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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X) 예수가 부활했다(O) (황용연)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8. 4. 1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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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부활하셨다(X) 예수가 부활했다(O)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도둑들이 무덤 막은 돌을 굴려 버린 뒤 그 수의를 벗겨 가고, 다시 승냥이떼가 그의 죽은 몸을 물어 간 일이 입에서 입으로 옮는 사이에 좀 부풀리어 졌다손 네가 흔들릴 게 무엇이냐. 거기에 휘말린 줏대 약한 사람들이 헛것을 보고 그가 다시 살아 났다고 수군대며 다닌들 네가 두려워할 게 무엇이냐.”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 나오는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설에 놀란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가 그가 찾아낸 신적 존재인 ‘위대한 존재’에게 달려갔을 때 그 위대한 존재가 아하스 페르츠에게 해 준 말로 나온다.

물론 이 이야기가 예수의 부활에 관련해서 특별히 사실성이 더 있다거나 그럴 것은 아닐 것이다. 애당초 어떤 역사서 같은 것의 기록도 아니고 말 그대로 소설 중의 이야기니. 그래도 예수의 부활의 사실성에 대해서 이 정도로 심한 야유도 드물 듯 하다. 하긴, 아예 예수라는 사람의 실존 자체를 의심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니 그런 입장에서 보면 저런 야유도 필요없는 셈이긴 하겠다.


2. 

사실 성서에서도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극구 애쓰고 ‘증명’을 하려 드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런 건 아니지 않나 싶다. 일단 잘 알려진 대로, 마가복음서는 초기 형태에서는 무덤이 비었다더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나중에 다른 복음서 부활 기사 요약본이 덧붙었다. 다른 복음서의 기사들도 도마가 못자국에 손 넣어 봤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처음 봤을 때는 모르다가 어떻게 알게 되니 사라지고 없더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바울의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이야기도 목격자 명단을 쭉 늘어놓다가 맨 마지막에 “나도 봤어요” 해 버리니, 바울이 예수를 생전에 봤을 리가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이거 뭐하자는 거야 생각이 들 수밖에 없기도 하고.

여기에 덧붙인다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외부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시위와 선전을 하기보다는 내부 결속을 위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이들이 이미 많이 지적하는 대로, 성서 속에서의 부활한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만 나타났지, 그를 죽인 로마와 이스라엘 상층부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뭐 그래도, 확실한 것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처형당할 때 다 도망갔다가, 혹은 위에 언급한 예수의 실존 자체를 의심하는 견해까지 고려한다면 자신들이 그랬다고 말을 했다가, 예수가 부활했다고 말하면서 다시금 자신들의 활동을 재개했고 오히려 그 전보다도 더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것이겠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반전을 생각한다면, N.T.라이트가 말했던, 그 당시 누군가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면 예수의 빈 무덤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거다라는 말이 그럭저럭 말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서두에 소개했던 야유가 사실이라고 해도 빈 무덤 사진은 찍을 수 있는 거긴 하겠지만.


3. 

그러니 이렇게 한 번 물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은, 그 추종자 집단이 아닌 외부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보였을까/보일까.

일단 부활이라는 것이, 생전의 몸과 같은 것이든 아니면 어떤 새로운 몸이든, 다시 생명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가 그 당시에 그리 드문 것만은 아니었다고 하니, 그런 이야기 중의 한 건으로 수용이 되려면 될 수 있었을 것도 같다. 물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가 애당초 그렇게 손쉽게 수용될 이야기가 절대 아닌지라, 당장 복음서에도 에이 그게 말이 되냐 만약 그렇다면 예를 들어 형이 죽어서 동생이랑 결혼한 여자가 나중에 형이랑 동생이랑 자기랑 다 부활하면 어쩔려구 그래 이랬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서도.

그런데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어쨌든 수용이 가능한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부활한 사람이 ‘예수’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다. 일단 이렇게 되묻게 되지 않을까. 예수가 도대체 누구여? 존재 자체를 의심받을 정도로 남긴 기록이 없다시피 하니 이른바 듣보잡 아니겠는가.

듣보잡에서 조금 더 알아 보니 이 친구 사형수란다. 그것도 그냥 사형수도 아니고 불온분자를 처형하는 십자가형을 당한 사형수. 얼레? 그런데 그런 친구가 무려 부활을 했다니 이건 말이 되냐 안 되냐는 둘째쳐도, 불온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듣보잡 혹은 불온분자가 부활했다고 이야기를 한단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는 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란다. 속된 말로, 이게 말이야 방구야?


4. 

이게 말이야 방구야인 것 같은데 그런데도 그런 듣보잡 혹은 불온분자가 부활했다는 게 구원의 길이란다. 그렇다면 그런 구원은 지금의 삶을 그냥 유지하면서 혹은 더 상승시키면서 가능한 건 아니지 싶다. 어느 영화 대사를 문면만 보고 끌어 온다면, 오히려 인생을 망치는 구원, 듣보잡이나 불온분자의 길로 빠질 수도 있는데 그래도 받을래 말래라고 나를 밀어붙이는 그런 구원이라는 게 더 현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 이런 구원은 다른 구원과 경쟁을 하거나, 혹은 다른 구원들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다원주의’에 걸맞는 구원도 아닐 터이고.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그런 구원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난 달 국가조찬기도회인지 뭔지 하는 자리에서 그 자리에 설교하러 나온 목사가 아니라 축사하러 나온 대통령이 오히려 진짜 설교다운 설교를 했다고 칭송이 자자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구원의 길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대통령의 ‘설교다운 설교’보다는, 후보 시절부터 대통령 본인이든 휘하 장관이든 계속 한국 기독교에 “적어도 이건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께”란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대상이 되는, 성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보면 그 ‘설교다운 설교’도, “적어도 이건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께”와 연관이 전혀 없지도 않은 것이기도 하겠고.

그러고 보니 어느새 1년이 가까워 간다. 대선 토론 자리에서 또 한 번 “교회가 원하는 대로” 발언을 해 준 바로 그 사람에게 성소수자들이 항의를 하러 찾아갔던 바로 그 일이.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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