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들만의 '5.18'?


황용연
(미국 GTU 박사과정)

 
야구팬인 필자가 미국에서 주로 찾는 한국 인터넷 사이트 중에 하나는 한국프로야구 관련 사이트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로 구경하는, 한국프로야구 관련 사이트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축에 속하는 사이트 A에서는 최근 특이한 현상 하나가 벌어지고 있다. 이 사이트와 규모에서 경쟁 관계에 놓이는 다른 야구 관련 사이트 B에서 시시때때로 A사이트를 게시판 도배와 욕설, 비꼼 등의 방법으로 공격하는데, 그 공격의 내용이 주로 '호남 비하'인 것이다.

A사이트에는 일반적으로 광주 연고의 KIA 타이거즈 팬이 가장 많다고 여겨지며, 또한 A 사이트의 정치적 성향은 주로 '반한나라당'으로 인식된다(이 사이트는 2008년 촛불시위와 연관되어 언급된 사이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A사이트가 공격받을 때, 공격하는 B사이트 이용자들은 A사이트를 호남 사람들에 대한 비하어인 '홍어'들이 주로 모인 '홍팍'이라고 지칭하며, 공격하는 날짜는 예를 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일이라거나 전두환의 생일 등이고, 공격내용은 전라도에 대한 비하, 5.18 항쟁에 대한 '폭도' 비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비하 등이다. A사이트의 회원들은 5월 18일이 또다른 공격의 날이 될 것이라고 예측할 지경이다.

물론 이런 현상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호남차별과 5.18 항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구적 입장의 표출이다. '민주화 이후'의 시기에도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되고 비판되어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호남차별과 5.18 불인정이라는 나쁜 행태의 지속이라고만 일축하기에는 생각할 여지가 남는다. 왜냐하면, 위에서 서술한 B사이트의 호남차별과 5.18 불인정의 행태에 대해서, 그 행태가 어떤 굳건한 신념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그냥 싫은 대상인 A사이트에 대한 편가르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한 인터넷 위키사이트의 설명은 필자의 이런 의문을 뒷받침하는데, 그 설명에 따르면 B사이트의 경향이 보수적이고 호남차별적이 된 것은, '반한나라당' 성향이고 KIA 타이거즈 팬이 많다는 A사이트와 경쟁 관계에 놓이다 보니 A사이트의 반대 성향을 추구하게 되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신념이라기보다는 편가르기일 뿐일지라도 '나쁜 생각'을 선택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의문의 방향을 조금 다르게 잡아 보고 싶다. 그렇다면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편가르기'에서 자유로울까.

경북 지역 대학의 어느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서 흥미로운 진술을 한다. 1980년대 이후 5.18 항쟁이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 되면서 국가적으로 기념되자, 다른 지역에서는 '우리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찾아 기념하는 의례들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각 지역별로 민주화운동의 전통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5.18 항쟁은 '호남'의 것일 뿐이니 그것보다는 '우리 지역'의 것이 더 좋다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A, B 사이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5.18 항쟁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은 '우리 편'이 아닌, '호남'이나 '운동했다는 사람들' 등의 '저 편'의 것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민주화운동'이 '편가르기'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은 '상대편'이 그 의미를 접하지 않으려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민주화운동 지지'나 '반한나라당' 동의 '좋은 생각'을 한다는 사람들은 과연 '편가르기' 이상의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좋은 생각'을 한다는 사람들이 공유한다는 가장 흔한 어휘부터가 '반한나라당'인 것에서 보듯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는 '한나라당'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훨씬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현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긍정적으로 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여기에다가 '한나라당'을 일단 몰아내고 봐야 한다는, 마치 악당을 최후의 한판으로 쓰러뜨린다는 식의 무협지 내지는 액션영화스러운 상상력이 덧붙여진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물론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너도나도 '보편적 복지'라는 답을 내놓고 있긴 하다. 그런데, 지금 너도나도 외치는 '보편적 복지'란 말 속에는, 그 '복지'의 기반이 되는 사회구조와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다르고 그래서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보편적 복지를 하면 이렇게 좋아요"라는 프로파간다만이 보이고, 그래서 '답'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질문에 대한 '얼버무림'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필자만의 지나친 생각일지.

상황이 이렇다면 5.18 항쟁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왜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는가를 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반복의 의도가 어떻든 또다시 '편가르기'에 빠질 테니까. 오히려 필요한 것은 5.18 항쟁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던 사람들의 '자기 해체'일지도 모르겠다. '민주화운동'을 해왔다는, '수구세력'과 싸워왔다는, 거기에 덧붙인다면 그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 중에서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더 '왼쪽'으로 가서 '진보운동'을 했다는, 그 코드 외의 다른 현실과 맞닥뜨리기 위한 '자기 해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사실 5.18 항쟁이야말로, 바로 그 '운동'을 해 왔다는 사람들의 코드 밖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던가.

ⓒ 웹진 <제3시대>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김학규
    2011.05.19 17:2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반갑습니다~^^
    이렇게 웹진도 발간하며 활발하게 움직이고 계셨군요~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2009년 7월 19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
본문 : 마태복음서 5장 33~37절



“예”와 “아니오”가 하나가 될 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황용연
(본 연구소 회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저는 오늘 성서 본문을 읽다 보면 조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은 오늘 성서 본문의 시작처럼, 맹세라는 걸 하면 제대로 지켜라 이게 일반적일 것 같은데, 아예 맹세라는 걸 하지 마라 일단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이색적이구요.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거기에다가,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라”는 말을 덧붙여 놨다는 말이죠. 이렇게 덧붙임으로써 구조상 맹세하지 말란 말과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라는 말이 대조 관계를 이루게 되어 뒷 말을 한 번 더 강조하는 구조가 되게될 텐데요. 도대체 맹세와 예/아니오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요?
저는 이번에 하늘뜻나누기 준비를 위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맹세라는 것은 어떻게 이야기를 붙이든 지금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현실의 문제를 접했을 때, 어떤 우회나, 회피나, 이런 길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고, 현재의 문제를 직시하고 거기서 지금 당장,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라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왜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등등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는 건가라는 것도 감이 잡힐 것 같네요. 그걸 두고 모두 하느님과 결부시켜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아무리 맹세를 지키려는 진실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과 같은 권위를 빌려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럼 “예”한다는 것은 도대체 뭐고, “아니오”한다는 것은 도대체 뭘까요?
“예”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저에게는 계속 곱씹어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서준식 선생의 동생인 서경식 선생 책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알다시피 이 두 분은 재일조선인이죠. 어렸을 적에 주변의 일본인 아이들이 자기들을 놀리는데, 이렇게 놀리더라는 거에요. “조선, 조선, 파가 취급하지 마. 같은 밥을 먹는데 토코가 틀리냐”
여기서 조선, 조선, 이렇게 부르는 건 흔히 알려진 “조센징”이라는 비하어처럼 아예 “조선” 자체를 비하어로 쓰는 거구요. “파가”와 “토코”라는 말은 원래 발음은 “빠가(바보)”와 “도코(어디)”인데 조선인들이 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저런 말이 나온다고 놀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놀리는 것도 상당히 악질적이죠. 놀리지 말라고 항의하는 말인데 그걸 또 비틀어서 놀리고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놀림을 받고 들어가면,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더라는 이야깁니다. “조선은 나쁘지 않아. 나쁜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그래서 그 어머니는 나중에 서준식 선생과 그 형 서승 선생이 한국에서 조작 간첩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거지요. "빨갱이는 나쁘지 않아"

저는 이 이야기말로 “예”할 것을 “예”라고 하는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평소에 했더랬습니다. 놀림받는 존재, 억압받는 존재, 그렇게 주변에서 자기를 계속 부정당하는 존재. 그래서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라고 계속 자기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런 존재들에게 “너 이렇게 살아도 돼. 너는 나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그래서 그것이 “나 이렇게 살아도 돼. 나는 나쁘지 않아”라는 자기 긍정으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해야 할 것을 “예”하는 전형이 아닐까 하는 거지요.
조금 다른 예를 들자면, 지난 주에 한백식구 한 분을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분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다른 것은 괜찮은데 성적이 안 좋으면 자꾸 재시험을 본대요. 그래서 그럴 때마다 내가 딸을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신다고 합니다. 저는 한백이 그럴 때, “재시험 봐도 괜찮아.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있어”라고 그 분께 힘을 주는 공간이, 그래서 그 분이 “나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있다!”는 자기 긍정을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는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일 텐데, 저는 그 ‘은혜’와 ‘믿음’이란 말이 결국은 이런 ‘자기 긍정’을 그 실체로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 ‘은혜’라면, 그 말을 받아 “그래,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 아닐까 싶은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 보겠습니다. 앞에서 서준식/서경식 선생 어머니의 말씀. “조선은 나쁘지 않아. 나쁜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라는 말씀을 인용했었습니다. “나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하셨으니, 그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다 “예”라고 말하면 되는 걸까요? 그렇게 말할 수는 당연히 없는 게, 당장 “조선은 나쁘지 않아”부터가 그걸 깨겠지요. ‘조선’을 놀리는 사람들에게 “조선은 나쁘지 않아”라고 해 버리면 당장 그 사람들에게 대놓고 “아니오”라고 말하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렇게 “예”라고 하는 것이 동시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구조는 모든 소수자들에게 적용되는 구조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소수자들이 자신이 받는 억압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예”라고 긍정할 때, 그것은 동시에 그 소수자들의 억압 위에서 존재하는 지금의 세상에 대해서 통째로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란 이야기지요.
조금 더 범위를 넓힌다면 이런 예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노무현 대통령 추모 광고를 보다가 계속 곱씹게 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당신이 다시 태어나 바보 대통령이 또 한 번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나라의 행복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이것도 말하자면 민주화 시대라는 ‘사람 살 만한 시대’가 내가 “예”할 수 있는 시대라는 표명일 거고, 동시에 그렇지 않은 지금 시대에 대해서 “아니오”하려는 표명이기도 할 겁니다.

한데, 앞에서 말한 문구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프레시안에서 노동운동가 김진숙씨가 이렇게 말했더랬죠. 차라리 군사독재 때는 대드는 노동자만 잘렸는데, 민주화되었다는 시대엔 남녀노소가 다 잘리더라고요. 그렇다면 “바보 대통령의 행복한 국민”이라는 “예”는, 이명박 정부라는 현재에 대한 “아니오”도 되지만, 또 다르게 보면 ‘다 잘리는 남녀노소’에 대한 “아니오”도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 지점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예”가 동시에 그 삶에 대한 억압에 대해서 “아니오”가 될 수 있다면, 그 “예”가 동시에 그 “예” 속에 숨겨져 있는, 타인의 삶을 억압하는 구석에 대해서 “아니오”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아마 그건 인간으로서는 무지하게 어려운 길이겠지만, 그걸 성취해서 나의 “예”가 내가 당하는 억압과 내가 가하는 억압 양쪽 모두에 대해서 “아니오”가 될 때 그 경지를 “구원”이라고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한백이 22년 전에 이 땅에 세워졌을 때, 한백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한백은 “예”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었을 겁니다. 기존의 한국 교회의 모습을 두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던 사람들에게, “네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너처럼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라고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 한백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기존의 한국 교회에, 다시 그 한국 교회와 친화적인 기존의 한국 사회에 대한 “아니오”이기도 했겠죠.
저는 한백이 22년 동안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기존의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두고 이건 아닌데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예”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라고 말하는 것이 동시에 기존의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한백이 22년 동안 마음 속으로 동일시해왔던 이른바 “민주화운동”이, 그들이 “예”라고 말하는 것에 또다른 억압을 숨기고 있었다면, 한백 스스로도 그러한 억압에 대해 반성하고 또다른 “아니오”를 말해야 하는 자리가 있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웹진 <제3시대>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18)
특집 (8)
시평 (93)
목회 마당 (59)
신학 정보 (133)
사진에세이 (39)
비평의 눈 (69)
페미&퀴어 (23)
시선의 힘 (133)
소식 (153)
영화 읽기 (31)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44,778
Today : 787 Yesterday : 1,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