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자다 못가의 사람들 [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
― 「요한복음」 5:1-9 중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는 38년간 베드자다 연못가에서 첫 번째로 물에 뛰어들 날만을 기다리던 한 병자가 예수를 만나 몸이 치유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라고 말하자, 그는 몸이 나았고 예수의 말대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몸의 회복’을 한순간에 가능하게 했습니다, 연못의 신비한 힘을 빌지 않고도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치유 사건은 뭔가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습니다. 환자의 치유를 선언하는 타이밍에 예수는 왜 “네 병이 나을 것이다” 또는 “네 병을 고쳐주마”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 있지 말아야 할 곳에 그 병자가 자리를 깔고 있다는 듯이 “자리를 걷어 떠나라”고 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는 그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14절)라고 권면한 것일까요? 문맥 상 이 두 말은 등가의 의미를 갖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8절의 예수의 치유 선언과 14절의 권면은 “네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떠나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우리는 그 병자가 38년이나 지키고 있던 그 자리가 어디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그 병자가 있었던 자리는 어디인지 함께 생각해보고,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는 예수의 치유선언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 병자가 있던 곳은 ‘양의 문’ 곁, 베드자다 못가입니다(2절).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있었습니다(3절). 예수는 많은 환자들이 누워있는 베드자다 연못가의 주랑을 거닐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그는 거동이 쉽지 않은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를 발견합니다. 그 병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연못만 응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8년이나 앓아온 그 병자는 날이 갈수록 굳어져가는 몸 때문에 이렇게 인생이 끝장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고, 공동체에서 온전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몸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 몸은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온 희망을 연못의 신비한 힘에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병세가 깊어갈수록 더 강한 처방을 원했고, 그렇게 오게 된 곳이 베드자다 연못이었을 듯합니다. 대체 베드자다 연못은 어떤 곳이기에 거동이 힘든 중증 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일까요?

 

'양의 문'의 위치


애초에 베드자다 연못은 포로기 이후 강화된 사제 집단의 권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공간이 형성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의 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에 의해 중건된 성벽의 문 중 하나입니다. 「느헤미야」 3:1에서는 이 문이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동료 제사장들이 나서서 만든 것이며 첫 번째 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쪽 지방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성전으로 이어지는 길의 최종 관문과 같았던 ‘양의 문’은 그 이름이 주는 인상과 같이 제의용 가축이 성전으로 대거 유입되는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베드자다 연못은 이러한 도시의 흐름에 맞춰 성전에 제사용 물을 대거나 제의용 동물을 씻기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활동하던 당대에는 성전 안에서 제의용 동물을 거래하는 산업이 이미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이 산업과 관련돼 있습니다.(마태 11:15-19; 마가 11:15-19; 누가 19:45-48; 요한 2:13-22) 아마도 이 산업은 성전 중심 체제가 형성된 초기부터 성장했을 것입니다. 레위기 기록(레 22:17-25)으로 볼 때 제의용 동물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흠이 없는 것’을 선별해야 했는데, 원근 각지에서 성전으로 모이는 이들이 제의용 동물을 온전하게 수송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성전 근처 및 성전 안에서 ‘흠 없는’ 소나 양, 염소 등을 구입하려는 수요가 넘쳐났고, 베드자다 연못은 (자신이 정성스레 가져온 제의용 동물을 씻기는 곳이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누군가가 구입했거나 곧 구입하게 될 제의용 동물을 제사장들의 형식적 검사를 받기 전 잠시 들러 씻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중증 환자들의 집합소가 된 베드자다 연못은 이처럼 성전 중심의 도시공간 배치와 상업화된 제의 방식이 결합된 체제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중증 환자들의 희망의 보루가 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음모론적 상상력을 보태보겠습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구성된 제의 체제에서라면 종교 상품인 동물의 시장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핑계이자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뢰를 주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박물관에 있는 베드자다 연못 모형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높이가 다른 쌍둥이 건물로 구성된 베드자다 연못은 상층의 물이 수로를 통해 하층 건물로 유입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자다 연못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 보니, 오른쪽에 보이는 상층 건물은 동물을 씻기던 곳이었고, 왼쪽 건물은 환자들의 치유센터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동물 씻긴 물이 하층으로 흘러들어가 환자들을 씻기는 치유센터의 물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음모론적 상상을 돕는 촉매제가 되기에는 충분할 듯합니다.
제사장 그룹은 상하층의 물을 모두 동물을 씻기는 데 써도 부족하겠지만, 하층의 회랑을 병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로 내어주자는 결단을 ‘힘겨운 척 쉽게’ 내립니다. 제의용 동물들을 씻긴 물이 신비한 치유의 힘을 갖는다는 소문이 득이 되면 됐지 실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이 제사장들의 음모를 제의용 동물을 구입할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말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짐승(그것도 그다지 거룩해 보이지 않는) 씻긴 물에 ‘나만 안 씻으면 되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상품 구매력을 소유한 이들 사이의 암묵적 합의, 그것이 베드자다 연못에 대한 대중들—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 구매력을 통해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을 능력이 없는 이들—의 소망을 떠받치는 토대였던 것은 아닐까요.
다시 예수와 병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가 병자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묻자, 병자는 원망 섞인 어조로 대답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7절). 함께 누워있는 병자들은 자신이 연못에 들어가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자기를 밀쳐내는 경쟁자들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문득 궁금해집니다, 정말 그곳에는 환자들을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언뜻 생각해보면, 어떤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함께 와서 못에 넣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라면 종들을 거느리고 못가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겠다, 하는 상상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종을 부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이 연못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자다 못에서 씻으라고 한다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사환에게 화를 냈던 것처럼 불쾌해하고 화를 냈겠지요.(열왕기하 5:10-12) 그리고 죄인으로 규정돼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족이 얼마나 냉정한지, 그와 함께 있다가 자신들까지도 율법을 어긴 사람으로 내쳐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9:20-22) 그러니 가족도 그들과 함께 있었던 이, 즉 환자를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몸이 불편한 환자들에게 “내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고 말했을 법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베드자다는 체제의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체제의 작동 논리가 발현되는 장소, 곧 체제 자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전 중심 체제의 곳곳에서 ‘속죄’라는 종교적 가치와 제의용 동물이 상호 교환되는 상업적 종교의례가 일관성 있게 발현되고 있었는데, 베드자다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자다의 하층 연못에서도 구원과 속죄를 바라는 열망이 그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자원을 값으로 지불하게 만들고 종교 상품으로 교환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겠지요. 그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 천사가 물을 휘저을 때 제일 먼저 당신을 연못에 넣어주겠다며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듯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보니 중증 환자들을 ‘물에 넣어주는 사람’, 밑바닥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이강도(이정진)는 몰락해가는 청계천 금속 가공 상가를 돌아다니며 일수를 회수하는 사람입니다. 일수를 쓴 이들은 쉽게 상환기한을 넘겨버리고 이자는 원금의 열배로 금세 뛰어오릅니다. 강도는 일수를 줄 때 채무자가 상해보험에 가입하도록 요구하고 일수를 갚지 못하면 가차 없이 그의 신체를 훼손해 보험금을 가로챕니다. 일수를 빌려야 하는 이들, 낮은 신용등급을 가진 죄밖에 없는 그들은 그 죄값으로 신체가 영구히 훼손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과 별반 다른 삶의 조건을 갖지 않았을 사람인 것이지요. 형벌의 집행자인 이강도는 ‘빌린 돈’의 달콤함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잔인한 이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요즘의 불경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일수를 갚는 사람은 하나도 담아내지 않고, 일수를 못 갚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이들이 맞게 되는 지옥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것은 불경기 때문에 욕망을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불 능력은 축소됐지만, 이들로부터 이윤을 갈취하는 이들의 욕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욕망의 격차’가 자본주의 사회의 수많은 패배자와 무능력자를 생산해내게 됩니다. 이렇게 생산된 패배자와 무능력자들은 ‘일확천금’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 현실에서는 고리대금의 유혹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청계천 금속 상가와 대비되는 주변 건물들

한편, 영화는 종로나 명동의 고층빌딩과 청계천 금속 상가를 한 화면에 보여줌으로써 두 지역 간 건물의 높낮이가 얼마나 다른지, 외양에서 얼마나 큰 격차가 나는지 드러내 보입니다. 한때 청계천 금속 상가는 ‘잘 나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재개발만을 기다리는 곳이 된 느낌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베드자다 연못이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된 이중구조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연못은 성전 중심으로 배치되고 작동하는 종교-사회체제의 일부분입니다. 연못은 이 체제의 작동 논리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고 존재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베드자다 연못에서 소비되고 있는 희망과 꿈의 담론은 체제의 작동 논리와 전혀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하층 베드자다의 ‘신비한 힘’이 성전체제의 배치 속에서 등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구매능력을 가진 자만이 ‘속죄와 구원’을 향유할 수 있는 종교체제 안에서, 불구의 몸뚱어리만 남은 사람들은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죄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 가진 게 몸밖에 없어서 ‘속죄와 구원’을 구매할 수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죄인일 수밖에 없는 한 사내에게 예수는 “네 자리를 걷어서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자다에 일등으로 뛰어들 꿈을 꾸는 한 그는 악한 체제의 작동을 돕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그 꿈, 그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그는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의 불구인 몸을 근거로 그를 죄인이라고 규정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기준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고 하는 예수의 명령을 듣는 저에게, 예수의 명령이 “꿈 깨”라는 말로 들립니다. 악몽 그만 꾸라고, 악몽 속에서 취해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어찌 들으면, 예수의 이 말은 남의 심정도 모르고 질러대는 ‘훈계’나 ‘계몽적 언사’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을 따라 일어나 걸어간 그 병자가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그다지 밝은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 위로를 주는 말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전승들이 그를 먼발치에서 태평하게 훈계나 던져대는 사람이 아니라 붕괴돼 가는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과 함께 서서 이들을 지지해줬던 분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베드자다A를 떠난 병자가 결국 맞닥뜨리는 현실은 ‘자유’가 아니라 베드자다B, C, D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 곁에서 그 병자가 그를 죄인 취급하는 체제의 시선에 순응하지 않도록 그를 격려하고 일으켜주는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이 글은 한백교회 2012.9.30. 예배의 하늘뜻 나누기(요 5:1-9)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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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

―「사도행전」 16장 19절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는 한 세일즈맨의 자살에서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사회적 모순을 들추어냅니다. 유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비교적 좋은 직장의 세일즈맨이던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성실하게 일하면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아버지의 그 열정에 반항하며 탈선했고, 그 역시 대공황기를 맞아 직장에서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삶의 막바지에 몰린 그는 자식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고자 사고를 가장한 자살을 했는데 그 보험금을 탈 아들은 이미 그를 떠나버린 뒤였습니다.

지난 8월 22일 또 다른 세일즈맨이 칼을 휘둘러 전 직장동료 2명과 행인 2명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파리 같은 자기 목숨을 끊는 대신 자기를 해코지 한 전 동료들의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는 2005년 더 이상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직장인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7년 동안 그는 네 곳의 직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했고 마지막 직장에서 퇴사한 지난 4월, 그간의 노동의 대가로 남은 것은 4천만 원의 부채였습니다. 곧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노동의욕을 상실하였으며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 두 번의 직장은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휴대폰 미납요금을 독촉하는 일이었고, 모두 2년이 되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직전 고용계약이 해지되었습니다.

세 번째 직장도 휴대폰 미납요금을 받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역시 대기업에서 위탁받은 회사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개인사업자 형식으로 계약하여 실적에 따라 수당을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업무가 종료될 때 개인 실적과 팀별 실적을 공개하여 심한 노동압박을 가했습니다. 세 번째 직장에서 그는 불과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취업한 회사는 한 시중은행의 대출상품을 위탁판매하는 곳이었습니다. 한데 이 회사는 지금까지의 회사보다도 더 안 좋은 방식으로 노동자를 고용했습니다. 기본급은 없었고 실적만으로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그의 급여로는 기초생계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저리인 은행대출은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결국 이자율이 높은 카드빚을 져야 했고, 상환기일을 못 지켜 고리의 이자가 발생했습니다. 일할수록 그의 부채는 늘었고, 그나마 네 번째 작장을 그만둔 뒤 그는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최선을 다하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해서 몸이 부수어지도록 일했습니다. 회사의 고강도의 강박을 받으며 그의 전 노동력, 아니 몸 전체를 세일즈했습니다. 한데 7년 동안 그는 늘어만 가는, 아니 더 이상은 늘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한 부채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7년은 그의 노동의욕을 소진시켰고, 감정조절 능력도 분쇄시켜 버렸습니다. 하여 그는 더 이상 세일즈맨이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일즈맨은 7년 만에 사실상 죽어버린 셈입니다.

이것은 2천년대 우리의 삶을 휘둘리게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재앙인지를 보여주는 한 전형적 사례입니다. 그 체제는 모든 사람들을 세일즈휴먼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노동력을 팔고 몸을 팔며 끝내는 정신까지 팔아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력은 물론이고 몸과 정신까지 ‘소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 존재가 소진되어 버린 사람은 여간해선 회복이 어렵습니다. 왜냐면 존재의 바닥까지 소진된 그이는 회생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없을 만큼 자아가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최근 크게 늘어난 이른바 ‘묻지마 범죄’(방화, 폭력, 살인)는 그 붕괴의 한 실례입니다. 감정조절에 실패하여 모르는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살은 그 또 다른 예입니다.

또 많은 이들은 ‘언어 붕괴’ 양상을 보입니다. 횡설수설, 무차별적인 독설 등이 그 양상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합니다. 해서 사람들은 그이를 외면해 버리거나, 심지어는 가까지 못하도록 쫓아내기도 합니다.

해서 그런 이는 자기를 외면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면 지겹도록 따라다니면서 말을 겁니다. 어떤 때는 듣기 벅차게 존경을 표현하고 어떤 때는 분노를 표합니다. 그러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언어 붕괴 상황에 놓인 그는 뜬금없는 말을 하고 횡설수설하며 상대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존재의 소진 상황에 놓인 이들은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지만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주위사람에게 폭력으로 느껴질 만큼 지나치게 열정이 넘칩니다. 자녀나 아내, 혹은 약한 이웃이나 동료에 대한 상습적 폭력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비인간적 체제의 폭력적 할거는 이런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만났던 한 여자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그녀는 ‘점치는 귀신’이 들러붙은 소녀입니다. ‘점치는 귀신’의 그리스어는 프뉴마 퓌토나(pneuma puthōna)입니다. ‘퓌톤’(puthōn)이 ‘점쟁이 영’을 뜻하고 ‘퓌토네스’(puthōnes)가 ‘복화술사’를 가리키는 단어임을 감안하면, 이 소녀는 복화술처럼 말하여 점을 치게 하는 영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주인들’에 고용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주인이 그녀로 인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녀는 점치는 조합에 고용된 노예이고 그 조합의 운영자들이 점술사들의 점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사회는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 같은 이를 신령한 자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에는 그런 이가 많았습니다. 해서 그런 회사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불과 반세기 전 이 도시가 겪은 엄청난 재앙 때문입니다. 부르투스와 캇시우스가 이끄는 공화군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부대와 바로 이 도시 앞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입니다. 두 공화군 지도자가 자살하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되는데, 이때 양군의 전사자의 수가 무려 2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잘 훈련된 로마군끼리의 전쟁에서 전사자의 수가 이렇다면 이 도시 민간인의 피해는 훨씬 혹독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후 이 도시는 격변을 거치면서 바울 당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혹독한 역사, 그리고 빠른 변화는 이 도시 주민을 고강도의 집단적 스트레스 상황에 몰아넣은 것 같습니다. 해서 점에 대한 수요도 넘치게 많았고, 광인들 가운데 점치는 광인이 많았으며, 또 그이들을 고용한 회사들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그 광인들을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여겼다 해도 그이들은 몸과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녀가 몇날 며칠을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예요. 그분들이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고 외쳐댔다고 합니다(17절). 이에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에게 들러붙은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18절).

이상한 구절입니다. 귀신을 쫓아낸 것이 그녀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바울이 자기를 애틋이 여긴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언어 붕괴 상황에 있어서 그녀의 말투에 바울 일행이 괴로워했다는 것을 시사할 것입니다.

바울이 만난 소녀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전쟁으로, 전쟁의 상흔으로 영혼이 파괴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의 자본은 그런 이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것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파괴된 영혼으로까지 세일즈해야 하는 소녀, 그런 도시에서 바울은 바로 그런 이들의 해방을 뜻하는 복음을 전합니다. 비록 바울은 그 소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귀찮아했지만, 아무튼 그 도시는 그런 죽임의 시스템을 교란시켰던 바울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따라 죽임의 시스템과 맞서야 할 것입니다. 한데 과연 우리는 그 소녀를 귀찮아했던 바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여의도에서 칼부림한 청년을 보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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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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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식객
    2012.09.06 11:3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여의도 사건이 신자유적인 자본주의가 영육을 소진한 예라고 보는 각도가 신선합니다.
    언어 붕괴는 특별한 트라우마가 없다고 하더라도 넘쳐나는 정보에 빠져 사는 요즘 사람들이 보이는 흔한 증세인 것도 같습니다.....

2012.03.04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
성서 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사도들의 거절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사도행전 6:1-7 中]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무리의 일곱 지도자가 사도들을 찾아왔습니다. 늦은 저녁 그들이 조용히 사도들의 숙소를 찾아온 것은 굳이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인 듯합니다. 마침 사도들이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로 의회에서 장(杖)을 맞고(5:40) 병상에 누워있던 터라 ‘문병’을 왔다고 둘러댈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찾아온 ‘진짜 이유’는 문병에 있지 않아 보입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과부들이 겪었던 수모(6:1)에 대해 듣고 난 이후여서인지 이들 일곱 지도자의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듯합니다. 일곱 지도자의 대표인 스데반의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조용한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의 반응에 당황한 듯 보입니다. 일곱 지도자 중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돌아서서 고개를 젓고 있기도 합니다. 다음날, 사도들은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서두에 인용한 말들을 합니다. 대체 그날 저녁 사도들의 숙소에서 일곱 지도자는 어떤 말을 들었던 것일까요? 그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위에 인용된 사도들의 말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이러한 상황 재구성과 질문 모두 저의 상상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적 비약이 존재하는데 그 비약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통적 해석과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재구성해본 것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전통적 이해대로라면, 일곱 ‘집사’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그룹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차별 받았고, 그에 대한 사도들의 대응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사람을 임명하는 것으로 신앙 공동체 내부의 갈등은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해석에서 세 가지 지점에 물음표를 붙이고 싶습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집단의 일곱 지도자가 (이전에는 없다가) 성서에 언급된 사건 이후에 선출된 것일까, 공동체 안의 갈등은 ‘분배 불평등’ 때문에 초래됐을까, 일곱 집사의 선출로 신앙 공동체는 다시 평화를 회복한 것일까?(평화를 회복했다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 세 가지가 제가 갖는 의문들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 답은 모두 ‘아니오’입니다. 그리고 이 ‘아니오’라는 답 때문에 앞서 인용한 2-4절을 전통적 해석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행 6:1-7)은 보통 교회 안의 여러 직무 중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이해돼 왔습니다. 또는 사도들이 자신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헬라 이름을 가진 일곱 사람에게 나눠줌으로써 교회 안의 갈등을 해결하는 ‘훈훈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로나 집사라는 교회의 직분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본문으로 해석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2-4절은 교회 안의 갈등해결의 모범 사례, 직분 선출을 위한 기준 등으로 이해돼 왔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정한 해석의 틀을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전체를 교회의 성립과 복음의 확장 과정으로 보려는 틀입니다. 예수 사후의 기독교사(史)는 제도화된 교회형태와 공교회(Catholicism)라는 목표를 향해 수렴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갈등은 결국 ‘교회’를 완성하기 위한 체계 내적인 분화와 적응의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학이 성립하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초대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구제업무를 수행했는데, 사람이 많아지자 이 일 때문에 사도들이 시간을 많이 뺏기게 돼 자신의 업무에 충실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일곱 장로 혹은 집사를 선출하는 것은 사도들의 업무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일곱 사람이 그 일을 대신했기 때문에 사도들이 ‘방해받지 않고’ 자신들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었고, 그것은 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런 분화와 적응 행동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차분하게 본문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의 구제에서 헬라 말을 하는 과부들이 차별받았다고 하는데, 차별의 주체는 누구였던 것일까요? 분명히 1절에서는 ‘문제 상황’이 ‘분배의 불평등’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사도들이 제시하는 2-4절의 ‘해결책’에는 왜 분배방식 개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문제 상황이 분배 때문이었다면 왜 선출된 일곱 집사의 자격조건은 하나같이 분배 업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뿐일까요? 또한 “제자들을 모두 불러”(2절) “여러분 가운데서”(3절) 일할 사람 일곱을 뽑으라고 하고는 (모인 사람들 중에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과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이 함께 있었을 텐데) 뽑힌 사람은 왜 전부 헬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일까요? 한 마디로, 문제 상황과 해결책의 연결이 매우 껄끄럽게 돼있는데 대체 이 문제와 해결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해결방식은 이 껄끄러움을 ‘없는 셈’ 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목적론적 해석학’을 가져다가 성서는 교회와 신자들의 나아갈 바를 모범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목적론적 해석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 다양한 ‘단계’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들은 구체적 시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해석학은 성서를 통해 현대의 ‘삶의 지침’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 해석학의 입장에서, 사도행전에서 언급되는 이상적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단계들은 현재의 상황과 쉽게 동일시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각색돼 한국교회 안에서 소비되고 있는데, 주로 교회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출된 일곱 사람에 대한 묘사(3절,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를 근거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나 삶의 태도, 신앙양식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택받은 일꾼’은 이 일곱 집사처럼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으로 설교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이 본문이 ‘사역의 우선순위’를 규정하고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즉, 구제와 같은 봉사활동도 중요하지만 목회자들이 그것보다 우선시해야 할 일은 바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섬기는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이 주장은 양날의 검과 같이 사용되는데,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가르치는 목회자의 역할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해 장로들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기도와 말씀 섬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을 규율하는 논리로 사용됩니다. 이 논리를 따라 기도와 말씀 섬김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이 선한 봉사활동이라 해도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성서는 목회자 중심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스데반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이 쉽게 내파되고 맙니다. 위의 설명대로라면 스데반은 사도에 의해 임명된 집사 또는 장로입니다. 하지만 그는 평신도지 목회자와 같은 ‘급’이 아닙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기적을 행하였”으며(8절),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논쟁의 적수가 그를 “당해날 수 없었다”(10절)고 성서는 전합니다. 이런 표현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스데반을 사도와 동급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니 스데반을 봉사 업무를 전담하는 평신도라고 규정할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 그를 평신도로 본다면 평신도가 사도처럼 행동하는 것을 막을 근거가 없게 됩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그동안 읽어온 오늘의 성서본문에 번역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혹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공교회를 향해 가는 체계 내적 과정으로만 볼 수 없는 심각한 갈등의 흔적을 오늘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흔적을 ‘섬김(디아코니아, διακονίᾳ)’과 3절에 나오는 ‘이 일(τῆς χρείας ταύτης)’의 불일치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도들의 ‘섬김’과 3절의 ‘이 일’이 일치될 수 없는 것 때문에 공동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는 동사형으로 쓰인 것을 포함해 오늘의 본문 안에서만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사용에서 모두 다른 의미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서를 놓고 볼 때, 1절에서는 “구호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 2절에서는 “음식을 베풀다(식탁에서 봉사하다)”, 그리고 4절에서는 “말씀을 섬기는 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때 단어의 기본적 의미에 가장 충실한 용법은 2절의 ‘식탁 섬김(봉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구호제도 전통과 기독교 신앙 전통 속에서 이 단어가 갖는 ‘섬김’의 의미가 확장돼 ‘구제활동’이나 (섬김을 본연의 임무로 하는) ‘사역’, ‘직무’의 의미로 쓰이게 된 듯합니다. 오늘의 본문 안에 있는 세 번역은 이 한 단어가 갖는 다양한 번역 가능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번역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동번역, 개역개정과 같은 한글번역뿐만 아니라 NAS, NIV, RSV같은 영문번역들도 아래처럼 새번역 성서와 대동소이한 번역 방식을 보입니다.


1b

τδιακονίᾳ τκαθημεριν

2b

διακονεν τραπζαις

4

τδιακονίᾳ τολγου

새번역

날마다 구호음식을

나누어 받는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다

말씀을 섬기는

공동번역

그날그날의 식량 배급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다

전도하는

개역개정

매일의 구제

접대를 일삼다

말씀 사역

NASB

the daily serving of food

to serve tables

the ministry of the word

NIV

the daily distribution of food

to wait on tables

RSV

the daily distribution

to serve tables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껄끄러운 궁금증들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 본문에 나오는 문제 상황과 해결책이 잘 연결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 단어가 이처럼 일관성 없게 번역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 번역 때문에 구제 문제에서 시작해 뜬금없이 사도의 직무 문제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이 본문이 이해돼온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의 헬라어 ‘테스 크레이아스 타우테스(τῆς χρείας ταύτης)’는 4절의 “우리는 기도하는 과 말씀을 섬기는 에 헌신하겠습니다”와 대비시키기 위해 ‘이 일’로 번역됐으나, ‘크레이아스(χρείας)’의 원래 의미는 ‘요구’나 ‘필요’에 가깝습니다.[각주:1] 따라서 3절 후반부의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를 다시 번역하면 “그러면 그들에게 이 요구를 맡기고”가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들었던 요구는 무엇이고, 왜 그 요구를 자신들이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일곱 명을 선출해 그들에게 맡기려 한 것일까요?

오늘의 본문 안에서 각기 다르게 번역되고 있는 ‘디아코니아’를 구호제도나 직무라고 보는 해석 전통을 따르지 않고 원래의 의미에 가깝게 통일해서 ‘섬김’으로 바꿔보면 아래와 같습니다.(밑줄 친 곳이 다시 번역한 부분입니다.)
1a.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1b.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1c. 왜냐하면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섬김에서 무시 받았기 때문이다.
2a.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2b.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식탁들을 섬기는 것은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요구를 맡기고,
4. 그리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섬김을 계속하겠습니다."
5.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2b의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라는 표현입니다. 기존의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과 ‘식탁을 섬기는 일’이라고 해석해 마치 두 일이 대비되고 있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다시 번역해보면 그것은 식탁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식탁을 섬기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적 신념에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과 ‘식탁을 섬기는 일’을 원래 모순되는 것으로 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 2:42, 46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도행전의 문맥 속에서 식탁 섬김과 말씀 섬김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뤄질 때 공동체가 화합과 평화의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 사도행전 저자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위의 해석을 보면 사도들은 말씀 섬김과 식탁 섬김을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이로부터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그룹의 과부들이 매일의 식탁 섬김에서 무시 받았고(1절),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이에 대해 사도들에게 식탁 섬김에 함께 할 것을 요구했는데(3절), 사도들은 그 식탁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고 거절했습니다(2절). 그리고 식탁 섬김의 요구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일곱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맡김으로써(3절) 자신들은 신앙적 소신을 지키며 기도와 말씀 섬김을 계속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4절). 그렇다면 이때 사도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직무의 충돌이 아니라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의 식탁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적 소신에 위배된다는 점입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서의 다른 본문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깝게는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의 환상’ 에피소드를 들 수 있습니다. 환상 중에 하늘에서 베드로에게 음식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는데, 베드로가 보니 그것들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먹을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되고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세 번 거절합니다. 이 환상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예비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또한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3에는 바울이 ‘게바(베드로)’를 나무란 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유대인적 정체적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게바’라는 이름으로 베드로를 부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갈 2:9) 중 한 사람인 게바가 안디옥 교회에 방문했을 때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게바의 이 행위를 “위선”(13절)이라고 질타합니다.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 실천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과부들에 대한 식탁 섬김을 유대인인 열두 사도가 거절한 것은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역사적 정황으로 봤을 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은 종교적 열심에서나 유대인으로서의 자의식에서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보다 결코 뒤떨어지는 이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절에서 언급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은 주로 동로마의 헬라적 도시들의 디아스포라(유대인 이산집단) 출신으로, 종교적 열심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가 예수 운동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거나, 디아스포라에 소속돼 있을 때부터 이미 예수 운동을 접하고 매력을 느꼈던 이들로 추정됩니다. 그들이 헬라 말을 한다는 점 때문에 헬라문화에 우호적이며 따라서 성전제의와 안식일 규정 등 율법의 준수에서 느슨한 태도를 보이는 ‘혼합주의적’ 경향을 보였을 것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가 헬라 문화의 충격에 대응하는 방식은 흡수, 타협, 전통 고수 등 다각적이었으며, 그 양상은 동방과 서방의 디아스포라가 각기 달랐습니다. 동로마의 헬라적 도시들에 거주한 유대인들은 절대 다수가 유대적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했으며 팔레스틴의 유대인들보다도 더 성전과 율법에 대한 헌신이 뛰어났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귀환한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고 예수 운동에 소속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에 대한 태도에서 유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도에 의해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한 학자에 따르면, 팔레스틴 유대인들에게 ‘헬라인’이라는 호칭은 율법과 전통이 정한 신앙과 관습으로부터 이탈한 사람들을 뜻하는 ‘이방인’과 동의어였으며, 이는 곧 헬라인을 불경스런 자로 보는 경멸적 시선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학자는 70년 이전까지 ‘헬라파 사람들’이란 표현은 ‘정통’을 자처한 바리새주의를 제외하고 모든 다양한 사상과 관습을 포괄하는 일반적 용어였다고도 말합니다.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이로부터 1절에서 언급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은 적어도 유대 중심적 가치관에서 배제된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는 점은 추론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1절에 등장하는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과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은 애초부터 동등한 주체로 성서에 소개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보면, 유대 사회의 주류집단과 하위 주체화된 집단이 예수 운동 공동체 안에 미묘한 형태로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가정은 너무 순진한 시각일 것입니다. 설령 사도들이 식탁 섬김 참여 요청을 거절하기 전까지는 이 두 집단 간의 갈등이 가시화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 그 공동체 안에서는 (신앙 공동체 밖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존재를 평가절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삶의 방식이 일종의 상식처럼 작동하고 있었던 것을 아닐까요? 오늘의 본문은, 그 ‘위험한 상식’을 사도들이 견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동안 평화롭던 교회가 분배 문제로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집사 선출로 타개하는 것으로 이해됐던 오늘의 본문은 새롭게 읽혀야 합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집단에서 일곱 지도자를 선출(혹은 이미 존재하던 지도자를 승인)하는 것은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심지어 사도들마저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위험한 상식이 신앙 공동체를 그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일곱 지도자의 선출은 교회가 그 상식으로 인해 결국 분열돼나가는 상황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사도행전 주석서의 저자인 핸첸은 χρεία가 헬레니즘 시대에는 “궁핍, 필요”가 아니라 “직무, 일”을 의미했다고 주장했다. E. 핸첸 / 이선희·박경미 옮김, 『사도행전I』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404-405 참조. 그러나 그의 주장은 어떤 문헌 근거를 토대에 두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의 글에는 참고문헌이 소개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BDAG(바우어 헬라어 사전)의 ‘χρεία’ 항목을 보면 복음서와 다른 헬레니즘 문헌들에서 이 단어가 ‘필요’나 ‘요구’를 의미하는 용례를 다수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 2:45, 4:35, 20:34, 28:10에서 사용된 이 단어는 명백히 ‘필요’나 ‘요구’와 관련 있다. 다만 BDAG에서는 행 6:3절의 경우 ‘필요한 해동(an activity that is needed)’의 용례로 보고 ‘직무, 의무, 봉사’를 뜻하기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때 ‘직무’는 제도화된 형태의 직무를 뜻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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