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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충동이 이끄는 삶(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8. 2. 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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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이 이끄는 삶[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보시기에 참 좋았다 (it was very good).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창 1:31)


00.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새해를 어떻게 시작하시고 계신가요? 문득 제가 서른 살이 되던 해가 생각납니다. 스물 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던 12월 31일 날 밤에 대학로에 있는 어느 맥주집에서 스물 아홉이었던 내 후배와 맥주를 먹으며 엉엉 울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저 보다 한 살 적었던 그 후배는 지금은 꽤 알려진 독립다큐멘터리감독이 되었는데, “형 울지마!” 라고 저를 위로 할 때, “야, 스물 아홉이 뭘 알어?” 하면서, 저의 지나간 20대를 하염없이 애도했었습니다. 그때로부터도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저는 올해 오십이 되었습니다. 사십이 되던 해는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어떻게 사십을 맞이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십을 맞는 올해는 느낌이 좀 다르네요. 스물 아홉에서 서른을 맞이하던 그 해와 비슷하게 좀 우울하고 맬랑콜리 합니다.

   제 기분을 더 안 좋게 만든 것은, 제가 새해시작하자마자 감기가 걸렸는데, 저는 보통 감기 걸려도 약 안 먹고 인삼차나 비타민 먹고 잠 자고 일어나면 나았는데, 이번에는 낫지가 않는거예요. 그래서 병원갔더니 폐렴까지는 아니지만 기관지염으로 발전했다고, 하면서 주사 맞고 약먹고 해서 지금은 겨우 잡혔습니다. 오십이 되니까 감기까지도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구나, 라는 씁쓸함이 밀려왔습니다.

   더욱 저를 심란하게 만든 것은, 오십은‘지천명’이라고 하죠. 하늘의 명을 안다는 나이가 지천명 아닙니까. 그런데 오십이 된 저는 하늘의 뜻은 커녕 내 마음 하나도 제대로 알지도 다스리지도 못하는 나 아닌가, 라는 회의와 반성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오십이라는 삶의 무게에 아직 저는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암튼 저는 이렇게 썩 유쾌하지 않게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좀 나아지겠죠.


01.

   새해가 되면 결심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죠. (새해들어 여러분들은 무엇을 결심하셨습니까?) 담배를 피시는 분들은 금연을 결심하고,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는 올해는 성경을 반드시 일독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교회에서는 새해가 되면 일일성경 통독표 같은 거 나누어 주면서 매일매일 읽을 성경을 읽도록 유도합니다. 대개의 경우 창세기 출애굽기까지는 잘 따라가다가 레위기 민수기가 나오면 거의 반 이상의 사람들이 포기합니다. 저는 이런 식의 성서 통독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용과 의미가 단절되잖아요. 별로 재미도 없습니다.

    성서를 읽는 (제 견해로) 좋은 방법은 사건의 단위별로 성서를 읽는 겁니다. 성서를 이야기의 단위별로 끊어 읽는거죠. 예를 들어 창세기를 읽을 때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삭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가 창세기의 내용이면, 아브라함으로 시작했으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다 읽는거죠. 아브라함 이야기가 창 12장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아브라함이 죽는 기사가 창 25에 나오는데, 거기까지 원샷으로 읽는 것입니다. 한 시간 정도면 됩니다. 물론 매일 한 시간 오로지 성경 읽는데 시간내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가끔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는 이벤트를 올 한해 몇 번 만들어 보기를 권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새해가 되어도 별다른 결심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올해 오십도 되고, 제가 한백교회 담임목사 취임한지 횟수로는 4년차, 만으로도 3년을 맞이하면서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성경을 좀 정해진 시간에 주기적으로 읽자, 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하늘 뜻 준비할 때, 논문을 쓸 때나 원고를 쓸 때 자주 성경을 보지만, 그런 목적이 있는, 직업으로서의 성서읽기 말고, 그냥 단백한 성서읽기를 해 본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실험 중입니다. 언제가 가장 일정하게 아무런 구애 받지 않고 시간을 낼 수 있을까, 실험중인데 만만치 않네요. 어쨌든 저는 지금 2018년 새해가 되어 단백한 성서읽기를 시작했습니다. 벌써 창세기를 다 읽고 출애굽기을 읽고 있습니다. 일단 레위기- 민수기를 넘어가는 것이 목표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02.

    오늘 하늘 뜻 나누기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읽다가 들었던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단백한 성서읽기를 한다고 했는데 어느덧 목적이 있는, 직업으로서의 성서읽기가 되어버렸네요. 창세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2장 4절까지가 첫 번째 창조이야기라면, 창세기 2장 4절부터는 두 번째 창조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 내용은 첫째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와 2장부터 등장하는 창조이야기 사이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신이 창조하기 전에 세상이 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 1:2) 반면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메마른 광야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창 2:5-6)  

   이러한 차이는 창조 이야기가 쓰여지던 시기와 공간적 배경을 암시하는 단서입니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는, 즉 물로 가득찼던 세상에서부터 창조가 시작되는 이야기는 바벨로 강가로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때 형성된 이야기입니다.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 비옥한 초승달지역은 인류 4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죠. 앗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 제국들이 이 강가에서 발원하고 성장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강들이 홍수가 나서 범람하면 온통 물난리가 나서 모두가 쓸려내려 갔습니다. 이런 배경속에서 포로로 잡혀와 이방땅에서 살고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신은 우리를 위해 물과 물 사이를 갈라 하늘을 내고 길을 내고 땅을 마련하여 우리를 안전하게 만드는 신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에는 이렇게 창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때 위로는(에누라 엘리쉬) 하늘이 이름 지어지지 않았고, 밑으로는 마른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들(신들)의 아버지 압수(남신, 지하수 상징)와 그들 모두를 낳을 모체 티아마트(여신, 바닷물 상징)는 자기네들의 물을 하나로 섞고 있었다.”창세기 1장과 굉장히 유사하죠. 


03.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메마른 광야 지대인 가나안땅을 배경으로 합니다. 가나안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가나안땅은 메마른 척박한 해발고도 800미터되는 산지가 중앙에 버티고 있는 척박한 땅입니다. 그나마 그 지역에서 살만한 땅은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해안지대,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그 땅이 유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메마른 광야지대에서 살았다고 보면 맞습니다. 물이 귀한 곳이었기에 땅에서 물이 솟아나 온 땅을 적셨으면 좋겠다, 라는 환상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볼 때 바벨론 포로기때 형성된 첫 번째 창조설화보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가 역사적으로 더 오래된 창조이야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의 핵심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 역시 고대 메소포타미아 창조 이야기에 거의 공통되게 언급되는 점이라고 고고학자들은 말합니다. 최초의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수메르의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처음에 큰 신과 작은 신이 살았다고 해요. 작은 신들이 노동을 담당했고, 큰 신들은 작은 신들이 노동하는 것을 보고(감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작은 신들이 점점 불평불만이 늘어나면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큰 신들이 작은 신들의 불평소리가 시끄러워 자기들이 쉴 수가 없게 되자, 작은 신들의 우두머리를 처형하고 그의 피를 흙과 섞어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작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지게 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는 큰 신들이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반역한 신들의 피를 흙과 섞어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속에 인간을 바라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관점이 들어있는 거죠. 인간은 반역의 DNA를 타고 났다는. 창세기 2장에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역시 당시 퍼져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인간 창조설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DNA에 반역의 인자만이 섞여 있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살아있는 따듯한 인간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왜 어떻게 언제부터 이런식 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일어났을까...이 부분은 다각도에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두 번째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첫 번째 창조이야기입니다.


04.

    창세기에 등장하는 두 개의 창조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은 어쨌든 신이 인간에게 살만한, 아니 살기 아주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을 생각해보세요.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씩 만들어가면서 “좋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빛을 만들고 나서,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지는 것을 보시고, 땅에서 온갖 생명이 돋아나는 것을 보시고, 창공에 빛나는 것이 땅을 환히 비추는 것을 보시고, 물과 하늘에 생명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신은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최종적으로 “참 좋았다”라는 여느때보다도 더 강한 감탄을 합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만들었을 때랑은 달리 인간을 만들고 나서‘좋았다’에서 ‘참 좋았다’로 신의 표현이 격상된 이유는 무엇일까, 를 둘러싼 엉뚱한 호기심, 그리고 발칙함 같은 것이 작동하더군요. 과연, 신은 무엇 때문에 ‘참’ 좋았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창세기 1장31절인데, 그 앞 창세기 1: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the image of God, eidos)대로 사람을 창조하였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른 것 들을 만들었을때는 안 그랬는데, 유독 인간을 만들 때 신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성서는 강조합니다. 신이 태양을 만들든, 달을 만들든, 동물을 만들든, 식물을 만들든지 간에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대상 사이는 명확한 간극이 있었습니다. 그것을‘주체/객체’라 부르든, ‘대상/실재’라 부르든, ‘주관/객관’이라 부르든 명확한 간극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있었습니다.


05.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신의 형상대로 그것들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독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이 주입된 것이죠. 그렇다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실체로 존재했던 신이 당신의 독특함(전지전능함)을 버리고, 신과 인간 사이 존재하는 간극을 뚫고 우리(인간)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론의 독특함이고, 그것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고, 예수가 당했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죠.

    인간 세계속으로 들어온 신은 한마디로‘고통받는 신’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Moltmann)은 그 신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슬라보예 지젝(Zizek)은 하이데거(Heidagger)의 발언인“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를 “고통받는 신 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는 말로 바꿉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라는 말은 신이 인간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 같지 않은 신이 된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특수한 신적인 특징이 투입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 속으로 들어온 신은 단순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으로 우리를 구성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간 안에 어떤 다른 공간이 생긴 것이죠. 그것을 X라고 했을 때, 그것을 데리다(Derrida)는‘차연’으로, 레비나스(Levinas)는‘타자’로, 들뢰즈(Deleuze)는‘홈’으로, 지젝(Zizek)은 틈과 균열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06.

    그럼, 여러분들은 그 빈 공간 X 를 뭐라 부르겠습니까? 인간 안에 있는 인간 이상의 그것, 인간을 인간이 아닌(Not All) 어떤 것으로 만드는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 물음에 대해 자끄 라깡(Lacan)은‘충동(drive)’을 말합니다. 충동과 본능은 다릅니다. 본능은 살고자 하는 에너지죠. 하지만, 라깡에서의 충동은 기본적으로 ‘죽음충동’입니다.

    인간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모두 쾌(기쁨)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본능이죠. 하지만 충동은 죽음을 무릅쓰고 가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죽음충동을 갖습니다. 죽음충동을 이야기 할때마다 언급되는 인물이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나오는 안티고네입니다. 국가에 대해 이적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법(크레온)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지시키고, 애도로 못하게 하죠. 여기서 윤리의 문제, 행위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반역자에 대해서는 장례와 애도를 표할 수 없다는 법을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이든 지켜져야 한다는 (실정)법 밖의 그것을 지켜야 할까요? 안티고네의 문제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실정)법을 지키면 안락하고 편합니다. 이것이 쾌락의 원칙, 본능에 합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금지된 애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국법으로 다스려집니다. 죽음이 예상되는 그것을 강행하는 것이‘충동(drive)’이고, 그래서 모든 충동은 ‘죽음충동’이 되는 것입니다.

    칸트(Kant)는 이것을‘자유’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현실의 원칙(현실계)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지만 그 너머의 세계(가상계)를 바라보면서 나가는 존재인데, 그 힘이 자유이고 그 자유를 향한 행위가 도덕이 되는 것이죠. 즉 자유란 인간이 기표화, 의미화, 법질서에 충실한 존재로만 국한될 수 없다는 마지막 저항지점이고, 그 공간이 바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교두보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07.

    어쩌면 역사는 충동의 역사였고, 자유를 향한 역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쾌락의 원칙에 만족하지 않았던 충동적이었던 사람들, 현실을 지배하는 법의 목소리가 부자유스러워 자유를 외쳤던 사람들, 현실을 지배하는 욕망의 법칙을 거슬러 올라갔던 무수한 쾌락의 원칙을 넘었던 사람들의 외침과 몸부림이 점점이 박혀 선을 이루고 그 선을 연결하면서 역사는 이어져 왔던 것 아닐까요. 이런 충동의 역사와 자유를 향했던 역사는 너무나 많아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범위를 좁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벌어졌던 사건들만 생각해도 지금 당장 다음과 같은 사건들과 인물들이 떠오릅니다. 1987년 6월 항쟁이 그랬고, 80년 광주가 그랬고, 문익환과 장준하가 그랬고, 4.19가 그랬고, 3.1 만세운동이 그랬고, 상해임시정부의 인물들이 그랬고, 동학의 전봉준이 그랬습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보시기에 참 좋았다(it was very good)... 과연, 무엇이 좋았을까?” very good에서 very가 들어간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개입했기 때문일텐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drive를 지닌, 즉 충동적인 존재들 아닐까. 그래서 신이 drive를 지닌 인간들이 앞으로 일으킬 사건들을 미리 내다보시고 좋았던 것 아닐까. 이것이 신이 인간을 만들고 그렇게 좋아했던 이유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2018년이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시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보기에 참 좋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저는 이 말이 2018년 한해를 살아 갈 우리들에게 각자가 거하고 있는 삶의 공간속에서‘충동적’으로! 살라는 말로 들립니다. 올 한해 주께서 주시는 한없는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Happy New Year!


ⓒ 웹진 <제3시대>



  1. 1월14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보시기에 참 좋았다... 과연, 무엇이 좋았을까?”를 수정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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