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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 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8] 지젝(1) : 까다로운 주체(허석헌)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7. 10. 1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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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8]


지젝 (1) : 까다로운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주체의 문제


      탈근대 철학의 이론의 장에서 벌어진 논쟁의 화두는 ‘주체의 죽음’을 중심으로 벌어져 왔다. 인식론적 전환점을 찍은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와 헤겔을 넘어 후설의 현상학까지 경험의 주체를 실체론적인 형이상학에 의해 탈역사적으로 구성해온 부르주아 철학은 실존주의 철학(실존주의 역시 존재론적 시도의 한 형태이지만,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관념 체계를 탈피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맑스주의, 구조주의에 이어 이마저도 한발 더 넘어서려는 탈구조주의에 의해 반박되어져 왔다. 이들 철학이론들의 지형은 엄연히 자기고유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의미에서 지지되어온 ‘주체’의 존립근거를 부정하는 전복적인 태도에서 만큼은 일치된 입장에 있다. 이로써, ‘주체의 죽음’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가장 적합한 용어처럼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이라는 탈근대를 향한 급진성이 유행처럼 지나간 이후에, 주체의 죽음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지에 대한 물음은 모호한채 남겨졌다. 물론, 이성이 되었든 존재가 되었든 주체를 최종 판단의 결정권자로서의 권한을 부여한 결과, 그로 인해 구성된 세계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구조를 초래하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체가 제거된 이후의 세계는 달라졌을까? 주체가 사라졌으니 마음 놓고 자유를 만끽하라고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면, 주체의 죽음을 확신케 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권력을 향유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바디우는 오늘날의 차이와 다양성의 문화가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강조한다. 즉 차이와 타자성이라는 말은 매혹적이지만 이들 용어들은 자본주의의 탐욕만을 충족시켜줄 뿐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운다. 바디우는 주체의 죽음이라는 급진적 현상이 다양성과 차이만을 강조한 채 사회적 갈등과 적대를 포스트모던의 풍토 안으로 일시에 흡수해 버리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와 차이의 존중이라는 그럴듯한 주장을 앞세워 헤게모니를 영속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지배전략이 주체의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적으로 수용되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런 문제인식 위에서, 이 글은 먼저 지젝의 주체이론이 기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칸트적 헤겔 또는 헤겔적 칸트의 이해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근대적 주체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지 않고 오히려 근대철학의 주체성 논의에서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두번째는, 데카르트부터 칸트, 헤겔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연결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라캉의 이론적인 토대로 기능하게 되는지를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이 라캉의 실재개념 안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현실 정치의 변혁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데카르트의 유령


    지젝의 철학적 사유는 주체의 죽음이 공언된 이 시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주체를 부정함으로서 혁명의 가능성마저 제거해 버린 탈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뒤에는 결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묵인하고 존속시키는 탈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음을 경계한다. 따라서, 지젝에게 철학적 문제는 근대적인 주체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혁명의 주체의 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주체의 가능성을 찾는 데 있다.


    지젝이 선택한 길은 두가지 방향에서 파악될 수 있는데, 하나는 맑스-레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학이다. 맑스-레닌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은 생소하게 보일진 몰라도, 맑스주의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에 맑스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외부로부터 이론적 보완을 시도했던 경험은 역사적 선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맑스주의에 도입한 경우가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왜곡되어 국가사회주의라는 파시즘으로 흘러간 경위를 프로이드를 통해 밝혀내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맑스주의를 실존주의적으로 수용하면서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적으로 탈바꿈 할 때에, 알튀세르는 이러한 시도들을 수정주의로 파악하고 인식론적인 개입을 제거한 순수한 맑스주의 해석을 들고 나온 사례를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젝의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철학의 결합은 형식의 측면에서는 전혀 새로운 시도라고 보기 어렵다. 지젝의 프로젝트를 이전의 사례들과 구별짓는 데에는 형식적인 특별함이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에서 결여되었던 주체를 재구성하기 위해 라캉의 정신분석철학의 관점에서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온다는 점에 있다. 이 글이 지젝에게 주목하는 점도 여기에 있다. 지젝의 철학은 주체 문제와 연관된 탈근대적인 해체주의의 성과를 전면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근대적 주체를 해방적인 역량으로 전유할 수 있는 이론적 시도를 과감하게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근대와 탈근대의 단절을 그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특색은,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1999)’의 서문에서 쉽게 발견된다. 지젝은 주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 해체주의자, 하이데거적 지지자, 생태론자, 비판적 맑스주의자와 여성주의자까지 이어져온 ‘데카르트적 주체라는 유령’의 ‘성스러운 사냥’을 위한 ‘학술권력’들의 동맹에서 찾는다. 지젝은 주체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데카르트의 주체가 여전히 유령처럼 출몰해 왔음에 주목하며, 주체의 유령에 대한 반 데카르트적 동맹이 지시하는 바는 역설적으로 데카르트적 주체성이 강력한 지적 전통으로 인정받아 왔음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이처럼 지젝은 대세가 되어버린 주체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데카르트의 주체를 저마다 희생양으로 삼아 학술권력을 지배해왔던 진보적 담론들과 대결을 벌인다.


초월론적 주체


    그러나 지젝이 부활시키고자 한 주체는 실체론적-존재론적인 데카르트식 주체 개념이 아니다. 지젝은 코기토를 시점으로 칸트로부터 인간의 이해에 적용되었던 초월적(선험적) 관념주의 철학에 의해 확인되는 것은, 사유하는 ‘나’는 인정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나’를 보증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즉, 칸트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전환으로서 코기토를 자기 초월론적 철학의 출발점으로 수용하지만, 세계를 인식하는 투명한 자기확증적인 주체로서 인간을 규정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식되어진 현상과 객관적인 대상(물 자체 thing-in-itself)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사유와 존재, 지각과 대상, 표상과 실재는 일치하지 않으며 양극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여기서 자기 동일적인 주체성이 설 여지는 없다. 이성이 알 수 있는 지식의 범위는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없는 것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영역이다. 칸트가 설정한 ‘물자체’는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영역, 초월적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비대상성에 속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현상이지 물자체가 아니다. 현상은 실재의 그림자이다. 실재로부터 유출되어 나오지만, 실재의 모사일 뿐이다.


    칸트의 초월론적 인식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두가지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하나는 한계로서 이성의 지위이다. 이성은 객관을 직시할 수 없다. 언어, 표상, 감각, 기호, 말 등은 실재 즉 객관적인 대상, 본질 그 자체를 지향할 뿐,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계는 현상과 본질의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 . 그러나 이성의 한계가 실재와의 완전한 단절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는 사고로서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의미를 요구하기 마련인데, 그 의미는반드시 초월적인 로고스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두번째로 지적되어야 할 점과 연관 되어 있다. 현상은 실재와 반성적(reflective)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성에 의해 파악된 세계는 실재의 존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물자체는 지각에 의해 경험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부재하다고 할 수 없다. 실재가 없이는 상징계의 질서 또한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계로서의 이성은 이처럼 실재와 현상의 불일치 뿐 아니라, 실재의 존재를 확증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이처럼, 한계와 초월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칸트의 초월론에는 이성과 실재사이의 관계가 잠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초월적인 실재의 영역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져 있지 않다는 특징 또한 포함하고 있다.


까다로운 주체


    칸트의 초월론적 방식은 인간의 인식이 도달할 수 없는 물자체를 상정해야만 성립할 수 있었다. 인식은 단지 감각을 통해 주어지는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객관와 주관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말한다. 주관은 객관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사실상 칸트의 핵심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렇게 잠정적으로 가정된 초월적 통각 영역 너머의 물자체를 진리로서 수용할 수 없었다. 헤겔이 보기에 철학이 객관적 진리를 알 수없고 한계안에서 제약된 상대적 현상만을 파악할 수있다는 것은 철학의 무능을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헤겔은 칸트의 초월철학에 손질을 가한다.


    헤겔은 칸트와 달리 이성을 객관적인 것으로 본다. 객관성을 갖는 칸트의 오성 또는 초월적 통각은 이미 헤겔에서 이성으로 동일시된다. 헤겔은 칸트가 분리한 오성과 이성을 다시 이성안으로 통합시킨다. 이렇게 통합된 이성은 객관을 타당하게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실체론적으로 긍정하는 칸트와 달리 헤겔은 가정된 초월적 물자체를 부정한다. 칸트에게서 있을 것으로 가정된 물자체는 매우 약한 고리로 이성과 잠정적인 관계로 남아있었지만, 헤겔은 물자체를 가시적인 이성의 현실 영역으로 끌어온다. 현상은 객관에 대립하는 주관의 구성물이 아니라 바로 사물자체의 규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체로서 현상의 피안으로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현상계의 끝을 물자체라고 본 것이다. 물자체란 현상 세계의 너머에 있는 실체가 아닌, 현상계의 종착점이 바로 물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헤겔은 칸트가 끝까지 남겨 놓은 물자체마저도 주관의 영역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절대적 주체성을 복원한다. 이로써 현상과 실재 사이의 거리는 제거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반대로 잠정적이었던 틈새는 보다 확정적인 것이 되었다. 지젝에게 있어서 헤겔은 칸트철학의 극복자라기보다는 현상계와 물자체의 갈라진 틈새를 보다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가시화시킨 장본인으로 이해되는 이유이다. 이점은 헤겔이 칸트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며 전통적인 이성과 그로 인한 결과인 형이상학을 복권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온 일반적인 헤겔에 대한 해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젝의 헤겔에 대한 독창적 해석법은 여기에 있다. 지젝은 ‘나눌수 없는 잔여(1996)’에서, 헤겔이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은 “주체는 알수 없다는 칸트의 생각을 사변적으로 역전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물자체로서 “주체의 ‘알 수 없음’은 주체가 비실정적 공백이라는 사실을 오성이 잘못 인지하는 방식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주체는 알 수 없는 텅빈 X라고 말하는 곳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런 인식론적 규정에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즉 주체는 순수 자기정립적인 ‘없음nothing’이라는 것이다. 초월적 통각의 너머에 물자체를 인정하는 칸트와 달리, 헤겔에게 주체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의 담지자이며, 지젝은 이러한 부정성의 담지자를 “까다로운 주체”라고 부른다. 부정성에는 주체뿐 아니라, 대타자로 기능해온 물자체역시 부정성의 대상이 된다. 언제나 감각 너머이 있을 것으로 가정되어 온 물자체는 ‘그곳’에 없다. 이로써 대타자도 역시 ‘그 곳’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헤겔이 물자체를 이성의 범주로 소환하였듯이, 지젝에게 대타자는 상징계 안으로 진입한다. 


   여기에서 지젝은 헤겔의 부정의 변증법에 대한 해석을 칸트주의와 연결시킨다. 칸트에게 확인되는 것은 초월적 통각에 의해 종합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 아니라, 이성과 물자체 사이가 서로 대립과 긴장 속에서 근본적인 상호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듯이, 헤겔의 변증법은 정과 반의 긍정적 종합으로서 합이 아니라, 부정의 근본화, 즉 부정을 더욱 철저히 부정하는 변증법이다. 변증법을 부정의 부정이라는 운동을 부정의 근본화시키는 것으로 읽어내고 그로부터 ‘비어 있는 텅 빈 무’로서의 주체를 발견하려고 하는지젝은 헤겔을 반칸트주의가 아닌, 반대로 급진적인 칸트주의자로 해석한다.  


라캉과의 만남


    지젝의 해겔에 대한 독특한 독법은 헤겔의 철학을 타자를 주체로 환원시키고 차이를 동일성으로 통합시킨 형이상학적 철학의 토대로 이해해왔던 기존의 통념에서 한발 물러나 다른 시각에서 주체를 재구성할 여지를 남겨준다. 그러나 지젝이 다시 읽어낸 헤겔과 칸트만으로는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논하고, 현실정치 안에서 주체를 재구성의 대안으로 삼기에는 아직 이르다. 칸트와 헤겔의 해석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만나야 한다. 지젝은 칸트의 초월적 통각과 물자체의 개념을 라캉의 인식체계를 선취하는 모형으로 보았다. 라캉은 이를 상징계와 실재계로 구분하였다. 지젝이 데카르트로부터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을 읽어가는 관점은 이처럼 라캉의 개념과 맞물려 있는데, 이제 우리는 지젝이 해석한 칸트와 헤겔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되는지 볼 차례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지젝이 그의 주체 이론이 현실적으로 얼마만큼의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지도 검토하기로 한다. (다음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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