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된 불쾌함: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와 <킹스맨: 골든 서클>



조은채*

 

※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와 <킹스맨: 골든 서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시크릿 에이전트>)의 속편인 <킹스맨: 골든 서클>(이하 <골든 서클>)은 개봉을 앞두고 불거졌던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예상되었던 대로 흥행하고 있다. 전작인 <시크릿 에이전트>가 그랬듯이, <골든 서클> 역시 여러 모로 준수한 오락영화이다. 무엇보다도 141분의 상영시간이 큰 지루함 없이 흘러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시크릿 에이전트>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인 ‘신선함’은 <골든 서클>에서는 더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그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는 베테랑 요원인 해리 하트(콜린 퍼스)의 신조 아래, 동네 ‘양아치’였던 주인공 에그시(태런 에저튼)는 세계를 구한 국제 비밀정보기구 요원이자 최고의 ‘젠틀맨’으로 거듭난다. 교육과 훈련을 바탕으로 습득한 에그시의 ‘매너’는 열두시가 지나면 사라져버리는 요정의 마법 따위가 아니기 때문에, 에그시는 유리구두보다 단단하고 안정적인 옥스포드화를 신고 새로운 세계에 성공적으로 입성한다. 관객의 예상을 조금씩 비틀어 전개되는 스토리, 기발하면서도 현란한 액션, 매력적이지만 구구절절하지 않은 다양한 캐릭터는 영화의 신선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하지만 <시크릿 에이전트>의 마지막 몇 분은 산뜻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에그시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돌연 불쾌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썩 나쁘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던 <시크릿 에이전트>의 여성관에 대한 평가는 갑자기 곤두박질 친다. 틸디 공주는 에그시에게 “세상을 구하면 뒤(asshole)로”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후 정말로 세상을 구한 에그시는 약속을 이행 받기 위해 달려간다. 영화는 에그시가 틸디라는 전리품을 차지하는 과정의 바로 그 직전까지를 보여준다. 카메라가 누워있는 틸디 공주의 몸을 ‘전형적인’ 구도로 훑고, 종래에는 그녀의 벗은 엉덩이만이 스크린을 꽉 채우던 순간의 당혹과 불쾌함은 여전히 생생하다. 이처럼 <시크릿 에이전트>의 불쾌함은 마지막 몇 분에 응축되어 있었다. 영화관을 나선 뒤에야 불편했어야만 했을 장면과 설정이 머릿속에서 플래시백처럼 재생되었다. 하지만 영화가 지닌 신선함이라는 마법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중에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크게 거슬리지 않았었다는 사실에 조금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골든 서클>은 <시크릿 에이전트>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한다. 이미 한번 시작한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지만, 여전히 새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시크릿 에이전트>에는 뒷골목 양아치에서 영국 최고의 젠틀맨이 되는 에그시의 신데렐라 서사가 있었다. 그 시작과 끝이 대단히 분명한 이 고전적인 이야기는 분명 전형적이지만 그래서 더 효과적이고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에그시가 젠틀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서사를 재활용할 수 없게 된 <골든 서클>은 전작이 구축해둔 세계관을 철저하게 부수는 것부터 시작한다. 메인 빌런 포피(줄리언 무어)를 통해 킹스맨 본부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인원을 몰살시키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전작의 신데렐라 서사만큼이나 효과적인 메인 스토리를 찾지 못한 탓인지, <골든 서클>은 <시크릿 에이전트>보다 자주, 그리고 더 많이 방향을 헤맨다.


  <시크릿 에이전트>에서는 그나마 마지막 장면에 응축되어 있었던 눈살 찌푸려지는 여성관은 <골든 서클>에서는 그 범위가 영화 전체로 확장되고, 때로는 지나치게 반복된다. 여성 캐릭터의 등장도 활약도 대폭 줄어든 <골든 서클>에서 가장 중책을 맡고 화면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것은 악당 포피이다. 거대 마약상인 포피는 마약을 합법화라는 조건으로 세계 정부와 거래를 한다. 포피가 쥐고 있는 것은 한 번이라도 마약을 했던 모든 사람의 목숨이다. 전 세계의 마약에는 이미 포피가 고의로 넣은 바이러스가 포함되어 있고, 해독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포피 뿐이기 때문이다. 포피는 환상 속의 놀이공원 같은 ‘포피랜드’에서 신입 부하에게 상냥한 표정과 다정한 말씨로 동료를 갈아 인육으로 만들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포피는 참 독특하고도 대단한 악당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에 다다를수록, 진정한 흑막은 포피를 역이용하고자 했던 미국의 ‘남성’ 대통령이나 알고 보니 스파이였던 스테이츠맨의 ‘남성’ 요원 ‘위스키’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포피는 100여분이 넘게 열심히 최고의 악당을 연기하지만, 결국 임팩트 없는 죽음과 함께 퇴장 당한다. 포피는 <골든 서클>의 메인 빌런이라고 소개되지만, <골든 서클>의 클라이맥스는 포피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스토리 상 절정에 해당하는 장면은 상당 부분 남성 캐릭터들에게만 할당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피에게는 메인 빌런이라는 타이틀과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적절히 활용되지 못하는 설정이라는 껍데기만이 주어진다. 아름다운 ‘포피랜드’가 포피 외에는 아무런 정서적 상호작용 없이, 포피와 로봇만으로 굴러가는 껍데기 같은 허상인 것처럼 말이다.


  포피랜드가 포피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라고 해석하고 끝낼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예고되었던 것보다 심심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포피만의 캐릭터성이라고 좋게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골든 서클>에 나오는 모든 여성 캐릭터가 ‘포피랜드’ 같았다는 사실이다. 겉보기에는 매력적인 설정을 부여받았지만 실속 있는 역할이나 장면은 주어지지 않았고, 그저 껍데기뿐이었다. 더 나아가, 포피랜드에 구현되어 있던 ‘여성성’이 구시대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것처럼, <골든 서클>이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피를 제외한 <골든 서클>의 주요 여성 캐릭터는 오로지 두 가지 유형으로만 등장한다. 여성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캐릭터(틸디 공주, 클라라)는 남성 캐릭터의 ‘여자’친구라는 점만이 두드러졌고,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성적 대상화의 대상으로만 소비된다. 반면, 여성성이 강조되지 않는 캐릭터(진저, 록시)는 아무런 활약도 존재감도 없이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렸다. 예를 들어, 비록 마지막에 성적 대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교본이 될 만한 장면을 남기기는 했지만, 악당 발렌타인에게 당당하게 맞서다가 감옥에 갇혔던 <시크릿 에이전트>의 틸디 공주는, <골든 서클>에서는 에그시 때문에 마약에 손을 댔다가 구출 당하는 여자친구로만 남을 뿐이다.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에그시보다 뛰어난 기량을 보였던, 그리고 아마 최초의 여성 킹스맨 요원일 록시는 영화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죽으면서 영화의 서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은 찰리의 애인이었던 ‘클라라’이다. 찰리는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유력한 킹스맨 후보였지만 탈락한다. 평민 에그시에 밀려 떨어진 것이 참을 수 없었던 ‘귀족’ 찰리는, 포피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그의 부하가 된다. 클라라는 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심지어 포피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만, 놀랄 만큼 메인 스토리에서 비켜나 있다. 클라라에게는 그저 찰리’의’ 전 ’여자’친구라는 정체성만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라라는 문제의 ‘추적기 장면’에서 완전히 도구화된다. 찰리를 통해 포피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서, 에그시는 찰리와 연락을 주고받는 클라라에게 추적기를 달아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쳐있다. 하지만 이 추적기는 대단히 특이하게도 콧구멍이나 질과 같은 점막이 있는 곳에 삽입되어야만 작동할 수 있다. 에그시는 클라라의 콧구멍에 추적기를 넣을 길이 요원해 보였는지 그녀의 성기에 이 추적기를 넣기로 한다.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발렌타인이 와인 안에 추적 물질을 넣어 상대에게 건넸던 것과 비교하면 일종의 기술 퇴행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척이나 미심쩍은 이 추적기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의 성별 역시 무척 제한적이다. 남성에게는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걸까? 그때는 무리해서라도 콧구멍이나 항문? 아니, 애초에 남성이 대상이었다면 이런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추적기가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추적기의 존재 자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기 위한 아주 질이 나쁜 농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클라라는 이 불쾌한 장면을 구현해내기 위해 만들어낸 캐릭터처럼 보인다. 불필요할 정도로 포르노와 유사한 방식으로 클라라의 몸을 훑는 카메라보다도 더 끔찍했던 것은, 추적기가 들어간 클라라의 질 안의 모습까지도 적나라하게 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스크린이 틸디 공주의 엉덩이만으로 채워졌던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한 발 더 나가, <골든 서클>은 여성의 질 내벽으로 스크린을 꽉 채운다. 클라라의 몸뿐만 아니라 클라라라는 인물 자체는 완벽하게 ‘객체’가 된다. 그리고 이 불쾌한 장면을 위해 꽤 긴 시간이 할애되어 있다.


  <시크릿 에이전트>의 개봉 이후, 많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 몇 분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감독인 매튜 본은 이들을 블러디 페미니스트로 일축하고 전혀 개선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크릿 에이전트>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마지막 몇 분으로 응축되어 있었던 불쾌함이 <골든 서클>에서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오히려 강도가 높아지기도 했다. 이로써 <골든 서클>은 나쁘지 않다고 말할 때조차 가책을 느끼게 되는 꺼림칙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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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민소매 입기



유하림*

 


    올 여름은 정말 더웠다. 에어컨을 발명해 낸 사람에게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수준이었다. 바깥에서 10분만 서 있어도 땀이 주륵주륵 흘렀고, 습도는 높아 숨이 막혔다. 이런 몇 주간의 무더위 속에서도 내가 차마 도전하지 못한 것이 민소매다. 민소매를 입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깨를 가리는 한 뼘만한 천때기의 있고 없음이 생각보다 쾌적함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작년 여름에 여행으로 베트남에 갔다. 첫 해외여행이었으므로 큰 맘 먹고 민소매 원피스를 입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바람을 맞이 한 것은 초등시절 이후로는 처음이었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매가 없다 뿐이었지만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베트남에서 돌아오는 날 다시 반팔 티를 입었고, 허무함을 느꼈다. 나에게 민소매란 남의 눈을 피해서만 입을 수 있는 것이니까.

   페미니즘 열기가 한창 뜨거운 이 때에 노브라도, 겨털 기르기도 아니고 민소매 입기 따위가 무슨 글감이냐고 스스로에게도 질문했지만 내게 민소매란 그런 것이다. 삐져나오는 겨드랑이 살과 통통한 팔뚝에 대한 좌절과 증오를 뚫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것.

   아직 십대가 되기도 이전, 0-9세 사이로 분류되던 때에 한의원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 엄마는 태양인 태음인 등의 체질 분류에 꽂혀있었고, 나의 체질 또한 가늠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진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생년월일 등을 묻고, 내 손목에 맥을 짚어보기도 했다. 그리곤 드러난 내 팔뚝을 보더니 “너 치킨 좋아하지 ?” 하는 것이다. 그렇게 덧붙였던 이야기. “살을 빼려면 치킨을 먹지 말아야해. 치킨 먹으니까 팔뚝에 살 찌는거야.”

   그 뒤로 몇 해간 꾸준히 할머니와 엄마는 치킨을 먹을 때 마다 내가 가진 팔뚝 살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면 치킨이 아니라 팔뚝 살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았고,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팔뚝 살은 안 좋은 것. 팔뚝 살을 만드는 것은 치킨. 치킨을 먹으면 안돼. 그런데 나는 치킨이 먹고 싶어. 그럼 치킨을 먹어야지. 그치만 치킨을 먹으면 팔뚝 살이 찌는데. 팔뚝 살은 안좋은 것. 이라는 생각의 회로가 나를 괴롭혔다. 팔뚝과 치킨, 치킨과 팔뚝. 이 사이에 실제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렸을 적 한의원에서부터 거슬러온 내 팔뚝 살에 대한 증오는 꽤나 긴 것이다.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났다. 한 여름이지만 반팔에 긴바지를 입고 있었다. 자신은 몸이 너무 왜소하고 말라서 그것을 가리기 위해 여름에도 긴 옷을 입는다고 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나는 통통한 팔뚝 살과 삐져나온 겨드랑이 살에 대한 눈초리를 이길 수 없어 몸을 가리는데, 나와는 달리 마른 체형의 그녀 또한 몸에 대한 눈초리를 이길 수 없어 몸을 가린단다. 우리는 다른 몸을 가졌지만, 같은 이유로 민소매를 입지 못한다..

   이러나 저러나 눈초리가 신경 쓰인다면 그냥 한번 입어볼까 싶어 칠 천원을 주고 민소매를 하나 샀다. 집에 돌아와 입어보니 삐져나온 겨드랑이 살과 통통하고 하얀 팔뚝이 밉지만은 않았다. 밖에도 입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고 기온이 33도를 찍던 날, 민소매를 꺼내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나가기 직전, 현관 앞 거울에서 몸을 이리저리 비춰보다 결국 다른 옷을 입고 나갔다. 괜찮아보이다가도 막상 마주하면 무너지는 게 나의 몸이다.

   이제는 타인의 몸 (특히나 살이 찐 사람)에 대한 왈가왈부가 경솔한 일이라는 게 상식이다. 내가 민소매를 입고 나간다고 해서 대놓고 수군댈 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랜 기간 이어져 온 팔뚝 살에 대한 증오가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란거다.

   팔뚝 살에 대한 미움은 주위 사람들의 온갖 협조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게 어디 팔뚝 살 뿐이랴. 통통한 허벅지도, 뱃살도, 다리 털도, 겨드랑이 털도, 얼굴에 난 여드름도, 까무잡잡한 피부도.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용기를 내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니 민소매를 입는 것 하나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외모에 대한 기준이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잣대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많은 다이어트 제품이, 피부 미백제가, 제모 용품이, 여드름 패치가 여성을 타겟팅 해 광고를 만든다. 티비를 켜면 비교적 다양한 체형의 남성이 나오지만 (사실 티비 예능에선 여성을 찾는 것이 어렵다.) 여성은 말랐거나, 뚱뚱해서 놀림 받을 뿐이다. 그렇게 티비에 나오는 여성들의 피부와 다리는 어찌나 매끄러운지, 손가락을 올려보면 미끄러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민소매를 입었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간 건 용기를 내지 못한 내 탓이 아니다. 민소매를 입는데에 무려 ‘용기’까지 필요하게 되는 것, 그러나 차마 그 용기도 낼 수 없었다 것. 이 세계의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증명이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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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 성별화된 세뇌(1)





조은채*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가스등(Gaslight)>(1944)은 『가스등 이펙트』의 저자 로빈 스턴(Robin Stern)에 의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명명된 정서적 학대의 양상을 면면이 보여준다. 스턴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가해자(gaslighter)”와 “상대방이 자신의 현실감을 좌우하도록 허용하는 피해자(gaslightee)” 사이에서 발생한다. 가해자의 반복된 상황 조작과 거짓말에 노출된 피해자는 자기 자신의 현실감각, 판단력, 기억력에 의심을 품게 된다. 피해자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약해질수록 가해자의 영향력은 강화되며, 종국에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권까지 내어주게 된다. <가스등>의 주인공인 폴라(잉그리드 버그만)가 남편에게 결혼 생활 내내 당하는 것이 바로 이 가스라이팅이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이모가 살해된 후 모든 유산을 상속받은 폴라(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어느 날 그레고리라는 남자가 접근한다. 그레고리를 잘 모르면서도 깊이 사랑하게 된 폴라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물려받은 런던의 이모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그레고리가 폴라를 정신병자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폴라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듣는다고 주장한다. 폴라가 병에 걸려 건강하지 못한 데다가 거의 매번 소지품을 잃어버린다는 이유로 외출을 금지하기도 한다. 폴라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남편인 그레고리와 그가 고용한 하녀 두 명뿐인데, 그 두 명 역시 폴라에게는 적절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한 명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렵고, 다른 한 명은 폴라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그레고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녀를 환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폴라는 그레고리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환경 속에서 그의 걱정을 빙자한 교묘한 거짓말과 속임수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당신은 잘 잃어버리잖아."

"제가요. 몰랐는데요.” 


“건망증에 의심까지 생겨?” 

 “그럴 리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모르겠어요.” 


 “당신이 아프거나 환각을 보면 슬퍼.” 

 “………”


   폴라는 그레고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 어렵지만, 마땅한 증거도 증인도 없다. 처음에는 그의 말에 반문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점차 폴라는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그레고리의 가스라이팅이 점점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아질수록, 폴라는 “갑자기 내 기억력이 의심스러워져요.”, “나도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거나 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레고리가 의도했던 것처럼 자신의 판단력과 기억력을 믿을 수 없게 된 폴라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된다. 점차 폴라는 그레고리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레고리의 기준과 명령이 있어야만 안심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레고리의 “정서적 학대”, 즉 가스라이팅이 성공한 것이다.

   폴라의 두려움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되는 것은 매일 밤 일어나는, 그녀 혼자만 듣고 보는 어떤 사건 때문이다. 매일 밤 그레고리가 일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고 나면, 갑자기 천장에서 정체 모를 발소리가 들려온다. 방 안의 가스등도 돌연 희미해진다. 그러나 폴라 말고는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다. 둘 뿐인 하녀 중 하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른 하나는 늘 외출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폴라의 목격담이 완전한 허구, 즉 폴라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레고리에 의해서 폴라의 경험은 그녀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징후이자 증거가 되어버린다.

   영화는 두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그레고리가 얼마나 교묘하고 치밀하게 폴라를 조종하고자 하는지 면밀하게 보여준다. 어렴풋하게 암시만 되었던 그레고리의 동기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은 이미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고나서이다. 그레고리가 폴라에게 접근한 것은 폴라의 이모가 생전에 소유했던 “외국 왕실의 보석” 때문이다. 폴라가 매일 밤 들었던 천장 위의 발소리와 희미해지던 가스등의 불빛은 폴라의 망상이 아니었다. 그레고리가 다락방의 불을 환히 밝힌 채로 폴라 이모의 유품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졌기 때문이다. 그는 속편히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서 방해가 될 뿐인 폴라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계획까지 세워둔 상태였다. 그가 결혼 생활 동안 폴라에게 저질렀던 수많은 정신적 학대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전부터 그들 부부, 정확히 말하면 그레고리를 의심스럽게 보고 있던 런던 경시청 소속의 어떤 경위의 도움과 증언으로 폴라는 그레고리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다. 경시청에 그레고리를 넘긴 폴라는 자신이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스라이팅은 현실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자행된다. 그레고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스스로 불신하게 만드는 갖가지 방법을 영화 내내 직접 시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레고리에게 “외국 왕실의 보석”을 훔치겠다는 비교적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스턴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들도 있다고 말한다. 특별한 이유나 의도 없이도 상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이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서 이 가스라이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위계이다. 스턴이 예시로 드는 상사와 부하 사이의 혹은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의 가스라이팅은 이 위계를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준다. 상사와 부하 사이에 존재하는 직급, 경험, 숙련도 등의 차이와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연령, 경제력 등의 차이. 이 차이를 기준으로 권력의 위계 구조가 형성되고, 한쪽이 다른 쪽의 영향력 행사에 필연적으로 취약해진다.

   스턴은 가스라이팅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관계”, 즉 연인, 친구, 가족, 상사와 부하, 동료들과의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20년간 심리치료사로 활동한 그의 경험에 따르면 “가해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은 반면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가 가장 빈번했기 때문인지, 스턴의 저서 『가스등 이펙트』는 “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스라이팅 사례로 빼곡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시는 여성에게는 피해자, 그리고 남성에게는 가해자라는 역할이 처음부터 성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스턴은 왜 대부분의 가스라이팅이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정면으로 맞부딪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대신에 스턴은 가스라이팅을 “신종 전염병”이라고 명명하는 장에서 부분적인 해명을 시도한다. 사회의 변화에 따른 결과인 세 가지 요인이 이 새로운 질병을 창궐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성 역할의 근본적인 변화와 그에 대한 반발”, “개인주의 만연과 개인의 고립”, “사회의 압력과 세뇌”을 그 원인으로 제시한다. 스턴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시작된 “성 역할의 변화”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일종의 “위협”이었다. 이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특정 남성”들은 “강하고 똑똑한 여성”을 “통제”하려고 했고, “특정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까지 남성들에게 “의지”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들의 통제에 “동조”했다. 스턴은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스라이팅이 사회의 변화에 역행하는 “특정”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합작인 것처럼 진단한다. 이 특정한 남성과 여성을 “새로운 세대”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 내의 “신종 전염병”이라는 말은 가스라이팅을 “특정”한 남성과 “특정”한 여성, 즉 “특정”집단 내의 문제로 축소해버린다. 아득히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성과 남성 사이의 권력 차이, 그리고 그 차이에서 비롯된 착취와 폭력은 담론의 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스턴은 여성에게 가해져 왔던 폭력과 착취를 가스라이팅과 연결짓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젠더의 위계에서 오는 차이가 가스라이팅을 성별화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셈이다. 성 역할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시점에서도 가스라이팅이 드물지 않게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가스등>의 폴라 역시 전통적인 성 역할을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으며, 그레고리의 가부장적 남성성에 조금의 위협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젠더의 위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배 혹은 영향력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레고리가 폴라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지닌 권력 차이 때문이고, 그 권력의 차이는 결국 그들의 성별에서 기인한다.

   가스라이팅이 애초에 성별화-즉 남성에게는 가해로, 그러나 여성에게는 피해로-되었던 것은 유구하게 존재해왔던 여성혐오(misogyny) 덕분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존재해왔던 위계는 한 성별(주로 남성)이 다른 성별(주로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며, 성애화하고, 이 혐오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까지를 가능하게 했다. 여성을 그저 사유재산의 일부로 여기거나, 마녀로 몰아가 불에 태웠던 시대가 존재했던 것처럼, 이 혐오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까지 했다.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대상을 내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 상황을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쉬운 일이다. 성별화된 가스라이팅은 ‘신종’ 전염병이 아니다. 한쪽 성별이 다른 성별을 아주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는 무기로써, 젠더의 위계에 의해 생겨난 아주 오래된 발명품이다. 동시에 수많은 형태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여성혐오의 양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에 이 성별화된 가스라이팅이 전염병이라면, 마을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는 것으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는 아직도 철폐되지 않은 젠더의 위계, 그 간격 속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혐오라는 이름으로 배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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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노인의 나라에 나는 없을 것이다.



유하림*

 


    서울 시청 지하에 위치한 공정무역 카페에서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한지 2년 째다. 가끔씩 큰 집회가 있을 때면 손목이 뻐근하도록 컵에 얼음을 퍼야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리 바쁜 편이 아니다. 게다가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도 있고, 음료의 레시피도 간단하다. 흔히 말하는 꿀알바인 셈이다. 

   바야흐로 2016년 12월. 가끔씩 열리던 큰 집회가 매주 열리면서 ‘꿀알바’는 ‘쓴알바’로 바뀌었다. 시청 광장을 가득 채웠던 ‘태극기’가 카페마저 가득 채우게 된 것이다. 볼이 따갑게 세찬 바람이 부는데도, 어깨와 발등에 쌓이게 눈이 내려도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었다.

   태극기를 든 사람 중에는 노인이 많았다. 가만 보면 그들은 자못 진지해 보인다. 서로를 향해 당신이 대한민국의 희망이라고 어깨를 두드리고, ‘투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며 ‘투투사’ 라고 부르겠단다. 비록 당신들의 커피를 만드는 어린 여자 알바생에게는 “언니가 잘해주면 매일 카페에 와주겠다”고 말할지라도 탄핵반대집회에 나오는 것을 과업으로 여기는 듯 했다.

   계산하려고 꺼낸 지갑 안에 박정희 사진이 들어있기도 했고, 어디서 난건지 각종 뱃지를 단 군복을 입고 오기도 했다. 적당히 손님이 빠지면 카페 내부를 정리해야하는데 그 때마다 기괴한 것들을 발견한다. ‘계엄령을 선포하라’, ‘촛불은 종북, 태극기는 애국’이라고 뾰족뾰족한 글씨체로 적혀진 빨간색 종이,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접착성 좋은 스티커, 커다란 성조기.  

   처음부터 태극기 노인들이 카페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최순실에 대한 비리가 밝혀지고 나서 한달 정도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카페를 채웠다.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주문을 하려고 선 줄이 카페 바깥까지 이어져있어서 계속해서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었다. 특대형 쓰레기 봉투를 자주 교체해야 했고, 영업시간이 끝나면 모아둔 쓰레기만 내 키를 훨씬 넘었다. 그치만 즐겁게 일했다. ’박근혜 탄핵’이라는 문구가 적혀진 피켓을 정리하면서 몇장은 가방에 넣어 챙기기도 했고, 앞치마에는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고 연대의 의미를 전했다.

   김일성 만세의 자유 뿐 아니라 박근혜 만세의 자유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내 탓일까. 태극기를 든 노인들은 유독 일을 힘들게 만들었다. 어린 여자 알바생으로서 나이 든 손님을 상대한다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반말은 물론이고, 돈 던지기, 아무 말 안하고 서 있기, 소리 지르기, 본인 순서가 아님에도 불쑥 끼어들어 주문하기, 성희롱 하기 등 갖은 진상 짓을 마스터하여 우리를 곤란에 빠트린다. 거기에 태극기과 성조기를 나란히 든 모습이라니.

   특히 날이 갈 수록 유려해지는 성희롱 기술에 나는 더 이상 웃으며 주문을 받을 수 없었다. 조금만 미소를 보이고 친절하게 대하면 “예쁘다”, “너 때문에 내가 여기에 온다”며 불쾌한 말들을 남발했다. 스탭 중에 한 명을 지목한 뒤 쟤가 내 스타일이야 하지를 않나,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으면 노골적으로 위아래를 훑어 본다. 유일한 남자 스탭에게는 “꽃밭에서 일해서 좋겠다”며 나름의 ‘유머’를 건네고, 내게는 “커피가 네가 줘서 더 맛있다며” 나름의 ‘칭찬’도 잊지 않는다. 웃지 않는 건 선택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말이 두려워 웃을 수 없어졌을 뿐이다.

   나는 22살, 여자, 알바생.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표적이 되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태극기 노인들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나를 부른다. 기분이 안좋으면 ‘야’하고 부르고, 기분이 좋으면 ‘아가씨’하고 부른다. 내 몸을 훑고 싶으면 언제든 그렇게 한다. 그러다 한마디 건네고 싶으면 그러면 된다. 내가 농담을 받아주지 않고, 웃지 않으면 ‘좀 잘해달라’며 내 탓을 하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들은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남자고, 나이 들었고, 그들에게 나는 어린 여자 알바생이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 어린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해본 적 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꿈꾸는 자유 대한민국에 내 자리는 없겠지. 그치만 나는 그들에게 여전히 커피를 팔아야겠지.

   태극기 노인들과 6개월은 마주한 것 같다. 나는 그들이 태극기를 드는 행위에서 오는 만족감을 마주했다. 그것은 대통령을 ‘수호’하며, 나라를 ‘지킨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는 나라에 나는 없을 것이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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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허구일지도 몰라, 여성혐오[각주:1]



신윤주*



# 나의 이야기


    지난 세월을 돌이켜 헤아리는 일은 시간의 유속을 왜곡하는 셈법이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8년차 부부라니! 맘이 그렇지 않다 해도 신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버렸다. 낯선 열정이 친숙한 다정함으로 변모하는 동안 동갑내기인 우리 부부는 양가 부모님 네 분의 환갑 기념행사와 동생의 결혼, 그리고 몇 번의 이사를 함께 치렀다. 그리고 서른여덟이 되었다. 서른여덟짜리 여성의 몸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이를 가지는 일을 두고 숙고할 때마다 내 몸의 나이를 센다. 그렇게 ‘나 자신’인줄 알았던 몸이 사실은 ‘대상’이었음을 자각한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통제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대상으로서의 육체가 불모를 선언하기라도 할까봐 내심 불안해한다.

    나는 아직 초산을 하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간의 피임은 성공적이었다. 처음부터 아이 없는 삶을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망설임은 유보 혹은 지연으로 귀결되곤 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한두 해가 지났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이 소식을 묻기 시작했다. 양가 부모님 역시 순리처럼 아이를 기다렸다. 엄마는 애를 태우기까지 했다. 혹여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아 쌔한 대접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신 것이다. “시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셔?” 어느 날 엄마는 무심한 척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물론 기다리기야 하시지만 재촉하진 않으신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남편이 부모님을 나름 성공적으로 설득해내고 있기도 했다. “지금 저희 벌이로는 아이 못 키워요. 다른 여건도 어렵고요. 저희 아이는 저희가 키울 거예요.”

    결혼 후 첫 해를 채운 후에 나와 남편은 순차적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결혼할 당시에 진학을 계획했던 건 아니었지만 출산의 시기 때문에 조금 서둘렀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고 우리에겐 더 해야만 하는 공부가 있었으니까. 마치 사명처럼 우리를 추동한 욕망을 따라 남편과 나는 출산도, 커리어를 쌓는 일도 다음으로 미뤘다.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일과 공부와 육아를 병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한정된 자원의 배분에 관한 문제였다. 육아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이의 부모가 포기하지 않으면 조부모가, 그마저도 어려우면 아이 자신이 포기할 지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여성으로서의 당위와 기대가 만들어낸 내적 갈등이 한동안 이어졌다. 빨리 아이를 갖지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자기 몸의 한 자리에 난 방을 작고 여린 생명에게 내어주고, 열 달 즈음 몸 안에서 자라게 하고, 때가 찼을 때 광활한 우주의 어느 공간에 내어놓는 일. 그리고 그가 스스로 자기 몸과 세계를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여전히 지키고 돌보는 일. 자녀를 만난다는 것은 분명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자 엄청난 변화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 원하지 않는 아이만큼 여성을 괴롭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아이와 상황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 끝내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를 바라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아버지가 되는 일의 숭고를, 부모님에게 갚아야 할 생명의 빚이 있음을 생각했지만 경제적인 부분에 관한 현실적 우려를 떨칠 수도 없었다. 아이가 생긴다는 건 진로와 사랑 양쪽을 모두 건 모험을 감행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편의 관심 분야는 모종의 성취와 돈벌이 사이의 연관성이 뚜렷하지 않았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방향으로든 부부의 관계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꽤 만족스럽게 잘 지내고 있기도 했다. 남편에게도 아이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이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해 전 어느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의 간부급 남성 한 분이 걱정이라는 듯 점잖게 말했다. “요즘 젊은 여자들은 이기적이어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는 게 큰 문제에요.” 자녀를 위한 희생을 감당하지 않으려한다는 거였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기는 했다. 하지만 출산 기피 현상을 그런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입체적인 사안을 너무 납작하게 만들어놓는 일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그때 ‘아이를 낳는 일도 자녀를 갖고자 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을까? 적어도 이기심과 이타심의 이분법 외에 다른 준거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반문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식물처럼 앉아 있었을 것이다.


#자궁은 누구의 것인가


    모성은 당위가 아니지만 어머니가 되는 일에서 발견 되는 숭고가 있다. 한 생명을 온전히 책임지는 실천은 삶의 깊이를 더하고 외연을 넓히는 결과를 낳곤 한다. 그러나 아이를 원하는 이유가 이타성을 훈련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명 때문이든, 부부의 모습을 닮은 아이를 보고 싶기 때문이든, 부모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이든, 엄마가 되는 경험이 주는 긍정적인 기억 때문이든, 첫째 아이를 위한 것이든 출발점은 희생이 아닌 ‘욕망’이다.

    새 생명의 삶은 소중하다. 아니,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그렇다면 생명을 잉태한 이의 생명도 소중하다. 그리고 두 생명이 맺는 관계의 양상도 소중하다. 축복 속에 시작한 결혼이라도 순탄치만은 않듯, 축복 속에 시작한 삶이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수많은 필요와 장애를 해결할 의지와 기지를 발휘해야 할 때 누군가에게 욕망되지 않는 삶은 쉽게 좌초된다. 욕망하지 못하는 양육자는 죄책감을 쉬 떨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회적·도덕적 당위의 잣대를 가져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임신과 모성을 선택할 혹은 포기할 권리와 책임은 일차적인 책임의 주체인 성인 여성에게 있어야 한다.

   임신 중단은 여성이 자신의 삶에 일어난 낯선 사건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성이라기보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에 불과하며, 그 관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양육자의 돌봄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임신과 출산, 양육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은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갓 엄마-되기를 시작한 한 여성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고 새로운 몸의 신호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라가는 생명과 더불어 호흡한다. 하나의 흔적이 미미한 박동이 되고, 그 박동이 인간 신체의 형상으로 광활한 세계에 떨어지고, 최초의 폐호흡을 시작하면 비로소 진짜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덩어리의 숨 쉬는 육체가 사회 속에 자리를 만들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 개체가 되기까지 복수의 양육자와 공동체와 사회와 국가는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수의 양육자가 아이의 생존을 책임질 길을 상상할 수 없다면 출산하지 않는 선택을 과연 이기적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임신 중단으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입는 사람은 여성 자신인 경우가 많다.

   지난 해 보건복지부에서는 여성의 자궁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들을 내놓았다. 그중 하나로 ‘낙태죄’의 유령을 불러낸 조치로서 여성·사회 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은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 개정령안’과, 성경험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여성에게 귀속하는 접근인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사업이 있다.

    우선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 개정령안’이 문제가 된 것은 근본적으로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임신중절수술 조항을 포함시켰다는 데에 있다. 불법임신중절수술에 관한 처벌 조항이었지만 산부인과의사회는 11월 2일부터 모든 병원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 사회에서 임신중절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합법인 경우는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유전성·전염성 질환 등의 보건 의학적 사유나 성폭력에 의한 임신 등의 경우에 제한된다. 또 합법적 사유에 해당되더라도 임신 24주 이내에, 그리고 부득이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남성)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임신 중단은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라는 조항에 따라 불법이며, ‘낙태’를 한 여성도, 시술한 의료인도 형사 처벌의 대상이다. 

    임신의 ‘과정’에 남성이 개입되고 임신 이후의 모든 기간에 사회적 장치들이 개입되는 만큼, 임신 중단의 결정을 여성 개인의 죄로 처리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신 중단에 대하여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여성에게 인구 재생산의 사회적 의무를 부과할 때뿐이다. 여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의 몸을 단순한 인구정책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은 여성혐오적 접근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최초의 쾌락과 최초의 수정에 대한 기여도를 감안한다면 준비되지 않은 임신에 대한 도의적 책임과 과오를 모두 여성에게 묻는 것 역시 성평등지수가 낮은 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성혐오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종 여성·사회단체의 청원 덕에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처벌을 12개월 자격 정지로 강화하려던 개정안의 조항은 현행과 동일한 수준인 1개월 자격 정지로 유지되었고, 복지부는 현행 의료법령에 명시된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한 대체 용어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책임을 여성 자신에게만 귀속하는 시각은 지난 해 6월에 발표된 사업인 ‘건강여성 첫걸음 클리닉’에서도 발견된다. 건강여성 첫걸음 클리닉은 2003~2004년에 태어난 12~13살 여학생이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을 하도록 권장하는 사업이다. 보건복지부는 2015년도에 국회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매해 230억원을 이 사업에 배정하여 무료 접종을 시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주사제의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대두되어 접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11월에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자궁경부암 예방접종 ‘동행’ 캠페인’이라는 것을 내놓기도 했다. 무료 접종 대상을 12, 13세의 여학생으로 제한한 이유로 제시된 것은 HPV 감염이 성 접촉을 통해 전파되므로 성 경험 전 예방을 통해 최적의 효과를 내도록 한다는 것, 9∼15세 연령에서 접종 시 그 이상 연령에서 접종한 경우보다 면역반응이 더 높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성별을 특정한 근거로 충분하지 않다.

    사실 이 백신은 정확히 말해 자궁경부암 예방 주사가 아닌 HPV 백신이다. 마치 인플루엔자(flu)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주사를 플루 백신이라고 하는 대신 독감 예방 주사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사실상 HPV 예방 주사는 자궁경부암만을 예방하는 주사가 아니다. 이 주사는 항문암에 80%, 자궁경부암에 70%, 여성생식기 계열 암에 60~40%, 그리고 몇몇 구강암에 대한 예방 효과를 기대한다. 또한 성 접촉을 통해 감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예방주사를 반드시 ‘여성 청소년’만 맞아야할 이유는 없다. 이미 한국은 캐나다, 호주, 홍콩, 영국, 미국 등과 더불어 남성에게도 이 예방접종을 할 수 있는 승인을 받은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방접종 대상이 여성으로 제한되기 때문일까. HPV 예방주사 중 하나인 ‘서바릭스’의 홍보물은 학생들 간 대화의 내용으로 인해 여성혐오 논란을 촉발하기도 했다. 


     여학생 A: 우와- 오늘 자궁경부암 백신인가 때문에 병원 간다구? 

     여학생 B: 아 몰라~!! 지금 우리 나이가 공짜로 놔주는 때라서 엄마가 절호의 찬스래. 


     남학생 C: 너 그거 얌전히 맞는 게 좋을 거야. 신문에서 사춘기 때 맞는 게 좋다고 했어! 

     여학생 B: 이 자식, 네가 뭘 알아? 남자가. 

     남학생 C: 사... 상관있어! 여자가 나중에 내 아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 여성혐오의 정의는 고정되어 있는가


    여성혐오Misogyny에 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지난 한 해였다. 온라인 서점 내 페미니즘 분야의 도서 판매량이 전전해 같은 기간에 비해 급증했다는 내용이 기사화되었고, ‘여성혐오’는 2016년 누리미디어(dbpia) 에서 선정한 사회과학분야 최다 검색 키워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깊은 공감과 학습 의욕을 불러일으킨 여혐 논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반감의 대상으로 자리하는 일에 그쳤다. 그런데 저마다에게 정의된 ‘여성혐오’는 같은 것일까?

    한국말에서는 Misogyny가 여성혐오라는 번역어로 굳어졌지만, 이 개념어 자체에 대한 정의나 이해는 학자들이나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의 여지나 ’혐오‘라는 어휘에 대한 정서적 반응의 문제 때문인지 여성혐오 개념의 적용에 관한 논란은 피할 수 없는 일인 듯하다. 그러던 중 일본의 사회학자인 우에노 치즈코의 저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일본어 제목이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여성혐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인 ‘Misogyny'의 음가를 그대로 차용한 ‘미소지니(ミソジニー)’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용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2012년 10월, 호주의 국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통해 여성혐오 개념에 관한 비교적 최근의 논의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맥쿼리 사전Macquarie Dictionary은 이 일로 여성혐오의 사전적 정의를 개정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호주의 대학에서, 또한 법률가들이 참조하는 사전으로서의 권위가 인정되는 맥쿼리의 개정은 결과적으로 여성혐오에 관한 가장 최신 버전의 정의로서 회자되기도 했다.

    사건에 달린 표제는 여성혐오 연설Misogyny Speech이다. 사건은 2012년도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피터 슬리퍼Peter Slipper가 여러 스캔들에 휘말려 사임을 하는 과정에서 촉발된다. 슬리퍼는 2012년 4월 이후로 여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보좌관에게 노골적인 성희롱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를 고소한 보좌관은 제임스 애쉬비James Ashby로 서른세 살의 동성애자였다. 당시 총리였던 줄리아 길라드Julia Gillard는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야당의 영수인 토니 애보트Tony Abbott는 (슬리퍼와 같은 성차별주의자를 국회의장직에 남겨 두는 것은) 정부의 수치를 또 하루 더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애보트가 길라드 총리에게 자극적인 발설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길라드는 슬리퍼가 의장직에서 물러난 다음 날인 10월 10일, 작심이라도 한 듯 15분에 걸친 연설을 통해 애보트를 비판한다. 이 연설을 찍은 동영상을 업로드하며 ABC 뉴스는 다음의 제목을 붙인다. “길라드가 애보트에게 여성혐오자라는 딱지를 붙이다.”

    이 연설에서 길라드는 애보트의 발언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왜 애보트가 성차별주의sexism나 여성혐오에 관한 문제제기를 할 자격이 없는지, 그리고 어째서 애보트 자신이야 말로 성차별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인지에 관해 논증한다. 호주 최초의 여성 총리인 길라드가 취임한 후 애보트는 인터뷰 도중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만약에 남성이 여성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은 권력을 쥔다는 게 사실이라면요, 그게 나쁜 가요?”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때때로 의사당 내부의 웅성대는 소리가 거세지고, 의장이 저지하다 못해 고개를 가로젓기도 하지만 길라드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취임 이후로 애보트로부터 들은 모욕적인 언사들, 애보트가 여성의 역할에 대해 구시대적 선입견을 가지고 한 발언들, 한때 가까운 동료였던 슬리퍼와 그의 스캔들에 접근하는 애보트의 이중 잣대, 그리고 의결 과정에 대한 절차적 존중을 성차별 담론으로 퇴색시킨 것에 대한 분노를 꿋꿋이 발화한다.

    이 연설로 길라드 총리는 여성혐오라는 용어 사용의 부적절성과 및 야당 총수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호주 내 언론인들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SNS상에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주목을 받는다. 나아가 연설 장면을 담은 동영상의 조회 수는 수백만에 이르게 된다. 이에 맥쿼리 사전은 표제어 ‘여성혐오’에 관한 정의에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여, 기존의 정의였던 “여성에 대한 미움/반감”이라는 의미에 “여성에 대한 확고한 편견들”이라는 의미를 더한다. 여성혐오에 관한 기존의 정의로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을 수용하고 사전적 정의를 확장한 것이다. 이 용어의 정의에 관한 한 맥쿼리 사전은 옥스퍼드 사전보다 비교 우위에서 논의되었다.

    같은 달 17일, 가디언 지에서는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뤘다. 여섯 명의 페미니스트는 각자의 견해를 내놓았는데 그 중 나오미 울프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을 싫어하는 것이듯 성차별주의란 여성을 싫어하는 것”으로서 줄리아 길라드의 용례는 매우 정확했다고 말한다. 울프는 길라드의 연설 내용 중 토니 애보트가 ‘낙태’를 두고 책임을 회피하는 쉬운 길로 묘사한 것, 선거 운동 중 야당 지지자들에게 마녀를 쫓아내자는 구호를 인용한 것이 있었던 것에서 근거를 찾는다. 한편 줄리 빈델은 성차별주의자가 늘 여성혐오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예컨대 여성은 천성적으로 모성이 있다거나, 기본적으로 운전을 못 한다거나 하는 주장을 한다면 그는 성차별주의자이지만, 이에 덧붙여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제한한다면 그는 여성혐오자라는 것이다. “여성혐오자들은 반드시 성차별주의자이지만, 성차별주의자들이 항상 여성혐오자인 것은 아니다.” 라일라 굽타는 “성차별주의란 여성혐오를 꽃피우는 우물인데, 물이 하도 탁해서 우리는 가끔 그게 얼마나 실하게 자라고 있는지 볼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성차별주의는 남자들이 당신을 새치기해서 줄에 설 수 있도록 끼워주고 붐비는 버스에 먼저 탈 수 있도록 도와주고는 싫든 좋든, 아 가엾지만, 그들의 손이 “우연히” 당신의 가슴을 감싸며 여성혐오의 광기로 당신을 짓밟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성혐오라는 허구


    여성혐오의 정의는 언어 표상의 운명을 따라 통시성과 공시성을 지닌다. 개념이 속한 시대와 지역의 특성이 의미를 구성하는 사건들에 차이를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옥스퍼드 사전에서 정의하는 여성혐오의 의미(“여성에 대한 증오, 미움, 편견”) 및 용례들이 19세기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2017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2012년 호주에서의 여성혐오 논쟁을 촉발한 사건이 길라드 총리의 연설이었다면 한국의 경우는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혐오를 둘러싼 페미니즘 이슈는 급격히 일상의 언어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성혐오 논의에 의해 계몽된 주체는 ‘여혐’하는 남성보다 ‘여혐’하던 여성이었다. 상품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물질성을 얻은 도서가 다수 출간되었을 뿐 아니라, SNS상의 페이지 혹은 그룹과 페미위키 등을 통한 아카이빙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호주의 사례와는 달리 권위 있는 사전에서 새로운 정의를 내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의미가 고정된 기표의 부재는 다성성polyphony을 띠는 운동력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각자가 이해하는 여성혐오가 동일한 의미를 담아내지 않는 것은 불편한 일일 수 있으나 어쩌면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명사의 의미에 대한 하나의 약속 위에서 소통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맥락 속에서 그 어휘가 소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여성혐오적 상황에 대한 각자의 고백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만드는 첫 번째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다성적 실천이야말로 무엇보다 여성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깡이 보편적 명사로서의 여성은 ‘없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서로 다른 개별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긍정이었다. 일반화된 여성 이미지는 어쩌면 불가해한 여성 혹은 부재하는 집합 명사를 견디는 대안적 허구다. 그렇다면 여성혐오도 허구일지 모른다. 고유한 삶의 역사를 지닌 개별적 인간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화한 여성에 관한 담론으로서의 허구 말이다.

    나와 남편은 전형적인 역할의 틀에 맞추기보다 둘 사이에서 실현되기에 적합한 관계의 양상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다. 좀 더 까다로운 필요를 갖고 있거나 이미 유능한 일을 중심으로 역할을 분담하다보니 일반적인 성역할이 분배되는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생겼다. 남편은 언제부턴가 요리 파트를 맡고 있다. 남편이 요리를 잘하게 된 후로는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주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가는 요령을 익힌 것 같다. 장을 보는 단계에서부터 식재료는 남편이 고른다. 나는 공산품 담당이다. 상품 패키지에 적혀 있는 원재료를 읽거나 가격을 비교한다. 대신에 나는 처음부터 남자가 돈을 벌어오는 방식으로 가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득이 많진 않았지만 결혼 시기 중 대부분의 기간에 가계 소득 기여도는 내 쪽이 더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건강 상태나 감정을 살펴서 챙기거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고민이 생겼을 때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는 나의 태도는 좀더 여성적인 역할일 것이다. 관습적인 성역할을 기준으로 볼 때 현실적인 수행의 부분은 일관되지 않았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린 것은 나였다. 여성적 수행으로 고정된 일들에 대한 죄책이 가부장제의 질서 하에서 형성된 여성혐오적 기준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제는 나의 역할과 신체를 도구화하는 일을 좀더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최근에 개정하여 출간된 어느 책의 제목처럼 페미니즘은 사실상 ‘모두를 위한’ 것이다. 페미니즘의 시선을 통해 질문하는 일보다 페미니즘의 시선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이 더 익숙한 것은 무엇이 이데올로기인지를 반증한다. 이상적으로 제시된 여성 일반의 특성도, 삼가야할 것으로 제시된 특성도 모두 하나의 통념이다. 통념은 안전하지만 우리를 우물 안의 세상에 가두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변화는 불편하게 겪어낼 수밖에 없지만 어떤 변화들은 우리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계기로 기능한다.

    우리는 어떻게 환경으로서의 여성혐오를 넘어설 수 있을까. 우선은 여성 각자가 성차를 둘러싼 고정관념에 복무하려 애쓰는 대신 자기 자신을 발화하고 욕망을 찾아가는 일을 통해 균열의 지점들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혐오적 틀의 편리함 대신, 남성들과 여성들이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개별적 여성에 대하여 질문하며 그들 각자와 고유한 관계성을 구성해가기 위해 얼마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통념은 강하다. 하지만 불멸하는 것 또한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가톨릭평론> 2017년 5·6월호에 송고한 원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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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함과 지능의 상관관계





조은채*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친구가 듣는 여성학 수업에서 저 말과 동시에 강의실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고 한다. 몇몇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고, 나머지는 표는 내지 않았지만 실망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도 그 말의 진부함에 기대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었다고, 친구가 고백했다. 잠깐 말문이 막혔다. 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그 말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쉽사리 부정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반발심도 들었다. 저 말에 진부함을 느끼고 다들 실망해버릴 거라면, 도대체 여성학 수업에 얼마나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는 말인가? 물론, 오랫동안 반복해서 회자된 예시가 진부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성별에 따라 밤길을 걸을 때 느끼는 두려움에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차이가 이미 너무 익숙하고 진부해졌지만 조금도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페미니즘에 관해서 설명할 수는 없었겠느냐고 순간이나마 느꼈던 아쉬움은 곧 희미해졌다.

        물론 저 말에 진부함을 느꼈을 모든 사람을 한 데 묶어 비난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사실 진부함을 표현한 것 정도는 여성학 수업에서는 꽤나 준수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멀쩡해 보였던, 때로는 심지어 아주 배울만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들까지도 갖가지 헛소리를 앞다투어 정성스럽게 늘어놓는 마당에, 페미니즘이 진부하다고 실망하거나 지적하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범위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이 그나마 ‘들어줄 의지’가 있는, 그리고 ‘배울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부함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이쪽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페미니즘 수업에서 얼마나 많은 한심한 반응들이 있었는지, 아주 잠깐의 시간만 투자해도 수많은 사례를 떠올릴 수 있어서 더욱 그랬다. 친구의 수업에서는 적어도, 페미니즘 수업에서 왜 여성의 입장을 위주로 다루냐고 반발하거나, 교수가 ‘심각한’ 페미니스트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학생은 없지 않았는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유로 페미니즘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가 아닐까?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는 사례를 제시한 것은 이쪽의 실책이 아닐까? 덜 진부한, 그러니까 더 세련되고 쿨한 방식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혐은 지능의 문제”라는 말이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소위 ‘과격’하다고 불리곤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 중 하나이다. 친구는 내게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명 높은 지능의 조건을 완비한 주변인들이, 실제로 페미니즘에 관해서 자기보다도 더 많은 학술서나 논문을 읽는 사람들이, 페미니즘 안에 새로운 것이 없었다고 했다고 한다.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지능 문제도 아니고, 그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안에서 그들을 설득할 만한 정밀하고 객관적인 논리나, 과학적인 방법론, 혹은 합리적인 사례들이 없기 때문이 아닌지, 페미니스트인 친구는 조심스럽게 반성했다. 그들을 단순히 ‘지능’이 떨어지는 무리로 매도하는 것은 일시의 후련함 말고는 아무런 이득도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친구는 페미니즘이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이유를, 진부함과 같은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페미니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갖가지 영역에서 작동해야만 하고, 때와 상황에 맞춰 그 형상을 바꿔야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예시를 마냥 진부한 것으로만 느끼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과연 설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영 타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혼자 걷는 밤길을 떠올려 보라는 저 진술이 진부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진부함에 대해 불평만 하는 사람들이, 과연 설득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일까? 세상의 절반이 매일 마주해야 하는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외면할 수 있는, 그래서 그 문제에 조금도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나 감수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총체적인 의미에서 지능이 떨어진다고 확장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여성혐오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면, 의도적인 태만을 폐기하든지 감수성을 키우든지 해서 이를 반증해야 하는 것은, 이쪽이 아니라 그쪽일 것이다. 누군가는 매일 직면하는 문제에서 완전하게 격리된, 안락한 곳에 앉아 새로움이나 세련됨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합리적이라고, 혹은 지능이 높다고 속 편히 평가할 수는 없다. IQ에서 EQ, 그리고 SQ까지 여러 방면에서 사람의 지능을 평가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들이 페미니즘에서 고루함이나 진부함의 흔적밖에 찾아낼 수 없었다면, 그것은 사실 페미니즘의 문제라기보다는 총체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지능 문제라고 결론짓고 싶다.

       페미니즘이 진부하고 그 어떠한 새로운 통찰도 주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하나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의 올바른 정의나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의식하든 못 하든 감각은 하고 있으며, 이를 결코 포기할 마음도 없다. 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제시하고, 더 밀도 높은 주장을 하고, 대단히 효과적인 전략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페미니즘이 덜 진부한 것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온갖 수사 아래 감춰진 그들의 본심은 페미니즘이라는 이 지긋지긋한 주제에 대해 이제 영원히 입을 다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의지가 없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는 이유를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거나, 페미니즘의 한계라고 인식할 필요는 없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이 진부한 것에서 탈피해야 할 이유도 없다. 페미니즘은 단 한 순간도 진부했던 적이 없다. 그저 사회에 만연했던 가부장적 감수성이 이를 진부하다고 규정했던 것뿐이고, 그래서 그렇게 믿어져 왔던 것일 뿐이다. 이제 좋게 설득할 때는 지났다. 차라리 문제를 그들의 지능으로 환원시켜, 그들 스스로 반증과 증명의 굴레에 갇히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과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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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속 정국, 무지에 대한 거부를 통해 헤쳐가기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진 후 약 2주 동안 한국에 대한 뉴스가 카나다 뉴스에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전해지고 있다. 물론 남한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미사일에 관한 뉴스까지 포함한다. 이는 아주 드문 일이다. 지난 주일엔 교회 예배 중보 기도 때, 한 백인 교인이 소리를 내어 북한에 대한 기도를 드렸다. 남북한 정세에 관한 어려운 상황이 카나다에까지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역시 아주 드문 일이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나에게 남한에 대해 북한에 대해 물어본다. “어떻게 될 거 같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내 모국이 걱정이 되어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표현으로 닥쳐오는 이 많은 질문들을 받으며, 난… “글쎄… 모르겠어.”라고 답을 할 수 밖에 없음에 답답하다. 모르기에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무지하기에 위험하다. 이를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오늘은 이에 대해 다루어 보자.

    미디어에 드러나는 북한의 모습은 너무 제한적이고 왜곡되어 있어서 북한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런 내 생각엔 근거가 있다. 올 4월에 남한과 북한의 공식 외교국인 카나다에서 카나다 연합교회 주최로 남북한 기독교 여성 평화 모임이 개최될 예정이었다. 한국 기독교 협의회 여성 위원회가 요청을 했고, 파트너 교회인 카나다연합교회는 이를 긍정적으로 응답함으로써 1년 전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 중인 일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복잡하게 엉켜있는 분단의 실타래를 종교의 관점에서, 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다는 확신에 대한 실천적 모습이었다. 또한 정전을 포함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수십년동안 노력을 해 온 한국 기독교와 전세계 에큐메니칼 진영의 지난한 여정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겠다는 결단의 모습이었다. 이 모임에 전세계 다양한 교단과 단체에서도 참가하려고 대표단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정적인 부담을 안고 이 모임을 치루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연합교회가 “합시다!”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 거의 40년, 은퇴할 때 까지 평생을 사셨던 매리온 커런트 (구애련) 선교사님 덕분이다. 당신이 소천하기 전 유산의 일부를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증하셨다. 그런 보이지 않는 분들의 힘으로 준비된 일이었다. 그런데, 북한기독교 연맹의 동의를 얻고 여성들을 보낸다는 약속을 받고 시작한 일인데, 올 2월 말 북한에서 갑자기 불참 통보를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안타깝게도 모임은 취소되었다.  

    박근혜 탄핵 대법원 만장일치 가결을 축하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박근혜 지지자들의 탄핵 결정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집회도 있었다. 5월 9일 대선을 앞두고 남한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 지 가늠하기 어렵다. 매년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표현하기 위해 3월이 되면 북한이 늘 해 온 일이지만, 올 해3월 북한 미사일 발사는 심상치 않다. 북한의 정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부임한지 고작 2달이 지났는데, 반이민 행정명령과 오바마 도청설, 오바마 케어 무산등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책에 대한 혼란과 저항으로 미국의 정세 역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러한 안개 속 정국을 거닐며 기독교인들은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사순절의 의미는 다양하다. 교단마다 전통마다 또 문화와 신학적 성향에 따라 그 의미는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사순절이 기독교 절기 중 가장 진지한 절기, 즉,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삶에 대해,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통적이다. 그 어느 절기보다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머리속으로 하는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으로 매일의 행위로 훈련하게 하고 결단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순절이 지닌 힘은 대단하다. 소셜 미디어 중독자로 살던 많은 기독교들이 40일 노페이스북을 선언하고, 커피와 초콜렛을 안먹으면 두통으로 하루도 못 버티는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이 음식에 대한 사순절 금식을 선언하고 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이 고기냄새만 맡아도 사죽을 못쓰는 고등학교 남학생 기독교청소년들이 사순절 기간동안 육류 안먹기를 선언했다. 이렇게 내 주위에 내가 아는 가족, 친구들이 이런 육적이고 영적인 거부의 실천을 하고 있다. 이런 선택은 단지 유행을 좇는 즉흥적 반응이 아니다. 이들의 결단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윤리적 이유가 함께 동반된다. 소비주의에 찌들은 자본주의적 삶, 특권층 인간의 소비로 희생당하는 소외된 사람들과 동물, 그리고 생태계의 위기, 미디어에 대한 촉각적 반응에 대해 진득한 고려를 하겠다는 일종의 체화된 기도이자 거부이다.

    어떤 면에서 사순절 의미의 핵심은 거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권력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지만) 그 권력이 저지른 폭력 자체를 거부하신 것이다. 사순절은 그 예수님의 행위를 예수님의 삶 아니 죽음, 죽임당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로 하는 기억이 아니라 몸으로 우리의 매일 매일 삶의 실천으로 동참하는 기억이자 그 기억을 체화하는 거부다.

    내가 좋아하는 탈식민주의 문화이론가이자 퀴어 페미니스트 학자가 있다. 사라 아미드이다. 영국계 엄마와 파키스탄 출신 아빠를 두고 영국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호주로 이민을 갔고, 현재 영국에 살고 있다. 거의 20년동안 8권의 책을 저술하면서, 아미드는 탈식민주의, 이주, 인종, 성, 성정체성, 혼종성, 타자, 문화, 그리고 다름, 이런 굵직한 주제를 탁월한 글솜씨로 다루었다. 가장 최근 출간된 책은 Living a Feminist Life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각주:1]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 그의 이론은 마치 내 살에 닻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삶과 현실에 동떨어진 메마른 이론이 아니라 마치 내 살갗을 뚫고 파고드는 것처럼 날카롭고 신랄하고 살아있다. 그렇게 아미드는 우리 사회, 삶이 지니고 있는 억압, 차별, 불평등, 지배의 문제에 정곡을 찌른다. 나의 삶이 백인 우월사회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가서, 이민자이고, 여성이어서 내게 그렇게 가까이 다가올 수도 있다. 아미드 역시, 소수인종으로 호주/영국에서 살아가고, 성소수자이고, 이민자이고, 여성이어서, 그 경험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에 그의 언어의 선택과 표현이 그렇게 적나라하고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칼보다 펜이 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펜의 힘을 땀에 절여진 개념 (sweaty concepts)이라고 표현한다.[각주:2]

    페미니즘이 책의 핵심화두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 앞서 열거한 이 모든 굵직한 주제가 마치 한 사람의 몸 곳곳에 필요한 피가 동맥과 정맥을 통해 골고루 전해지듯이 녹아들어 있다. 마치 오장육부가 연결되어 있듯이 아미드는 이 주제들이 어떻게 연결 (intersectionality)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의 결론이 특별히 인상적인데, 이 결론을 보면서 난 “거부”의 힘을 보았다.

    아미드는 페미니스트들이 ‘killjoy’ 로 낙인을 찍히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즉, 잔치상에 찬물을 끼얹는 자, 따끈한 있는 분위기를 싸늘케 만든 썰렁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미드는 기죽지 말고 그 일, 그 일이 기쁨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계속하자고 독려한다. 아미드가 제안하는 구체적인 거부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자로서 글을 쓸 때, 이미 기득권자 그룹에 속한 저자들을 인용하는 것을 거부하자고 제안한다. 대신, 소수자, 억압받는 자, 주변부에 속한 학자들 (소수인종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을 인용하자고 주장한다. 아미드는 실제로 이 책을 통해 서구 백인 이성애자 남성 학자들을 인용하지 않아도 훌륭한 학자들, 이론가들, 실천가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주변부 소수학자들을 인용하면서 얼마든지 아니 더 멋지고 이론적이고 비판적이고 생생한 글을 써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자인 내게 가장 도전을 주는 거부제안이다. 실제로 강의를 준비할 때, 책과 저널 아티클을 선정할 때, 교수로서 꼭 해야하는 일이다. 백인 남성,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학자들의 글만을 소개하지 않고, 소수 인종, 여성, 성소수자들, 유럽, 미국을 벗어나 3세계 학자들의 글을 소개하는 형평성을 유지하는 일은 선생으로서 기본 원칙이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로서 저명한 저널에 원고를 기고하고, 저명한 출판사와 계약을 해서 책을 쓸 때, 아미드처럼 기득권 학자들을 거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심지어 치루어야 댓가가 있기에 고통스럽다. 그래서 이 사순절 아미드가 제안하는 거부는 학자에게 교수들에게 글을 쓰는 지식인들에게 특별히 더 의미심장하다.

    두번째,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불편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그 상대방을 대상으로하는 농담 (대부분 여성비하, 성소수자, 인종차별적 발언)을 들을 때 다수에 휩쓸려 웃는 일을 거부하라고 제안한다. 따뜻한 분위기에 찬물을 뿌리는 자가 되라고 한다. 세번째, 이미 지난 일이라고 세상이 말하지만, 역사가 실제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그 역사가 종결되었다는 주장에 거부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정신대 여성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했으니 그 역사는 끝났다고 일본정권이 아무리 말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거부하는 정신대 할머니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 거부의 메아리를 함께 울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득권 세력이 정해놓은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을 거부하자고 한다. 한 예로 “여자가 독신으로 살면 힘들어. 나이가 들었으니 대충 남자 만나 결혼해 그게 행복이야”라는 세상의 규범 (이성가부장결혼제), 순리라는 논리로 치장된 억압적 규제를 차별적 행복이라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그 음식이 몸에 좋다는 허황된 이유 (기득권 논리)로 먹는 것과 같다. 거꾸로 “남자가 되어가지고 울기는… 참아야지” 하는 남성억압적 논리 역시 참지 않고 우는 행위로, 마치 그 음식을 토해내는 것처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 남성에게 종용되는 논리이외에도 억압적 차별적 규제들은 정말 많다.

    아미드가 제안하는 거부의 핵심은 바로 세상이 오리무중이고 안개속 정국이지만, 세상을 탓하면서 무지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곧 운동이다. 지난번 원고에서 무지가 주는 폭력에 대해 말했다. 사실이 거짓으로 진리가 기만으로 둔갑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 비판적 의식의 부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세월호, 미국 선거,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 세상은 오리무중이고 안개속이다. 한국 대선이 어떻게 될 지, 북한 미사일 문제가 어떻게 될 지, 트럼프의 반이민정책, 오바마케어 정책이 어디로 갈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한가지는 있다. “무지가 권력과 야합하면 정의가 대적해야하는 최악의 적으로 둔갑한다”는 걸 말이다.[각주:3]

    남은 사순절 무지가 권력에 야합하지 않도록 무지를 거부하자. 억압과 차별을 행복의 이름으로 세상의 순리라고 치장하고 종용하는 부정의를 거부하자. 사순절을 마치면 그만두는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 꾸준히 우리를 무지하게 만드는 논리, 기득권의 힘을 향해 거부 실천을 하자. 거부가 습관이 되어 우리 몸에 배일때까지. 마치 이빨을 매일 닦듯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하는 실천이 될 때까지. 일상의 거부로부터 (예. 쓰레기만드는 물건 안사기) 큰 역사를 바꾸는 거부의 물결을 일으키자.


ⓒ 웹진 <제3시대>



  1. Sara Ahmed, Living a Feminist Lif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7). [본문으로]
  2. Ibid., 12. [본문으로]
  3. James Baldwin, No Name in the Street (New York: The Dial Press, 1972). “Ignorance, allied with power, is the most ferocious enemy justice can hav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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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폭력을 되받아 치는 발칙한 그녀 

<Elle (폴 버호벤, 2016)> 




이희승*



  영화과 동료가 감독한 저예산 영화를 단 한번, 게릴라 개봉한다는 이메일이 도착했지만, 오후 6시인 상영시간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이메일을 닫습니다. 흔치 않은 일은 아니지요. 결혼생활하고 아이 키우며 대학가 언저리에서 교편잡고 있는 워킹맘들은 강의 시간이 다 끝난 후에야 시작하는 여러 학술 활동 및 친목모임에 참여하기 쉽지 않은 현실을 한탄하면서, 서서히 교수사회의 중심에서 멀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권신장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뉴질랜드에 산다고, 꽤나 진보적인 인문학부에 속해 있다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자괴감 충만한 에피소드는 기득권을 결코 여성들과 순순히 나눠 가질 수 없다고 버티는 가부장제의 뿌리깊은 독점욕을 공적, 사적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난공불락인 듯 보이는 가부장제의 전방위적인 차별과 폭력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이번 호에는 아직 국내에 개봉하지 않은 최신 영화이자 제 마음에 쌓였던 앙금을 잠시나마 해소해 준 폴 버호벤 감독의 신작 <그녀( Elle)>를 소개할까 합니다.


  필립 지앙의 소설을 영화한 <그녀>는, 이제는 거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제목만으로도 그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는 <원초적 본능 (1992)>을 감독한 폴 버호벤 감독의 첫번째 프랑스 영화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2012)>를 통해 국내 영화에도 출연한 바 있는, 프랑스의 명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주인공인 미셸 역할을 맡아서 명불허전의 연기를 펼치죠.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세계에는 특유의 긴장감이 존재합니다. 이는 겹겹이 감추어진 진실에 서서히 다가가는 동안 느껴지는 은근한 긴장감이라기보다는 종잇장보다 얇은 문명의 가면 뒤에 누구나 품고 있는 잔인성과 폭력에의 본능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말초적 긴장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폴 버호벤의 영화들은 예외없이 남성본위의 사회 구조를 성(性)과 폭력의 합일체로 묘사하고 있고, 고유의 말초적 긴장감은 그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영화적 장치로 활용됩니다. <원초적 본능>에서도 그랬듯이, <그녀>는 일일이 거론하고 반박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일상화되고 관습화된 가부장적 권위의 폭력은 인간관계의 가장 내밀한 층위인 섹슈얼리티를 도구로 삼는다는 진실을 폭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폭로나 증언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라는 매체가 허락하는 대안적 공간에서만큼은 이 부조리한 구조를 철저히 응징하는 핏빛 유토피아를 구현하려고 하죠. 물론,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다는 논리나 그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부르조아적 문제인식의 한계에 얼마나 동의하느냐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미셸은 뚜렷한 자기 주관과 성적 취향으로 무장하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맹수와 닮았습니다. 파리의 부유한 주택가에서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인생을 즐기며 혼자 사는 이혼녀인 미셸은 한때 문학을 공부했지만, 초고도화된 자본주의의 총아인 비디오게임 업계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게임회사의 공동대표이기도 합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보이는 그녀이지만 현실은 좀 한심합니다. 절필한 소설가로 이혼한 전부인의 회사에 일거리를 찾아 기웃거리는 찌질한 전남편, 변변한 직장도 없이 표독한 여자친구에게 치이고 부자 엄마에게 손 벌리는 외아들, 잘사는 딸의 도움으로 연명하면서 젊은 남자와 연애 놀이에 푹 빠져 사는 엄마, 희대의 연쇄살인범으로 장기수감 중에도 심심찮게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아빠, 절친이자 회사를 함께 운영하는 안느와 그녀의 남편이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끊임없이 만나자며 들이대는 내연남. 마치 복잡한 게임이라도 하는 양, 이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들 사이를 거침없이 유영하던 당찬 미셸은 어느날 느닷없이 침입한 괴한에 의해 강간을 당합니다. 잠시 바닥에 앉아 텅빈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미셸은 말없이 일어나 어지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욕조에 몸을 담그죠. 눈깜짝할 사이에 들이 닥친 토네이도처럼 일상을 산산조각낸 사건을 겪었지만 미셸은 개의치 않겠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혼란스러운 순간을 견딥니다. 미셸이 마치 밀린 업무라도 처리하는 것처럼 성병 검사를 받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지인들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알리는 영화 초반의 비관습적인 장면들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가녀린 몸으로 이 강철같은 인물을 완벽히 표현해 냅니다.


    강간범으로부터 줄기차게 협박 메세지가 오고 집안에 그가 다시 침입한 흔적이 선명하지만, 미셸은 이를 경찰에 알리지 않고 – 혹은, 또하나의 제도화된 남성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 주변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둘러 보기 시작하죠. 영화의 중반부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성들을 관찰하는 미셸의 시선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그 안에서 묵인되는 배타적 특권의식이 낳은 기형적 남성상을 가차없이 카메라 앞에 드러냅니다. 탐욕, 위선, 불관용, 이기심, 자기연민, 그리고 무력감과 우울 – 이 모두가 바로 <그녀>가 직시하는 오랜 권력독점으로 인해 안에서부터 썩고 있는 가부장 제도의 자화상이지요. 강간이라는 가장 원초적 형태의 남성 폭력에 노출되었지만 주체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미셸과, 그런 그녀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는 주변남성들, 우아하고 럭셔리한 파리 상류층의 일상에서조차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욕망의 호전성, 그리고 내재된 공격본능을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자본의 천박한 속성 간의 충돌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버호벤 감독 특유의 서슬퍼런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비록 정글같이 위험천만한 현실에 살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호의적인 태도로 대하는 이가 있으니, 잘생기고 듬직한 이웃집 남자 패트릭입니다. 패트릭은 신앙심 깊은 아름다운 아내와 그림같은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는 은행간부죠. 불안과 공포를 홀로 견디는 미셸에게 보호본능을 느끼는 듯, 무슨 일이든 나서서 미셸을 돕는 패트릭은 서서히 미셸의 주변을 맴돌며,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일상에 스며 듭니다. 관객 또한 이 친절한 앞집 남자의 등장으로 한숨을 돌리게 되지요. 허나, 이미 <원초적 본능>에서 예견된 바대로, 성적 욕망에 있어서 남녀 구분없이 ‘뻔뻔한’ <그녀>는 미셸이 사람좋은 패트릭을 망원경으로 훔쳐 보면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나도 관음과 자위를 누릴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미셸의 당당한 선언으로 해석이 가능한 이 작은 반전은, 두 인물 사이에서 로맨틱한 관계 발전을 살짝 기대했던 저를 비롯한 관객들의 습관적 기대감을 머쓱하게 합니다.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 오는 강간범의 협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미셸은 간단한 호신 무기에서부터 권총 사격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제의 근간이자 남성 우위를 정당화하는 마초적 폭력에 잠시 의탁해 보려고도 하죠. 하지만 이자벨 위페르가 품격있게 연기해낸 미셸은, 얼음 송곳을 침대 밑에 감춘 채 대상화시킨 남자의 육체를 맘껏 탐하는 <원초적 본능>의 캐서린보다는 한 수 위인 듯 합니다. 노련한 미셸은 서로의 손에 피를 묻히는 유아기적 폭력 대신, 가부장적 독점욕 안에서 이미 자랄대로 자라난 자기파괴 본능을 살짝 비트는 전략을 써서, 독버섯처럼 그녀의 인생에 기생하던 찌질한 남자들을 한방에 청소해 버립니다.


    영화는 상상만으로도, 아니면 상상 속에서나마 통쾌한 페미니즘적 복수극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미셸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젖어 있는 동안 저지른 본인의 위선과 자기기만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자기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처입힌 누군가에게 그녀만의 방법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폴 버호벤 감독은 나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나 이제는 다소 식상한 감이 있는 대안적 여성연대로 영화를 맺으려 하지요. 이 영화가 담지하려고 했던 부조리의 폭로와 비판 그리고 전복에의 시도와 그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지의 문제와 별개로, 여든이 다 된 백발의 할아버지 감독은 사실 속빈 강정에 불구한 펠러스 (phallus)를 마구 휘둘러대는 남근 중심적 문명의 민낯을 솔직히 드러낸 <그녀>를 통해서, 보편화된 성차별의 폭력에 감금된 수많은 “그녀”들에게 잠시나마 해방구를 선물하려는 듯 합니다. 그리고 억압과 불평등으로 유지해온 가부장 질서의 내압으로부터 발생한 무의식적 자책과 불안에 떨며 ‘이러다가 이 세상이 끝내 멸망’하리라고 예견했으나 너무나 멀쩡히 21세기가 도래한지도 한참이건만, 독주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치열한 경쟁과 생산성을 명목삼아 여전히- 아니 그 어느때보다도 더 공고히 –남성 우위를 지속하려는 “그”들에게 섬뜩한 경고장을 날립니다. 진짜 위험한 건 바로 ‘그녀’라고.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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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이유



유하림*

 


   6개월 정도 만난 애인은 어쩐지 나를 답답하게 만든다. 그에게 귀엽고, 착하고, 애교많고, 철없고, 왈가닥인 나는 진지하고, 예민하고, 거칠고, 폭력적일 수 없었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서 시작 전에 나오는 광고를 보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자가 엉덩이를 쭉 내민 자세의 운동을 하는 장면이 광고내내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더 저렴하게 이용하자!’ 같은 카피가 나왔다. 광고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저렴한 가격이었는데, 내가 본 것은 한 여자의 몸매와 그것을 통한 섹스어필이었다. 화가 나서 “아니, 저게 무슨 광고야.” 하고 투덜댔다.


   “통신사 광고지.” 

   “그걸 내가 몰라서 물어?” 

   내가 어떤 의미로 말한지 뻔히 알면서도 눈치 없는 답을 하는 그에게 쏘아댔다. 

   “왜 또 짜증났어. 좋게좋게 하자.”   


   애인은 내게 자주 그렇게 말했다. 좋게좋게 하자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는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 학교에서 있었던 성폭력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대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흥분한 채로 가해자를 욕했다. 애인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항상 그렇게 많은 곳에 열을 쏟으면 힘드니 진정하라고 말했다. 진정하라고? 같이 화내주지는 못할 망정, 진정하라니. 힘이 풀리는 말이었다.  

   비슷한 몇번의 사건을 겪고 나니 애인의 앞에 설 때면 자기검열을 하게됐다. 내가 흥분하며 말한 것은 아닌지, 좋은 우리 사이를 방해할 정도로 다른 일에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봤다. 그가 내게 좋게좋게 하자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일이 아닌 다른 일로 싸우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혔다. 분노 해야 할 대상에게만 화내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애인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심지어는 그에게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누구는 싸움이 체질이라 여기저기 시비걸고 다니는 줄 아나. 좋게좋게. 나도 좋아한다. 그거 못해서 안하는 거 아니다. 이 세계는 나를 자꾸만 화나게 하고, 지금 나는 나의 정당한 분노를 대중적인 언어로 푸는 것에 한참 흥미를 느끼는 중이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사람들이 평가하는 나에 대해서 신경끄기로 작정한 상태였는데 나는 다시 그를 상대 할 차분하고, 사랑스러운 언어를 골라야만 했다. 그래서 말 수가 적어졌다.

   애인에게 몇번 말했다. 싸우지 않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잘 싸우는 게 중요하다고. 불만이 있으면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서로의 삶과 경험과 생각을 자꾸만 나누는 것이 관계를 맺는 거라고. 누가 그랬는데,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역사와 역사가 만난다는 거라고. 그러니 우리 서로 오만해하지 말고 열심히 들어주자고. 그런데도 그는 그냥 싸우는게 싫단다. 서로 좋다고 말하기도 부족한 시간에 왜 싸워야 하는건지 모르겠단다. 아니. 무작정 싸우자는게 아니라, 불만이 있으면 이야기 하자는 거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알게된다면 당연히 못마땅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상대에게 기대를 걸고, 그 기대에 못미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대 안한단다. 본인은 그냥 나 자체를 사랑한댄다. 애인이 생각하는 ‘나’는 뭘까. 잘 모르겠다.

   그는 고양이를 예뻐하고, 뭘 먹든지 옷에 다 흘리고,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나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소한 것에 화내고, 때로는 거친 언어로 분노를 표현하고, 어떤 사람이든간에 적절치 못한 말을 한다면 신랄하게 까버리는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싫은 모습은 있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연애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 그리고 상대가 그것을 봐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혹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고 보는 것. 그렇다면 내 정의로 우리는 연애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것을 하는 중이다. 그는 나의 분노를 보지 못하니까. 나의 분노를 예민함 따위로 취급하니까. 그래서 나는 애인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으니까.

   아무래도 우리의 연애는 여기까지다.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과의 연애는 6개월이면 충분했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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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화된 불평등과 대상화된 여성




조은채*

 


       남자 지인 중에 페미니즘 강연을 종종 들으러 다니고, 그 주제에 대해 나름 유의미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친절한 편이었고, 딱히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이전에 저질렀던 성폭력이 sns를 통해 폭로되고 고발되었을 때, 나는 놀라기는 했지만 경악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그런 행동을 직접 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어떤 태도나 말에서 미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끼던 의혹을 사소한 것으로, 혹은 괜한 것으로 치부해서 넘겨버렸다. 그가 나에게도,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좋은 사람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투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익, 성 소수자의 인권, 그리고 옳다고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을 위해 싸웠으면서도, 그에게 여성은 사실 자신과 동등한 주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라는 소리에 페미니즘에 관심은 가졌지만, 자기 주변의 여성들이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진리는 인식하지 못했던, 흔한 여성혐오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해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내가 엄청나게는 충격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서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통하던 남자 지인은, 같은 무리 여학생들을 ‘부위 별로’ 등급을 매겼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다고 누누이 밝히던 동료는 무리 내의 페미니스트를 뒤에서 성적으로 희화화하고 조롱했다. 앞서 언급한 ‘그’에게서 몇 가지 조건을 더하거나 빼고 이름만 바꾸면 똑같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말이 통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음에도, 가끔 그 생각이 내 착각이었나 싶은 질문을 던지는 남자 지인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질문 안에 담겨 있는 여성혐오를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 때문에 더욱 답답해지곤 했다. 다른 문제에서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중립적이었던 친구들이 남성 장애인의 성욕 해결을 이유로 들며 성매매 합법화를 역설했다. 하지만 그들의 논지에서 여성 장애인이나 그들의 성욕은 등장조차 하지 않았고, 남성의 성욕은 누군가 반드시 해결해주어야만 하는 불가피하지만 절대적인 것으로 치환되었다. 왜 남성의 성욕에만 애정 없이도 그것을 해소해줄 대상이 필요한가? 왜 그 해소 방법을 여성과의 성관계로 당연하다는 듯이 한정하는가? 그들은 남성 장애인이라는 특수한 경우를 예시로 들며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주장은 얼마든지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될 수 있었다. 기러기 아빠라서, 여자친구는 혼후관계주의자라서.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성관계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에게는 비슷한 논리로 성매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그 논리대로라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다. 결국, 그 주장은 여성을 철저하게 타자화시켜, 남성의 성욕을 위해서는 보급되거나 구입될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인식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사람임에 앞서 여자로 규정된다. 여성이 등장하는 기사에는 ‘여(女)’ 자가 빠지지를 않는다. 여대생, 여교사, 여배우, 여교수. 며칠 전에 본 기사의 제목은 ‘IS 대원 100명을 사살해서 현상금 11억이 걸린 23살 여대생’이었다. ISIS 무장세력때문에 고통받는 시리아 난민 소식을 접한 뒤, 대학을 그만두고 시리아의 쿠르드족 군대에 자원입대한 여성의 이야기였다. 이미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버린 지 오래이며 최전선에서 저격수로 활동하고 있음에도, 기사 속의 주인공은 군인이기 이전에, ‘어린 여대생’으로 먼저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반면, 남성은 사회 안에서 성별로 규정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정규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청년’ 혹은 ‘청소년’, ‘교수’, ‘의사’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남성 주체를 먼저 떠올린다. 신문 기사에서도 굳이 ‘남의사’, ‘남교수’, ‘남기사’라는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은 ‘여’와는 달리 불필요한 수식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청소년’이라는 말에 남성 청소년만 연상하기 때문에 ‘청소녀’라는 괴상한 명칭이 실제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간의 디폴트 값은 남성인 것이다. 결국 어느 한쪽은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쪽은 인간이기 이전에 여자가 되어버린다. 이 연장 선상에서 여성이라는 집단의 이미지는 종종 과잉되게 성애화된다. 그리고 남성 집단이 이 이미지에 기반을 두고 여성을 인식하는 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뒤에 앉은 남자의 전화 통화를 듣게 된 적이 있다. 그는 꽤 큰 목소리로 이름 모를 형님에게 오늘 ‘연애’를 하러 가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가격도 괜찮고 ‘여배우’ 같은 애들도 널렸다며. 잘 말해두면 시간도 길게 할 수 있다며. 그는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형님이 오늘은 안된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다른 형님에게 ‘연애’를 하러 가자고, 자기가 오늘 다 알아봐 놓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형님은 된다고 한 것인지 그가 신나서 계획을 읊었다. 절대 당사자 면전에 대고는 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이 양념처럼 곁들여졌지만, 그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통화 내용을 들을수록 그 남자가 말하는 ‘연애’가 성매수를 가리키는, 성매매 산업에서 흔히 쓰이곤 한다는 은어인 ‘연애’라는 것은 점점 명백해졌다.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통화 내용을 들어야만 했던 나는 문득, 그리고 아주 뜬금없이 남자는 만나는 모든 여자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본다는, 제법 자주 쓰이는 농담이 떠올랐다. 물론 이 농담에서 말하는 연애가 그 남자가 통화로 형님들에게 같이 하자고 조르던 그 ‘연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애’를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할 수 있는 남자가 하는 또 다른 연애는, 과연 그 ‘연애’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여성을 구입할 수 있는 성애화된 객체로 여기는데 이미 익숙한 사회에서, 그와 같은 여성혐오자들이 하는 또다른 연애는 ‘연애’가 아닌 연애라고 해서 무고(無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여성을 동등한 주체가 아닌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간주하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사실이 그가 발화한 말들로 선명하게 입증된 기분이었다. 친구였으면서 단체카톡방에서는 말로 온갖 성추행을 다 하고, 연인이었으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에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했으면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전화 한 통만으로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혐오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증명되는, 그리고 그 증명이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그리고 별 거리낌 없이 일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 필자소개

      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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