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탈로스의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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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그 무렵에,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창세기」 6장 1~4절

이 텍스트는 한 편의 수수께끼 같다. 하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 그랬더니 ‘인간’의 수명이 줄게 되었다고 한다. 무슨 소린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의 아들들과 결혼했다면 사람에게 좋은 일인 듯한데, 그 결과는 뭔가 잘못됐다는 분위기다.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다음 말은 한술 더 뜬다. 느닷없이, 그 이후 거인족이 살게 되었는데, 이들의 정체는 하늘의 아들들과 땅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이라고 한다. 황당하다. 이런 종족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보면 탄탈로스라는 이가 나온다. 그는 시피루스라는 나라의 왕이었고 대단한 자산가였다. 어느 모로 보나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그는 신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제우스는 종종 그를 신들의 잔치에 초대한다. 신만이 마시는 술(神酒)을 먹으며 신들과 담소를 나눈다. 그는 신과 같은 반열로 올라간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신주(神酒)에 취해버렸다. 잔치 속에서 그는 자신이 신이 된 착각에 빠진다. 다시 사람의 세상으로 내려가기가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그는 땅으로 내려와 땅의 논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사람의 음식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 사람의 진실에 진지해져야 한다. 속으로는 ‘이 얼마나 허망한 짓인가’ 라며, 조소로 가득한 마음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탄탈로스는 신의 권력을 흠모하며, 신의 잔치의 영원한 손님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욕망은, 그로 하여금 사람의 진질을 귀담아 듣지 못하게 하였다. 실상, 그의 ‘돌아섬’은 육체 밖으로 나가려는 욕망의 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는 세상에 대한 외면을 통해서 자신이 정말 그러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자기는 남들과는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가치로 사는 존재라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궁궐이 신의 잔치마당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하여 이번에는 그가 신을 초대한다. 신들을 위한 향연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초대된 순간만을 향유할 뿐인 손님의 자리가 아니라, 잔치의 영원한 향유자인 주인의 자리에 앉고픈 것이다.

성대한 잔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것으론 양이 차질 않았다. 그에겐 모든 것은 한갓 세상의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최후로 그는 비장의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바로 ‘자기의 아들’이었다. “이 얼마나 숭고한 잔치상인가? 누구도, 이만한 향연을 주최할 순 없으리라.”

그러나 이것이 그의 추락의 계기였다. 그의 상승 욕망은 결국 그를 타르타로스라는 ‘지옥’같은 곳으로 인도한다. 목까지 차는 물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목이 말라 고개를 숙이는 순간 물이 마르고, 눈앞에 과실이 열려 있는 데도 배가 고파 손을 뻗치는 순간 멀리 사라져버리는 그런 곳이다. 끝없는 욕망의 공간이며, 결코 충족되지 않는 고통의 공간이다.

Honoré Daumier 작 <Tantalos>(1842)

탄탈로스는 끝없는 상승 욕망의 노예가 된 자를 상징한다. 그는 남보다 우위에 있는 자기를 즐기고자 했으나, 그것이 다른 이들이 밟고 있는 같은 땅 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가치를 실현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망각한 존재다. 그는 다른 이들의 삶과 가치를 무시하고서만 실현되는 욕망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것이 신의 권력이라고 믿었다.

신의 권력이 확인되는 잔치의 손님이 된 자화상을 그린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잔치가 생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을 위한 잔치를 주최한다. 그러나 그가 초대한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의 권력이었다. 이 욕망을 위해서는 무엇을 대가로 지불해도 좋았다. 그리고 그 끝은 자기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것이 타르타로스, 곧 끝없는 욕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다시 「창세기」 4장의 텍스트로 돌아가 보자. 1절에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람의 딸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딸들이 누구냐,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 그들이 어떻게 됐느냐 등에 대해선 이 본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이 본문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그 무언가에 관련된 주역은 바로 ‘하늘의 아들들’이며, 여기서 ‘사람의 딸들’은 단지 하늘의 아들들로 나오는 존재의 소행과 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부가적인 조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들’(베네 하 엘로힘)에서 ‘아들’이라는 말은 물론 혈연적인 자녀라는 뜻에 국한되지 않는다. 직역하면 ‘~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천사일 수도 있고, 악령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 천사건 악마건, 이들은 인간의 어떠한 성향과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들’은 어떠한 성향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일까?

본문에 따르면 행위의 주체인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취했다고 한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행한 이 일의 요체는 ‘욕망’에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욕망’이라는 성향의 존재들이다. 이들이 욕망한 것은 ‘땅의 가치’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들이 추구한 것은 ‘땅의 가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이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하늘의 가치가 아니라 땅의 가치였다는 것이겠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라는 자의식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했다. 자신의 욕망의 실현이 곧 하늘의 가치와 맞닿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치 하늘의 지혜를 알려고 ‘선악과실’을 먹은 아담의 ‘착각’처럼 말이다. 요컨대 이들은 아마도 탄탈로스처럼 신을 사모하는 방식을 신의 권력을 욕망하는 것으로 표현했던 존재들인 것 같다.

이 내용은 3절의 내용과 바로 연결된다. 즉 ‘하늘의 속한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결혼한 결과, ‘거인들’의 탄생했다는 것이다. 2절의 내용, 즉 사람의 수명이 120세로 줄게 되었다는 말은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자연스런 논리의 흐름을 깨뜨리고 있다. 그러니 먼저 3절을 보고, 뒤에 2절이 끼어든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좋은 독서방식이다.
본문에서 ‘거인’은 ‘힘’으로 표상되는 존재다. 즉 이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힘’이었다. 신의 권력을 추구한 결과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탄탈로스처럼, 본문의 욕망의 결론은 ‘힘만이 생존의 논리’인 존재들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수명이 줄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여기서 ‘사람들’은 1절의 ‘사람들의 딸들’과 동일한 대상이 아니다. 앞의 구절이 ‘하느님의 속한 자들’에 대응하는 하나의 수사어로 쓰인 것이라면, 여기서는 ‘인간 일반’을 가리킨다. 인간에게 ‘하느님의 숨’이 120년밖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의 초점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한계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데 강조점이 있다. 즉 욕망의 대가는 창조의 생명력을 상당부분 손실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해봤자, 120년밖에 살지 못하는 것을 ......”이라는 냉소인 것이다.

이 텍스트는 「창세기」 처음부터 계속되는 일련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과정은 신의 권력을 추구하는 욕망의 대가로 세상은 더욱 죄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 모방 욕망’은 ‘인류 문명의 발전’과 대응하고 있고, ‘죄’는 ‘고통’과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끝없이 탄탈로스의 잔치를 벌이면서, 그것의 발전에 도취한다. 그것이 마치 신의 축복의 증거이기라도 한 양 말이다. 그것이 마치 신의 반열에 이른 인간 자아상의 확인인 양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바로 도정에서, 본문은 그러한 대단치도 않은 인간의 호들갑이 길어야 120년에 불과함을 냉소하고 있고, 나아가 이러한 인간은 욕망의 쳇바퀴 속에 갇혀 반복되는 고통과 절망을 체험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역사의 이 비밀을 알아낸 인간은 이 욕망의 쳇바퀴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한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기다림’의 요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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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5(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설교
본문: 고린도후서 3:4~6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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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꽤 오래 전부터 떠도는 이야기이지만, 천국과 지옥 사이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흉악해지다보니 지옥이 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옥으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급기야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담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천국측에서는 당연히 보수를 요구하였으나 지옥측은 태연히 버팅기고 있었습니다. 천국측은 도리없이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측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 몰라라 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뱃심으로 그렇게 버티는지 천국측이 다그쳐 묻자 지옥측은 세상의 유능한 변호사가 다 자기네 소속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응수했답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특정한 법조인들을 폄훼할 할 의도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 곧 법적 논리가 지니는 근본적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이 우스갯소리는 법적 정의와 실체적 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심오한 법철학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법적 논리가 지니는 결함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 법적 논리는 그 나름의 일관된 논리와 그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덧붙여짐으로써 완결됩니다. 그 논리는 그것을 주장하는 편에 유리한 조건에 따라 구성되며, 어떤 사건에 관련된 내용들을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명문화된 법조문에 의거해 그 시비가 비교적 분명히 가려질 수 있는 단서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됩니다. 여기에서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많은 단서들이 명문화된 법조문으로 시비를 가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부차화되거나 아예 사상되는 경우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법적 소송은 진정한 의미의 실체적 진실보다는 완벽한 논리의 재구성 성패 여하에 그 판결이 좌우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더욱이 법적 판결이 이루어질 때 사회적 강자에게는 충분히 배려되는 것도 사회적 약자에게는 배려되지 않는 경우들도 허다합니다. 사회적 유력인사나 재벌 등이 범죄나 비리를 범했을 때 직접적으로 범죄 사건을 구성하는 요인 말고도 사회적 기여도 등이 폭넓게 감안되어 당사자가 형을 선고 받고도 그 집행을 유예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범죄를 범했을 경우 그 동기나 정황 등이 충분히 헤아려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도 아무런 제약 없이 활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한 좀도둑질만으로 완전히 인생의 행로가 뒤바뀌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법의 집행이 재력이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현실을 말합니다.

법적인 논리 자체가 지니는 근본적인 한계에 덧붙여 그 집행이 재력이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면 법이 곧 정의라는 통념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이 정의를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요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도 아니라면 그 법은 제도적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집행하는 일에 관한 논란이 뜨거운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수시로 법질서의 준수를 강조하고 있고, 대법관은 ‘촛불재판’에 지침을 내려 개별 판사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보장하기보다는 권력의 안위만을 보장하려는 의도와 직결되어 있는 사태들입니다.

국회에서는 ‘입법전쟁’이라는 이상한 말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어쩌다 법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을까요? 재벌의 언론사 소유를 가능케 하는 언론관계 법안들은 이미 통과되어 버렸고, 이 밖에 국민의 정당한 권리 주장 및 사생활 보호와 직결되어 있는 집회와 통신 관련법안, 재벌에게 더욱 큰 힘을 실어주는 금산분리 법안, 출자총액 제한 완화 법안, 민생과 직결된 교육세와 농어촌특별세폐지 법안, 수돗물 민영화 법안, 비정규직 법안 등등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힘있는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고 힘없는 서민들을 더욱 옥죌 소지를 안고 있는 법안들입니다. 

법의 집행도, 법을 만드는 일도 온통 힘있는 사람들의 편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법이 곧 정의라는 통념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 주는 사태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질서의 준수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그것은 끽 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살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의 한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한편으로 율법의 속박을 강조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그와 대비되는 믿음의 자유를 역설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린도후서 3:6).

오늘 본문 말씀은 일차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사도로서 고린도교회 교우들과의 관계를 밝히는 대목에서 이 말씀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도 추천장 제도가 있지만, 그리스-로마 세계 안에서도 추천장이 널리 통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와 고린도교회 교우들 사이에 문자로 된 그 어떤 추천장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추천장을 내보여야 하는 관계도, 또는 추천장을 받아 그 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만큼 서로 신뢰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아주 아름다운 언어로 고린도교회 교우들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표합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작성하는 데 봉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입니다.”(고린도후서 3:3).

여기서 사도 바울은 문자로 기록된 그 어떤 추천장이나 편지가 필요하지 않은 까닭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말하면서 한 걸음 나아가 율법의 조문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이라는 말은 율법과 믿음을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바울의 일관된 논지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에서 말하는 문자는 율법 조문, 곧 법률 조문을 뜻합니다.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오늘의 현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용산참사는 제도적 폭력 내지는 제도적 테러의 결과입니다. 법 조문에 의거한 폭력이요 테러입니다.
  
사도 바울은 때로 법의 운용과 집행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율법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남용을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보다 근본적으로 율법의 폐기를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법의 형식 그 자체, 법의 한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제한적인 의미에서 법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하느님의 영을 말하고 있습니다. 법 질서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구원의 희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삶이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으로 수많은 법의 제약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모양을 띠는지는 끊임없이 물어야 할 과제입니다.

하지만 우선 지금 당장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결단하고자 할 때 우리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문자로서 법 조문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제약하고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법 질서를 준수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삶은 제도나 법조문 또는 문자의 격식에 매여 사람을 소홀히 하거나 죽이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 격식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삶이 아니라 그 모든 격식에 앞서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의 말미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린도후서 3:17~18).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후손이 모세의 율법을 대할 때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서 너울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 너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소 제거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영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역설합니다.

지금 읽은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런 힘에나 내맡겨져 굴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놀라운 영광에 이르게 되리라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 영광에 이르는 삶을 소망하며 진정한 삶의 용기를 얻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 천안살림교회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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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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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준호
    2009.03.29 22:4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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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글 잘봤습니다. 은혜가 깔끔하네요^^

    - 부산에서 이준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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