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작은 도시 공동체 이야기 4]



가치가 이끄는 삶


 

 

최규창[각주:1]

 


 

목적이 이끄는 삶


       제1세계의 유명한 목사가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다. 이미 대단한 양적 성공을 거둔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 성공의 동력으로 제시한 이론은 어떤 것이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었다. 근대적 합리성에 근거한 신앙성장 논리와 이를 따르는 교인들의 헌신, 그리고 현대 경영학적 전략과 전술을 잘 버무린 릭 워렌의 연작들은 계속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급기야 <목적이 이끄는 삶>에 와서는 마치 그 모든 성공의 비밀이 밝혀진 것처럼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거룩한 목적’, 이것만큼 사람들의 욕망과 신앙을 불편하지 않게 조화시킨 말이 있을까. 우리의 삶을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의 목적으로 방향지우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삶의 우선순위, 일상의 계획, 경제적 삶의 유지, 시간사용, 재정관리, 사람들과의 만남 등 그 모든 기저에는 ‘목적’이라는 엔진이 항상 구동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지구는 둥글다’는 말처럼 의심되지 않는 명제였다.  

       그러나 목적은 항상 권력을 생산한다는 점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해 ‘전진'해야하고, 그러자면 의사결정 권한을 지닌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계급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데, 그것은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그들간의 계약이 이미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반드시 욕망에 의해 충동된 탈목적적 권력이 생겨나고 그 부산물들이 계급간의 억압을 생산해 내기 마련이다. 목적에 의해 도구적 권력이 정당화되는 대표적인 집단이 군대인데, 여기서는 합목적적 권력체계도 문제지만, 목적에서 벗어난 권력 남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권력의 작동이 억압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목적을 벗어난 지배가 생산되는 지점이다. 억압과 차별은 필수적으로 피억압자의 분노, 슬픔, 한, 울분을 낳게 되는데 그 대부분은 적정한 방법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자기멸시와 자기파괴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목적이 이끄는 사회에서는 억압되는 소수가 필수적으로 양산되고, 그들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속한 사회나 공동체 중에서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 국가나 기업은 명확한 목표를 가진다. 국민의 보호, 시민의 정상적 삶의 영위, 삶의 질을 증진시키는 것이 국가의 목표라면, 기업은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이윤을 만들어내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기업 내에서의 억압과 차별을 웬만하면 참아낸다. 회사가 존립하고 이윤을 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교회나 가정 같은 공동체는 (‘존재’가 아닌 ‘소유’의 의미에서) 목적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 공동체들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주어야 하는 곳이다. 만약 이런 공동체들이 목적을 가지게 되면 위에서 언급한 권력과 계급의 생산이 다시 벌어지고 구성원들은 참된 안식의 공간을 잃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의 양적 성장=복음전도=하나님의 명령=우리의 삶의 이유'이라는 등식이 목표로 주어지면서, 총동원체제를 통한 권력구조의 공고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것은 마치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의미상 모순이다. 가정도 ‘자녀의 사회적 성공’, ‘경제적 풍요’라는 목적이 부여되면, 아버지의 경제자본과 어머니의 정보자본이 권력으로 작동하면서 가부장제가 공고히 자리잡을 수 밖에 없고, 자녀는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한 채 목적을 위해 훈련되는 기계로 전락한다.


공간확장과 장소의미화


      역사적으로 남성성은 '공간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다. 이윤의 극대화, 무한 증식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남성성의 산물이다.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총과 칼을 들고 가든, 상품을 들고 가든) 다른 사회, 국가를 침범하고, 그 경계에서 분쟁과 충돌을 일으켰다. 경계의 충돌은 항상 전쟁의 양상을 띄게 되는데, 그 결과 '삶은 곧 전쟁'이 되고, 경계 내부의 사회는 ‘생존’이라는 분명한 목적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다른 사회와의 충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전체주의, 가부장제, 소수에 대한 억압이 정당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의 언어체계가 상징계를 장악하고, 젠더의 모순이 일상의 기저에 편재하게 된 것은 다분히 사회진화론 또는 구조결정론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가정에서 남녀의 가사 분담을 주장하는 여성들도 남편이 다니는 직장에서 여성이 동등한 기회를 얻는 것은 반대한다. 기업에서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남편을 그 회사로 보내는 전업주부들에게는 위험요인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내부의 체제는 구조의 영향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데 그 구조라는 것이 바로 끊임없이 공간을 확장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남성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협박범’이 된다.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미 이렇게 되어 있으므로’, ‘모두가 살아 남기 위해' 젠더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이런 거대한 구조에 대한 반성은 전지구적 혁명과 같은 변혁을 겪지 않고는 일어나기 어렵다. 결국 유럽은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 나서야 다른 관점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다른 관점이란 바로 공간확장과 권력체계에 대한 의존성에 회의를 품는 것이었다. 서구에서 젠더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부터다. 외부의 커다란 위협이 최소화되는 시점에서는 국가 전체를 지켜야 하는 목표가 보다 작은 단위로 분절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논리적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남성성의 특징과 달리, 여성성은 제한된 '장소의 의미화'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1971)은, 아내가 없는 아파트에 덩그러니 남겨진 한 사내가 자신의 집과 어떻게 불화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내가 없이는 밥을 할줄도, 세탁기를 돌릴 줄도,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주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남성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정'이라는 ‘장소'에서는 소외되는 현상을 경험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책상이 움직이고, 시계가 말을 걸고, 우호적이지 않은 사물이 자신을 공격하는 환상을 경험한다. 목적이 지배하는 외부 영역에서는 끊임없이 공간을 확장해가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이를 잘 수행하는 이들이, 가정이나 교회 같이 뚜렷한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는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에 대한 반발로 가정이나 교회도 목적이 지배하는 남성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가 ‘자녀에 대한 과잉 기대’, ‘사교육 시장’, ‘전도열풍’, ‘교회 건물짓기’ 등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남성은 목적이 없는 공간에서 소외를 느끼고, 자신이 역차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탈냉전시대에 냉전론자들이 느끼는 소외감도 이와 같을 것이다. 공공의 적이 불확실하고, 공간확장성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을 견디는 것, 자신의 삶을 ‘존재’의 가치로 들여다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2008년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이런 면에서 ‘장소의 의미화’를 추구하는 여성적 운동성이(그것이 비록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폭력시위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새롭게 정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건대, 남성적 시위는 공간의 확장성, 다시 말해 차벽과 경찰벽을 뚫고 나가 청와대라는 '목표'를 향해 진격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진격의 대상만이 전부다. 그런데 촛불시위는 ‘시청 광장’, ‘광화문 광장’이라는 장소를 우리에게 각인시켰다. 그 곳에 촛불을 들고 앉아 몇 시간씩 구호를 외치고, 노래와 연설을 듣고 해산하는 것은 '장소의 시위’이지 진격의 시위는 아닌 것이다. 장소는 쉬는 곳이고, 대화하는 곳이지 달성해야 할 목표를 갖는 곳이 아니다. 진격은 점령하고 부수어야 할 대상을 목표로 하지만, 장소는 그 대상의 소멸과 동시에 그 너머의 '존재의 양식'을 바라 본다. 촛불시위대가 바라는 것은 대통령의 퇴진이 아니라(이것이 최종 목표라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주적인 국가일 것이다. 그러자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더라도 의미화 과정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공동체의 일곱가지 가치

 

       공동체에 대한 연재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장소의 의미화’, ‘탈목적적 공동체’라는 가치를 몇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한국사회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글들을 보면 대부분 현상적인 측면에 대한 분석에 집중되어 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대안 관철을 목표로 한다. 예컨데, 교회 내 의사결정의 민주화를 위해 장로로 구성된 당회보다는 다양한 성도들의 그룹을 대변하는 운영위원회를 둔다거나, 교회의 회계장부를 일반 회계법인의 감사를 받게 한다거나, 목사의 전횡을 막기 위해 최고 의결기구인 공동의회의 의장은 목사에게 맡기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나 예로 든 이런 제도적 개혁의 더 본질적인 이유는 ‘돈’과 ‘권력’에 대한 이 공동체의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다. 그 가치(value)가 제대로 자리잡지 않으면 제도는 다른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 지난 14년의 공동체생활과 두 번의 공동체 세우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어떤 가치가 우리속에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치는 어떤 리더가 ‘이렇게 하자’고 선언하거나, 모두 모여 ‘우리는 이런 공동체가 됩시다’라고 결정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과정을 겪어 만들어진 공동체라면 이미 어떤 가치가 그 속에 만들어져 있다고 봐야 한다. 형식적이든 암묵적이든 이미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여곡절을 거쳐 그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이고, 다시 모이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수 십년 된 교회나 공동체의 개혁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가치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올 해 아홉 가정으로 다시 시작되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대략 일곱 가지로 부를 만한 가치가 내부에 심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 가치들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우리 공동체의 존재양식을 드러내고자 한다.   


       단순성은 자연의 원리다. 생떽쥐베리가 말했듯이 완벽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정도로 단순해진 상태’를 말한다. 교회, 공동체, 조직이 너무 많은 것을 갖추려고 하면(이것은 대부분 소수의 욕망이다), 자체 유지 자체가 큰 목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구성원에서 무의미하고 무리한 헌신을 강요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에서 일요일에 시행되는 행사, 노동, 프로그램의 70%는 없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의 억압은 특히 ‘죄책’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고질적이다. 현재 우리 공동체는 일요일에는 예배와 먹기, 수다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일요일에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제안되고 모두가 동의해야 가능하다. 공동체의 첫번째 필요는 안식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을 포기하고 많은 일을 계획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현명하지 않다. 이것은 일요일에 모든 사역의 역량을 쏟도록 훈련받은 사역자들과의 오랜 협의와 화해가 필요한 과정이다. 안식의 날짜와 패턴이 일반 성도들과 다르게 세팅된 모순이 일요일의 과도한 프로그램 운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역은 평일로 옮겨져야 한다. 따라서 평일은 더 거룩해져야 하고, 일요일은 더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두번째 가치는 ‘구조’에 대한 것이다. 공동체의 사이즈, 의사결정 구조, 건물의 크기, 목회자의 위상, 재산 등은 공동체의 정체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사이즈가 큰 교회에서 사회적 영성과 도덕적 민감성을 기대하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이즈, 밀도가 구성원 개인의 도덕성, 영성과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점은 심리학, 사회학에서 이미 오래전에 연구가 마무리된 사실이다. 그 구조 안에 있으면(짐바르도의 표현대로 ‘사과 상자가 썩어 있으면’),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직장의 전문인들, 상식적인 중산층, 평균 이상의 양심을 가진 성도들로 구성된 강남의 대형교회가 교회 살림(작정헌금 포함)의 5배에 달하는 빚을 지고 초대형 건물을 짓는 의사결정 투표를 무기명으로 했는데도 95% 이상이 찬성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정 구조 안에 있으면 누구라도 자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결정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를 시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공동체는 물리적으로 적정한 규모를 넘지 않아야 하고,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고 평등하게 결정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현재 우리 공동체는 아홉 가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가 원하는 구조를 유지하면서 예배를 같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결국 두 교회로 나눠서 교제하기로 결정하였다. 작은 규모로 나누고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적정한 구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아무리 많은 공동체라도 적정한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다.  

       ‘통합’은 단순성과 구조의 가치를 실현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우리의 삶은 주로 가정, 생업(직장), 교회와 그 주변부로 구성된다. 이 공간들이 모두 분열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현대인은 이 공간들을 왕래하는데만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고, 모든 영역을 효과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생의 시기별로 '선택과 집중’의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30대에는 직장의 안정화, 40대에는 자녀의 학업을 중심으로 한 가정경제의 유지, 50대에는 사회적 관계를 공고하게 하는 관계망의 구성(교회, 취미동호회)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각 시기마다 포기하고 잃게 되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공동체는 이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주거가 통합되면 자연스럽게 교회공동체가 그 안에서 생겨난다. 기존의 교회에서는 주거까지 통합하면서 구성원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라이프스타일이 구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50대 이후 직장에서 은퇴하고 생업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면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함께 계획할 수 있는데, 이것이 생업의 통합이다. 극단적으로는 함께 귀농하거나 농촌 노동공동체를 계획할 수도 있지만 도시에서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함께 거주하는 가운데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실제적인 준비를 해 나갈 필요가 있다. 도시는 삶을 점차 세분화시키고 분절시키는 양식을 가지는데, 이를 다시 단순화하고 통합해 가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고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 현재 우리 주거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를 통합한 형태다. 그 정도만 가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매우 많아진다. 통합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으므로, 경험상 돌아보건대, 30대에는 주거의 통합, 40대에는 교회의 통합, 50대 이후에는 생업의 통합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연재글에서 설명했듯이, 공동체가 항상 시대성, 역사성을 가지고 새롭게 구성된다는 말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도 공동체의 이해와 실천이 상이할 수 있음을 내포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할 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하물며 한 세대가 지나가면 그 사이에 수 많은 용어가 생성되고 유행이 지나가며 사건과 사고가 발생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간의 관계와 역동 역시 달라지기 마련이고, 정치적 상황과 시대정신도 새롭게 변화한다. 공동체는 자기 시대의 문제에 직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성격과 형태, 존재 방식이 계속 '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특별히 한 공동체가 한 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단(單)세대 교회론'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자녀를 자녀의 공동체로 떠나 보내고, 부모는 부모의 공동체에 머물게 하면서, 공동체가 공동체를 돌보는 형태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두 번째 공동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기존과 달리 새로운 멤버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새로운 진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 진화는 우리가 나이들어가면서 직면하는 이슈와 관심사가 달라진다는 측면과, 새로운 멤버들의 참여로 공동체의 특징과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을 모두 포함한다.

       일상의 삶을 중심에 놓는 것 역시 공동체의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한다. 모든 훈련 프로그램을 하루에 몰아 넣고, 일요일+교회건물+목사 중심으로 삶과 신앙을 이분화시키는 형태로 유지되어온 한국 기독교는, 일상의 삶에서 복음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을 별다른 고민없이 수용해 왔다. 그 결과, 특정하게 구별된 날, 절기, 사람, 장소만을 거룩하게 만들고, 나머지는 세속적 영역으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일상이 가지는 다양한 측면들(유동성, 추상성, 가변성, 운동성, 실존성)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일생을 통해, 한 사회의 발전과정을 통해 꾸준히 진화해가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의 개념도 확실하지 않던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이 오늘날에도 절대 진리, 문자적 진리로 자리잡으면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생략한 채 변경불가능한 고정된 진리로 탈바꿈되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온 현실은 사실 삶의 이원화 외에는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신학이 일상을 붙잡고 지탱해야 한다는 말과 초역사적 신학의 견고함은 양립하기 어려운 말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다시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하는 것은 자본의 견고한 지배 하에 일상의 위대함을 잃어버리고 매일 반복되는 비참함과 지루함을 인생이라 여기고 살게 된 현실에서, 그나마 진정한 삶의 돌파구를 꿈꾸는 시도들이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보편적 기준이나 진리는 관념적일 수 밖에 없는데 반해, 피지배되는 대상 즉 우리의 일상은 실재하며 물질성과 관계성을 지닌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관념으로서의 진리는 이전 시대를 대표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했으며 우리가 아닌 이전 타인들의 일상을 표상한다. 우리 시대의 보편적 관념은 몸과 물질성을 지닌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공통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다(네그리, 하트, 아감벤, 블랑쇼, 바디우, 르페브르). 공동체는 일상과 비일상이 만나는 곳이고, 일상이 다시 복구되고 의미를 회복하는 공간이다. 그러기 위해서 공동체는 일상의 한 가운데 있어야하며, 먼곳에서 일상을 내려다보고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일상의 사건들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해석을 개입시켜 일상을 비일상화(신성화)시키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비일상은 일상이 그 한계에 이를 때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같은 것이다. 목사도 한 명의 시민이며, 교회도 사회의 한 기관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주거와 가정의 통합을 통해 공동체 역시 우리 삶의 한 가운데 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우리가 일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보고, 그 지배가 시작된 시점을 19세기 경쟁자본주의의 태동부터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이 때부터는 대량생산된 상품의 세계가 열리게 되며, 개인과 공동체의 고유한 양식(style)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작품'이 없어지고, 축제가 사라지고, 저항이나 주체적 혁명 역시 드물어졌다. 공중의 권세(엡2:2)는 일상을 장악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예수의 인생은 결국 그러한 일상의 비루함에 비일상적 권위를 가져와 잔치를 벌이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일상에 임하는 것이다(눅11:20). 일상의 비참함 속에서 이익을 취하는 교회는 결국 시대의 지배적 권력 아래서 '유기적 지식인'(그람시)으로 생존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벌여야 할 잔치는 무엇일까.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일상을 지탱하고 변화시키기는 커녕 일상을 탈(脫)일상화시키는 일부터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거창한 수식어들을 동원해 스스로를 구별하고 타자를 배제하면서 세상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다시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교회는 분명 사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목표 보다는 과정으로, 절대성 보다는 상대성으로, 외재적이기 보다는 내재적으로, 대립적이기(세상은 악, 교회는 선) 보다는 변증법적으로, 양보다는 깊이로, 사람 중심이기 보다는 모든 피조 세계 중심으로, 단일하기 보다는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여섯번째로) '해석'이다. 한국 기독교는 성서 해석의 권한을 안수받은 소수의 설교자와 신학자들에게만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해석과 삶의 결합인 설교 역시 이들이 몫으로만 남아 있다. 목사의 설교에 대해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기껏해야 약간의 인상비평 수준을 넘지 못하며, 다른 해석은 금지된다. 해석이 금지된 공동체는 각 주체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없고, 다시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해석'의 차이로 수 많은 종교 전쟁과 종교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을 알고 있다. 해석은 군중(성도)를 결집시킬 수 있었고, 그 군중을 배경으로 종교권력은 국가권력을 압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폴 비릴리오의 말대로, 국가가 종교와 분리되고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무기의 발달로 소수의 군대가 군중을 통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막강한 절대국가가 탄생한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이 시기에 와서야 해석의 차이는 학살을 면하는 수준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오늘날도 '경전'으로 취급되는 성서의 해석독점은 교회 내에서 수많은 폐단을 낳고 있다. 나는 예전에 출석했던 몇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설교자들의 다양화를 주장했으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주장하는 나에게는 몇 번의 설교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것은 내가 바라던 해석의 보편적 자유가 아니었다. 토론이 아닌 일방향식 설교가 보편화된 오늘날 예배 형식에서 교단 신학교를 졸업한 사역자가 아닌 사람이 설교하는 것은 여전히 교회 내의 큰 위협으로 간주된다. 현재 우리 거주 공동체 교회에서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설교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그대신 설교를 마치고 그에 대해 설교시간의 두 배 가량의 시간을 할애하여 함께 해석하고 토론한다. 그러다보면 다양한 관점을 만날 수 있고, 성서의 텍스트가 수용자 중심으로 다시 쓰여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일상의 삶에 적용하기에 무리 없는 범주로 해석이 모아지는것을 느낀다. 신기한 것은 예전의 일방향식 예배에서는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던 사람들이 세 시간 가까이 되는 예배시간을 별다른 무리없이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도 점점 대화에 대등하게 참여하게 되었고, 심지어 부모가 아이의 고민을 공동 예배시간에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자기의 해석이 공유되고 피드백 되는 경험은 연령을 초월하여 긍정적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우정은 공동체의 중요한 존재양식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은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사랑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모든 인류, 원수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정작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는 소질이 없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아가페보다도 필레오(우정)가 더욱 어려운 사랑의 형태가 된다. 리젠트 칼리지의 설립자인 제임스 휴스턴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우정'이라고 정의했다. 증여나 환대가 여전히 증여자와 수혜자라는 계급성, 부채의식을 제거할 수 없다는 부르디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정의 가치야말로 현대사회가 회복해야할 가장 의미있는 돌파구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김현정의 말대로 우정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고, 우리 역시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수많은 타자들 앞에 서 있다. 전혀 불편함이 없는 동질집단 내에서 발현되는 것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 자기확인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그것을 위협하는 경계를 만날 때 흔들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우정을 통해 다시 진화한다. 놀랍게도 나의 경험으로는 이런 방식의 우정이 생존하기 힘든 가장 어려운 환경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사회보다 더 많은 가면과 위장을 갖추어야 하는 공간이고, 자신을 드러내기 힘든 장소다. 특히 목사와 교사들(리더들)이 가지는 소외감과 외로움은 아무도 감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설교와 교육의 방식을 통해 종교담론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을 열어보임으로써 다름을 드러내고 인정하면서 우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대부분 배제된다. 나는 은퇴한 후 적정한 우정의 자리를 찾지 못해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노년을 외롭게 보내는 목사들을 자주 보았다. 그들에게는 '제자들', '양떼'라고 부르는 이들은 많이 있으나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희귀해진 것이다. 공동체를 인생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제자'도 좋고 '성직'도 좋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관계는 '친구'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요한복음15:14). 친구란 계급관계가 상정되지 않는 유일한 관계다. 스승-제자, 상사-부하, 부모-자식, 선배-후배 관계 조차도 서열과 계급의 지배를 받는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에게도 함부로 말을 하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친구는 언제 만나도 친구고 동등하다.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말이다. 그 관계는 그저 서로의 존재로 만족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부모도 가정에서 목적을 제거하고 자식의 친구로 존재해야 한다.

 

인과론과 목적론을 넘어선 일상

 

       이러한 일곱가지의 가치(단순, 구조, 통합, 진화, 일상, 해석, 우정)는 우리 공동체가 오랜 기간동안 교회, 가정, 사회생활을 통해 갈구하던 삶의 양식들을 언어화한 것이다. 가치가 구현되면 현상적인 것은 그 가치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사실 여러 교회를 다녀본 나로서도 이 중 두 가지 이상을 지닌 교회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차라리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가정-교회-생업-활동(사역)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럴 경우 전체 비용은 감소하고 효과와 영향력은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는 가정과 교회를 통합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앞으로 생업의 통합과, 우리와 유사한 공동체와의 연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뚜렷한 목적이나 권력관계가 상정되지 않는 작은 공동체들의 연대가 앞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가올 것이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마이클 무어는 13명의 사망자를 낸 충격적인 고교생 총기난사사건의 원인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 중 핵심적인 것이 바로 총기를 쉽게 소유할 수 있도록 정부와 시민을 설득하는 '군산복합체'의 음모라고 분석한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원인과 주범들이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고 관객들 역시 이에 설득당한다. 동일한 사건을 묘사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는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영화 내내 아무 목적도, 일관성도 없이 희생된 12명 학생과 1명 교사의 사고당일 일상이 지루하게 묘사된다. 그런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당혹스러운 무작위 총기 발사 장면이 갑자기 등장한다. 산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외에, 그들의 잘못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감독은 그 날 희생자들이 친구들과 대화하고,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찍고, 다른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 평범한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 일체의 인과론적 설명을 거부한다.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제의 원인이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파생되는 권력의 부산물과 그것의 재생산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반드시 다른 문제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공동체는 부유하게 된다. 사회는 목적을 가지더라도 내부의 공동체들은 탈목적론적인 가치를 보유해야 한다. 우리가 벗어나기 힘든 인과론은 결국 목적론과 연결된다. 목적을 향한 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 인과성으로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가치들은 우리의 일상이 인과론도, 목적론도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제 두 번째 스테이지에 선 이 공동체는, 아마도 긴 매너리즘을 거쳐 다시 새로운 목적에 사로잡히고, 서로 분열되기 시작할 때, 다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이 공동체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50대에 접어들 것이고, 이 시대, 이 장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와 직면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삶을 온통 기존 교회에 바치느라 분주한 우리 선배들의 무관심 탓에, 우리에게는 '가보지 않은 길'이겠지만, 우리 후배들에게는 하나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다. 목적없는 공동체가 가능할까. 리더 없는 리더십이 가능할까. 리더십 없는 공동체가 가능할까. 우리의 실험은 계속된다.


ⓒ 웹진 <제3시대>

 

  1.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그 곳에 오래 매여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 수치가 세상변혁이라는 불가능성에 대한 부담과 지나친 민감함에서 나온 혼란이었음을 깨달은 후에 나는 비로소 자연스럽게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 톱니바퀴로부터 일탈하여 나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소박한 대안적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십여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친 후 시작된 법인사업과 생활대안운동은 아직 고전을 면치 못하는 과정 중에 있지만, 그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해가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웹진을 통해 앞으로 4차례에 걸쳐 그 가치생성의 과정을 일부 나눌 예정이다. (주) 포리토리아 대표,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저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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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넘어 삶으로



심범섭



    미국 소설가 헤이븐 키멀(Haven Kimmel 1965 ~ )은 2002년 <일찍 떠남의 위안 (The Solace of Leaving Early)>이라는 작품을 출간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랭스턴(Langston)은 서른 살이 다 된 미혼 여성인데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박사 학위 취득 직전에 몹쓸 일을 겪고선 공부를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다. 이제 그가 하는 일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 다락방에서 시와 소설과 다른 심오한 글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마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린 두 딸 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총기 사고로 죽고 만 것이다. 두 아이는 갑자기 고아가 되었고 이들을 누가 돌보아야할 지 난감한 상태이다. 이때 랭스턴의 어머니가 딸에게 이 두 아이를 적어도 몇 달 동안 돌봐주라고, 시 쓰는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며 강권한다. 랭스턴은 그 일은 자신의 천성에도 안맞고 집필 일정과도 전혀 조화가 안된다고 하며 반발한다. 화가 난 나머지 이제 집을 나가겠다고 소리친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제 울기까지 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하지만 사실 이건 너, 나, 심지어 그 아이들의 문제도 아니야. 이건 인생의 문제야, 랭스턴. 인생이 무턱대고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무게를 견뎌야만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야 . . . (But really this isn't about you or me or even those children, it's about life, Langston, the way life just bears down upon us and we are forced to withstand its weight . . .) [각주:1]  


    랭스턴 어머니의 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고아가 된 두 아이를 돌보는 것 같은 큰 일, 당사자의 삶에 크게 간섭하는 일이 그 사람에 관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말에서 쓰이는 부정은 문자 그대로 부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긍정하는 요소를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한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랭스턴 어머니는 삶의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원리, 개인을 넘어서는 원리를 딸에게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이 원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있고 우리가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돕는 반응이 지극히 당연함을 “강요받는다(are forced to)”라는 표현이 전달한다.  

    다른 사람을 돕는 동기가 그의 개인적 특수성이 아니라 삶의 원리라면 이때 돕는 사람의 개인성 또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삶이 본질이 될 때 돕는 ‘나’도 사라지고 도움 받는 ‘너’도 사라진다. 도움은 필요한 곳으로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물처럼 곧바로 흘러들어갈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양의 옛 철학자 맹자가 제시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에 대한 논의를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각주:2]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이 곤란에 처한 것을 보았을 때 반사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다고 맹자는 주장한다. 사람에겐 이런 이타적인 마음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원리를 랭스턴 어머니의 말을 참조해 삶의 원리라고 이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맹자가 이런 이타적인 반응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곧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로 여기고 있음은 그가 이 가상의 상황에서 아이를 구하는 사람의 동기를 기술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리 이얼리(Lee Yearley)라는 학자가 지적하듯이 맹자는 여기에서 돕는 사람의 동기를 부정적으로 정의한다.[각주:3] 곧 그 사람의 동기가 아닌 것을 나열하지 그 동기를 긍정적으로 집어 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맹자는 이 동기 자체를 굳이 명시적인 표현을 통해 규정하지 않아도 자신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맹자가 언급하는 세 가지 이유, 곧 새로운 인간 관계 형성, 더 좋은 평판 얻기, 현재 평판 유지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개인과 관련이 있다. 특정한 사람과 인간 관계를 맺고 평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자신의 특수성을 의식하며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개인’이다. 도움을 받는 아이도 특정한 사람을 부모로 둔 특수한 개인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아이를 구할 때 이런 이유들이 부정되는 것은 돕는 사람과 도움 받는 사람의 개인성이 부인됨을 뜻한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도 그를 구하는 나도 개인이 아니다. 또한 인간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개인을 부정하는 것, 다시 말해 관계적 인간을 부정하는 것을 우리는 공동체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인간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맹자의 논의에서 우리는 고유한 자아를 잊은 인간, 공동체적 인성을 넘어서는 인간을 만난다.  

    이런 인간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신약성서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논의하고자 한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읽어보자.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는 예수와 한 율법교사의 대화가 있고 그 안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알려진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이 드는 요소가 있다. 예수가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 ”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이웃이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할 이웃을 말한다. 곧 내가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베푸는 사랑의 수혜자가 되는 이웃이다. 이 의미 구조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A의 이웃이 B일 때 A는 B를 자신처럼 사랑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마친 다음 예수는 이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고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문답을 요약하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그를 도운 사람이다’가 되는데, 이 명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면 ‘A의 이웃이 B일 때 A는 B에게서 도움을 받았(는)다’가 될 수 있다. 이를 위에서 먼저 제시한 추상 명제와 비교해 보면 A와 B의 역할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명제에서는 이웃이 내가 사랑해야할 사람이었다가 두번째 명제에서는 이웃이 나를 사랑한(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누구의 이웃을 정의하는 방식은 미세한 차원에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어긋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신학적 윤리학자 폴 램지(Paul Ramsey)는 이 어긋남을 통해 “당연히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의 특성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한 사람 자신이 이웃이 되야 한다는 구체적 요구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사랑은 이미 존재하는 이웃이 누구인가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서 섬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램지는 주장한다. 저기 어딘가에 먼저 이웃이 있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섬길 때 이웃 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웃에 대한 사랑(love for neighbor)”이라는 표현은 이웃이 누구인가 따지게 하므로 더 이상 쓰지 말고 대신 “이웃으로서의 사랑(neighbor-love)” 또는 “이웃적인 사랑(neighborly love)”이라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말한다.[각주:4]  

    그런데 내가 사랑해야할 이웃이 이러이러한 조건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웃의 조건을 나 자신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위험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사랑하기 편한 사람을 ‘내 이웃’이라는 범주의 (주요) 구성원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산상 설교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6-47)  


    여기에서 예수는 사랑하기 편한 사람만 사랑하는 쉬운 사랑의 예를 보여준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간 제사장과 레위인도 이런 사랑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편의주의적인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램지의 해석처럼 이웃이라는 범주의 선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미리 설정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이웃이 되는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의 특수성이 개입하지 않는 사랑, 관계적 인성을 넘어서는 사랑이며, 따라서 공동체 개념을 넘어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 개념과 분리할 수 없는 역사, 전통, 관습, 이야기(서사) 등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이런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관점, 전제, 해석, 의미, 시간의 흐름 등도 넘어섬을 뜻한다. 비록 사람은 이야기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이야기와 의미는 때로 우리가 본질적인 원리를 인식하고 그를 실천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공동체는 우리에게 소속감과 의미있는 서사를 제공하는 중요한 원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랑이 활달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로막는 경직된 범주가 될 수도 있다. 공동체는 익숙함과 편안함의 강한 인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키멀의 소설 한 구절, 맹자의 논의 한 대목, 누가복음의 한 대목을 살펴보면서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서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어려움이 키멀의 글과 누가복음 텍스트에 이런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비록 맹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위기에 처한 타인을 반사적으로 돕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자신을 도움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랭스턴이며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을 슬쩍 피해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면에서도 전혀 사심이 없기는 어려운 것이 인간 마음의 참모습이다. 저명한 천주교인 사회운동가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그의 자서전 <긴 외로움(The Long Loneliness)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자신의 노력에 이기적인 동기도 숨어 있었음을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 . .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이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이 모든 것에 얼마나 큰 야심과 얼마나 많은 자기 추구가 있었던가!”[각주:5] 

    그러나 완벽할 수 없다고 해서 완벽을 향한 노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떤 이유로 도저히 100점 만점은 받을 수 없는 시험이라 하더라도 90점을 받는 것이 70점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법이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대상의 특수성이 강조되는 이러한 범주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동시에 이러한 범주를 해체하고 넘어서서 삶의 원리에 먼저 주목하고 그에 바탕해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삶의 원리란 생명의 원리, 곧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원리이다. 위의 누가복음 텍스트 앞부분에서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이르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더하여 우리 곁에 이러한 성숙하고 담대한 사랑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랭스턴 어머니가 딸에게 했듯이 더 근원적인 시각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을 미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했듯이 이런 사랑의 예화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우리 이와 같이 합시다”라고 말해야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Haven Kimmel, The Solace of Leaving Early (New York: Doubleday, 2002), 137. [본문으로]
  2. 신영복, 강의 (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4), 224-25. [본문으로]
  3. Lee H. Yearley, “Ethics of Bewilderment,” Journal of Religious Ethics 38.3 (2010): 436. [본문으로]
  4. Paul Ramsey, Basic Christian Ethic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0), 93. [본문으로]
  5. Dorothy Day, The Long Loneliness: An Autobiography of the Legendary Catholic Activist (New York: HarperCollins, 1952), 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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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I :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따라서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 이제 타자(他者, the other)다!

 

타자에 대한 논의만큼 21세기에 유행처럼 번지는 담론이 있을까? 하지만, 타자에 대한 이론만큼 논란이 많은 경우도 드물어 타자에 대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나 그에 대한 책을 접하는 독자들 모두 왕왕(아니, 대부분) 혼란에 빠지는 경우를 목격한다. 필자 역시 타자에 대한 윤리를 주제로 논문을 진행시키고 있는데, 타자에 대한 사상적, 신학적 의미를 논하기 이전에, ‘타자가 누구이고 무엇이냐?’는 첫 번째 질문에서부터 말문이 막힌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 봉착하는 이유는 타자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복잡하고 길었던 사상사의 전개과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논의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주체에 대한 논의, 다시 말해 자기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기에 그렇다. 타자의 반대말이 자아, 주체 아닌가? 자기를 어떻게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타자에 대한 규정과 이해가 다르다. 저마다의 입장과 맥락에 따라 저마다의 주체가 성립하고 그에 대한 대립각으로 다종의 타자가 존재한다고 볼 때 타자에 대한 논의는 그야말로 타자적이다.

 

본격적으로 타자의 윤리를 논하기 이전에, 사상사에 등장했던, 촘촘한 의미의 두께를 지닌 타자에 대한 굵직했던 흐름을 살펴보는 시간을 차례로 갖는다. 우선, 이번 웹진에서는 근대 이전의 타자론에 대한 부분을 다룬다. 특별히 몰락하는 중세를 배경으로 쓰여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통해 중세인들이 지녔던 타자에 대한 배제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리고 타자의 출현이 중세의 몰락과 근대의 도래라는 역사적 전환기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칸트와 헤겔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의 타자론이고, 마지막은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이어지는 타자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논의는 거칠고 매끄럽지 못하다. 그것이 거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필자가 지닌 타자에 대한 이해가 아직 과문하기에 그렇다. 비록 지금은 이처럼 남루하지만, 언젠가 너덜너덜 이곳 저곳에 붙어있는 타자론을 유려한 칼솜씨로 깔끔하게 발라낼 그날을 꿈꾸며이제 타자에 대한 여행을 시작한다.   

 

 

 

투박하게 읽어내는 근대이전의 타자론

 

서구 기독교 발전과정에서 여러 교리 논쟁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신과 인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해석을 둘러싼 싸움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은 흔히 내재와 초월로 불리며 고대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에서부터 20세기 바르트와 브루너의 자연신학 논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학 논객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져 왔다. 이처럼 신의 내재와 초월에 대한 해석은 당대 신학의 최대 이슈였으며 앞으로도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 중세교회를 바라보는 이해의 창도 커다란 틀에서는 위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초월적 신에 대한 일방적 독주가 중세 1000년을 내내 지배했다는 말이 옳다. 이 시기에는 세상과 유리된 전적타자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과 순종만이 허락되었고, 체제(로마교황청)밖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무엇이든 에어리언으로 취급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인들에게 타자란 두려움, 죄악, 악마, 공포, 마녀, 처단 등등의 말로 대치되면서 중세 특유의 타자포비아를 낳았다.   

 

타자에 대한 의식이 광기적으로 작동하고 합리적인 타자에 대한 접근이 지연되었던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 중세인들이 지녔던 세계관에 기인한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세계를 아름답고 친근하고 낙천적으로 이해한다. 세계관이 이처럼 따뜻했던 이유는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데, 하나가 공동체 자체의 안정성(폐쇄성)이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늙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의 모든 회로가 중세 전 까지는 모두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고 익숙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이렇듯 끈적하고 친밀한 횡적 공동체인 가정과 사회와 교회, 그리고 국가는 종적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다. 단일한 공동체성이 첫 번째 특징이라면, 하늘()과 관계맺는 무한에 대한 집단적 신뢰(믿음)가 중세 세계관의 두 번째 특징이었던 것이다. 근대 이전은 신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 즉 무한에 대한 믿음이 당대를 지배했던 사회이고, 무한한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인 계시(은혜)에 의해 인간은 신과 만났다. 이러한 매커니즘에 의해 중세의 (폐쇄적)공동체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고, 그 중심에는 어김없이 교회가 위치하였다.

 

만일, 이런 안정된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타자)이 등장하면 무차별한 숙청이 자행된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 좋은 예이고, 특별히 무한한 하나님의 자기현현 방식인 계시에 반하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시도는 그것이 무엇이든 감시와 통제와 제재를 받았다. 이를 통틀어 신비주의(mysticism)’라 부르고, 그것을 중세교회는 이단이라 정죄하였다. 근대이전 타자는 바로 이단자였던 셈이다. 전적 타자인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접속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더 이상 피조물들의 타자로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인간 역시 하나님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두렵고 위험한 존재로 다가왔겠는가? 이처럼 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가 사회전체를 지배했던 사회가 중세였고, 중세의 위기는 이 공식에 균열이 가해지면서 도래하기 시작하는데……

지금부터 다룰 <장미의 이름>은 중세교회가 지녔던 타자규정의 매커니즘을 파악하기에 유용한 자료이고, 중세가 지녔던 타자에 대한 증오의 두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해주는 흥미로운 해석이 될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따라서

 

쟝자크 아노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져 상영된 바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은 단순한 소설이기에 이전에, 중세 말 흔들리는 교회의 권위와 위기속에서 이를 수호하려는 수구 기독교 세력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하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14세기 중세교회가 상한가를 치고 십자군 원정의 실패 후 차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던 그 무렵, 한 수도원(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이에 윌리암 수사(영화에서는 숀 코너리가 배역을 맡음)가 사건의 해결을 위해 급파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범인은 수도원 도서관 사서로 40년 넘게 수도원을 장악했던 요르게 수도사였다. , 요르게는 사람들을 하나씩 죽였을까? 그리고 죽임을 당했던 인물들이 넘었던 금단의 벽은 무엇이었나? 이 질문은 소설의 주제이면서도 동시에 중세가 당면했던 교회의 위기와 세계관의 붕괴를 바라보는 중세 교권주의자들의 초조와 불안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장미의 이름’ 책표지


우선, 사건의 시작이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벌어진 것이 흥미롭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데 생활의 특색이 켈틱(Celtic) 수도원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켈틱 수도원은 영국의 웨일즈와 아이랜드에서 발달한 수도원 유형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묘하게도 어거스틴과의 인간론 논쟁 이후 이단으로 몰린 펠라기우스가 숨어들어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각주:1]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원죄교리를 배격하였다. 무엇보다 그에게 있어 은혜란 인간의 이성을 개발시켜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은혜는 인간성의 한 부분이지, 인간 본성에 예외적으로 부가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이러한 견해는 제국의 질서를 신의 질서로 등치시키기 위한 로마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정책에 반하는 발언이었고, 무엇보다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제도기독교의 입장에서도 마땅히 제거해야 할 불온 사상이었다. 이렇듯 교회사의 전개과정에서 변방으로 내몰리고 이단으로 정죄당했던 펠라기우스가 자리잡았던 곳에서 베네딕트 수도원의 전통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자연신학을 신봉하였고, 창조의 선함과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학문을 장려하였고, 창조의 선함을 믿기에 금욕생활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도 않았으며, 피조세계의 건강함을 근거로 노동의 신성함도 이끌어낸다.

 

사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대결은 그 전시대에 있었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 중세로 넘어가서는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으로 이어지며 등장했던 초월과 내재를 둘러싼 오래된 지적, 신학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그리고 양자간의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긴장과 갈등은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에 와서 표면적으로 봉합되고 종합되었다. 스콜라철학은 그간 교회사 전통에서 배제되어왔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자연현상과 창조현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아울러 세상속에 내재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접촉점으로 인간 이성을 내세웠다. 그 후 억제되어왔던 인간이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점차 (교황청입장에서 볼 때) 암세포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하면서 1000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중세교회는 서서히 몰락의 수순을 밟게 되는데[각주:2]

 

소설 속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은 수도원내 도서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의 유일한 필사본을 둘러싼 비밀로부터 연유한다. <시학> 2권은 희극론, 즉 웃음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살해당한 사람들은 웃음은 예술이며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의 내용을 알고 이에 접근했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요르게는 왜 그들을 죽이면서까지 <시학> 2권의 존재를 감추려 했을까? 이는 혹 중세 세계 전체를 감싸고 있었던 신과 인간사이의 불연속성, 즉 무한에 대한 믿음을 수호하기 위한 중세 교회의 최후 발악이 아니었을까? 요르게로 대표되는 중세교회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있어 웃음이란 엄숙과 경건을 저해하는 요소이며, 교회에 대한 권위와 두려움마저 소멸케하는 위험인자이다. 그리하여 필경에는 신적 계시의 위엄과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파괴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기에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된다. 만약 이 사실이 만방에 알려졌을 경우 교회를 위협하는 많은 이단(타자)들이 창궐할 것이고 그 전에 미리 이것을 차단하여야 한다.[각주:3]

  

요르게 수사는 몰락하는 중세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로서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투쟁를 벌이며 온몸을 바쳐 잠재적 이단의 등장을 막고자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요르게의 발악은 이미 시작된 근대를 향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그에 따른 타자의 등장은 <시학> 2권을 감추는 것만으로 멈춰서지 않는다.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이미 전방위적으로 중세의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고,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타자의 출현을 의미하였다. 

 

무너지는 중세, 도래하는 근대

 

중세의 붕괴와 근대의 도래를 규정하는 여러 가지 입각점이 있다. 문화사적으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부터 중세에 대한 균열과 근대를 여는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주장 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에 따른 봉건경제의 붕괴, 이에 따른 초기 자본주의의 등장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적으로는 종교개혁의 후폭풍이라 할 수 있는, 수 백년간 진행된 각종 종교전쟁들로 인한 유럽대륙의 국민국가화와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로 야기된 고양된 시민의식을 들 수 있다. 이는 중세 교회와 봉건영주의 전횡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태동과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 밖에도 각 분야별로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도래를 예감케하는 여러 전조들을 거론 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타자론의 관점에서 근대의 시작은 물리적으로는 지리상의 발견, 정신사적으로는 칸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지적전통에 기반한다. 지리상의 발견을 통한 횡적 세계의 확대는 안정적이고 폐쇄적 공동체이었던 중세사회에 틈을 내면서 다름에 대한 공포, 충격, 그를 대하는 자세, 대책 등을 한꺼번에 모색하게 만들었다. 상상해보라!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배를 타고 온 노란머리 하얀피부 (검은 머리 검은피부 혹 노란피부)의 사람들이 등장한다면? 그 다름과 차이에 대한 해석, 타자를 하나로 엮어내는 방식, 타자에 대한 논의의 집대성, 내지 (당대 유럽식) 타자에 대한 해법의 완결판이 바로 헤겔철학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Philip Newell, A Celtic Spirituality, 정미현 역, 『겔트 영성 이야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중 1장 “창조의 선함에 귀기울이기: 펠라기우스”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2. 소설 속 요르게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창세기는 우주의 창조에 대해 모자람 없이 설명하고 있는데도 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자연과학으로 우주를 음산하고 불결한 언어로 나타내고 있소”-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윤기역 (열린책들, 1989), 533. [본문으로]
  3. 계속 요르게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소설 속 발언을 인용하면: “저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의 일자일언은 이 세상의 형상을 바꾸어 놓았오. 이 서책( 『시학』 2권)이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이 그어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넘게 될 것이오.”-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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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한숨결교회 열두 번째 예배 메시지

우리에게 여전히 진리가 필요하다면.......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빌라도가 예수에게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요한복음 18:38)
당신들이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8:32)


1. 진리가 무엇이기에?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38절까지의 본문은 “빌라도의 심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서게 되어 그로부터 심문을 당하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 전체에 모두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역시나 이 부분에서 다른 복음서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딱 한 가지만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합니다(23:3).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도 동일한 질문과 답변이 한차례 오고가고, 다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예수가 고발을 당하는데도 정작 자신을 위한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고, 빌라도는 예수의 이런 침묵을 놀랍게 여기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와 빌라도 사이에 최소한 네 차례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까진 공관복음서와 동일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 그런데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말은 너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해 준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냐?”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다시 자신의 질문으로 바꾸어서 빌라도에게 던집니다. 이번에는 빌라도가 답변을 합니다. 누가 심문을 하고 누가 심문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다시 예수를 향한 질문이 됩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유대인도 아닌 내가 니가 유대인의 왕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그리고 또 묻습니다. “니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나한테 재판하라고 넘겼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들이 너를 나한테 넘긴 것이냐?”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뭘 했는지는 말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이 말은 정확히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단순히 세속적인 의미의 왕국에 반대되는 영적인 왕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적인 구조에 대비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왕국은 왕국이되, 지금 여기의 시간대, 즉 세상에 속하는 왕국이 아니라 도래하고 있는 종말론적 시간의 구조 안에 있는 그런 나라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빌라도가 제대로 알아들을 리 만무합니다. 그는 재차 묻습니다. “됐고! 그러니까 니가 왕이라는 것 아니냐?” 예수는 대답합니다. “그래. 맞다. 나 왕이다. 내가 왕이 되려고 태어났고, 왕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증거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내 말을 알아 듣게 되어 있다.” 그러자 빌라도가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하게 묻습니다. “진리가 뭥미?” 예수와 빌라도의 문답이 시종일관 뭔가 엇박자를 내고 있다가 드디어 빌라도가 예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핵심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답변이 없습니다. 예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 답변했을까요? 혹시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침묵했을까요? 오늘 메시지의 초점은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이었고, 나아가 예수의 그러한 진리 이해가 오늘 이곳의 우리 한숨결교회에 어떠한 성찰의 여지를 제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데 있습니다.

2. 정말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던가요?

요한복음에는 진리, 곧 알레떼이아(αλληθεια)라고 하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합니다. 알레떼이아가 신약성서 전체에서 98회 정도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서만 무려 20회나 등장합니다. 바울 서신을 다 합쳐도 44회 정도 나오고, 공관복음서 세 권을 다 합쳐도 7회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얼마나 이 단어를 선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요한복음 어디에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이 진리에 대해 증언하러 왔는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고, 예수가 곧 진리이며, 예수 혹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을 향해 나아가고, 진리로 사람들은 거룩해질 수 있다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런 얘기 갖고는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예외적으로 주목한 만한 진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8장 32절의 “당신들이 진리를 알 것이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처음 듣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하여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그것이 곧 진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습니까?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이며,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데 정말 그렇던가요? 여러분은 진리를 앎으로 인해 과연 지금 자유롭습니까?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진리를 안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을 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은 충분히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진리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진리는 별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 적이 없습니다. 외려 진리는 우리를 더욱 숨 막히게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진리는 더 이상 가슴 설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간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과 야만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는 진리를 참칭하면서 자유를 억압해온 대표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이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종교에 내재하는 진리와 자유 간의 관계의 역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만큼 무서운 자도 없는 법입니다. 진리를 살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요.

흔히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라고 하면 적어도 ‘참되고 옳은 것’, 더 나아가 그 무엇을 바로 그렇게 ‘참되고 옳게 하는 것’이라는 최소한의 정의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참됨과 옳음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나 기준이 여전히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답이 있을 수도 없는 그것에 대해 역사는 어떤 특정한 것이 진리라고 강요해왔고, 그렇게 강요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구속하고 억압해왔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 진리는 이제 진부한 것이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굳이 기독교 신앙적 맥락에서 진리라고 할 수 있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진리 일반에 대해 더 이상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진리?!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포스트모던 사상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고 나면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고를 대변하는 아이콘은 단연 20세기 최대의 회의주의적 사상가라 할 미셸 푸코가 아닐까 싶습니다. 폴 벤느(Paul Veyne)라고 하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푸코는 죽기 25일 전 가진 대담에서 그러한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대담자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떤 보편적 진리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신은 회의주의자 아닌가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푸코는 너무 일반적인 모든 진리, 시간을 초월한 우리의 모든 거대한 진리를 의심했습니다. 푸코가 겨냥하는 그런 의심스러운 진리의 범주에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때 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각 개인에게 경험된 그런 차원의 실존적인 신앙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닙니다. 차라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원리 위에서 작동하는 초월적인 규범이자 명제가 되어버린 ‘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렇게 교리로서 정착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개념은 세상이 변하고 상황이 달라지고 믿는 사람의 삶의 자리가 아무리 바뀌어도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그와 같은 형식으로 믿고 계십니까? 제가 아는 한 이 자리에 그런 교리적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신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리적 근본주의자를 자처하는 분은 계시지만, 제가 보기엔 결코 근본주의자가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해본 바 교리적 근본주의자는 종교적으로나 신앙윤리적으로 어떠한 자유의 여지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까지 허락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여줍니다. 그 철저함이 없다면 결코 교리적 근본주의자일 수 없습니다.

다시 본래의 맥락으로 돌아와서 교조적인 의미 혹은 고전철학적 의미에서 진리를 이해했을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예수의 말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습니다. 예수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개념적 현실에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예수의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매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철학의 진리관을 그대로 따라서, 예수가 말한 진리를 받아들일 경우, 진리란 동일성, 보편타당성, 객관성, 만물의 본질, 영원불변성, 안정성, 초월성....... 뭐 그런 것에 다름 아닌 것일 텐데, 그러한 진리는 언제나 자기 이외의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에, 따라서 다른 존재 내지는 다른 특성이 끼어들 여지를 찾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자유가 허용되고 행사될 공간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결코 양립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우리의 상식 속에 자리 잡은 그런 의미의 진리 개념으로는 결코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말을 틀렸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상식적인 편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전제를 해야 합니다.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즉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같음’의 진리란 그저 맹목적인 순종만을 강요하는 교리일 뿐, 주체적인 혹은 주체 각자의 성찰과 고민의 결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에서 교리적 고백이 무의미한 것은 교리는 주체의 개별적 경험과 상황적 특수성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보편지향적이지 개별지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진보적인 신학자는 진리와 자유의 관계의 위상을 역전시켜, 이제는 “자유가 너희들을 진리하게 하리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절대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무조건적 진리를 거슬러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개별적인 다름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자유에 상대적으로 더 무게를 실어주자는 것입니다.

3. 다시, 진리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면

자, 그럼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진리를 이제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과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런 의미의 진리에서는 결코 자유로움을 찾을 수 없었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는 새로운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진리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에 비해서 정의 내리기가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자유라는 개념입니다. 단순히 억압이나 강제가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에서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자유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자유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유라고 하면 개별적인 다름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저마다의 길을 갈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는 서로 간에 다를 수 있는, 아니 다를 수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에 주목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의미의 자유가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적 실천의 차원이나 사상적 신념의 차원 보다는 고용의 자유, 해고의 자유, 투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 통치의 자유 같은 자본주의적 의미로만 통용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더욱 친숙한 자유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같은 것 보다는 말그대로 소비생활의 자유, 즉 원하는 만큼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해줄 수 있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 진리 중의 진리는 ‘자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에서 자본으로 진리가 바뀌는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애써 지금껏 우리가 진리의 개념을 자유의 맥락에서 되살리려 노력했던 것도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열심히 각자 돈 버는 데 더 매진하고, 교회는 그 자본이라고 하는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강화하기 위한 모임으로 활용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 한숨결교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앞서 말한 그런 의미에서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고 있는 교회는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특정한 맥락과 상황성에 대한 고민 없이 전통적으로 교회가 신조화한 그대로 예수를 고백하겠다는 것이며, 또한 성경을 교리적으로 해석하겠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모든 역사적, 문학적, 이데올로기적 비평과 재해석을 포기하겠다는 것일텐데, 그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 생각이나 고민 따위는 없이 그냥 교회에서 말하던 그대로 기독교를 계속 믿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제가 단언컨대,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자고 굳이 한숨결교회에까지 나오고 계신 분은 없을 줄로 압니다. 우리가 더 이상 교리적 진리로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말 속에는 각자가 경험한 하느님의 다른 얼굴과 신앙사건의 다른 결들,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역사성과 영토성에 대한 인정, 기독교 내의 다양한 분파와 전통에 대한 인정, 성서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 타종교와 종교 이외의 다양한 문화와 현상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누미노제의 가치,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보편 진리이고 구원의 길이라는 사고의 거부 등을 일차적으로 긍정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단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몸으로나 삶으로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교리적 진리의 차원에서 기독교를 믿고 있는 분은 이 자리에 결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무조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또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획일적인 같음을 강요하는 진리에 반대하여 차이와 다양성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해서, 자본이 약속하는 그런 삶의 자유를 진리로 절대화하는 그런 이들도 아닐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굳이 한숨결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나눌 이유도 없었겠지요.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자유의 가치를 끝까지 옹호하는 사람들이고, 더 나아가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우연히든 아니든) 일치하여 여기까지 모일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다른 이들처럼 역설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의 억압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자유의 옹호가 자본의 자유와 같은 무질서의 자유와 혼동되어 결국 모든 것이 진리일 수도 있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진리라고 한다면 굳이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고 하는 상대주의 내지는 허무주의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라고 하는 가치를 완전히 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린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가치, 혹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어떤 삶의 양식이 갖는 가치를 버리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진리에 대해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한숨결교회를 통해서 교회라고 하는 것 혹은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는 뜻에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사고의 빛에서 재해석해보자는 것, 기독교적 신앙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한숨결교회의 맥락에서 우리 나름대로 새롭게 만들어나가 보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이 진리에 대한 예수의 개념 규정이라고 했을 때,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리를 주어로 놓았을 때 술어는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됩니다. 여기서 술어의 시제는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입니다. 진리란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진리는 지금 현재의 차원에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것입니다. 오직 미래의 차원을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고전 『중용』에서는 미발(未發)을 천하의 바탕(本)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알려진 것[기지(旣知)], 이미 발한 것[이발(已發)]은 오직 아직 알려져 있지 않고(미지), 아직 발하지 않는 것(미발)을 근본에 두어야 제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지와 미발로서 진리는 현재에는 아직 없고 오직 미래에만 있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능성으로서 혹은 잠재성으로 엄연히 현실 안에 있고, 현재와 현실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재와 현실에 ‘나아갈 바’, 즉 지향성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진리를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라고 일컫습니다. 풀어 말하면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란 ‘그 너머(미지)에 대한 지향을 근본으로 ‘이것(기지)’을 조율한다는 뜻입니다. 미지는 늘 현실의 바탕에 있고, ‘자유롭게 함’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너머’에 대한 운동적 지향의 가장 포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한숨결교회가 모종의 지향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어 왔습니다. 저는 우리의 지향성을 굳이 찾자면 바로 이러한 미지의 차원에서, 다시 말해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현실 너머의 현실에서 찾고 싶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만들어갈 자유로움에 의해 규정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진리는 실체가 분명한 물질명사가 아닙니다. 추상명사로서 진리라고 하는 주어의 의미는 오로지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술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그 진리라는 것, 결국 우리가 지금부터 앞으로 만들어 나가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리로서의 진리, 우리와 상관없이 과거에 누군가에 의해 이미 확정된 그런 것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진리를 우리 마음대로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진리는 우리를 언제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어떤 것이 참된 자유인지를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미래의 진리를 지향하기 위해 자유로움에 대한 모험을 함께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로서의 진리를 버리는 것만으로는 아직 자유로움에 도달하기엔 부족함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더 적극적으로 무엇을 향한 자유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적극적인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는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누릴 것이며, 그 자유를 누림이 우리에겐 즉각적으로 새로운 진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한숨결교회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에서 진리를 새롭게 알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고, 교회라고 하는 그 이상적 공동체를 새롭게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한숨결교회가 자유의 공동체, 진리의 공동체, 아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그런 미래의 교회공동체가 되어 가기를 꿈꿉니다.

우리가 그러한 꿈을 함께 꾸는 그 순간부터 그 미래는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곧바로 자유인으로 삽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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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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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츨링
    2010.01.06 00: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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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 보고갑니다.
    저에게 있어서 '완성형'이라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글이였던것 같습니다.

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첫 번째 이야기 - 풋내기 목사의 꿈

“하느님께 무엇인가 바치겠다고 너무 성급한 생각을 하지 말고, 조급하게 입을 열지도 말라.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말이 적어야 한다.” (공동번역성서, 전도서 5장 1절)

저는 목사안수를 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풋내기 목사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목회에 관한 이러저러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에 덜컥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을 해 놓고는, ‘또 실수 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이 약해서 글 쓰는 것을 취소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무슨 말이든 쓰기로 했습니다.

저는 목회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해서 목회란 것을 하겠지만 그렇게 몇 십 년 목회를 한다고 해도 ‘목회란 이런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목사가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공간을 통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특히 개신교에 대한 비종교인과 사회의 엄청난 불신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목사가 되어버린 한 인간의 나약한 삶을 그저 쓰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저는 목사가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심지어 교인들조차도 목사 앞에서는 웃으며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도 속으로는 “으이구, 저런 게 목사라니~” 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삶에 있어서 교회와 목사는 이렇게까지 욕만 먹어야 할 곳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여섯 살 때부터 자그만 시골교회를 다녔는데 그 교회는 저를 품어준 보금자리였고, 그 교회 목사님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작은 시골교회에서 동네 사람들과 동고동락하셨고, 제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나이 지긋하신 인자한 할아버지셨지요. 그 목사님은 원래 음악교사셨는데, 아버님이 한국전쟁 중에 순교를 당하자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목사가 되셨고, 평생을 그 작은 시골교회에서 어렵고 힘든 삶을 감당하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신나게 놀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사람들과 함께 모여 얘기하고 웃음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의 유년과 청소년, 청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그 교회에 가면 엄마의 품에서 쌔근쌔근 잠든 갓난아이처럼 포근하고 아늑함을 느낍니다. 제가 어쩌다가 목사가 되었는지 저도 사실은 잘 모르지만 20년 동안 저의 삶의 한 부분이었던 그 작은 교회의 아름다운 경험이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저의 부모는 지금도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제가 신학을 하고 목사까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땅에 뿌려진 씨가 저절로 자라듯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었습니다(마가복음 4:26-29). 세상엔 온갖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많지만 저는 한명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신비를 믿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 인간은 땅에 있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문제 가득한 이 세상도 눈 크게 뜨고 보면, 잠잠히 입 닫고 고요히 있다 보면, 여기저기서 파릇파릇 돋아나는 하나님의 신비로 가슴 한켠에서 잔잔히 밀려오는 감동에 눈물 적시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생존의 욕구와 더불어 자아실현의 욕망으로 가득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저도 욕망이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지요. ‘돈’이 ‘하느님’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돈 벼락이라도 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내밉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욕망이 있다면 제가 그 어린 시절 작은 교회에서 느꼈던 그 행복하고 뿌듯하고 신났던 그 경험을 누군가의 삶 속에 일어나도록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가 이런 저의 욕망에 대해 꾸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 웃긴 놈아! 그러니까 목사 쓰레기라고 불리는 거야. 알았어!” 그래요.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사람은 원래 사람들하고 함께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사는 맛도 느끼는 것이니까, 교회라는 곳이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 곳이 그런 곳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풋내기 목사로서 하느님께 뭔가 바치겠다는 성급한 생각을 할까봐 전도서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사실 제 주변에 가까운 분들은 제가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그렇고 제 아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라는 거창고등학교에 써 있다는 직업선택의 십계명의 뜻을 생각하면서 아마도 전 계속 목사로 살게 될 것 같습니다. 세상엔 수많은 목사가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 개인에게는 단 한번 지내는 일생이겠지요. 목사로서의 제 삶을 반추하고 성찰하기 위해 몇 분들의 생각을 소개하고 첫 번째 글을 마칠까 합니다.

첫 글은 권정생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한 20여년 전, 친구한테 얘기했던 게 생각난다. 내용은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안 넓이는 사람이 쉰명에서 백명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겠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마루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00교회라는 간판도 안 붙이고 꼭 무슨 이름이 필요하다면 '까치네 집'이라든가 '심청이네 집'이라든가 '망이네 집' 같은 걸로 하면 되겠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오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

어때요? 좋지요. 저도 이런 교회를 갖고 싶답니다. 프랑스 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가 하는 공동체가 있는데 거기에 누군가 찾아 오면 세 가지를 물어본다고 합니다. 

“주무시겠습니까? 드시겠습니까? 씻으시겠습니까?”

이 공동체에서는 이렇게 누구나 환영하고 함께 사는 이들은 자신이 먹을 것보다 조금 더 많이 일을 한다고 합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더 일하는 교회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 사셨던 신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이시여!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교 제도 내에서 목사를 하면서 정말 신을 사랑할 때 꼭 해야 할 것들을 할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을 사랑할 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을 사랑할 때 우리는 무슨 행동을 할까요? 신을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목회를 해야 할까요?”

두 손 모아 잠깐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성공회 주교였던 존 엘브리스 하인스가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했던 기도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가 당신께 아무런 뜻도 없는 일들을 습관처럼 행할 때, 우리를 용서하소서.”

ⓒ 웹진 <제3시대>

* 향린교회 http://www.hyangl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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