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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빌라도를 위한 변명(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8. 3. 2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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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를 위한 변명[각주:1]

: 유대인의 왕,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기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빌라도는“나는 쓸 것을 썼다”하고 대답하였다. (요한복음 19: 19-22)



01. 빌라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인식이 안 좋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보통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데, 빌라도라는 이름은 매주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런 사도신경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역사가 계속되는 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아주 나쁜 놈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빌라도에게 그런 오명이 생기게 된 결정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예수를 심판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과연 빌라도가 이렇게 사도신경에까지 올라 대대로 죽일 놈이라고 지탄받고 저주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빌라도에 대한 나름의 변명을 오늘 하늘 뜻 시간을 통해 시도하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로마가 이스라엘에 파견한 총독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옛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했을때 조선총독부를 두어 총독을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로마의 종교는 다신교입니다. 로마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많은 땅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렸지만 식민지 통치에 있어 종교적으로는 관대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종교였던 유대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거리가 등장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 (대제사장, 바리새파 등등)과 로마의 관계가 어떠했는냐? 하는 점이죠. 로마의 총독들은 식민지 국가의 민족지도자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부여하여 그들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여 밀약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직 목표는 원활한 세금징수와 노동력 제공입니다. 반란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고 평온한 임기를 보내는 것도 로마의 식민지 총독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02. 빌라도의 어록

그런 빌라도가 지금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나이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처형하라고, 예수를 살려두면 민심이 이반될 것이라고 그러니 그 자를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지금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는 장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다 나오는 장면이고, 예수의 죄목으로 십자가 위에 달린 죄패 “유대인의 왕”에 대한 기사 역시 4복음서에 다 등장합니다. 아래 각주에 빌라도가 재판에서 한 어록을 복음서 별로 달아놓았습니다. 아래 각주에 빌라도가 재판에서 한 어록을 복음서별로 달아놓았습니다.[각주:2] 마태, 마가,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의 빌라도 재판 사이에 있는 빌라도의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과 심정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요한복음이 좀 더 질문의 층이 다양하고 심층적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대한 차이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를 다른 복음서에서는 누가 썼는지 불분명한데,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예수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위한 것이었다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빌라도가 선택한 ‘유대인의 왕’은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빌라도는“나는 쓸 것을 썼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What I have written, I have written)입니다. 카톨릭 성경에는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총독인 내가 이렇게 쓰겠다는데 왜 이렇게 토를 달지, 총독인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라고 해석할 수 있고, 심문 과정에서 예수를 대면하고 대화하면서 그 아우라와 품격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면서 정말 예수가‘유대인의 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이라면.... 빌라도가 한“나는 쓸 것을 썼다”라는 답변은 그래서 많은 상상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03. '노르웨이의 숲' 혹은 '노르웨이산 가구'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올 무렵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젊은 청춘들의 사랑, 이별, 죽음, 삼각관계, 허무...이런 감정들이 하루키의 특유의 문체로 잘 전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앓이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상실의 시대’의 원제가 <노르웨이 숲>입니다. 이 책의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지금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비틀즈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틀즈가 1965년에 본인들의 여섯 번째 앨범(Rubber Soul)을 출시합니다. 그 앨범에 수록된 곡 중 <노위전 우드>(Norwegian Wood)라는 곡이 있습니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Norway(노르웨이)라는 나라 아시죠. Norweigian는 형용사로 쓰일때는 노르웨이의, 명사로 쓰일때는 노르웨이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Norwegian Wood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노위전 우드>(Norwegian Wood)는 1987년에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이기도 합니다. 하루키는 Norwegian Wood를 ‘ノルウェイの森 ’, 즉 ‘노르웨이의 숲’이라 옮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노르웨이의 숲>으로 알려 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번역이라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통상 Wood 나무(혹은 가구로 해석되기도 함), Woods 가 숲(林)입니다. Norwegian Wood는 ‘노르웨이 나무 or 가구’로 번역하는 것이‘노르웨이 숲’으로 번역하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이죠.

제가 아래에 비틀즈의 Norwegian Wood 가사를 한글로 달아드리겠습니다. Norwegian Wood 나오는 부분만 영어로 남겨 둘께요.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주십시오. <노르웨이 숲>이 좋은지, <노르웨이 가구>가 좋은지를: “한때 난 사귀는 사람이 있었지. 아니 그 사람이 나랑 사귀어준 거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은 방을 보여줬어. Isn’t it good? norwegian wood. 편히 있다 가라며 아무 곳에나 앉으라고 했지. 그래서 둘러보았지만 의자가 없더군. 바닥 깔개에 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시간을 죽였어. 2시까지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 그 사람이 말했어. 이제 잘 시간이야. 자기는 아침에 근무라며 웃기 시작하더군. 난 아니라고 말하고는 욕조로 기어들어가 잤지. 눈을 떴을 때는 혼자였고 새는 날아가버렸더군. 그래서 난 불을 질렀어. Isn’t it good? norwegian wood.”

영어로 쓰여져 있는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솔직히 둘 다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갑자기 노르웨이 가구와 숲 이야기를 왜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택일을 하라면 둘 다 써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멋지지 않아(짱이지, 좋지 않아) 노르웨이 가구 or 노르웨이 숲”. 저는 다 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냥 후렴구처럼 “멋지지 않아요. 노르웨이 숲”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자기 집에 있는 노르웨이 가구를 자랑하면서 “멋지지 않아요 (우리집) 노르웨이 가구”라고 말할 수도 있죠.

어떤 문학작품을 해석하려면 당시 문화와 관습과 그 사회의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죠. 비틀즈 전문가들에 의하면 1960년대 영국에서 노르웨이산 가구(Norwegian Wood)가 인기였다는 겁니다. 이 노래에서는‘노르웨이 숲’ 보다는 ‘노르웨이 가구’가 더 맞는 해석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노르웨이 숲’이든 ‘노르웨이 가구’든 간에 그 부분의 가사가 이 노래 전체에서 이질적인 그로테스크한 불순물 같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습니다.


04. 돌발, 우연 그리고 진실

하루키는 영미소설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하루키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 누구보다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이 사실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왜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번역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한마디쯤 답변을 했을법도 한데 별다른 하루키의 대응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이영미 역, 비채)에 보면 ‘노르웨이의 나무는 보고 숲은 못보고’라는 글에서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번역한 ‘노르웨이의 숲’은 오역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하루키는 No, 나는 잘못 번역하지 않았다, 라고 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하루키의 변론이유입니다. 실제로 비틀즈 노래를 들어보면, Isn’t it good? Norweigan Wood가 들릴 듯 말 듯 애매하게 들립니다. 전체적으로 곡을 지배하는 메시지는 모호하고 몽롱하고 흐릿합니다. 그 노래 가사 중 배치된 돌출적인 Isn’t it good? Norweigan Wood 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루키는 그 모호함과 불편함이 이 곡의 생명이고 메세지라 말합니다. 자기가 번역한 ‘노르웨이의 숲’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노르웨이산 가구’역시 맞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루키는 말합니다. 그 정답을 말해버리는 것이 이 곡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정답을 말해버리면 이 곡의 생명은 끝난다는 것이죠. 그냥 답답하고 뭔가 풀리지 않는 불쾌함과 군더더기를 남기면서 그 곡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하루키는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비틀즈 멤버가 4명이었죠.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스타). 조지 해리슨 사무실에 있었던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제목이‘Knowing s/he Would’였답니다. 문제가 되는 가사도 “Isn‘t it good? knowing s/he would”였다는 거죠. “멋지지 않아? 그(녀)가 하려는 것을 안다는 건 말이야.” 전체적인 노래 가사가 몽환적이고 약간 썸타는 분위기도 있고, 무슨 로맨틱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을 전제로 하는데, 서로 호감이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할 것 같은 아찔한 순간을 예상하는 말이 바로 knowing s/he would입니다.

그런데 음반 회사 측에서 가사가 선정적이어서 검열에 걸릴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자, 존 레넌이 홧김에 knowing s/he would 를 Norweigan Wood로 바꿔버렸다는 겁니다. 어쩌면 Norweigan Wood, 즉 <노르웨이의 숲> 혹은 <노르웨이산 가구>는 뻥카입니다. 그렇다고 한 세대가 흐른 시점에서 모두가 Norweigan Wood로 불렀던 노래가사를 knowing s/he would로 바꿔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죠. 지금까지 저는 Norweigan Wood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Norweigan Wood는 무엇일까요?


05. 진리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하여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를 쫓아가면서 하루키도 생각이 났고, 존 레논 생각도 났습니다. 하루키가 생각이 난 이유는 Norweigan Wood를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번역해놓고 그것이 틀리지 않느냐는 지적에 정답이 없으므로 나의 번역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버리는 배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쿨함. 그래도 그때는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라고 밝히는 그의 솔직함 때문이었습니다. 존 레논이 생각나는 이유는 원래는 knowing s/he would 였는데, 검열당국의 성화에 못 이겨 비록 가사를 Norweigan Wood로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계속 불명확하게 Norweigan Wood를 읊조리면서 knowing s/he would로 부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아죠. 우리가 처한 압제와 구속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의 도래를 유대인들은 대망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 하에서는 그런 메시아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내란죄, 국가보안법에 저촉을 받는 큰 죄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조롱하면서 예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 써서 붙입니다. 네 주제에 우리의 왕이라니. 어림없는 소리고 웃기는 소리다, 라는 경멸의 메시지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전하는 빌라도가 직접 써서 붙인 ‘유대인의 왕’은 좀 느낌이 다릅니다. 빌라도는 ‘어쩌면 이 자가 정말 유대인의 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빌라도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죄패에 쓰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굳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면서 “나는 쓸 것을 썼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어쩌면 유일하게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던 최초의 인물은 스승이 잡히고 뿔뿔이 흩어졌던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라 빌라도 아니었을까. 진짜 메시아는 이렇게 남루하고 초라하게 우리 곁에 머물다 가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빌라도 혼자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진심을 담아 정말로 예수가 메시아였다, 라는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라 썼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빌라도를 소환하여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이 썼던 ‘유대인의 왕’은 무슨 의미였고, 당신이 만났던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냐고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다시 존 레논이 생각났습니다. knowing s/he would를 Norweigan Wood로 부르는 존 레논, 아니 Norweigan Wood를 knowing s/he would 부르는 존 레논. 어쩌면 이런 교란이 존 레논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교란의 방식이 Norweigan Wood가 텍스트로 작동하면서 살아남았던 이유입니다.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의 왕(메시아), 유대인들이 예수를 조롱하면서 그의 십자가 위에 죄패로 붙인 유대인의 왕(메시아), 빌라도가 예수를 대면한 후 쓴 유대인의 왕(메시아), 어쩌면 빌라도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왕(메시아) 서사를 교란시키면서 유대인의 왕(메시아)에 대한 서사를 다시 써 내려갔던 인물은 아닐까. 저자가,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면서 절규하지만 자기 목숨 하나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저 사람이 진짜 메시아라고 말입니다. 이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빌라도는 사도신경에 등장하여 그 후로 2000년이 흐른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원성과 아우성을 받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렇듯 빌라도가 말한 ‘유대인의 왕’은 우리의 (신앙, 혹은 신학의)경계를 교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어쩌면 그 경계에 대한 교란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전달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예수가 존재했던 방식과 그의 행위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절정이 십자가 사건이고요. 유대인들의 메시아주의가 지배했던 세상은, 로마의 평화가 제국을 지배했던 세상은 온갖 경계로 가득했던 세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도그마가 만든 경계였고, 제국의 질서가 만든 경계였습니다. 그로부터 2천년이 흐른 21세기, 자본이 지배하는 지구촌의 상황도 그리 이전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 정상인/장애인, 남자/여자, 백인/흑인, 내국인/난민, 이성애자/동성애자, 제국의 시민/ 그 밖의 인간>이라는 이항 대립의 원칙으로 구성됩니다. 빌라도가 물었던, 그리고 직접 예수의 십자가위 죄패로 썼던‘유대인의 왕’은 그 나누어진 경계를 교란시키고 흔들고, 결국에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표가 아닐는지.


06. 지금은, 2018 사순절

저는 빌라도가 자기의 목숨을 구하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그 사람이, 군중들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받는 저자가 진정한 메시아라는 비밀을 알았고, 그리고 예수와 만났던 그 순간이 자신에게 자유와 해방이 임했던 경이적이고 매혹적인 한 순간이었다, 라고, 그 찰나의 변화가 사실은 내 모든 선택의 순간과 삶의 고비마다 다짐과 결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고 간증하지 않았을까, 라는 순진하고 나이브한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사건이, 그 실패한 메시아 사건이 예수의 죽음으로 사라지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당장에 급한 불만 끄면 위기를 모면할 것이라고 빌라도는 생각했겠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 불은 꺼지지 않고 불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또 다른 메시아 사건의 원인이 되었고 그곳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기재가 되었습니다. 예수에 의해 감행되었던 실험은 유일회적인 실패한 기억으로 화석이 된 채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계속 역사에서 재생 반복되면서 더 큰 음모와 반란, 그리고 변혁의 시나리오가 되어 지금까지 유전되면서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빌라도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출발한다고 봐야겠죠. 그것에 대한 해석은 <노르웨의 숲>을 독해하는 방식처럼 지난하겠지만,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사건의 의미와 그것의 현재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고민과 기도를 회피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저는 신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과 부활절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교가 갖는 신비를 묵상하는 기간이고, 그것에 참여하는 시간이구요. 지금 우리는 2018년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2018년 3월 11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본문으로]
  2. 1) 마태복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27:11),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27:13), "여러분은,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27:17),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27:21),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27:22),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27:23),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27:24) 2) 마가복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15:2),"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 (15:4), "여러분은 내가 그 유대인의 왕을 여러분에게 놓아주기를 바라는 거요?" (15:9), "그러면, 당신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그 사람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15:12),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15:14), 15절에 가서 넘겨줌. 3) 누가복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23:3),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23:4),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오?" (23:6), "그대들은, 이 사람이 백성을 오도한다고 하여 내게로 끌고 왔으나, 보다시피, 내가 그대들 앞에서 친히 신문하여 보았지만, 그대들이 고발한 것과 같은 죄목은 아무것도 이 사람에게서 찾지 못하였소. 헤롯도 또한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를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이오. 이 사람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하고, 놓아주겠소."(23:14-16),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나는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까 하오." (23:22) 후에 백성의 아우성이 너무 커서 넘겨줌 4) 요한복음: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18:35),“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18:35),“당신은 왕이오?”(18:37), “진리가 무엇이오?”(18:38),“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18:38-39), "보시오, 내가 그 사람을 당신들 앞에 데려 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오." (19:4), "보시오, 이 사람이오" (19:5),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19:6), "당신은 어디서 왔소?"(19:9),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9:10),"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 (19:14),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19:15), "나는 쓸 것을 썼다"(19: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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