여름부터 그칠 줄 모르고 싸우다가 가을 초입 즈음에는 결국 헤어지고 둘다 집을 나갔다. “물론 이사를 하는 경우에도 이웃에 인사를 하는 수고스러운 미덕은 이 ‘나가야’ 규정에 없다.” 그 옆 칸에 사는 젊은 여자는 앓던 이가 빠진 것 같다고 평했다. 이 젊은 여자의 경우 젖먹이를 먼저 저 세상에 보내는 일을 겪었다. 이런 경우에도 부의를 하는 이웃은 없었다.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어 이상의 가족이 사는 칸의 반대편 이웃집에서 흰떡을 했다. 그 떡은 그 집 식구들끼리만 먹는다. 이상의 가족 역시 지짐이를 했지만 “흰떡 한 가락 안 주는 걸 뭘, 하고” 혼자 먹었다. 사 남매가 사는 바로 옆집의 경우는 처음부터 나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그 집에서는 애초에 아무것도 부치거나 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혀 흰떡과 지짐이를 그 이웃집에 기대하고 있는 수작이 아닌가” 해서 오히려 얄밉기까지 했을 뿐이다. 혹 누가 굶지는 않는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바로 옆 방의 식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진심으로 마음쓰는 사람은 없다. 다만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거슬리느냐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이상은 어느 만큼이나 박하려는지 알기 힘든 도회의 인심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도회의 인심이 박해진 것에 이유가 없을 리 없다. 한층 더해진 생활의 중압이 “현대라는 데 깃들이는 사람들”을 짓누른다.


생활이라는 중압은 늘 훤조하며 인간의 부드러운 정서를 억누르려 드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라는 데 깃들이는 사람들은 이 중압을 한층 더 확실히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를 보아도 교착된 강철과 거암과 같은 콘트리트 벽의 숨찬 억압 가운데 자칫하면 거칠기 쉬운 심정…… 그가 제철공장의 직인이건, 그가 외과의실의 집도인이건, 그가 교통정리 경관이건, 그가 법정의 논고인이건, 그가 하잘것없는 일용 고인이건, 그가 천만장자의 외독자이건 묻지 않는다. 그런 구구한 간판은 ‘네온사인’이 달린 다방 문간에 다 내려놓고 들어가는 것이다. 「추등잡필 3-예의」 중에서


    “강철”과 “콘크리트 벽의 숨찬 억압”이라는 공간의 느낌이 대변하는 생활의 무게 역시 무작정 지향할 수만은 없는 근대의 단면이다. 이상은 근대에 관한 이러한 성찰과 고민을 모두어 자신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 문학하는 행위로 나아갔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이상의 수필을 통해 앞서 살펴본 근대를 둘러싼 문제의식들을 그의 문학하는 태도와 함께 고찰함으로써 이상에게 단편소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구성하고, 나아가 소설의 인칭과 인물들을 통해 그의 단편을 읽는 구심점을 만들어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이상, 「무제」, 김수영 역, 『현대문학』, 1960.12 [본문으로]
  2. 김승구, 「김기림 수필에 나타난 대중의 의미」, 『식민지시대 시의 이념과 풍경』, 지식과 교양, 2012, 75쪽 [본문으로]
  3. 사신6. “톨스토이나 국지관 씨는 말하자면 영원한 대중문예(문학이 아니라)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신듯 합디다.” [본문으로]
  4. 「날개」에서 ‘나’는 사용가치로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화폐’라는 사물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복잡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제도와 화폐의 축적과 재생산, 사물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에 관한 고민은 수필「산촌여정」이나 단편소설「지주회시」에서도 나타난다. [본문으로]
  5. 본문에 미쓰꼬시 백화점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 도회지의 에피소드임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6. 나는 그후 갑인출판사에서 발행한 이상수필집에서 성천기행을 읽어보았다. 나는 그가 성천에 와서 머무르고 있는 동안 기진맥진하여 움직일 수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글을 쓰고 시를 썼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용석, 「내가 마지막 본 이상」, 『그리운 그 이름 이상』, 172쪽) [본문으로]
  7. 파시즘 권력에 대한 이상의 인식은 1936년 10월에 매일신보에 연재했던 수필 중 「추등잡필 2-구경」, 「추등잡필 4-기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추가 정리 필요) [본문으로]
  8. 이상이 아이들을 ‘회충’에 비유하거나, 물고기 떼처럼 ‘잘도 논다’고 표현한 것은, 자칫 조소하는 듯한 어조로 읽힐 수 있지만 이상이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태도를 바탕에 두고 읽는다면 조소하는 일말의 정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이들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상은 아이들을 돌봐야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며 긍휼히 여기는 속내를 다른 텍스트 곳곳에서 드러낸다. 가령「조춘점묘」의 ‘동심행렬’ 편이나 완성된 원고의 형태로「권태」에 편입된 「이 아해들에게 장난감을 주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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