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변화시키는 기도



류헌조

(GTU Ph.D. Candidate)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했나요.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기독교인들이 즐겨부르는 복음성가의 1절 가사입니다. 힘들고 지쳐서 주저 앉고 싶을 때, 희망이 보이지 않아 낙심과 염려가 몰려 올 때,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리고 이 노래의 가사가 호소하는 것처럼, 기도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고 다시금 힘을 내는 경험을 합니다. 기도에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된 기도, 간절한 기도, 믿음의 기도는 실제로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듯 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기도(prayer)와 명상(meditation)을 대단히 중요하고 필수적인 수행방법의 하나로 생각하고 이를 수련하는 데 힘써 왔습니다. 기도를 빼고서는 거의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기독교에서도 기도는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기도는 자주 호흡에 비유되곤 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은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조직신학자이자 영성신학자인 사이몬 찬(Simon Chan)에 의하면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성숙을 위해 실천해야 할 수덕(修德)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도는 정말로 효과(effect)가 있는 것일까요?

   기도의 효과에 대하여 상반되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한 쪽 입장의 맨 끝에는 기도하면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기고 기도를 마치 만병통치약, 만능열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기도를 더 오랫동안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한편, 이러한 입장의 반대쪽 끝에는 기도 무용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기도는 종교가 사람들을 현혹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민중의 아편”이요, 인간이 “심리적 투사”로 만들어낸 신에게 말하는 자기 독백입니다. 그리하여 기도는 니체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박탈하고 결국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합니다. 결국,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기도는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기도의 효과에 대한 이 두 가지 극단적 입장 사이에는 기도의 효과를 긍정하고 실제로 경험하면서도 그 효과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여성신학자인 도로테 죌레(Dorothee Sӧlle)는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반면,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반 디빅(Abraham Van De Beek)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일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해방신학자들처럼 기도와 사회정의의 불가분리성을 크게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최근의 영성신학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기도를 통해 한 개인의 내면을 성찰하고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데 집중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들 모두의 주장은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도에 관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들을 정당하게 짚어주고 있으며, 서로 뗄 수 없는 긴밀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신학자들 사이에는 참된 기도는 분명히 효과가 있고, 제대로 기도하면 무엇인가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기본적인 믿음, 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기도는 특별히, 인간의 내면(정신 또는 마음)에 어떤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인간의 마음만큼 변화무쌍하고 통제하기 힘들며 또한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 그리고 창의성을 가진 것도 드물 것입니다. 한 인간의 마음은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은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가득 찬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불의와 폭력이 가능한 죽음의 장소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인간의 마음은 죄와 고통이 발생하는 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선(善)으로 지향(志向)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많은 종교들, 특히 기독교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기 위한 도구로서 기도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가르쳐 왔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니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절)

   한 인간의 내면, 한 인간의 마음(정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성서, 특히 히브리 전통에서 마음은 인간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한 개인이 어떠한 일을 결정하는 중심 기관이며 또한 도덕적인 판단이나 선택을 하는 곳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유명한 독일의 개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목사님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켜 “내적 삶의 모든 심층들”이라고 말합니다. 즉, 마음은 한 인간의 중심이요 핵심이며 중추(中樞)입니다. 오늘날 뇌과학(brain science) 또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연구자들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뇌의 활동에서 찾으려고 시도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정신을 뇌세포들의 물리적 메카니즘으로 단순하게 환원시키거나 축소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더불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뇌(brain)라는 용어와 뇌의 활동을 통해 창발적으로(emergently) 나타나는 인간의 의식/정신을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의식/정신)은 뇌세포들의 물리적 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종교를 생물학적 관점, 특히 인간의 뇌의 활동과 관련지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신경과학자(neuroscientist)이자 신경신학자(neuro-theologian)인 유진 다퀼리(Eugene d’Aquili)와 안드류 뉴버그(Andrew Newberg)는 Why God Won’t Go Away (한국어 책 제목은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라는 책에서 자신들이 시도했던 획기적인 실험과 그로 인해 도출된 흥미로운 결과들을 소개합니다. 티벳불교의 승려들이 기도(명상)을 시작합니다. 기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혈관에 방사성물질을 주입한 후 SPECT(Single Photon Emission Computed Tomography, 단일광자방출단층촬영)을 위해 제작한 특수한 카메라로 승려들의 뇌를 촬영합니다. 카메라의 촬영에 의하면, 기도가 절정에 이르기 전에 이들의 뇌는 아주 활성화되어 있었고 전반적으로 빨간색과 노란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촬영영상은 뇌의 색깔을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나타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가요? 그것은 OAA(Orientation Association Area, 물리적 공간 안에서 방향과 거리, 각도 등을 인식하고 안전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뇌의 영역)의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유진과 뉴버그는 프란시스코회 소속의 수녀들을 상대로도 같은 실험을 하였고 비슷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실험에 참가한 피실험자들은 기도의 절정에 이르러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할 만큼 자신들이 어떤 무한한 실재와의 연합을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티벳승려들의 경우 온 우주 만물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고 프란시스코회 수녀들은 하나님과 말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요약하면, 기도와 명상은 사람들의 의식에 분명히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고 그것이 실험을 통해 관측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실험을 했다고 해서 기도의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자신있게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실험은 일정 그룹의 아주 훈련된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실험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수준의 사람들이 하는 기도나 다른 종류의 기도에 대해서 그 결과를 동일하게 적용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촬영영상을 통해 뇌의 활동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서 그것이 한 사람의 생각이나 인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 영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실험의 결과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God)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실험을 통해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은 기도와 명상으로 지칭되는 이 특정한 종교적 활동이 인간의 뇌, 그리고 뇌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마음/정신에, 부인할 수 없는 어떤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효과에 대한 경험적인 증거(empirical evidence)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퀼리와 뉴버그는 이후 The Mystical Mind 라는 책에서 인간의 뇌는 일곱가지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연산자(operators)를 가지고 있고, 이 중 이항 연산자(the binary operator)는 뇌가 자신이 경험하는 사물(사건)들을 두 가지 대조적인 그룹으로 범주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뇌는 이 이항 연산자의 기능에 따라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선과 악, 참된 것과 나쁜 것, 정의와 불의, 행복과 슬픔 등으로 분류하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처한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현실을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악(evil)의 신화(myth)가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뇌는 이항 연산의 기능을 통하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이해하기 힘든 일들 -- 선한 사람에게 왜 악한 일이 일어나고, 악한 사람에게 왜 좋은 일이 일어나는지와 같은 – 을 신화의 형태로 바꾸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악은 이제 실제적인 것(as real)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악의 신화가 작동하게 되면 인간의 뇌는 불안(anxiety)을 느끼게 되고 이 불안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특히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 불안을 해소하려 할 때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죄와 기도 그리고 종교적 신비에 대한 논의의 타당성’을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George Tsakiridis는 최근 이 주제와 관련하여 Evagrius Ponticus and Cognitive Science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뇌가 느끼는 불안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이 부작용으로부터 죄(sin)가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이 죄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방법이 바로 기도와 명상입니다. George Tsakiridis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명한 심리학자 Kenneth Pargament의 임상실험결과를 예로 들며 “기도를 동반하는 영적 치료(spiritual therapy)가 영적인 면을 배제한 심리치료보다 훨씬 더 탁월한 치료효과를 보여준다”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기도는 오랜 세월 동안 종교인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왔습니다. 아마도 신앙인들의 삶에서 기도를 제거한다는 것은 한 그루의 나무를 뿌리부터 뽑아내버리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새로운 희망, 용기, 위로, 지혜와 평온함을 경험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정결하게 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기도는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한 인간의 삶이 보다 더 건강하고 가치 있게 되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통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게 됩니다. 기도의 효과는 경험으로 느껴지는 실재(reality)입니다. 오늘날 인지과학과 심리치료의 발전은 이러한 기도의 효과를 예전보다 더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의 작동 메카니즘, 기도의 유효성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과학으로 완벽히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기도의 효과가 실재가 아니라거나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학자인 저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초월적인 종교 체험은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얻게 되는 이론들보다 때때로 삶의 궁극적 실재를 더욱 더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계속적인 과학 연구의 발전을 통해 이 종교적 신비가 더욱 효과적이고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신학과 과학(또는 종교와 과학)이 인간의 마음을 더 아름답고 선하게 하는데 협력하고 그리하여 한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인류의 삶과 나아가 온 세상이 더욱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이 가득한 곳으로 바뀌어 가도록 함께 힘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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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문제에 대한 신학과 과학의 대화



류헌조

(GTU Ph.D. Candidate)


 

   벌써 3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었지요.)시절 국내의 모 출판사에서 출판한 학습그림과학이라는 책을 읽고 충격과 흥분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은 당시 앞으로 21세기가 되면 인류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재미있는 만화를 곁들여 아주 사실감 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미래에는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화상으로 전화를 할 것이고, 서울과 부산을 단 2시간 만에 주파하는 고속열차가 나타날 것이며,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여 음식을 만들고 집안 청소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꿈만 같던 상상 속의 이야기들이 이제 현실이 되었고, 사람들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니 앞으로의 미래는 또 어떻게 바뀌어갈 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인간은 더 편안하며 더 안락한 삶을 추구합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류의 삶이 계속해서 발전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발전합니다. 삶은 다채로워지고 풍요로워지며 더욱 편리해집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발전이라는 밝은 면의 또 다른 편에서는 직시하기 싫은 어두운 역사가 계속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름하여 “악(evil)의 흑역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정말로 나쁜 사람들입니다. (때때로 이렇게 나쁜 사람들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습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배웠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히려 법을 준수하고 양심을 따라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법을 무시하고 거짓과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이 자자손손 부를 축적하며 건강하게 사는 예가 많습니다. 살다 보면 겪지 않고 싶은 일들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수가 없구나”하면서 그래도 눈 딱 감고 넘겨버릴 비교적 가벼운 문제들도 있지만, 그 아픔이 너무나도 커서 평생의 한이 되고 예전의 삶으로는 도무지 회복되지 못할 치명적인 고통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질병과 이별의 아픔, 각종 사고와 자연재해, 그리고 전쟁의 폭력으로 인한 부상과 죽음의 충격들처럼 세상에는 감당하기 힘든 처참한 악의 현실이 존재합니다. 

   사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칼로 무를 자르듯이 선명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또 사람의 생각과 경험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예전에는 악인 줄로 알았던 사건들이 세월이 지난 후 그것이 선이었던 것임을 깨닫는 경우도 있고, 고통의 시간을 지혜롭게 잘 통과하니 그것이 도리어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듣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악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선으로 경험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히 선으로 인식되는 동일한 사건이 다른 사람의 삶을 망치는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악”이라고 할 때,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싫은 것,”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악은 정말이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나쁜 것”입니다.  

   누구나 악을 경험하게 되면 많이 힘듭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 악의 현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별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들(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에게 더욱 심각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악을 경험하는 그 자체가 힘들기도 하지만, 내가 믿는 절대자 하나님이 도대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전능하고 선하며 사랑이 많은 분이라면, 어째서 나의 인생에서 또한 이 세상에서 이처럼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악의 세력이 힘을 떨칠 수가 있을까요? 악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적으로나(intellectually) 감정적으로(emotionally) 계속해서 신앙인들을 괴롭힙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켜켜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결국 질문은 “왜(Why?”)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서, 태초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왜” 악이 발생할 수 있는 곳으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주일학교 시절 한 번 씩 이런 질문을 던져 봤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죄인이 되었고 세상은 왜 이렇게 살기 힘든 곳이 되었나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대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함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또 묻습니다. “인간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게 되었나요?” 선생님이 다시 답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인간이 이 자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질문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나요?” “음… 그것은…” 사실, 저를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은 자유(freedom)야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꼭두각시나 로봇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게 선택하고 선을 행하는 살아있는 인격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 가운데서 인간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최고의 섬김, 최고의 대접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게 반대하고 저항하며 반역할 수도 있습니다.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실제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자유,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인간은 죄 지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이러한 가능성 안에서 참으로 안타깝게도 인간은 죄를 짓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된 주제 뿐만 아니라, 세상과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들에도 비슷하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들이 사고가 나서 다치고 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셨나요? 하나님은 왜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싸움과 경쟁, 질병과 노화로 인해 계속해서 고통을 겪고 도태되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허락하셨나요?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홍수와 지진, 태풍과 쓰나미가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가족을 잃는 아픔을 당하도록 하셨나요? 이에 대해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연세계에 얼마 간의 자유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라고 답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어떤 학자들은 우연(chance)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세계가 하나님과 피조물들간의 인식론적 거리(epistemological distance)를 확보하기 위한 장(field)으로서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연세계를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짜맞춰져서 기계처럼 돌아가는 고정불변의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로 충만하여 변화무쌍하지만 새로움이 발생하는 생명의 세계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세계는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어두운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과 새로움으로 가득한 아름답고 선한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학과 과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는 일련의 신학자(또한 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발생하는 악의 문제와 자연세계에서 발생하는 악의 문제를 아주 조십스럽게 서로 연결하여 생각해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reduction)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 둘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본질적인 구조가 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피조세게가 갖는 어떤 본질적인 구조, 이것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이치 또는 법칙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즉,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동시에 발생한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구조, 생명이 탄생하고 번식하여 살아가지만 동시에 병들고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구조,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동시에 창조주를 거역하고 멀리할 수 있는 구조, 이웃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동시에 이 자유로 인해 이웃을 미워하고 생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구조, 인류의 삶이 더 행복하고 편안하게 발전할 수 있는 만큼 그 이면에는 거짓과 폭력의 흑역사가 계속될 수 있는 구조, 이렇게 세상은 이중성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세상이 이런 식으로 밖에 창조될 수 없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답변을 시도해 왔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현재로서는 “unnecessary but inevitable(꼭 그래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이라는 개념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답변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A Christian Interpretation(한국 책 제목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죄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죄를 비롯하여 세상에서 경험되는 악은 꼭 반드시 발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과학자-신학자(physicist and theologian)인 로버트 존 러셀(Robert John Russell) 박사는 이러한 자연세계의 이중적인 구조, 또는 “unnecessary but inevitable”의 본질적 특성을 물리세계의 법칙, 특별히 열역학 법칙에서 발견합니다. 물론, 그가 분명하게 지적하듯이 신학적인 진술과 과학적인 이론을 아무런 여과 없이 일대일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과학의 두 영역 모두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세상의 본질적 구조를 서로 연결지어 살펴봄으로써 진리에 한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학창시절 과학시간의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열역학 제 2법칙 또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르면, 가용한 에너지 분실의 척도인 엔트로피(쉽게 말해서, 무질서의 양)는 닫힌 세계에서 언제나 계속해서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납니다. 자연세계에서 발생하는 생명체들의 계속되는 질병, 쇠퇴, 멸종, 죽음의 현상을 통해 엔트로피의 증가를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엔트로피는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벨기에의 화학자 Ilya Prigogine(일리야 프리고진)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러셀 박사는, 세상에는 “무질서로부터 질서(Order out of Chaos)”가 출현하며,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비가역성(irreversibility)의 구조로부터 생명이 탄생하여 살아가고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체들이 나타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이 세게에서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inevitable) 요소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리가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엔트로피를 통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비유적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엔트로피가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은 엄연히 바꾸어 쓸 수 없는 서로 다른 개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악을 선을 위한 도구라고 정당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를 시도해 봄으로써 하나님이 선한 의도로 세상을 창조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세상에 악이 발생하였고, 어떤 면에서 볼 때 악은 피조물로서 창조세계가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구조 또는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cost)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질 수 있고, 저 스스로도 심각한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present)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생명과 죽음이 함께 하며 행복과 고통이 뒤섞여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분명한 현실에 대해 신학과 과학은 나름대로 질문하고 답을 찾습니다. 세상에 악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정말이지 악은 있어서는 안 되고 또 없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악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고 말았고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통해 (또한 악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이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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