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라 목사 ‘이단’ 시비를 통해서 본 ‘연대’와 ‘퀴어신학’의 가능성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이성애가부장제(heteropatriarchy)의 붕괴와 젠더 위계질서의 분열에 대한 두려움을 ‘동성애’에 대한 공격으로 분출해온 개신교 우파의 최근의 권력행사의 대표적 사례는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성’ 여부 조사일 것이 다. 예장합동의 이단대책위원회가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성조사를 표명했고, 7개 교단 이단대책위가 공조 하면서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 여부를 조사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급기야는 임 목사를 소환하겠다고 나섰다. 지금 한국 개신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성애 관련 ‘이단’ 시비는 ‘정통’과 ‘비정통’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이 성애가부장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신학적 입장, 목회, 목사를 ‘이단’으로 명명한 뒤에, ‘정통’과 ‘다르고’, 다르기 때문에 ‘비정상’이고, ‘비정상’이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에 ‘해’가 되기에 낙인을 찍겠다는 것이다. 비정 통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려 차별, 배제, 멸시, 폭력,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던 존재들은 21세기 한국사회에서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와 관련하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포럼을 개최했고, 나는 임보라 목사와 함께 포럼에 참여하였다. 동성애에 대한 ‘교리신학’적, ‘윤리신학’적 이해에 대한 짧은 고찰과 8개의 개신교 교단에서 자신들의 교단에 속하지 않은 임보라 목사를 왜 ‘마녀사냥’하듯 이단으로 몰아가는지에 대 해서 의견들이 오갔다. 한데 질의・응답시간에 나눈 의견들과 질문들 중 하나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고 있 다. 맨 마지막에 제기된 것인데, “이 날의 포럼이 퀴어들의 경험을 대상화하는 것은 아닌지”라는 것이다.[각주:1]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 이 짧은 질문은 ‘퀴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하냐를 묻는 퀴어정치학(queer politics)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한, 이 질문은 성소수자,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하며, 더 나아가 ‘누가 퀴어신학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퀴어’(queer)는 일반적으로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 자신의 성과 젠더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일 컫고, 이들과 연대하는 ‘엘라이들’(allies)도 포함하는 총괄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이렇듯 ‘퀴어’가 LGBTQIA(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stioning, Intersex, Asexual)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의미로 규정될 수 없고 그렇게 제한되기를 거부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영어에서 명사로도, 동사로도, 형용사 로도 쓰이는 ‘퀴어’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지워버린다는 의미, ‘뭔가를 위반하는 행위’, 또는 ‘이성애규범 성(heteronormativity)에 대한 대항’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각주:2]


    퀴어정치학은 성적인 ‘일탈자’와 ‘타자’로 규정되는 주체들을 소수자들로 낙인찍고 억압하는 여러 가지 규 제와 범주화에 의해 성적 주체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성정체성의 이분화를 비판하 고 이성애를 포함한 다양한 범주의 섹슈얼리티에 분포된 권력의 여러 지점들(힘의 불균형)을 예리하게 짚어낸다.[각주:3] 또한, 퀴어 이론가들은 동성애의 어떤 규범적 위치(position)를 옹호하는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에 대 해서, 그리고 ‘퀴어’를 ‘이상화’(idealization)하거나 ‘동일시’(assimilation)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4]


    이렇게 ‘퀴어’가 한 가지 의미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엘라이’로서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 자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엘라이로서의 연대는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성적 ‘일탈자’로 규정된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거나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연 대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근간인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 젠더 위계질서를 끊임없 이 비판하고, 성과 젠더의 사회적 작동과정에서 차별과 배제, 고통을 유발하고 재생산해내는 사회의 권력구 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비록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의 아픔과 고통의 깊이를 충분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들에게 고통을 부과하는,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이 연대의 유의미한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정체성의 ‘다름’을 차별로 전환시키는 권력구조의 작동 임이라는 사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자신의 성과 젠더 정체성을 퀴어로 규정짓 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을 통해서 성소수자나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가 가능하게 된다. 다름을 비정상으로, 비정상을 해악으로 규정하면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메커니 즘을 각인하고, 그 속에서 여러 차별과 배제가 어떻게 생겨나고, 여러 가지 고통과 아픔이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인식한다면 그런 권력구조의 종식을 위해서 연대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연대 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획일적’으로 이성애를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엘라이가 이성애자나 시스젠 더(cisgender. 태어나면서 지정받은 '신체적 성별[sex]'과 자신이 정체화 하고 있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일치한다고 여기는 사람) 로서 알게 모르게 특권을 누려왔음을, 그러한 (무)의식적 메커니즘에 기생하고 있어왔음을 자기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또한 성소수자와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는 이성애가부장제와 그것을 지탱하는 다른 권력 구조와 억압 체제들에도 대항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왜냐면 억압구조들은 서로 교차하고 그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형성되고 작동되는 과정에서 편견과 차별, 배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대의 끈과 망은 계속 넓혀져 갈 수 밖에 없다.


    ‘퀴어’의 다양한 의미와, 성소수자와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퀴어신학에 대한 이해도 확장하게 된다. 약 30여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퀴어종교학(퀴어 기독교신학 포함)도 변해왔다. ‘퀴어’라는 용어가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듯이 퀴어종교학/신학도 내부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퀴어’를 LGBTQIA를 총 괄하는 용어로 규정하면서 퀴어정체성과 퀴어경험에서 출발하는 퀴어신학이 있고, 퀴어를 단지 성과 젠더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신학도 있다. 다시 말해서, ‘게이로서 신학하기’라는 정체성과 경험에 근 거한 신학에 머무르지 않고, 기독교의 뿌리 깊은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를 비판하고, 또 기독교내에 이미 존재하는 ‘퀴어성’(queerness)을 재발견해내려 하는 퀴어신학의 흐름도 있다. 이는 퀴어신학이 LGBTQIA의 경험만을 신학화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다름’을 ‘차별’로 규정하고 성과 젠더에 대한 지배 규범을 생산해 내 는 사회의 권력구조를 비판하면서 기독교 역사와 전통, 기존의 성서해석과 신학을 퀴어적 시각에서 다시 읽 고 재해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렇게 ‘퀴어’가 한 가지 의미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엘라이’로서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 자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엘라이로서의 연대는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성적 ‘일탈자’로 규정된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거나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연 대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근간인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 젠더 위계질서를 끊임없 이 비판하고, 성과 젠더의 사회적 작동과정에서 차별과 배제, 고통을 유발하고 재생산해내는 사회의 권력구 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비록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의 아픔과 고통의 깊이를 충분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들에게 고통을 부과하는,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이 연대의 유의미한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광범위한 퀴어신학의 한 분야인 퀴어적 성서 해석도 성서에서 ‘동성애’에 관한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들을 재해석하거나 성서의 몇몇 등장인물들을 ‘게이’로, 또 그들의 관계를 ‘동성 간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시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식론적 관점으로서의 ‘퀴어’를 통해 성서의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 가부장제, 젠더의 위계 질서를 비판하고, 성서에 나타난 규범과 비규범의 이분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비판함과 동시에 재해석 하고, 성서에 내재된 퀴어성을 해석해 내기도 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내부적으로 다양한 퀴어 신학은 정상과 비정상의 극명한 대조를 해체하고, 규범과 비규범의 경계를 지우고, 차이와 경계들을 만들어 내는 권력구조를 비판하며, 그런 권력구조가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계속해서 질문 하면서 경계 허물기를 도모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신학적 시도는 소위 ‘정통’신학에 대한 비판까지도 포함한다.


    임보라 목사와 퀴어신학의 ‘이단성’을 판단하겠다는 세력에게 대항하는 방식으로서 그들의 ‘비정통성’이나 ‘이단성’을 되물으면서 또 다른 경계를 짓기보다는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 권력구조의 억압성과 죽음 의 정치학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폭로하면서 그들의 낙후되고 치졸한 ‘이단’ 시비에 대한 집단적인 대항의 목소리와 행동을 보여야 할 것이다.


    최근 교회의 경계 긋기와 벽쌓기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높고 폐쇄적으로 구축되어 가는 경계를 허무는 퀴어목회와 퀴어신학은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그렇기에 퀴어목 회와 퀴어신학을 실천하는 임보라 목사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내일로 미뤄질 수 없다.



ⓒ 웹진 <제3시대>



  1. 이 질문을 한 오세요 전도사님에게 감사드린다. [본문으로]
  2. Patrick S. Cheng, Radical Love: An Introduction to Queer Theology (Seabury, 2011), pp. 3~5을 보라. 또한 Susannah Cornwall, Controversies in Queer Theology (SCM, 2011)을 보라. [본문으로]
  3. Cathy J. Cohen, “PUNKS, BULLDAGGERS, AND WELFARE QUEENS: Radical Potential of Queer Politics?” GLQ vol. 3(1997), pp. 437~465을 보라. [본문으로]
  4. Lisa Duggan, The Twilight of Equality? Neoliberalism, Cultural Politics, and the Attack on Democracy (Boston: Beacon Press, 2003)을 보 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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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한 배후세력’ 찾기에 담긴 약자혐오와 비민주성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여성과 종교]라는 과목을 몇 년 동안 가르치면서 해가 바뀌어도 계속 사용하는 몇 가지 수업 교재들이 있다. 서리니티 영 (Serinity Young)이 쓴 “티베트를 변화시키는 여성들, 여성들을 변화시키는 티베트” (“Women Changing Tibet, Tibet Changing Women”)라는 글과, “사티야: 적을 위한 기도” (Satya: A Prayer for the Enemy) 라는 짧은 다큐 영화이다.[각주:1]  이 글과 영화는 티베트 여성들, 특히 ‘아니’ (ani, ‘aunt’) 라고 불리면서 티베트 불교에서 정식으로 승려 안수를 받지 못하는 여성 승려들이 중국으로부터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면서 벌이는 비폭력 저항에 관한 것이다. 불교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삶에서 행하는 여성 승려들은 자신들이 체포될 경우 중국 경찰의 지하 감옥에서 행해질 취조와 고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평화적인 독립시위를 이끌어 간다. 그들이 불교의 가름침을 익히고 수행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토론할 주제들이 많은 글과 영화인데 그 중 한가지 주목할 내용은 티베트의 여성 승려들이 시위 도중에 중국 경찰에 의해 체포가 되고 감옥으로 이송된 뒤에 왜 중국당국에 의해 지독한 고문을 받는가이다. 아무리 ‘평화’적인 시위라 해도 중국으로 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으니 당연히 고문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그들이 당하는 고문은 독립시위를 이끌었다는 ‘죄목’에 해당하는 형벌이 아니다. 여성 승려들은 고문 뒤에 재판에 넘겨지고 형이 결정되면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물론 수감 생활 중에도 여러가지 폭력에 노출되지만, 그와 별도로 그들이 법정에서 형을 받기 전에 모진 고문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티베트의 여성 승려들은 독립시위의 ‘배후세력’을 찾아 ‘진실’을 밝혀 내려는 중국 당국으로 부터 고문을 당하는 것이다. 고문을 받을 때 그들이 항상 받는 질문은 ‘배후에 누가 있냐’는 것이다. 여성 승려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하고 실행에 옮긴 평화적인 시위이지만 이를 받아 들이지 않은 채 어떤 ‘불순한 배후’가, 즉 ‘순수하지 않은 배후’가 있는지를 알아 내려고 중국 당국은 여성 승려들을 지속적으로 가혹하게 고문한다. 물론 대부분의 고문은 젠더화된 고문이다.


중국 정부는 어리게는 16살, 17살부터 20대, 30대인 여성 승려들이 스스로 그런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믿지도 못한다. 그런 ‘어린 여성’ 승려들의 ‘배후’에 ‘불순한’ 누군가가 있어서 그들을 조절하는 것이라 믿고, 어떤 ‘남자’ 승려들이나 혹은 더 큰 배후세력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갖가지 고문을 가한다. 이것은 고문에 담긴 여성혐오이다. ‘약한’ 여성은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오직 ‘강한’ 남성만이 배후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여성을 약한 존재, 남성에게 의존하는 존재, 자발적으로 저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존재로 보는 것이 바로 여성을 고문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여성들은 ‘배후세력’이 누군인지를 말하지 않는다고 고문 받고, ‘배후세력’없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저항운동을 펼친 것으로 잠정적으로 결론 지어질 때는 감히 (남성)국가권력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는다. 약하면 약한 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고문과 형벌을 피해 갈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다.

 
글의 저자인 서리니티 영은 중국정부의 ‘배후찾기’가 ‘성평등’을 외치는 중국 정책들의 ‘애매모호성’을 스스로 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친다’라는 구호를 가지고 ‘성평등’을 외쳐온 중국이 실제로는 여성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티베트의 여성 승려들은 정치적인 저항뿐 아니라 중국의 ‘애매모호한’ 성평등 정책을 폭로한 ‘죄’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들의 시위는 티베트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채 파괴한 “자비로운 지배자”로서의 중국에 대한 거부이며, 여성들, 특별히 소수민족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장려한다면서 동시에 그들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중국정부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각주:2]


‘불순한 배후세력’. 우리도 많이 듣는 말이다. 대중시위나 저항이 있을 때마다 ‘배후’를 먼저 찾는다. 정부나 기업, 혹은 학교를 상대로 일어나는 ‘시위’가 있을 때 흔히 듣는 말이다. ‘온순한’ 주민들이, ‘나약한’ 청소년들이나 학생들이, ‘순응’하는 직원들이, ‘연약한’ 피해자들이 그렇게 시위를 주도하고 이끌리가 없다는 것이다.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 누구인지 엄연히 아는 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배후세력’을 찾아 냄으로써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정부나 경찰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시위나 집회를 대하는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배후세력’을 알고자 하는, 아니 ‘만들어’ 내고자 하는 노력의 집요함이 보인다. 만약 저항이나 시위가 조금이라도 ‘과격’ 해질 경우에는 ‘불순한 배후세력’을 찾으려는 집착은 더 심해진다. 이렇듯 ‘배후세력’을 찾으려는 권력자들의 모습은 한국의 과거 군사독재정권이나 현정권에만 국한 된 것도 아니고, 권력을 쥔 자들이 통치수단의 하나로 사용해온 시대와 국경을 넘는 ‘작업’중의 하나이다. 이런 ‘배후세력’ 찾기와 만들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배후세력’ 찾기나 만들기는 ‘배후’에 대해서 보다는 사실 그 ‘배후’를 찾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배후’를 찾는 사람들은 시위의 참가자가 여성들이거나, 어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근거없는 확신을 ‘배후세력’을 찾는 행위를 통해서 여과없이 보여 준다. 뭔가 큰 일이 있으면 그 주체는 여성들이나 어린 사람들일 수 없고 반드시 뭔가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지닌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는 대부분 지도자급 ‘남성’이거나 ‘남성들로 이루어진 조직’이고, 때로는 ‘외부’ 세력이고, 그 배후세력만이 모든 사건의 전말, 또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실제하든 하지 않든 찾아지고 만들어진 ‘배후세력’이나 ‘진실’은 배후를 찾아내고 만들어 내야만 하는 권력자들의 약자혐오와 비민주적인 의식과 행동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고문과 진실 (Torture and Truth)]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페이지 두보이스 (Page duBois)는 사건의 ‘배후세력’과 ‘진실’을 캐내려고 노예들을 고문했던 고대 그리스의 잔인한 제도에 대해 논의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상한’ 자유인들과 달리 노예들은 항상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고, 그렇기 때문에 고문을 당할 때에만 ‘진실’을 말한다고 믿었다. ‘이성적’인 주인과 달리, 노예들은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오직 고문을 받을 때만 ‘진실’을 얘기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들이 고문 받으면서 내놓은 얘기들만 ‘증거’로 채택되었다. 여기서 ‘진실’은 항상 어딘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찾아 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각주:3]


민주주의의 (democracy) 개념적 토대가 형성된 고대 그리스사회에서 ‘일반 사람’ (demos), 또는 ‘시민’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자유인인 성인 남성들 뿐이었다. 여자들, 아이들, 노예들은 ‘시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21세기인 지금은 어떠한가? 민주사회 구성원들의 자기의사 결정권이나 행동권을 인정하지 않고 시위를 통해 드러내는 그들의 염원을 무시하는 권력기관이나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오직 힘있는 사람들만이 (물론 그 힘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생길 수 있겠다)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비민주적인 태도가 보인다. ‘일반 사람’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구성원인 시민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래서 ‘배후세력’을 밝혀내서 ‘진실’을 찾겠다는 권력기관이 사실은 가장 비민주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진실’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어서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사회의 구성원 (demos)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염원을 시위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진실’인 것이다. 이런 진실을 무시하고 부인하려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세계 곳곳의 대로와 골목길에서 저항의 시위 행렬이 길어지는 또 한해가 될 것 같다.

 

 

ⓒ 웹진 <제3시대>



  1. Serinity Young, “Women Changing Tibet, Activism Changing Women,” in Women’s Buddhism and Buddhism’s Women: Tradition, Revision, Renewal. Ed. Ellison Banks Findly (Wisdom Publications, Boston, 2000). [본문으로]
  2. Ibid., 238-239. [본문으로]
  3. Page duBois, Torture and Truth (New York: Routledge, 199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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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초월하는 ‘크리스토파시즘’: 미국 대선을 보면서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인 질라 아이젠스타인(Zillah Eisenstein)은 2016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6년 미국의 대통령 경합은 여성혐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편협한 사람과 제국적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벌어진 지옥으로부터의 선거였다.” 그 ‘지옥으로부터의 선거’에서 미국의 선거인단투표를 통해 승리한 사람은 백인우월주의자이며 여성혐오적이고 반이민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였고, 일반투표에서 이긴 사람은 ‘제국적 페미니스트’인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선거인단투표에서 클린턴이 졌다고 제국건설을 지지하는 ‘제국적 페미니즘’[각주:1]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횡포가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미국을 비판적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더욱 분명해 진 것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경험해 온 소수인종들, 이민자들, 무슬림들, 성소수자들, 저임금 노동자들, 장애인들, 여성들의 삶이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것이다. 벌써 학교를 비롯한 미국내 이곳 저곳에서 스스럼없이 백인우월주의와 극단주의를 표출하면서 유색인종들과 성소수자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이번 미국의 대통령선거에 관해서 많은 분석이 나왔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다양한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보태질 것이다. 예를 들어, 힐러리 클린턴이 여러가지 정치적 불신을 일으켰지만 궁극적으로 당선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젠더와 관련된 분석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성추행과 여성혐오 발언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을 보면 젠더라는 축으로만 이번 미대선의 결과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수 있다. 트럼프의 “아메리카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슬로건이 백인들을 집결 시키는데 성공했고, 트럼프의 ‘아메리카’는 백인들만의 미국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인여성들에겐 백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따른다. 또한, 위싱턴의 집권세력에 의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져 왔던 저소득층 백인들이 월가의 금권정치와 빈부격차의 증가를 비판한 트럼프를 지지했기에 선거에서 이길수 있었다고 하면서 ‘계급’과 관련시키는 분석도 나오고 있지만, 트럼프를 지지한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고학력자와 고소득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에 속하는 백인 남성들과 여성들이라는 점은 ‘계급’으로만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분석의 한계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자본주의, 성차별과 인종차별주의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듯이, ‘트럼프 현상’을 인종이던, 계급이던, 젠더이던 한 가지 축으로만 설명하려는 분석은 미흡할 수 밖에 없다. 


    이번 미 대선과 관련해서 실망스럽지만 놀랍지 않은 사항들 중 하나는 트럼프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이 ‘거듭난’, 혹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백인들이었다는 것이다. 백인들 4명당 1명이 복음주의계열 기독교인들이고, 선거 출구 조사에 따르면 78%-81%의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백인 남성과 여성포함)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한다.[각주:2] 실망스럽지만 그닥 놀랍지도 않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물론 왜 대다수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발언과 행동을 보여온 트럼프를 선택했는지에 관한 분석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이런한 정치적 선택이 놀랍지 않은 것은 지난 몇 십년동안 사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보여온 정치적 편향과 행태 때문일 것이다. 또한, 비록 이번에 투표를 한 소수인종들의 대다수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는 보고가 있지만, 한국계와 중국계 미국인들 중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백인 복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이렇게 지속되는 복음주의자들의 선거 양식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복음주의’ 기독교가 보수적 정치의 동반자임을 더이상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내의 분열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그저 형태만 민주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는 미국의 ‘부드러운 파시즘’과 독일 나찌의 파시즘을 비교하면서,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 (Dorothee Soelle)는 미국의 파시즘을 지지하는 우파기독교를 ‘크리스토파시즘’ (Christofascism)이라고 비판한다.[각주:3] 죌레가 미국의 ‘크리스토파시즘’을 비판하는 상황은 1980년대 레이건 정권하의 미국이지만, 트럼프의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과 결과에서 보여진 ‘크리스토파시즘’의 영향 및 더 이상은 ‘부드러운 파시스트’고 할 수 없는 새정권의 핵심이 될 인물들을 보면 죌레의 비판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각주:4] 죌레에 의하면, ‘크리스토파시즘’은 국가주의, 군사주의, 가족이데올로기,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심등의 이데올로기들이 우파세력에 의해 기독교와 혼합되어진 수단화된 종교이다.[각주:5] 죌레는 기독교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도 이런 ‘크리스토파시즘’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죌레는 ‘크리스토파시즘’의 특징은 구약성서, 즉 유대교성서에 담긴 기독교의 모든 뿌리들을 잘라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의와 하느님이 도우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죄책감이나 고난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크리스토파시즘’에서 ‘희망’은 완전히 개별화되어지고, 개인의 성공으로 축소되어진다. 억압된 사람들과 연대했던 예수는 ‘크리스토파시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로 남는다. 그 대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와 “아메리카를 사랑합니다”라는 구호가 구별하기 어렵게 외쳐질 뿐이라고 한다.[각주:6]  


    한국에서도 이러한 ‘크리스토파시즘’의 현상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백인이 아니면서도 ‘백인하나님’, ‘백인예수’를 ‘주’로 선포하면서 우파정치인들과 그들의 정책을 지지해온 한국의 보수 개신교회의 모습에서 죌레가 비판한 ‘크리스토파시즘’이 보인다. 트럼프를 지지한 미국의 ‘크리스토파시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한국의 ‘크리스토파시즘’의 겹쳐지는 모습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지는데, 성차별과 여성혐오 조장, 사회적 약자 멸시,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 이슬라모포비아, 기독교 우월주의, 미 군사주의 지지등이 그러하다. 국경을 넘나드는 ‘크리스토파시즘’의 세력은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그렇다면, 그런 ‘크리스토파시즘’에 대한 저항도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뿌리가 잘린 기독교와 ‘금관의 예수’를 숭배하고, 가해자만을 옹호하면서 ‘값싼 은혜’를 선포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내칠 수 있는 ‘거룩한 분노’가 그런 저항의 동력이 될수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s://www.thecairoreview.com/essays/hillary-clintons-imperial-feminism/ [본문으로]
  2. 물론 이런 통계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분석도 있다.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no-the-majority-of-american-evangelicals-did-not-vote-for-trump. [본문으로]
  3. Dorothee Soelle, The Window of Vulnerability: A Political Spirituali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133-141. 이 글에서 “Christofacism”은 영어발음을 그대로 옮긴 ‘크리스토파시즘’으로 적고 있다. [본문으로]
  4. 단적인 예로, 트럼프정권의 부통령이 될 마이크 펜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기독교 우월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https://theintercept.com/2016/11/15/mike-pence-will-be-the-most-powerful-christian-supremacist-in-us-history/. [본문으로]
  5. Ibid., 138-140.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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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과 찜질방에 깃들은 인종차별과 편견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지난 8월 초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Rio de Janeiro)에서 열렸던 올림픽과 관련하여 미국의 주류 방송사에서 방영하지 않은 이야기들과 경기들이 있다. 리우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그리고 열리는 동안에도 계속 일어난 브라질 사람들의 올림픽 반대 시위와 그에 대한 경찰의 가혹한 진압은 방송에서 물론 보기 어려웠지만, 경기 자체가 미디아의 조명을 받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의 수영선수인 시몬 마뉴엘 (Simone Manuel)이 금메달을 딴 수영 개인종목 경기였다. 미국의 대부분의 주류 방송사들은 시몬 마뉴엘이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는 순간은 물론이고 금메달을 받는 시상식 장면 또한 방영하지 않았다. 아무도 흑인여자 수영선수가 수영 개인 종목에서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그냥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지나칠 수 있는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시몬 마뉴엘의 메달 획득이 수영과 미국의 인종차별주의 역사의 연관성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1865년에 끝난 미국의 시민전쟁과 그 해에 비준된 미헌법 제 13조에 의해 약 400년간 이어져온 노예제도가 폐지 됬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 흑인들의 삶의 향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노예제도 폐지후 얼마 되지 않아 남부지역에서 실행된 짐크로우 (Jim Crow) 법은 흑인과 백인의 ‘분리’ (segregation) 를 법으로 정한 반흑인 인종차별법으로써 1965년 까지 유효했다. 이 법에 따라 흑인들과 백인들의 생활의 모든 공간이 분리되어 졌고, 만약 이 법을 어길 경우는 법의 처벌을 받는 제도화된 인종차별법이었다. 군대[각주:1], 학교, 식당, 화장실, 엘리베이터, 버스, 열차, 극장내의 ‘분리’된 공간들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놀이기구, 수영장, 해변가에서도 ‘분리’는 분명했다. 백인들만의 공간에 흑인들이 들어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그것을 위반 했을 때에는 백인들에 의해 잔혹하게 폭행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시몬 마누엘(출처 : https://au.tv.yahoo.com)


    1950년대에 도로시 덴드리지라는(Dorothy Dandridge) 흑인 여배우가 발가락을 잠깐 담궜다 꺼냈다는 이유로 라스베가스 한 호텔의 수영장물 전체를 다버린 사건, 1964년 플로리다주의 한 모텔주인이 흑인들이 들어가 있는 모텔의 수영장에 염산을 뿌린 사건등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을 것 같은 수영장, 해변가, 사우나시설들이 어떻게 인종차별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공간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각주:2] 수영장의 이런 인종차별적 역사 속에서 많은 흑인들은 수영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고, 수영이란 운동과 가까와 지기 어려웠다. 이렇게 수영과 관련된 인종차별 역사 때문인지 미국의 주류 방송사들도 미국을 대표하는 흑인여자 수영 선수의 개인 종목 결승전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수영장에 깃들은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과 동일시 될 수 는 없지만, 한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태도가 드러나는 장소들 중 하나가 바로 찜질방이다. 점점 늘어나는 미국내 한인들의 숫자를 보여주듯이 한인들이 밀집한 대도시에는 한인 사우나, 또는 찜질방이 있다. 애틀란타라는 남부의 큰 도시에도 한인들이 운영하는 사우나와 찜질방이 있다. 한국에 있는 찜질방에 비해서 훨씬 비싸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처음 찜질방이 문을 열었을 때는 한인들이 대다수 였지만, 지금은 흑인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흑인들이 많이 가기 때문에 더이상 찜질방에 가지 않는 다거나, 가지 말라고 조언을 하는 한인들을 주위에서 종종 만나 볼 수 있다. 이유는 흑인들이 많아서 ‘더럽다’는 것이다.


    ‘흰색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검은색은 오염됬고 더럽다’라며 색깔과 인종을 연결시켜 우열을 나누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를 지탱하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들 중의 하나이다. 한국사회에서도 흑인이나 ‘혼혈아’로 불리는 사람들을 상대로 쓰여지는 여러가지 용어들이 있는데, 여기서 일일히 나열할 필요도 없이 부정적이고, 혐오적이다. 도대체 흑인에 대한 이런 편견과 부정적인 태도가 언제부터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한국인들 사이에 퍼지게 된 것일까? ;


    한국 사회와 미국의 한인 공동체의 초국가적 (transnational) 연관성을 연구해온 한국계 미국학자 김나디아 (Nadia Y. Kim)는 자신의 책 [제국의 시민들] (Imperial Citizens)에서 한국 사람들이 흑백인종질서를 받아 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한 여섯가지의 연관된 요인들을 논의하고 있다. 간략하게 요약을 하면, (1)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색깔사이의 위계, (2) 각 사회 구성 집단의 적합한 위치를 강조하는 유교관념, (3) 애국계몽운동이후에 (1895-1905) 형성된 ‘한핏줄’ 국가개념, (4) 엘리트 백인들과의 접촉, (5) 일본에 의해 소개된 미국-유럽의 인종 이데올로기들, (6) 한국에서 반인종차별운동의 역사와 담론의 결핍 등이다.[각주:3]


    김나디아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연관된 요인들이 다른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가능하게 한 토양을 만들었고, 냉전시대 이후 부터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한 유색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미국의 흑백인종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각주:4]. 다시 말해서, 미국이 문화, 경제, 군사적으로 그 힘을 확장해 나갔던 냉전시대에 미국 사회의 흑백인종질서로 다른 나라들도 “인종적으로 ‘미국화’” 시켰다는 것이다. 흑백질서라는 미국의 인종 이데올로기,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반흑인 인종차별주의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미국의 영향아래에 있는 한국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인들도 이민을 가기 전부터 이미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람들과 미국내 한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반흑인 편견과 태도는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각주:5]


   미디아만 보더라도 미국의 인종차별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전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는지 알수 있다. 흑인들과 관련된 미디아 이미지는 ‘아프리카의 미개인’으로 부터, ‘무력한 노예’, 마약과 폭력을 일삼는 도심지의 ‘난폭한 갱’, 국가의 복지 혜택을 누리면서 세금을 축내는 ‘게으른 미혼모’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가 부정적이다.[각주:6] 한국 미디어에서 간혹 미국의 유명한 흑인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조명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상당히 제한되어져 있고, 몇 몇의 ‘뛰어난’ 흑인들을 ‘예외’인 것으로 부각시키면서 오히려 흑인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강화시키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물론 백인들의 유색인 차별과 한인들의 다른 유색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태도를 동일 선상에 놓고서 얘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힘의 역학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인들도 백인들과 똑같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주의는 개개인들의 차별적 언어, 행위와 편견이라는 중요한 측면이 있지만, 무엇보다 구조적 차원의 문제이다.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포함하여 유색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억압은 백인우월주의 (white supremacy)라는 큰 틀과 연결 시켜서 봐야 한다. 여성신학자 앤디 스미스 (Andy Smith)는 백인우월주의를 지탱해온 세가지의 각각 다르면서도 서로 연결된 “기둥”들을 논하는데, 그 세가지의 기둥은 다음과 같다: (1) 미국 노예제도와 자본주의, (2) 미 ‘원주민’ 학살과 미국에 정착했던 유럽인들의 정착형 식민주의, (3) 미국이 관여한 아시아에서의 전쟁과 오리엔탈리즘이다.

   

   흑인들, 한인들을 포함한 아시아인들, 그리고 미국의 ‘원주민’들이 백인우월주의에 의해 억압을 받아온 경위와 역사가 동일 하지는 않지만, 각각의 그룹이 경험하는 억압은 백인우월주의와 연결되어져서 서로의 억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렇게 다른 “기둥”들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람들이 취해야 할 행동은 ‘우리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라는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분리’나, ‘우리는 저 사람들 보다 훨씬 낫다’라는 우월주의적 사고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서로가 “공유하는” 억압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누가 더 억압받았는지 경쟁하는 “억압 올림픽” (the oppression olympics)에 참가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각주:7] 각각의 억압 경험이 다르지만, 서로의 억압을 강화시키는데 알게 모르게 참여해 온 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백인우월주의와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들을 무너뜨리는데 힘을 합할 수 밖에 없다.

  

    수영장에 깃든 미국의 기나긴 인종차별의 역사를 비인간적인 억압의 구조로 본다면 찜질방에 깃들은 한인들의 인종적 편견과 태도 역시 간과 할 수 없겠다. 나/우리의 인종차별적 편견과 태도가 흑인들을 억압하는 인종차별적 구조를 견고하게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나/우리를 열등하게 여기고 차별하는 구조를 굳건히 하는데 내/우리가 오히려 앞장서는 이상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유색인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억압구조에 동조하면서 한인들만은 차별받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실현 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란 있을 수도 없고 꿈을 꿀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고달프게 하는 구조에 동참하면서 나/우리만 잘 살 수 있는 사회란 많은 이들에게는 깨어나고 싶은 악몽일 것이다.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웠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기억하면서 나/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서로 떼어 질 수 없이 연결 되어있는 지 보도록 하자. 그러면 별 일 아닌 것 같이 보일 수 있는 수영장과 찜질방에 깃든 인종차별과 편견이 사실은 모두의 삶을 황폐하게 하고 위협하는 부정의라는 것을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어딘가에 있는 부정의는 곳곳에 있는 정의에 대한 위협이다. 우리는 하나의 운명에 묶인 채 피할 수 없는 상호관계성의 네트워크안에 있다. 무엇이든 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모두에게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각주:8]


ⓒ 웹진 <제3시대>



  1. 미군대내의 분리는 1948년에 폐지 되었다. [본문으로]
  2. http://www.sportingnews.com/athletics/news/simone-manuel-gold-medal-swimming-legacy-history-african-american-barred-pools-beaches/y6t5l0c7b55h166ovrc5ssxid; https://www.washingtonpost.com/sports/olympics/the-significance-of-simone-manuels-swim-is-clear-if-you-know-jim-crowe/2016/08/12/870e3bb6-60ad-11e6-af8e-54aa2e849447_story.html?tid=sm_fb [본문으로]
  3. Nadia Y. Kim, Imperial Citizens: Koreans and Race from Seoul to LA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8), 37. [본문으로]
  4. Ibid. [본문으로]
  5. 여기에 관해서는 본인의 책에서 조금 더 자세히 논의하고 있다. Nami Kim, The Gendered Politics of the Korean Protestant Right: Hegemonic Masculinity (Palgrave Macmillan, forthcoming). [본문으로]
  6. 한국 사람들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에 관한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 바람. Dave Hazzan, “Korea’s Black Racism Epidemic.” Groove (February 11, 2014). Available at http://groovekorea.com/article/koreas-black-racism-epidemic-0. [본문으로]
  7. Andy Smith, “Heteropatriarchy and the The Three Pillars of Oppression: Rethinking Women of Color Organizing.” In Color of Violence: The Incite! Anthology. Ed. Incite! Women of Color Against Violence (Cambridge, MA: South End Press, 2006). [본문으로]
  8. Martin Luther King Jr., "Letter from a Birmingham Jail” (16 April 196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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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여성혐오를 다루지 않고서는 


500주년 종교개혁을 논하지 말라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작은 것들의 신] (The God of Small Things)의 저자로 잘 알려진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전통”과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로 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는 인도의 여성들이 어떻게 많은 투쟁을 이끌게 되었는지에 관한 인터뷰에서, 인도는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는 나라이다”라고 말한다.[각주:1] 인도란 나라에는 여성을 상대로 여러 형태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반면에, 동시에 이런 폭력에 저항하는 강하고, 독립적이고, 급진적이며,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 여성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국이란 나라도 지금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다.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과거’에나 행해졌을 법한 여성들에 대한 차별, 혐오, 비하, 희롱, 폭력, 살해를 도심지에서, 동네 골목길에서, 섬에서, 산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병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집안에서 서슴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물론, 이에 저항하는 여성들도 적지않다. 


    서른명의 학생들과 포르투갈에서 2주 단기 수업을 하는 동안 서울 강남역 근처의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살해 사건을 전해 들었다. 그 때 마침 포르투갈의 한 여성운동단체를 방문하여 포르투갈 여성들이 직면한 여러가지 이슈들에 관해서 듣고, 포르투갈에서도 ‘여성살해’ (femicide)가 얼마나 큰 사회적 문제인지, 또 여성들이 이에 어떻게 저항하는 지에 관해서 막 접한 터였다.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살해 사건이 너무나 끔직한 뉴스이긴 했지만, 사실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폭력, 살인, 성폭행, 성희롱, 성차별이 사회 전반에 너무나 만연해 있었기에 그 뉴스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다르게’ 와 닿았던 것은 이번에 발생한 여성살해를 그저 ‘또 하나’의 ‘일상적’인 사건으로 지나쳐 버릴 수 없었던 여성들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misogyny) 사건으로 규정하고, 여성혐오의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피해자를 공공장소에서 추모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 뿌리가 깊고 넓은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없애야 할 사회악으로 보고 여성들이 그것에 저항했다는 것과, 그런 저항의 움직임을 받아 들일 수 없어하는 남성들이 그들을 비판하면서 공공연하게 여성혐오를 또 다시 드러냈다는 것이다. 한국도 인도처럼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지적했듯이 여성혐오란 용어가 한국에서 생소하다고 해서 여성혐오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혐오를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일상화’ 되어져 있고, 개개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및 사회구조에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여성혐오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여성혐오에 대한 해결책 또한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감시 카메라를 늘리고, 치안을 강화하고, 가해자에 대한 형량을 높이거나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 시키면, 몇 몇의 ‘이상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연관 없는 ‘사건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모두가 ‘안전’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실로 대책없고 공허한 방안을 내놓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신학자 메리 헌트 (Mary Hunt)가 말하듯이, 폭력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각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상황” (context)이다.[각주:2] 여성혐오, 성차별, 여성을 상대로 행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은 그저 어쩌다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기독교회와 신학이 외면해 온 여성들의 ‘치명적인 일상’인 것이다. 이렇듯 여성혐오를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식한다해도 해결할 노력이나 의지가 없어 보이는 곳 중의 하나는 교회이다. 교회내의 ‘여성혐오’는 그 사례들을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교회내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목소리와 운동은 지속되어져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소수의 저항으로 종종 무시 되어지거나, 저항의 주체들은 오히려 여성우월주의자들로, 또는 ‘남성혐오자’들로 매도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교회도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고 있다. 


    내년에 종교개혁 500 주년 (1517-2017)을 맞이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틴 루터의 고향인 독일을 비롯하여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는 유럽국가들로 ‘순례’를 계획하고 있고, 개신교회들도 한국교회의 미래와 교회개혁을 논의하는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무엇을 준비하고 논의를 할 것인가? 주로 논의 되는 주제들은 “한국 교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와 성장주의, 배타주의”[각주:3]라고 한다. 모두 중요하고 절실한 주제들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물질 만능주의, 성장주의, 그리고 배타주의의 원동력이 되어온 구조적 성차별과 여성혐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형태의 혐오들에 관한 논의는 누가, 어디서 할 것인가? 


    성차별과 여성혐오, 그리고 다른 형태의 차별과 혐오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서는 “한국 교회에 만연한 물질 만능주의와 성장주의, 배타주의”를 제대로 논의 할 수 없다. 그러니 진정한 교회 개혁은 있을 수 없고,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여성혐오를 없앤다는 명목하에 다른 혐오를 정당화하는 과오를 저지르는 일 없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장애인혐오, 이주노동자혐오, 이슬람혐오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저항인’ (Protestant) 들이 되지 않는다면 500년을 또 기다려도 ‘개혁’은 없을 것이다. 교회는 그저 계속해서 여러 세기를 동시에 살게 될 뿐이다.  


    한국교회의 미래와 교회개혁을 진정으로 논의할 의지가 있다면, 500년 전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종교개혁가들의 사상과 행동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여성혐오와, 지금까지 지속되는 여성혐오적이고 차별적인 신학, 성서해석, 의례, 예배 형식, 언어, 교회 조직, 활동들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다.  


    500 여년 전, 당시의 부패했던 교회에 ‘저항’의 목소리를 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이었지만, 여성신학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그 시대 그 공간에서 살았던 여성들의 삶과 그 이후 세대의 여성들에게 부정적으로 미친 종교개혁의 영향은 비판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조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가부장적 성서해석으로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여성들의 종속적인 위치를 확실하게 못박았고, 야곱의 딸 디나의 납치와 강간은 그녀가 자초한 일이라면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성서해석을 내놓았으며, 성과 관련해서 남녀에게 적용된 이중잣대를 정당화 시켰던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의 남성중심적 성서해석과 신학이 아직도 어떻게 교회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묻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각주:4] 동시에 여성혐오를 사회에서 견고히 하는 데 한국의 개신교회가 어떻게 앞장서 왔는지를 반성하면서,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실천을 통해서 보여주는 방법 밖엔 없다.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논의하고 변화를 가져오려면,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장애인혐오, 이주노동자혐오, 이슬람혐오에 저항하라. 그런 저항으로 말미암아 변하기를 거부하는 기존 교회와 사회로 부터 설사 ‘이단자’로 불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마치 500여년전 ‘이단자’로 불렸던 종교개혁가들처럼. 그러나, ‘이단자’로 불릴 각오와 결심이 없다면 500주년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교회의 미래와 개혁을 논하지 말라. 변화없는 교회의 ‘미래’란 과거와 과거가 되어 버렸을 지금의 현재가 여전히 뒤엉켜서 존재하는, 그래서 “여러 세기가 공존”하는 맞이 하고 싶지 않은 ‘미래’일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outlookindia.com/magazine/story/i-dont-believe-there-are-only-two-genders-i-see-gender-as-a-spectrum-and-im/295061 (accessed 09/10/15). [본문으로]
  2. Carol J. Adams and Marie M. Fortune, “Preface,” in Violence against Women and Children: A Christian Theological Sourcebook, ed., Carol J. Adams and Marie M. Fortune (New York: The Continuum Publishing Company, 1995), 12. [본문으로]
  3.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0/22/0200000000AKR20151022143000005.HTML (accessed 11/30/2015); http://www.koreatimes.com/article/879912 (accessed 10/18/2014). [본문으로]
  4. Denise Lardner Carmody, Women and World Religions (Prentice Hall, 198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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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누구를 위한 가정인가?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5월에는 기념하고 챙겨야 할 날들이 많다. 근로자의 날로 시작하여,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석가탄신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이어진다. 이와 더불어, 입양의 날, 성년의 날, 세계인의 날, 발명의 날, 식품 안전의 날, 부부의 날, 세계인의 날, 가정위탁의 날, 생물종 보존의 날, 방재의 날, 실종 아동의 날, 바다의 날, 세계 금연의 날 등 참으로 다양한 날들이 여러가지 명목으로 기념되고 있다. 바다도 기념되고, 생물종들의 보존과 식품의 안전도 챙겨지는 5월은 무엇보다 ‘가정의 달’로 불린다.


    형식적이고 의무처럼 되어버린 선물과 꽃다발을 가족들에게 안겨주고, 고도로 발전된 소비문화에 참여하는 것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는 동안 간과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정의 달’에 가장 많이 듣는 설교주제가 ‘행복한 가정’이기도 한데, 누구의, 누구를 위한 가정이고, 왜 특정한 한 달을 정해서 굳이 가정의 ‘행복함’이나 ‘소중함’을 되새겨야 하는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가정’은 “한 가족이 생활하는 집,”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공동체”를 의미하고, ‘가족’의 뜻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로 정의되고 있다. 증가하는 1인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 대안가족을 고려한다면 사전적 의미의 ‘가정’이나 ‘가족’에도 곧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행복’한 생활 공동체일 것이라는 기대나, 개개인에게 가장 안전한 삶의 울타리나 보호망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 또는 통념과는 달리 어떤 누군가에게는 가정이 그 어떤 ‘공동체’ 보다 위험하고 두려운 곳일 수 있다. 가정을 위험한 곳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중 하나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위협이나 압력이 아닌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다. 한때 ‘아내 폭력’, ‘배우자 폭력’등으로 불리기도 했던 ‘가정폭력’의 형태는 다양하다. 배우자와 자녀들, 노부모들을 상대로 가해지는 신체적 폭력, 정신적 폭력, 언어 폭력, 성폭력, 경제적 강압이 있고, 반려동물에 대한 폭력과 가정의 기물파괴를 통해 공포심을 조장하는 폭력도 가정폭력의 한 형태이다.  


    가정폭력은 물론 가정내에서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글로벌 수치로 볼때 여성 3명중 1명이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다.[각주:1] 전세계적으로 여성살해의 약 38% 정도가 파트너 (배우자, 동거자, 연인)에 의해 저질러 진다고 한다.[각주:2]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요인중 하나가 바로 가정폭력인 것이다. 여러가지 통계수치를 통해서 가정폭력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하지 가늠할 수는 있지만, 가정폭력의 특성상 그 심각성의 정도를 ‘수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신고 되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고, 신고가 된다고 해도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폭력의 정도와 피해 상황은 보도 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할 수가 있다. 


    미국에서 가정폭력 또는 배우자 폭력은 “여성에 대한 전쟁”이라고도 불리는데, 가정폭력예방과 해결을 위해 일하는 한 활동가가 말하는 예를 보면 왜 그런지 이해가 될것이다. 베트남 전쟁중에 사망한 미국 병사들의 숫자가 약 58,000 명이었는데, 같은 기간동안 미국에서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여성들의 숫자는 51,000명이었다고 한다.[각주:3] 가정폭력의 피해가 국가간에 치루는 ‘전쟁’에서 발생하는 인명피해 (‘아군’의 피해)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숫자는 가정폭력으로 인해 다양한 형태의 부상을 입은 피해자들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어느 정도의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서 그 심각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듣고 인지하고 있다고 해도 가정폭력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폭력으로 존재한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집으로 부터 도망친 뒤에 노숙자가 되는 경우, 가정폭력에 지속적으로 고통을 받다가 집을 나간뒤에 소위 가출 청소년으로 낙인이 찍히는 경우, 피해자들의 자기방어가 가해자에 대한 폭력행사로 간주되어 오히려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경우 등등 가정폭력의 피해정도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가정폭력이 발생하는 순간에 피해자들이 받는 정신적, 육체적인 상처와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폭력의 후유증도 심각하게 삶을 위협한다. 모든 전쟁의 정신적 외상 (trauma)이 몇 세대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듯이, 가정폭력의 정신적 외상도 세대간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문제이다.  


    그런데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가정폭력이 꼭 신체적 폭력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신체적 폭력에 앞서서 배우자나 자녀들을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는 대신에 욕이나 막말로 지칭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가족 개별인을 고유한 사람으로 보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 (objectifying)시키면서 마치 물건을 대하듯이 하는 것에서 폭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철학자 마틴 부버 (Martin Buber)는 “나와 너” (I-thou)의 관계가 “나와 그것” (I-it)의 관계로 변하는 때가 폭력이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했다. 즉, “인간 관계성”이 지워지면서 상대를 “대상화” 할 때 그 사람에 대한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4] 폭력의 상대를 “관계성”을 맺는 주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해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대상’으로 보기에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가정폭력이 ‘저질러’ 지는 것이 아니다. 가정폭력은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술에 취했거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누가 ‘맞을 짓’을 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행사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배우자와 자녀, 또는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할 수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나 요소가 있어서가 아니다. 폭력의 대상자가 나보다 약하고 내게 종속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폭력을 행사해도 결과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임을 알기에 가해자가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여성의전화에 의하면, 현행 가족폭력처벌법에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의 핵심은 그 법의 목적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즉, 현행 목적조항에서는 가정의 보존이 피해자의 인권보다 우선시 된다는 것이다.[각주:5] 가정의 보존, 아주 그럴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보존된 가정은 누구의, 누구를 위한 가정인가? 폭력가정의 보존이 우선시 된다는 것은 결국 가해자를 우선시하겠다는 뜻이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할 피해자의 안전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가해자의 처벌도 어려워 진다. 가해자를 보호함으로써 ‘보존’되어진 ‘가정’이란 곳은 피해자들에는 계속해서 위험하고 두려운 곳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이렇듯 현행법의 목적조항의 문제를 지적 하면서 가정폭력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목적조항이 개정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5월을 굳이 ‘가정의 달’로 기념하고 싶다면 ‘행복한 가정’이라는 빈 껍질 같은 말 대신에 많은 사람들, 특별히 여성들과 아이들이 가정폭력으로 인해서 얼마나 참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에 대한 의식과 실질적인 해결방책을 생각해보고, 이와 병행해서 그 누군가를 폭행해도 된다는 생각, 즉 사람을 ‘대상’으로 여겨도 된다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전념하는 달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어디에도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1. World Health Organization, “Violence against women: Intimate partner and sexual violence against women” (Updated January 2016). Available at http://www.who.int/mediacentre/factsheets/fs239/en/ (accessed March 25, 2016). 가정폭력의 피해자중에 당연히 남성들도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여성과 아동임음 감안하여 이 글에서는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가정폭력에 중점을 둔다.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http://psychcentral.com/lib/understanding-domestic-violence/ [본문으로]
  4. Pamela Cooper-White, The Cry of Tamar: Violence Against Women and the Church’s Respons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2, Second Edition), 41. [본문으로]
  5. 한국여성의전화. http://hotline25.tistory.com/3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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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의 경고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카나리아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새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 광부들이 광산의 터널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기 전에 터널 안으로 먼저 날려 보낸 새도 카나리아이다. 카나리아는 오염이 되었거나 독성이 퍼져있는 공기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광산의 터널안으로 날려보낸 카나리아가 돌아오면 터널안의 공기가 광부들이 일하기에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카나리아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 되돌아 오지 않는다면 그 광산안에는 독성의 공기가 만연하여 그 독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광부들이 일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한다. 요즘엔 광산에서 더 이상 카나리아를 사용하지 않지만, ‘광부의 카나리아’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쓰이고 있는데, 여기서 카나리아는 뭔가 위험하고 심각한 상황이 곧 닥칠 것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바드 법과대학 역사상 유색인종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종신교수로 임명된 라니 귀니어 (Lani Guinier) 라는 법학자가 제랄드 토레스 (Gerald Torres)와 공저한 [광부의 카나리아]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인종(race)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 사회 구성원들을 대우하는 정책이나 이론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과연 어떤 “힘” (power) 을 갖고 써야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다.[각주:1] 이 책에서 귀니어와 토레스는 미국 사회의 소수자인 유색인종들을 카나리아에 비유하면서, 미국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인지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여러 유색인종들이 자유롭게 호흡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의 소수자들인 유색인종들이 자유롭게 제대로 숨을 쉬면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사람들이 살만한 괜찮은 사회이지만, 만약 유색인종들이 인종차별과 다른 부정의한 구조 때문에 숨막혀 하면서 살아도 사는 것 같이 않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다. 유색인종들이 잘 살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면 그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제도에 대해, 특히 민주주의를 재점검하고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내의 인종문제를 제대로 다뤄야 한다는 것을 ‘광부의 카나리아’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뉴욕에서 에릭 가너 (Eric Garner)라는 흑인남성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팔다가 경찰에 의해 목주위의 호흡기관이 제압되면서 (chokehold) 11번이나 “숨을 쉴 수가 없다” (“I can’t breathe”)라고 호소하면서 죽어간 사건이 있다. 어떤 무기도 소유하지 않은 남성이 그저 담배를 판다고, 경찰의 불법 제압방식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미국 내의 인종문제와 경찰 폭력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는 한 예이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 폭력에 희생당한 흑인 남녀노소들이 증가하고 있고, 정의를 요구하는 흑인들을 ‘썩어빠진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흑인들이 대다수인 한 도시에서는 납으로 오염된 물이 버젓이 수도꼭지로 흘러 나오는데도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대학내에서도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여 최근 51개 대학의 학생들이 캠퍼스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다양한 요구를 하고 있다.[각주:2] 미국의 유색인종들, 특별히 흑인들은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공화당의 몇몇 대선 후보자들의 캠페인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 반이민정책과 구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최근 더욱 급속히 증가한 반이민정서에 이민자들도 많이 위축되고 시달림을 받고 있다. 또한 무슬림이라면 마치 모두 ‘이슬라믹 테러’와 관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들을 범죄시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미국내의 유색인종들은 국가의 보호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들’로 인식되고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비롯해서 미국의 여러가지 제도와 정책이 재점검되지 않는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독에 오염된 공기를 마신 카나리아처럼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미국에서 유색인종들이 카나리아에 비유되고 있다면, 한국의 카나리아는 누구이고, 그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과연 숨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사회인가? 아니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독성 가득한 공기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사회인가?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독에 오염된 공기에 질식되어 되돌아 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독소’ 조항이 가득한 사회 정책과 제도들로 인해 숨을 쉴 수 없는 카나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회라면 어디서 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염되고 독성이 가득한 공기를 빨리 제거하지 않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현상은 공상소설에 나오는 디스토피아의 상황과 비슷할 수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세상은 디스토피아로 보이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인 것처럼 그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카나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편하게 숨쉬면서 살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종교철학자인 코넬 웨스트(Cornel West)는 [포스트모던시대의 예언자적 사상]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즉, ‘개개인이 피어나는것, 번창하는것’을 위한 수단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인 고통을 없애는 노력에 동참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급진적인 민주주의자 (radical democrat)이다.[각주:3] 


 여기서 코넬 웨스트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란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지칭하는 “D”가 아니라 “small d”임을 강조한다. 즉, 민주당이란 정당의 당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의 소속 여부와 상관없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개별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코넬 웨스트는 급진적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 바로 모든 개별인들을 평등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으로서 행해야하는 윤리적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즉,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은 나사렛의 예수가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가장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었던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한명 한명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통을 없애는 노력에 참여하는 것이다. 타인의 영적, 물질적인 고통을 없애는 데 동참한다는 것은 높은자가 낮은 자를 대하거나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던지는 자선이나 연민의 눈길과 손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와 타인 한명 한명이 모두 평등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의 고통을 줄이면서 개별인들이 “피어날 수”있도록 ‘힘’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몇몇의 능력있고 힘있는 사람들만 살아 남고 대우받는 사회가 아니라 카나리아 같은 사회의 가장 약자들도 건강하게 숨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라고 할때 곧 제기되는 반론과 질문이 있다. 즉, 그렇게 약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들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고,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이고,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다 괜찮아 질 것이라는 만병통치약과도 같은 ‘긍정의 복음’과 개인의 능력여부를 연결짓는다. 그런데 이렇게 개별인의 부족함이나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인주의적 인간관 아닌가.  


    개인의 잘못과 부족함을 탓하기 전에 과연 그 구성원들 개별인들에게 공정한 기회와 공평한 물적/인적/교육적/제도적 자원이 분배되었는지, 아니면 ‘독소’ 조항이 가득한 정책과 제도로 인해서 숨도 한번 편하게 제대로 못쉬게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개별인이 “급진적 민주주의자”로서 지닌 “힘”이 무엇이고, 누구와 어떻게 그 “힘”을 써야하는 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질적이든, 육체적이든, 아니면 정신적이든, 실질적인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의 고통을 없애는데 동참하는 개별인들의 힘이 모이면 ‘우리’의 힘이 된다. 힘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힘을 넓혀나가는 것, 즉, 혼자만 위로 올라가는 위로의 수직적인 팽창이 아니라 옆으로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그런 힘을 넓히는 것이다. 그런 힘은, 가진자가 없는 자를 누를때 쓰는 힘, 배운자가 덜 배운자들을 누를때 쓰는 힘, 남자가 여자를 누를때 쓰는 힘, 비장애자가 장애자를 누를 때 쓰는 힘,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누를때 쓰는 힘, 권력이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누를 때 쓰는 힘, 연장자가 연소자를 누를 때 쓰는 힘, 내국인이 이주노동자들을 누를 때 쓰는 힘, 그런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는 힘이 아니라 같이 나눌 수 있는 힘, 나누면 나눌수록 많아지고 커지는 그런 힘을 말하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쓰는 힘이 결국은 나를 ‘위하는’ 힘도 되는 것이다. 수직적인 힘을 행사하는 대신에 나누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언제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입을 것을 주었고, 따뜻하게 맞았고, 병들었을 때 보살펴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갔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그런 나눔이 남들을 의식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소에 나와 내 이웃들에게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별인의 나누는 힘과 병행되어져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비롯해서 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구조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카나리아가 되돌아 오지 않는 독성이 가득한 죽음의 광산에 대해서는 폐광이 한가지 답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폐광’으로 문제들이 해결 될 수 없는 복잡한 곳이다. 일시적 폐쇄나 폐광이 답이 아니라면, 개별인이 “급진적 민주주의자”가 되어 ‘독소’ 조항이 가득한 정책과 구조를 제거하는 노력에 동참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런 길에 어떻게 동참할 지는 윤리적 책임을 질 줄 아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로서의 개별인의 몫이다. 그러나 카나리아가 되돌아 오지 않는 상황을 외면한다면 카나리아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곧 “숨을 쉴 수가 없다”를 외치며 쓰러지게 될 것이다. 카나리아의 경고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이다.  


ⓒ 웹진 <제3시대>


  1. Lani Guinier and Gerald Torres, Miner’s Canary: Enlisting Race, Resisting Power, and Transforming Democrac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본문으로]
  2. “Here Are The Demands From Students Protesting Racism At 51 Colleges.” December 3rd, 2015. http://fivethirtyeight.com/features/here-are-the-demands-from-students-protesting-racism-at-51-colleges/ [본문으로]
  3. Cornel West, Prophetic Thought in Postmodern Times (Monroe, Maine: Common Courage Press, 1993), 63-6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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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백인 남성'은 누구인가?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아기예수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기독교의 성탄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성탄절이 되면 영화극장에 굳이 가지 않더라도 텔레비젼을 통해서 예수의 생애나 초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에서 박해 받는 이야기, 아니면 성경의 인물들에 관한 할리우드의 ‘고전’영화를 시청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왕중의 왕’, ‘벤허’, ‘쿼바디스’, ‘메시아’, ‘나사렛 예수’, ‘예수 그리스도 수퍼스타’, ‘십계명’등이 있다. 아니면 유툽이나 비디오로 멜 깁슨이 2004년에 제작한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러셀 크로우 주연의 최근 영화인 ‘노아’를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화에 나오는 주연 배우들은, 노아이든, 모세이든, 예수이든, 예수의 제자들이든 거의 대부분이 유럽인의 형상을 한 백인 남성들이다. 주연 배우들과 그들을 옆에서 돕는 ‘선한’ 역할의 배우들이 백인 남성과 여성들이라면 악역은 주로 유색인종이나 검게 분장을 한 백인들이 맡는다. 악역으로 나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머리 색깔이든 수염 색깔이든, 피부 색깔이든 어느 한 부분이 ‘검게’ 묘사되곤 한다.


    많은 교회들의 예배당과 방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또 어떠한가? 눈부신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키가 큰 백인 남성이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의 머리와 갸름한 얼굴을 한 백인 남성의 모습. 하얀 양떼들 사이에서 지팡이를 짚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서있는 젊은 백인 남성의 모습. 마굿간의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예수와 그의 젊은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도 백인의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심지어 그 옆을 지키는 천사들도 곱슬한 금발머리의 백인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법인류학자들이 (forensic anthropologists) 여러가지 자료들에 근거해서 약 2,000여년 전 예수의 모습과 가장 흡사할 것으로 추정해서 그려낸 이미지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묘사해온 ‘백인 남성’ 예수나 교회당을 장식하는 ‘백인 남성’ 예수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래의 링크 사진 참조][각주:1]. 아마 그렇게 생긴 팔레스타인에서 온 남성이 지금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의 공항에 나타난다면 철저한 검문검색을 당하거나 특별한 이유없이 단지 ‘수상해’ 보인다는 이유로 입국이 허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비행기 탑승이 거부될 수도 있다. 요즘의 국제 정세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결코 아니다.  


   


[잘 알려진 워너 살맨(Warner Sallman)의 ‘그리스도의 머리’ (Head of Christ, 1941)[각주:2], 좌측 /  

예수의 실제 모습과 가장 흡사할 것으로 추정되는 이미지[각주:3], 우측] 


    그렇다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약 2000년 전에 태어난 것으로 믿어지는 유대인 예수가 언제부터 어떻게 ‘백인’의 모습으로 묘사 되기 시작했을까? 2000여년이 되는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이 짧은 글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반유태주의 정서가 심해지기 시작한 유럽 중세시대부터 르네상스시기를 거치는 동안 유대인 예수가 유럽인의 형상을 한 백인 남성으로 그려지기 시작됬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부색] (The Color of Christ: The Son of God and the Saga of Race in America)이라는 책을 보면 최소한 지난 5세기 동안 아메리카(미국)에서 진행된 ‘백인’ 예수 만들기와 그 이미지의 재생산 과정에서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 미국의 제국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선교가 어떻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 되어져 왔는지를 조금은 알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부색]의 공동 저자인 에드워드 블룸과 폴 하비는 아메리카(미국)라는 국가형성기와 아메리칸(미국) 시민권을 규정하는 시기에 예수가 ‘백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이민자들의 물결이 백인 미국들인들로 하여금 “백인성 (whiteness)의 범주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백인 남성으로 더욱 엄격하게 규정”[각주:4]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백인’ 예수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큰 백인 형으로서 ‘반은 악마같고 반은 아이같은’ 외국인들에게 수출”[각주:5] 되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미국에서 그런 ‘백인’ 예수의 모습에 계속 도전하고 저항해 온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관련된 상징적인 힘 때문에 ‘백인’ 예수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만연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미국내에서 ‘백인’ 예수 형상에 대한 저항의 이미지로 ‘검은’ 예수 (흑인의 이미지) 와 ‘붉은’ 예수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원주민의 이미지) 의 형상이 제시되었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백인’ 예수의 이미지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선교사들의 노력과, 세계 도처에 있는 미군기지들과, 글로벌 영화 시장을 통해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와 인종간의 위계질서를 확장해 나감으로서 ‘백인’ 예수를 다른 나라에도 수출해왔다. 선교를 통해서 성서의 이야기들 뿐만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성경공부 교재와, 교회 장식 용품, 다양한 선교용 팜플렛들, 그리고 영화들을 통해서 일정한 이미지들도 전달된 것이다. ‘백인’ 예수가 다른 나라로 ‘수출’되었다는 것은 ‘백인’ 예수에 함축되어져 있는 백인우월주의와 미국의 인종간의 위계질서와 인종차별주의가 다른 ‘작은 형제’국가들에도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구세주로 만들어진 ‘백인’ 예수는 백인의 권위와 지배에 특권을 부여했다.[각주:6] 에드워드 블룸과 폴 하비는 이런 ‘백인’ 예수가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소비 자본주의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해서라고 한다. 처음엔 영화산업이 자신들의 ‘도덕성’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예수를 필요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내와 다른 나라들로 예수를 퍼트리기 위한 수단으로 오히려 영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각주:7] 백인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달 받은 예수의 이미지는 ‘백인 남성’이었고, 그 이미지가 ‘은막의 예수’를 통해서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예수의 이미지가 ‘백인 남성’으로 기정사실화 된 것은 백인우월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현상이지만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이런 ‘백인 남성’ 예수와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예수의 피부색이 그저 하얗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하느님을 대표하는 ‘백인성’이 곧 ‘선함’과 ‘우월성’을 상징하게 되고, 그것과 대조되는 ‘검은색’이나 ‘갈색’은 잘하면 ‘종속적’이거나 ‘열등한’ 상태, 그렇지 않으면 ‘악함’을 상징하게 된다는 것이다. 피부색에 따라 사람의 가치와 가능성이 다르게 평가되고, 피부색에 근거해서 인종간에 우열이 매겨지게 된다. 나아가 그런 인종간의 ‘질서’가 하느님이 의도한 질서라고 믿게 되면서 흑백간의 인종적 위계질서가 신학적으로도 정당화 되어진다.[각주:8] 여기서 물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예수와 하느님의 백인성뿐 아니라 남성성이다. 백인성과 남성성 이 두가지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지금은 고전이 된 [하느님 아버지를 넘어서] (Beyond God the Father)에서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메리 데일리 (Mary Daly)가 “만약 하느님이 남성이라면, 남성이 곧 하느님”이라고 기독교의 가부장적 하느님 이미지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느님이 특정한 성/젠더가 없는 실체이고 한가지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 또는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하느님이 남성적인 존재로 투사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성신학자인 이숙진도 여성들을 ‘공적 언어활동’에서 소외시키고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언어의 차별성을 규범화하여 제도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종교의 가장 핵심 상징인 ‘신’을 ‘남성’으로 표상하고, 소수의 남성들이 성서의 몇 몇 구절에 근거해서 여성들의 설교를 불허하면서 설교권을 장악하는 경우이다.[각주:9] 이숙진은 “가부장적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교회공간”이 여성들의 말할 권리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머니 또는 다른 친밀한 존재로 부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용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남성들만이 교회에서 말할 권리가 있고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보살피는’ 역할만을 하도록 노골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요구되어진다.  


    메일 데일리와 이숙진이 말하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면, 예수나 하느님이 그냥 남성인 것이 아니라 ‘백인 남성’이고, 그런 이미지가 규범적인 모습으로 받아 들여지면서 ‘백인 남성이 곧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여성신학자 로즈메리 류터 (Rosemary Redford Ruether)가 남성 지배적인 신학을 비판하면서 쓴 “남성 구원자가 여성을 구원 할 수 있을까?”라는 글의 주장과 관련해서 워머니스트 (womanist) 신학자 재클린 그랜트 (Jacquelyn Grant)는 “유색여성들, 예를 들어 흑인 여성들은 하느님의 이미지로 부터 두 배나 멀리 떨어져있다”[각주:10]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나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토론에서 남성성만을 얘기하는 것은 인종차별의 경험이 없는 백인 여성의 경험을 표준화하고 우선시하는 것이기에 남성성과 인종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랜트가 이런 주장을 편 것은 이미 25여년 전이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과 계급과 인종은 물론이고, 섹슈얼리티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의 복장인 도포와 갓을 쓴 ‘조선인’ 예수, ‘중국인’ 예수, ‘일본인’ 예수, ‘아프리카’인 예수등 다양한 이미지들의 등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주장들도 이미 펼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남성’으로서의 예수와 하느님의 이미지는 당연한 것으로 국경을 초월하여 받아들여 지고 있다. 더불어, 하느님은 남성으로 뿐만이 아니라, 호전적이고 적을 정복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 왕정 시대의 군사적 왕이나 군주로도 아무 문제없이 불러지고 찬양되고 있다. 한국사회와 세계 곳곳에 팽배해 있는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 해온 ‘백인 남성’으로서의 예수와 하느님의 이미지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의 ‘다름’에 근거한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알게 모르게 쓰고 내뱉는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장애비하적 언어와 이미지, 군사주의와 사회의 군사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언어와 이미지가 왜 문제가 되는지를 먼저 묻고 알아나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봄과 함께 찾아오는 기독교의 또 다른 큰 명절인 부활절에 부활의 새벽을 알리는 ‘밝은 빛’으로 더욱 ‘눈부셔진’ ‘백인 남성’의 모습이 교회들을 수놓는다면 물어보자. 도대체 그 백인 남성이 누구인지.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bbc.co.uk/2/hi/entertainment/tv_and_radio/1243954.stm. [본문으로]
  2. http://www.warnersallman.com/collection/images/head-of-christ/ [본문으로]
  3. http://www.popularmechanics.com/science/health/a234/1282186/ [본문으로]
  4. Edward J. Blum and Paul Harvey, The Color of Christ: The Son of God & The Saga of Race in America (Chapel Hill, NC: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12), 143. [본문으로]
  5. Ibid., 159. [본문으로]
  6. Ibid., 154. [본문으로]
  7. Ibid., 183. [본문으로]
  8. Regarding the image of Jesus in film, see David Morgan, ed., Icons of American Protestantism: The Arts of Warner Sallma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6); W. Barnes Tatum, Jesus at the Movies: A Guide to the First Hundred Years (Polebridge Press, 1997); Lloyd Baugh, Imaging the Divine: Jesus and Christ-Figures in film (Kansas, KY: Sheed & Ward, 1997); Stephenson Humphries-Brooks, Cinematic Savior: Hollywood’s Making of the American Christ (Westport, CT: Praeger, 2006); Adele Reinhartz, Jesus of Hollywoo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본문으로]
  9. 이숙진, “방언과 간증: 성령운동의 젠더 정치학.” 종교문화비평10 (2006), 235. [본문으로]
  10. Jacquelyn Grant, White Women's Christ and Black Women's Jesus: Feminist Christology and Womanist Response (Scholars Press, 1989), 6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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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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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비' 성폭행 사건을 대하며 : 빠지지 말아야 할 '유혹'들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나의 연구실과 강의실이 있는 학교 내의 건물 이름은 코스비 (Cosby)이다. 정확하게는 ’카밀 올리비아 행스 코스비 빌딩’ (Camille Olivia Hanks Cosby Building)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코스비 쇼]의 주인공인 빌 코스비의 부인인 카밀 코스비의 이름이 붙여진 빌딩이지만 줄여서 코스비라 불리고 있다. 이 대학은 1988년에 코스비가족으로 부터 약 200억원 ($20 million)을 기부 받았는데, 미국내 흑인 대학교들이 받은 기부금 중 최고의 액수였다. 그 기부금의 일부로 시설이 좋은 코스비 건물이 지어졌고, 기부금의 또 다른 일부는 매년 ‘코스비 교수’ (The William and Camille Olivia Hanks Cosby Endowed Professorship)를 초빙하는데 쓰여져 왔다 (‘코스비 교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문학이나 예술 분야에서 명망이 있는 학자를 일년에 한명씩 뽑아 학교로 초빙해 왔다). 작년 겨울에 빌 코스비의 성폭행 (sexual assault)과 관련된 혐의가 또다시 제기되었을 때 이 대학은 ‘코스비 교수’ 프로그램을 폐지했다.[각주:1] 올 여름 마흔 명이 넘는 여성들이 빌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을 하면서 그의 혐의가 다시 제기되었을 때는 남은 기부금 전액을 카밀 코스비가 세운 클라라 엘리자베스 잭슨 카터 재단 (The Clara Elizabeth Jackson Carter Foundation)에 되돌려준다는 결정을 내렸다.[각주:2]


    코스비의 여성을 상대로 한 다양한 형태의 성폭행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코스비의 성폭행에 대한 혐의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즈음이다. 지난 십년 동안 몇 명의 여성들이 그의 성폭행 혐의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피해경험을 얘기 했지만, 그때마다 코스비 사건은 묻혀버렸다. 2014년에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들이 여러 명 나타나면서 코스비 사건은 더 이상 묻혀 버릴 수 없는 일이 되었다.[각주:3] 그동안 코스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피해 여성들의 숫자는 현재 52명 (2015년 8월 25일 기준)이다.[각주:4] 수십명의 여성을 상대로한 성폭행 혐의와 관련해서 빌 코스비는 아직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 기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코스비의 성폭행 혐의를 접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반응도 엇갈렸다.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코스비를 비난하는 소수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혐의를 일단 믿기 어려워 했다. 1980년대 [코스비 쇼]에서 화목한 흑인 중-상류층 가정의 유쾌하고 자상한 ‘가부장’을 연기하면서 ‘아메리카의 아버지’로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코스비의 이미지가 성폭행을 행사한 가해자로서의 코스비와는 도저히 맞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흑인 커뮤니티에서 코스비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흑인들이 코스비를 옹호하거나 보호하려는 것은 ‘존경받고 사랑받는’ 코스비의 이미지 때문 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잔인했던 흑인 ‘폭행’ (lynching)의 역사와도 일련의 관련이 있다. 노예 해방후 남부 지역에서 흑인들을 향한 백인들의 잔인한 폭행과 살인은 흑인 남성들, 여성들, 그리고 아이들에게 까지도 거침없이 자행 되었다. 특히 흑인 남자들은 백인 여성을 ‘강간한 죄’로 폭행 당하고 살해 당했으며, 심지어는 ‘눈으로 하는 강간’ (eye rape)도 수감과, 폭행, 심지어는 살해를 당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흑인 남성들에 대한 미 백인들의 폭행의 대부분은 조작되었거나 거짓 증언의 결과였다. 폭행과 살해를 정당화 하는데 사용되었던 “흑인 남성은 강간범”이라는 이미지가 고정관념이 되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이런 잔인한 역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흑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코스비 역시 그의 피해자들로 알려진 여성들 중 대다수인 백인여성들의 거짓 증언의 희생자라고 여기고 그를 옹호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흑인여성 피해자들과, 피해자들의 증언을 우선 믿고 연대하는 여성들은 도데체 몇 명의 피해자가 나와야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 것인가라고 울분을 토하면서, 코스비가 자신의 행동을 책임 질 것을 촉구해 왔다. 또한,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코스비를 옹호했던 몇몇 유명인사들도 자신들의 코스비 지지발언을 철회하고 있다.  


    미국의 잔인한 흑인 폭행과 살해의 역사가 코스비 사건을 수면으로 떠오르게 하는데 시간을 지체시킨 면도 있지만, 코스비 사건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질문과 시선이 다른 비슷한 사건들의 경우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성폭행 피해자가 거짓 증언을 하는 경우는 사실 매우 드문데,[각주:5] 다른 범죄들의 경우와 달리 성폭행일 경우 유독 피해자의 거짓 증언의 가능성이 제기되거나, 가해자보다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이 빈번하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성폭행의 사례들, 특별히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남성들이 가해자일 경우들도 그 예외가 아니다.  


    믿고 뽑아준 국회의원, 믿고 배운 교수, 믿고 따른 교사, 믿고 헌신한 목사, 믿고 맡긴 의사, 믿고 보는 배우, 믿고 안심한 경찰, 믿고 도와준 시민운동가… 만약 그렇게 굳게 믿었던 공동체의 영향력있는 남성이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근절을 위해 지난 수십년간 활동하고 글을 써온 마리 포춘 (Marie Fortune)과 제임스 폴링 (James Poling)은 피해자 여성이 그녀가 속한 공동체 (교회 공동체도 포함해서)의 영향력 있고 힘있는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폭로했을 때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여섯가지 유형의 ‘유혹’에 대해 말한다.[각주:6] 그 “유혹’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날 수 있다.  


    1. 믿지 못하는 유혹

    예)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그 남자가 그랬다니… 믿을 수가 없어!” “그럴 남자가 아냐!” 


    2. 교회 (공동체)의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유혹

   예) “교회를 위해서 일을 더 크게 벌리지 말자.” “모두를 위해서 그냥 조용히 덮고가자.” “우리가 어떻게 이뤄 온 공동체인데... 왠만하면 공동체를 생각해서 이번 한번만 넘어가자.” 


   3. 피해자를 탓하려는 유혹

   예) “그 여자는 왜 그 시간에 그 남자의 사무실에 갔지?” “그 여자가 뭘 바란건 아닌가?” “왜 굳이 따로 만나려고 했지?” “왜 그 여자는 그 시간에 그런 (야한) 옷을 입고 거기에 갔지?”: 


   4. 가해자를 동정하는 유혹

   예) “어쩌다 그렇게 됬을까.” “외로웠나 보다.” “마음이 너무 약해서 만나주다 보니 그렇게 됬다.” “아마 무슨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피해여성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갔다.” 


   5. 가해자를 그의 행동의 결과로부터 보호하려는 유혹

   예) “앞날이 창창한데 한번 정도 실수는 봐줘야지.” “경찰서까지 갈 필요없이 그냥 합의를 하지.” “법으로 처리하면 그 사람과 그 가족은 앞으로 어떡하라고.” 


   6. 값싼 은혜의 유혹

   예) “이제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으니 앞으로는 다시 그러지 마라.” “하나님께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죄사함을 받고, 다 해결 될 것이다.”  

   

   이 여섯가지 유혹들 중 그 어떠한 것도 피해자를 ‘위한’ 유혹은 없다. ‘유혹’ (temptation)이란 단어의 여러가지 어원들 (한 예로 희랍어peirasmos) 을 보면 ‘유혹’은 결과를 수반하는데 그 결과는 잘못된 것이거나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즉, 위의 여섯가지 유혹들 중 한가지에라도 빠지게 되면 잘못된 결과를 가져 오게 되는데, 그 결과는 어렵게 자신의 피해를 폭로한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잘못을 덮어주고 넘어 감으로써 결국엔 그가 또 다른 가해를 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유혹’에 넘어간 개개인들과 공동체는 성폭행의 악순환을 끊는 것을 방해하고 지체함으로써 넓은 의미에서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유혹들이 되풀이 되면 피해자의 회복은 점점 어려워 지고, 가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어 내면서 교회든 어느 공동체에서든 성폭행의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이다.

  

    만약 공동체가, 특별히 교회가, 가해자와 공범 집단이 되어서 사건을 은폐하는데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성폭행의 악순환을 끊어 내는 것을 우선 순위로 여긴다면,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유혹들을 떨쳐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여섯 가지의 ‘유혹’을 여섯 형태의 ‘용기’으로 바꾸는 것이 그 첫 단계가 될것이다.  


    한국어사전은 ‘용기’를 날랠 용 (勇)과 기운 기(氣)를 써서,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라고 적고 있다. ‘용기’라고 번역되는 영어 단어인 ‘courage’는 심장, 즉, 마음과 연결되는 단어이다. Courage의 어원인 ‘cor’는 라틴어로 심장/마음 (heart)을 뜻한다.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용기(courage)라는 단어는 원래 “온 마음 (heart)을 다하여 내 생각을 말하는 것”[각주:7] 이란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혹’ 대신에 어떤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피해자의 얘기를 듣고 믿어주는 용기 

    피해자를 탓하지 않는 용기 

    상황을 덮으려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막는 용기 

    공동체나 조직의 이미지 유지보다 피해자의 편에 서는 용기 

    지위와 영향력에 상관없이 가해자가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용기 

    가해자에게 값싼 은혜 (빠른 용서)를 퍼부어 주지 않는 용기.  


    그런데,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들의 이러한 용기는 제도적으로 뒷받침 되어져야 한다. 피해자에게는 정의로운 해결과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고,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 그리고, 공동체 역시 적합하고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경우에 그 담당자들도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가 개개의 교회와 교단 및 일반 사회에 정착되어져야 한다.  


     이렇듯이 개개인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 및 사회의 제도가 제대로 적용되고 정착되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뿌리 깊은 여성혐오, 성차별, 남성우월주의, 위계질서가 왜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문제인지를 묻는 비판적인 교육이다. 개개인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용기있게 행동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와 지속적인 교육이 병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위의 여섯가지의 유혹들이 더 이상 ‘유혹’이 될 수 없고, 여섯가지의 ‘용기’가 특별한 것이 아닌, 그저 내가,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이 될 때 성폭행의 근절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코스비빌딩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계속해서 물을 것이다. 데이트 폭력을 포함해서 성폭행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 지고 있는 대학 캠퍼스와 사회에서 학교는, 교수들은, 직원들은, 동창들은, 종교기관들은, 사법기관들은, 그리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또 다른 코스비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누구든지 빠질 수 있는 유혹과 누구나 가져야 할 용기들에 대해 계속해서 대화해야 할 것이다. 갈길이 멀지만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huffingtonpost.com/entry/spelman-college-drops-bill-cosby-professorship_55b4417ee4b0224d8832819b [본문으로]
  2. http://time.com/3972281/bill-cosby-spelman-college/ [본문으로]
  3. http://www.slate.com/blogs/browbeat/2014/11/21/bill_cosby_accusers_list_sexual_assault_rape_drugs_feature_in_women_s_stories.html [본문으로]
  4. http://starcasm.net/archives/306591 [본문으로]
  5. http://web.stanford.edu/group/maan/cgi-bin/?page_id=297 [본문으로]
  6. Marie M. Fortune and James Poling, “Calling to Accountability: The Church’s Response to Abusers,” in Violence Against Women and Children: A Christian Theological Sourcebook, ed. Marie M. Fortune and Carol J. Adams (New York, NY: Continuum, 1995). [본문으로]
  7. http://www.pbs.org/parents/experts/archive/2010/11/courage-is-a-heart-word-and-a.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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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의 '창조론'에는 없는 여성과 성 소수자들의 권리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창조과학 세미나] 강의가 한국의 한 명문 사립대학교에서 2015년 2학기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창조과학회 (이하 창조과학회)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진 담당교수는 수업 계획서에서 “기독교인 과학자로서 성경의 내용 중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보는 수업을 할 것”이고, “종의 기원, 노아의 홍수, 창조와 진화, 성경과 과학, 우주의 창조 및 진화론 등을 주제로 강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이 나간 직후 여러 가지 이유로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 명문대에서 ‘창조과학 세미나’ 개설을 둘러싼 소란은 미국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나에게 흥미로운 뉴스로 다가왔다. “내가 만약 창조와 관련된 주제들을 가지고 강의를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분명한 것은 수업의 목적, 그리고 이 주제들에 대한 접근 방법에 있어서 나는 [창조과학 세미나] 와는 다른 동기와 방법을 가지고 그 강의를 바라볼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위의 주제들과 관련된 성경의 내용은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의 과학적 증거들을 드러내는 것을 추구해 온 창조과학회에서 말하는 ‘창조’는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이다 (참고로 창세기에는 두가지 창조설화가 있다). 창조과학회는 몇 명의 기독교인 과학자들이 1980년 서울에서 열린 “80 전세계 복음화 십자군” 대회에서 주최한 ”창조냐, 진화냐?”라는 세미나에 참석한 후에 1981년에 설립한 단체이다. 그 세미나는 현대 창조과학의 아버지로 알려졌고 창조연구기관(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의 공동 설립자인 헨리 모리스와 그의 동역자들이 진행했다. 창조과학회의 비젼과 선교는 성서무오설을 믿는 근본주의 기독교의 입장을 반영한다. 창조과학회는 열방의 구원, 창조신앙의 회복, 교육개혁과 창조과학관 정립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무엇보다 진화론을 과학적 허구성을 지닌 복음전파의 커다란 장애물로 여기는 반면에, 성서무오설, 즉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이해를 바탕으로 창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장 과학적인 이론이라 주장한다.  

    ‘창조론’ 대 ‘진화론’ 논쟁이 교육현장에서 논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이하 교진추)가 말과 시조새의 진화 과정이 상상의 산물이라며 정부에 낸 교과서 내용 삭제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이를 2012년 6월 12일에 과학전문학술지 '네이처(Nature)'가 기사로 내보냈다. 기술강국, 인터넷 대국인 한국에서 벌어진 ‘믿거나 말거나’ 한 일이라며 자기네들끼리 뒤에서 키득거렸을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진다. 창조과학회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알려졌고, ‘반진화론’ 학술 단체로 스스로 규정을 내리는 교진추의 궁극적 목표는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하고 진화론의 부정적인 영향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한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창조과학회가 한국 사회에 이런 식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이 우려되지만, 사실 나는 창조론이 ‘진짜’ 과학에 의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반론되어 질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의과정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설화’를 과학의 언어로 얘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창조설화’ (creation narrative) 를 포함해서 스무가지가 넘는 다양한 ‘창조설화'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디서 왔고, 어떻게 번식을 하고, 하늘과, 땅과, 동식물 및 자연의 현상들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각각의 설화들이 생겨난 지역에서 쓰였던 다양한 표기형식과 언어를 통해서 설명하고 표현해 낸 상징적인 이야기들이다.  

    각자가 지닌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설화’는 진실된 이야기이다. ‘진실되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과학실험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길을 제시해 주는 ‘살아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서의 내용을 진리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그 내용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그 내용을 과학적으로 검사하여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삶에서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통해서 그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즉, 검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백과 실천을 통해서 진리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창조론과 관련해서 진화론이 더 정확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데도 별로 관심이 없다. 이것은 진화론을 포함한 모든 과학 이론들이 지속적인 검증을 받아야 함을 의미하고, 소위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알려진 이론들 또한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할 때 역사적 패러다임 전환이 어떻게 당대의 ‘객관적 진리’라고 불리는 것들과 조응하는지에 대해 주목해야한다. 19세기 말의 다윈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회적 다윈주의가 어떻게 인종주의, 제국주의를 뒷받침했는지는 그저 하나의 간접적인 예일 것이다. 

    ‘창조과학’의 문제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과 그 해석에 근거한 신학에서 보여지는 집요한 반지성주의와 여성차별 및 성소수자 차별의 요소들이다.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주의 기독교의 초석인 성서무오설과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에 바탕을 둔 신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본주의’[각주:1]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성서의 무오를 믿는 일반적인 복음주의적 신앙”을 옹호하는 신학은 19세기 중반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각주:2] 그런 신학은 19세기 성서의 권위를 둘러싼 논쟁 중에 만들어 졌고, 천년왕국설 운동과 함께 근본주의 기독교의 특징이 되었다. 근본주의 기독교의 토대가 되는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고, 그런 해석은 일관성 없이 선택적으로 적용되어져 왔다. 이런 성서무오설은 19세기 말부터 미국의 백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으로 전파되었고, 이들에 의해 문자주의적 해석만이 성서를 올바르게 읽는 방법이라는 통념이 한국교회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성서무오설은 19세기 중.후반 미국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성서적 입장과 관련해서 일어난 광범위하고 심각한 논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각주:3]근본주의 기독교에서는 무엇보다도 가정과 사회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여기서 질서는 다름 아닌 창조질서를 말하는 것이고,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은 창조 질서 안에 내재된 것으로 믿었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성서적 진리로 받아들였고, 이브의 종속은 물론 더 나아가 여성들의 ‘다른’ (사실은 불평등한) 지위가 하느님의 원래 창조질서안에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근본주의 기독교는 그저 추상적인 무질서나 사회의 혼란이 아니라, 젠더 (성)와 관련한 “무질서 또는 혼란의 가능성”[각주:4] 에 대해 염려를 한 것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가정 예찬/숭배’ (the Cult of Domesticity) –‘여자들에게 어울리는 곳은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사적인 공간이다’– 에 근거한 젠더화된 신학을 미국의 기독교 우파가 이어 받게 된다.[각주:5] 근본주의 기독교의 맥을 잇는 미국의 기독교 우파가 받아들인 젠더화된 신학 체계에서 여자들은 우선적으로 자신들의 가정과 하느님의 관계를 책임져야 하는 반면, 남자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역사적으로 남성이었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각주:6] 다시말해서, 젠더화된 신학은 위계질서적인 젠더체계와 이성애 가정만을 정상적인 것으로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젠더 (남성과 아버지로) 에 관한 태도 역시 미리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각주:7] 

    이렇듯,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과 그것에 근거한 신학이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에게 해로운 것임은 자명하다. 그것이 여성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여성은 가정의 우두머리 –아버지든 남편이든– 에게 속하고 복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의 종속은 창조질서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하느님이 창조한 첫번째 인간이고, 여자는 남자로 부터, 남자를 위한 조력자로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물론 창조과학을 따르거나 문자주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정말 한 명의 여자가 감히 하느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은 뒤 모든 인간 후손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하느님이 만든 ‘보기 좋은’ 세상을 ‘죄가 가득한’ 세상으로 완전히 뒤집어 엎어 놓을 만큼 ‘강했다’라고 해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소수자들에게 문자주의적 해석은 딱 두가지 선택을 주고 있다 – 죄인으로서 영원한 정죄를 받던가 아니면 ‘자연스러운’ 젠더이원론과 이성애규범주의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자주의해석을 통해서 설명되는 창조질서에는 성소수자들을 위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든 창조과학을 믿고 가르친다는 것은 아담과 이브의 ‘혈액형’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려는 것만이 아니다. 여자의 역할은 (남성)배우자를 돕는 것이고, 성은 출산과 관련해서만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립적이고, 남성과 동등하게 취급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나, 성을 다향한 형태로 표현하거나 관계를 맺는 것은 모두 창조질서에 반하는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이 된다. 아무리 ‘과학적’인 것으로 잘 포장된다고 하더라도 창조과학은 창조질서로 여겨지는 이성애 가부장제의 구조와 권력을 강화시킬 뿐이다. 교육에 있어서 비판적 사고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창조과학이 ‘과학적 검증’의 한 방식으로 교육 제도속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것과,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의 권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만약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한 학기를 진행한다면, 한국 명문대에 개설된 [창조과학 세미나]와 어떻게 다를 것인가? 나는 우선 여러종류의 ‘창조설화’들을 비교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난 인간관계, 젠더형성과정, 삶과 질병과 죽음의 이해, 사회의 금기사항들,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이 각각의 종교와 문화권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의미를 달리하는지를 밝힐 것이다.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것 같다. 최근 관심을 많이 받는 ‘종교와 과학’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해도 대학교 1학년생들에게 필요한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할 주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무엇을 왜, 어떤 교육철학과 목적으로, 그리고 어떻게 가르치는냐 일 것이다. 감동을 주는 소설이나 은유 가득한 시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듯이, 다양한 창조설화들도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창조설화를 다양한 이론과 방법을 통해 해석해 내고 설화의 의미들이 사람들의 삶에 미쳐온 영향 (긍정적, 부정적인 것 모두 포함해서)들에 대해 토론을 하고,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 현재의 내 삶과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서 더 많은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수업이라면 해 볼 만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수업의 목적이 한 종교의 한가지 교리만을 ‘진리’로 가르치려는 ‘교화’ (indoctrination) 또는 ‘주입’이라면 교육의 장에 들어설 수 없고 그래서도 않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은 ‘교화 공장’ (indoctrination mill)이 아니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1. “근본” (fundamentals) 이란 단어는 1910년 미국에서 출간된 The Fundamentals 의 제 일권에 처음 표기 됬고, “근보주의자들”이라는 용어는 커티스 리 러즈 (Curtis Lee Laws)가 1920년에 처음으로 썼다. See Ernest R. Sandeen, The Roots of Fundamentalism: British & American Millenarianism, 1800-1930 (Chicago,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본문으로]
  2. Ibid., 106. [본문으로]
  3. Margaret Lamberts Bendroth, Fundamentalism and Gender: 1875 to the Present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3), 34. [본문으로]
  4. Ibid., 113. [본문으로]
  5. Kathy Rudy, Sex and the Church: Gender, Homosexuality, and the Transformation of Christian Ethics (Boston, Mass: Beacon Press, 1997), 26. [본문으로]
  6. Ibid., 39. [본문으로]
  7. Ibid., 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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