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향한 서로 다른 포물선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유감레비나스

레비나스가 걸어온 사유의 여정은 감동적이다. 현대 사상계의 화려하고 감각적인 내공을 지닌 고수들과 달리 레비나스는 평생 타자와 윤리라는 밋밋한 주제를 갖고 강호를 누볐다. 이런 그의 완고함과 철저함으로 인해 감히 함부로 레비나스와 맞짱을 뜨려는 검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데리다가 그의 생의 초반에 썼던 논문 ‘Violence and Metaphysis: An Essay on the Thought of Emmanuel Levinas’ (『Writing and Difference 』,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pp.79-153)에서 잠시 레비나스를 향해 딴지를 걸었던 것을 빼곤 별로 기억나는 레비나스 비판은 없다.

하지만, 레비나스 윤리학이 선사하는 이러한 감동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존재한다. 쇼펜하우어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비판한 것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레비나스의 ‘표상할 수 없는 타자’라는 테제 앞에서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이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에 그렇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레비나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왜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작아지는가? 급격한 초월의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때문이다. 그 벽은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이 드러날 때 겨우 열린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초월적 타자와 수직적으로 만난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그 순간을 감지하고 찬양하는 숭고함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양자간의 초월적 관계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다. 수많이 타자들이 자아내는 다름과 차이에 대한 숙고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곳이 지금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볼 때 레비나스의 윤리는 작금의 다원화된 세계화된 사회에서 유통가능한 복수의 윤리를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순결하고 완고하다. 위에서 언급한 레비나스 윤리의 완고함 내지 우직함은 레비나스 사상을 지배하는 유대교적 철저함, 즉 무한인 하나님은 오직 타자의 얼굴을 통해 드러낸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궁극적으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신비로 밀어붙였던 것이다.[각주:1] 여기에는 제3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공동체의 자리, 즉 다른 타자들과의 횡적연대를 도모할 여지가 남겨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위치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구조이고, (교회) 공동체에 대한 여전한 신뢰를 놓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그것과도 차이가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번 웹진에서 레비나스 윤리의 외연 확대를 위해 그리스도론에 입각하여 타자의 윤리를 전개하는 본회퍼를 끌고 올 것이다.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존재’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을 강화시킬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본회퍼의 기독교 윤리

일반적으로 본회퍼는 본인의 신학과 삶을 통해 신앙과 사회적 책임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루터의 ‘두 왕국설’을 임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거나, 나치로 상징되는 정치지도자들이 행하는 악에 방관했던 당시의 교회현실에 맞서 사회적 책임이 신앙의 영역에 포괄된다는 사실을 주장했고 이러한 본회퍼의 사회윤리는 후에 서구의 정치신학과 세속화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각주:2]

본회퍼 신학의 출발점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인간은 추상적 관계의 총체가 아니라 공동체에 바탕한 구체적 관계의 총체이다. 본회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 총체성의 중앙에 위치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현실’[각주:3] 속에서 모든 개인들은 얽히고 연대하여 하나로 모아진다. 그러므로 본회퍼 윤리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고 주어진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계의 현실성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 우리가 얼마만큼 긴밀하게 참여할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기독교윤리의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그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윤리에 있어서는 당위와 존재, 이념과 실현, 동기와 결과의 대립에 의해 그 특징이 드러나지만 기독교 윤리에서는 현실과 현실화, 과거와 현재, 역사와 사건의 관계나 애매한 개념들을 사건의 불분명한 이름으로 대치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가 문제된다. 선에 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문제가 된다.[각주:4]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본회퍼는 칸트 이래 서구 윤리학이 걸어왔던 개인적 차원의 심정윤리학도 거부하였고 동시대에 미국에서 활동했던 라인홀드 니버의 분열된 현실인식 또한 부정한다. 본회퍼에 있어 윤리란 인간의 의지나 정신적 행위에 역점을 두는 존재의 윤리도 아니고, 업적이나 성공, 지위를 강조하는 행위의 윤리도 아니다. 본회퍼에 이르러 주체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로 선언되었고, 이 주체는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묻는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Dietrich Bonhoeffer (1906-45)



타자를 위한 존재

‘그리스도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끌어낼 수 있는가?’ 본회퍼 신학이 묻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회퍼의 하나님은 고통가운데 숨어계시는, ‘없이 계시는 하나님이다.’[각주:5] 하지만, 자칫 이 말은 악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다. 강성영은 이러한 의심에 맞서 본회퍼가 주장하는 신의 자기은폐는 십자가상에서 피조세계의 고통에 참여하는 신의 탄식이었음을 분명히 한다.[각주:6] 이는 그리스도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신 이해이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본회퍼는 비로소 본인의 윤리적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본회퍼의 ‘십자가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단어가 ‘대리(stellvertretung)’이다. 본회퍼는 1941년 여름부터 1942년 초 사이에 쓴 『기독교 윤리』에서 책임의 문제를 다루었다. 본회퍼는 그의 책임윤리를 그리스도론으로 설명하면서 책임적인 삶의 형태가 ‘속박(Bindung)’과 ‘자유(Freiheit)’에 의해 이중적으로 규정됨을 밝힌다. ‘속박’은 ‘대리’와 ‘현실적응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는 ‘생활과 행동의 자기음미’와 ‘구체적인 결단의 모험’으로 드러난다. 본회퍼는 책임이 대리행위를 근거로 생겨난다고 보았고,[각주:7] 그 다음 페이지에서 본인의 사상을 지탱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에 대한 중요한 서술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생명자체이고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대신 사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그가 대신 사신 삶이다. 예수는 결코 스스로가 완전성에 도달하려고 한 단독자가 아니라, 단지 자신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나를 받아들이고 감당하신 분으로 사신사신 것이다. 그의 생활, 행위, 노력의 전체는 대리다. 인간이 살고, 행동하고, 괴로워해야 할 것이 그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의 인간적인 실존을 형성하고 있는 이 진실한 대리의 행위에서 그는 책임을 지는자가 되었다.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모든 생명은 대리된 것으로서 규정된다.[각주:8]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적 타자인 하나님에게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은 없다.신의 입장에서도 인간은 타자이어야 한다. 그래야 신의 신다움이 보장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대리를 통해 양자간의 극복될 수 없었던 타자성은 긍정될 수 있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대리적 죽음으로 파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철저히 ‘타자를 위한 존재’로 규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것은 인간의 전존재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경험이요,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이다. 예수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초월경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에서 비로소 전능, 전지, 편재가 유래한다. 신앙이란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 관여하는 일이다.(수육,십자가,부활).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생각할 수 있는 사고상의 최고, 지대, 최선의 존재-이것은 결코 진정한 초월이 아니다-에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다.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타인을 위한 존재”에 있어서의, 곧 예수의 존재에의 관여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이다.[각주:9]

이제 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드러난 ‘타자를 위한 삶‘을 통해 새로운 자기동일성을 획득하였다. 신은 자기동일적인 공간이 아니라, 세상과 타자를 위해 자기를 개방할 때 비로소 신의 신됨이 선포된다. 그리스도의 대리에 나타난 하나님 현현이 그것을 보증한다. 이렇듯 ‘타자를 위한 존재’로 특징지어지는 본회퍼의 사상은 그의 윤리뿐 아니라 교회론에도 영향을 끼쳤다.[각주:10] 이 말은 윤리란 개인의 실존과 공동체를 양대축으로 삼고 전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본회퍼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개인과 공동체를 매개하는 이음새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한 대리자로 고백하는 본회퍼의 사상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당연히 거부할 것이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무한은 오직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타자의 얼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통해 발견되어지는 것이지, 성육신의 도그마에 의존하는 본회퍼의 그리스도 이해를 따라 하나님 앞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고 레비나스는 답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레비나스의 신인식에 대해서는 반박할 필요를 못 느끼겠고, 또 그럴만한 내공도 없다. 개신교 목사라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유대교 석학의 신 이해에 대해 그것이 나의 고백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딴지를 건다면 신앙의 오만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서는 그의 신 인식과는 별개로 묻고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1996), 85. [본문으로]
  2. 본회퍼 연구가 강성영(한신대, 기독교윤리)은 그의 논문 “타자와 민중을 향한 외침: 본회퍼 신학과 한국교회의 미래”에서 이러한 본회퍼의 신학을 ‘실천적 해석학’, ‘참여의 해석학’, 그리고 ‘타자를 위한 삶’으로 요약하고 있다 - 강성영. 『생명 .문화. 윤리: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주제탐구』,(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252. [본문으로]
  3. 본회퍼 저/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 162. [본문으로]
  4. Ibid., 163. [본문으로]
  5.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D. Bonhoeffer, Widerstand and Ergebung, Neuausgabe, hrsg.v.E. Bethge, 3. Aufl, Munchen: 1985(=WEN), 27. 강성영, 앞의 책, 23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6. “그는 하나님의 초월을 피안의 초월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삶의 한가운데 있는 초월을 말하였고, 하나님의 전능을 그의 권력과 지배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무기력함과 약함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의 전능으로 이해하였다.”- 강성영. 『생명 .문화. 윤리: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주제탐구』, 238. [본문으로]
  7. 본회퍼 저/손규태 역. 『기독교윤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 193. [본문으로]
  8. Ibid., 194-195. [본문으로]
  9. 본회퍼 저/고범서 역. 『옥중서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개정3판), 229. [본문으로]
  10. “The church is the church only when it exists for others.”- D. Bonhoeffer, Letters & Papres from Prison, ed. E.Bethge.(NY: The Macmillan, 1971), 3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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