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카피하다>는 가벼운 영화이다.
영화의 소재는 흔하디 흔한 남녀간의 사랑이다. 더욱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론처럼 되어있는 여자는 감성적이며 사랑만을 간구하고 남자는 현학적이며 사랑에 무감 하다는 식의
고정된 성 역할을 대변하는 두 남녀의 양 많은 대사가 영화 끝까지 이어지는, 그야말로
자막 읽기에 바쁜 영화다.
물론 고전적인 남녀간의 사랑과 갈등만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 <certified copy>가 암시 하듯 ‘오리지널’과 ‘카피’라는 매우 현대적인
화두가 영화 전반을 장식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랑을 카피하다>는 가벼운 영화이다.
대부분의 다중적 의미를 지닌 작품들이 그렇듯 해석과 결론의 몫은 관객의 것이기 때문이다. 혹 감독이 결론지어 주지 않았다고 해서 내 몫에 버거워 할 필요는 없다.
결말은 열려 있고 해석은 자기가 보이는 것 만 큼 만 하면 된다.
더욱이 내 해석이 감독의 의도와는 다른 무엇이면 어쩌나 하는 기우도 필요 없다.
그것 또한 ‘원본’에 대한 한물간 중압감이다.
바로 이 영화 원 제목이 <공인된 카피>인데 뭐가 문제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카피하다>는 매력적이다.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와 남자배우 윌리엄 쉬멜의 안정적인 중년의 모습과 자연스런 연기도 좋거니와 소재와 대사를 넘어 영화라는 형식 전체를 사용하여 삶과 기억의 복제들을 풀어내며 관객들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 하는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치기가 매력적이다.
한 영국 작가와 그 작가의 팬인 한 프랑스 여인의 만남으로 영화는 시작 되지만
투스카니 시골 마을로 여행을 하게 되면서 그 둘이 원래 부부였는지 부부인 척 하는 건지
모를 야릇한 상황으로 끝을 맺는다.
부부라 해도 좋고 역할극을 했다 해도 좋을 극의 흐름이 이어 지면서 그 사이에 감독이
보물찾기처럼 숨겨 놓은 ‘카피’를 의미하는 장면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영국작가 제임스 밀러의 강연이 열리는 강단 전면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을 기다리는 마이크와 주인공이 쓴 책 <copie conforme> 이 보인다.
책 표지는 다비드상 얼굴 두 개가 쌍둥이처럼 마주 보고 있는 디자인이다.
한 동안 주인공이 오지 않고 정지된 공간만이 비춰진다.
이 한 장면으로 앞으로 이 영화의 소재는 그 책과 연관된 ‘카피’의 문제가 될 것이며
별 이유 없이 강연에 늦고도 태연하고 지성적인 남자 주인공의 모습에서 그가
자신의 행위나 생각에 대해 완고한 사람임을 암시한다.
이런 남자 주인공 밀러의 완고함은 영화 마지막 부분 화장실 거울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이 영화는 거울에 비취는 모습으로써 ‘복제’의 의미를 상징하는 듯 한 장면들이 있는데
처음 것은 프랑스 여인의 골동품 가게에서 둘이 대화할 때 거울에 비취는 그녀의 모습이고
다음은 분수대 동상 앞에서 프랑스 여인이 한 중년의 부부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벽에 놓인 거울과 오토바이 사이드 미러에 동시에 비춰지는 장면이다.
두 장면 모두 남자는 바라 볼 뿐이고 여자가 비춰지는데 그건 아마도 ‘복제’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남자 주인공 밀러의 시각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벽에 있는 거울과 사이드 미러에 두가지로 보이는 장면은 더욱 복제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장면은 거울은 보이지 않고 거울을 보는 남녀의 표정만이
보이는 씬인데 이 거울씬은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가 극명하게 표현된다.
여자의 경우, 그녀는 거울을 보며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상기된 얼굴로
새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화려한 귀걸이를 이것저것 대어본다. 마치 처음 만난 그 때의 설레임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그녀는 그를 붙잡고 싶어한다.
반면 남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표정을 가늠할 수 없다.
사랑의 원본으로 되돌아 가고 싶어하는 여자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표정은 그에
부응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에게 예쁘게 보여지려는 이유만으로 거울 앞에 자신을 카피하고 남자는 그저 볼 일을 보는 도중 앞의 거울을 대할 뿐이다.
이렇게 감독은 거울을 이용하여 복제의 의미와 남녀간의 심리의 전형을 표현하려한다.
한편 거울이 ‘시각적인 복제’를 말 한다면
카페에서 남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던 플로렌스에서의 어느 모자의 모습을 설명하는 부분은 기억에 의한 ‘언어적 복제’를 의미한다. 멀찌감치 걷고 있었다는 모자의 모습과
다비드상 앞에서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엄마는 아들에게 그 상은 복제이고 원본은 아카데미아에 있다고 말했을 거라는, 남자의 상상과 기억이 섞인 설명을 들었을 때 여자는 그 것이 자신과 아들의 모습이었음을 알아챈다. 그리곤 얼굴이 굳어지며 눈물을 흘린다. 남자에 의해 언어로 카피 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수치스러워서였을까?
아님 기억을 핑계로 하는 남자의 덧붙인 상상이 부당하다고 느껴서였을까? 아님 영화 속 대사 그대로 힘든 시기였던 그 때가 생각나서 그랬을까?
카피와 변형에 대해 관대한 남자는 다비드상 앞에 있던 모자의 들리지 않는 대화를 자신 스스로 상상하여 완성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반면
카피에 대해 그리고 변화에 대해 부정적인 여자는 오리지날 격인 자신의 모습에 덧붙여지는 상상과 변형을 동반하는 남자의 언어적 카피가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세 쌍의 부부는 바로 주인공 남녀의 ‘자아의 복제’일 수 있다.
이들 세 쌍의 부부로 인해 주인공 남녀는 더욱더 부부 역할에 빠져 들 수 있었는데
이제 갓 결혼식을 올리는 젊은 신혼부부는 함께 사진을 찍을 것을 간청하기도 하고 야외에서의 피로연 모습이 보여지기도 하면서 풋풋한 주인공남녀의 젊은 사랑을 재연하고,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한 프랑스 중년 부부는 밀러에게 부부간의 필요한 조언을 건낼 만큼
완숙한 중년의 사랑을 재연한다. 그리고 노파 부부는 두 주인공에 앞서 걸으며 호텔에 까지 이르게 한다. 다름 아닌 완벽한 부부의 재연 공간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영화에는 본다는 것의 불안정함 즉 모두들 원본이라고 믿는 것들의 허술함과
왜곡현상을 암시하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먼저 카페 여주인이 두 남녀를 부부라고
확신하는 부분이다. 두 남녀는 영어로 이야기 하였고 카페 여주인은 영어를 모르는 이탈리아인이 건만 그들을 부부라고 확신하며 주인공 여자로 하여금 역할극을 시작하게 만든다.
다음은 분수대에서 만난 중년 부부 중 남편이 소란스럽게 전화를 하는 장면인데
화면을 등진채 부인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여서 처음 얼마간은 관객으로 하여금 남편이 부인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남자가 걷기 시작하면서 그 것이 전화 통화였음을 뒤 늦게 보여 준다.
또 다른 장면은 영화 후반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버린 여자를 찾기 위해 남자는 성당문을 열어 어두운 실내를 들여다 본다. 너무 짧은 순간이어서 의자에 않아 있던 사람의 뒷 모습이 주인공 여자 였는지 관객은 확인할 시간이 모자랐건만 남자는 여자가 기도를 하고 있던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여자는 가방에서 자신의 브래지어를 들여보이며 답답했던 것을
벗으러 성당에 들어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영화는 원본과 복제, 확신과 왜곡, 또 그것들의 혼동을 표현할 수 있는 영화적 방법을 동원해 곳곳에 배치해 놓았는데 압권은 사랑을 빙자한 두 남녀의 역할극 놀이에 있다.
그들이 원래 부부였을까. 아님 부부인척 한 남남이었을까.
전체적인 흐름으로 봐선 부부 역할극을 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부부만이 할 수 있는 매우 사적이고 감정적인 대화들이 그들이 부부임을 주장해도 무방하게 만든다. 결국 부부라 해도 부부인척 했다 해도 영화는 달라질 것이 없다.
오히려 감독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들이 부부였다면 남남인척 만나는 부분이 카피이고 부부가 아니였다면 부부 행세를 한
부분이 카피이다.
감독은 주연을 통해, 조연을 통해, 소품을 통해, 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그러나
강권하지 않는 가벼움의 형태로 자신의 것을 말하고자 한다.
남자 주인공 밀러가 쓴 책의 바뀐 원제목은 <원본은 잊고 질 좋은 짝퉁을 사라>였다.
이건 그야말로 감독의 의도를 직설하는 것이 아니였을까?
<공인된 카피>이던 <원본은 잊고 질 좋은 짝퉁을 사라>이던 이들 제목만 보더라도
오리지날의 아우라가 붕괴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감독이다. 현대 미디어 예술의 총아격인
‘영화’는 애초에 ‘원본’이 없다. 원본이 어디 박물관 유리관에 모셔있고 우리는 복사본을 돌려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세계 구석구석 동시 다발적으로 카피된 것을 상영한다.
영화는 ‘카피’로 존재한다. 그 것이 영화의 태생이다.
그러니 감독이 원본과 복제의 위계를 고집할 리는 없지 않겠나.
내 책장에 꽂힌 미술도록에 있는 앤디 워홀의 <마린린 몬로>를 보는 것은 미술관의 특별전에 걸려있는 비싼 <마린린 몬로>를 보는 것과 감흥이 다르지 않다.
붉은 입술에 황금빛 머리카락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스타로서의 아우라를 표현하기 위해
또는 원본으로서의 아우라를 표현하기 위해 미소 짓는 것이 아니라
복제된 스타의 이미지, 아우라의 이미지를 내 뿜을 뿐이다.
복제의 시대 이전엔 없었던 현대인들의 방법론으로 감독은 ‘영화’라는 예술 장르를
변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회귀할 원본 없는 현대인의 인식 자체를 변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영화속 그녀는 어딘지 진부해 보인다. 사랑의 원본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을 남자에게서 갈망하는 그녀는 이미 감독의 뮤즈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다분히 개념적으로 보이지만 <사랑을 카피하다>는 여전히 무겁지 않다.
감독이 말하는 사랑도 원본도 카피도, 영화 속 이탈리아 길가 사이프러스 나무 처럼
되돌아 보면 하나 하나 아름답긴 하지만 그것이 불멸의 고전으로 박제 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흔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늘 있는 것들 이기에
쥐어도 보고 펴도 보고 탱탱볼 처럼 벽에 튕겨져 나가기도 하는
가볍고 매력적인 영화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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