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과 복수



심범섭



   한국 사회에 고립화 경향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하며 이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없다는 사람이 많고, 이런 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진다고 하는데, 2014년 통계에서는 노인 100명 가운데 11명이 완전 고립 상태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경제불황으로 취업과 결혼 시기가 늦춰지고, 사별, 황혼 이혼, 기러기 가족 등의 이유가 더해져 현재 대한민국 4가구 중 1가구는 1인 가구라고 한다. 혼자 사는 사람은 전반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건강 상태가 더 안좋다고 한다.    

   고립화 경향을 보여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혼자 밥 먹는다’라는 뜻의 “혼밥”이다. 이 표현은 혼술 (혼자 술 마신다), 혼영 (혼자 영화 본다), 혼여 (혼자 여행간다) 등 혼자 활동함을 뜻하는 여러 표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혼밥 현상 자체는 단지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을 시간적 또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 같은 부정적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있는 여유를 즐기고 싶다 같은 이유로 자발적으로 혼밥을 선택한다. 하지만 원치 않는 고립이 혼밥 현상의 무시할 수 없는 한 원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혼밥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문재 시인은 “‘혼밥’과 시의 마음”이라는 글(2015년 12월 25일 경향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밥 먹듯이 해온 말이지만) 밥상이 둥근 이유는 여럿이 둘러앉아 함께 먹기 위해서다. 평화에는 평상에서 밥을 같이 먹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혼밥이 많은 사회는 공동체와 평화로부터 멀어지는 사회다. 사회가 없는 사회, 가장 나쁜 사회다.  


    이문재 시인은 혼자 밥 먹는 것이 “공동체와 평화로부터 멀어지는” 현상과 이어지는 이유를 진지하게 논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립과 사회의 평화를 관련짓는 이 구절은 나로 하여금 ‘왜 고립이 사회의 평화를 저해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보게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소박한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먼저 사람이 홀로 있다(고립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 생각해보니 적어도 다음 다섯 가지 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는 듯 하다. 첫째, 물리적인 혼자됨, 곧 옆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경우이다. 비록 모르는 사람, 말 한 마디 안나누는 사람이라도 그가 가까이 있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가장 근본적인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에 반응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한 서양 학자가 고독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곤충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해당 곤충 두 마리를 같이 있게 했을 때 혼자 둔 개체보다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읽은 글을 지금 찾지 못해 학자 이름, 글 제목 등 세부사항을 언급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같이 어울리면서 살면 더 오래 산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이때까지 이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인간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의미 덕분에 생물학적 수명도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학자는 자신의 곤충 실험 결과를 보면서, 의미에 대해 사유하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동물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며 인간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제기했다. 적적할 때 사람 많은 거리에 나가거나 찻집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는 것을 보면 이 주장은 맞는 것 같다. “늙을 수록 북적북적한 데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 수 있지만, 비록 모르는 사람이라도 사람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정신과 신체 건강에 좋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단순히 다른 사람 없는 곳에서 홀로 지내는 것은 고립의 한 의미있는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의미있는 인간 관계가 없다는 것이 홀로 있음의 한 가지 중요한 정의가 될 수 있다. 의미있는 인간 관계란 서로 관심을 기울이며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관계이다. 사람에 둘러싸여 살아도 이런 관계가 없으면 사람은 외로움을 느낀다. 이런 경우를 “홍수 때 오히려 먹을 물이 없다”, “군중 속의 고독” 같은 표현을 빌어 표현하기도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표현은 원래 데이빗 리즈만(David Riesman) 등이 1950년에 출간한 <고독한 군중(Lonely Crowd)>이라는 책에서 제시하는 개념에서 비롯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정의하는 군중 속의 고독이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군중 속의 고독”과 그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영문학사에서 이러한 관계적 고립을 가장 극명하게 형상화한 작품 가운데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단편 소설 “안타까운 경우 (A Painful Case)”라고 생각된다. 중년의 지성인 제임스 더피( James Duffy)는 어느 누구와도 친밀한 인간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몇 년 전 시니코(Sinico) 부인과 가까와진 적도 있었지만 부인이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절교하고 만다. 외로움에 괴로워하던 부인은 술에 의지해 버티다가 어느 날 드디어 자살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더피는 자신의 고립을 절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생의 향연으로부터 쫓겨난 (outcast from life’s feast)” 것으로 느낀다.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없이 사는 것은 “삶의 향연에서 쫓겨난” 채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셋째,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철학(가치관,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이 없을 때, 바꾸어 말해 근본적인 인식에서 이해받지 못할 때 고독을 느낀다. 누군가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가 내 가치관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근본 인생철학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훌륭한 친구와 결별하기도 한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여양이라는 사람이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알아준다”라는 표현은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철학을 이해한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 어떤 기독교인들이 종교관이 다른 가족보다 종교관이 같은 남과 더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도 근본 세계관이 같은가가 유대감에 의미있게 영향을 미침을 드러내는 한 예라고 할 것이다.  

    넷째, 우리는 우리와 ‘처지’가 같은 사람이 없을 때, 곧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때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처지라는 것은 삶의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더 일반적인 것일 수도 있고,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것처럼 더 구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라는 속담은 삶의 어떤 중요한 처지에 대한 이해를 이야기한다. 신경림 시인의 “겨울밤”이라는 시는 농촌 청년들의 고민과 좌절을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슬픔을 아는 건 우리뿐”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같은 처지에 있는 농촌 청년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의미와 이 집단 밖에 있는 사람은 이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동시에 전한다. 거의 20년 전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전화상담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선생님, 굶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상담가는 당황하면서 자신없게 이렇게 말했다. “밥인가요?” 그러자 전화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같이 굶어주는 사람이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크게 위로가 됨을 말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힘든 사람에게 그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고독감을 느낄 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우리는 신 또는 참된 자아 또는 실재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근원적 대상과 합일되지 못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이를 종교적 차원에서 느끼는 고립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종교를 믿거나 영적 수행을 실천하는 것은 이 차원에서 고립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약성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의 명령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신과 소통하기를 그치지 말라는, 곧 종교적 차원에서 고립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차원에서 고립을 벗어나는 것이 다른 차원에서 고립을 벗어나는 것과 갈등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라는 책을 쓴 김정운은 “자기 성찰은 외로움에서 온다. 외로운 시간을 가져봐야 한다. 주말에 반나절이라도 혼자 있어볼 필요가 있다. . . . 더 외로워야 덜 외롭다”라고 말한다. 물리적으로 혼자됨으로써 깊은 자아를 만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불교나 천주교 같은 종교에서는 제도적으로 사제들에게 결혼을 금함으로써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종교적 차원의 고립을 극복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사상을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이 다섯 가지 차원은 서로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꾸어 말해 이 가운데 사회적 통합과 평화를 더 직접적으로 저해하는 고립은 무엇일까? 나는 관계적인 고립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 철학적, 처지적, 종교적 차원의 고립은 관계적 고립보다 덜 일반적인 문제인 것 같다. 달리 말해, 대다수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 있지 못할 때 다른 측면에서 홀로 있을 때보다 더 불행하게 느끼는 듯 하다. 그리고 언론 보도에서도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관계망”이 약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계적 고립과 사회의 평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 먼저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이 누군가와 마음 편하게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게 규범 의식이나 윤리 의식이 퇴화하고 소통능력도 떨어지게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은 사람은 선량한 의도로 행동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낳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런 면에서라도 이문재 시인의 지적에 동의하게 된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것은, 관계적으로 고립되는 주된 이유가 가난하거나 힘이 없어서일 때 가진 자 또는 힘 있는 자의 명시적, 암시적 멸시가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는 더욱 확연한 현상인데, 이와 관련하여 김우창 선생이 18년 전에 하신 말씀을 한번 들어보자. 


    우리 사회에서 우리의 값어치(남의 눈에나 자신의 눈에나), 사람의 값은 권력과 부와 지위에 의하여 정하여진다. 이것들은 우리 사회가 믿는 유일한 가치이다. (도덕적 자기 정당성의 느낌도 우리가 남달리 믿는 가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가치의 추구는 사회 구조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 되기도 한다. 오만과 모멸의 사회 체계에서 가해지는 수모를 피하며 자존심을 유지하려면 최소한도의 부와 권력과 지위를 확보하여야 하는 것이다.[각주:1]  


    거의 20년 전 글이지만 한국 사회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과 돌봄을 받고 싶어하고, 어떤 의미에서 이를 생래적 권리(영어로 “birthright”로 표현하는)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대우를 충분히 받지 못할 때 사람은 분노하게 된다. 사실 제대로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게 모멸 받으면 분노하는 법이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적으로 고립된 사람이 모멸 받기까지 한다면 그의 가슴에 간과할 수 없는 분노가 도사리고 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관심 받지 못함과 멸시 당함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부당하게 대우받는다고 느끼며, 어떻게 해서든 이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약하기 때문에 짓밟히는 사람은 반드시 분노하고 반드시 “복수”를 생각한다.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복수심이 있는 사람은 심성이 거칠어져 그 말과 행동이 문득문득 차갑고 날이 서게 된다. 이런 면에서도 그의 현실은 평화를 이루는 좋은 조건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그가 보복 의식을 더 적극적으로 표출할 때 그 결과는 평화를 조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마련이다. 그런데 복수는 많은 경우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에게로 곧바로 향하지 못하고 자신보다도 더 약한 존재에게로 향함으로써 또 한번 부당한 상황을 낳고 만다. 여러 해 전 오키나와가 고향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안에서 주변인으로 차별받지만, 이들은 오키나와 남쪽에 있는 더 작은 섬들에 사는, 더 힘 없는 소수민족을 또 차별한다고 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장이 아내와 자식을 폭행함으로써 울분을 해소하는 것도 왜곡된 복수의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립과 복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나는 서정주의 어두운 시 “문둥이”에 한번 적용해 보고 싶다.  


문둥이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 시에 대한 전형적인 해석은 인터넷의 한 블로그에서 빌려온 다음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의 처지를 위해 죄 없는 목숨을 희생시키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문둥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본능적 삶의 애착과 원죄 의식을 말하고 있다.”[각주:2] 그러나 동시에 이 글에 소외된 자의 왜곡된 복수라는 의미를 담아 읽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아기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에 따라 아기를 죽이는 것을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모멸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속설 자체가 이미 복수를 위한 이론일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달리 말해, 이 시에서 우리는 고립되고 멸시받는 사람이 극단적인 분노 때문에 사회윤리의 제약에서 벗어난 보복의 이론을 만들고 이를 실천하면서 동시에 가책을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라스콜니코프도 같은 틀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매우 고립된 사람이었는데, 비범한 인간은 인류 전체의 진보를 위해 사회의 규범을 어겨도 된다는 철학으로 살인 강도를 감행한다. 고립되고 모멸받는 이가 보복의 이론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고립 현상과 그로 인한 갈등을 들여다 볼 때 ‘고립되고 억압받는 자의 복수’라는 개념이 가장 명심해야할 사항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사회의 고립화 경향을 막고, “오만과 모멸”의 문화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구체적이고 절차적인 답을 내놓을 능력도,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답을 내놓을 능력도 나에게는 없다. (현실적, 실천적 차원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와 종교기관과 봉사기관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대책을 개발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지하고 작은 개인으로서 소박하게 몇 가지 생각하는 바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우리 사회에 다른 사람의 사람다운 삶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미 고통받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에는 그 고통의 구체적 경험을 (완전히는 불가능하더라도) 가능한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관심을 낳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런 책임감은 나와 남의 존재가 그 근원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곧 남이 사실은 남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둘째, 부정적인 고립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거나, 부와 권력과 지위 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고방식에 저항하는 “이야기(narratives)”를 찾고 창조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역사와 문학과 영화를 비롯한 여러 서사 장르에서 유용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또 새로이 창작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인문 교육, 문화적 교양활동에 해당하는 일이다. 인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종교인들이 이런 노력에 큰 역할을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고립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에 대해 조금 상술하자면, 이런 이야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 고립을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원치않는 고립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또 하나는 누군가가 고립되어 있는 모습만을 그리는 이야기이다. 이 고립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나 같은 상황에 있다는 이야기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이 이야기가 허구라 하더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  

    세째, 고립된 사람 또는 모멸받는 사람이 사회 및 공동체에 잘 융화할 수 있도록 도울 때 이 사람을 단지 도와야 할 약자로 인지해서는 안될 것이다. 빈곤한 사람만이 아는 부요가 있다. 거창하게 이름을 붙이자면 “결여의 역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립의 고통을 겪은 사람은 함께 있음과 공동체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모멸에 분노해 본 사람은 존중과 공정함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깊이 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이런 차원에서 결여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없는 감각과 판단력과 언어가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만 있는 지혜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배우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이들의 자존감은 더 높아질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삶의 상황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더 깊고 예민하게 인식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고립화 현상을 사회 평화와 관련하여 복수라는 개념을 통해 생각해 보았다. 지금 우리 가까운 곳에 “해와 하늘빛이” 서러운 사람들,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김우창, “투명성: 경제 위기와 도덕”, <정치와 삶의 세계>, 삼인, 2000, p.31. 이 글은 원래 <신동아> 1998년 1월호에 실렸던 글이다. [본문으로]
  2. http://blog.naver.com/paulus1993/2206859935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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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의 젊은이, 오해를 넘어서

밥상공동체를 만드는 작은 예수 운동의 부활

 


김혜령[각주:1]
(이화여대)


 

          「구별짓기」의 저자 피에르 부르디외에 의하면, 인간사회의 위계적 계급질서는 단순히 자본의 소유여부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은 입는 옷에서부터 시작하여, 음악, 운동, 취미생활 등 비슷한 문화적 취향을 공유하며, 자기집단을 구별 짓는다. 이러한 취향의 차이야말로 인간사회의 복잡하고도 미시적인 사회적 계층들의 분화와 이들 간의 차별을 잘 설명해 내기에 부르디외는 이를 문화적 자본이라 부른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먹는 음식까지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음식을 볶을 때 버터를 사용하는지, 혹은 식용유나 마가린, 돼지기름을 대신 사용하는지, 곡물섭취는 빵을 주로 먹는지, 아니면 쌀과 파스타, 감자를 곁들이는지, 고기는 통조림이나 햄, 소시지와 같은 가공육을 주로 섭취하는지 아니면 고기를 직접 조리하여 먹는지, 고기 중에서도 소고기나 양고기, 말고기 혹은 생선과 같은 특정 고기를 주로 소비하는지, 조금 유치하리만큼 세세하게 조사가 펼쳐졌다. 어떠한 음식을 먹느냐가 한 사람의 계급과 신분, 직종 등을 구별하여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정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연구의 결과는 우리가 이미 상식적인 수준에서 공유하고 있는 경험이다. 점심시간, 누구와 무엇을 먹느냐가 이미 우리자신이 어떠한 사회적 존재인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신빙성 있는 자료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먹는 음식에 따라 나타나는 인간사회의 구별짓기는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 캠퍼스 안에서도 점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혼밥(혼자 밥먹기)이란 말이 존재하지 않았던 90년대 중반, 나는 유치하게도 매일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점심을 먹곤 했다. 학생식당이나 학교 앞 분식점 등을 우르르 몰려다니며 같은 밥을 먹었다. 물론 우리 중에도 잘사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음식이 아니라 옷에서나 구분이 될 뿐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서는 먹는 것으로 차이를 느껴본 적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학교 안에 고급식당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또한 학생들 각자의 시간표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혼밥은 요즘 대학생들의 일상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이제 혼밥은 학생들 간의 전공의 구별짓기, 계층의 구별짓기 혹은 우정의 구별짓기 등의 원인이 되었고, 친구들이 무엇을 누구와 먹는지 관심을 갖는 것이 때때로 지나친 간섭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된 듯하다.  


          문제는 이러한 혼밥 현상 이면에서 경제적 문제로 식사를 해결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부 학생들의 상황이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의 대학교회에서는 장학금의 일환으로 10만원치의 식권을 매학기 100명의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이를 원하는 학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계층의 학생들이 많이 다닌다고 소문(?)나 있는 우리대학 안에도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데에 고민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 다양한 이유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혼밥 현상은 이들의 존재를 감추며, 이들의 어려움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  


         다행인 것은 이러한 학우들의 문제를 함께 짊어지고 싶다는 학생들이 대학사회에 곳곳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2년전부터 시작한 ‘십시일밥’이라는 대학생 비영리봉사단체다. ‘십시일밥’은 학생들 스스로가 학생식당에서 일주일에 한 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돈을 모아 필요한 학우들에게 학생식당쿠폰으로 되돌려 주는 학생나눔자치활동으로서 한양대에서 시작하여 현재 전국적으로 십 여개의 대학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우리학교에서도 어린 여학생들이 십시일밥 로고가 새겨진 베이지색 유니폼을 입고 점심시간마다 생활관 학생식당의 까페와 한식코너, 교직원 식당에서 일을 한다. 사실 모두 집에서는 설거지 한 번 제대로 안하고 자란 귀한 딸들이기에 아직은 서툴고 힘들어 한다. 그래도 이번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열 명이 넘는 학우들에게 ‘우리와 같은 밥을 먹자’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 수 있게 된다는 기대 속에 땀을 흘리고 있다. 물론 이들의 봉사가 한 끼의 식사를 걱정 하는 학우들의 모두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는 대단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교내의 다른 학생들과 교수님들, 가족들에게 화려한 대학 캠퍼스 안에도 여전히 따뜻한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되고 있다. 또한 도움을 받게 될 학생들 역시 학점과 취업 경쟁에서 벗어나 그들의 삶을 함께 걱정해주고 지지해 주는 따뜻한 친구들이 같은 캠퍼스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삶의 작은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자 박재순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친 예수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가난으로 인해 이리저리 찢겨진 갈릴리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하나의 ‘밥상공동체’를 회복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가나안 혼인잔치의 포도주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최후의 만찬, 엠마오 도상에서의 식사 모두 이러한 나눔과 회복의 밥상공동체의 실행인 것이다.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일에서 인간은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사랑을 가꾸어나간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나는 ‘십시일밥’이라는 대학생 나눔활동이 우리 대학사회의 가장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는 ‘성만찬’을 세속적으로 부활시킨 작은 예수운동이라고 라고 부르고 싶다.  



십시일밥 누리집 http://www.tenspoon.org/



          물론 개인의 봉사로 가려져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음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5년 전 프랑스 유학시절 대학생 학생식당의 식사 가격은 3유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 그 양과 질은 7유로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음식이었다. 나머지 차액이 어디서 왔을까. 한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들을 건강하게 길러내고자 하는 사회의 구조적 의지가 그 4유로의 차액을 채워 풍성하고 건강하며, 평등하고 행복한 밥상공동체의 잔치로 젊은이들을 초대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 스스로가 연대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쪼개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또 그 사회 구조의 중요한 결정권을 만들어 내는 기성세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때다. 부끄럽게도 젊은이들 스스로가 어렵게 열어 초대한 잔치에 밭 갈러 간다고, 장가가서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고 핑계대기에는 이제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 웹진 <제3시대>

  1.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신학박사(윤리)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서울 향연감리교회에서 점심봉사를 하며 가끔 설교를 맡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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