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아, 에큐메니칼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최근 우리는,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판에서 두 개의 굵직한 뉴스를 받아 들었다. 하나는, 새로운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 총무로 노르웨이 출신 신학자이며, 에큐메니칼 운동가인 올라프 F. 트베잍 목사가 한국교회가 추천한 후보자를 제치고 피선되었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단체의 2013년 차기 총회(10회) 장소가 사도바울이 회심한 곳으로 알려진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제치고, ‘부산’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두 사안은 지난 8월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에서 함께 다루어졌다.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여기에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었으며, 그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해서는 관심 밖이다. 다만, 투표가 있기 전,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까지 교회협의회(KNCC) 회장 자격으로 제네바를 방문했다는 뉴스를 접한 터라, 그와 국내 주요 교단 지도자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가는 자못 궁금하다. 최초의 한국인(혹은 아시아인) 총무 배출의 기대도 컸을 것이고, 더하여 차기총회 유치라는 성과를 기대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절반의 성공이다. 걱정은, 사분오열을 넘어 수만여 개신교회가 각각의 하나인 듯 존재하는 한국교회 풍토에서 과연 ‘에큐메니칼 총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을까. 준비과정에서 빚어질지도 모를 여러 형태의 상황 예측이 비단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겐 절반의 성공이었을지 모르나, WCC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차기 총무와 총회 장소 결정 사이에, 공통적으로 이 운동이 끌어안고 있는 고민과 열망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총무 올라프 목사는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대의 조직과 신도수를 보유하고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내의 다양한 교파들, 특히 에큐메니칼 운동 참여에 미온적이거나, 참여를 거부해온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들과 대화와 관계증진을 추진할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교회’야말로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이 네크워크가 지역교회 현장(local church-grass root)까지 닿아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교회들’ 사이에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어 보인다고 지적한다. 2천 년대에 들어서며, WCC는 ‘와이드 에큐메니즘’의 가치를 내걸고, 로마가톨릭, 복음주의권(Evangelical), 심지어 성령운동(Pentecostal) 교회들과의 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심지어 미국 내에서 이들 교회들의 성장은 괄목할만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성장을 나타낸 곳 또한 이들 교회들이다.

냉전 해체 이후, WCC가 표방하던 여러 진보적 가치들이 퇴색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위기를 맞이한 듯 보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무기력’이 하나의 보기라 하겠다. 운동의 새로운 추진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에큐메니즘은  한국 상황(context)에서 이해되는 범주보다 훨씬 다양하고 넓다. 당장, 조직신학과 선교학, 기독교윤리학, 성서신학/해석학, 실천신학까지 전 분야에 걸쳐져 있다. 이를 기껏해야 진보적 기독교운동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고 보면, 에큐메니칼을 표방하는 교회들조차 그 범주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보수적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에큐메니칼을 여전히 이념적 차원에서 이해하며, 그 활동들을 ‘좌경’으로 분류한다. 그뿐인가 심지어 종교다원주의 운동으로 매도하며,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이들도 있다. 참으로 편협하다. 선출된 신임 총무의 말대로, WCC는 보다 강하고, 풍부하고, 넓어지는 방향으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 연대와 선교를 위한 지평을 확장해 나갈 것이다. 때문에, 부산에서 열릴 차기 총회는 역대 가장 큰 규모의 세계교회 모임이 될 것이라 예측된다. 개최지 결정 후, 중앙위원회 대표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와 관심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한국교회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성장을 이루었다. 그 성장의 저변에 복음주의 교회와 성령운동 교회들의 중추적인 역할이 있었다. WCC는 한국교회의 사례를 통해, 대화를 위한 여러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한국교회가 벌여온 통일을 향한 다방면의 노력과 화해의 증언들을 수집할 기회가 될 것이다.”

또 하나,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그것’이 있다. 성령운동 교회로 분류되는 순복음교단(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이 정식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순복음교회가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자신들의 교회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는 알려진바 없다. 다만, 몇 차례 조용기 목사 주도로 국제적인 에큐메니칼 세미나와 프로그램이 개최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그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와이드 에큐메니즘’을 통해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확장과 안정을 추구하려는 WCC의 열망이, 차기 총무와 총회 장소 결정 모두에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본론이다. 이 뉴스가 목사인 나의 사역과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애초에 ‘에큐메니칼’이라는 단어 자체부터 와 닿지 않는다. 아무리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려 해도, 좀처럼 이해되지도, 이해를 시킬 수도 없다. 이러다가 영원히, 이 단어는 진보적 교회운동, 예언자적 참여운동과 동의어 수준에서, 저들이 구호로 사용하는 단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념어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정죄를 위한 하나의 기준어가 되거나!

매번, ‘에큐메니칼’을 주제로 한 대화나 세미나의 결론은 ‘교회 현장 속으로’이다. WCC도 마찬가지이다. 늘 ‘Go to the grass root, share with the local church'를 외친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사실, 우리는 매주일, 아니 매일, 설교를 하거나 성도들과 대화하면서, 성경공부나 각종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면서 부지불식간 이 운동의 여러 주제들과 마주치고 있다. 교인들은 여전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궁금해 한다. 왜 교회는 분열되었는가? 이를 궁금해 하고, 각 교파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 이해는 다분히 피상적이다. 심지어 자신이 속한 교파에 대한 이해나 관심도 식어가고 있다. 어느 상가교회 간판을 보니 교회 이름 밑에 이렇게 써있다. ‘우리교회는 사당동 총신대학교가 속한 교단의 교회입니다.’ 맙소사!!! 교인 중 한 사람이 내게 한 말이다. “사람들이 요즘은 성당이 훨씬 더 쿨(?)해 보인대요. 그 쪽 교인수가 늘어나는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이 짧은 문장 안에도 어떤‘에큐메니스트’가 들으면 두세 번 정도 탄식할만한 단어들이 있다. 뿐만 아니다. 현장 안에는 여전히 ‘전도’와 ‘선교’가 혼재되어 있고, ‘해외선교’와 ‘세계선교’가 아무 성찰 없이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문화선교’는 기껏해야 ‘경배와 찬양’ 주위를 맴돌며, 대형마트 문화센터와 비슷한 제목의 강좌들에 ‘신앙’이라는 단어가 덧붙여져 교회당 외벽에 나부끼고 있다.

기왕에, 2013년 WCC 총회가 결정되었으니 말인데, 난 정말 에큐메니칼 운동이 먼저 내 안을 관통하고, 우리 교회와 성도들 속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굳이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표방하는 여러 주제들이, 다양하게 설명되고, 실천되어서 하나의 건강한 교회운동으로 ‘흐름’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에큐메니칼’이라는 ‘거대한(?)’ 단어로부터 교회협의회, 총회, 노회, 교회, 현장(grass root)으로 나아가고,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다양한 활동들이 목사들과 선생들을 통해 ‘에큐메니칼적’으로 해석되어, 노회, 총회, 교회협의회로. 나아가 연합과 일치로. 종국에 요한복음 17:21과 에베소서 4:4-6 말씀에 이르기를 바라는 바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한복음 17:21).


ⓒ 웹진 <제3시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785)
특집 (8)
시평 (91)
목회 마당 (58)
신학 정보 (126)
사진에세이 (37)
비평의 눈 (63)
페미&퀴어 (20)
시선의 힘 (128)
소식 (150)
영화 읽기 (28)
신앙과 과학 (13)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16,680
Today : 289 Yesterday : 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