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과 남성성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지난 일주일 동안 미국은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게이 나이트 클럽, 펄스(Pulse)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현재까지 49명이 죽었고, 53명의 부상자들이 발생한 이 사건은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점들을 보여 주고 있다. 총기 규제, 동성애자들을 상대로한 증오범죄, 이슬람혐오주의, 테러와의 전쟁, 인종 차별주의, 남성 폭력 문제, 문화 충돌과 이민법 개혁과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 등등.이 대량 살상 사건으로 인해, 세계는 올해 11월에 치뤄질 미국 대선, 이슬람 국가 (ISIS)와 전쟁을 치루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이익으로 인해 후폭풍을 맞고 있다. 


          다수의 시민들과 여성, 어린이, 소수 인종,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폭력행위는 절대로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펄스 나이트 클럽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도, 단순히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이슬람 과격주의에 영향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이민 2세인 오마르 마틴 (Omar Mateen)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로만 보기에는, 그 밑에 깔린 보이지 않는 사회 구조적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 우선 마틴이 살아온 삶 자체가 폭력으로 물들어 있다. 마틴의 삶을 파헤친 다양한 기사들을 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자잘한 싸움과 폭력행위에 휘말려, 정학을 당하거나 퇴학을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폭력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고, 여성들을 무시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이런 그가 경호원이란 직업을 택하고, 경호 훈련과 총기 사용 훈련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경찰이나 군인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랬다면, 그는 아마도 합법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오마르 마틴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한 숨어있던 동성애자였다는 보고도 있다.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도 마틴의 성정체성을 의심했지만, 굳이 알려고 들지도 않았고, 마틴 스스로도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는 설이다. 오마르 마틴이 동성애자라 하더라도, 명예를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프가니스탄 가족 공동체에서 커밍 아웃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강경하게 그의 게이설을 부인하고, 그가 동성애자들을 증오했다고 확언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 문화에서 보면 당연하다.  


         아프가니스탄 이민자의 아들로 자라면서, 오마르 마틴의 유년 시절도 평탄하지 않았을 것 같다. 폭력적인 성향이 어렸을 때부터 나타났고, 그의 학교 교사들이 끊임없이 마틴의 행동 장애를 가족에게 알렸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그러한 보고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폭력성을 보이는 아프가니스탄계의 문제아였던 마틴의 학교생활과 교우관계가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가 왜 어렸을 때부터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는지, 왜 행동장애에 대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그가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오마르 마틴의 복잡한 인생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대량 학살의 원인을 찾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펄스 나이트 클럽 총기 난사사건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미국에서의 총기 규제가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이 총기 사건과 관련하여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폭력과 총기류와 같은 무기에 기대어 생명력을 유지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 (hegemonic masculinity)이다.  


          미국에서는 총기류의 소지를 규제하려고 할 때마다, 전미 총기 협회 (National Rifle Associations)와 같은 단체가 전방위로 규제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펴왔다. 그들의 로비는 1977년 카터 대통령이 총기규제를 강화하려고 할 때부터, 더 조직화되었고, 강해졌다. 현재 미국에는 인구 100명당 88정의 총이 존재하지만, 총을 한정 또는 그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22%에 불과하다 (자료ProCon.org http://gun-control.procon.org/view.resource.php?resourceID=006436).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총은 남성성을 상징한다 (총이 나오기 전엔 칼과 창이 남성의 상징물이였다).남성성을 연구하는 호주의 학자, 코넬 (R. W. Connell)은 총기 소유를 방어하는 입장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Connell, Masculinities, 2005). 여기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란, 진정한 남성은 ‘이러저러한 성향과 행동’을 해야한다는 사회 관습적 규범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부합되지 않는 몸과 행동, 생각 등을 보이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탄압의 대상이 된다. 서구화된 대부분의 사회에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가부장적인 남성, 강인함, 지도력, 카리스마, 폭력성 또는 가족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과 용맹성, 경쟁심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총기류의 정치학에서는 남성성이나 젠더가 보이지 않는다. 주로 토론되는 주제들은 국가 안보, 군수 기업의 이익, 가족의 가치, 종교적 신념, 개인의 자유, 과학 기술의 진보와 같은 것들이다.  


          코넬은 가장 합법적으로 무기와 폭력을 사용하는 군조직이야 말로 유럽과 미국에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한다 (Connell, 2005). 군대 조직과 더불어 미디어에서 생산해 내는 전쟁 드라마, 군 영웅 이야기등을 통해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확대 재생산되고, 진정한 남성에 대한 기준이 세워진다. 남성 영웅은 군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게임에서, 만화에서 다양한 영웅들이 등장하고, 이 영웅들 사이에는 묘하게 닮은 성향들이 존재한다. 바로 영웅이든 악당이든 폭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이들의 남성성은 주로 폭력을 통해 드러난다. 마치 남자라면 당연히 폭력적이라고 믿는 듯하다. 좋은 의도에서건 아니건, 폭력과 연계된 남성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위태롭다. 여성들의 생존은 남성과 같은 수준의 폭력을 보이거나 그들의 폭력을 지지하던지, 아니면 남성의 보호를 받던지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선택도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가부장적인 남성상위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여성은 폭력의 주체가 되기도 힘들고, 생존을 위한 선택의 주체가 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즉 권위있는 남성들이 보호받을 여성들과 그렇지 않은 여성들을 구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의해야할 것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대한 연구가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적 구조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헤게모니는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 유지되기 마련이다. 또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직접적인 이슈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들과 남성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생각을 맞추어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소수의 남성 엘리트 그룹의 이익만을 지켜줄 뿐이다.  


          코넬이 주장하는 대로, 정치, 경제, 종교, 이데올로기, 성담론의 주도성을 유지하려는 (소수의) 이성애자남성들은 활발히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방어하려고 한다 (Connell, 2005). 비록 그들이 드러내 놓고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방어하거나, 이것에 대해 의식화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세계 정치가 경쟁적이고, 주도권 쟁취에 바탕을 둔 남성성에 의해 지배되는 한, 폭력과 전쟁, 자연 파괴와 같은 파괴적인 지속될 것이라고 코넬은 경고한다 (2005).  


          나는 코넬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작게는 개인 간의 관계에서 넓게는 국가 간의 관계까지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이 영향력은 여성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남성들에게 까지도 악역항을 끼친다. 그렇기에 벨 훅스 (bell hooks)와 같은 흑인 여성 운동가는 남성성에 대한 바른 이해와 남성성의 변화가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흑인 여성 신학자 숀 코퍼랜드 (Shawn Copeland)는 더 나아가, 예수의 삶이 대안적인 남성성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보여준 사랑과 자비심, 공동체 중심적인 삶, 여성들과 남성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받아들인 삶 등이 과연 남성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예를 제시해 줄 수 있다 (Copeland, Embodied Freedom, 2008).

  

          성소수자가 아닌 이상, 펄스 나이트 클럽 총기 난사사건을 퀴어 관점에서 이해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 공포, 절망 등등.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총기 규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동성애 혐오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상, 9/11 테러와 펄스 학살 사건을 통해, 그들이 사회로 부터 느끼는 증오, 압박감과 공포를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들의 종교가 폭력의 종교로 규정되고, 이슬람교도 모두가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여겨지는 한, 종교간의 갈등과 폭력은 더욱더 극복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또 다른 폭력과 희생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공포를 남성들이 이해하기 어렵듯, 여성인 나또한 한국 사회에서 미국에서 남성으로, 특히 한국인 남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제 17개월된 내 아들이 어떠한 남성으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감은 있다. 나는 내 아이가 타인의 삶과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폭력과 경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신이 남자임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모든 인간들이 소중한 존재임을 어느 순간에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미국은 지금보다 더 강한 총기 규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강력한 총기 규제법 못지 않게, 사회의 폭력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폭력성을 극복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대안적인 남성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실천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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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6 : 총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시카고가 속해있는 미국의 일리노이 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총기를 공공장소에서 소지할 수 없는 유일한 주였다. 다른 주들은 총이 눈에 띄지 말아야한다는 단서가 따랐지만 누구나 쉽게 허가 받을 수 있는 총을 차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리노이 주의 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은 이유는 총으로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도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한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최근 총기산업의 로비단체들의 소송으로 여러 주에서는 대학의 강의실에도 총을 소지하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일리노이 주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새로운 법안을 만들면서 예외조항을 포함시켰다. 학교나 도서관 같은 곳은 예외로 인정해 주었고, 다만 금연사인과 비슷한 총기금지 안내판을 출입구에 부착하도록 했다. (교회는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예배시간에 총기소지를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나처럼 학교 건물로 출근하는 사람은 하루에도 여러 번 총의 형상을 보게 되었다. 총기소지가 금지된 건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밖의 세상은 총이 허용된 공간이란 사실을 의미한다. 그 효과는 총에 대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고, 총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금연사인이 흡연을 막지 못하듯이 총기반입을 금하는 안내판이 총을 합법적으로 안주머니에 소지한 사람이 학교건물에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다. 미국 대도시의 고등학교에서 총기유입을 막기 위해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서 등교하게 만들고, 총을 소지한 경비원들이 교내를 순찰하는 건 흔한 일이다. 모든 학교의 교실에 경찰서와 연결된 카메라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듣게 된다. 총이 없는 사람들에게 총기금지 안내판의 효과는 암시작용에 있다. 총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는 일차적인 암시가 있지만, 그 암시는 총에서 끝나지 않는다. 총의 목적이 생명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최후의 암시가 빠질 수 없다. 그런 암시가 통치의 수단이라면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람을 수동적이고 순응적으로 만드는 수단은 없을 것이다. 그 총이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지 상관없이 총은 언제나 죽음을 암시한다. 그 자체로 공포와 복종을 유발하는 힘이 된다. 이런 총의 현상은 미국적인 삶의 일상이고 역사의 일부다. 미국의 군사문화의 기초를 이루고 미국의 묵시록을 현재형으로 만드는 요소다.  




    미국 밖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설명하기 힘든 것, 그렇다고 미국 내에서도 합리적인 설명이 어려운 것이 바로 미국의 총기문화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대형 총기난사 사건은 더 강력한 총기규제를 요구하지만, 규제를 반대하는 세력도 그들의 논리를 굽히지 않는다. 실제로 이 문제만큼 미국을 갈라놓는 이슈는 없다. 총기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총이 흔하기 때문이고, 총기 보유율이 높은 이유는 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미국사람들이 왜 총을 좋아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설명이 유럽의 신대륙 발견과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온 역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에선 이론이 없다. 서구의 근대란 시기는 식민지를 통해 이루어낸 것이고 식민지 지배는 총과 무기를 통해 가능했으며, 그 시기는 또 총과 무기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시기였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미국은 총으로 만들어진 나라다. 극단적인 표현으로 들리지만 그 내용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를 미국의 입장에서 간략하게 설명해 보자. 미국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유의 나라이고, 예외적인 운명을 타고난 나라다. 이 자유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키고 보존해야 할 이념이었다. 총은 자유를 상징하고 대변할 뿐만 아니라, 광야와 같은 악한 세상에서 자유를 지키는 수단이었다. 신이 인간에 부여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총이기 때문에, 총이 지켜내는 것은 인간의 자유만이 아니다. 신의 자유를 지키고 실현하는 역할까지 한다. 이런 총에 관한 이해의 변증법은 미국적 사유의 본질적 단면을 보여준다. 여기에 묵시적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선과 악의 단순한 구분, 예외적인 선택과 사명을 부여 받았다는 자기이해, 그리고 특히 미국에서는 자유란 내용없는 개념이 총이란 종말의 무기를 위한 자유로 쉽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흔히 미국사람들은 주입식 교육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총에 대한 지식은 예외일 것이다. 미국 사람들만큼 총에 대한 아는 게 많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가끔 총하고는 거리가 먼 대도시 출신의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총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 나를 놀라게 하는 때가 있다. 물론 나에게만 ‘방대한 지식’이지만 그들에게는 미국의 역사와 문화의 한 부분일 뿐이다. Browning, Colt, Remington, Winchester, Smith & Wesson등의 총을 만드는 회사들은 그 브랜드 가치는 여느 일류기업 못지않다. 미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은 그 시대의 총이나 무기와 함께 기억되는 경우도 많다(서부시대의 레밍턴 라이플과 콜트.45, 2차 대전의 카빈소총, 베트남 전쟁의 M-16 등). 그 이유는 그 순간들이 주로 전쟁의 순간들이었던 사실도 있지만, 기본적인 총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총을 중심으로 사건을 이해하게 만드는 면도 있다 (따라서 총기 사고가 나면 어떤 총이었나, 누굴 암살한 총은 어떤 총이었나 등에 높은 관심을 갖게 된다). 흔히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서부시대의 신화를 만들고 총과 폭력의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하지만, 이는 미국의 총기사랑에 대한 표면적인 설명밖에는 되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의 총기문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논란의 대상이다.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백인들이 땅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백인들에게 총기소유는 필수적이었다는 설명이 있다. 서부로 영토를 확장시키던 시기엔 법보다 총이 앞섰기 때문에 총기보유율이 높아졌다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18세기 미국 백인들의 사망하면서 유산으로 남긴 물품의 목록을 조사한 결과 생각하는 만큼 일반인들이 총을 많이 보유하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다. 미국의 총기문화가 영화산업이 흥행을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입장도 있고, 총기산업의 로비가 총을 자유와 권리의 문제라 주장하면서 이 총기문화를 지속 유지시킨다는 분석도 있다. 


    대통령 후보시절 오바마는 시골의 가난한 백인들이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소외되고 왜곡된 세상인식을 갖게 되었고, 국가의 정책으로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총과 근본주의 신앙에 빠진다는 말을 해 엘리트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얼마 후 미국 남부에서 활동하는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라는 록밴드는 오바마를 은연중 비판하는 “God and Guns”라는 곡을 냈다. 가사가 재밌다. God and guns/Keep us strong/That’s what this country/Was founded on/Well we might as well give up and run/If we let them take our God and guns. 




    미국의 평범한 백인들의 정서를 잘 대변한 이 곡에서 ‘신’과 ‘총’은 항상 함께 한다. 가사가 비판하는 내용의 배경에는 신을 버리고 다문화주의를 선호하며 미국을 세속사회로 만든 자유주의자들이 이젠 총까지 빼앗으려 한다는 위기의식이 담겨 있다. 가사는 미국이 ‘신’과 ‘총’의 바탕 위에 세워졌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은 평범한 백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다. 그들의 삶속에서 신은 위대하고 총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총기문제는 자신들이 만든 문제가 아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지소유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협박조의 내용이다. 어디로든 떠날 때 총은 들고 떠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미국의 역사에서 신의 존재와 총의 현실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총의 신학사


    미국에서 총은 신학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신학은 묵시적인 것이고, 미국의 묵시록은 총을 제외하고 설명될 수 없다. 미국에서 그 신학의 역사는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한다. 메이플라워란 배에서 육지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 총을 들고 내렸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미국정신의 뿌리가 되는 ‘메이플라워 서약’으로 유명한 그 배엔 상당한 양의 총과 무기가 실려 있었다. 그들에게 마귀가 들끓는 광야에서 믿을 건 총과 하나님밖에 없었다. 광야에서 에덴을 개척해야 할 선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었고, 땅을 마련하기 위해 총은 필수였다. 17세기 청교도들에게 주일은 총을 드는 날이었다. 늑대와 원주민들의 공격을 퇴치시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교회에 올 때 총은 의무적으로 소지해야만 했다. 예배를 드리는 마을회관에는 전망대가 있었고, 교회는 무장한 보초가 지키던 요새였다. 예배 중에도 총을 옆에 두고 유사시에 발사할 수 있어야 했다. 말 그대로 Ecclesia Militans(군사적 교회)였다. 죄와 마귀와 상징적인 싸움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 총을 든 군사적 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였다. 그런 군사적인 장치가 필요할 정도로 원주민들의 공격이 빈번했는지 묻을 필요는 없다. 그런 보안조치 때문에 원주민 공격을 사전에 예방했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인들이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원주민들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청교도들은 이 분쟁을 신에게 부여받은 사명을 실행하려는 선택받은 백인들과 이를 막으려는 불신의 원주민들 사이의 분쟁으로 이해했고, 총과 무기로 원주민들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청교도 교회 내에서는 총기 사용과 훈련이 강조되었고, 총의 선함과 정당성은 설교를 통해 재확인되기도 했다. 청교도들이 총과 무기에 집착한 이유로 원주민들과의 분쟁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원주민들에 대한 이미지와 스스로를 사악한 세상에서 공격당하는 약자이고 피해자라는 인식도 무시할 수 없다. 원주민들을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다는 아말렉 족속으로 보는 시각은 오랜 역사가 있는 청교도들의 수사였다. 그들이 건설하려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원주민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계시의 완성이었다. 청교도들이 생각한 원주민은 신학적 상상의 산물이었다. 미국의 종말론적 사명의 드라마에서 조역을 맡아 광야에서 실체 없이 떠도는 이스라엘의 적, 그리고 최종적으로 총에 굴복하여 땅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청교도들에게 총은 신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고, 그 사명은 최후의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후의 역사에서도 미국의 예외적인 정체성은 총과 무기를 매개로 유지되었다. 미국역사의 무의식에서 총은 신의 편에 서있는 미국이 신의 정의를 집행하도록 내려 받은 선물이었고 축복의 상징이었다. 그 선물의 현재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장 앞선 무기를 보유해야만 했다. 그 관점에서 냉전시대는 선택받은 미국과 무신론자들의 싸움이었고, 냉전에서 이긴 건 신의 승리였고 무기의 승리였다. 신과 무기는 분리될 수 없는 미국정신의 양대 근원이었다. 군사적 우위를 다른 나라에게 내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군사정책의 기초가 바로 거기 있다고 할 수 있다. 군사적 우위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신의 축복, 미국의 예외성, 미국이 받은 사명의 근거가 없어짐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자유의 개념은 평등하지 않고, 언제나 예외적이다. 총은 그 자유를 가능케 하고 지키는 도구였다. 청교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자유는 미국에 부여한 신의 선물이었고, 자유는 신의 속성에 속한다. 그렇다면 총은 인간의 자유만이 아니라 신의 자유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God and Guns’가 담고 있는 미국적인 정서의 깊이 있는 차원의 논리다. 미국의 군사주의와 근본주의는 언제나 같은 목표를 지향해 왔다. 미국의 예외주의는 군사적이고도 신학적인 자기이해다. 군사문화를 정당화 하고 완성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은 근본주의 신학이었다. 십자가 군병이란 표현 같이 복음전파를 군사적 용어로 설명해 온 19-20세기의 역사가 이를 증거한다. 미국의 군사주의와 근본주의가 함께 공유하는 또 다른 것은 최후의 국가가 되기 위한 종말론적 세상이해다. 마지막 전투까지 이겨야 한다는 각오는 미국의 군사주의만이 아니라 미국의 종말론적 종교집단들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대량의 총을 확보해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면서 종말의 주역이 되고자 하는 예를 1970년대 짐 존스가 이끄는 인민사원이나 1990년대 FBI와 혈전을 벌인 데이빗 코레쉬의 다윗파 등에서 볼 수 있다. 미국의 주류 기독교가 폭력과 전쟁을 자유의 이름으로 용납해 온 역사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군사주의와 청교주의가 만들어 낸 것은 전례 없는 총의 문화만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폭력의 문화다. 총을 수용하는 만큼 폭력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또 총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폭력적인 강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내가 옳다는 생각과 정의가 내 편이라는 생각으로 정당화 된 폭력은 가혹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총기규제의 논란에서 늘 제기되는 질문은 총이 문제인가 아니면 사람이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한쪽에선 총기소유를 제한해야 사고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총이란 기계적 물체가 아니라 총을 이용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반박한다. 오히려 총을 공개적으로 소지하고 다닌다면 사고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한쪽에선 폭력과 살생의 문제로 보고, 다른 쪽에선 자유와 권리의 문제로 본다. 그러나 문제는 총을 가진 사람, 즉 총과 사람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다. 내가 총을 드는 순간 나와 세상의 관계는 바뀐다. 총은 생명을 해치는 목적이 있고, 그 총을 든 사람은 그 목적을 가능성으로 부여받는다. 생명을 순간적으로 끝낼 수 있는 총의 힘은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만든다. 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생명의 세계는 궁극적인 객관화의 대상, 즉 총기를 겨눌 타깃이 된다. 이분법적인 발상의 극치라 할 수 있겠다. 총을 통해 나는 생명을 결정짓는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자아를 이루고, 그 자아는 기계적인 것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서구인간의 오랜 욕망이 극적으로 실현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총은 생명을 해치는 기능밖에는 없고 총을 갖는 것은 생명을 순간적으로 끝낼 힘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존재를 추구했던 서구적 인간의 이상이 바로 그 힘의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차원에 의해 실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할 수 있다. 18-19세기 미국을 관찰한 사람들은 미국사람들을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인간’이라 규정하는 예가 많았다. 그 새로운 인간을 통해 세상이 바뀔 것이란 예언도 흔했다. (그 미국인에게 총이 중요했다는 관찰은 많았어도, 그 총으로 미국인이 만들어졌다는 분석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나온다). 광야로 여기던 땅에서 살아남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총은 어느 순간 수단이 아니라 (많은 미국인들의) 존재의 중심이 되었다. 어쩌면 이 총의 존재론이 타인과 담을 쌓고 이루어내는 서구적 개인주의의 종착점인지도 모른다. 총의 정의와 총의 폭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서부시대의 유산으로 풍자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미국의 종말론적 사상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부영화 High Noon(정오)에서 최후의 결투가 일어나기 전 마을의 교회에서는 “영광, 영광, 할렐루야~”가 퍼져 나온다. 신의 정의가 승리할 것이란 암시와 곧 모든 게 끝난다는 암시를 동시에 전해준다. 총의 묵시록을 가장 잘 드러내는 건 서부영화다. 서부시대와 총에 대한 환상적인 신화가 서부영화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심어졌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에 총과 폭력, 정의와 신에 대한 정서적 기초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부영화는 20세기 미국영화를 대표하는 장르가 될 수 있었다. 청교도들의 선악관과 총기에 대한 신뢰와 묵시적 세계관이 19세기 중반의 서부개척 시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질서가 무너지고 악이 판치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 총잡이 영웅이 나타나 최후의 총싸움을 벌이는 묵시적 드라마의 구도는 서부영화의 전형적인 서사다. 총으로 죽고 총으로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폭력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막에서 총에 맞아 죽는 악인들에게 죽음이란 부활이나 구원이 없는 묵시적인 죽음이다. 서부시대의 신화가 미국의 신화가 된 이유는 그 묵시록의 신화를 관객들이 이미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화면 속에서 재현되는 드라마를 적극 수용할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총기소유자들에게 왜 총이 필요한지 물으면 자주 듣게 되는 응답이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해 군사적으로 저항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불의의 공격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법에서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고 싶어서, 종국에는 총밖에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등의 총을 위한 변명을 구체적으로 듣게 된다. 모두 현실적이지 못한 환상적인 발상이지만 그 피해는 너무 크다. 총으로 최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지만, 총은 그 최후를 앞당긴다. 묵시록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 웹진 <제3시대>



    (참고) 


    청교도들이 주일을 어떻게 지켰는가에 대한 내용은 Alice Morse Earle의 The Sabbath in Puritan New England (NY: Charles Scribner's Sons, 1896)라는 책을 참고 했다. 총을 들고 교회에 가는 그림은 George Henry Boughton의 ‘Early Puritnas of New England Going to Worship’(1872)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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