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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안전한 선택지에 가려진 것들: <코코>(2017) (조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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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3시대 2018. 2. 2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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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선택지에 가려진 것들: <코코>(2017)



조은채*

 

※ 영화 <코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딱히 불편한 감수성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은데도 그 영화에서 어떤 점이 너무 거슬릴 때가 있다. 이럴 때마다 왜 괜찮은 결과물에서도 '굳이' 나쁜 점을 찾게 되는지 스스로 뒤돌아보게 된다. 그건 명백하고 노골적이게 불편한 작업에서 거슬리는 부분을 짚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불편한 경험이다. <코코>(2017)가 그랬다.


  멕시코의 설화에 기반을 둔 <코코>는 아름답고 화려하면서 이승보다도 더 생기가 넘치는 '저승'을 무대로 진행된다. 멕시코에는 '죽은 자의 날'이라는 전통 축제가 있는데, 죽은 자들은 1년에 단 하루 이 '죽은 자의 날'에 이승의 가족을 방문할 수 있다. <코코>의 주인공 미구엘은 바로 이날 죽은 자의 물건을 훔친 벌로 저승에 떨어지게 된다. 벌이라고 보기에는 미구엘이 도착한 저승은 온통 반짝이는 데다가 활기가 넘쳐서 '살아있는 자'도 충분히 마음을 빼앗길 만큼 매력적이다. <코코>에서 이승과 저승은 오갈 수 있는 이웃 나라가 되고, 죽음은 두렵거나 불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가까운 친구 같은 존재가 된다. 나를 먼저 떠난 소중한 존재가 이승보다도 더 아름다운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코코>의 메시지는 기꺼이 믿어보고 싶을 정도로 달콤하다. 하지만 <코코>는 자주 '안전한' 선택을 한다. 아니, 안전한 것 외의 선택지는 '굳이' 염두에 두지조차 않았던 것 같아서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코코에서 이야기의 진정한 '발단'은 주인공 미구엘이 아니라 그의 고조할머니와 고조할아버지이다. 한 남자가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내와 어린 딸을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여자, 이멜다는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다. 왜 하필 구두 만드는 일을 골랐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의 수완이 좋았던 건지 혹은 손재주가 뛰어났던지 어쨌든 이멜다의 사업은 꽤 성공한다. 고손자인 미구엘이 태어나기까지 꽤 대가족이 되었음에도 온 가족이 구두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삼고 여유롭게 살아간다. 하지만 구두 사업의 성공이 이멜다의 모든 상처를 치유해주지는 못했다. 이멜다는 음악을 하겠다며 가족을 버린 남편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고, 결국 그녀의 집안에서 음악을 완전히 금지한다. 그 금지는 이멜다와 이멜다의 딸인 코코, 그리고 고손자 미구엘에게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금지의 원인이 되었던 떠나버린 가장에 대한 분노는 점차 옅어진다. 이멜다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딸인 코코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미구엘의 증조할머니로만 등장하면서 별 대사 없이 웃기만 한다. 도망친 가장에 분노나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이승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는다. 고손자인 미구엘에게 이멜다의 해묵은 분노는 솔직히 이입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남의 일이다. 영화 <코코>는 가족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가족의 중요한 역할을 분노의 대상으로만 남길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코코>는 세대를 거쳐 그 분노를 조금씩 희석한 후에, 가족 외부에서 분노의 원인을 설정하는 안전한 선택을 한다.


  전설적인 가수인 에르네스토는 여러모로 중요한 인물이다. 미구엘은 에르네스토가 자신의 숨겨진 고조할아버지라고 오해하고 그의 기타를 훔친다. 미구엘은 음악을 반대하는 할머니가 부숴버린 기타 대신의 에르네스토의 기타로 마을 노래대회에 참가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미구엘은 무려 '죽은 자의 날'에 '죽은 자'의 기타를 훔친 죄로 저승에 오게 된다. 미구엘은 이승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서, 또 전설적인 가수이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인 에르네스토를 만나기 위해 왕년에는 뮤지션이었다는 초라한 행색의 남자 헥터와 함께 고군분투한다.


  에르네스토는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손자라는 미구엘이 노래 경연대회에서 두각을 보였다는 사실에 그를 퍽 반가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네스토가 희대의 악인이자, 미구엘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승에서 아무도 자신의 사진을 제단에 올려주지 않은 데다가 딱히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다는, 내내 우스워 보였던 헥터가 사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였다. 더욱 놀라운 진실도 밝혀진다. 헥터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내와 딸을 뒤로하고 에르네스토와 함께 떠났다. 하지만 가족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헥터는 에르네스토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에르네스토는 헥터가 만든 곡 없이는 유명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헥터를 독살하고 그의 곡을 훔쳐 유명해진다. 알고 보니 헥터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가족을 깊이 사랑하기까지 했던 멋진 가장이었다. 이멜다는 헥터가 실은 살해당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딸을 떠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고손자인 미구엘에게 헥터도 돌아오고 싶었지만 '에르네스토 때문에' 불가능했다는 '훈계'를 들을 뿐이다. 왜 헥터만 떠날 수 있었고 이멜다는 없었는지, 혹은 헥터에게 어떠한 이유가 있었든 이멜다의 고통이나 분노가 정당하다는 사실은 너무도 쉽게 곁가지가 되어 <코코>에서 잘려나간다. 헥터가 애초에 가족을 떠났다는 사실은 에르네스토라는 악당의 존재감에 밀려 더는 별 문제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이 갖는 위대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코코>는 에르네스토라는 악당의 몸집을 불려 모든 문제를 그에게 환원해버린다. <코코>는 에르네스토라는 안전하고 편리한 선택지로 우회하면서 가족 문제의 원인을 가족 외부로 돌리는 것에 성공한다.


  <코코> 속 저승에도 영원한 작별은 존재한다. 이승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면 저승의 존재는 소멸된다. 유일하게 자신을 기억하던 딸인 코코가 모든 기억을 점차 잃어가기 때문에 헥터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다. 저승에서 돌아온 미구엘은 증조할머니 코코에게 달려가 헥터가 만든 노래인 '기억해줘(Remember me)'를 간절하게 부르며 그녀의 아버지를 기억해낼 것을 간청한다. 어느새 정신이 돌아온 코코는 놀랍게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다정했던 아버지' 헥터를 기억해낸다. 아마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일 장면이겠지만, 이 장면은 화해도 용서도 아니다. 용서나 화해 모두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잘못을 인정해야만 하므로 문제를 가족 외부로 돌리려는 <코코>에서 코코에게 이 두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코코에게는 아버지를 망각에서 소환해내 그에게 다시 '가부장' 혹은 '아버지'라는 위치를 돌려주는 선택지밖에 없다.


  <코코>는 가족은 그 자체로 일단 선하고 완전한 것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코코> 속의 '진정한 가족'은 대단히 협소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저승에서도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모여 살면서 유사가족과 같은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코코>는 이들이 '진짜 가족'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그들보다 행복할 수도 없다고 믿는 듯하다. 유사가족은 화려한 저승과 대비되는 어두침침하고 누추한 곳에서 영원한 소멸을 두려워하면서 숨죽이고 살아간다. 하지만 헥터는 고손자의 활약과 내가 떠나도 나를 항상 기억해달라는 어찌 보면 이기적인 노래로 유사가족에서 무사히 졸업하고 진짜 가족에 다시 편입된다. <코코>는 한때 가족을 버리고 꿈을 좇았던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부채를 고손자를 통해 대신 상환해주고, 그가 다시 가족에 돌아올 수 있게끔 그럴싸하고 멋진 사연까지 마련해준다. 하지만 모습을 되찾은 <코코> 속의 '정상 가족'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은 그저 증발해버리고, 누군가의 잘못은 잘못이 아니게 된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같은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블로그(http://eunchaecho.tistory.com)를 드문드문 운영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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