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목회마당] 촛불은 체리향기가 되어 (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6. 12. 19. 22:41

본문


촛불은 체리향기가 되어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에스겔 37:9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  


    내가 좋아하는 이란의 영화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겠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알려진 그의 영화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였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내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같은 반 친구가 한번 만 더 숙제를 안 해오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을 알아버린 어린 주인공의 번뇌를 눈물나게 재미있고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비극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된다. 친구의 숙제노트를 실수로 자기 가방에 넣어서 갖고 온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그것을 안 주인공은 엄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그 친구의 집을 찾아나서는 나름 로드무비다.   

   <올리브 나무사이로> 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그동안 봤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엔딩이 아니었나 싶다. 남자주인공(호세인)이 여자주인공(테헤레)을 좋아하는데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자 주인공 부모가 반대를 한다. 이런 저런 사건들을 지나 마지막에 테헤레가 올리브 나무사이로 난 길을 먼저 걸어가고 호세인이 뒤에서 뭐라고 하면서 소리치며 따라 간다. 굽이굽이 녹색으로 덮인 초원길과 밭길을 여자는 앞에서 남자는 뒤에 서서 걸어가는데 둘 다 하얀색 윗도리를 입었다. 스크린 상에서 두 사람이 하얀 점이 되어 안보일 때 까지 감독은 롱테이크로 둘을 끈기있게 관찰한다. 그 시간이 약 3-4분쯤 되었던 것 같은데 관객들은 둘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 그때 상상할 수 있다. 짠하고 애틋하고 답답하고 조마조마하고 슬프고 행복하고...뭐라 말할 수 없는 여러 복잡한 감정이 들면서 피곤해질 무렵, 음악이 조용히 경쾌하게 바뀌면서 저 끝에서 하얀점 하나가 다시 관객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그것도 마구 아주 신이 나서 달려오는 것 아닌가! 영화는 호세인의 상기되고 환호하는 얼굴을 살짝 보여주면서 끝이 났다. 테헤레와 호세인은 결혼을 했을까?  


그리고 체리향기


   두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 마음이 티없이 맑고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샤워를 막하고 나온 느낌이랄까. 그런 감동과 기대를 가지고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를 보러갔었다. 그런데 시종일관 그 영화는 전작들이 지녔던 경쾌함과 유쾌함과는 다른 무거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영화였다. <체리향기>는 주인공이 자신의 자살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주인공은 한 노인으로 부터 약속을 받아낸다. 자살한 자기를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겠다는 약속말이다. 그런 다음 그 노인이 주인공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기도 예전에 목을 매려고 줄을 갖고 나무 위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며... 막 죽으려고 하는데 나무에 걸린 체리가 눈에 들어왔다고. 무심결에 그냥 손을 내밀어 하나를 떼어서 먹었더니 무척 그 체리가 달더란다. 그래서 계속 먹었다. 그랬더니 문득 세상이 좀 달리 보이고, 붉은 태양처럼 삶에 대한 열정도 되살아나는 것 같고,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정겹게 다가오고, 그래서 나무 밑을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체리를 따서 던져주다가 나무에서 내려왔다고...   

    영화는 결말을 열어두어 그 주인공이 자살을 했는지 안했는지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체 영화톤은 노인의 말로 인해 사내가 용기를 얻고 다시 세상으로 나갔을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비록 <체리향기>는 전작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톤이 무거웠지만 관객의 가슴을 활짝 열리게 하고 짜릿하게 하는 강도는 전작들보다 더 강렬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가 궁금해졌다. 첫 번째가 체리맛에 관한 것이다. 과연 그 체리 맛이 어떤 맛이었을까? 죽으려고 마음먹고 나무 위로 올라갔던 사내의 모진 마음을 녹여버린 그 맛이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로 들었던 궁금증은 영화 제목을 왜 <체리 맛>이라고 안하고 <체리 향기>라고 붙였을까? 라는 점이었다. 문득,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흙으로 형상을 빚으시고 코에다가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기록된 창세기의 구절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불어 넣었다는 그 생기가 혹 <체리 향기>는 아니었을까? 


마른 뼈. 다시 살아나...


    글을 시작하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에스겔서 중 일부를 적어 놓았다. 거기에도‘생기’라는 말이 나온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강가로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그 절패의 공간에서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특별히 위에서 언급한 에스겔 37장에는“마른 뼈가 다시 살아날 것!”(5절)을 선포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오늘은 그 구절을 택하지 않고 그 밑에 있는 ‘생기’와 관련된 구절을 택하였다.   

    이 부분은 창세기 인간창조 설화와 상동성이 있다. 창세기에서는 흙이라는 질료가 있었고, 다니엘서에서는 그 질료가 뼈이다. 질료인 흙과 뼈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기재를 창세기와 다니엘서에서는 공히‘생기’로 표현하고 있다. 그 생기가 뭘까? 키아로스타미는 그것을‘체리향기’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체리향기’는 물론 단순한 냄새는 아니다. 자살하려고 나무에 올랐던 그 중년의 사람을 살아서 다시 나무 아래로 내려가게 했던 기운이‘체리향기’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아직도 여전히 생명의 기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운이 주는 힘에게 신뢰와 희망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을 아주 매혹적이고 섹시하게 ‘체리향기’라 명명하였던 것이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들을 묘사하는 장면이 에스겔 37장 초반에 나온다. 골짜기마다 아주 말라 버린 마른 뼈들이 널려있었다고 적혀 있다.‘마른 뼈’라는 표현도 부족해서 아주 말라버린 마른 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나는 갑자기 마른 뼈가 우리나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말라 버린 마른 뼈! 그 어떤 희망과 가능성과 가치도 금방 증발하고 바짝 말라버리는 이 사회가 대한민국 사회라고 한다면, 에스겔의 ‘마른 뼈’ 묘사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한 정확한 상징이자 은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많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자살을 하려고 나무위로 올라가는가? 우리나라는 노인, 중년, 청소년 할 것 없이 전 연령대에서 OECD 가맹국 중에서 자살율 1위를 달리는 나라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마른 뼈를 되살아 나게 하는 생기가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는‘체리향기’가 필요하지만, 아무도 그것이 도래하리라고는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것이 어쩌면 더 비극적인지도 모르겠다.


촛불이 체리향기가 되어


    비참한 일상을 살아가던 이 땅의 백성들이 촛불을 하나씩 들기 시작했다. 그 불씨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올 여름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이 학교 측의 방만한 운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서 시작된 소요는 급기야 총장이 사퇴하는 단계로까지 번졌고, 곧이어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입학부정이 알려졌다. 조직적으로 학교측이 정유라의 입시부정에 개입을 한 정황이 포착되었고 학생들은 다시 분노하였다. 거기서부터 봉합되었던 체리향기는 풀어져서 스멀스멀 번져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후 최순실의 행각은 단순한 입시부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JTBC를 통해 일파만파로 전해지기 시작한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들불처럼 박근혜에 대한 의혹과 분노와 울분으로 번져나가면서 바른 뼈 같았던 시민들은 하나 둘 광장에서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촛불은 계속 불타오르고 있었다. 304명의 죽음이 농락되고 왜곡되었던 4.16 세월호 광장에서, 평화를 전쟁으로 바꾸려는 강정과 성주에서, 자본의 물신이 발악하던 용산과 밀양에서, 사람의 인권이 짐승의 야만 앞에 짓밟힌 소녀상 앞에서, 그리고 백남기 농민이 시신이 안치되었던 장례식장 앞에서도 촛불은 계속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한과 설움, 울분과 분노, 그리고 염원과 기도가 2016년 11월에 나비효과가 되어 빅뱅을 일으킨 것이다.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면서 우리가 얻어낸 수확은 박근혜에 대한 탄핵안 통과도,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도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 하나가 ‘채리향기’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체제와 권력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하고 두려워하던 그 비밀을 말이다. 혁명이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어느 한 슈퍼스타가 지니는 광할한 빛의 에너지에 의해 성취되리라는 환상에 젖어있던 백성들에게 촛불은 거짓과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는 건 그런 거대한 빛이 아니라 인고와 어둠의 세월을 살아온 여기 광장에 모인 작은 촛불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촛불은 언제나 세상을 세상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돌이키는 것은 어떤 특정집단의 영도력과 일부 계층의 기획과 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촛불을 들고 어둔 밤을 밝히는 무수한 개개의 단자들임을 알려주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밝혔더니, 그 수백만 촉의 빛을 받아 체리향기가 어디서부터인가 본격적으로 발향하기 시작했고, 그 생기에 취한 사람들이 마른뼈가 되살아나듯 살아서 꿈틀거리더니 말하고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그 향기에 취해 중독중이고 그 중독은 누구처럼 밀실에 갇힌 향락의 중독이 아닌 드넓은 광장에서 맛보는 혁명에 취한 중독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은 에스겔이 말하는 묵시론적인 환상이 실현되는 공간이 되었고, 우리는 지금 그곳에서 묵시가 실재가 되는 메시아적인 시간에 참여하고 있다. 천천히 그리고 똑똑히 이 시간을 두 눈 부릅뜬 채로 즐기라. 메리 크리스마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