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신대는 ‘해석학과 윤리’를 개설했을까? (상)
: 이 냉소의 시대에 신학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I. 프롤로그: Come back home

한국으로 돌아간다. 거의 10년 만이다. 그 사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세월 따라 변해갔고, 당연히 시대에 대한 해석도,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도 신학도 그에 걸맞는 옷으로 새롭게 갈아입었다. 그간 정권이 두 번 바뀌었고, 두 번의 정권이 바뀌는 사이에 민주 개혁(?) 세력을 대변하던 전직 대통령 두 명이 유명을 달리했으며, 김수환, 강원용, 법정 같은 종교지도자들도 많은 이들의 아쉬움 속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 사이 광장은 파헤쳐졌고, 그 기간 동안 국토는 온통 공사판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 옛날 어느 시절처럼 사람들이 몸에 불을 지르고 옥상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엽기적 괴담, 그 옛적의 어느 시절처럼 사람들은 다시 봉기를 상상한다는 흉흉한 소문,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고 이미 게임 끝났다!’는 냉소까지…이상은 나의 귀국 소식을 전해들은 그곳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이 조언이라며 아주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이다. 

결론적으로 그 조언들을 종합하면, 10년 만에 돌아가는 조국은 10년 후의 그곳이 아니라, 30년 가까운 과거로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이 시간을 거슬러 내려간 그곳이다. 그것은 흡사 이런 느낌이다. 아주 예전에 태백 예수원에 갔던 적이 있었다. 태백으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어느 한 구간에서 열차가 거꾸로 갔었다. ‘스위치 백’이라 불리는 구간이었다. 고지에 도달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뒤로 간다는 안내방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가는 그 시간 동안 약간 어리둥절하고 불안했던 기억이 있다. 현재 내가 느끼는 감정이 꼭 그와 같다. 열차는 다행히 그 스위치 백 구간을 지나자 다시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예정시간보다 다소 늦었지만 태백역에 무사히 당도했다. 우리의 역사도 그럴 수 있을까? 이 ‘스위치 백’ 구간을 지나면 다시 우리는 앞을 향해 나가 고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II. 등위접속사 ‘And’의 용법

2014년 봄 학기부터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해석학과 윤리’라는 과목을 강의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었다. 한신대, 해석학, 윤리…얼핏 답이 뻔할 것 같은데, 들여다 볼수록 그것들이 잘 조합되지 않고, 그나마 합체된 모양새는 심하게 일그러져 보인다. 그런 혼돈이 내 안에서 일고 있는데, 강의목표와 내용을 제출하라 연락이 와 일단 이렇게 적어 보냈다.

본 강좌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하는 해석학과 선과 책임, 행위를 목표로 하는 윤리학을 하나의 제목으로 묶음으로써, 윤리학은 해석학의 도움으로 행위의 근거를 보다 확실한 토대위에 근거 지을 수 있고, 해석학은 윤리에 기대어 인간 실존의 문제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이를 위해 강좌는 크게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며 진행될 것이다. 강의 초반에 현대 윤리학 이론에 대한 지형을 개괄한 후, 고전적인 해석학이론들(슐라이에르마허-틸타이-하이데거-가다머-리꾀르)을 강의 중반부에 다루고, 강의 후반부에는 현대 해석학 이론들(푸코-데리다-바디우-라깡-지젝-레비나스)과 만난다. 초반에 익힌 윤리학 이론들이 어떻게 시대별로 등장하는 다양한 해석학이론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신학적 상상력은 무엇인지? 본 강좌가 수강생들에게 요구하는 최종 질문이자 목표이다. 

이렇게 호기에 찬 목소리로 말은 했지만, 나는 여전히 어떻게 해석학과 윤리를 한 공간에서 만나게 할지 감이 안 잡힌다. 한동안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이렇게 헤매는 이유가 다소 엉뚱하게 들릴런지도 모르겠지만 등위접속사 ‘and’ 때문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의 영문 제목도 기입하라고 적혀있어서, ‘해석학과 윤리’의 영문인 ‘Hermeneutics and Ethic’ 이라고 표기하는데, Hermeneutics과 Ethic사이에 있는 ‘and’가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나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사실, 영문법 상으로 그렇다. 등위접속사 문제는 토플이나 GRE 같은 영어시험을 치를 때 빈번하게 나오는 주요 문법문제 중 하나인데(내가 너무 그 시험들에 시달렸었나?), and, but, or 같은 등위 접속사는 속성상 그것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되는 단어의 구조, 품사, 성, 수, 격이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그 차이를 묻고 그것의 정확한 일치를 감시하는 것이 등위접속사의 역할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영어문장에서 등위접속사들을 만날 때마다 법정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눈을 가린 ‘법의 여신’ 손에 들리운 수평저울을 연상한다 (그 여신의 다른 한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었지 아마도). 그 수평저울 양쪽에 놓여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이었나? 그것은 다분히 감각적인 질감을 지닌 덩어리, 즉 양적 차원의 그 무엇이어야 한다. 등위접속사 ‘and’는 그 수평저울의 중앙과 같은 역할을 한다. 대상들이 지니는 질적인 차원을 제거하고 계량 가능한 상태로 만든 후에, 그것들을 동일한 평면상에 위치시킨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볼 때, 이해의 지평을 중시하는 해석학의 정적인 측면과 구체적 행위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윤리학의 역동적 측면은 등위접속사 ‘and’ 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계량화 되지 않고, 균질화 되지 않은 불완전한 성, 수, 격의 조합이다.
 
III. 아, 한신!

강의에 대한 구상을 하면서 부딪치는 또 다른 문제는 이런 불완전한 조합을 주최한 공간이 한신대라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신학계에서 한신대라는 기표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무엇인가? 마치 짜장과 짬뽕을 놓고 다투는 것처럼, 그래서 이제는 짬짜면이 등장해 양자의 논의를 희석시켰던 것처럼, 한신대의 정체성을 둘러싼 다양한 긍정적, 부정적 논의들, 그리고 문제를 희석시키는 시도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한신대를 둘러싸고 있는 마치 유령과도 같은 무엇인가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상수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한신대는 그 초심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이제 한신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닐까?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람들, 이제는 변해야 한다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에는 공히 한신대라는 기표가 상징하는 거부할 수 없는 기의, 즉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의 그 기원, 그리고 변화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변화의 대상이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볼 때 양자는 모두 그 한신대적인 것을 음으로 양으로 공유하고 있는 단일한(아니, 잡다한) 해석의 집합체일런지 모른다.

이렇듯, 마치 비행기가 버뮤다 삼각지대에 들어가면 계기판이 난동을 부려 방향을 상실한 채 허공을 헤매다 실종되는 것처럼, 해석과 윤리, 그리고 한신대라는 함의가 내뿜는 자기장 안에서 나는 지금 길을 잃고 갈 바를 몰라한다. 이 순간 문득 니나가 잡혀있는 마왕의 소굴로 달려가는, 대마왕의 손에서 니나를 구해내겠다고 큰 소리 치던, 날쌔고 용감한 어릴 적 보았던 만화 영화 속 주인공 폴이 지금의 길을 잃은 내 모습과 대비되면서 보고 싶어지는 이유는 왜일까?    

IV. 해석학적인 것 

돌이켜보면 미국 유학 10년 동안 나는 ‘탈이념, 즉 모두 다 성인(成人)이 되어버린 이 냉소의 시대에 신학은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를 놓고 무던히도 씨름하였다. 이제 논문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그 답을 찾아나? 스스로에게 묻다가 “개뿔~ 답은 무슨!”이라는 외마디 비명이 나지막이 새어 나와 화들짝 놀랐다. 주위를 황급히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들은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황혼이 되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날아오른다고 헤겔이 그랬다는데, 학위가 마무리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 황혼에 이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꿈꾸던 성숙의 경지도 여전히 요원하다. 이런 자괴감이 논문을 마무리 해야 하는 지난 몇 달간 내내 나를 가위눌리게 했다. 그러는 가운데 다음 학기부터 ‘해석학과 윤리’라는 과목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한신으로부터 전해 들었고,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신학은 이제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답이었다.

신학이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오래된 공리다.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훨씬 거슬러 올라가서는 어거스틴까지, 해석학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사상과 문화의 차이를 객관적 언어로 서술하려던 노력이었고, 푸코는 특별히 각 시대마다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해석의 감각적 현현을 에피스테메라 불렀다. 그것은 이성으로, 낭만으로, 이념으로, 감각으로, 체험으로, 구조로, 신화로 시시각각 다르게 불리어왔지만 그것들이 각자의 시대마다 소실점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소실점

근대 회화에서 소실점의 발견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나? 태초에 혼동가운데 ‘빛이 있으라!’고 외쳤던 신의 음성처럼 소실점은 카오스 안에 코스모스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소실점의 기본공식은 그것을 중심으로 원거리의 사물들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들은 크게 배치하는 원근 법칙이다. 특별히 회화에서는 그것을 사실주의라 부르는데, 근대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고전적 소실점의 발견은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향한 인지의 강도, 혹은 주체가 정복해야 하는 타자의 우선순위, 혹은 주체가 두려움을 느끼는 타자의 등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전적 소실점의 발견과 대비되는 반대 개념의 소실점도 등장했다. 19세기 낭만주의가 그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 사실주의적인 소실점의 원리와는 다르게 낭만주의의 그것은 오히려 멀리 있는 것에 대해 아우라를 부여하고, 가까이에 있는 것에는 의혹으로 맞선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억이 아닐까 싶다. 멀리 있는 기억은 사실은 그리 아름답지도 근사하지도 않았던 구질구질했던 현실의 그것이었을 텐데, 세월이 흘러 먼 훗날 그것을 회상했을 때 그것은 과거 현실의 그것보다는 꽤 근사하게 포장되어 우리들에게 전해져 온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움직이는 커다란 두 개의 축이라 할 수 있는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그 매트릭스에 걸려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두 세력에 대한 모독일까?

뭐니 뭐니 해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초강력 소실점은 이념이다. 이데올로기의 원급법! 그래도 다른 소실점들은 약간씩 겹치고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기억도 그렇고, 거리도 그렇고, 감정의 완급도 그렇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깨닫지 않았나? 세상사에서 두부모 자르듯 선명하게 구획되는 그것이 얼마나 되었나?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작동되는 이데올로기라는 소실점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우리를 가른다. 라깡이 말하는 ‘상상적 양자합’이 이를 잘 설명해주는 원리가 아닐까 싶다. 유아기 아가에게 엄마와 나는 일심동체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타자다. 설사 그것이 아버지여도 말이다. 아직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모른다. 그 아버지를 인정하면서 아기는 비로소 인간으로 거듭난다고 주장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에서 바라보는 기본적 인간이해다. 이데올로기적 소실점은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라깡이 지금의 남한사회를 바라본다면 이런 발언을 하지 않을까 싶다: “한쪽에는 좌빨, 빨갱이, 종북좌파, 다른 한편에는 수구골통! 남한 사회는 그 외 다른 이름이 필요치 않아 보인다. 최첨단 테크놀러지를 자랑하는 기술국 대한민국 사회의 집단무의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너무나 원초적인 (라깡적) 상상계속 유아다.”

10년간 조국을 떠나있었던 외부인의 관점에서 라깡이 했음직한 이 말을 좀더 부연하자면, 현재 한국사회는 오른쪽에 있는 아이들이 왼쪽에 있는 아이들보다 대중적 말싸움, 즉 대중선전전에서 승리한 듯 하다. 오른쪽에 서 있는 아이들은 세 가지 패를 갖고 왼쪽에 있는 아이들을 골탕 먹이는 데 반해, 왼쪽에 있는 아이들은 고작 ‘수구골통’ 외에는 상대편 애들을 열 받게 할 적절한 어휘를 고안해내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다. 원래는 왼쪽 동네 아이들이 말싸움에 훨씬 능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난 10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음 웹진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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