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난감함...




구선애
(한백교회 교인)


 

지난 주일은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스무번째 맞는 제삿날이었습니다. 

12년 전부터 저희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제수는 기본적으로 밥과 국을 올리고 떡과 술은 물론, 삼색 나물, 고기, 생선, 전들, 그리고 탕. 포, 밤, 대추, 제철에 올릴 수 있는 모든 과일 등 음식이란 음식의 종류들을 다 올립니다. 

상다리가 휠 정도로 올리고야 정성을 다했다는 느낌이 드나 봅니다. 

시댁에서 지낼 때는 시어머님 주관아래 제수를 마련했으나 저희 집으로 제사를 모셔오면서 제수 마련은 전적으로 제 책임이 되었고 남편이 제관 즉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그동안 하던 데로 했지만 해마다 조금씩 제수를 줄였습니다. 

일하면서, 혼자 손에 버겁기도 했고 형식적이고 가지 수 늘린다는 느낌도 크기에 고구마 전, 삶은 계란 등을 제수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삶은 계란 찾는 남편에게 전 부치는데 스무 개짜리 계란 한판 다 들어갔다고 우스게 소리를 하며 오금을 박았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혹시 제사상에 빠진 품목이 있더라도 찾지 말라고, 모두 모인 앞에서 지적하지 말라고 미리 당부를 해 놓아도 올해도 고구마 전, 삶은 계란 타령을 형제들 앞에서 또 했습니다. 

밉상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까짓것 계란 3개만 삶고 고구마 2개만 구우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계란을 삶고 고구마 전을 굽는다는 건 그동안 제가 조금씩 간소화 시킨 의례를 다 되돌린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제가 양보가 안 됩니다. 

저는 그간 제사를 지내는 동안 귀신이 들어와야 된다며 열어 놓던 현관문을 혼백은 시공간을 초월한다며 닫았고 집 밖에서 태워 공중에 날리던 지방을 대야 위에서 태워 재를 집안으로 가져 오도록 했는데 이 모든 걸 다시 돌려야 합니다. 

이웃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기도 하고 개신교 신자들이 많은 요즈음은 이웃들이 노골적으로 싫어하기도 합니다. 

제가 양보가 안 되는 더 큰 일이 있습니다. 

‘제사를 잘 지내야 복을 받는다’ 는 남편의 정서가 저로 하여금 양보가 안 됩니다. 

사업 실패하고 난 후 조상이 돌보길 간절히 기원하는 남편이 참으로 딱하고도 안쓰러워, 또 아버지 잃은 형제들의 애통을 존중하여 10여년은 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만 할 때도 된 것 같습니다. 

복 받고 집안 잘되는 건 사람이 할 일이지 죽은 조상이 할 일은 아닙니다. 

제삿날은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며 그 분이 베풀어 주신 은덕과 사랑에 감사하고 남은 자손들이 모여 앉아 우애를 돈독하게 할 자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올해도 남편의 불만을 짐짓 모른 체, 제사 준비를 했습니다. 

해마다 참석 인원이 조금씩 줄더니 올해엔 18명이 참석했습니다. 

1부는 제사, 2부는 형제애를 돈독히 하는 애찬입니다. 

제수는 대표 음식으로 마련하고 모이는 형제들이 좋아하는 갈비와 회를 주 메뉴로 했습니다. 

총 경비가 70만원을 조금 넘었습니다. 

갈비를 호주산으로 했기에 그 정도입니다. 

유쾌한 가족들이 배불리 먹고 마시고, 남은 음식 한 보따리씩 들고들 돌아갔습니다. 

남은 음식이 아닙니다. 첨부터 싸 보낼 분량까지 감안하여 마련한 음식입니다. 

수고했다며, 잘 가라며 인사하고 돌아섰지만 찜찜합니다. 

그 놈의 삶은 계란, 고구마 전에 “저래서 복 받겠나~!”하는 시누들의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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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소통의 단절, 그리고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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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애
(부모교육/MBTI 강사)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41세에 죽은 카프카가 죽기 5년 전, 36세에 45장에 걸친 장문의 편지를 아버지에게 쓴다.
철옹벽 같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항의며 호소며 절규였으나 결국 부치지 못한 편지다.
아버지로 부터 겪은 것은 소소한 일상에서의 좌절이지만 상처 받은 카프카에게는 존재의 문제가 된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와 끊임없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노력이 불후의 명작들을 낳았지만 그 주제는 불통 속의 절망적인 실존이다.
자신을 한낱 벌레로 표현한 '변신'을 읽으면 카프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느낌을 짐작할 수 있고 평생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반란이 결혼이었으나 3번의 약혼과 파혼만 되풀이 하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었으니 가족-특히,부모와의 관계에서 겪는 불통은 단지 고통을 넘어 파괴적이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어느 날 갑작스레 맞은 아내의 죽음. 남편은 당황한다.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 아내의 자취는 옷과 사진첩.
"부토(원폭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현대무용, 칠흑같은 어둠의 춤이란 뜻)"를 추며 찍은 사진 속의 아내는 너무나 생소하다.
아내 생전, 자신이 보기엔 낭비처럼 보여, 아내의 취미인 부토를 막아 버렸던 남편은  재산을 정리하여 아내가 가고 싶어했던 일본으로 떠난다.
아내를 위하여.
이런 아버지를 자식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일상의 리듬이 깨지는 것이 싫어서 부담스러워 하기까지 한다.

작가와 감독은 가족간 단절의 숨통을 일본의 가족애에서 찾으려 한다.
벚꽃이 만발한 일본의 공원에는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가득하고 남편은 공원에서 부토를 공연하고 있는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분홍 전화기를 들고 부토를 추며 그림자인 자신과 만나고 저승의 엄마와도 만나 행복한 얼굴이다.
이 소녀만이 주인공 남편과 소통한다.
남편과 소녀는 후지산으로 떠나,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후지산을 기다린다.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몇 날이 지나고, 드디어 안개가 걷혀 환한 밤, 후지산은 선연히 자태를 드러내고, 남편은 달 빛 아래서 부인의 옷을 입고 부토를 춘다.
후지산 앞에서, 부토의 춤 속에서, 드디어 아내를 만나고 남편은 쓰러진다.
엔딩 자막이 다 올라가고도 한참동안, 어느 한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사랑은 소통이다
그러나 어렵다.
때때로 칠흙같은 어둠 속에 빠진 느낌이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당연히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랑의 상대가  눈 앞에서 사라졌을 때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알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또 얼마나 사랑의 상대를 좌절시켰나를 깨닫고 좌절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내 가족, 연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아파하고 있는지!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 특히 부모로 부터 상처를 받는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어서.
그리하여 내가 받은 좌절과 상처에만 급급하여 내가 사랑해야 할 상대에게 상채기를 내며 보복을 하기도 하며 많은 이들이 한생을 적개심과 분노로 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상처에 메여 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한다.
 
불통-다름과 차이
 
사람들은 누구나 내 잣대로 판단한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 오해하고 상대가 잘못 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어 날 때 기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태어난다.
이미 갈등의 소지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얘기다.
흔히 성격 차라고 말하며 극복하기에 벅차들 하는 부분이다.
이 다름과 차이는 타고 난 것이기에 바꿀 수 없으며 그냥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하며 이 근본적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갈등은 해소되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소통은 받아들임이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질 때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되며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는 인정과 수용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양식이 되고 특히 유아기와 아동기에 받는 부모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은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남편은 아내의 옷을 입고 후지산 앞에서 부토를 추며 아내를 만난다.
우리도 사랑하는 이의 옷을 입고 춤을 추며 사랑하는 이와  만나자.
물론 살아있는 오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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