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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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첫 번째 이야기 - 풋내기 목사의 꿈

“하느님께 무엇인가 바치겠다고 너무 성급한 생각을 하지 말고, 조급하게 입을 열지도 말라.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말이 적어야 한다.” (공동번역성서, 전도서 5장 1절)

저는 목사안수를 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풋내기 목사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목회에 관한 이러저러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에 덜컥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을 해 놓고는, ‘또 실수 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이 약해서 글 쓰는 것을 취소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무슨 말이든 쓰기로 했습니다.

저는 목회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해서 목회란 것을 하겠지만 그렇게 몇 십 년 목회를 한다고 해도 ‘목회란 이런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목사가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공간을 통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특히 개신교에 대한 비종교인과 사회의 엄청난 불신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목사가 되어버린 한 인간의 나약한 삶을 그저 쓰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저는 목사가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심지어 교인들조차도 목사 앞에서는 웃으며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도 속으로는 “으이구, 저런 게 목사라니~” 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삶에 있어서 교회와 목사는 이렇게까지 욕만 먹어야 할 곳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여섯 살 때부터 자그만 시골교회를 다녔는데 그 교회는 저를 품어준 보금자리였고, 그 교회 목사님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작은 시골교회에서 동네 사람들과 동고동락하셨고, 제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나이 지긋하신 인자한 할아버지셨지요. 그 목사님은 원래 음악교사셨는데, 아버님이 한국전쟁 중에 순교를 당하자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목사가 되셨고, 평생을 그 작은 시골교회에서 어렵고 힘든 삶을 감당하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신나게 놀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사람들과 함께 모여 얘기하고 웃음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의 유년과 청소년, 청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그 교회에 가면 엄마의 품에서 쌔근쌔근 잠든 갓난아이처럼 포근하고 아늑함을 느낍니다. 제가 어쩌다가 목사가 되었는지 저도 사실은 잘 모르지만 20년 동안 저의 삶의 한 부분이었던 그 작은 교회의 아름다운 경험이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저의 부모는 지금도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제가 신학을 하고 목사까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땅에 뿌려진 씨가 저절로 자라듯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었습니다(마가복음 4:26-29). 세상엔 온갖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많지만 저는 한명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신비를 믿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 인간은 땅에 있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문제 가득한 이 세상도 눈 크게 뜨고 보면, 잠잠히 입 닫고 고요히 있다 보면, 여기저기서 파릇파릇 돋아나는 하나님의 신비로 가슴 한켠에서 잔잔히 밀려오는 감동에 눈물 적시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생존의 욕구와 더불어 자아실현의 욕망으로 가득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저도 욕망이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지요. ‘돈’이 ‘하느님’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돈 벼락이라도 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내밉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욕망이 있다면 제가 그 어린 시절 작은 교회에서 느꼈던 그 행복하고 뿌듯하고 신났던 그 경험을 누군가의 삶 속에 일어나도록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가 이런 저의 욕망에 대해 꾸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 웃긴 놈아! 그러니까 목사 쓰레기라고 불리는 거야. 알았어!” 그래요.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사람은 원래 사람들하고 함께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사는 맛도 느끼는 것이니까, 교회라는 곳이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 곳이 그런 곳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풋내기 목사로서 하느님께 뭔가 바치겠다는 성급한 생각을 할까봐 전도서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사실 제 주변에 가까운 분들은 제가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그렇고 제 아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라는 거창고등학교에 써 있다는 직업선택의 십계명의 뜻을 생각하면서 아마도 전 계속 목사로 살게 될 것 같습니다. 세상엔 수많은 목사가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 개인에게는 단 한번 지내는 일생이겠지요. 목사로서의 제 삶을 반추하고 성찰하기 위해 몇 분들의 생각을 소개하고 첫 번째 글을 마칠까 합니다.

첫 글은 권정생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한 20여년 전, 친구한테 얘기했던 게 생각난다. 내용은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안 넓이는 사람이 쉰명에서 백명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겠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마루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00교회라는 간판도 안 붙이고 꼭 무슨 이름이 필요하다면 '까치네 집'이라든가 '심청이네 집'이라든가 '망이네 집' 같은 걸로 하면 되겠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오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

어때요? 좋지요. 저도 이런 교회를 갖고 싶답니다. 프랑스 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가 하는 공동체가 있는데 거기에 누군가 찾아 오면 세 가지를 물어본다고 합니다. 

“주무시겠습니까? 드시겠습니까? 씻으시겠습니까?”

이 공동체에서는 이렇게 누구나 환영하고 함께 사는 이들은 자신이 먹을 것보다 조금 더 많이 일을 한다고 합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더 일하는 교회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 사셨던 신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이시여!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교 제도 내에서 목사를 하면서 정말 신을 사랑할 때 꼭 해야 할 것들을 할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을 사랑할 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을 사랑할 때 우리는 무슨 행동을 할까요? 신을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목회를 해야 할까요?”

두 손 모아 잠깐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성공회 주교였던 존 엘브리스 하인스가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했던 기도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가 당신께 아무런 뜻도 없는 일들을 습관처럼 행할 때, 우리를 용서하소서.”

ⓒ 웹진 <제3시대>

* 향린교회 http://www.hyangl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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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회개는 진실합니까?
- '회개'라는 언어지옥에 빠진 한 주체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기독교의 회개는 대체 무엇인가?

기독교인에게 ‘회개’의 의미는 남다르다. 회개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이’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 앞에 내어 맡기는, 동시에 삶의 총체적 변화를 결단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를 통해 그는 과거의 죄를 사함(사면) 받는다. 따라서 회개는 이전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경험이다.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회개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는 왜 나에게 전혀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일부 교회의 문제를 전체 문제인 것처럼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특정한 형태의 신앙의 제도가 한국 교회에 보편적으로 내면화돼 있고, 그 신앙 제도에서 ‘회개’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이 한국 교회의 부패를 초래하고 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진실한’ 회개를 하는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군사주의적 선교를 떠나고, 사회의 불의에 침묵하는 현실을 보며, 기독교의 회개는 대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의 회개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을 기독교와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영화 <유레루>(니시카와 미와 감독)를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사진가로 성공해 자유분방하게 살던 다케루(오다기리 죠)가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들러 형을 기다리던 다케루는 자신의 옛 친구였던 치에코가 형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는 치에코를 유혹한다. 치에코는 형 미노루(카가와 테루유키)가 연정을 품고 있는 이였다. 형은 어릴 적 세 사람이 자주 놀러가던 ‘하스미 계곡’에 다시 같이 가자며 더 머물다 가라고 동생에게 권유한다. 다음날, 못 이기는 척 하스미 계곡에 함께 간 다케루는 자신을 따라 도쿄에 가고 싶다는 치에코로부터 도망쳐 구름다리를 건넌다. 다케루를 좇아 구름다리로 달려온 치에코, 그리고 그녀를 좇아 달려온 미노루. 건너편 강가에서 사진을 찍던 다케루는 형과 실랑이를 벌이던 치에코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형에게 달려간다. 다케루는 당황한 형에게 치에코가 혼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이라고 증언하도록 대응요령(?)을 알려준다.

그러나 형의 무죄방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다케루는 형과의 면회 이후 형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기로 한다. 법정에서 보이는 형의 태도를 보며, 그는 형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형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형은, 사실은 동생이 자신(의 결백)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케루가 “나는 형을 믿어”라는 말을 수없이 했지만, 사실 그 이면엔 ‘나는 형이 살인자라는 걸 알아’라는 지식 혹은 믿음이 놓여 있다는 것을 형은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형이 살인죄로 기소된 법정에 증인으로 선 다케루는 차분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그가 목격한 형의 ‘살인’ 장면을 증언한다. 다케루의 증언으로 다리 위해서 형이 내민 손은 치에코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었음으로 ‘판명’된다.

돌아온 탕자-동생 vs. 무한히 자기를 희생하는 자-형 ?

7년을 복역한 형이 출감하는 날, 다케루는 어릴 적 하스미 계곡에서 가족과 촬영한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된다. 어머니가 촬영한 그 영상에서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형이 내민 손과 고소공포증 때문에 구름다리를 건너기를 두려워하는 형을 보고, 형이 의도적으로 치에코를 다리에서 밀어 죽게 했다는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형에게 달려가는 다케루. 길 건너편 버스를 기다리는 형은 소음 사이로 들려오는 동생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동생에게 얼굴을 돌려 미소를 보낸다. 그 미소를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형은 마지막 장면에서까지 동생의 ‘위증’마저도 용서하고 받아주는 무한한 자기희생의 상징처럼 묘사된 것만 같다. 마지막 장면의 형의 미소가 형제의 아름다운 화해의 증거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인 듯하다. 자애로운 형과 이기적인 동생, 그리고 자신을 살인자로 만든 동생의 ‘실수’까지도 묵묵히 용서하는 형. 그리고 동생의 회개와 관계의 회복. 어찌 보면 너무나 통속적인 서사구조를 영화는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만의 장르적 속성을 이용해 서사의 ‘닫힌 구조’를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예를 들면, 다케루가 형의 유죄를 확신하며 회상하는 장면 ― 다케루는 구름다리 위에서 형과 치에코가 나눈 대화를 마치 명확하게 듣고 보았던 것처럼 그려진다. 치에코가 이 시골마을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며, 이 시골만큼이나 미노루를 혐오한다는 듯한 말을 하자 이에 화가 난 미노루가 치에코를 다리에서 밀어버리는 것이 다케루의 회상 내용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영화평론가 김지미의 표현을 빌리면, “카메라는 미노루의 시선보다는 멀리 있으며, 타케루의 시선이 되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회상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모호해진다.[각주:1] (영화에서도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오지만 굳이 설명을 보탠다면, 다케루는 구름다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물소리도 컸기 때문에 형과 치에코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다케루와 형의 마지막 면회 장면에서 카메라의 눈은 형을 향해 있지만 면회실 유리벽을 통해 다케루의 얼굴이 형의 얼굴 바로 옆에 선명하게 비치는 것 또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담아낸다/본다. 이때 진행되는 형의 진술은 다케루가 믿는 ‘진실’이 형의 입을 빌려 말해진 것일 뿐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형의 ‘유죄’가 다케루의 ‘믿음’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데 동시에 이 장면은, 역설적으로, 형이 ‘무죄’라는 사실 또한 관객의 ‘믿음’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형의 ‘유죄’가 다케루의 ‘믿음의 눈’을 통해서 재현된 것에 불과하다면, 다케루의 믿음이 허구이고 미노루가 무죄라는 사실 또한 카메라의 ‘눈’을 통해서 재현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메라의 ‘눈’이 영상에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다케루와 미노루를 관찰하고 있는 ‘눈’은 관객의 ‘눈’과 동일시된다.

해석자를 통해 완성되는 서사구조와 언어지옥

영화의 절정 부분에 등장하는 이 두 장면 때문에 관객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화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부분이 된다. 관객이 해석자로 동참함으로써만 돌아온 탕자로서의 동생 대 자애로운 형의 서사구조가 완성된다.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 영화의 서사는 완성된 구조 또는 닫힌 구조가 되는데, 이와 동시에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바꿔 말하면, 모호해진 회상의 지점(앞에서 든 첫 번째 예)과 다케루의 시선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지점(두 번째 예)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영화의 안과 밖은 뫼비우스의 띠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구별하고, 영화의 서사가 허구인지 진실인지를 판단하던 ‘주체로서의 관객’ 대(對) 해석과 판단을 기다리는 ‘대상으로서의 영화’라는 이분법은 허물어진다.

다시 영화 ‘안’의, 또는 우리가 영화 ‘안’이라고 믿는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다케루는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영상에 담긴 형과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보고 자신의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닫는다.(“흔들리는 다리에서 발을 헛디딘 것은 형이 아니라 나였다” 운운하는 마지막 나레이션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유지되고 있는 형의 이미지―자애롭고 자기희생적인―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 것일까. 형은 어머니의 기억, 다케루의 재현(그나마도 오락가락하는),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을 통해서만 재현될 수 있는, 그 스스로는 자신을 재현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이 영화는 아름다우면서도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을 재현할 능력이 없는 타자에 대해 ‘잘못된’ 재현을 한 결과 그 타자는 ‘살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재현을 한 주체가 ‘아, 그 판단은 실수였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타자는 마술처럼 다시 ‘자애로운 자기희생적인 형’이 된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주체의 변덕이 다시없으리란 보장을 할 수가 없다. 다케루는 자신의 판단의 착오는 인정했을지언정, 그 판단을 하는 주체 자체는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주체의 실수’는 인정하지만 ‘주체 자체가 틀렸을’ 가능성은 전혀 사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주체의 ‘앎/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진실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다케루의 회개는 매우 진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케루의 반성과 회개는 그것이 ‘진실한’ 것이었다 해도 결국 주체의 경계 자체는 사유하지 않는, 여전히 타자를 배제함으로써만 성립하는 반성과 회개일 수 있다. 그는 회개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저 회개라는 언어의 지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앞서 이 영화는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만 완성된 서사를 갖게 되며, 그 과정에서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다고 했던 것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미노루가 ‘타자’ 또는 ‘보여지는 자(재현대상)’에 대한 은유라면, 다케루는 ‘주체’ 또는 ‘보는 사람(관객)’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는데, 감정이입을 통해 자애로운 형 대(對) 돌아온 탕자 동생의 이분법과 서사구조를 완성시켰던 관객은 과연 미노루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다케루를 언어지옥에 빠지게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다케루와 미노루의 화해를 상상한 관객은 과연 ‘화해’라는 언어의 지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영화 안의 주인공에 대한 사유를 넘어 관객인 우리의 사유하는 태도 자체에 대해 그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나 회개하지 않는 기독교인

기독교인에게 회개와 관계회복의 전형처럼 수용되고 있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유레루>의 서사구조와 상당히 닮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사 자체가 닮았다기보다는 서사가 수용/소비되는 방식이 닮았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이러한 서사 수용방식―달리 부른다면, ‘돌아온 탕자’ 담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무한히 자애롭게 그려지는 타자로서의 하느님과 그 신 앞에서 어떤 죄도 마술처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 주체뿐이다. 이 기독교 주체의 회개는 ‘진실하다’. 그러나 그 진실함은 주체의 경계 안에서 느끼는 자기애의 정도에 비례할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 욕하는 상황에서, 욕하는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진실하게 기도하는 기독교 주체의 이해 못할 행동은 이러한 회개 담론을 통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독교 주체에게 회개란 무엇일까, 그를 언어의 지옥에서 건져내는 구원의 빛은 어디에 있을까.  ⓒ 웹진 <제3시대>

  1. 『씨네21』 2006년 8월 30일자 - 김지미, "인간의 기억과 믿음은 진실일까?" <유레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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