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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19 [목회 마당] 하늘을 담는 그릇 (손성호)


하늘을 담는 그릇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다시 펜을 듭니다.

형!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의문부호였던 것이 나중에는 느낌표가 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어느새 자학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단어들을 잃어버렸다고. 그렇죠. 매주 설교 강단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저의 단어들이 제한되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판 무덤이었던 거지요.

칼 구스타프 융은, 사람은 ‘나’라는 자아를 가지고 바깥세상과 어울리며, 자기 마음 깊은 곳을 살핀다고 했죠. 그런데 그 자아(의식)속에는 ‘우리’라는 집단적 견해, 집단적 가치관 또는 행동규범이 들어와 있답니다. 사람들은 집단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이나 행동규범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거지요. 이렇게 집단속에 살아가는 가운데 그 집단이 요구하는 태도, 생각, 행동, 규범을 행하게 되는데 이를 분석심리학은 ‘페르소나’(persona, 가면)라 부릅니다. 결국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썼다 벗었다 하며 사람은 집단에 적응해 갑니다. 참 재미있어요.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는 person이라는 단어에 겨우 한 글자가 더해져 <연출된 인격>이라는 의미가 되어 진다니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스위스개혁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폴 투르니에’도 그의 책에서 이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몸에 붙은 위선의 껍질을 벗기고 인격을 보다 순수한 모습으로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충고합니다(폴 투르니에 ‘인간 그 가면과 진실’, 문예출판사). 인간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존재이니까요.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연출된 이미지들에 덧씌워져 있는지요. 그것을 보고는 ‘그를 안다’고 말하며 손가락질하는 ‘실수투성이들’ 말입니다.

설교단에 서 보셨으니 짐작하시겠지만. 저처럼 채 익지 않은 설교자의 단어라는 게 얼마나 건조하고 메마른지요. 그 제한된 단어들 안에 갇혀 계신 하나님께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이라는 단어 없이 설교할 궁리도 해봅니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저들이 사용하지 않는 ‘기독교 터미놀로지’를 이식하는 일 자체가 독선처럼 느껴지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소로우’의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저를 향해 직격탄을 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인간의 불안에 어필하고, 신은 인간의 거룩한 존재 ‘영혼’에 어필한다. 신과 종교를 리버스(reverse)시키지 말아야 하며, 신을 종교에 귀속시키지 말아야 하고, 나를 신과 종교 어느 편에 세우지 말아야 한다. ‘너와 나’가 아니라 ‘신과 나’이다. ‘나는 너’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도솔)

신과 나이다! ‘영혼이 주뼛 서는 것 같았다’던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말처럼(욥기 4:15) ‘신과 나’라는 새삼스런 인식이 잠들어 있던 영혼을 깨워줍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적당히 얼버무리며 살아온 저에게 비수처럼 꽂히는 겁니다. ‘나는 너이다!’

이제, 이 편지를 쓴 이유를 밝혀야지요. 상암동 하늘공원에 갔었습니다.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어요. 우선, 하늘공원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이장호 감독의 영화 ‘바보선언’에서 보았던 그 쓰레기 무덤이 한강을 지날 때마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바람개비들’과 함께 초록 숲으로 변해있는 거지요. 여기에, 하나 더. 미군 폭격장으로 사용됐던 ‘매향리’를 방문했을 때 한참동안 시선을 잡아끌었던 그 조형물 - 미사일 탄피와 잔해들로 만들었다는 ‘자유의 신 in Korea'의 작가 임옥상 선생이 아주 멋진 그릇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담는 그릇

광활한 대지에 올라 하늘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땅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풀을 만지고 또 만졌습니다.
하늘공원에서 희망을 보는 일이란 자연 그 자체를 보는 일입니다.
삶에 지친 이들이 이곳에서 희망을 보는 일이란,
죽었던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다는 것처럼
마음속의 희망이라는 이름에 씨앗을 뿌리내리게 하는 일입니다.
희망전망대도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해야겠습니다.
자연과 함께 어울리고 춤추고 노래하게 해야겠습니다.

(임옥상, 하늘을 담는 그릇 제작 프로젝트 북, 디자인세보)




임옥상 선생은 지난 해, 서울시 도시 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하늘공원 희망전망대’라 명명된 작품의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수없이 하늘공원을 오르내렸을까요.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춤추고 노래하는 전망대를 생각해낸 겁니다. 그 해 8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두 달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하니 이제 첫돌이 지났습니다. 작품명은 ‘하늘을 담는 그릇’이라 지었습니다. 철골로 지름 13.5미터, 높이 4.6미터의 그릇이 되었고, 바닥과 내부는 목재로 장식됐습니다.

장대한 스케일의 대지에 점 하나가 찍힙니다. 하늘공원을 찾은 사람이면 누구나 잠시 멈추어 쉴 수 있는 점. 그 점이 그릇이 되었습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채워지면 다시 버려 야 하는 그릇. 비우고 채우고, 채우고 비우고, 다시 비우고 채우는 순환의 축적이 바로 자연이지요. 그것이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된 것입니다. 또한 이 그릇은 성배입니다. 쓰레기 위에 씨앗이 날아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숲을 이루는 과정을 보아온 사람들에게 하늘을 향한 기원과 소망, 꿈이 담긴 그릇 말입니다. 그릇 주변에 뿌려진 등나무 씨앗에서 싹이 나면, 그릇은 초록빛 등나무 줄기가 벽이 되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어 버릴 것입니다.

임 선생은, 아홉 가지 생각들을 심어놓았습니다.

Thought_사상 : 낮은 자세에서 사물을 바라보다. Scale_크기 : 보란 듯이 우뚝 서 있기를 거부하다. Reconciliation_화해 :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땅에게 사과하다. Emptiness_여백 : 소유를 벗어난 비움, 부재의 미학을 실천하다. Space_공간 : 새로운 공간의 배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드는 문제이다. Time_시간 : 천천히 축적되는 시간의 기록을 만들다. Landscape_경관 : 장대한 스케일의 자연을 떠받든다. Ecology_생태 : 최소한의 인공물로 자연에게 고개 숙이다. Moderation_절제 : 인간의 오만과 자만을 버리고 최소한의 것을 추구하다.

이 그릇은 벽이 없습니다. 등나무 줄기가 자라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자연과 어우러져 공생하는 중에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완성’이라는 단어자체가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저는 또 거기서 교회당을 그려보았습니다. 고대인들은 신전을 만들 때, 벽은 높고 웅장하게 하되, 지붕을 얹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상과 단절하되 오직 하늘을 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거룩과 세속’ ‘미와 추’ ‘선과 악’ ‘호와 불호’ ‘성공과 실패’라는 ‘종교의 아집’을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그릇은 종교 이상입니다. 하늘을 향해 활짝 열어젖힌 땅의 예배자이며 동시에 그 어떤 벽도 가지지 않은 ‘나는 너이다’입니다.

마치 제가 ‘하늘을 담는 그릇’의 전도사가 되어 버린 것 같군요. 한걸음 한걸음 목재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아 오르며, 철골구조물을 잇는 굵은 철사 줄에 매달려 있는 ‘열쇠들’을 보았습니다. 제각각 사람들의 소원이 적혀 있습니다. 남산에서도 본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라도 한줄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들만 보였습니다. 열쇠들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곳, 그 골목길들을 말입니다.

요즘 기독교와 관련된 뉴스들을 보시며 형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 며칠 후, 저게 말했죠. ‘쓸개 빠진 놈이 되고나니 뭐든 다 받아들여지더라고’ 실제로 우리 몸에 쓸개라는 것이 ‘판단작용’과 관계된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냥 지나치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 분명 ‘극소수’일 텐데, 늘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한국교회’가 되어버립니다. 또 얼굴을 들 수 없는 소식들입니다. 불교 사찰을 찾아가 ‘여리고성 땅 밟기’를 재현했다는 이들. 기독교회 이름의 ‘은행’을 만들자며 ‘장충체육관’에 모여 ‘장로대통령을 주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외쳤다는 ‘발람의 후예들’ 아! 하나님께서 보시고, 당신 주먹으로 가슴을 치셨을 일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걸지 않고도, 세상과 소통하며, 신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리는 예배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온 몸으로, 그 삶으로 ‘생명’을 감사하고, ‘은혜’를 기억하고 있는데. 도대체 교회는 무얼 하고 있단 말입니까!

김교신 선생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의 교훈을 자아의 주판으로 적당히 할인하여 믿으려 함은 차라리 믿지 않음만 못하다. 모두 예수의 비상소집에 응하라!”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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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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