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제삼시대 #시험방송] 4.13 총선과 '산당들' 그리고 전망

패널_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백찬홍(에코피스 아시아 상임이사)

  4. 13 총선결과는 우리 사회에 많은 의미를 던져 주었고, 그에 대한 분석은 다각도로 펼쳐졌는데요. 특히 이번 시험방송 에피소드에서는 2.73%의 득표를 한 기독자유당, 그리고 그로 대표되는 개신교 극우주의의 현상을 집중 진단해봅니다. 또한 종편과 더불어 대표적 극우주의 담론의 산실이자 ‘장소’로 자리매김한 ‘산당들(대형교회, 종편, 극우 단체)’에 대해 앞으로 우리는 어떤 관점과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백찬홍 선생과 김진호 연구실장의 날카로운 진단을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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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을 지지하는 '현실감각'



 

백승덕*


 

         이번 총선 출구조사 발표가 났을 때 ‘기타 정당’이 비례대표 2석 정도를 받을 수 있을 거란 기사를 보고 반가웠다. 녹색당이 드디어 원내진입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기타 정당’이 기독자유당이란 소식을 접하면서 기대가 경악으로 바뀌었다. 별다른 공약도 없이 ‘반동성애, 반이슬람, 간통죄 부활’을 내세우는 정당에 투표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  

          총선개표를 하는 동안 기독자유당 당사에서 당원들이 통성기도를 하던 장면은 두고두고 잊혀 지지 않을 것 같다. 정당득표율이 원내 진입을 위한 3%에 조금 못 미치는 2.7%에 머무르자 0.3%를 더 달라는 듯이 목소리 높여서 기도하는 정당을 보게 되다니. 2008년 총선 때도 통일교에서 당시 한나라당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전국 선거구에 빠짐없이 후보를 냈던 정당을 내놓았던 적이 있긴 했다. 기독자유당도 선거에 나왔다가 사라지는, 그렇고 그런 정당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아깝게(?) 원내진입에 실패했다. 기독자유당 세력과 교단이 달랐던 기독당이 표를 갈라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한국판 도널드 트럼프들이 국회에 들어갈 뻔했다.  

         비례대표 2석을 챙길 뻔했던 ‘기타 정당’이 다름 아닌 기독자유당이었단 사실이 알려지자 주위에선 진보정당들에게 반성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특히 녹색당이나 노동당처럼 1% 득표도 하지 못한 정당 지지자들의 ‘현실감각’이 공격 대상이었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지적부터 더불어민주당에 들어가서 블록을 만드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라는 주문까지 비판은 다양했다.

         녹색당 지지자로서, 이러한 비판은 곧 나의 ‘현실감각’을 돌아보라는 경고로 느껴진다.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이 0.7%인 정당을 지지한 정치인식이니 100점 만점에 0.7점짜리인 셈인가? 그러나 나는 다시 찍는대도 녹색당이다. 거기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힘! 힘! 힘!’만 이야기했던 총선


         사실, 이번 총선에서 기독자유당이 국회의원을 내지는 못했지만 총선 기간 중에 ‘기독자유당스러운’ 분위기는 이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공식 선거기간이 시작도 되기 전부터 이런 경향이 보였다. 지난 2월 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이 개신교 기도회에 나가서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한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라고 입을 모았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 자리에서 박영선 의원은 “동성애는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말하며 성소수자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그 정도로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같은 당의 표창원, 진선미 후보 역시 개신교 극우세력이 공격을 해오자 “동성애 확산엔 반대한다”거나 “동성애를 권장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대응을 했다. 동성애를 전염병처럼 취급했다는 점에서, 개신교 극우세력의 거센 비난공세에 맞춰서 정치력을 발휘했다고 보기가 곤란할 만큼 모욕적인 발언들이었다.

         선거가 진행되면서 이렇듯 혐오발언이 켜켜이 쌓여가니 기독자유당이 굳이 국회의원을 내지 않아도 될 법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 국회에 나오기도 전에 사망선고부터 받은 셈이다. 이 정도 수준의 차별과 혐오가 우리 사회의 평균값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현실 감각’이라면 그런 감각은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현실을 상수처럼 마냥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나는 병역거부자이다보니 성소수자들이 이번 선거를 통해 겪은 고립감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남북한이 그 어느 때보다 날이 서서 대치하고 있던 와중에 열렸던 선거였던 만큼 새누리당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등의 거대 정당들이 ‘안보는 보수’라는 입장에선 매한가지였다. 야당들의 경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그 전제는 굳건한 한미동맹이나 자주국방처럼 강력한 힘이었다. 힘에 기초해서 강력한 대북제재를 밀어붙이겠다는 점에선 3당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모양새다. 2007년 말 노무현 정부가 발표했던 대체복무제와 같은 계획은 아예 설 자리를 잃었다.

         이처럼 선거가 온통 ‘힘! 힘! 힘!’으로 돌아가다 보니 성소수자나 병역거부자처럼 ‘약한 자’들은 모욕당하고 배제당하더라도 조용히 있기를 요구받았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원외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 현실감각이 없다고 비판하던 목소리가 바로 그러한 요구의 민낯이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어떤 말들이 오가든지 간에, 그들의 관점에선 힘없는 약한 것들이 대세를 조용히 따랐어야 했다. 마치 전투 중엔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듯이 말이다.


전 지구적으로 움직이는 권력, 일국에 갇힌 대의제 정치


          이번 선거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약함에 대한 혐오가 두드러졌다. 김종인 대표의 컷오프나 안철수의 독자행보가 강단 있는 결단으로 주목 받을수록 정치에서 힘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더욱 커졌다. 역설적이게도 그 힘의 방향은 너무도 모호했다. 4년 전 선거 때는 그래도 경제민주화 같은 정책철학이 공감을 얻었지만 이번 선거에는 뚜렷한 공약도 없이 너나없이 자신이 배신을 당했다며 상대를 심판하겠다고 나섰을 뿐이다. 야권연대 같은 것 고려하지 않고 잘라낼 것은 확실히 잘라내면서 어떻게든 이긴다는 식의 생존주의가 이번 선거의 유일한 대의였다. 무엇을 잘라내겠다는 것인지 어떤 가치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이 천하삼분지계 같은 잔꾀만 넘쳐났다. 

         이처럼 공허하게 세력 과시만 했던 까닭은 역설적으로 대의제가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국회에서 원내 다수당을 차지한다고 해도 국민국가 단위 안에서 할 수 있을 일에는 한계가 커서 그저 자신들끼리 밥그릇 싸움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고 하자.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경제민주화를 얼마나 밀어붙일 수 있었을까? 법인세를 올려서 복지 예산을 늘리겠다고 하면 이미 초국적기업이 된 삼성과 현대 같은 재벌들은 회사를 해외로 이전하겠다며 협박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장 한진중공업만 해도 부산의 영도조선소를 대신해서 노동력이 훨씬 싼 필리핀의 수빅조선소로 일감을 몰아주려고 하지 않았나. 자본의 활동반경은 전지구적인데 비해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만들 수 있는 법안의 영향력은 국가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가 역력하다.

         자본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힘은 또한 어떠한가? 한쪽에는 미국이 전세계적인 패권전략의 일환으로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를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는 G2로 급부상한 중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자리를 잡고 있는 형국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싸드(THAAD) 배치와 관련해서 박근혜 정부가 미중 간의 외교전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던 사건이나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던 사건처럼 일국 단위를 넘어선 패권적 권력의 결정 앞에 정부뿐만 아니라 국회 역시도 속수무책인 경우가 허다하다.

         경제적‧군사적 권력이 초국적인 범위로 움직이는 동안 대의제 정치는 아직도 일국 단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국 국회가 보이는 무기력함은 여기에서 나온다. 자기들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느라 정치를 책임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책임질 수 있을 정치에 한계가 있으니 밥그릇 싸움에만 더욱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국민들 역시 이러한 현실을 직감하고 있다. 그러니 성소수자나 병역거부자와 같은 약한 자들을 위한 정치는 차례를 기다려도 결코 오지 않는다. 일국 단위의 대의제 정치 안에서 정치는 너무도 무력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세력 과시에만 끝없이 몰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1%도 안 되는 득표를 얻는 데 그친 녹색당을 계속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녹색당이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을 두고 고대 아테네 같은 소국에나 어울리는 소리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국 단위에 갇혀서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탓에 하는 소리다. 녹색당이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의 범위는 국민국가를 넘어서 최소한 동아시아 시민사회를 아우른다. 예컨대 정의당의 경우도 동북아 외교국방경제 협의체를 상설화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 간의 외교를 정례화하겠다는 구상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녹색당의 경우는 ‘동아시아 지속가능전환 포럼’을 대표공약으로 내놓았는데, 정부 간의 외교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시민사회 간의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초국적 권력을 견제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다른 정당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러한 구상대로라면 녹색당이 정권을 잡기 전에도 동아시아 지역의 시민사회가 단단한 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을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약한 자들이 지역적 연대를 통해서 전지구적인 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실질적인 힘을 얻을 길이 열리는 것이다.

         1%도 안 되는 득표를 얻은 정당의 구상이니만큼 현실이라는 장벽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직은 선언적인 구상들을 구현해나가기 위해선 전문가들도 많이 필요하고 세력도 어느 정도는 더 모아야 할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들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녹색당에 대한 지지를 거둘 수가 없다. 비록 힘이 약하지만 약한 자로서 살면서 전지구적인 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내놓은 정당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의 ‘현실 감각’ 안에선 그렇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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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진실



심범섭



    곧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다. 그래서 지금은 정치적 수사가 요란한 때이다. 분별있는 사람으로서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종종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자신의 작은 장점을 과장하고, 단점은 축소하거나 감추며, 개인의 야심을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위장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말이 흥성한 이런 때에 말에 대한 믿음은 허약해진다. 그리고 이런 때에 어떤 말이 참된 말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하는가를 떠나 진실한 말의 의미를 헤아려 보는 것도 마음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어떤 말이 참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똑똑하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길 가운데 하나는 분석철학에서 다루는 진실론(theory of truth)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것으로 상응론, 정합론, 실용론이 있고, 이 외에도 다른 이론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학술적으로 접근할 능력은 나에게 없으므로 이 글에서는 그저 나 자신의 주관적이고 소박한 견해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어떤 말을 참이라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는 네 가지 특성을 생각해 보았다. (이 글에서 “말”은 ‘언어’를 뜻하며 따라서 말과 글을 모두 가리킨다.)  


1


    말은 그 내용이 현실과 상응할 때 참이다. 예를 들어 “홍길동은 2016년 4월 4일 사과차를 마셨다”라는 문장이 있을 때, 실제로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이 위의 날에 사과차를 마셨다면 이 문장은 참이다. 말이 가리키는 현실이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 상황일 때 우리는 약속, 예측, 예언, 다짐, 계획, 선언 같은 범주를 다루게 된다. 미래를 향해 던지는 말은 미래가 이와 맞아떨어져야만 참이 된다. 많은 경우 이런 참을 얻으려면 말한 사람의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말의 내용이 현실과 상응할 때 우리는 이 말이 ‘정확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정확한 말이 정직한 말의 전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정직한 말은 많은 경우 정확한 말에 공평무사한 판단이 더해진 것이다. 이런 사실에 담긴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면 때로 자기도 모르게 정직하지 못하게 말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정확이 인지적인 개념인데 비해 정직이라는 개념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개념이므로 내가 한 말이 부정확했다라기보다 부정직했다라고 인식되는 것은 나를 더 난처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거나, 이미 한 말에 현실을 일치시키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거나, 훗날에 대한 예측이 (말한 이가 가만히 있어도) 맞아떨어져 말이 참이 되는 경우와는 다르게 우리는 때로 말 자체에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담은 이런 인식을 드러낸다.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신비롭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의 인과관계 논리로 설명할 수도 있다. 어떤 말이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미쳐 그 말의 내용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해주면 아이가 성격과 인격이 건전하며 성취도가 높은 사람이 된다는 주장을 우리는 듣는다. 더불어 악담과 저주의 말이 한 사람을 절망으로,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말은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현실이 되지 않는다. “내 국민은행 통장에 오늘 10억원이 들어온다”고 내가10억번을 말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때로 말이 새로운 현실을 낳아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참이 되는 경우에 감탄하고 때로 그러지 못함에 실망하면서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정 말이 기적처럼 현실을 창조해내기를 소망하는 듯 하다. 동화에 가끔 나오는 ‘소원을 말해 봐’ 모티프는 이런 소망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소망이 가장 거창한 차원에서 표현된 것이 히브리 (구약) 성서 <창세기> 제일 처음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에서 신이 말로써 천지를 창조하는 장면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본다.    


2


    어떤 말의 표면적 의미가 현실과 상응하지는 않지만 삶이나 인간의 이치를 맞게 전할 때 우리는 이런 말에서도 참을 인지한다. 이런 인식이 널리 정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는 소설 같은 장르가 “개연성 있는 허구” 또는 “가공의 진실”이라는 주장을 우리가 얼른 받아들인다는 사실인 듯 하다. 전설, 신화, 우화 등도 사실이 아닌 언어로 진실을 전달하는 방식이며, 속담에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나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처럼) 이러한 예가 많다. 이러한 언술을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숨은 원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해석의 가능성은 여러 가지로 열려 있으며, 또한 누가 해석하는가가 한 해석이 사회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어떤 말이 전하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데 권력과 권위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언술 자체에 크고 무거운 권위가 부여되어 있을 경우에는 이 언술을 표면적인 의미로,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사실성은 인정하지 않고 진실만을 찾아 이해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대한 접근법이다. 예를 들어 마틴 루터(1483-1546)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를 이렇게 비판했다고 한다. “이 바보는 천문학이라는 과학 전체를 뒤집고 싶어한다. 하지만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명령한 것이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각주:1] 루터처럼 해석한 힘있는 자들이 코페르니쿠스처럼 다른 견해를 주장한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론 루터 자신은 지동설 주장자를 물리적으로 박해하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도 교회 당국에 의해 처형되지 않고 병으로 사망했다). 오늘날에도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성서에 대해 서로 차분하게 대화하기가 늘 쉽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실 경험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로 전하기는 매우 어렵다. 언어의 정확함이란 어디까지나 타협의 범주이다. 우리는 인식과 기억과 언어의 한계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옆집 사는 사람이 오늘 한 평범한 일도 아주 정확하게 말로 재현하는 건 힘든 일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허구를 통해서도 진실을 전하는 언어의 차원이 있음에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자서전 대신 자전적 소설을 쓰겠다는 말을 할 때 나는 그가 (예술적 형상화에 대한 의욕이 있어서겠지만 동시에) 개인사를 정확하게 기억해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 저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3


   어떤 말이 평소에는 보기 힘든 인간의 더 ‘정직한’ 모습을 보여줄 때 이런 말을 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감정이나 소망 등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말을 하기도 한다. 비록 말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절실한 심정이 인간 본성을 더 깊이 깨우쳐 준다. 이런 말은 김춘수 시인이 쓴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의 깊이”에서 우러나온다고 할 것이다 (“악마의 총탄에 딸을 잃은 부다페스트의 양친과 함께 / 인간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고 통곡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예 가운데 하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애인에게 바치는 찬사일 것이다.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 같은 말에 들어있는 최상급 표현은 이 안에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에 따르는 비교가 포함되어 있다고 받아들이면 안된다. 이런 최상급은 일상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을 가리키기 위해 극한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말은 실증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고백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라는 말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오래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불가능이 없다고? 그러면 럭비 공으로 농구공처럼 드리블을 해보시지?”라는 유머를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에 절실한 내적 경험이 담겨있다면 이 말은 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소설가 윌리엄 마치(William March 1893-1954)가 쓴 단편 “자그마한 아내 (The Little Wife)”에서 우리는 이러한 언어의 슬픈 예를 만난다.[각주:2] 회사 일로 출장 중이던 조 힝클리는 아내 베시가 출산 후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오른다. 기차 안에서 그는 두번째 전보를 받는데 여기에는 아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어있다. 조도 이를 짐작하고 차마 전보를 꺼내서 읽지 못하고 찢어서 내버리고 만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가까운 곳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기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내가 방금 첫 출산을 했는데 산모도 아기도 모두 건강하다고 말하고 자기가 아내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연애했는지를, 지금까지 결혼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술에 취하거나 정신이 나갔거나 마약에 취한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이다. 그러나 조에게는 자신이 베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그녀가 안전하지 않을까하는 느낌이 있다. 열차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고 조는 역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장모를 만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거짓말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더는 베시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서 그녀를 살아있게 할 수 없었다.”[각주:3]  

    조 힝클리는 아내가 아이를 낳고 아주 건강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은 현실과 상응하는가의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점에서 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아내의 죽음에 깊이 절망하는 마음, 아내의 죽음을 부인하고 싶은 간절한 심정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을 느낀다. 그가 미친 듯이 쏟아놓는 출혈같은 말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고 통곡”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참된 말이라 할 수 있다. <논어> “태백편”에서 증자는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라고 말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모든 욕심에서 자유로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착한 말도 진실된 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절명하기 전 외쳤다고 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마태복음 27:46)라는 말도 절망의 극한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참된 말이 아니겠는가.  


4


    어떤 말이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을 비범하게 증진시킬 때, 곧 우리 영혼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할 때 이런 말을 참된 말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쓴 <향연>에서 알시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칭송하면서 그의 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하는 말은, 그냥 띄엄띄엄 들어도, 더구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데다가 그 사람이 그 말을 아무리 불완전하게 전할지라도, 그리고 듣는 이가 남자든 여자든 어린애든 간에 그 사람의 영혼을 깜짝 놀라게 하고 그 영혼을 사로잡아 버립니다.[각주:4]  


    이 인용문에서 부각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말은 듣는 사람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영혼에 충격을 준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을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분적으로, 그것도 또 부실하게 전해듣는다는 설정이 이런 뜻을 전한다. 같은 의미는 듣는 사람이 “어린애”라도 그 영향력에 차이가 없다는 말에서도 얻을 수 있다. 어린애는 아직 인지능력이 부족하여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 어른보다도 떨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이해하지 못해도 영혼을 일깨우고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소크라테스의 말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언어가 전달하는 것에 특정한 정보, 말하는 이의 생각, 정서, 사회문화적 배경, 사람됨 등이 있다고 할 때 소크라테스의 말이 지니는 마력은 그의 사람됨, 곧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의 말에는 우리 영혼의 힘이 실리며 소크라테스의 말은 그의 심오한 영혼에서 태어나 비범한 힘을 지닌다고 이해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예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때로 우리가 누구의 말에 영향을 받는 이유는 그 말의 구체적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말이 일으키는 어떤 정신(영혼)의 울림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말은 그 말을 한 사람의 정신의 힘을 싣고 어떤 “울림의 장(field of resonance)”을 형성하면서 듣는 사람에게 다가가는데, 그 말에 영향받는다는 것은 듣는 사람의 정신이 이 장에 포섭되어 같은 방식으로 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울림이 우리 영혼의 눈을 새로이 띄워 주어 더 고결한 경지에 이를 때 이 울림을 일으킨 말을 참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것이 있는데, 이 말이 가리킬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여기에서 논의하는, 말이 영혼을 고양시키는 경우는 아니라도 하더라도 이러한 경우를 포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곧 빚진 사람이 빚 받을 사람한테 한 어떤 말이 그의 영혼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강렬한 감동을 일으켜 경제적인 차원의 천냥 손해가 더는 중요하지 않다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말하는 사람의 사람됨과 상관없이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영혼이 고양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8세기 일본의 선승 반잔이 깨달음을 얻은 계기가 이러한 경우의 한 극단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반잔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러 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 시장을 걸어가는데 옆에 있는 푸줏간에서 주인과 손님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손님이 말했다. “고기 이 집에서 제일 좋은 걸로 주시오.” 그러자 주인이 맞받아쳤다. “우리 집에는 제일 좋은 고기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집 고기는 모두 다 제일 좋은 고기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반잔은 득도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가장 좋은 순간임을 깨달았다. 푸줏간 주인이 한 말은 장삿꾼의 닳아빠진, 사실성도 떨어지는 말이었지만 반잔에게는 존재의 본질을 짚어주는 지혜의 말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그에게 깨달음을 간절히 원하는 수도자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우리의 본질적 생명력을 증진시키는 언어는 쉽게 마주치기가 어려운데,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이런 언어를 꾸준히 듣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이런 언어를 듣기를 원한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설교뿐만 아니라 종교생활 전반을 통해 이런 언어를 만나기를 원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4:8에서 예수는 “내가 . . . 참이요 생명이니”라고 말하고, 같은 책 10:10에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언어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영혼을 더 풍성하게 하는 말, 그래서 참된 말을 나누는 것이 기독교를 믿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맺는 말


    비록 많은 경우 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항상 진실을 원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럴수록 진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가치있다고 할 것이다. 비단 지금이 선거철이어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이른 바 ‘저신뢰 사회’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사기공화국이다”라는 심한 표현도 쓴다), 그래서 의심과 두려움이 많은 사회이기 때문에 참에 대해서 고찰해 보는 것이 더욱 의미있지 않나 생각한다. 진실에는 말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도 관련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진실된 말에 대해서 대강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듣는 말의 진실성을 따지는 것은 우리에게 진실된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성찰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터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언어가 범람한다면 그것은 말하는 이들의 천박함과 위선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깊이와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어서가 아닐까?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 볼 문제이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칼 세이건(Carl Sagan)의 Cosmos p.52에서 재인용(Ballantine Books, 1980). [본문으로]
  2. <20세기 영미 단편 소설 (The 20th Century English-American Short Stories)>, 양병택 편집, 서울: 신아사, 2013년, pp. 264-277. [본문으로]
  3. 같은 책, p.276. [본문으로]
  4. 작품 구절 번호 215c-d. 벤자민 조웟(Benjamin Jowett)의 영어 번역을 내가 우리말로 옮긴 것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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