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을 기다린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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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임방주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

어디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만날지는 ‘하느님’도 모르는 것 같다. 만약 아신다면 안가르쳐 주시는 걸 꺼다. 모르시든 안가르쳐주시든 ‘나는 알수없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불교에서는 인연을 짓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 의미는 상황이 끝난 후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 하느님과 부처님을 오가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만남의 의미는 꽤나 지나서나 아나부다~’라는 상식을 깨우쳐준 소중한 만남에 관한 것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하 KSCF)의 회원자격으로 태국의 버마이슈라는 곳에서 인턴이 되어 버마 민주화와 난민, 종족 갈등에 대해서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있던 것이 2003년 여름의 일이다. 숙소에서 버마이슈 사무실까지 걸어서 3분, 아주 짧은 거리지만 그 사이에 식당이 2개, 이발소가 1개, 구멍가게가 1개 있을 정도로 빽빽한 주택가였다. 아침에 출근길에 아침인사와 목례를 하면 ‘Good Morning’이라고 답을 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정말 외국인으로 보이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동네에서 눈에 띄는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달 가까이 지내다 보니 머리가 많이 자라 지나면서 늘 인사하던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를 손질(?)하게 되었다. 이발사 청년과 자연스럽게 짧은 영어로 가계조사와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다. 워낙 친절한 사람이라 나중에는 머리 깎지 않아도 서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태국의 찜통 더위와 소나기를 경험한지 두달이 지날 무렵, 그 친절한 친구가 시간되면 저녁을 먹자고 했다. 가까운데 좋은 곳이 있으니 가자고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요리사’인데 곧 요리를 배우러 유럽에 가게 될지 모르니 가기 전에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오히려 현지인과 ‘민주와 인권, 투쟁’이 아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흔쾌히 ‘OK’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기쁜 표정으로. 그런데 사무실에 일하는 친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내가 모르는 정보와 느낌을 나누는 듯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저녁식사를 하러 그 친구와 ‘룸비니 공원의 나이트 바자’를 갔다. 시끄럽게 공연과 흥정이 오가는 시장에서 조금 조용한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그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별로 할 말이 없어 주로 듣고 있었는데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날 즈음 그 친구가 나에게 “당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했고 나는 “와~ 기대가 됩니다”라고 답을 했다. 그런데 그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가 ‘커플이 되가는’ 수순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확 스치면서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인지 물어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돌아온 답은 “당신이 맘에 들어요, 좋아요~”. ‘앗! 이거였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뭐라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 긴장된 상황이 되어버렸다.

‘앗, 어떻하지? 거절해야 하는데, 뭐라고 하지, 어~ 이거 뭐라고 하지???’라며 머릿속을 굴리고 있는데 그 요리사가 꿈인 친구가 폼나게 거절할 미끼를 던져주었다. “내가 같이 살고 있는 친구가 있지만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예요”라고. ‘이거다. 이때다!!’ 나는 2.7초도 지나지 않는 순간에 “그러면 안되죠,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안되요, 당신의 친구가 불쌍하잖아요~~”라고  ‘웃으며’ 정당하고, 윤리적으로 거절하였다. 이후 이야기는 순풍에 돗단배처럼 술술 풀려갔다. 그 이발사가 비윤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설득하고, 나중에 더 좋은 기회가 올거라고 달래며 택시를 태워보냈다. 그리고 생맥주 한잔......‘지금 뭔일이 있었는데, 아~~ 정리하고 싶지 않다.. 휴~~’ 한숨을 돌렸다.

한국에서 KSCF회원으로 민주와 통일, 인권, 소수자의 권리 운동에 음으로 양으로 관계를 맺어오면서 논리와 당위는 머릿속에 또라이1)를 틀고 있었지만, 그 권리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생각은 없었던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 인연’이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자각하기까지 6년이란 시간동안 그 기억은 내 머리 한편에 독방에서 구금 당해 있었다.

기독교내의 동성애자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도 어려운 상황임을 절실하게 알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이하 차세기연)의 활동이 6년전의 기억을 눈 앞으로 불러세웠다. 여전히 동성애인권을 말하는 내 입은 6년전 눈 앞에 있던 ‘요리사가 되고 싶은 이발사 친구’를 내가 동성애인권을 알게 해준 ‘은인’으로 조작하면서 차세기연에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내 위치를 돋보이게 하는 ‘지지자’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이 인연을 생각하게 되었다.

6년전 너무나 당당하게, 윤리적으로 설득했던 내 모습과 그 인연을 활용하여 동성애인권과 신앙과 신학을 말하는 내 모습 어디에도 ‘그 인연 속의 그 친구’는 없었다. [사람이 없었다]

6년을 기다린 그 기억의 친구를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안해~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느님도 부처님도 말해주지 않는 그 인연의 깊은 뜻은 뭘까?라고 다시 질문하는 내 머릿속에 또 [사람]이 없어지고 있다.
‘에이씨~ 이런 된장~~’

ⓒ 웹진 <제3시대>


1) 오타가 아닌 필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30대 개그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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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옹달쌤
    2009.05.07 20: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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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초가 의미하는게 뭐에요?

한국 기독교, 신앙 실력을 발휘해 보자

김학철
(신약학 / 연세대 신학 박사)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들이 아직까지 모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기업 연구원, 대기업 계열사 중간 간부, 공무원, 대기업 중간 간부, 방송국 PD 등 각기 자리를 잡았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두었다. 가족들이 종종 모이는데, 남자들만의 모임과는 달리 가족 간의 대화에서 화제는 언제나 두 가지로 모이게 된다. 하나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 교육’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 주제에 도달하기 위한 서언이고, 모임이 끝날 무렵 덕담은 그 두 가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기원이다. 그러나 대화 내내 우리는 괴롭다. 그 두 가지 ‘문제’가 오늘 이 땅을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삶을 피폐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과수원을 망치는 두 마리 여우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것들을 잡는 덫이 무엇이어야 하며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갑론을박 중에 유일하게 얻는 소득은 서로가 서로의 크고 작은 고통을 위무하고 있는 친구임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문명을 발달시키고 난 후 거주권과 교육권이 중요하지 않은 때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도 거주에 관한 권리와 교육권을 국민의 중요한 권리를 보장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가 괴로운 건 지금 우리에게 ‘집’과 ‘교육’이 단순히 거주나, 교양 및 직업 지식을 얻기 위한 교육 이상인 데에 있다. 어쩌면 그것들은 우리 삶의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 그래서 몽둥이를 들고 잡을 수 있을 훼방꾼의 수준을 넘어선 것 같다. 그 둘은 이른바 물신화되었다. ‘집’과 ‘교육’은 일종의 신이 되어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라고 말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가 오늘 우리에게 ‘집’과 ‘교육’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듯 싶다.
 
바알은 우뢰와 비를 주관하며 자기의 짝신인 아세라와 함께 풍요와 다산을 약속한다. 숭배자들은 그 복을 얻기 위해서 지극한 제사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는 우상일 뿐이다. 그것이 우상인 까닭은 그것 자체가 그저 상상물일 따름이며 따라서 약속을 실행해 줄 능력도 없고, 그들이 요구하는 제사가 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집’과 ‘교육’도 이와 비슷하다. 그 둘은 우리에게 달콤한 약속을 한다. 집은 안정과 여유와 안락을, 교육은 그것에 이를 수 있는 길이자 탁월함 및 명예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둘은 바알과 아세라처럼 우상일 뿐이다. 그들의 약속은 빈 것이고, 그 헛된 약속에 도달하기 위해 지내야 할 제사는 우리의 삶을 망칠만큼 파괴적이다. 문득 아합 왕 때 갈멜 산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내리기를 바라면서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지내던 바알 선지자 4백 명과 아세라 선지자 4백 5십 명의 제사 광경에 대한 묘사가 떠오른다. 소를 재물로 삼고 아침부터 부르짖는 그들은 제단을 돌면서 춤을 추고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러 대면서 미친 듯이 날뛴다. 그러나 불은 내리지 않았다. 그 광경의 현대적 소프트코어 버전은 영화 <즐거운 인생>에서 자식을 조기 유학 보내고 사무실 한 켠에서 라면을 먹으며 행복해하다가 자식과 함께 외국에 갔던 아내에게서 버림을 받았던 ‘혁수’의 모습이다. 하드코어 버전은? 말하기도 싫다.
 
기독교를 궁극적인 실재와의 만남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확보하게 도와주는 상징 체계라고 편의상 정의할 때, 이 시대에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상의 본질적 허구성을 비판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폭로하는 성서를 손에 들고 읽는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곰곰이 헤아려 본다.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라고 호기롭게 말하며 제단과 제물에 물을 붓고는 하나님께 불을 청하던 엘리야가 나타나주기만을 기다렸다가, 누군가를 향해 냉큼 ‘엘리야가 오셨다’고 환호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는 아닐 것이다. 엘리야는 우리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
 
한국 기독교, 신앙 실력 좀 발휘해 보자. ‘신앙을 통한 물질의 축복’이니 ‘다니엘 학습법’이니 하면서 ‘집’ 우상, ‘교육’ 우상의 제단을 섬기는 부끄러움은 그만 반복하자. 우리 시대 우상의 본모습을 폭로하고, 그것이 살 길이 아니라고 설득하고, 실제로 다른 삶을 집단적으로 훌륭하게 살아보여 주자.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교회로 모여 뭐 하겠는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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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ineluna
    2009.05.21 10: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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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 우상의 본모습을 폭로하고 아니라 외치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사람을 피폐하게 하는 삶의 고리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하는 신앙의 힘이 우리안에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회개는 진실합니까?
- '회개'라는 언어지옥에 빠진 한 주체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기독교의 회개는 대체 무엇인가?

기독교인에게 ‘회개’의 의미는 남다르다. 회개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이’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 앞에 내어 맡기는, 동시에 삶의 총체적 변화를 결단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를 통해 그는 과거의 죄를 사함(사면) 받는다. 따라서 회개는 이전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경험이다.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회개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는 왜 나에게 전혀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일부 교회의 문제를 전체 문제인 것처럼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특정한 형태의 신앙의 제도가 한국 교회에 보편적으로 내면화돼 있고, 그 신앙 제도에서 ‘회개’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이 한국 교회의 부패를 초래하고 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진실한’ 회개를 하는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군사주의적 선교를 떠나고, 사회의 불의에 침묵하는 현실을 보며, 기독교의 회개는 대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의 회개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을 기독교와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영화 <유레루>(니시카와 미와 감독)를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사진가로 성공해 자유분방하게 살던 다케루(오다기리 죠)가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들러 형을 기다리던 다케루는 자신의 옛 친구였던 치에코가 형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는 치에코를 유혹한다. 치에코는 형 미노루(카가와 테루유키)가 연정을 품고 있는 이였다. 형은 어릴 적 세 사람이 자주 놀러가던 ‘하스미 계곡’에 다시 같이 가자며 더 머물다 가라고 동생에게 권유한다. 다음날, 못 이기는 척 하스미 계곡에 함께 간 다케루는 자신을 따라 도쿄에 가고 싶다는 치에코로부터 도망쳐 구름다리를 건넌다. 다케루를 좇아 구름다리로 달려온 치에코, 그리고 그녀를 좇아 달려온 미노루. 건너편 강가에서 사진을 찍던 다케루는 형과 실랑이를 벌이던 치에코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형에게 달려간다. 다케루는 당황한 형에게 치에코가 혼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이라고 증언하도록 대응요령(?)을 알려준다.

그러나 형의 무죄방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다케루는 형과의 면회 이후 형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기로 한다. 법정에서 보이는 형의 태도를 보며, 그는 형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형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형은, 사실은 동생이 자신(의 결백)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케루가 “나는 형을 믿어”라는 말을 수없이 했지만, 사실 그 이면엔 ‘나는 형이 살인자라는 걸 알아’라는 지식 혹은 믿음이 놓여 있다는 것을 형은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형이 살인죄로 기소된 법정에 증인으로 선 다케루는 차분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그가 목격한 형의 ‘살인’ 장면을 증언한다. 다케루의 증언으로 다리 위해서 형이 내민 손은 치에코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었음으로 ‘판명’된다.

돌아온 탕자-동생 vs. 무한히 자기를 희생하는 자-형 ?

7년을 복역한 형이 출감하는 날, 다케루는 어릴 적 하스미 계곡에서 가족과 촬영한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된다. 어머니가 촬영한 그 영상에서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형이 내민 손과 고소공포증 때문에 구름다리를 건너기를 두려워하는 형을 보고, 형이 의도적으로 치에코를 다리에서 밀어 죽게 했다는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형에게 달려가는 다케루. 길 건너편 버스를 기다리는 형은 소음 사이로 들려오는 동생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동생에게 얼굴을 돌려 미소를 보낸다. 그 미소를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형은 마지막 장면에서까지 동생의 ‘위증’마저도 용서하고 받아주는 무한한 자기희생의 상징처럼 묘사된 것만 같다. 마지막 장면의 형의 미소가 형제의 아름다운 화해의 증거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인 듯하다. 자애로운 형과 이기적인 동생, 그리고 자신을 살인자로 만든 동생의 ‘실수’까지도 묵묵히 용서하는 형. 그리고 동생의 회개와 관계의 회복. 어찌 보면 너무나 통속적인 서사구조를 영화는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만의 장르적 속성을 이용해 서사의 ‘닫힌 구조’를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예를 들면, 다케루가 형의 유죄를 확신하며 회상하는 장면 ― 다케루는 구름다리 위에서 형과 치에코가 나눈 대화를 마치 명확하게 듣고 보았던 것처럼 그려진다. 치에코가 이 시골마을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며, 이 시골만큼이나 미노루를 혐오한다는 듯한 말을 하자 이에 화가 난 미노루가 치에코를 다리에서 밀어버리는 것이 다케루의 회상 내용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영화평론가 김지미의 표현을 빌리면, “카메라는 미노루의 시선보다는 멀리 있으며, 타케루의 시선이 되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회상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모호해진다.[각주:1] (영화에서도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오지만 굳이 설명을 보탠다면, 다케루는 구름다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물소리도 컸기 때문에 형과 치에코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다케루와 형의 마지막 면회 장면에서 카메라의 눈은 형을 향해 있지만 면회실 유리벽을 통해 다케루의 얼굴이 형의 얼굴 바로 옆에 선명하게 비치는 것 또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담아낸다/본다. 이때 진행되는 형의 진술은 다케루가 믿는 ‘진실’이 형의 입을 빌려 말해진 것일 뿐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형의 ‘유죄’가 다케루의 ‘믿음’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데 동시에 이 장면은, 역설적으로, 형이 ‘무죄’라는 사실 또한 관객의 ‘믿음’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형의 ‘유죄’가 다케루의 ‘믿음의 눈’을 통해서 재현된 것에 불과하다면, 다케루의 믿음이 허구이고 미노루가 무죄라는 사실 또한 카메라의 ‘눈’을 통해서 재현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메라의 ‘눈’이 영상에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다케루와 미노루를 관찰하고 있는 ‘눈’은 관객의 ‘눈’과 동일시된다.

해석자를 통해 완성되는 서사구조와 언어지옥

영화의 절정 부분에 등장하는 이 두 장면 때문에 관객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화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부분이 된다. 관객이 해석자로 동참함으로써만 돌아온 탕자로서의 동생 대 자애로운 형의 서사구조가 완성된다.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 영화의 서사는 완성된 구조 또는 닫힌 구조가 되는데, 이와 동시에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바꿔 말하면, 모호해진 회상의 지점(앞에서 든 첫 번째 예)과 다케루의 시선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지점(두 번째 예)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영화의 안과 밖은 뫼비우스의 띠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구별하고, 영화의 서사가 허구인지 진실인지를 판단하던 ‘주체로서의 관객’ 대(對) 해석과 판단을 기다리는 ‘대상으로서의 영화’라는 이분법은 허물어진다.

다시 영화 ‘안’의, 또는 우리가 영화 ‘안’이라고 믿는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다케루는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영상에 담긴 형과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보고 자신의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닫는다.(“흔들리는 다리에서 발을 헛디딘 것은 형이 아니라 나였다” 운운하는 마지막 나레이션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유지되고 있는 형의 이미지―자애롭고 자기희생적인―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 것일까. 형은 어머니의 기억, 다케루의 재현(그나마도 오락가락하는),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을 통해서만 재현될 수 있는, 그 스스로는 자신을 재현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이 영화는 아름다우면서도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을 재현할 능력이 없는 타자에 대해 ‘잘못된’ 재현을 한 결과 그 타자는 ‘살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재현을 한 주체가 ‘아, 그 판단은 실수였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타자는 마술처럼 다시 ‘자애로운 자기희생적인 형’이 된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주체의 변덕이 다시없으리란 보장을 할 수가 없다. 다케루는 자신의 판단의 착오는 인정했을지언정, 그 판단을 하는 주체 자체는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주체의 실수’는 인정하지만 ‘주체 자체가 틀렸을’ 가능성은 전혀 사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주체의 ‘앎/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진실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다케루의 회개는 매우 진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케루의 반성과 회개는 그것이 ‘진실한’ 것이었다 해도 결국 주체의 경계 자체는 사유하지 않는, 여전히 타자를 배제함으로써만 성립하는 반성과 회개일 수 있다. 그는 회개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저 회개라는 언어의 지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앞서 이 영화는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만 완성된 서사를 갖게 되며, 그 과정에서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다고 했던 것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미노루가 ‘타자’ 또는 ‘보여지는 자(재현대상)’에 대한 은유라면, 다케루는 ‘주체’ 또는 ‘보는 사람(관객)’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는데, 감정이입을 통해 자애로운 형 대(對) 돌아온 탕자 동생의 이분법과 서사구조를 완성시켰던 관객은 과연 미노루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다케루를 언어지옥에 빠지게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다케루와 미노루의 화해를 상상한 관객은 과연 ‘화해’라는 언어의 지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영화 안의 주인공에 대한 사유를 넘어 관객인 우리의 사유하는 태도 자체에 대해 그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나 회개하지 않는 기독교인

기독교인에게 회개와 관계회복의 전형처럼 수용되고 있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유레루>의 서사구조와 상당히 닮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사 자체가 닮았다기보다는 서사가 수용/소비되는 방식이 닮았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이러한 서사 수용방식―달리 부른다면, ‘돌아온 탕자’ 담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무한히 자애롭게 그려지는 타자로서의 하느님과 그 신 앞에서 어떤 죄도 마술처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 주체뿐이다. 이 기독교 주체의 회개는 ‘진실하다’. 그러나 그 진실함은 주체의 경계 안에서 느끼는 자기애의 정도에 비례할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 욕하는 상황에서, 욕하는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진실하게 기도하는 기독교 주체의 이해 못할 행동은 이러한 회개 담론을 통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독교 주체에게 회개란 무엇일까, 그를 언어의 지옥에서 건져내는 구원의 빛은 어디에 있을까.  ⓒ 웹진 <제3시대>

  1. 『씨네21』 2006년 8월 30일자 - 김지미, "인간의 기억과 믿음은 진실일까?" <유레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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