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이브 패러디: 문제적 성서, 여성의 눈으로 다시읽기 1
정나진*
패러디에 대하여
패러디. 문학, 음악 등의 작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만들어 놓은 어떤 특징적인 부분을 모방해서 자신의 작품에 집어넣는 기법, 이론가에 의하면 이전의 예술작품에 대해 상이성을 염두에 두고 재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전도시키고 초맥락화하는 통합된 구조적 모방 2이다. 좀 거칠게 적자면 원작의 모방이지만, 그러나 해체와 재구성, 비틀기, 전복 등을 통해서 재해석과 풍자, 교훈을 가져오려는 목적이다. 대부분은 희극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예술의 주요기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패러디’는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서 고전적인 주제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근대의 합리성에 질문과 비판을 가하고 있다. 3
'나쁜 패러디'
옆의 그림은 지난 탄핵심판 정국 때 국회회관에 걸렸던 그림 <더러운 잠>의 원작이 되는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이다. 이 작품 또한 16세기 초 티치아노의 대표작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그림을 패러디한 것인데, 마네는 그림의 주인공을 원작의 요염하고 부끄러운 듯 관객을 바라보는 자세와 달리, 관객을 당당하게 응시하는 구도로 그렸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목을 어느 여신의 이름이 아닌 ‘올랭피아’라는 그 당시 흔한 매춘부의 이름을 빌려와, 여신/성녀숭배라는 위선을 덧입고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던 당시의 사람들을 비꼬았다.
Édouard Manet, Olympia(1863)
<더러운 잠>은 사실 마네의 이 작품 뿐만 아니라,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원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르조네(Giorgione)의 <잠자는 비너스>도 함께 참고하고 합성하였는데, 박근혜의 잠자는 얼굴이라든지,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체라든지 하는 부분이다. 작가라고 하는 이는 원작의 함의나 의의에 대한 어떠한 고민이나 성찰도 없이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여러 작품들의 도상을 오직 자신의 의도를 위해 편할 대로 도용하였는데, 이러한 경우는 ‘패러디’라는 예술기법의 전형적인 나쁜 예, 올바르지 못한 예라고 보여진다. 더구나 <더러운 잠>이 큰 논란이 된 것은, 일종의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공공미술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동시대적인 성찰없는 ‘편할 대로’의 태도와 시선이 그 속에 여과없이 들어가면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동시에 혐오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도 소위 ‘진보진영’이라고 하는 그룹도 이런 태도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음을 고스란히 재현했기 때문이다. 고민과 성찰이 없는 패러디의 ‘나쁜 예’는 풍자와 재해석을 통한 문제제기와 비판은커녕, 또다시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대상화시킬 뿐이다. 고상한 척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결국 성적 쾌락을 위해 여성누드화를 사고 팔았던 남성들을 향한 올랭피아의 무뚝뚝하고 당당한 시선과 목소리는 또다시 희석되고 삭제되었다.
패러디-낯설게 보기
René Magritte, La trahison des images(1928-1929)
패러디 기법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왼쪽)이라는 작품이다. 마그리트는 흔한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는다. 실상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이 맞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관객은 저 모양의 그림을 관습적으로 파이프라 부르므로, 곧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라는 캘리그래피 문구 사이의 모순에 당착하고, 관습을 벗어나 곧 작품에 대하여 다시 보기, 낯설게 보기를 시작할 것이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인 마그리트는 이런 식으로 파이프의 패러디를 통해 통속적인 이미지의 재현으로서의 회화에 반발하고, 규범화된 근대의 합리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성서는 어떻게 패러디 되어 왔는가?
패러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기법 중 하나이긴 하지만, 사실 패러디는 항상 있어왔고, 인기있는 대중작품들은 회자되는 동시에 역사 속에서 좋게든 나쁘게든 끊임없이 패러디되어왔다. 패러디를 단순한 모방이나 흉내가 아니라 비틀기와 해체, 재구성을 통한 재해석이라고 할 때, ‘성서’라는 텍스트 또한 각 시대에 따라, 공동체에 따라, 개인에 따라 끊임없이 패러디되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삶의 자리 속에서 경험되고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구전되고, 그것이 편집되어 문자화된 성서 텍스트는 그 행간의 빈틈들과 모호성들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져왔다. 그리고 그 (재)해석에는 텍스트의 삶의 자리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삶의 자리 또한 뒤섞여있기 일쑤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가 남성에 의해 쓰여지고, 또한 성서의 패러디-(재)해석- 또한 주로 남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독자가 여성이라 하더라도) 줄곧 남성의 눈으로만 읽혀져왔다는 것이다. 텍스트가 누구에 의해 쓰여지고 해석되어지는가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성서가 모두(의 구원)를 위한 책이라면, ‘남성’이 아닌 이의 눈으로도 주체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성서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숨겨지고 지워지거나 왜곡되어지기 일쑤였다. 성서에 여성이 등장하지만 중요한 구원역사의 순간 여성은 사라지거나 미래의 중요한 아들들의 대를 잇기 위한 도구와 희생자로 전락해버리곤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알아차리고 마지막까지 함께 한 것은 결국 여성들이었으나, 이름조차 기록되어있지 못하기도 하고,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 보낸 주요인물은 결국 열두명의 남성사도들만으로 기억된다. 사도바울의 선교에 큰 기여를 하고 일약을 담당한 여성들이 꽤 있으나 성서에서 그들을 찾아보기는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하는 식이다.
성서가 남자들만을 위한 구원의 책이 아니라면 성서에서 지워지고 잊혀진, 왜곡되고 오해된 이들의 존재와 목소리 또한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의 성서해석이 성차별적인 시선에서 이루어져왔다면, 그 성차별적인 시선 또한 찾아내고, 제거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브'의 나쁜 패러디 역사
특히 구약으로 불리우는 제 1성서의 여성 대표주자로 가장 많이 패러디되는 이는 단연 ‘이브’일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교회 안의 여성혐오의 근원에는 이브가 출연하는 창세기의 나쁜 패러디가 자리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나왔으므로(창세기 2장)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나,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본인도 먹고 아담까지 먹여 낙원에서 쫓겨나고 원죄를 입었으며 인류의 고통이 시작되었으므로(창세기 3장), 여자는 만가지 악의 근원이라는 이야기 등이다. 바울로 서신의 여성에 대한 언급들도 결국 그 기원은 같은 창세기의 본문으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4장의 “여자여 잠잠하라. ...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는 말도 창세기 3장 16절(“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창세기, 특히 야웨기자의 것으로 불리우는 2, 3장 본문의 시대적 배경 자체가 다윗왕조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후 각 시대마다 있어왔던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관점들 속에서 이브 신화의 나쁜 패러디가 재생산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형성기 때는 교회에 비교적 여성 리더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교회의 제도화와 국가공인 이후로부터 여성들은 배제되거나, 창세기 2장, 이브의 역할의 명명처럼 ‘돕는 자’로서의 존재의 한계가 명백했다. 교부들은 여성이란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남성들에게는 선물이지만 세상의 저주라고 보았고 이러한 교부들의 여성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교회 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결정했다. 존경받기 그지없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출산이라는 이유를 배제하면 여자가 남자의 돕는 자로 만들어질 아무런 이유도 상상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여성은 약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등한 이성에 따라 살기보다는 열등한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 같다고 여성을 인식하며 창세기 주석을 저술했다. 이러한 교회의 여성에 대한 이해는 14세기부터 근대 초까지 이어진 20-50만명이 희생된 마녀사냥에서 여지없이 이용되었다. 교회의 의도를 위한 ‘편할 대로’의 나쁜 패러디는 너무나도 쉽게 여성들을 마녀들로 만들어버렸다.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여자는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 4
창세기 2장 다시 읽기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나쁜 패러디의 전형적인 예는 원작의 의도와 함의를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작가의 편의를 위해서 원작을 1차원적으로 흉내, 모방하고 갖다쓰는 것이다. 원작을 비꼬거나 해체, 재구성하려는 목적이라면 더더욱 그렇거니와, 원작의 의도를 다시 살리고 싶은 경우에도 원작의 의미를 깊이있게 성찰해보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보편적 종교로 받아들였던 서구문명 전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그 서구문명을 그대로 세례받은 한국의 문화에 이브의 나쁜 패러디는 그대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이브의 나쁜 패러디가 성서텍스트의 원형에서도 진리화되어있는지는 다시 한번 읽어볼 일이다. 성서의 목소리는 일괄적이지 않다. 우리는 텍스트 속에서 누구의 진리가 주장되고, 누구의 진리가 억눌려졌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5
여자, 남자를 돕는 자?
먼저 여성의 존재를 남성의 소극적이고 부속적인 역할로 정당화시킨 창세기 2장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 장면을 다시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첫째로 야훼는 땅의 먼지(히브리어로 ‘아다마’, 성서에는 알고보면 이와 같은 유쾌한 말장난 식의 단어들이 많다)로부터 사람(아담)을 지으셨다. 아다마에서 나왔으니 아담이다. 나는 여기에서 첫사람인 ‘아담’을 남자로 전제하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아담을 남자(man)가 아닌 사람(human being)으로 바꿔 읽어보았다.
“한처음에 야훼는 땅의 먼지(아다마)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첫사람을 창조하셨다(7). 그리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에덴동산을 섬기며 지키도록 하셨다(15). 어느날 야훼가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내가 그를 위해서 그의 앞에(그에게 맞는, 그의 파트너로) 돕는 사람(에쩨르)을 만들겠다.’(18) ...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해 적합한 돕는 자는 발견되지 않았다(20). 그래서 야훼는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들었다. 야훼는 사람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빈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21)..... 아담이 말하였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23)”
이렇게 성서를 다시 읽으면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이야기는 남성/여성 이분법적인 창조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그를 돕는 자’의 창조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별분업을 정당화시킨 ‘돕는 자(에쩨르)’에 대한 재해석이다. 통속적으로 생각할 때, ‘돕는 자’라면 주체의 옆에서 부가적인 역할을 하는 정도의 존재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언어든지, 그 언어권에서든 언어가 함유하는 문화 속의 의미와 용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돕는 자'(helper)의 히브리어 '에쩨르(עֵזֶר)'는 (우리가 그동안 이 본문에서 생각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벗어나 놀랍게도) 여성명사가 아닌 남성명사이다. 더 놀라운 것은, '에쩨르'는 구약 전체에서 21회 사용되는데 그 중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창세기 본문의 2회를 제외한, 나머지 19회는 모두 '구원자로서의 하느님'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창 2:18,20, 출 18:4; 신 33:7,26,29; 시 20:2; 33:20; 70:5; 89:19; 115:9-11; 121:1,2; 124:8; 146:5; 사 30:5; 겔 12:14; 호 13:9; 단 11:34). 이렇게 본다면 아담의 돕는 자 ‘에쩨르’는 '야훼의 도움'을 표상하는 신적 대행자로서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6
"에쩨르(עֵזֶר), 온전한 인간을 위하여" : 21세기 이브 패러디
앞선 창세기 본문을 여성중심적으로 다시 읽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텍스트가 쓰여졌던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의 한계를 인식하며 회의적인 이들도 있다. 어떠한 텍스트도 순수하게 친여성신학적이거나 친가부장적인 본문이라 단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텍스트들이 새로운 의미가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7
사람은 누구도 단독자로 온전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단독자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돕는 자(에쩨르)’와의 결합을 통해서 상호 협력적이고 상호 구원적인 사회적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아담과 이브 창조에 대한 이러한 재해석은 그동안 가부장제와 성별분업의 규범을 정당화시켜준 성서해석에 일갈을 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여/남 이분법적인 정체성의 젠더정치를 넘어서 모든 차이(성별, 인종, 장애/비장애 등)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 차이를 자원으로 새로운 시대의 해방과 구원의 텍스트로 읽혀질 수 있지 않을까?
마치며 : 멀미, 패러디로 시작해보기
지난 2월, 속해있는 교회공동체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문제적 성서, 여성의 눈으로 다시읽기”라는 주제로 4주 동안 강좌를 이끈 적이 있다. 그동안 성서가 (독자가 혹시 여성이더라도) ‘남성’의 눈으로만 읽혀져 왔으므로, 이번에는 거꾸로 (혹시 남성이더라도) ‘여성’의 눈으로의 성서읽기를 해보자는 의도였다. 네 번의 짧은 강좌였으므로, 실제로 성서를 함께 다시 읽기보다는 재해석을 위한 선작업으로, 그동안의 남성중심적인 시각을 해체해보고,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를 객관화해보고, 동시대의 페미니즘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선의 거리차를 확인하는 정도의 워밍업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세 번째 시간인가에 강의를 마칠 무렵, 수강자 중의 한 분이 고뇌를 토로했다.
“아 진짜 힘드네요. 이게 그냥 이론이 아니고, 삶하고 결부되어 있고, 신앙하고 결부되어 있으니 고민이 들어요.”
마치 파이프를 보고 있는 나에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하는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패러디 앞에서 느껴지는 당황스러움처럼, 성서를 그동안 소외되었던 여성의 눈으로 다시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멀미를 동반한다. 그것은 그만큼 지금까지 나의 인식방법으로서의 (남성중심적) 제도와 규범, 언어의 틀이 땅처럼 견고했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 규범과 언어, 때로는 신앙까지도 불변하는 진리의 땅과 공간이 아니며 다른 문화들과 더불어 시대의 생산물일 뿐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서해석이 유희나 이론, 머리로만 하는 평등이나 정의의 윤리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 존대에 대한 ‘신앙’의 문제라고 보았을 때,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여태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의 태도의 기반을 흔드는 문제로 다가온다. 바라는 바,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동안에 내가 가져왔던, 그리고 사회가 나에게 강요했던 정체성에서의 이탈과 남성중심주의의 가부장제와 성별분업, 남녀이분법이라는, 우리를 가둬두는 성차별적 정체성 정치의 성서해석으로부터의 해방이 될 것이다.
‘성서 다시 읽기’ 강좌를 이끌면서, 느꼈던 한계 중 한 가지는, 참여자들이 주체적으로 스스로 성서를 해석해보는 일을 기술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어려워하더라는 점이다. 그래서 부러 ‘성서 다시읽기’를 ‘패러디’에 빗대어보았다. 교회의 교육은 신자로 하여금 성서텍스트를 주체적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성서의 권위, 사실은 결구 성서해석의 권위에 짓눌려있게 해왔고 성서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고 교회의 해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주로 희극적 요소로 이미지화되는 패러디는 그래서 신자들에게 좀더 성서를 가볍게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할수 있지 않을까? 행간을 상상하기, 삭제된 목소리 들어보기, 숨은그림찾기. 뒤틀고 해체하여 재구성해보기.
* 필자소개
글쓴이는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을 전공으로 지구화, 공간, 이주 등에 관심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과 오순도순 함께 사는 것이 꿈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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