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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저절로 살아진 나날들, 그리고 나를 살아있게 한 것들에 대하여(김의환)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7. 10. 1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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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살아진 나날들, 그리고 나를 살아있게 한 것들에 대하여




김의환*

 


    그 더웠던 여름이 사라질 듯 말듯 하는 걸 보니 계절엔 경계가 없는가 보다. 시월이 되면서 낮에는 반팔차림으로 남아있는 여름을 느끼고, 저녁에는 자켓을 껴입은 채 가을을 기다린다.


   1년간의 긴 칩거를 마치면서 대학원 복학을 결정하고,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한 것은 지난 7월이었다. 날이 너무 더우니 별일이 없어도 매일 아침 에어컨이 빵빵한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취방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온통 땀으로 흥건해졌다. 도서관에 도착해 로비에서 얼굴을 손수건에 파묻고 젖은 몸을 말리다 보니, 20년 전 일이 불쑥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체육시간을 마치고 교실에 돌아왔더니 체육복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나를 본 담임선생님께서는, 내가 뚱뚱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뚱뚱한 사람은 땀이 많이 난다는 거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내 몸이 소위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니까. ‘팩트'에 기반한 선생님의 말에 상처받아 풀 죽은 채 집에 왔고, 엄마에게 이 일을 말씀드렸다.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매사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해서 그래.” 어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열심히 하지도 않는, 무척 소심하고 민감한 아이라는 사실을, 평생 세상과 불화하며 살아갈 것을. 그런데 엄마의 그 말이 그때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각할수록 고맙다. 세상이 그토록 추구하는 진실이나 사실, 논리와 객관성, 과학적 근거, 법과 제도 따위를 떠나서, 그 말이 진심으로 느껴져 나를 위로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나를 깊이 사랑한다고 느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라는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사랑한다. 이 구절은 인간이 죄와 결함과 허물 투성이임을 전제한다. 이때 사랑으로 ‘덮어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니, 가능하기는 할까? 내겐 사랑이 없어서인지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허물을 보면 쉽게 지적하고 짜증내고 울분을 토하고 뜯어 고치려 한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무관심과 냉소, 환멸로 자신을 간신히 지켜낸다.


    올해 초에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 남자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세 자녀가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는 어느 날 밤, 우연히 발생한 하나의 사건으로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이 영화는 성장이나 극복, 힐링 내러티브로 나아가지 않는다.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누굴 탓 할 수도, 돌이킬 수도, 헤아릴 수도, 잊을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고통을 안은 채 그냥 살아간다. 회복이나 전환의 기미가 전혀 없으나 그냥 그렇게, 살아지니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나타나는, 고통 가득한 우리네 삶을 향한 건조한 태도와 낯선 시선, 차가운 정서는 역설적으로 관객의 감정을 온통 뒤흔든다.


    나는 고통받는 인간에게 끌리고, 인간의 추락과 파멸, 실패에 매혹된다. 그 사람을 경유해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감수성으로 가득하던 학창시절부터 어쩌다 서른이 된 지금까지, 삶은 항상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왜 자꾸 실패하고 낙심하는가’. ‘나는 왜 앓는가’. ‘내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딱히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그냥 안고 살아가야 했다. 한때는 타인의 도움 따위 없이 주체적으로 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혼자 지내는 연습도 해보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나 고립과 자기소외, 단절은 피할 길이 없어 동굴에서 긴 밤낮을 보냈다.


    그러면서 혼자서는 절대 못 산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여전히 사람 대하는 건 고단하고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같이 부대끼며 살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지난 여름날, 땀 흘리고 돌아다니며 누구라도 만나고 얘기를 나눠보려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은 내 고통과 무관하지 않으며,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음을. 또한 주체적으로 힘껏 살아내는 시간보다는, 저절로 누군가에 의해 살아지는 시간이 삶에서 어쩌면 훨씬 더 길 수도 있다는 것을.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것들을 하나씩 헤아려 본다.


   내가 나를 포기했을 때, 나를 돕겠다던,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던 친한 형의 말.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 아들이라던 아버지의 편지 속 구절.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던 내게 아무 말 없이 매끼 밥상을 차려주시던 어머니. 

   이제 갓 돌을 지난 조카 진이의 옹알이와 걸음마와 표정, 젖내음. 

   매일 저녁 6-8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배철수 아저씨의 목소리와 팝송들. 

   아주 이따금씩 읽는 성경 속 피 흘리는 예수. 고통받는 자들의 예수. 

   심연까지, 삶의 나락까지 추락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목소리와 가사로 무대에 오르는 가수들 

   책장을 넘기다 우연히 발견해 한없이 머뭇거리고 서성이게 하는 문장들. 

   이 가을, 해질 무렵 옥상에 올라가면 펼쳐지는, 순간의 황홀한 풍경. 

   시월의 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탈 때 스치는 싸늘한 바람. 

   교회에서 함께 목소리 높여 부르는 노래들, 함께 나누는 밥. 

   불안하고 위태로운 청춘을 함께 보내는 친구들과의 술자리, 그 때의 미묘한 표정과 잊을 수 말들. 


    지난 여름 내내 버스 창가에서, 도서관에서, 연구실에서, 방구석에서, 영화관에서, 공연장에서, 홍제천 산책로에서, 이 소중한 것들이 하나씩 불쑥 떠오를 때면 너무 고마워서, 다행이어서 주책없고 뜬금없이 울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 짧은 계절에, 밤이 빠르게 찾아오고 한없이 차가워지고 참을 수 없이 쓸쓸해질 때, 속절없이 허비한 청춘을 헤아리다 밤길을 비틀대며 걸을 때, 나를 살린 것들과 저절로 살아진 날들을 생각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살아 있었을까 싶다. 누군가에 기대면서 간신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죽이는 말을 해오지 않았던가. 제발, 부디 그러지 말기를. 나도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를, 같이 살기를.


    이인성 작가의 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의 마지막 구절이자 나를 살려낸, 살아있게 한, 아니 살아지게 한 문장들을 남겨본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이곳에서 기다리던 어느 순간? 이제, 그것은 지나간 매순간이었으며 다가올 매순간이다. 

이제,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그 모든 일을 받아내겠다. 

...곧 개찰이 시작될 것이다."


*필자소개

청춘을 허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한량. 어두운 자취방의 혁명가. 문학과 영화, 음악과 라디오에 기대 하루하루 때우고 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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