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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 바울신학가이드 23] 알란 바디우 I (한수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8. 2. 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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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23]



알란 바디우 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1997년에 출간했을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왜 바울인가?’라는 질문을 물었을 것이다. 먼저, 알란 바디우는 기독교인도 성서학자도 아니다. 게다가 1997년은 지금처럼 너도 나도 바울에 대해 한마디씩 하던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처음 장을 ‘바울, 우리의 동시대인’(Paul: Our Contemporary)이라고 이름짓고, 왜 바울을 지금 이 시대에 소환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바디우가 직접 밝히듯이 바울이 소환된 정확한 지점은 “보편적 개별성(Universal Singularity)의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이 되기 때문이다.(사도바울, 31) 먼저 이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이란 말을 살펴보자. 보편적이라는 뜻은 누구에게든 차별없이 주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개별성이란 말은 그 어디에도 비슷한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이고 특별한 어떤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바울이 이런 것을 이야기하기는 했다. 보통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누구든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전의 자신의 모든 정체성 위에 그것을 놓게 된다. 흔히 ‘교회에 빠지면 부모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다. 이런 것이 ‘보편적 개별성’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보편적 개별성’을 말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의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이다. 바디우는 바울이 마련해 놓은 그 조건이 동시대 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주 특별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그 조건을 먼저 살펴보기 전에, 왜 바디우는 하필이면 지금 이 시대에 바울을 소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살펴보자. 바디우는 일견 매우 문제적인 발언을 던진다.


“인종적·종교적·국가적·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인정하기 위해 진리들의 구체적 보편성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러한 황폐화가 늦춰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바디우, 20)


    지금 한국에서 성담론이 매우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바디우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매우 흥분할 수도 있다. 일단 차근 차근 풀어보자. 진리라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스스로 옳은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그 진리가 지향하는 바는 바뀌거나 양보될 수 없다. 그런데 흔히들 현대사회나 포스트모던 사회를 말하는 사람들은 ‘진리가 사라진’시대 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그 이전의 진리가 구세대의 종교적 권위나 근대의 ‘주체’라는 허상이나 어떤 이념의 조종을 받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또한 인간 사회는 언제나 그러한 당파성이나 권력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또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진리를 담기에는 부족하므로 더 이상 쉽게 진리를 입에 올리는 것을 우려하는 움직임이 팽배하였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인문학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하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의 명제를 상정하고 그것이 자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는 진리의 조건, 즉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조건을 말해야 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바디우가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디우의 말로 돌아가면 바디우는 먼저 진리들의 구체적 보편성을 포기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이른바 진리의 상대성이나 가치의 상대성을 직격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가 만약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즉 어떤 누구나 따라야하고 지켜내야할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남은 것은 자신의 권리를 위한 투쟁밖에는 없다. 또는 그런 투쟁을 지지 하고 연대하는 것만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권리를 지켜내고 투쟁을 통해 그들을 위한 법을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행동을 바디우는 폄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들이 소위 자본주의와 의회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파국을 막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기억하자. 알란 바디우는 뼛속까지 맑스주의자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시대는 인간의 화폐가치로 환산하지 않으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누군가의 삶을 억압하는 일이 없는 시대 라면 그 시대는 이러한 운동들로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리 독자들을 위해 밝혀 두자면 지난 웹진까지 다루었던 조르지오 아감벤과 알란 바디우는 새시대를 향한 처방이란 주제에서 서로 상극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아감벤의 바울이 주체라는 것을 놓는 것 자체를 어떻게든 피하여 현재의 억압의 구조를 활동 정지시키는데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바디우의 바울은 현재의 구조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다시금 주체를 놓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단 바디우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자본주의와 국가모델이 한편으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국의 시민들을 보호하지만 그 보호를 위해 억압하는 것은 자국의 시민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다.(바 디우, 23) 예를 들자면, 현재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은 일반 시민이 누리고 있는 법적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 현재의 상태 자체가 국가의 법이 그들을 탄압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성소수자들 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하면 법은 그 안에서 용납할 만한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해 줄지언정 다시금 새로운 방법으로 성소수자들을 정의하여 탄압하기 시작한다. 결국 “국민들의 부분 집합들은 매번 특수한 지위에 의해 규정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바디우, 24)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더욱 자유롭게 유통될 것이나 인간의 삶은 언제나 통제와 억압속에 있게 될 것이라 말한다.(바디우, 25) 그러나 이보다 더 날카로운 바디우의 문제제기는 바로 그러한 끊임없이 인간의 삶을 나누고 난도질 하는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문화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이다.(바디우, 25)


“탐욕스런 투자 자본에게 여성들, 동성애자들, 장애인들, 아랍인이 출현하는 것이 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잠재력인가!” (바디우, 26)


  이른바 다양성과 다원화라는 목표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해석학과 예술의 중요 과제였으나, 이는 동시에 자본주의 시장의 주요 목표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 위해 자본은 새로운 소비 주체들을 생산해야 한다. 같은 사과를 먹더라도 농약이 없는 사과, 청정지역에서 재배한 사과, 당도가 더 높은 사과, 순수하게 사람의 손으로만 재배한 사과 등등 무한하게 분화시켜 개별적인 욕망을 충족 시켜줄 소비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이른바 진리 과정(Truth Process)이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일체의 원리들을 단절시키고 중단시켜 자본주의적 예측과 계산의 억압을 멈추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진리 과정의 사건)을 보편화시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열수 있는 어떤 희망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바디우, 27) 그 대 표적인 진리과정으로 바디우는 예술, 과학, 정치, 사랑을 들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네가지의 중요 주제들을 다루어 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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