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기념비를 세우라
: 차별금지법 논란에 즈음하여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우리말 성서에서 ‘회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콰할’(qahal)은 칠십인역성서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에클레시아’(ecclesia)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에클레시아’는 제2성서(신약성서)에 나오는 ‘교회’의 원어다.
한데 「출애굽기」 16,9의 용법에 따르면 ‘콰할’은 모세의 법 앞에 모인 백성을 뜻한다. 이 구절은 형식상 국가 이전 시기 광야의 유랑자들이 야훼가 내린 법을 통해 법공동체가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법공동체는 (떠돌이 사회의 상상이 아니라) 국가형성의 상상이다. 떠돌이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복잡한 사회적 집단이 되었을 때, 이들을 묶어내는 양식이 곧 법의 반포인 것이다. 하여 법의 반포는 그 법이 포괄하는 공동체의 안과 밖을 나눈다. 즉 다양하고 복잡한 전통과 관습과 역사를 가진 이들을 일괄하여 법의 일원으로, 곧 법의 ‘안’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 나라의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하고, 나머지를 ‘밖’으로 배제하여 이방인이 되게 하는 이분화의 형식이 바로 국가에서 법의 효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치적 집단이 법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비로소 국가다운 국가가 되었다는 시금석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누가 그 공동체의 일원인가의 문제다. 즉 법은 누구를 ‘안’으로 포함하는가의 문제가 국가 형성의 핵심적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다국의 멸망 이후, 그곳에서 일어난 재건공동체가 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누가 법공동체의 일원인가’를 둘러싼 논의를 살피고자 한다. 여기서 유다 재건공동체는 과거 유다국이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 유배되어 끌려간 자들의 일부가 반세기 이후부터 돌아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귀환자들이 속속 돌아왔다. 바벨로니아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먼 곳에서 오려니 나이든 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고 혹여 용기를 내어 길을 떠난 이들도 험한 여정에서 쓰러졌다. 하여 기어이 고향 땅 유다로 무사히 돌아온 이들은 대개 청년들이었다. 경험이 많지 않지만 열정은 넘쳐나는 이들이다.
이들은 전에 왕족 혹은 귀족 집안의 자제였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던 이들의 자손이었다. 해서 그들은 꿈꿨다. 그 땅에 무사히 돌아오면 다시 주인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루아침이 유배민으로 전락하여 고생고생하며 살아가는 종의 신세가 아닌, 땅의 주인이 되는 삶, 인생역전의 꿈이다. 
한데 그들이 당도한 꿈의 땅 예루살렘은 폐허가 된 채 버려진, 아무도 살지 않는 땅, 불에 탄 잿더미와 무너져버린 벽돌, 무수한 잡초만 가득한 ‘죽은 도시’였다. 그들을 환대해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없었다. 고국 땅에서 주인이 될 줄 알았던 귀환자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폐허가 된 담벼락을 보수하고 잡초를 치워 가까스로 살 집을 마련했고, 겨우겨우 끼니를 잇는 절박한 생활고에 꿈이 자리잡을 곳은 없었다. 몇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귀향한 사람들, 새 나라에 대한 꿈에 한가득 부풀었던 그들은 번번이 절망하고 말았다.
그중 한 귀환집단이 있었다. 예수아 제사장과 즈루빠벨 총독이 이끄는 귀환자들이다. 이들의 지도자들이 황제가 준 기금을 가지고 와서 그 날이 곧 도래할 거라고 부추겼을 때, 그들과 앞서 귀환했던 이들, 그리고 그 지역의 일부 토착민들은 힘을 내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지었다. 성전이 세워지면 야훼가 보살펴줄 것이라고, 하여 영광의 시간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전이 세워졌어도 야훼의 영광은 보이지 않았고, 비루한 현실은 여전했다. 게다가 때만 되면 몰려오는 약탈자들은 성전이 세워진 뒤 더 기승을 부렸다.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났다. 다시 큰 규모의 귀환자들이 돌아왔다. 지도자는 느헤미야 총독, 페르시아 황제의 관리였다는 자다. 그는 황제가 준 기금과 유배민 공동체에서 수거한 기금, 그리고 귀환민들로부터 징수한 기금을 모아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가까스로 성벽이 세워지니 이제 더 이상 약탈자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성벽은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곳이 다름 아닌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멀리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서 보내온 기부금과 기부물품이 쌓이기 시작했고, 성전 제사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제사장들의 권위는 다른 성소들의 권위를 압도하게 되었다.
식민지가 된 이후 유다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성읍이 되었던 미스바(예루살렘 북족의 13킬로의 성읍)도 예루살렘에 밀리게 되었고, 남쪽으로 30킬로 떨어진 성읍 벧수르도 예루살렘에 복속되었다. 하여 느헤미야는 이제 영토다운 영토를 다스리는 총독이 되었다. 그 주(州)의 이름은 ‘예후드’였다.
예후드 주에서 느헤미야 총독은 강력한 분리주의 정책을 취했다. 식민지 이후 이 지역은 한동안 사마리아에 복속된 하위의 정치단위였었다. 또 사마리아 못지않은 강력한 정치세력이던 암몬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하여 느헤미야는 분리주의 정책을 통해 사마리아와 암몬으로부터 실제적으로 독립된 자치구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에스라 제사장이 황제의 재가를 받아 이곳으로 파송되었다. 그는 예후드 주의 백성을 결속시키는 법을 반포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법은 ‘성전에 계신 야훼께서 주신 율법’이라는 것이다. 이제 느헤미야의 분리주의는 하느님의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최초로 백성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통합시키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전 제사도 비슷한 통합의 기능을 하지만, 그것은 제사 드리는 그 순간에야 효력을 미친다. 한데 예후다 영토가 넓어지자 모든 이가 제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된 데다, 제사는 연중 불과 몇 회만 시행될 뿐이다.
반면 율법은 성전까지 오지 않아도 백성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자의식에 매어 있게 할 수 있다. 마을마다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하는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이 예배와 교육은 매 안식일마다 시행되었다. 법은 이렇게 제사보다도 예후다의 백성을 더 촘촘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안식일마다 마을에서 천명되는 율법에서 핵심은 ‘누가 예루살렘 성전공동체 예후다의 백성인가’라는 문제에 있다. 이때 에스라의 율법은 백성이 아닌 이를 규정함으로써 백성인 이들을 포용하는 형식을 지녔다.
누가 법의 백성이 아닌가 하면, 첫째로 이방인이 그렇다. 심지어는 이방인과 결혼하는 이도, 그이들의 자제들도 이방인이다. 강력한 배타주의다. 이방인과 결혼 중인 이들까지 강제로 이혼시키고 한 편을 국외로 추방하는 조치가 내려질 정도로 고강도의 폐쇄주의다.
둘째는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고자’는 배제의 대상이다. 왜 하필 ‘고자’라고 표현했을까? 추측컨대 ‘생산을 할 수 없는 성(性)’이라는 점이 고자 속에 담긴 핵심 논지였을 듯싶다. 왜냐면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가 혼혈의 위험으로부터 피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것이라면, 고자 배제의 원리는 깨끗한 피의 백성이 번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자 배제’ 원리 속에 함축된 것은 ‘생산하는 성’만이 진정한 ‘법의 내부’라는 주장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생산 없는 성’을 왜 하필 ‘고자’라고 했을까? 아마도 남성 중심사회에서 불임 여성을 거론하는 것보다는 불임의 남성을 얘기하기 위해, 불임 남성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자’가 배제의 대표집단으로 거명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느헤미야-에스라 식의 이러한 분리주의와 순혈주의는 유대주의적 성전공동체를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부상하게 했고, 하나의 사회적, 종족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주체화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한데 문제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 체제는 누군가를 강하게 차별하는 배제주의적 사회를 만들어냈다. 하여 이 체제를 실행하기 위해 이웃 족속과 결혼했던 이들을 강제로 갈라놓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성에 대한 사회적 처벌을 제도화했다. 결국 소수자에 대한 배제를 제도화함으로써 그 사회는 성립했던 것이다.
이제 오늘 우리 시대 얘기를 해보자. 최근 다시 차별금지법안이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상정되었다. 북한 미사일 사태에 시민사회가 정신이 온통 쏠려 있는 중에 이 차별금지법 문제는 개신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있다. 기독교계 매체들 가운데 몇 개 빼고는 거의 전부가 차별금지법에 대해 일방적 비난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해서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 표출된 여론은 반대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해묵은 물음이 제기된다. 왜 개신교계는 그토록 차별금지법 반대에 열을 올리는가? 말할 것도 없이 반대의 핵심은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 문제에 있다. 수많은 반대 주장에 들어 있는 공통된 불만은, 이 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죄라고 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니 이게 가당한가라는 주장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인 이들은 반성서적이고 반자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성서적이라 함은 성서가 동성애자를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반자연적이라 함은 생식 없는 성은 부자연스런 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억지다. 성서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텍스트가 단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그 텍스트가 동성애와 무관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 또한 있으므로 그것으로 성서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주장은 자명하자 않다. 설사 반대한다는 해석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서의 모든 주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니, 불과 몇 개 텍스트에 불과한 것을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지나치다. 가령 성서가 월경하는 여자를 불경하다고 하고, 그 기간에 그녀가 눕는 자리, 앉았던 자리에 닿는 것까지도 주변의 모든 사람을 부정타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교회도, 어느 목사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또 고기를 먹을 때 피까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반복하는 교회는 없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선 주일 점심 식사로 선지국이 나오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동성애 같은 몇 개 요소만은 성서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성서 문구조차도 동성애 반대 논지가 불명확하니, 억지 부린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반자연적이라는 주장도 그렇다. 자연적이라는 것을 다수자의 선택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단지 다수자에 속하는 이들이 낯설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종종 다수자의 폭력으로 드러나곤 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소수자든 다수자든 그 선택이 주변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차별금지법은 인권법이다. 인권법은 소수자라 하여 차별받지 않는 권리에 관한 법이다. 소수자든 다수자든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한, 그 선택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한데 소수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낀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소수자들은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그런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바로 차별금지법인 것이다.
하여 차별금지법 같은 인권법은 다수의 동의를 요하기보다는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인권 개념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법제화되는 것이다. 즉 차별금지법은 그 사회가 국제적 인권의 관점에서 얼마나 성숙한 인격을 갖추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차별금지법 논란은, 우리 사회가 누구를 법공동체의 일원으로 삼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국제적으로 격조 있는 사회가 될 것인가 아닌가의 기로에 선 논란이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은 한국사회를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국제적 인격을 결여한 사회가 되게 하려는 일에 앞장섰다.
다시 성서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사야서」 56,4~7는 느헤미야-에스라가 주장하는 법공동체의 폐쇄적 개념에 대항하고 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

주장인즉슨, 이방인이나 고자라는 이유로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은 안 된다는 얘기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그 사회의 질서를 반하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이방인과 성소수자는 그 사회로부터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구절은 당시 예후다 지역의 지배적 법률인 에스라의 법의 배제주의에 대항해서 제기된 하느님의 차별금지법인 셈이다.
이 성서 구절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성벽 안에서(곧 야훼의 법 공동체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는 표현이 주목된다. 누가 우리 사회, 우리의 법공동체의 일원인가?를 둘러싼 논의에서 차별당하는 소수자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 야훼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부활에 관해 상상해본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부활은 몸이 난도질당한채 죽임당한 이들이 그 마지막 때에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어 일어서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몸의 부활 모티브는 그 살해당한 이들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신체가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활은 몸의 복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하여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그들, 곧 소수자이기에 차별받았던 이들이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사건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차별당하고 죽임당한 소수자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벌인다. 그것이 바울 사역의 핵심이기도 하다. 곧 그것은 하느님의 차별금지법의 바울식 실천인 셈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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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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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31 22: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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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감합니다^^ 멋지십니다 ㅎㅎ
  2. 참된 목자를 찾으며
    2013.06.05 06:4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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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 목사님 맞나요??
    성서적으로 동성애가 죄라고 딱 집어 얘기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법이란 불법한 자.. 죄인.. 을 위해 있다 하고 '아비를 치는 자.. 살인한 자..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라고 해서 동성애를 죄라 하고 있거든요. 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가 동성애자를 죄인 취급하거나 혐오한다는 뜻이 아니라 글 쓰신 분이 성경을 들먹이시기에 나도 인용을 해본 것 뿐이구요.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로서 어려움을 겪다가 빠져나와 참된 행복을 맛보고 있는 사람들을 알기에 다른 동성애자분들도 이들과 같이 되면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 것도 행복의 기준에 대한 차별로 느껴진다면 죄송하구요.
    본론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전공도 정확히 모르는 분이 '법'에 대해서는 알고나 계실까 싶고 이렇게 분석과 해석력이 부족하신 분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제대로 이해는 하신 걸까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정죄하고 차별-배척하자는게 아니라 '동성애 합법'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문제점 그리고 '차별금지법'에 따른 역차별과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는 것.
    즉 '사람'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법'의 부실에 대한 반대인데, 마치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국제적 품격에 못 미치는 사람인 양 표현하신 것이 목사님으로서의 품격과 자질에 의심이 가네요..
  3. 위의 분
    2013.06.19 00: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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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동성애 같은 몇 개 요소만은 성서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성서 문구조차도 동성애 반대 논지가 불명확하니, 억지 부린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라고 본문이 말하는 게 뭔 말인지 모르시나 보군요.

    법의 부실을 논하기 전에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편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는 성찰의 능력부터 키워 보시길 권합니다.

견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

 

주님이 명령을 내립니다. 천사장이 그 명을 받들어 소리를 내지릅니다. 그러자 좌우의 나팔수들이 거대한 나팔을 힘껏 불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순식간에 세상을 가득 메웁니다. 그러자 죽은 이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이들도 하늘로 이끌려 올라갑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좌우로 길을 만듭니다. 주님이 그리로 오신 것입니다. 하여 그들은 거기에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는 마지막 때의 부활이 이렇게 청각적이기도 하고 시각적이기도 한, 한 편의 판타지 영화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묘사는 바울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바울스럽지 않은 바울의 묘사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시청각적 부활 판타지 속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의 제2의 도시가 된 데살로니가는 본래 마케도니아의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기원전 4세기, 세계의 대제국이 된 마케도니아의 무수한 폴리스들 간의 국제교역으로 이 도시는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합니다. 해서 이 도시에는 여러 인종이 만나고 다양한 물품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다양성의 도시가 됩니다. 다인종이 드나드는 도시에는 으레 그들의 신전들이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또 그이들의 종교적 결사체들도 세워졌지요. 그중에는 이스라엘인들의 회당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당들 가운데 어떤 곳은 더 유대적이었고 다른 어떤 곳은 더 사마리아적이었지요.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중반에는 로마에 병합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도시를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지정합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이 지역 대도시들 가운데 로마에 가장 충성스런 도시였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9절에 따르면 유대적 성향이 더 강했던 한 회당에서 바울이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바울은 시당국에 고소당하게 됩니다. 회당 당국은 시당국과 로마제국에 충성스러웠으며, 시당국은 로마에 적대적인 행동을 할 것으로 보이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기소하고자 하였습니다. 다행히 바울 일행은 도시를 빠져나와 피신했지만, 바울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당국에 의해 끌려가 고초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이 텍스트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동족에게서 고통을 받았다’는 표현(2,14)을 보면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도 이스라엘인임은 의심의 여지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집단은 이방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그들도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한데 ‘유대인들’은 그런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저들이 바울집단을 괴롭히고 당국에 고소한 이유였습니다.

바울과 그의 측근들은 발 빠르게 그 도시를 빠져나와 남쪽의 오래된 도시 아테네에 당도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동료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모진 당하였고 일부는 죽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그런 정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해서 다시 데살로니가로 들어가고자 했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바울의 측근인 디모데가 그 도시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의 협박과 회유에 고통당하고 있던 예수파 공동체가 전향할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디모데로부터 들은 정보는 공동체는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마도 디모데로부터 공동체의 동요에 관해 전해 들었던 모양입니다. 죽은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산자들은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습니다. 하여 그이들은 그 참혹함 속에서 기도합니다. ‘도대체 다시 오신다던 주님은 언제 오시나요!’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죽은 자들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알 수 없다고. 사람들이 ‘평안과 안전’을 되뇔 바로 그때라고 말입니다.

이런 답변을 이야기하는 바울의 묘사는, 앞서 보았듯이,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청각적인 판타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묘사는 하나의 패러디라는 점입니다.

과거 기원전 2세기 중반, 카이사르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고 데살로니가를 이 지역의 수도로 삼은 이후 이곳은 이 지방에서 가장 열렬히 로마를 지지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여 로마 황제가 다시 돌아올 때를 열망하면서 판타지처럼 묘사된 대중설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주’(퀴리오스)가 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복음’(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용어는 황제의 등극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이가 도시로 되돌아오는 것을 ‘파루시아’라고 불렀지요.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황제를 마중 나가 그이를 ‘영접’(아판테시스)합니다. 그때 나팔이 울려 퍼지고, 영접하는 도시 주민들은 길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황제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런 패러디를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 이야기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도시들은 도시로 들어오는 가도에 길을 따라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황제에 의해, 황제의 이름으로 죽임당한 이들의 시신들도 널려 있습니다. 그러니 이 패러디는 하나의 음울한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황제에 의해 죽임당한 이들이 황제를 영접한다는...

한데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묘사합니다. 음울함은 다시 축제장면으로 역전됩니다.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돌아올 때에 황제로 인해 죽임당한 이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신체훼손형벌로 처형된 이들의 몸이 회복되는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몸의 부활의 상상은 바로 이런 갈가리 찢긴 육체가 깨끗하게 회복된다는 바람과 맞물려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 더 주지할 것이 있습니다. 그때, 그 재림의 때를 바울은 사람들이 ‘평안! 안전!’(에이레네 카이 아스팔레이아)이라고 되뇔 바로 그때라고 합니다.

이것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선전 구호였습니다. 이 말이 도시 곳곳을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평화를 선사하는 이, 안전을 주는 이로 갈망하게 됩니다. 이 구호와 함께 사람들은 제국의 질서 속에 확고히 포섭되게 되는 것입니다. 한데 바로 그런 ‘평안, 안전’의 구호가 울려 퍼지는 바로 그 순간, 주의 재림이 있습니다. 그때는 황제로 인해 처철하게 난도질당한 이들의 육체가 되살아나고, 그로 인해 갖은 핍박을 받고 있는 이들이 하늘에 오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울은 바로 이 날을 이렇게 강변합니다. 그날, 황제에게 회유당하지 않고 견디는 이에게는 황제가 주는 안전, 평안과는 다른 안전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로마제국이 아닌 지구화된 자본의 제국이 세계의 평안과 안전을 준다는 메아리가 널리 울려 퍼지는 대도시 서울에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읽고 있습니다. 서울은 지구적 자본의 한 복판인 뉴욕, 런던, 도쿄, 그리고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주변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그 대도시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지구적 제국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자본의 질서에 거스르는 이들이 무수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본의 추방령에 내몰려 스스로를 살해한 이, 몸이 불이 되어 잿더미가 된 이, 공장의 혹독한 질서 속에서 살해당한 이 등등. 그런 주검들이 도시 가도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고, 그 죽음을 기리며 메시아를 갈망하는 이들이 혹독한 자본의 질서 속에서 겨우겨우 숨 쉬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지구적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아니 그 신적 존재를 영접하기 위해 사람들의 안전과 평안을 희생시키며 제도를 바꾸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에는 평안과 안전이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지구제국의 핵심 도시들보다도 더 열렬히 그 지본의 신봉자가 되고 그것을 신격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저주의 땅이 되었습니다. 해서 우리는 갈망합니다. 그 끝이 어디에 있나요?,라고. 바울의 「데살로니가전서」는 바로 이런 우리에게 견딤의 지혜를 일깨워줍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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