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국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도날드 트럼프 (Donald Trump)가 대통령 취임식을 할 날도 이제 열흘 남짓 밖엔 남지 않았다. 미국 대선 기간 내내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의 기독교 사회 윤리가 생각이 났다. 비록 나의 사회 윤리 관점이 니버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며 발전해 왔지만, 니버 만큼 미국 자유주의 신학 전통에서 사회, 정치 문제를 분석한 기독교 학자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니버의 입장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국제 사회에 가져올 불안감을 분석해 보고, 희망의 신학을 생각해 보고 싶다.


    니버가 쓴 많은 저서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 (Irony of American History)” 이다.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해, 니버는 비판적으로 미국의 자유주의 기독교 사상을 분석하며, 이 사상이 미국 정치와 경제,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지, 그리고 미국의 국제 사회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니버가 이 책을 쓴 1952년과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2017년의 미국은 별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트럼프는 니버가 생각하는 최악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니버는 미국이 강대국인 이유가, 기독교 칼빈주의의 입각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자본주의 체제 때문이라기 보다는, 광대한 영토와 자원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사회에 널리 퍼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윤리 사상은 브루조아 계층과 결합한 기독교 사상이지, 미국의 부를 설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이유는 아니다. 미국은 이미 자연적으로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이 자산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부가 모든 계층에 공평하게 분배되지는 않았다. 니버는 부의 불평등 만큼이나, 미국 사회에 팽배한 부에 대한 무비판적 시각, 또는 부를 바라보는 순수함 (innocence)이 도덕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국 사회는 정치적 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억압적인 정부나 거대 정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는 반면, 경제적 힘에 대해서는 소극적 입장을 취한다.


   이미 60여년전에 니버는 돈이 가지는 힘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정치 뿐만 아니라, 돈 또한 위험한 권력이며, 돈을 가진 자본계급이 정치권력까지 가질 때, 권력의 집중화로 인해 사회 불평등은 심화되고, 권력의 균형 있는 분배 또한 어려워 진다. 도날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니버가 우려한 것처럼 부의 권력이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무지한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 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부유해 진다는 진부한 믿음이 도날드 트럼프처럼, 어찌 보면 일반인이 생각하는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는지도 모른다.


   도날드 트럼프는 미국의 국제 정치에 대한 정책이 별로 없다. 아마도 정책의 부재는 지식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 같다. 니버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강대국이 된 미국이 힘의 정치가 판을 치는 국제 사회에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해야한다고 경고했다. 니버에 의하면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피해야할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고립주의와 제국주의가 그 것들이다. 고립주의는 자국의 이익만 생각하며, 미국이 국제 사회에 가지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고, 제국주의는 국제사회의 반발 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니버의 세계관은, 소련을 경계하며, 미국과 동맹국들이 핵전쟁의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7년은 니버의 세계와는 달리, 냉전체제를 벗어났지만, 냉전체제 보다 더 위험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얽히고설킨 국제 정치 판에서 트럼프의 등장은 위험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니버의 눈으로 본다면, 트럼프의 국제 정치는 보호주의를 표방한 미국 고립주의, 힘을 이용해 다른 나라를 억누르려는 제국주의 밖에 없다.

  
   트럼프의 미국은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상당한 위협을 줄 수 밖에 없다. 트럼프는 대선 운동 기간 내내 주한 미군 방위 분담금을 한국 정부가 더 부담해야 하고, 북핵에 대해서는 강경 대응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거 없이 하는 그의 주장이 대중적 지지를 얻는 이유는, 그것이 미국 대중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전세계 도처에 있는 미군과 미군부대가 세계 평화를 위한 자국의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통틀어 핵폭탄을 실제로 사용한 나라는 미국이 유일 한데도, 이란과 북한과 같은 핵을 계발하는 국가들과 IS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으로만 비춰지고 있다. 미군기지 연구의 전문가인 아메리칸 대학교 (America University)의 데이빗 바인 (David Vine) 교수에 의하면, 비록 미 국방성에서는 686개의 미군기지가 자국 밖에 분포하고 있다고 하지만, 공식, 비공식적으로 알려진 크고 작은 기지들과 군사작전들을 생각하면, 전 세계에 위치한 미군기지들은 1000여개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만도 공식적으로 밝혀진 기지는 83개이며, 주한 미군은 2009년 현재 2850명에 달한다 (Base Nation: How U.S. Military Bases Abroad Harm America and the World, 2015). 미군 기지들은 해외에 거주하는 5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의 삶과, 그 기지 주변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삶, 주둔국들의 정치, 경제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친다. 바인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골프장, 리조트 시설, 아파트 단지까지 갖춘, 외국에 위치한 하나의 미국 사회인, 미군 기지는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며, 오히려 미국의 국내 정치화 국제 정치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미국은 마초주의에 입각한 힘의 정치, 군사 정치로 국제 문제에 접근한 확률이 높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군을 생각하면, 국제 질서에 위협이 되는 힘은 실제로 미국이다. 니버는 이미 1952년에 미국이 세계 정치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했다.  


    트럼프의 등장은 오히려 미국의 사회 운동 세력을 규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에서도, 대선 후,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도 여러 연설을 통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힘은 시민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현재 트럼프의 내각은 위험할 정도로 부유한 백인 남성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양한 사회 운동 그룹들이 그 내각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 운동의 힘은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 여성 운동, 반전 운동, 소수 인종 인권 운동 등을 통해 다져진 힘이다. 유니온 신학교의 라인홀드 니버 석좌 교수였던,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 래리 라스무센 (Larry Rasmussen)은 이 힘을 “집단적 영성 (collective spirituality)”이라고 불렀다 (Earth-Honoring Faith: Religious Ethics in a New Key, 2013).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갈라 놓고, 군사주의가 자본을 보호하려고 들고, 자연이 인간에 종속되는 시대에, 집단적 영성은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생명이 서로에게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민중이 원래 가지고 있는 변화의 힘을 공동선을 위해 사용하도록 이끈다. 한국에서 불타오르는 수많은 촛불들은, 나에게 라스무센이 이야기한 집단적 영성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트럼프의 미국은 위험하다. 그러나 이것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나는 집단적 영성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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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9 : 묵시록의 영웅 트럼프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한국에서 요즘 많이 쓰는 ‘집단적 지성’이란 말을 접하면서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의심을 품은 적이 많지만 나 역시도 그에 대한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트럼프 대통령’이란 상상하기조차 싫었던 말을 듣게 되면서 깨졌을 때까지는 말이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예선전을 이기도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 나는 그 마저도 인정하기 싫어 뉴스 읽기를 거부했었다. 그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뉴스를 미국의 어떤 정신의 몰락과 내가 아는 묵시록의 한 페이지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의 충격도 그의 당선 소식이 준 충격과는 비길 수 없었다. 세상의 예측은 다 틀렸고, 미국의 경제와 정치의 내막을 가장 잘 알 것 같았던 뉴욕 타임스의 Paul Krugman도 자신이 미국을 잘 모르고 있었노라 고백을 하고 말았다. 지난 한국의 총선과 영국의 Brexit도 그랬다. 왜 빅데이터와 SNS의 개명된 시대에 그렇게 많은 돈과 기술을 투자하고도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그 개명된 시대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작동한 것일 수 있다. 어쨌거나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탄식하는 일은 모두에게 남겨진 몫이 되었다.  


    나는 미국의 선택을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없다는 종말론적인 심정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으니 정반대의 극단적인 수를 던져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문화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였다. 동성애 결혼 문제에 대한 법원의 진보적인 판결이 나오고 다수의 미국인이 이런 결정을 지지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다른 진보적인 이슈들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는 것으로 보였다. 오바마케어라 불리는 국가가 관리하는 의료보험 제도도 보수주의자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면서 진보적인 색체의 정치가 주류로 정착되는 듯했다. 그에 따라 보수권 내에서도 새로운 정치권의 스펙트럼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찾아나가려 한다는 느낌도 받았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그게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개표 직후부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 시골의 가난한 백인남성들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외되고 주류사회의 변화를 받아드릴 수 없었던 그들이 정치적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것이 반란이었다면 그 의미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는 과거 어느 대통령 후보보다도 더 많은 81%의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나온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그 뿌리가 근본주의에 있고, 근본주의는 19세기 미국의 전천년설의 묵시록을 수용한 사람들의 신앙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지난 웹진의 글에서 다룬바 있다. 그들의 신앙이 정치화 된 시기를 1970년대 말이라고 흔히 얘기하는데, 나의 입장은 그 현상을 미국역사 전체에서 찾아야 하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한 용어로 묵시록이란 개념을 여기서 쓰고 있다. 70년대 말 복음주의 신앙의 정치운동화가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성공하게 된 이론적 배경에는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과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만남이 있었다. Frederick Hayak에서 Milton Friedman까지 ‘자유’라는 개념을 화두로 삼아 세상의 가치를 자본주의의 가치로 바꿀 꿈을 꾸고 있던 신자유주의에겐 유권자가 필요했고, 정치적 플랫폼이 필요했던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인들에게 ‘개인의 자유’만큼 매력적인 용어는 없었다. (60년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 이후 비대해진 국가권력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암묵적 적그리스도로 보았던 근본주의 신앙과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자본의 자유를 추구하던 세력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신앙운동이 바로 미국의 뉴라이트(New Christian Right)운동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들의 타협적인 도덕관에 맛서는 순혈의 ‘도덕적 다수’라 불렀다. 그들의 세계관은 미국의 묵시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몰락은 그 세계관의 토대였고, 세상은 적군과 우군으로 구분되었고, 적을 대하는 자세는 언제나 폭력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세계관은 청교도 이후 미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으로, 현대 미국의 종교와 정치는 이 세계관이 신자유주의 세계관과 만나 변신한 형태, 곧 70년대 후반 근본주의 개신교의 ‘도덕적 다수’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등장해서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는 비극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 없이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성공한 이데올로기가 늘 그렇듯이,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그 테두리의 밖은 상상도 하기 힘들게 되었다. 성공한 이데올로기는 일상과 접목된 보편의 철학이 된다. 철학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반민주적인 철학이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자본가와 기업인에 의한 절대적 지배를 꿈꾸고 승자와 패자로 사람을 구분하는 도박의 철학이다. 그 철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상을 움직이는 현실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현실을 이길 수 있는 건 비판이 아니고 혁명뿐이다. 그리고 모든 혁명은 주된 텍스트는 묵시록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그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선택한 신자유주의 철학에 의해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판의 대상이 될 신자유주의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미래를 모르는, 아니 미래가 없는 묵시록의 혁명이 아니었을까.


    좀 더 현실 정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트럼프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한 이유는 진보적인 이슈들을 수용하는 사회분위기에 저항하는 면도 있고,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철저하게 밖으로 내몰린 현실에 대한 왜곡된 표현이라는 면도 있다고 해야 하겠다. 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트럼프라는 인물에게서 찾아야 한다. 실제 트럼프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한 유권자들은 많지 않았다. 소외된 백인들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분노의 정치를 공공연히 말하는 트럼프에게서 그들의 아바타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도 없었고, 전통적인 도덕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았고,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었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았던 세속의 인물인 트럼프를 보수 기독교인들이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묵시록이란 주제에 맞는 간명한 설명 하나가 가능하다. 그들은 트럼프를 묵시록의 영웅으로 본 것이다.  


    트럼프의 세계관은 묵시록에 기초한 것이다. 세속화된 그의 묵시록에서 종교적인 언어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은 없었지만, 세상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근본주의 묵시록의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세상을 선과 악이란 이분법으로 이해했고, 미국이라는 선과 테러라는 악의 두 축의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싫어했다. 세상의 선과 악이 너무나 분명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설명은 과거의 정치, 행동이 아닌 말의 정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선을 실천하기 위해서 폭력은 불가피할 수도 있었다. 세상은 무질서와 테러의 위험 앞에서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고, 지금이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그의 선언에서 진리와 예언을 읽은 사람은 의뢰로 많았다.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웃어넘길 수 없는 현재의 시간에 대한 진단이고 묵시록의 예언이었다.  


    <Waiting for Armageddon>은 10년 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끝낼 아마겟돈 전쟁이 곧 일어난다는 묵시록을 믿는 약 5천만 명 정도라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을 주제로 하고 있다 (Youtube에서 볼 수 있음). 비교적 편견 없이 그들의 신앙과 입장을 다룬 영화로, 묵시록의 신앙이 개인적인 믿음을 넘어, 곧 파괴되어 없어질 세상에 대한 인식이 정치화되어버린 현실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의 현상으로, 선택된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한 순간에 하늘로 사라지는 휴거를 믿는다. 그 순간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환란을 겪게 되고, 예루살렘에서 재림예수가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최후의 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 천년왕국을 일으킬 것으로 믿는다. 이 묵시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를 현실의 일부로 이해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장르가 미국 영화의 대표적 장르로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묵시록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가 오천만 명이 되고, 그들이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세한다는 게 미국의 현실이다. 


    트럼프가 선과 악을 넘어선 니체적인 영웅이라면 무리가 있을까. 자신의 삶이 전통적인 종교의 선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는지 그에게 악이란 개념도 종교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윤리를 넘어서 묵시록의 결단을 요구하면서 대통령이 됐다. 동성애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전통적인 도덕관이나 가치관의 회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웃에 담을 쌓고자 했고, 불법채류자들에게 가혹해져야 한다고 했다. 모든 국가는 한국은 한국의 문제이고 위대한 미국이 망하기 직전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고, 완전히 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는 협박도 있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립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현대 정치의 공식은 그에게 불필요했다. 암울한 공포의 디스토피아적인 비전만으로도 대통령이 되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은 묵시록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묵시록의 영웅은 재림예수일 필요도 없고 적그리스도일 필요도 없다. 세상의 몰락을 상기시켜주고 그에 합당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니면 몰락의 사실을 자신의 말과 제스처로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런 영웅이 되기 위해 트럼프는 종교적일 필요도 없었고,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신학의 본질은 이미 미국적인 것으로 미국의 정신 속에 녹아져 있었다.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는 21세기에 많지 않다. 트럼프는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묵시록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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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초월하는 ‘크리스토파시즘’: 미국 대선을 보면서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인 질라 아이젠스타인(Zillah Eisenstein)은 2016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6년 미국의 대통령 경합은 여성혐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편협한 사람과 제국적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벌어진 지옥으로부터의 선거였다.” 그 ‘지옥으로부터의 선거’에서 미국의 선거인단투표를 통해 승리한 사람은 백인우월주의자이며 여성혐오적이고 반이민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였고, 일반투표에서 이긴 사람은 ‘제국적 페미니스트’인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선거인단투표에서 클린턴이 졌다고 제국건설을 지지하는 ‘제국적 페미니즘’[각주:1]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횡포가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미국을 비판적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더욱 분명해 진 것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경험해 온 소수인종들, 이민자들, 무슬림들, 성소수자들, 저임금 노동자들, 장애인들, 여성들의 삶이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것이다. 벌써 학교를 비롯한 미국내 이곳 저곳에서 스스럼없이 백인우월주의와 극단주의를 표출하면서 유색인종들과 성소수자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이번 미국의 대통령선거에 관해서 많은 분석이 나왔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다양한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보태질 것이다. 예를 들어, 힐러리 클린턴이 여러가지 정치적 불신을 일으켰지만 궁극적으로 당선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젠더와 관련된 분석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성추행과 여성혐오 발언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을 보면 젠더라는 축으로만 이번 미대선의 결과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수 있다. 트럼프의 “아메리카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슬로건이 백인들을 집결 시키는데 성공했고, 트럼프의 ‘아메리카’는 백인들만의 미국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인여성들에겐 백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따른다. 또한, 위싱턴의 집권세력에 의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져 왔던 저소득층 백인들이 월가의 금권정치와 빈부격차의 증가를 비판한 트럼프를 지지했기에 선거에서 이길수 있었다고 하면서 ‘계급’과 관련시키는 분석도 나오고 있지만, 트럼프를 지지한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고학력자와 고소득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에 속하는 백인 남성들과 여성들이라는 점은 ‘계급’으로만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분석의 한계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자본주의, 성차별과 인종차별주의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듯이, ‘트럼프 현상’을 인종이던, 계급이던, 젠더이던 한 가지 축으로만 설명하려는 분석은 미흡할 수 밖에 없다. 


    이번 미 대선과 관련해서 실망스럽지만 놀랍지 않은 사항들 중 하나는 트럼프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이 ‘거듭난’, 혹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백인들이었다는 것이다. 백인들 4명당 1명이 복음주의계열 기독교인들이고, 선거 출구 조사에 따르면 78%-81%의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백인 남성과 여성포함)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한다.[각주:2] 실망스럽지만 그닥 놀랍지도 않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물론 왜 대다수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발언과 행동을 보여온 트럼프를 선택했는지에 관한 분석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이런한 정치적 선택이 놀랍지 않은 것은 지난 몇 십년동안 사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보여온 정치적 편향과 행태 때문일 것이다. 또한, 비록 이번에 투표를 한 소수인종들의 대다수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는 보고가 있지만, 한국계와 중국계 미국인들 중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백인 복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이렇게 지속되는 복음주의자들의 선거 양식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복음주의’ 기독교가 보수적 정치의 동반자임을 더이상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내의 분열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그저 형태만 민주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는 미국의 ‘부드러운 파시즘’과 독일 나찌의 파시즘을 비교하면서,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 (Dorothee Soelle)는 미국의 파시즘을 지지하는 우파기독교를 ‘크리스토파시즘’ (Christofascism)이라고 비판한다.[각주:3] 죌레가 미국의 ‘크리스토파시즘’을 비판하는 상황은 1980년대 레이건 정권하의 미국이지만, 트럼프의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과 결과에서 보여진 ‘크리스토파시즘’의 영향 및 더 이상은 ‘부드러운 파시스트’고 할 수 없는 새정권의 핵심이 될 인물들을 보면 죌레의 비판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각주:4] 죌레에 의하면, ‘크리스토파시즘’은 국가주의, 군사주의, 가족이데올로기,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심등의 이데올로기들이 우파세력에 의해 기독교와 혼합되어진 수단화된 종교이다.[각주:5] 죌레는 기독교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도 이런 ‘크리스토파시즘’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죌레는 ‘크리스토파시즘’의 특징은 구약성서, 즉 유대교성서에 담긴 기독교의 모든 뿌리들을 잘라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의와 하느님이 도우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죄책감이나 고난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크리스토파시즘’에서 ‘희망’은 완전히 개별화되어지고, 개인의 성공으로 축소되어진다. 억압된 사람들과 연대했던 예수는 ‘크리스토파시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로 남는다. 그 대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와 “아메리카를 사랑합니다”라는 구호가 구별하기 어렵게 외쳐질 뿐이라고 한다.[각주:6]  


    한국에서도 이러한 ‘크리스토파시즘’의 현상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백인이 아니면서도 ‘백인하나님’, ‘백인예수’를 ‘주’로 선포하면서 우파정치인들과 그들의 정책을 지지해온 한국의 보수 개신교회의 모습에서 죌레가 비판한 ‘크리스토파시즘’이 보인다. 트럼프를 지지한 미국의 ‘크리스토파시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한국의 ‘크리스토파시즘’의 겹쳐지는 모습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지는데, 성차별과 여성혐오 조장, 사회적 약자 멸시,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 이슬라모포비아, 기독교 우월주의, 미 군사주의 지지등이 그러하다. 국경을 넘나드는 ‘크리스토파시즘’의 세력은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그렇다면, 그런 ‘크리스토파시즘’에 대한 저항도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뿌리가 잘린 기독교와 ‘금관의 예수’를 숭배하고, 가해자만을 옹호하면서 ‘값싼 은혜’를 선포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내칠 수 있는 ‘거룩한 분노’가 그런 저항의 동력이 될수 있을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s://www.thecairoreview.com/essays/hillary-clintons-imperial-feminism/ [본문으로]
  2. 물론 이런 통계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분석도 있다.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no-the-majority-of-american-evangelicals-did-not-vote-for-trump. [본문으로]
  3. Dorothee Soelle, The Window of Vulnerability: A Political Spirituali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133-141. 이 글에서 “Christofacism”은 영어발음을 그대로 옮긴 ‘크리스토파시즘’으로 적고 있다. [본문으로]
  4. 단적인 예로, 트럼프정권의 부통령이 될 마이크 펜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기독교 우월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https://theintercept.com/2016/11/15/mike-pence-will-be-the-most-powerful-christian-supremacist-in-us-history/. [본문으로]
  5. Ibid., 138-140.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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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권력에 대해

: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생각하며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 ( Reinhold Niebuhr)는 중앙으로 집중된 힘은 쉽게 타락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치 권력은 다양한 이익 집단들 사이에서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사회는 윤리적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정치적 이익 집단들이 사용하는 힘을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버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소련의 중앙통제식 공산주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최소한 삼권분립의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되며, 대통령이나 어느 이익집단이 정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도록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미국의 실용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고용주들과 임금 협상, 자신들의 권리 등을 논의할 수 있는 힘을 가능하게 하였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다. 


    이에 반해, 니버에 의하면, 소련의 공산주의는, 정치와 경제 권력이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고, 이 힘을 견제할 제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 남용이 쉽게 이루어진다. 중앙정부가 권력을 남용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집단은 두말 할 것 없이 일반 민중들이다. 그러므로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 현실주의 (Christian Realism)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회에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익 집단 간의 힘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강대국들 또는 거대 사회집단들 사이의 힘의 균형보다는 민중들이 힘을 되찾아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해방신학자들과 제3세계 중심으로 국제 정치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탈식민주의 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중앙권력형 정치구조가 억압과 고통을 재생산하는 반민주적이란 니버의 주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덧붙여,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약자의 폭력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니버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현대 사회에서도 수용하기 힘든 급진적인 생각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 곳곳의 정치적 사건들을 보면서, 20세기 중반의 기독교 윤리학자 니버를 떠올리게 되었다. 니버가 활동하던 1930~50년대는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세계 대공항과 두번의 세계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의 죄성을 뼈져리게 느끼고, 노동 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한 당시의 노동자들과 일반 민중들의 힘은, 고도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21세기 노동자들와 민중의 힘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날드 트럼프가 주장하는대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면, 자본가들과 정치 엘리트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노동자들와 일반 시민들에게 분산시켜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생각하는 위대한 미국은 라인홀드 니버가 끔찍해한 자본가들을 위한 미국, 책임을 회피하는 미국 고립주의, 그리고 미국 패권주의다.

  
   트럼프가 구상하는 미국의 모습도 문제지만, 현재 한국에서 밝혀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는 니버의 입장에서 보면 최악이다. 니버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정치 권력이 한 개인과 정당에 집중되는 것은 견제하고 두려워 하면서, ‘자본’은 정치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이 아이러니라고 보았다. 자본은 정치 권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권력형 비리는 자신들이 가진 정치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재하고, 그 부를 사용하여 다시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전형적인 부정부패의 모습을 띄고 있다. 한국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반 민중들의 시국 선언과 광화문 광장을 밝히는 시민들의 촛불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유화한 권력이 실제로는 한국 민중들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지금의 대중 시위는 니버가 이야기 한 힘의 균형이 아니라, 민중들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였던 힘을 되찾아 와서, 새로운 정치 구조를 만들어 가려는 혁명의 몸짓이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그가 생각한 인간의 죄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 전통에서, 니버는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자기 이익 추구는 결코 윤리적 중립 상태로 존재할 수 가 없다. 이익 추구가 극대화 되면, 인간은 쉽게 이기적이 되며,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은 도덕적 양심이 있어서, 자비심, 동정심, 이해심 등의 감정을 통해,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회 집단이나 국가는 집단화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이타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현실 가능한 방법은 힘의 균형을 통하여, 한 집단 또는 한 국가가 이익 추구를 위하여 다른 집단이나 다른 국가를 억압하거나 폭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니버의 이러한 생각은 많은 여성 신학자들과 사회 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우선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 (특히 여성)은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돌봄과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이다. 또한 이런 관계성을 통해서 삶의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이 이기적이며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주장은 인간이란 존재 전체를 규정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한 집단 또는 국가가 그 집단과 국가 전체 구성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국가의 이익이 국가 구성원들의 이익과 동일시 되는 것은 위험한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국가의 이익은 그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 생각들—비록 그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들의 삶의 태도, 인간에 대한 이해, 끊임 없는 자기 반성, 윤리적 기준들이 절대적으로 간과될 수 없다. 어떻게 주가 조작과 유령회사를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이 이타심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비록 그 사람이 일요일 마다 교회 주차장에서 주차요원으로 봉사를 했다고 해도 말이다. 일생을 공주처럼 떠받들여 살면서, 남에게 섬김만을 받고 그 섬김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봉사와 희생정신을 찾고,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소외된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아무리 국가 구조가 삼권 분립과 권력의 분산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지도자들의 도덕성이 일반 국민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 한다면, 미국이든 한국이든 현재의 대통령 중심제도는, 국가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 밖에 없다. 즉 국가나 특정 집단이 집단화된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공동선을 위해 집단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집단이나 국가의 지도자들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타집단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니버는 종교가 정치를 해석하려고 할 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치적 혼란과 윤리적 혼란을 일으킨다고 했다. 정치적 사건을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할 때,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해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미국 패권주의 신학이 등장하게 되고,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약자를 억압하거나, 정치인들을 무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종교가 정치 세력과 떨어져서, 비판적 관찰자의 입장을 갖는 것이 세상의 고통을 훨씬 더 덜어주는 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설명하려는 지도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민중들은 올바른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세계 민중들은 도덕적으로 흠없는 정치자들을 원하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줄 수 있는 지도자를 현실적으로 기대할 것이다.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는 것, 자신과 측근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권력을 쓰지 않는 것은 도덕성이라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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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기회론'이라는 망상



 

백승덕*


 

   20세기 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는 생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이 우리를 온통 휩쓸고 있다. 나는 바로 여기서 새로운 문명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미국은 근대성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때가 1930년대였으니 미국은 100년 가까이 근대성과 동일시되어왔다. 미소 간에 체제경쟁을 하던 냉전 중에도 미국은 군사력이나 생산력 등 어느 부분에서도 소련에 대해 항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근대화가 곧 미국화를 의미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대학 신입생끼리 모여서 자기 고향에 햄버거 가게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도시수준을 따지던 때가 있었다. 미국식 생활은 근대성의 지표였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계속 나아가야 할 목표였다. 아이들이 미군 지프차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기브 미 초코렛’을 외치던 땅에서 보기에 미국은 꿈의 나라였다.  


아메리카니즘의 위기


   그랬던 아메리카니즘이 추락하고 있다. 냉전이 끝나고 미국의 세기가 지속될 거란 기대가 금방 무색해졌다. 2008년 금융위기는 결정적이었다. 미국이 그간 누려온 풍요가 사실은 가계부채 위에 쌓은 빚잔치였다는 사실이 준 충격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미국의 대응은 굼떴다. 세계 온갖 군데에 손을 뻗쳤던 터라 발이 묶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에 미군은 중동에서 계속 죽어나갔고, 이어서 IS처럼 이슬람 극단주의가 세력화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미국은 어디에서건 손을 대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마이너스 손’이 돼버렸다.  

   여태껏 미국이 근대성의 상징으로 자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래도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 때문이었다. 나치독일을 비롯한 파시즘 세력에 대항해서 싸웠던 역사가 부여해준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트럼프 돌풍’으로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공화당 유력 대선후보가 마치 히틀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자극적인 표현으로 이민자들과 무슬림 추방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라 반파시즘은 더 이상 미국의 상징이 되기 어려울 지경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해서 이민자들을 막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는 인물을 개그맨이 아니라 대선후보라니.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유력 대선후보로 떠올랐단 사실은 미국을 세계에서 근대성의 상징으로 유지하기 위해 치루는 비용을 미국인들이 얼마나 버거워하는지 보여준다. 트럼프는 구체적인 정책을 이야기할 땐 오락가락하지만 한 가지는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미국 국내 문제, 정확히 말하면 돈 버는 것 말고 다른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IS가 중동에서 뭔 짓을 하든, 북한이 자기 땅에서 핵실험을 하든 개의치 않겠다고 말한다. 동맹국들 역시 방위비를 더 내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거듭 선언하고 있다.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경제중심적인 관점으로 일관하는 것인데, 이런 트럼프를 미국인들 중 절반가량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한국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이런 사정을 ‘축복’으로 환영하는 모양이다. 한국발 트럼프 기회론에는 인터넷 진보언론 <프레시안>이 앞장서고 있다. <프레시안>은 참여정부에서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문정인의 인터뷰를 통해 트럼프 당선이 한국의 자주국방에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트럼프가 주한 미군 급료까지 한국에 부담하게 만들면 한국 여론이 주한미군 철수와 전시작전권 회수에 동의할 거란 이야기다.


한국 진보진영에서 부는 트럼프 기회론


   이러한 주장은 문정인만의 것이 아니다. 이 매체에 실린 다른 칼럼이나 기사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역사학자 이병한 역시 고정 칼럼을 통해 트럼프 당선을 핑크빛으로 그려냈다. 트럼프가 억만장자이기 때문에 군산복합체 등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호전적 정책에서 벗어날 거란 이야기였다. 이병한은 심지어 트럼프가 서구의 근대 민주주의가 지닌 신화를 무너뜨려 유라시아의 옛 문명들을 회생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가 염두에 둔 유라시아의 옛 문명들 속에는 한국의 지분도 들어있을 것이다.

   분수령은 지난 5월 17일이었다. 이날 트럼프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김정은과 대화할 것이며 그와 대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 알려지자 그에 대한 장밋빛 기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김정은과 대화에 나설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남한이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해서 남북대화를 미루고만 있을 거냐는 이야기였다. 요컨대 이 기회를 빌어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주체성을 키우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일리가 있을 만큼 한국은 안보와 관련해 미국의 힘에 의존해왔다. 주한미국대사가 피습 당하자 한복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서 부채춤을 추면서 쾌유를 기원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최근 <미디어오늘>을 통해 보도된 사실은 충격적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제주해군기지로 보내는 철근 400톤이 배 안에 실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 상당수가 선박 복원력을 약화시키는 위치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과적은 세월호가 침몰하게 된 주요원인으로 꼽혀왔는데, 배에 무리해서 실은 것이 바로 제주해군기지 건설자재였던 것이다. 일부 선원들이 승선을 기피할 정도로 안전에 문제가 있었지만 무리하게 출항한 이유 역시 기지건설 공사기일을 맞추기 위해서였단 이야기도 나온다. 제주해군기지 공사일정은 미국과 약속한 것이기에 시민들의 안전에 우선해서 고려된 것이다.

   조금 더 넓게 보더라도, 그간 미국이 주도한 국제법 질서는 국가 간 계약에 기반을 둔 권력을 해당국가의 사회에 각인시키는 과정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미, 미-일 상호방위조약 등의 계약을 가장 상위에 둔 채로 사회질서가 자리 잡았다. 2005년에 평택으로 미군기지가 이전될 당시에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한국군까지 출동시켰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에 UN 안보리 결의도 없었지만 한국 정부는 한미동맹을 이유로 파병했다. 

   그러니 미국은 그간 사실상 계약을 매개로 한 패권을 휘둘러온 셈이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 지역에 해군기지를 원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공연한 비밀이다. 


중국화하는 동아시아라는 문제


   일각에서는 중화질서를 새로운 대안으로서 호출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동아시아 근대성,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중국화한 동아시아가 미국이 주도한 국제법 질서를 대체할 대안이라는 것이다. 다시 <프레시안>으로 가보자. 이 매체는 오랫동안 칼럼을 써온 역사학자 김기협을 초청하여 기획강연을 열었는데, 김기협은 이 자리에서 중국의 군사력이 서구와 달리 “주변에 있던 지역들을 안정시키는 방어적 성격”이라고 구분 지었다. 게다가 중국의 조공체제가 “약한 국가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하나의 질서를 위해 공헌하자는 식의 유인책”이라고 긍정했다. 이처럼 중국화한 동아시아를 긍정하는 그의 입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와 '대안으로서 동아시아 전통의 가치'에 관한 책을 소개하는 연재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으로 표상된 근대성이 몰락하는 이 시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핑크빛 기대는 두 가지로 수렴된다. 하나는 주체성 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화한 동아시아의 부상이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현실을 돌아보면 핑크빛 기대는 어김없이 깨진다. 최근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보이고 있는 행태를 보면 그렇다.

   최근 중국은 남중국해 남사군도에 있는 암초들을 매립하여 인공섬을 만들고 있다.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무리수다. 이 지역은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이 오래 전부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서 갈등이 이어져온 곳이다. 중국은 인공섬에 활주로 등 군사시설을 배치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실하게 하려고 나선 모양새다. 중국의 군사력이 “주변에 있던 지역들을 안정시키는 방어적 성격”이라던 김기협의 설명이 무색해지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논리는 더욱 기가 막힌다. <주간동아>(2015.11.16)의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작년 11월 한 연설에서 “남중국해 도서들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영토였다”며 “남중국해에서 영토 주권과 해상에서의 정당한 권익을 수호하는 것은 중국 정부가 짊어진 책무”라고 말했다. 명나라 영락제 때 해양원정에 나선 정화의 항해 때부터 이 바다가 중국의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이 기사는 “영해나 EEZ 같은 국제법 용어 대신 ‘정당한 권익’ 같은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섬과 암초의 구분이나 육지로부터의 거리처럼 국제법상의 구체적인 논의를 모두 뛰어넘은 채로 바다에 U자형 선을 긋고 영유권을 주장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중국화한 동아시아가 보여주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말인가? 김기협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조공체제라는 것도 사실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예식을 반복함으로써 유지하는 ‘소극적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적 천하질서에서 ‘평정(平定)’이란 말은 작은 것이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억눌러서 유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했다. 높은 것은 높은 자리에, 낮은 것은 낮은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유교적 평화질서였다. 그러니 지금의 중국이 보이는 행태가 왜곡되었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계약에 기반을 둔 권력과 전통을 등에 업은 패권 사이에서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메리카니즘 몰락 이후에 현실을 핑크빛으로만 보기가 어렵다. 한국이 더 많은 분담금을 내고 주한미군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하던 방식으로 서해에서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중국화한 동아시아에서 조공체제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선택지는 북한의 길이다. 지난 1월 제4차 핵실험 직후 조선중앙TV는 특별 중대 발표를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엄혹한 현실은 자기 운명은 오직 자기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철의 진리를 다시금 명백히 실증해주고 있다. 사납게 달려드는 승냥이 무리 앞에서 사냥총을 내려놓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이다.” 한국이 주한미군을 떠나보낸 뒤에 오로지 자국의 힘으로만 중국과 상대하려면 이러한 자세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한 자세를 취한 사회가 지금의 북한처럼 경직되지 않을 수 있단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주체성을 위한 고난의 행군 중에는 자국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시민들의 안전을 볼모로 삼는 행태 또한 비일비재했다는 점을 북한의 역사가 보여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메리카니즘의 몰락을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한국 진보진영 일각에서 불고 있는 트럼프 기회론 역시 위험한 망상이다. 우리는 지금 계약에 기반을 둔 권력이 몰락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등에 업은 패권이 발흥하는 걸 상찬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모색해야만 하는 때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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