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저항하기, 고통에 복종하기[각주:1]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마태복음 25장 31-46절

31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33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37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41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44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1. 본문에 관하여

1) 행위구원론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성서 본문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비유로 분류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선 논란이 있긴 하지만―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행위구원론을 보여주는 본문으로 일찍부터 해방지향적인 신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던 마태복음 7장 15-27절의 본문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말하는 로마서 2장 1-16절의 본문이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야고보서 2장 14-26절의 본문처럼 이 본문 역시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다른 본문들처럼 일반적인 차원의 도덕적 선행이 아니라, 구체화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대적 차원의 행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관심을 끌어왔습니다. 그만큼 이 비유가 전달하는 신학적 메시지 안에는 사회윤리적인 함의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비유는 인자가 돌아왔을 때, 그는 모든 사람을 심판할 것인데, 그 심판의 기준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각 개인들이 자비와 사랑의 태도를 보여주었는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말에 메시아 앞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소외된 이들에게 보여준 행동에 기초하여 의인으로 인정받거나 악인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구원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믿었던 신학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신조나 의례, 예수나 기독교에 대한 지적인 이해나 고백보다,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들을 위한 관심과 선행으로 드러난 사회적 연대의 실천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 및 영생의 최종적인 기준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2) 영생의 기준

오늘 본문은 양과 염소를 가르는 인자의 최후 심판의 날이 온다는 사실을 단순히 경고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최후의 심판이 내려지는가를 알리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청중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구별할 것 없이 모두 자신들에게 내려진 판결을 두고 충격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헬라어 원문으로는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았습니까?”(37b, 38b, 39절), 그리고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지 않았습니까?”(44b)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그들을 구별하는 것은 누구에게 그들의 선한 행위가 보여졌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왼쪽에 서게 된, 즉 양으로 분류되어 복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 반대로 두 번째 그룹이 오른쪽에 서게 된, 즉 염소로 분류되어 저주받은 사람으로 판정받게 된 이유는 메시아가 행한 두 개의 답변에서 잘 드러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그리고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45절). 

가장 놀라운 대목은 예수의 현존이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의 형제자매였던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었다는 것, 즉 예수는 그들과 자신을 철저하게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식적인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여 행동했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도 몰랐던 사이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돌보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보았던 바로 그때였다고 말합니다. 

3) 값싼 행위구원론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이렇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식하고 그들을 최대한 잘 돌봐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이 비유가 복음서에 기록될 당시의 맥락에서, 이 본문이 증언하는 그 이웃 사랑의 행위가 갖는 당시의 역사적-사회적 무게를 헤아리지 않고, 우리 시대로 곧바로 가져와서 문자적으로 적용할 경우, 이 본문은 값싼 행위구원론의 전거로 소비되기에 안성맞춤이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부지불식간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예수에게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현대의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이것보다 더 쉽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의 리퀘스트’에 전화 한 통만 해도 ARS로 소년소년가장이나 결식아동, 장애인, 재해민들과 같은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을 도울 수 있고(“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교회로 찾아온 이주노동자들이나 결혼이주여성, 탈북자와 같은 우리 시대의 나그네들을 예배 시간에 환영할 수 있으며(“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아름다운 가게’와 같은 시민단체에서 주최한 바자회에 헌옷을 내놓음으로써 가난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할 수도 있고(“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하다못해 동네마다 있는 헌옷 수집함에 옷을 집어넣어도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 됩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 정도는 봉사활동 차원에서 병원이나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하여 몇 시간 동안 환자들을 돌봐줄 수도 있고, 교우들이 가족들의 병문안을 갈 수도 있고(“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겠지만 교도소나 구치소에 있는 지인을 면회 갈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렇게 일상생할 중에 큰 부담 없이 한 선행이나 봉사만으로도 최후의 심판 앞에서 그리스도를 섬긴 공을 인정받아 최종적인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쉬운 구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본문이 그런 방식으로 교회에서 쉽게 소비되는 경우를 무수히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이 본문이 말하는 실천이 이토록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일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은 현재의 시점에선 전혀 다르게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값싼 행위구원론의 전거로 이 본문이 소비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할까요? 


2. 마태공동체의 삶의 자리

1) 예수의 ‘형제자매들’

이 비유가 지시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비유가 누구의 입장에서 전달되고 기록되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 요청됩니다. 이를 위해선 40절의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형제자매들’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서에서 ‘형제자매’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의 단어는 ‘아델폰’(αδελφων)으로서 ‘형제’를 의미하는 남성 단수 명사 ‘아델포스’(αδελφος)의 복수형태입니다. 신약성서에서 ‘형제’라는 단어가 문맥상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의 혈연적 관계를 지시하지 않을 때, 그것은 전적으로 동일한 신앙공동체에 속한 동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오늘날 교회에서 교우들끼리 서로를 ‘형제자매’로 지칭하는 것).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거나,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방인들을 ‘형제’라고 지칭하는 그런 예는 성서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가 복수형태로 쓰일 때는 명백히 남성과 여성을 포괄적으로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인자가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그 형제자매들은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비유입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여기서 나타난 ‘형제자매들’을 마태복음과 연관된 ‘마태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혹시 마태공동체라는 단어가 생소하신가요? 현대 복음서 연구는 각각의 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의 배후에는 그 복음서의 전승을 연행하며 전달하고, 또한 문서화하여 기록하고 다시 전수했던 각각의 공동체들이 존재한다는 학문적 가설 위에서 발전해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가설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성서 내적인 증거와 교회사적인 증거들을 갖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 책 배후에 마태공동체라고 하는 미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마태공동체를 이해하는 것, 즉 이 비유를 자신들의 복음서 안에 담아냄으로써 자신들의 독자적인 신학을 드러내고 있는 마태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이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원래의 역사적-사회적 문맥 속에서 올바르게 파악하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2) 사회적으로 배제당한 집단

마태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을까요? 마태공동체의 자의식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위치를 여전히 유대교 안에 두고 있는지, 아니면 유대교 바깥에 두고 있는지에 대해선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엇갈린 해석들이 맞서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했든지 간에, 복음서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그들의 사회적 현실만큼은 그들이 유대교 내에서 철저히 주변부로 밀려나있는 집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마태복음 도처에서 확인되듯이,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의 다른 집단들로부터 비방, 회당에서의 채찍질, 산헤드린이나 지방 법정에 고발당함, 박해와 추방, 죽임 당함 등의 처절한 폭력을 경험한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됩니다. 마태공동체가 유대교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개의 본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11-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예언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의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들에게 축복을 선언하는데 이는 그들이 ‘모욕’을 당하고 ‘모든 악한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욕하다’라는 용어 'ονεδισωσιν’은 개인들 간의 직접적인 ‘비방’을 의미하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하다’라는 어구는 공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방식의 사회적 비난을 의미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부정적인 경험은 마태공동체가 다수의 유대교 집단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제당하는 과정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방과 비난이 ‘박해’(διωξωσιν)라는 단어와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던 마태공동체의 신앙적 일탈이 그러한 모욕과 비방의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태공동체가 당한 박해와 비방, 모욕이 공식적인 유대교 회당 지도부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다수의 광범위한 유대교 집단들로부터 마태공동체가 일종의 ‘왕따’, 즉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를 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겠습니다. 사회적 배제라는 현대 사회과학의 개념이 뜻하는 바가 “다차원적인 불이익으로서 어떤 사회의 주류적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포함하며, 이것이 상당기간 지속되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를 마태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이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한편 마태복음 10장 17-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회당이나 법정에 끌려 나가 채찍질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10장 22절에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고, 23절에서는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하며, 급기야는 23장 34절에서 예수 자신이 보낸 예언자들 중 일부가 유대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회당에서 채찍질당하고 가는 동네마다 박해를 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물론 이 모든 언급들은 마태공동체가 이스라엘 땅에서 자신들의 동족들로부터 당한 박해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랐던 이들이 겪은 사회적 배제와 집단적 폭력에 대한 기억은 로마 지배 체제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반란과 그에 대한 로마의 대대적인 진압으로 일어난 유대-로마 전쟁(서기 66-70년)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마태복음은 그 전쟁으로 인한 폭력의 경험과 이후의 여파를 처절한 언어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전쟁 당시의 경험을 마치 종말에 닥쳐 올 환난을 방불케 할 정도로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마태공동체와 같이 예수를 추종하던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환난에 넘겨지고 죽임을 당하며, 그들이 따랐던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민족, 즉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고, 결국엔 공동체 내부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여 서로를 적대자들에게 팔아넘기고 서로 미워하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공동체는 단순히 물질적 궁핍으로 인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던 약자 계층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으로 인해 그들이 속해 있던 사회로부터 폭력적으로 배제당하면서 빈곤과 위험에 처한 사회적 소수자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종교적․사회적 소수자 집단에 속한 어떤 누군가(‘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를 도와준다는 것이 과연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일지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공동체라고 하는 집단이, 우리가 별 부담 없이 도와줄 수 있는 평범한 사회적 약자계층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의도적으로건 비의도적으로건 하나로 뜻을 모아 함께 배제하고 박해했던 그런 저주받은 이들에게 감히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한 행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소수자 집단을 향해 연대를 실천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전체적으로 그들에게 부과했던 어떤 권위적이고 일반적인 판단을 정면으로 거슬렀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불우이웃돕기나 약자들에 대한 자선활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매우 민감한 사회적 논란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그런 비상한 사회적 연대의 행동을 의미할 것입니다. 유대교 일반과는 다른 신앙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온갖 종류의 사회적 배제와 폭력, 그리고 억압과 박해를 자초한 그런 집단을 향하여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요즘 말로 하자면, ‘외부세력’이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자신들을 향해 연대의 행동을 보여준 그 특별한 이들에게 마태공동체는 종말에 도래할 메시아 예수의 권위에 의지하여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메시아의 최후 심판에서 주어지게 될 최종적인 구원이란, 바로 그렇게 마태공동체 자신들과 같은 이들을 향해 위험을 무릅쓴 연대를 실천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음을 마태공동체는 세상에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3. 어떤 ‘권위’에 복종할 것인가?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이라고 하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는 1960-1963년에 걸쳐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을 수행한 후, 그 실험에 대한 보고서를 책의 형태로 1974년에 발표하게 됩니다. 그 책의 제목은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 to Authority)인데요. 제목 그대로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권위와 명령에 잘 복종하는지에 대해 실험한 결과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지난 20세기에 이루어진 수많은 심리학 실험들 가운데 이 실험만큼 유명하고 또한 논란이 된 실험도 없을 것입니다. 

일단 실험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밀그램은 ‘기억과 학습’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실험 참가자들을 모집합니다. 실험 참가자들은 2인 1조가 되어 매회 실험에 참여하게 됩니다. 실험을 주관한 과학자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생’으로, 다른 사람을 ‘학생’으로 명명하고, 그들에게 이 실험은 선생이 학생에게 내리는 처벌이 학생의 학습 능력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학생들이 단어를 기억하는 데 있어 처벌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과학자는 이제 학생 역할을 맡은 피험자를 방 안의 의자에 앉히고, 과도한 움직임을 제어하기 위해 양 팔을 의자에 묶은 다음, 전극봉을 그의 손목에 부착합니다. 그는 단어의 목록을 공부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틀릴 때마다 ‘선생’ 역할을 맡은 실험 참가자가 전기충격의 강도를 높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핏 보면 실험실 안의 ‘학생’이 실험 대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선생’이 실험 대상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학생은 밀그램이 고용한 연기자였고, 선생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이 실험의 진짜 피험자, 즉 실험 대상자였던 것입니다. 피험자의 역할을 맡은 것처럼 보이는 학생에게는 실제로는 아무런 전기 충격도 가해지지 않았고, 그는 단지 충격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연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선생의 역할을 맡은 실험 참가자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 실험의 진짜 목적은 고통을 호소하고 실험의 중단을 요구하는 희생자들에게 점점 더 심한 충격을 가하라는 권위적인 명령이 내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디까지 그 명령을 따르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험이 진행되자, 놀랍게도 이 실험에 ‘선생’으로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생’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처럼 ‘연기’를 하는데도, 상당히 높은 수치에 이르기까지 전압을 높여 그들에게 충격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일부의 ‘선생’들은 최고 수치로 전압을 올리라는 과학자의 명령에 전혀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들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이 실험을 중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갈등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실험실의 합법적인 권위자인 과학자가 그들의 옆에 서서, 그들로 하여금 애초에 맺었던 실험 완수의 의무를 다하도록 무언의 압박을 가했습니다. 아울러 학생들이 고통을 표현할 때마다, “실험을 계속 해야 하냐?”고 묻는 참가자들에게 “전기충격이 극도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몸의 세포 조직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히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실험을 계속하도록 종용했습니다. 

따라서 이 실험의 진짜 피험자였던 선생들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사회적 요구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과학자의 명령에 계속 복종하여 학생에게 점점 더 강한 충격을 가하거나, 희생자들의 요구를 쫓아 실험을 중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요구, 즉 권위적인 명령을 내리는 과학자의 목소리와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는 학생의 목소리 사이에서, 전자의 목소리에 복종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권위적인 명령의 목소리가 강하게 울려 퍼질 때, 자신들 앞에 다가온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그런 비도덕적인 성향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요컨대, 도덕적 책임감이 사회적 권위 앞에서 무너질 수 있음을 이 실험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실험이 모두 끝나고, 이 실험의 진짜 목적을 ‘선생’의 역할을 맡았던 실험 참가자들에게 알려주었을 때, 그들의 상당수는 학생들이 계속해서 답을 틀렸기 때문에 본인들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즉 본인들이 희생자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낼 수 있는 여러 불가피한 상황적 요인들을 각자 나름의 변명거리들로 늘어놓았습니다. 아울러 희생자와의 거리감, 즉 희생자가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익명성이 강화될수록, 이와 같은 비도덕적 행위에 더욱 쉽사리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결국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권위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그 죄책감을 면해줄 수 있는 기발한 변명의 논리들, 그리고 희생자와의 거리감 내지는 가해자의 익명성에 근거하여, 그들은 비윤리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권위의 목소리에 순순히 복종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밀그램의 이 실험이 왜 ‘아이히만 실험’으로 불렸는지 이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실무자로 참여했으면서도, 자신은 그저 공무원으로서 국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그래서 어떠한 잘못도 없다고 말했던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이라는 인물처럼, 누구라도 일정한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그 상황에서 비도덕적인 행위를 쉽게 저지를 수 있음을 이 실험은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실험에 참여했다가 학생이 지르는 비명의 소리를 듣고 실험에 계속 하기를 거부했던 소수의 피험자들도 있었습니다. 밀그램은 자신의 책에서 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대학에서 구약성서를 가르치는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사람입니다. 물론 그 신학자 역시 처음에는 학생이 답을 틀릴 때 마다 별 다른 고민 없이 전기 충격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학생이 고통을 호소하며 실험에 저항하자 이 실험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자기 옆에 있던 과학자에게 실험을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학생의 저항을 무시하고 실험을 계속 하라는 과학자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로 실험을 중단했으며, “왜 이 실험이 이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며 과학자와 논쟁을 벌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무리 전기 충격이 세포 조직에 영구적인 손상을 가하지 않는다고 과학자가 말할지라도, 학생이 겪을 정서적인 충격과 신체적 고통이 크다는 사실을 과학자에게 일깨워주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실험을 중단한 것을 실험실에서의 과학자의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 아니라, 희생자의 요구에 복종한 것이라고 정당화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과학자의 명령과 학생의 명령이 서로 대등한 것이었고, 자신이 복종하는 대상은 과학자가 아니라 학생, 즉 희생자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신학자의 태도에 강한 충격을 받았던, 밀그램은 그에 대해 평가하기를, “그는 모든 종류의 권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악한 권위를 선한 권위, 즉 신성한 권위로 대체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마태공동체를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과정에 일상적으로 동참했던, 혹은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무관심 속에 외면했던 당시의 마태공동체 주변에, 수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동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유대교의 권위, 더 나아가 유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에 순순히 복종했습니다. 아울러 마태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사회적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태공동체 자신들에게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는, 책임 전가의 논리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태공동체는 유대교 주류가 배척했던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었던 유대교의 이단자들이었고, 이방인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나라의 축복을 개방했던 동족의 배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는, 즉 당시 사회가 일반적으로 합의하고 있었던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충분히 정당한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마태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외쳤던 고통의 비명소리보다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결정과 이스라엘 사회의 전체적인 합의가 더 권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사회적 권위의 목소리와 마태공동체의 고통의 목소리 사이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인들 주변의 많은 이방인들은 전자의 목소리에 복종하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 사회의 권위적인 목소리보다 마태공동체의 고통의 목소리에 더 복종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단 한 사람도 없었을 수도 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마태공동체의 고통에 응답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권위의 목소리를 거슬러서, 고통의 목소리에 그 자체에 응답했던, 즉 사회적 권위가 아니라 고통의 권위에 복종했던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메시아는 최후의 심판의 순간에 영생을 허락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과 마태공동체가 증언하는 구원은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배제당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고통을 겪고 있는 바로 그런 이들의 모습으로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했을 때, 그의 부름에 응답한다는 것은 사회적 권위의 목소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모종의 결단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최후의 심판이란 그렇게 두 개의 목소리 사이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목소리에 응답했는가, 어떤 목소리의 권위에 복종했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영생이란 그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관과 규칙 등에 정면으로 맞서서,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고 있는 어떤 이들에게 용기 있게 다가갈 때, 고통당하는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그들의 고통의 음성에 제대로 귀 기울이고, 그들의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며 그들이 벌이고 있는 운동과 실제적으로 연대했을 때 비로소 주어질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이 정도 말씀드린 것만으로도 마태복음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구원이란 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무겁고 어려운 것인지를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4. “연대, 그 참을 수 없는 어려움”에 관하여

지난 금요일(2월 7일) 오전에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이 2009년에 정리해고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 153명에 대해 작년의 1심 판결을 뒤집고 2심 재판에서 해고 무효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정리해고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던 쌍용차의 경영현황에 관한 회계장부가 애초부터 조작된 것이라고 하는 노동자들의 주장이 6년 만에 비로소 진실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 진실이 진실로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대가가 따랐는지를 떠올려본다면, 고등법원의 이번 판결은 당연하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2009년 5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약 76일간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사측의 구조조정 단행에 반발해 쌍용자동차의 평택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루액은 기본이고, 테러나 폭동 진압 때나 쓰는 다목적발사기를 및 테이저건 등을 사용하여 노조원들을 무자비한 방식으로 진압했습니다. 그전에 이미 사측은 농성을 와해시키기 위해 노조원들이 점거하고 있던 공장에 단전 및 단수 조치를 시행했고, 식료품 및 의료진·약품의 반입조차 금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농성으로 인해 64명의 노조원들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속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사측이 영업손실 100억 원, 파업 진압 당시 헬기 손상과 경찰 장비 손상, 경찰 치료비 등의 명목으로 경찰이 14억7000만원, 공장에서 발생한 원인 모를 화재의 책임을 노조에게 전가하면서 메리츠화재가 청구한 구상권 110억 원을 합계하면, 해고 노동자들에게 청구된 전체 손해배상 및 구상금액은 총 224억7000만 원에 이릅니다. 너무 커서 실감도 안 나는 금액이지요.

그러나 그것으로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쌍용차 사태의 진짜 비극은 그 다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14년 2월 현재까지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 가운데 자살과 스트레스성 사망자가 총 24명에 달합니다. 《시사IN》이 2011년 3월 쌍용차 해고 노동자 4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50.4%가 자살 충동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실제 자살 시도도 많았습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인 김정우씨는 감옥에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왜 쌍용차에서 24명이 죽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한 사업장에서 이런 이례적인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사회적·경제적인 분석이 이뤄져야 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보십니까? 이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 투쟁을 벌일 당시에 76일 동안 식수와 전기가 끊어진 농성장에서 용역과 경찰로부터 수시로 끔찍한 폭력에 시달렸으며, 마지막 날 헬기에서 최루탄이 난무하고 전자총으로 폭행을 당하는 등 전쟁에 버금가는 야만적인 진압을 경험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자살이나 스트레스성 사망을 단순히 농성 현장에서 겪었던 폭력의 후유증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파업이 모두 끝난 후에도 천문학적인 손해 배상 청구소송에 시달렸고, 쌍용차 출신이라는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다른 회사로의 취업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전체로부터 자신들의 선택과 저항과 고통에 대한 정당한 ‘사회적 인정’과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이 그 죽음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자살과 스트레스성 사망은 경제적 어려움 탓도 크지만 파업 이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버림 받았다는 고립감, 본인들이 무가치하다는 자존감 상실,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냉담함과 갈등 등 여러 사회심리적 요인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국가와 회사, 언론, 정치권, 고용시장, 지역사회와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시민사회 등으로부터 이들은 공공연한 비방과 모욕, 박해, 처벌, 무관심과 냉소, 따돌림 등을 지속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결국엔 그 ‘한’맺힌 분노와 슬픔이 유령처럼 우리 사회를 떠돌면서 연쇄적으로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요?

결국 24명의 사람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당함과 그 고통의 억울함을 호소하기까지, 우리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은 고통과 저항의 목소리에 귀기울기 보다는 국가와 자본의 권위적인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국가와 자본의 목소리를 거스르고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다시 말해 사회의 권위적인 목소리가 아닌 고통 받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6년 만에 법원이 정리 해고 무효 판결을 내리기 전에, 이미 공개된 다양한 증거 자료들을 통해 드러난 사실들만이라도 제대로 믿었더라면, 아니 그전에 노동자들의 주장에 관해서라도 제대로 귀를 기울였더라면, 24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계의 상황에 내몰려 죽임당하는 그런 비극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끝내 그들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저항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정당한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들의 고통에 있는 그대로 다가가 그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얼굴을 마주해야 할 우리 주변의 고통 받는 이웃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그리 착하거나 유순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도처에서 폭력적인 결말을 담은 비유가 많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래 시간 동안 겪은 폭력과 배제의 경험으로 인해 마태공동체의 내면은 피폐해졌고,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시시때때로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을 향해, 또는 공동체 바깥의 타자들을 향해 돌출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여러 상처 입은 저항자 집단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연대의 손길을 내민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저와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 스스로가 사회적 편견이나 자기 검열의 심리기제를 깨뜨리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무조건 다가간다고 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찾아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말을 건네고 어떻게 그들을 도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남겨진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최후의 평가가 바로 그렇게 어렵고도 힘겨운 연대의 실천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과연 누구의 목소리에 복종할 것이냐고. 사회의 명령과 권위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의 비명소리에 복종할 것인가. 누구의 얼굴을 볼 것이냐고. 국가의 얼굴, 자본의 얼굴을 볼 것인가, 아니면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얼굴을 볼 것인가. 그 목소리를 듣고, 그 얼굴을 보고도 그들을 외면할 것이냐고. 지금 그 목소리와 얼굴 속에서 예수를 보고도 그렇게 외면할 것이냐고 말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미래도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를 어느 한쪽으로 분명히 이끌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 어느 한쪽의 사람들의 얼굴에서 바로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그래서 마침내 그분의 손을 기꺼이 붙잡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2014년 2월 9일 천안살림교회 예배 설교문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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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5(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설교
본문: 고린도후서 3:4~6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꽤 오래 전부터 떠도는 이야기이지만, 천국과 지옥 사이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흉악해지다보니 지옥이 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옥으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급기야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담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천국측에서는 당연히 보수를 요구하였으나 지옥측은 태연히 버팅기고 있었습니다. 천국측은 도리없이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측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 몰라라 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뱃심으로 그렇게 버티는지 천국측이 다그쳐 묻자 지옥측은 세상의 유능한 변호사가 다 자기네 소속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응수했답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특정한 법조인들을 폄훼할 할 의도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 곧 법적 논리가 지니는 근본적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이 우스갯소리는 법적 정의와 실체적 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심오한 법철학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법적 논리가 지니는 결함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 법적 논리는 그 나름의 일관된 논리와 그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덧붙여짐으로써 완결됩니다. 그 논리는 그것을 주장하는 편에 유리한 조건에 따라 구성되며, 어떤 사건에 관련된 내용들을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명문화된 법조문에 의거해 그 시비가 비교적 분명히 가려질 수 있는 단서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됩니다. 여기에서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많은 단서들이 명문화된 법조문으로 시비를 가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부차화되거나 아예 사상되는 경우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법적 소송은 진정한 의미의 실체적 진실보다는 완벽한 논리의 재구성 성패 여하에 그 판결이 좌우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더욱이 법적 판결이 이루어질 때 사회적 강자에게는 충분히 배려되는 것도 사회적 약자에게는 배려되지 않는 경우들도 허다합니다. 사회적 유력인사나 재벌 등이 범죄나 비리를 범했을 때 직접적으로 범죄 사건을 구성하는 요인 말고도 사회적 기여도 등이 폭넓게 감안되어 당사자가 형을 선고 받고도 그 집행을 유예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범죄를 범했을 경우 그 동기나 정황 등이 충분히 헤아려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도 아무런 제약 없이 활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한 좀도둑질만으로 완전히 인생의 행로가 뒤바뀌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법의 집행이 재력이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현실을 말합니다.

법적인 논리 자체가 지니는 근본적인 한계에 덧붙여 그 집행이 재력이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면 법이 곧 정의라는 통념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이 정의를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요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주는 것도 아니라면 그 법은 제도적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집행하는 일에 관한 논란이 뜨거운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수시로 법질서의 준수를 강조하고 있고, 대법관은 ‘촛불재판’에 지침을 내려 개별 판사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보장하기보다는 권력의 안위만을 보장하려는 의도와 직결되어 있는 사태들입니다.

국회에서는 ‘입법전쟁’이라는 이상한 말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어쩌다 법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을까요? 재벌의 언론사 소유를 가능케 하는 언론관계 법안들은 이미 통과되어 버렸고, 이 밖에 국민의 정당한 권리 주장 및 사생활 보호와 직결되어 있는 집회와 통신 관련법안, 재벌에게 더욱 큰 힘을 실어주는 금산분리 법안, 출자총액 제한 완화 법안, 민생과 직결된 교육세와 농어촌특별세폐지 법안, 수돗물 민영화 법안, 비정규직 법안 등등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힘있는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고 힘없는 서민들을 더욱 옥죌 소지를 안고 있는 법안들입니다. 

법의 집행도, 법을 만드는 일도 온통 힘있는 사람들의 편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법이 곧 정의라는 통념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 주는 사태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질서의 준수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그것은 끽 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살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의 한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한편으로 율법의 속박을 강조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그와 대비되는 믿음의 자유를 역설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린도후서 3:6).

오늘 본문 말씀은 일차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사도로서 고린도교회 교우들과의 관계를 밝히는 대목에서 이 말씀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도 추천장 제도가 있지만, 그리스-로마 세계 안에서도 추천장이 널리 통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와 고린도교회 교우들 사이에 문자로 된 그 어떤 추천장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추천장을 내보여야 하는 관계도, 또는 추천장을 받아 그 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만큼 서로 신뢰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아주 아름다운 언어로 고린도교회 교우들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표합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작성하는 데 봉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입니다.”(고린도후서 3:3).

여기서 사도 바울은 문자로 기록된 그 어떤 추천장이나 편지가 필요하지 않은 까닭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말하면서 한 걸음 나아가 율법의 조문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이라는 말은 율법과 믿음을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바울의 일관된 논지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에서 말하는 문자는 율법 조문, 곧 법률 조문을 뜻합니다.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오늘의 현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용산참사는 제도적 폭력 내지는 제도적 테러의 결과입니다. 법 조문에 의거한 폭력이요 테러입니다.
  
사도 바울은 때로 법의 운용과 집행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율법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남용을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보다 근본적으로 율법의 폐기를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법의 형식 그 자체, 법의 한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제한적인 의미에서 법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하느님의 영을 말하고 있습니다. 법 질서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구원의 희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삶이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으로 수많은 법의 제약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모양을 띠는지는 끊임없이 물어야 할 과제입니다.

하지만 우선 지금 당장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결단하고자 할 때 우리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문자로서 법 조문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제약하고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법 질서를 준수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삶은 제도나 법조문 또는 문자의 격식에 매여 사람을 소홀히 하거나 죽이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 격식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삶이 아니라 그 모든 격식에 앞서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의 말미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린도후서 3:17~18).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후손이 모세의 율법을 대할 때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서 너울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 너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소 제거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영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역설합니다.

지금 읽은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런 힘에나 내맡겨져 굴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놀라운 영광에 이르게 되리라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 영광에 이르는 삶을 소망하며 진정한 삶의 용기를 얻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웹진 <제3시대>

* 천안살림교회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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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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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준호
    2009.03.29 22:4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목사님 글 잘봤습니다. 은혜가 깔끔하네요^^

    - 부산에서 이준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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