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동안 쉼 없이 물어 날랐다. 

인공의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 

인간과 더불어. 여기가 내 집이다. 

진흙으로 바람을 막고 서까래를 올려 

허허둥실 우리집이로다.  


    


눈바람 깃을 여미고 털들도 모았다. 

새로운 생명을 부화해야 한다. 

높다란 도심 인큐베이터. 우리 집이다. 

생존과 번식의 업보 속으로 

만물은 허허로이 순환한다.  


      


그런데 사라졌다.

인간의 전망을 위해서

베이고 상처입고 무너졌다.


     


연둣빛 희망은 주저리 주저리

땅을 헤매고 있다. 


 

 


 

 

 

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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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spam) 사회'
김신식
(《당대비평》간사)

우리는 ‘언어-에너지’의 과다 분비를 통해 많은 상처를 안고 산다. 나는 이러한 상처의 누적이 만연한 오늘날의 사회를 ‘스팸(spam) 사회’로 명명하려 한다. 하루에 2~30개씩 쌓이는 스팸 메일. 우리는 이 메일의 운명을 안다. 예견된 폐기의 운명 말이다. 2~3초의 순간에 폐기의 미래를 빗겨나기 위해 애쓰는 ‘스팸’ 생산자들의 ‘친절’ 전략은 고도화되어 가지만, 그럴수록 가깝게 다가오는 남모를 깊은 고독과 지속되는 실망감. 그것은 곧 시각의 피로감을 유발한다. 우리는 이런 피로감을 일찌감치 예방하기 위해, ‘외면’이라는 전략을 선택한다. 길거리에서 불과 몇 십 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내 손에 쥐어지는 전단지들. 그 전단지를 개인의 손에 쥐어주어야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어색한 접촉. 우리는 이 접촉을 통해 메시지의 무의미함을 체감한다. 그리고 내가 취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판별하고 학습한다. 메시지는 흩뿌려지고, 구겨지고, 거리에 쏟아진 구토물에 섞여 있다. 메시지는 오늘날 하루살이 아니 ‘일초살이’가 되었다.

이런 ‘일초살이’의 범람 속에서 내가 정작 걱정하는 것은, 구경꾼의 어떤 윤리이다. ‘말과 글’의 스펙타클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 그 시대 속에서 사람들의 감각이 피로를 호소할 때, 우리는 이 피로감을 혐오로 교환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짧지만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짜증. 이 짜증은 메시지를 전달해야지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인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곧 구겨지고 거리에 버려질 전단지의 운명처럼, 제목만 보고 휴지통에 들어갈 스팸 메일의 그것처럼, 우리는 메시지의 비극적 운명을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사람에게도 덧씌우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구경꾼의 윤리 속 내면화된 상처에 대한 예방. 이 예방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시도되는 ‘외면과 무관심’이라는 행위. 이를 통해 정작 거리에서 자신의 생존을 외칠 수밖에 없는 이들 또한 곧 폐기의 운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의미 없는 메시지의 굴레라는 구경꾼들의 인상에 갇힌 채, 의혹의 수술대에 오른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칼을 준비하여, 그들을 해부하려 한다.  ‘난’ 보았다. 그리고 알고 있다. 의료사고로 생긴 부작용으로 사회 생활을 못하는 어느 남자의 외침을, 경찰에 연유 없이 불법 연행되어 졸지에 방화범으로 몰린 한 대학생의 울분을.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저들은 그렇게 쳐다보여질 운명이라는 것을. 결국 우리는 망각의 약을 복용하기 위해 오른손을 내민다. 그러나 우리는 또 안다. 이는 우리네 삶의 ‘깔끔한 입’, 타자를 향한 ‘적당한’ 관심만이 내 삶의 안전망을 해치지 않는다는 ‘영민한 입’을 위한 부정과 부인의 과정임을.

‘스팸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피로감은 스스로가 ‘영민한 신체’가 되도록 부추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얻고 싶은 메시지를 얻고, 그 수확을 위해 쏟은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메시지를 과다하게 푼다. 소위 ‘뒷담화’라고 말하는 이야기 문화의 만연과 그것이 주는 상처의 과잉은 ‘스팸 사회’의 중요한 한 축이라고 생각한다. 순식간에 소비될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준비하기.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타인의 사생활에 별점을 매기고, 20자 평을 남기기. 여기엔 어떤 친밀성과 내밀성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있다. 말을 해야 하는 상황. 메시지가 없는 자리가 어색하고, 그것을 언어로 채워야 할 상황에서, 내 삶의 안전망을 해치지 않는 차원의 언어 공간을 창출하기. 그것을 위한 가장 손쉬운 전략은 타인의 내밀함을 교류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고로 현대인은 이장욱의 소설 제목처럼 ‘고백의 제왕’이 되어가고 있다. 짧은 시간 소비되고 잊혀질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소재들을 진열하고, 개인은 그 진열된 이야기의 풍요를 느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풍요 속에서 주고 받는 ‘빈 말’의 미래를 체화한다. 정이현의 소설 한 구절이었던가. “언제 한 번 보자”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예의 있는' 거짓말이 되었다고. 진언과 허언의 경계가 사라진 언어 에너지의 과다, 혹은 그 둘의 경계를 만들어 의혹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위무하려는 개인들. 우리는 물론 이 개인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 '허언'을 둘러싼 사람들의 냉소와 체념. 그것을 도모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두렵고 무섭다. 2008년 이후,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보여주는 ‘빈 말’의 정치. ‘허언’의 운명을 타고난 ‘공약’이 “그것은 오해입니다”로 일갈되는 그들만의 소통을 생각해본다. 사람들에게 이 국가와 이 사회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가 ‘휴지통’에 쉽게 버려질 운명에 처한 지 오래인 지금. 우리 사회는 메시지라는 존재에 지쳐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무기력해져 가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이 ‘스팸 사회’속에서 상처받지 않을 것 같은 ‘빈 말’이 환영받고, 무관심의 상처를 가진 자들의 호소와 분노는 ‘빈 말’ 취급을 당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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