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생각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함석헌 생각”이란 제목은 함석헌의 생각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만이 아니라 ‘생각’을 함석헌 사상의 독특한 면을 담아내는 개념 또는 고유명사로 보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함석헌에게 생각은 지적인 작용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라, 자신의 사상의 지향성과 방법론까지 드러내는 개념적인 용어로 볼 수 있다. ‘생각’만이 아니라 함석헌의 글에서 등장하는 몇 개의 단어들을 부각시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폭넓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여기서 다룰 단어들은 함석헌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담아두었던 ‘철학,’ ‘소리’, ‘자리’, ‘생각’ 등이다. 이와 관련해 내가 이해하는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의 굴곡진 고난의 역사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특히 4.19 혁명 이후 한국을 위한 사상과 철학의 전통을 유산으로 남기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에 대한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이 제대로 다음 세대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느낌도 이 글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따라서 나의 관심은 함석헌 사상의 현대성을 모색하고 그의 사상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는데 있다.




함석헌과 철학 (1)


    2008년 세계철학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1900년에 처음 개최되어 4년마다 열리는 국제적인 철학대회였지만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렸다. 개최 국가의 철학적 전통을 소개하는 특별한 분과모임에선 함석헌과 유영모의 철학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 발표됐다. ‘현대철학의 재고’라는 그 대회의 주제가 철학을 서양이라는 개념의 영토를 벗어나 이해하자는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함석헌과 유영모를 다룬 논문들은 대게 두 사상가의 학문에 담긴 철학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이 두 사람의 학문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저술은 많았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결국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면이 있었다. 철학이 무엇이고 또 무엇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 질문은 지금도 묻게 되는 철학사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철학에 대한 다양한 새로운 정의와 이해가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지만, 다양성이 철학적인 작업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국제적인 철학대회가 철학성을 증명하거나 대신할 수도 없다. 이 부분을 면밀히 다루지 않으면 철학적인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기서 철학이란 일반적으로 그 용어로 지칭되는 서구 사상의 전통을 말한다. 그 전제 하에 함석헌이 철학에 대해 갖고 있었던 생각과 자신의 사상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이해했는지, 그리고 함석헌 사상의 철학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그의 글을 어떻게 철학적 행위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개괄적인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20세기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함석헌의 사상은 학문적인 근거지가 없었다. 철학이라 하기엔 엄밀함이 떨어졌고, 신학이라 하기엔 다원주의적인 종교학 측면이 강했고, 역사학이라 하기엔 추상적이었다는 게 흔히 듣는 이유였다. 나름 근거가 있는 이유들이지만, 그 근거는 전공 중심적인 학문의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함석헌이 추구했던 학문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함석헌이 이루어놓은 학문적 업적은 오히려 근대적인 대학에서 전공을 중심으로 공부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전공 분야의 방법론에 고립시키는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함석헌은 근대 학문의 인위적인 경계에 갇혀있지 않았고 거기서 출발한 방법론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함석헌은 종교적으로는 다원론을 견지하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일원론을 지향하고, 사실의 증거에 충실하면서도 영적인 증언의 진리를 믿었고, 현실정치의 변혁을 위한 운동가의 역할과 예언적인 지식인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었다.


    함석헌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어디서부터 할까. 이 질문이 쉽지 않은 이유는 함석헌이 자신이 철학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유명한 철학자들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는 말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이런 입장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부정한 것은 철학적 자아만이 아니라, 그 어떤 학문의 지식인이나 전문가로서 규정되길 거부했다. 이런 소크라테스적인 자기부정은 함석헌과 철학의 문제를 철학적 자아의 관점에서 접근할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함석헌의 글 속에 ‘철학’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가 1960년대에 쓴 글 가운데 철학이라는 단어가 제목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은 함석헌 자신이 때때로 철학을 한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철학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는 것은 분명하다. 1960년대 초반은 그의 사상이 학문적으로 (철학적으로) 가장 무르익었던 시기였다. <생활철학>과 <누에의 철학>이 그 시기의 글이었고, <저항철학>은 몇 년 뒤 1968년에 쓴 에세이였다. 60년대 초반에 쓴 또 다른 의미 있는 글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개정판에 쓴 서문이다. 1965년에 출판된 4차 개정판을 내기로 결정하고 본문을 수정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이었다. 당시 그의 완숙해진 사상적 직관의 능력이 그 개정판의 구성에 잘 투영되어 있다. 철학이란 단어가 제목에 없지만 철학적인 의미와 비중이 있는 글로 “한국의 발견”과 “우리민족의 이상”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두 함석헌을 철학적인 사상가로 재발견할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글들이다. 앞으로 더 자세히 다룰 계획이지만 그가 1960년대 초반에 그런 글들을 쓰게 된 것은 4.19 혁명을 한국 역사의 분기점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한국을 위한 철학을 만들고 실천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시기 함석헌이 이루고자 했던 학문적 성과는 미국의 에머슨이 19세기 미국의 정신적 독립을 주장하고 미국의 학문을 제창했던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앞으로 다룰 예정이다.


    <생활철학>은 1961년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의 국토건설단에 선발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함석헌은 그 글에서 당시 서구 철학에 대한 그의 인상이 담겨 있고,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단순하게나마 정리하고 있다. 현대의 철학이 분열적이고 논쟁적인 것으로 변한 것에 대한 비판도 했다. 철학의 과학주의가 철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도 파악했다. 함석헌은 철학이 분석과 대립을 넘어서 지혜와 생활과 삶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다. 그에게 과학주의는 인간의 정신을 약화시키는 기술적인 사고의 지배와 과학에 대한 믿음이었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철학으로 등장했을 때 그것은 힘의 철학과 폭력의 정치로 변모하게 된다고 했다. 자연의 법칙만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뜻과 정신과 절대를 이야기 했지만, 철학적으로 그 입장은 반-자연주의(Anti-Naturalism)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맛봄’이라는 미학의 경지로 이해했고, 함석헌에게 그것은 통합의 경지였다. (“나도 인생이야”라는 시에서 등장하는 “혀 아래 맛으로 듣는다”라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예리한 관찰력은 - 이 후에 다루겠지만 - 그의 사상이 추구했던 통합을 미적인 감각으로 이해한 예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철학이 상실한 삶과 통합의 지향성을 지적해주고 일깨워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함석헌은 철학과 종교가 이성과 믿음으로 나뉘고 절대적으로 다른 방법론의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철학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끝없이 믿음을 얘기했던 이유는 그런 학문적 경향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기술적인 사유가 만든 정신적 혼란과 냉전의 위기로부터 세상을 건져낼 희망은 믿음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철학이 회의와 불신을 설명하는 이론이 되어가는 경향에 맛서 그가 제시한 믿음은 맹목적으로 선언된 믿음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과제이자 방법론이기까지 했다. 


철학과 한국


    함석헌이 요구한 한국 역사에 대한 반성은 철학적 반성까지 포함했다. 그에게 한국은 철학이 없는 민족, 아니 철학적 자기표현을 하지 못했고 그 의지를 상실한 민족이었다. 중국의 고전과 언어로는 한국의 정신을 드러내는 그런 자기표현을 할 수 없었다. 영어로도 한문으로도 다가갈 수 없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만든 민족의 혼이 있었다. 서구의 학문도 불교와 유교도 한국의 지적인 전통이 되기에 충분치 못했던 이유는 한국의 언어로 생각해서 만들어진 사유와 전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1963년 영국의 한 퀘이커 대학에서 했던 <우리 민족의 이상>이라는 강연에서 60년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철학의 문제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중국과 서양의 개념으로 한국 역사의 경험을 설명하려는 지적인 종속과 나태함을 질타했다. 사상의 빈곤은 수입된 개념과 모방을 통해 지식을 권력으로 행사하고 이득을 취하려는 지식인들 때문이었다. 한문의 사유를 아직도 하고 있고, 영어가 등장해 지배적인 언어가 된 역사는 한국 민중들의 고난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았다. 억압은 정치적인 무력행위만이 아니라 지식과 개념으로도 가능했다. 그 결과 민중들은 높은 뜻을 추구할 의지가 꺾인 채 숙명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함석헌에게 한국에 철학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미래도 없었다. 어제, 그제, 오늘, 모레는 있지만 ‘내일(來日)’은 한자이고 고유한 한국말이 없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표현이었다. 철학 없는 숙명적인 세계관으로 사는 것과 ‘내일’이 없다는 것을 동일한 현상으로 본 것이다. 철학이 없는 게 아니라 철학을 잃어버린 것처럼, 내일이란 말을 상실한 것이었다. 함석헌에게 <한국의 발견>은 철학적 자기발견을 의미했고, 한국의 미래는 한국에서의 철학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에게 철학이 없는 민족은 내일이 없는 민족이었다. 그가 찾았고 구현하고자 했던 새로운 한국은 내일이 있고 철학이 있는 한국이었다. 이 과정은 그에게 한국의 사상을 표현할 언어를 재발견하고 한국인의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함석헌에게 민중의 언어와 민중의 방식으로 할 수 없는 철학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철학의 가치는 인간의 자기이해와 자기표현에 있었고, 이는 민중의 현실과 경험의 한 축이었던 그들의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찾을 수 없었다. 함석헌에게 60년대 초반 한국에서 필요했던 것은 경제적 발전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혼이 담긴 언어로 구성된 새로운 철학이 필요했다. 함석헌은 된 자신의 강연과 글을 통해 그런 문제를 진단만 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새로운 철학을 예시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을 하기 위해 동양과 서양의 고전 연구도 필요했다. 특히 한국인에게 적합한 자기 이해를 위해서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서양의 가르침이 아니라 동양의 고전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양의 고전이 한국의 고전이 될 수는 없었다. 여기서 함석헌은 고전에 대한 색다른 이해를 내놓는다. 한국의 고전은 한국인 자신이었고 한국인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서구 사상사에서 많은 고전에 대한 정의가 등장했지만, 함석헌의 내면의 고전이란 개념은 고전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다. 마음속 혼에 있는 고전을 조명하여 발견하는 것이 자아의 발견이었고 영혼을 돌보는 행위였다. 자아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은 철학의 고전적인 의미에 속한다. 영혼의 돌봄은 다른 민족의 말과 개념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에, 민족 고유의 언어를 찾고 다듬는 것은 그 자체로 영혼을 돌보는 철학의 행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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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14 : 대중문화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설국열차


    <설국열차>란 특이한 제목의 영화가 묵시록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건 그 영화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알고 보니 그 영화의 원작은 이미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만화였고, 미국에선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기대하면서 기다리던 마니아들이 많았었다. 다행히 동네 도서관에 영문 번역판이 있어서 빌려다 보았다. 그런 정성까지 들인 이유는 묵시록 장르의 소설이 한국에서 어떤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했고, 또 서구사상의 깊은 열망이 담긴 묵시록이 한국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최근 <부산행>이란 좀비 영화도 동일한 궁금증을 갖고 보았다. 비서구권에서 일본은 핵폭탄의 경험을 통해 묵시록의 영화가 일찍부터 등장했고, 대재난과 몰락의 서사는 일본의 대중문화 속에 중요한 일부로 남아있다. <설국열차>는 지구에서 생명이 끝날 때 멈추지 않는 기차에 올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고, <부산행>은 죽은 자가 깨어나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좀비영화의 일종이다. 좀비 영화가 지속해서 유행하는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패러디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미 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고도 죽지 않고 좀비와도 같이 사람들을 파멸의 길로 끌어들이는 자본주와 이를 피해 쫓겨 다녀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 속에서 찾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좀비는 바이러스를 통해 유지되고, 인류가 멸종하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묵시록의 의지로 무장해 있다. 두 영화에서 묵시록에 대한 한국적인 해석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찾기 힘들었던 건 그런 의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설국열차>에서 한국인 주인공의 등장은 묵시록의 주제를 희석시키기도 하지만, 원작에서부터 드러나는 세상이 망한 이후에도 인간사회의 갈등이 존재한다는 문제의식은 영화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설국열차>의 기차는 목적 없이 궤도를 돈다. 목적이 없는 게 아니라 엔진이 꺼지지 않고 끝없이 얼음과 눈 위의 궤도를 돌아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움직임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기차 안에는 끝나는 세상을 피해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있다. 남들보다 먼저 기차를 탄 사람들은 엔진이 있는 앞부분에 자리를 잡고 뒤편에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계급과 차별과 억압이 존재한다. 사람 사는 곳에 종교가 없을 수 없다. 기차를 지키는 게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기차는 종교였고 엔진은 신으로 섬김을 받는다. 속도가 떨어지는 기차의 엔진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원작의 줄거리다. 영화에선 기차가 멈추어도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와 같은 최근 미국의 포스트 묵시록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토피아의 건설은 세상이 철저히 망해야만 가능하지만, 세상이 망하게 되는 과정이나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에 심판이나 재림은 없다. 대중문화 속의 묵시록이 세속화된 것을 보여준다.


미국과 영화


    활동사진의 기술을 우리가 아는 영화로 만든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에게 영화는 기술이나 예술 또는 오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영화에서 미국을 발견했고, 또 영화를 통해 미국을 생산해냈다. 그 결과 우리의 상상 속의 미국과 영화는 분리될 수 없는 상태에서 미국은 영화로 또 영화는 미국으로 남아있다. 20세기의 역사가 견딜 수 없는 악몽의 역사였다면, 실제와 가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미국이 현실 역사의 대안으로 혹은 역사 없는 초현실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아도르노(Adorno)는 영화와 미국이 하나가 되는 모호함을 자본주의 영화산업 때문이라 파악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미국의 현실 도피적인 병리 현상이라고 판단했다. 반면에 보드리야르는 미국이라는 사건이 역사가 아니라 영상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미국을 그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실험장으로 삼았다.


    미국의 사막과 고속도로에 주목한 것은 보드리야르만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서부 곧 미국 문명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사막과 그 문명의 상징인 대륙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그리고 그 둘이 만나 형성하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형상은 미국에 대한 상상에서 빠질 수 없다. 생명의 습함을 앗아가는 사막의 광활함은 역사가 비껴간 빈 공간으로 이해되었고, 그 위의 도로는 임의적인 두 장소를 이어주는 길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형이상학의 기호를 연상시켰다. 사막의 형이상학은 프랑스 학자들 특유의 심오함이 아니어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막은 극기와 수양과 초월의 의지를 시험하는 곳이었고, 이를 통해 접신을 꾀했던 공간이었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던 청교도들이 상상했던 광야의 미국적인 원형이 사막이었다. 서부영화에서 사막은 선과 악이 벌이는 최후 결투의 장소였다. 그 장소는 문명의 타협과 계산이 통하지 않는 곳으로,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다만 지리적인 장소에 불과했다. 여기서 선과 악은 제도화되지 않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었다. 사막은 미국 서부의 끝이고, 한때 서구 문명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그 끝에서 역사의 끝, 곧 묵시록의 사건을 상상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사막의 토양 위에 할리우드라는 환상과 자본의 산업이 탄생해 미국 그 자체를 재생산해온 것이다.  


    미국역사에서 사막이 묵시록의 무대였다는 사실은 영화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사막은 과거 핵실험의 주 무대였고, 지금도 종말의 핵무기들이 대기 중인 곳이다. 무수한 외계인과 UFO에 관한 음모와 소문의 진원지이다. 네바다 사막의 ‘Area 51’이란 곳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거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군사기지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막의 묵시록은 당연히 영화를 통해 완성됐다. <매드맥스> 영화 시리즈가 사막에서 벌어지는 종말의 전투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지만, 사막이 핵전쟁으로 생명이 사라진 세상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사막의 묵시록을 다루는 영화는 많다. 묵시록이 최근 종교가 아니라 영화의 장르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해서 그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건 아니다. 묵시록에서 종말은 언제나 세상의 종말이고, 그 종말이 누구의 행위 때문에 시작되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종말의 사건들이 묵시록이란 예언이 변하는 방식이 중요하고 그 방식은 대중문화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읽는데 매우 중요하다. 묵시록의 영화는 미국의 영화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단지 그런 영화들이 흥행성 때문이 아니라 미국역사의 묵시록을 이어받아 그 이념을 지속해서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역사의 시작부터 세상의 종말에 관심이 있었다. 영화 산업이 출범하던 시기가 서구 문명의 몰락을 고했던 1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이유도 있었고,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매체로 영화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장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적인 것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것이었고, 전쟁만큼 실제의 극치는 없었다. 20세기 첨단의 무기는 인명 살상만이 아니라 세상의 파괴를 가능케 했고, 그 파괴된 세상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는 작업을 영화화해낸 측면이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속의 묵시록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상이다. 세상을 한순간에 끝낼 수 있는 핵무기의 등장이 가져다 준 정신적인 분열과 충격은 이루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세상의 종말만큼이나 창의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195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묵시록의 영화는 다양한 종말의 사건과 그 결과를 예측해 주었다.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파괴된 세상의 종말론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슈퍼맨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구하는 서사는 할리우드 영화가 완성한 묵시록의 구조였다. 최근의 묵시록이나 디스토피아 영화에선 구원자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해피엔딩이 아니라 고통과 좌절의 사건들을 반복되는 영화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건 세상이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암묵적 합의가 공동체 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할 에덴동산도 없고, 꿈꿀 유토피아도 없는 세상은 이루어진 묵시록 또는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말한다.


공룡의 상상력


    1950년대 미국에 고속도로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시카고에서 제일 중요한 도로는 미시간 호수를 옆에 끼고 도심을 남북으로 가르는 레이크쇼어라는 길이었다. 1990년대 재공사를 하기 전까지, 그 도로를 타고 도심을 지날 때면 한 박물관을 정면으로 보고 달리다 그 건물을 우회해서 지나가게 돼 있었다. 마치 그 웅장하고 고전적인 건물을 바라보면서 경의를 표하고 그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받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 건물은 자연사박물관이었다.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란 개념이 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과정도 매우 흥미롭지만, 미국에 있는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기울이는 투자와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필드뮤지움이라 불리는 시카고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물은 단연코 ‘수’(Sue)란 이름의 공룡이다. 13m의 길이에 현재까지 발견된 공룡 가운데 가장 크고 많은 뼈가 남아 있는 T-Rex(티라노사우루스)라 한다. 인기가 많아 다른 나라에 대여되기도 한다. 몇 천만 년 전에 살았다는 동물에 대해 현대인들이 갖는 관심은 합리적이라 하기엔 너무 과하다. 화석이 된 공룡의 뼛조각을 근거로 생겨난 공룡 산업은 영화에서 박물관 그리고 관광상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규모가 크다. 미국의 여러 주는 그 주의 공식 공룡까지 지정해놓고 있고, 모든 주들은 공식 화석을 갖고 있다. 일례로 일리노이 주는 털리몬스터(Tully Monster)라는 삼천만 년 전에 살았다는 해조류 동물의 화석이다. 동물의 화석에 대한 환상적인 애착, 그 긴 시간의 거리를 애써 무시하고 인간과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의지를 어떻게 설명할까? 지구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탐구 정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최소한 문명의 무의식적인 부분까지 생각해야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관점에선 화석화된 동물에 대한 애착과 그 속에서 인간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를 ‘멸종’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공룡에 대한 관심은 공룡이 멸종했다는 데에서 출발했고, 더 나아가 멸종한 공룡의 뼈를 발굴해 전시하고 또 찾아가 이를 확인하고 증언하고자 하는 현상을 종교적 종말론의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구 사상사에서 화석의 의미는 매우 흥미롭다. 어떤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기독교 세계관에 더 큰 충격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천문학은 우주의 찬란함을 연구해서 신의 섭리를 깨닫고 영광을 돌린다는 의도의 자연과학 발전을 초래했고, 화석의 발견은 지구과학 발전의 동기가 됐다. 하지만 화석의 발견은 성경을 역사책으로 보던 시각에 큰 도전을 의미했고 인간이란 존재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혔다. 코페르니쿠스보다 다윈이 서구역사에서 더 큰 논란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화석의 의미는 그 동물이 멸종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멸종이란 개념은 18세기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멸종이 인간의 세상 인식에 등장하면서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에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에 살았던 동물 중에 지금은 멸망해서 사라진 동물의 종이 있다는 사실은 신의 계획에 따라 창조된 세상에 대한 믿음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신이 의도를 갖고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 세상의 일부인 동물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창조질서에 대한 믿음도 문제였지만 멸종이 가져다준 또 다른 문제는 종말에 대한 이해에 있었다. 기존의 종말론은 신의 뜻 안에서 역사가 끝나면서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었으나, 멸종으로 종말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끝이 한 번만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종말론을 뜻하는 것이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세상에 존재했던 동식물 중 절대 다수가 이미 멸종했다는 연구결과는 신과 창조물의 관계 그리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하였다. 인간의 끝을 멸종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본질을 새로운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멸종을 설명하는 일은 이후 많은 학자들이 풀려고 했던 오랜 숙제였지만 그 의미는 지구역사의 이해나 지질학의 범주를 넘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이유가 있었다. 종말론에 대한 관심과 세상에서 인간이 갖는 의미를 찾는 관심이 반영된 것이었다. 멸종에 대한 근거를 처음 제시한 조루즈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멸종의 이유로 홍수를 포함한 어떤 커다란 재난이 지구를 덮쳤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윈의 진화론도 멸종의 원인을 제공하는 이론이었다. 퀴비어의 재난설을 거부한 다윈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 등의 논리로 적응력이 떨어지는 종이 자연적으로 도태된다는 설명을 했다. 특히 다윈은 멸종하지 않은 동물도 진화를 통해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 간다는 이론을 펼치면서 인간의 존재 역시도 상대적이고 우연적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가능성을 제기했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의 충격은 기독교 신앙에만 가해진 게 아니었다. 멸종과 멸망이 신의 주권과 권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의 내적인 구성논리에 의한 것이란 인식은 재난 묵시록의 보편화로 나타났다. 종말의 묵시록이 종교인들만의 세계관이 아니라 소설과 영화와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일반적인 세상 이해가 된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멸종의 가능성이 신의 불완전함을 의미하고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그 논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멸종에 대한 언급 없이 창조의 목적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고, 멸종이라는 게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에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논리도 등장했고, 멸종되어 사라진 동물들이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란 입장을 펼친 사람도 있었다. 멸종을 설명한 다윈의 진화론은 19세기 미국에서 무신론의 원형으로 또 사탄의 이론으로 비판받고 근본주의가 형성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지금도 멸종과 창조질서가 병행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의 실제적인 주제는 종말론이다. 성서적이라는 종말론과 다른 종말의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충돌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드러나는 건 서구 사상사에서 종말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 중요성은 오늘날 화석이 된 공룡의 뼈를 발굴해 모셔놓고 또 설치된 뼈를 보기 위해 몰려오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현상은 생명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집념을 드러낸다. 최근 멸종된 동물에서 DNA를 채취해 다시 탄생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공상과학의 논의는 멸종을 번복할 수도 있다는 종말론의 새로운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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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13 : 자본주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21세기 초반 묵시록 담론의 중심에 자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은 자본주의 묵시록에 의해 대체되었다. 냉전 체제가 붕괴한 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세상의 몰락을 읽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경쟁 속에서 자연과 생태계는 파괴되어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믿음과 세상이 망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을 것이란 자괴적인 인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 자본주의 소비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동원된 반생명적인 기술의 대가는 신체의 질병과 인류가 쌓아 올린 가치의 파괴로 나타났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욕망과 소비의 주체로 만들었다. 이전의 도덕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 이해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인간 이해로 대체되었다. 인간은 경쟁의 상황 속에서 가장 인간적일 수 있고, 세상은 도덕적인 인식이 아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모여도 건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자원으로 전락한 자연은 균형을 잃고 결국 재난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망치고 있고 결국에는 몰락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진단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세상의 파괴와 종말의 묵시록으로 이해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에 의해 디스토피아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 개념이 좀비다. 좀비는 무기력하게 죽음과 삶 사이를 배회하면서, 반죽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살을 뜯어 먹어야 한다. 결코 이길 수 없는 경쟁의 서바이벌 게임을 하도록 강요받고 사는 현대인들은 좀비에서 그들의 아바타를 찾았다. 인간적인 세상은 이미 끝났고, 마지막 세상에서 생존해 있기 위해서 모든 가치의 종말과 패배를 인정하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떠도는 모습이다. 그 상태에서도 유지되는 생각 없는 생산과 소비는 자본주의가 원하는 세상을 완성하고 있다. 인류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좀비 영화들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 인문학의 공통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미국문화의 저변에 묵시록적인 종말론이 흐른다면 미국의 자본주의는 그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실제로 자본주의를 미국의 정신으로 인정하고 미국이 없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상상할 수도 없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종말론을 연결할 수는 없을까?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유명한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추론을 해보자. 베버는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그의 책에서 다뤘지만, 거기서 묵시록의 근거도 찾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에게 미국은 청교도의 나라였고, 그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다면 어떤 종교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베버는 그 이유를 청교도들의 신학 즉 칼빈주의의 예정론에서 찾았다. 구원은 신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예정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저주의 대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상태는 두렵고도 외로운 번민의 상태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의 삶은 외부에서 보기에도 달라야 했다. 그들은 신의 부름을 받아 세상으로 왔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의무를 다하고 충실한 삶을 사는 게 하늘에 합당한 선민의 삶이었다. 베버에 의하면 그런 삶은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모든 맡겨진 일에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임하는 자세를 요구했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일상의 생활에서 성실하고 자신감 있게 산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베버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생각해보자. 베버는 청교도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의식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런 모습이 선택받은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 했지만, 청교도들의 소명의식 중에 세상의 마지막 날을 준비할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한다는 종말론적인 사명을 간과했다. 세상의 사람들과 구분되어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은 그 자체로 종말의 사건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을 신에게 선택된 사람에게 합당한 성실과 열성을 다해 살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만약 베버의 말대로 청교도들의 소명의식이 자본주의 정신의 조건이었다면 그들의 삶은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하는 종말론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적인 삶은 종말의 과도기적인 삶이었고 곧 사라질 시대를 사는 방식이었다는 추론도 제기해볼 수 있다. 그 방식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세계관을 도입해 불필요한 생각과 활동을 제한하고 단순한 삶의 추구를 의미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서구의 기독교 문화 속에서 등장할 수 있었을까 묻는 것은 그 문제가 더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지금도 가치 있는 질문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정신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자본주의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19세기에 자본주의의 탐욕이 아닌 정신을 얘기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베버와 같은 학자의 영향과 자본주의가 체질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모순된 가치라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베버 자신은 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가치가 중세에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탐욕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베버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청교도들이 자본 친화적인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했던 세계관을 칼빈주의의 예정론에서 찾았지만, 그 연결고리가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돈을 벌고 재물을 축적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고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와는 큰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재물을 쌓아두는 행위 그 자체를 죄악이라 생각했던 종교문화 속에서 자본주의가 등장했다고 믿기 위해서는 큰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고 이를 베버는 잘 알고 있었다. 베버에게 그런 발상의 전환을 체득하여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한 인물이 벤자민 프랭클인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부자가 되는 법>은 그가 살아있던 18세기에 이미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자였다. 그는 지금도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미국인으로 손꼽힌다. 베버는 프랭클린을 청교도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묶어낸 인물로 설정하면서 그의 근면 정신과 시간 이해에 주목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또는 ‘시간은 금이다’와 같은 프랭클린을 통해 알려진 격언들에 그의 인생철학이 담겨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의 핵심은 그의 시간관이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은 언제나 짧다. 시간을 잘 시켜라. 쉬고 싶으면 시간을 잘 써라.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을 수 없다. 시간을 낭비하는 건 인생을 헛사는 길이다. 프랭클린은 청교도의 후예였지만 교회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신 중심의 생활보다는 합리적이고 정직하고 근면한 생활을 더 강조했다. 그의 생각은 매사에 신의 뜻을 찾지 않아도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행위 그 자체에 도덕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재물이 목적이 될 수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 도덕성을 부여하게 된 것은 큰 발상의 전환이었다 할 수 있다. 프랭클린에게서 종말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자본주의 정신이 청교도의 윤리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세속화된 것이라면, 돈과 시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즉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아까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짧아서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등식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론에 불과하지만, 개인의 종말 또는 시대의 종말 앞에서 재물의 있고 없음이 중요하지 않다면 프랭클린에게 자본의 도덕성은 과도기적이거나 마지막 시대의 현상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만약 청교도들이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를 닦았고 또 그들의 삶의 형태가 종말론적인 것이었다면, 청교도들은 그들의 삶, 즉 자본주의적인 삶을 종말론적인 것이라 보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런 생각이 가능하다면 청교도들은 이미 자본주의 종말론 또는 종말의 자본주의를 예견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종말론의 차원에서 이해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내적인 모순으로 인한 과잉생산으로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그 잔재 위에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적인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는 맑스주의의 진단이다. 여기서 종말론은 자본주의가 망해야 천년왕국과 같은 역사의 완성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역사의 구조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가 이 세상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현대 인문학의 진단이다. 맑스주의는 미국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이 예언한 자본주의의 종말과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은 미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 이유를 자본주의가 이미 미국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반대를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자본주의가 미국에서 그만큼 용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청교도 시대부터 현재까지 흐르는 미국의 종말론적인 사상 때문일 가능성이다. 그리스도가 지배할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 혹은 곧 닥칠 환란과 휴거에 대한 기대 때문에 자본주의의 탐욕을 마지막 날의 현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도적 제한을 두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자유를 실천하는 이념이라는 공식이 성립한 후에는 자본에 대한 규제는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자본주의의 ‘자유’를 다가올 천년왕국의 가치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본주의에서 다가올 천년왕국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과 자본주의가 세상을 재난과 파괴의 종말로 이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중립적인 입장은 있을 수 없다.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미국의 제도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가 ‘자유’를 지향하는 시스템으로 포장되어 홍보된 역사가 있다. 자유는 원래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들에 의해 기독교의 본질로 그리고 미국정신의 근거로 뿌리내린 개념이었다. 지금도 자유는 미국을 의미하고 대변하는 개념으로 인정받고 있고, 미국은 곧 자유라는 관념의 등식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자유를 표방하는 개념으로 포장되지 않으면 미국에서 수용될 수 없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미국에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이 주류의 시민 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미국의 정신인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최고의 정치와 경제의 제도가 바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논리가 펴졌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가 미국의 신앙으로 변하게 되기까지 오랜 홍보와 선전의 역사가 있었다. 미국에서 ‘기업’이라는 영리를 위한 조직이 19세기에는 법적인 사람의 권리를 갖게 되고, 자유의 주체가 되고, 20세기에는 무소불위의 통제되지 않는 권력으로 부각되는 역사다. 시장의 자유가 그 어떤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자유이고, 시장의 자유를 못 믿는 사람은 자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밀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1960년대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미국의 자유를 자본의 자유와 동일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시장의 자유를 종교적 양심의 자유로 또 미국의 정신으로 승화시킨 건 신자유주의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행태가 용인되어온 미국의 역사 저변에 자본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미국정신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묵시록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픽션이나 실존의 갈등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다.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묵시록의 힘은 어떤 실제적인 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공상과학이란 장르가 묵시록의 테마들을 차용했다고 해서 묵시록이 공상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묵시록에 대한 신뢰가 남다른 미국 보수 기독교인들은 지구온난화의 현상을 믿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종말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선과 악, 재림과 부활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자본주의라는 인간 제도의 남용과 같은 하찮은 이유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온난화의 과학적인 근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미국엔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학적인 사고를 우선시하던 사람들은 묵시록의 종말론을 추종하던 이들을 광신적인 종교에 빠져있고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류가 묵시록의 종말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묵시록을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존적인 픽션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의 묵시록은 급박한 종말의식을 종교적 세계관에서 상식과 과학의 세계관 일부로 만들었다. 냉전 이후에 등장한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는 묵시록의 전환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은 핵무기를 소유한 소수의 국가들에 세상의 운명을 맡기고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불공평한 세상의 현실을 반영했지만, 세계화 시대의 환경재난의 묵시록은 모든 인간을 공범으로 만들어 자본주의 묵시록을 보편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묵시록은 멸망의 묵시록이고 이 시대 유일한 보편적인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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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12 : 맥도날드 블루스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나의 미국은 동네 맥도날드에서 시작한다. 아침에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맥도날드에 들리지 않는 날은 거의 없다. 내가 나타나는 모습이 보이면 주문을 하지 않아도 남미출신 직원은 커피를 따르기 시작한다. 분명한 단골이지만, 장사에 도움이 되는 고객은 아니다. 작은 사이즈 커피에 크림 두 개가 전부다. 직원은 전부 남미 출신 아니면 흑인이다.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다. 아침의 맥도날드는 동네 백인 노인들의 다방이다. 10명 내외의 노인들이 예외 없이 앉아 대화를 나눈다. 주로 전날 스포츠 경기에 대한 얘기나 자동차 문제, 젊은 시절 군대나 최근 정치 얘기가 주된 대화거리다. 대화에서 개개인이 맡는 역할은 언제나 비슷하다. 늘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 늘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맥도날드를 처음 드나들 때부터 내 시선을 끈 한 사람이 있다. 언제나 검은 운동모자를 쓰고 다니는 백인 노인이었다. 군부대 마크와 더불어 한국전쟁 참전용사란 글씨가 박혀 있는 모자였는데, 한 번도 그 모자를 안 쓴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미국에 징병제가 있던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라 거의 모두가 한국전쟁 아니면 베트남전쟁의 참전용사들이었다. 어깨 너머로 그 노인이 한국 어느 지역의 전투에서 싸우던 얘기를 하는 걸 몇 번 들은 적도 있다. 그 경험이 특별하지 않았다면 그런 모자도 쓰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눈인사만 나눴지 한 번도 개인적인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노인이 작년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멤버들도 교체된다.


    맥도날드는 한때 미국의 상징이었다. 맥도날드의 브랜드 로고인 골든 아치(Golden Arch)는 미국의 효율주의와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미국적인 상징이었다.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끝없는 확장과 불패의 상징이었다. 효율주의를 자본주의의 조각난 시간개념에 맞는 ‘패스트푸드’란 음식문화로 완성시켰고, 여기서 근대의 합리성은 패스트푸드의 효율성으로 대체되었다. 맥도날드는 어느 순간 저렴한 햄버거를 효율적이고 표준화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기업이 아니라 미국의 가치와 문화를 대변하는 이념으로 부각되어, 반미 데모의 현장에선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브랜드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강해 어떤 훼손에도 소송으로 대응하는 기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징과 경험의 괴리는 언제나 넓고도 깊다. 그 내부를 직원으로 또는 고객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맥도날드의 상징을 얘기하는 경우는 없다. 그들의 경험은 맥도날드가 상징하는 이미지나 매장 내부 공간을 디자인한 사람들이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그곳에서 일하고 음식을 사먹는 고객들의 몫이다. 최근 맥도날드의 직원들이 미국의 생활임금 논쟁의 주역으로 등장한 이유는 맥도날드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효율주의는 개념에 불과하지만, 그 대가는 최저임금을 약간 웃도는 시급이다. 내가 아는 맥도날드는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노인들이 경로할인 받은 커피 한 잔으로 친구들과 하루를 시작하는 곳이고, 남미의 이민자들이 미국이라는 땅에서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투쟁하는 일터다. 승리의 교향곡보다는 서글픈 현실의 블루스가 더 어울리는 곳이다.


    테일러주의(Taylorism)라는 효율성을 강조한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체제는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 체인점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익숙해졌다. 프레더릭 테일러의 이론은 단순했지만 20세기 미국의 자본주의에 그 어떤 이론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실험은 노동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동작을 줄인 최소한의 동작을 시간으로 환산해 하루의 목표치를 노동자에게 지정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의 효율성 연구는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했지만, 효율성과 경쟁을 20세기의 종교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가 스톱워치를 사용해 철강회사 베들레헴 스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측정해 노트에 기록하는 모습은 20세기 자본주의의 노동자가 만들어지는 장면이었다. 노동의 시간을 분 단위까지로 나누고 그 쪼개진 시간 내에서의 효율성을 측정하여 노동자의 가치를 평가했다. 테일러주의의 의도는 실수나 불확실성을 배제하고 계산과 예측을 할 수 있는 경영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그 본질은 ‘인간적’인 차원을 생산과정에서 배제하여 ‘기계적’인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햄버거를 생산하는 목적은 고객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기업의 기계화된 생산 시스템을 관리하는 게 된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소외된 인간을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내가 목격한 만큼의 인간관계가 이뤄진다는 것은 사람들의 창의성과 저항정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라는 ‘빠른 음식’은 흥미로운 시간의 이해를 담고 있다. 음식이 빨리 제공되어야 하는 이유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노동시간도 짧아진 20세기 중반에 시간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왜 패스트푸드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가난한 자들의 음식문화로 정착하게 되었을까? 맥도날드를 필두로 패스트푸드 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한 1950년대 미국은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던 시기였다. 시간이 갑자기 소중해진 것일까 아니면 차원이 다른 개념의 시간을 살게 된 것일까? 그 시대 미국은 핵전쟁으로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포 속에 살고 있었다. 불안과 공포의 시간은 자본주의에 유용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는데 시간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제국주의가 공간의 개념이라면 자본주의는 시간의 개념이다. 자본주의 문화가 보편화 되면서 시간에 대한 이해도 바뀌게 된다. 시간은 쪼개지고 나뉘고 분리되어 사라지게 된다. 출근표에 시간을 찍고 출근하고 휴식시간이나 일을 마치고 퇴근할 때 또다시 시간을 찍고 나와야 하는 일상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일이 아니라 시간에 사로잡히고 내몰린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시간은 여유가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대상이 되었고 결국은 시간으로부터의 소외라는 현상을 만들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의 의식 속에 자본주의의 시간은 사라진 시간 그리고 남의 시간을 사는 경험으로 남아있다. 패스트푸드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실제적인 시간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몇 분의 시간도 기다리기 힘든 시간이 된다. 시간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자본주의는 햄버거를 만드는 과장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에게도 그 공간은 자본주의의 시간을 확인하고 강요받고 실천하는 곳이다.


    시간이 없다는 인식은 묵시록의 시간 이해다. 미국에서 그 인식을 재확인시켜준 건 냉전 시대의 핵전쟁 공포였다. 패스트푸드의 개발과 함께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이 진행됐다. 핵전쟁으로 먼저 파괴될 도시로부터의 탈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공간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역설적으로 사라졌다. 패스트푸드는 냉전 시대의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 중심에 묵시록의 시간 이해가 있다. 자본주의가 끝나야만 새로운 시간이 열릴 것이란 기대를 일축하며, 자본주의로 시간이 끝난다는 어떤 예언을 패스트푸드는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냉전 시대 묵시록의 공포를 만들어내고 패스트푸드를 통해 ‘사라진 시간의 음식문화’를 만들어낸 자본주의를 묵시록의 철학이라 할 수 없을까. 맥도날드는 몇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으로 유명하다. 구매한 지 몇 년이 지나도 멀쩡한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박물관에까지 전시 되었다는 뉴스가 한때 화제였다. 또 한 달 동안 맥도날드 음식만 섭취하고 몸의 변화를 측정한 사람이 만든 다큐멘터리도 있었다. 음식이 썩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멈추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상태이고, 소비자 인간에겐 사라진 시간을 사는 상태다. 바로 여기서 묵시록의 시간과 자본주의의 시간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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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11 : 젝 케루악과 길 위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내가 긍정하고 싶은 미국은 언제나 헨리 소로우의 글에서 드러나는 상상과 이상의 미국이었다. 그의 사상을 묵시록이란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청교도 묵시록에 저항한 반묵시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콩코드라는 작은 마을에까지 드리워지는 산업문명의 그늘이 싫어 마을 어귀의 호숫가 숲속에 오두막집을 짓고 홀로 살았다. 그 숲은 악한 영들이 가득한 저주의 땅도 아니었고 개발하고 길들여 생산을 유발시킬 땅도 아니었다. 그에게 숲은 군더더기 없는 삶 그 자체를 살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 삶은 문명에 대한 저항이었고, 저주받은 삶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사는 길이었다. 소로우는 그런 삶을 위해 한 시간만 걸으면 됐지만, 케루악은 그런 삶이 길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케루악은 20세기 중반의 소로우였다. 잭 케루악은 소로우가 살았던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로웰 출신이었다. 소로우의 추억이 담긴 매리맥 강은 로웰을 가로질러 흐른다. 소로우의 문학적 그늘 속에서 성장한 케루악은 20세기 변화된 미국의 소루우가 되고자 했다. 시대가 만들어준 조건이나 제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이 미국적인 삶의 자세라는 인식을 이 두 사람에게서 찾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거의 같은 시기에 소로우와 <월든>과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읽은 나 역시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사상에서 낭만과 저항은 자유로운 자아라는 입장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졌다. 자유롭기 위해 그들은 떠나야 했다. 소로우는 자신을 안주할 곳 없는 떠돌이(Sojourner)라 생각했고, 케루악은 그와 비슷한 보헤미안적인 주변인의 삶을 찾아 길을 나섰다. 


    케루악의 책은 출간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부수가 팔리는 베스트셀러다. 그 책은 미국의 의미, 자유의 의미, 젊음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정직한 안내서 역할을 해왔다. 케루악이 다녔던 길을 체험하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나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지만 내 주변에 있는 케루악의 흔적을 모른 척 한 건 아니었다. 책 속의 주인공이 살던 뉴저지의 패터슨이란 곳은 내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았기에 그곳을 지나칠 때 케루악의 책을 떠올렸던 기억이 있고, 책에 나오는 시카고의 거리(South Halsted, North Clark)들을 지나다니며 심지어 졸리엣이라는 도시의 감옥 앞을 차로 지나면서 케루악의 여행을 생각한 적이 있다.


    젊은 세대의 저항과 자유를 추구한다는 케루악의 <길 위에서>란 책에서 묵시록을 읽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핵폭탄이 만들어낸 묵시록의 시대에 대한 인식이 40년대 후반부터 기존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세계관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했고, 미국문학에서 그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이 케루악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케루악이 길을 나선 1947년에서 그의 책이 세상에 나온 1957년 사이 핵무기의 묵시록은 미국 사회에 허무와 저항의 세대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나는 <길 위에서>를 묵시록 시대의 저항문학으로 읽고자 한다.


    <지옥의 묵시록>이 개봉된 1979년,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은 <길 위에서>의 영화판권을 샀다. 두 작품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만, 좀 더 큰 상상력으로 연결되는 부분을 찾을 수는 없을까? 혹시 코폴라는 <길 위에서>를 읽고 묵시록 이후의 삶과 조건을 찾은 건 아닐까? 핵폭탄의 시대에 더 이상 안주할 곳이 없는 삶의 조건, 몸과 마음을 둘 곳 없이 떠돌아야만 하는 삶을 묵시록의 단면이고, 모든 로드 부비라는 것이 결국 그런 존재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진 않았을까? 50년대 미국영화에서 그런 상태를 저항이란 코드로 완성시킨 인물들이 말론 브랜도와 제임스 딘이었다. 하지만 브랜도나 딘의 상징적인 인물도 없고, 묵시록의 절박함도 담지 못하고, 비트의 리듬도 살리지 못한 채 2010년이 되어서야 개봉된 영화 <길 위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문학에서 ‘스크롤’(The Scroll)은 케루악의 <길 위에서>뿐이다. 케루악은 타자기에 용지를 갈아 끼울 필요가 없도록 텔레타이프 종이를 자르고 붙여 긴 두루마리 스크롤을 만들어 썼다. 글 쓰는 행위는 끊임없는 즉흥성이 담보되어야 했기 때문에 생각을 멈추고 종이를 갈아끼우고 여백을 맞추는 것은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흘러야 하는 글의 리듬을 깨는 행동이었다. 마치 자신에게 들려진 음성을 기록하듯이, 색소폰을 부는 손가락의 움직임처럼 언더우드 타자기를 처내려갔다. 케루악은 글을 쓴 게 아니라 타자를 친 것이라는 Truman Capote의 말은, 색소폰고수들이 그들의 음악을 단순히 손가락을 움직여 만들어냈다는 표현을 참고한다면 틀린 것은 아니다. ‘비트’의 의미에 관해선 언제나 몇 가지 해석이 있었지만 내 생각엔 모두 맞는 말이다. 몸이 피곤해 녹초가 된 상태, 강렬한 리듬으로 표현된 시간의 순간, 그리고 케루악 자신이 선호했던 하늘의 복이란 뜻까지 모두 비트세대의 문학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의미들이다. 하지만 케루악을 묵시록이란 관점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건 시간의 리듬으로서의 비트다.


    그가 원고로 남긴 것은 페이지의 구분이나 단락 사이의 여백도 없는 동그랗게 말린 35미터 길이의 스크롤이다. 그 책이 완성되기 까지 여러 해가 걸렸음에도, 케루악은 자신이 수정도 없이 3주 만에 완성한 것이란 인상을 남겼다. 한국에선 잔혹한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4월이었다. 그 결과물은 고대 경전과 예언을 연상케 하는 두루마리 문서였다. 그 문서에는 20세기 핵폭탄 묵시록의 시대를 살던 미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계시된 삶의 지침서가 있었다.


    <케루악은 왜 길을 떠났을까? 책의 주인공은 길을 떠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모든 게 죽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말했다. 모든 게 죽어버린 것 같은 세상을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케루악의 책엔 ‘미쳤다(Mad)’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선호하는 사람을 “미친 듯이 살고 미친 듯이 말하고, 미친 듯이 구원받으려” 하는 사람이라 말했다. 여기서 케루악은 낭만적인 여행가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 중산층의 이념에 저항해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청년.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은 자아를 찾아 길을 떠난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그보다 더 급박하고 절박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 절박함을 실존적이기 보다는 종말론적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책에서 자신의 역인 주인공의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샐 파라다이스(Salvatore Paradise)는 ‘구원자’와 ‘천국’이란 뜻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비트세대의 주역들의 삶은 전위적이고 보헤미안적이었지만 케루악의 기본적인 성향은 술과 마약으로도 감출 수 없었던 보수적인 가톨릭 신앙이었다. 떠오르는 스타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뉴욕에서의 화려한 삶을 동경하지 않았다. 비트세대의 다른 동료들처럼 반전, 히피운동의 정신적 리더가 되지도 않았고 좌파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 케루악에게 미국의 세상은 몰락하고 있었고, 그가 길을 나서야 했던 이유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케루악에게 몰락의 언어를 제공해준 건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18년 <서구의 몰락>이란 책으로 서양의 역사해석에 큰 도전을 준 오스발드 스팽글러였다. 한 문명이 기술적으로 완성될 때 창의성과 생명력을 잃고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되고 몰락으로 끝난다는 스팽글러의 역사관은 케루악과 그의 동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역사관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끝나는 종말의 묵시록이 아니었다. 문명은 몰락과 문화의 탄생을 반복하는 게 역사였다. 스팽글러의 서구문명 몰락의 진단은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살상 가운데 등장한 서구문화의 의기의식을 대변한 것이었다. 객관적인 근거보다는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로부터 받은 감동을 역사로 풀어냈고 서구의 몰락을 논증해내기 위해 다른 역사들은 조역으로 동원한 저술이었지만, 당시 많은 이들이 공유했던 위기의식을 역사의 철학과 생명의 리듬으로 설명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케루악은 ‘비트’라는 단어도 그 책에서 착안했고, 몰락하는 미국문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의지도 스팽글러에게서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케루악이 길을 나서야 했던 핵무기의 냉전시대는 그에 대한 공포심으로 유지되던 시기였다. 핵전쟁의 상황에 대한 미국정부의 지침은 가만히 숨는 것이었다.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금지사항이었다. 냉전체제는 핵무기의 공포 앞에서 숨는 연습을 강요하면서 유지됐다. 20세기를 ‘미국의 세기’(The American Century)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그 세기의 본질적인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1950년대는 미국역사에서 가장 종교적인 시기였고, 그 어느 때보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다. ‘복음주의’라는 미국의 보수 기독교가 탄생한 시기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등장했고, 19세기말 천년주의 묵시록이 위세를 떨친 지 반 세기만에 소련과 냉전이라는 적그리스도와 최후의 전쟁의 징후들이 발견했다. 냉전의 공포와 종교의 위안은 묵시록을 향한 비전으로 이어였다. 1950년대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전시경제 효과로 경제적으로는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다. 핵폭탄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포의 세상을 사는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소비문화와 인간을 소비자로 이해하는 소비자주의(Consumerism)도 이 시기에 미국의 이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국의 청교도들에게 마지막 시대를 사는 덕목은 절제와 절약이었지만, 냉전이란 세속의 묵시록은 공포를 사는 대가로 과시와 과욕의 소비를 보상으로 제공했다. 케루악과 비트세대는 핵폭탄이 선언한 묵시록의 질서를 거부하고 길을 나선 것이다.


    케루악에게 ‘길’은 공간보다 시간적인 개념이었고, 특히 묵시록의 시간에 대한 저항이자 도피의 도구였다. 그가 길을 통해 찾은 시간은 주어지고 정해진 시간의 리듬과 질서를 깨는 즉흥적인 시간이었다. 서구문화의 시간은 종말이라는 끝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 종말의 시간은 묵시록이란 드라마로 전해져 왔고, 케루악의 시대에 그 드라마는 핵폭탄이라는 한 순간에 역사와 시간을 끝낼 수 있는 심판의 무기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종말의 시계는 끝을 향해 움직이기 있었지만, 케루악은 그 시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명역사의 몰락 이후에 또 다른 생명의 리듬을 소유한 정신적 가치가 등장한다고 믿었다. 그가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의 길을 나선 이유는 다른 시간을 살기 위해서였다. 몰락의 시간이 아니라 즉흥적 순간의 시간, 비트의 시간을 살기 위함이었다. 그 시간은 그에게 ‘나의 시간’이었고 언제나 지금의 시간이었다. 역사의 시간에 갇힌 삶이 아니라 원시적 생명의 리듬을 잃지 않는 삶이었다. 케루악에게 길의 끝이었던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샐의 친구 딘은 원주민 소녀에게 손목시계를 건네주고 수정구슬 하나를 받아 챙기는 장면이 나온다. 계산된 시간을 포기하고 자연의 시간을 찾는 모습이었다. 케루악에게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시간은 에덴동산의 시간이었다. 청교도들이 그랬듯이 에덴을 회복하기 위해선 광야의 길로 나서야 했다.


    책에서 길의 끝은 멕시코에 있었다. 멕시코에서 남미어로 ‘내일’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샐은 천국을 연상했다. 천국은 내일에 있었다. 천국으로의 구원자 샐 파라다이스는 길 위에서 천국을 찾았다. 마침내 여행길의 끝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샐은 그곳을 ‘성경적’인 곳이라 했다. 성경적인 곳의 원형은 에덴이었고 파라다이스였다. 왜 멕시코시티를 그렇게 이해했을까? 그곳에서 문명의 역사, ‘서구역사의 사막’에 대한 대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케루악은 멕시코에서 몰락의 역사를 구할 원시의 역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요즘 같았으면 오리엔탈리즘이라 욕을 먹었겠지만 그의 의도는 미국의 묵시록에 대해 저항이었다. 서구역사의 끝인 묵시록의 시간이 아닌 영원한 시간, 그 내일의 천국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길을 떠났고, 멕시코시티에 남아 있는 고대 남미의 흔적에서 길의 끝, 즉 묵시록의 종말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끝이 없는’ 곳을 찾은 것이다. 미국의 묵시록의 시간과 멕시코의 영원의 시간의 대조시키고, 멕시코의 문화에서 영원한 내일의 시간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서양인의 환상일지 모르지만 케루악에겐 묵시록의 대안으로 필요한 환상이었다.


    케루악의 글쓰기는 묵시록의 시간을 역행하는 행위였다. 그가 추구했던 즉흥적인 리듬의 산문은 묵상이나 성찰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반묵시록의 퍼포먼스였다. 재즈의 즉흥연주(Improvisation)는 음악의 시간을 멈추고 기다리게 하는 행위였다. 종말로 흐르는 시간에서 생명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선 그 시간을 멈춰야 했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길은 시간의 순간을 즉흥적으로 사는 것이었다. 시간의 즉흥성을 자연의 리듬에서 찾았던 케루악은 멕시코에서 그 리듬의 비트를 찾았다. 그리고 케루악이 불교에 심취하게 된 이유 역시도 묵시록의 시간을 깨는 또 다른 가능성을 불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미래와 종말을 지향하는 시간에 대한 환상을 깰 수 있는 열반과 깨달음의 순환적 시간을 불교에서 발견했다. 이런 시간의 이해를 실천하는 삶은 주류의 규범에 저항하는 삶이었다. 케루악은 멕시코의 원주민들에게서 ‘펠라인’(Fellaheen)의 삶을 보았다 (펠라인이란 단어는 원래 스팽글러의 용어인데, 케루악이 문명에서 소외된 주변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다). 몰락하는 문명의 역사적인 시간과는 관계없는 무목적이고 토속적인 삶이 그것이었다. 역사의 중압감이나 미래의 약속에 구속됨이 없는 생명의 리듬과 이 순간의 비트에 충실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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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10 : 1950년대 핵폭탄 시대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20세기의 가장 큰 묵시록 사건은 히로시마의 핵폭탄이었다. 서양에선 오랜 시간 신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꾸어 왔지만, 그 능력이 세상을 끝낼 수 있는 힘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히로시마의 핵폭탄 이후 전개된 역사는 세상이 곧 파괴된다는 묵시록의 드라마였다. 냉전이라고도 불렸던 이 드라마는 세상의 종말을 전제로 한,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끝을 공포 속에서 기다려야만 하는 오랜 전쟁이었다. 지금은 희미해진 기억일 수 있으나, 80년대 후반 냉전체제가 와해될 때까지의 역사는 핵폭탄의 묵시록과 씨름하는 시간이었다. 일상의 삶에서 학문과 예술까지 그 묵시록의 그림자는 길고도 뚜렷했다. 미국은 당연히 그 드라마의 주역이었다. 서구역사에서 세상의 끝은 한때 공포의 전쟁과 지옥의 불꽃으로 형상화 되었지만, 핵폭탄은 그 드라마의 끝이 인간이 만든 과학에 있음을 예고했다. 1945년 이후 1950년대 후반까지 미국에서 핵폭탄의 묵시록 시대의 본질을 또 그 시대를 견디고 살아나가는 방식을 예술로 표현한 세 사람이 있다. 비밥(Bebop)재즈의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추상표현주의의 잭슨 폴락(Jackson Pollack), 그리고 비트세대 문학의 잭 케루악(Jack Kerouac)이었다. 


    그들의 작품세계에서 묵시록을 읽는 건 이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파커와 폴락과 케루악이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예술작업을 했고 그들의 장르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이뤄냈다는 사실에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이 공유했던 공통적인 가치는 아마도 지금(Now)이라는 순간과 즉흥성이라는 자세의 중요함일 것이다. 시간이 미래에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쌓여있는 게 아니고 다만 지금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직관적 판단을 그들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비트세대의 ‘비트’(Beat)는 여기서 그 순간의 시간이었고, 폴락의 드립페인팅의 드립(Drip)은 붓이 움직이는 시간의 흐름을 부정했다. 폴락과 케루악은 그런 시간과 종말의 동기의식을 재즈에서 찾았다. 특히 케루악과 비트세대의 작가들에게 비밥은 그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길 위에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선 그 책에서 재즈의 리듬을 찾아야 한다. 1947년 뉴욕에서 버스로 길을 떠나 도착한 곳은 당시 재즈의 블루스로 유명했던 시카고였다. 케루악은 서부로 출발하기 전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들은 비밥 재즈의 ‘빛의 소리’는 그의 여정을 위한 축도와도 같았다. 케루악은 찰리 파커에 대한 시를 썼을 정도로 그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고, 자신의 글쓰기 이론을 재즈와 비교해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글쓰기는 비밥의 즉흥적 창의성을 모방한 것이다. 비밥의 독주가들이 누린 시간과 호흡의 자유를 글에서 표현하고자 했고, 색소폰을 불듯이 이미지를 글로 묘사하기 원했다. 케루악은 또 자신의 글이 수정하지 않고, 쉬지도 않고 써내려간 즉흥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남기려 했다. 따라서 케루악 책의 이런 부분을 망각하면 남는 건 피상적이고 밋밋한 글읽기뿐이다. 코폴라 감독이 20년 넘게 그 책을 영화로 제작하려 했지만 실패했던 이유는 케루악의 글의 리듬감을 영상으로 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 사실은 실제 영화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폴락 역시도 밤낮으로 재즈를 들을 만큼 심취해 있었다. 그 시대의 재즈음악을 자신의 미술처럼 예외적이고 창의적인 예술이라 생각했다. 잭슨 폴락이 물감을 캔버스에 떨어트려 남긴 점들과 불규칙적인 선은 즉흥적인 재즈의 선율이었다. 그 선율의 시간은 이어지지 않는 시간, 지금밖에 기약할 수 없는 시간 이었다. 폴락은 자신의 작품을 핵폭탄 시대의 미술로 이해했었고, 그 이해는 음악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남겼다. 


잭슨 폴락 (1912~1956)


    폴락은 케루악이 길을 나섰던 1947년 드립페인팅의 실험을 시작했고, 케루악의 책은 폴락이 사망한 다음 해였던 1957년에 출간됐다. 1947년이라는 해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냉전이라는 묵시록의 드라마가 시작하던 시기였고, 그들의 새로운 실험은 그 묵시록에 적응하고 또 저항하려는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에서 우연이 아닌 필연의 가능성을 읽게 만든다. 1947년은 또 시카고의 과학자들이 Doomsday Clock(지구종말시계)라는 걸 만들어 핵폭탄의 위기로 세상이 종말에 얼마나 가까이 와있는지를 측정하기 시작한 해였다. 2016년 12월 말, 그 시계는 종말 3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종말시계는 냉전시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묵시록의 시간을 살고 있음을 망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폴락은 1950년 한 인터뷰에서 그 시대의 화가가 과거의 방식으로 핵폭탄의 시대를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기법을 필요로 한다는 말로 자신의 드립페인팅(Drip Painting)의 방식을 옹호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핵폭탄의 시대를 어떻게 드러냈는지 파악하려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볼 근거가 없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핵폭탄 투하로 잿더미가 된 히로시마의 도심을 공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폴락의 작품을 떠올리는 것은 착시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보인다. 그의 드립페인팅에서 무엇을 보았다고 말해야 할까. 그의 작품에서 갈기갈기 찢겨져 어떤 분별력도 허락하지 않는 황폐한 공간을 읽을 수 있지만, 거기서 서예의 선율을 읽는 사람도 있다. 폴락이 1947년에 완성한 드립페인팅의 초기 작품의 제목은 “Full Fathom Five(다섯 길 바닷속)”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등장하는 대사의 일부다. 풍랑으로 좌초한 배에서 익사한 아버지가 다섯 길 다닷속에 누워있고, 그 뼈는 산호로 변하고, 눈은 진주가 되어버린 처참한 광경을 묘사하는 대사다. <템페스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유토피아와 종말론에 대한 상상력이 뚜렷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신대륙 발견이 제공한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과 17세기 유럽의 종교와 정치가 영국에서 거대한 묵시록의 서사로 발전했던 역사가 그 배경에 있었다. 서양에 근대라는 시대를 열게 해준 이념은 유토피아와 묵시록이라는 뿌리가 같은 상상력이었다. 폴락이 그의 작품에 그런 제목을 붙인 이유가 건 <템페스트>의 묵시록 때문인지 아니면 작품 속에 바닷속 심연의 묵시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해석의 여지만 남길 뿐 명확하지는 않다.



(Full Fathom Five, 1947)


    폴락은 기존 회화의 캔버스보다 훨씬 큰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펼쳐놓고 그 위에서 물감을 떨어트렸다. 눈높이의 이젤에 걸쳐진 캔버스에 붓을 든 손을 움직여 그린 그림과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눈높이에서 손을 내밀어 맺는 관계가 개인적인 친밀감을 나타낸다면,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서 맺는 관계는 전체적이고 지배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넓은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폴락 자신도 그림의 일부가 되어 물감이 묻은 발자국을 남기는 일도 있었다. 그의 드립페인팅에서 어떤 묵시록을 읽는다면 무리일까. 물감을 공중에서 떨어트리는 과정이 폭탄을 공중에서 투하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고, 완성된 작품이 폭탄처럼 투하된 물감의 방울들이 퍼지고 번져서 만들어진, 어떤 의미도 용납하지 않는 무엇이라는 사실에서 묵시록의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는 상상이다. 화가가 그림 안에 있어야 했다는 사실은 캔버스가 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헤어 나올 수 없고 객관적인 시각이나 관계가 불가능한 혼돈의 상태 그리고 파괴되고 분열된 전체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그런 형태를 뜻하는 용어는 사구사상에서 묵시록밖에 없다. 폴락에게 드립페인팅의 의미는 핵무기 시대 미술의 도구가 될 수 없었던 이젤과 붓의 죽음 위에 서서 그가 제공한 묵시록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폴락의 드립페인팅에서 묵시록을 읽은 사람이 있다. 당시 유명한 미술비평가 헤롤드 로즌버그(Harold Rosenberg)였다. 폴락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을 ‘묵시록적인 벽지’(Apocalyptic Wallpaper)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그 후 이 표현에 주목한 사람들은 ‘묵시록’보단 ‘벽지’쪽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실제 두 단어의 의미를 함께 살린다면 폴락에 대한 상당히 재미있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Number 1 - Lavender Mist, 1950)


    <벽지란 무엇인가? 19세기 벽지가 상업적으로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이후 벽지는 자체적인 존재감이 없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어떤 평론가가 누군가의 작품을 벽지에 비교한다면 그 내적인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앤디 워홀이 한때 벽지를 순수한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했지만, 팝아트의 입장에서 그런 작업을 했다는 것 자체가 벽지의 낮은 위상을 반증해 주는 것이었다. 폴락의 드립페인팅을 벽지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설명할 수 있는 의미를 찾기도 힘들고, 어디가 중심이고 무엇이 주제인지 파악하기 힘든 추상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다는 한 평론가의 비판을 폴락은 오히려 자신의 의도를 간파한 찬사라 여겼다. 중심이 없고 시작과 끝이 모호한 작품을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준비된 배경에 불과하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로즌버그의 평가도 전문적이었지만 비슷했다. 폴락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품엔 긴장감이 없고 작가들이 만들어낸 캔버스의 세계에 만족하면서 결국은 그들의 예술성을 소멸시키는 자기부정으로 빠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로즌버그는 왜 그런 벽지가 묵시록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폴락의 작품이 분열과 파괴된 상태를 연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하지 않았다. 실제 폴락의 묵시록은 그 작품의 벽지성과 연결되어 있다. 벽지의 그림은 한 장으로 끝나지 않고, 그 중심이 한 가운데 위치해 있지도 않다. 벽지는 한 장씩 연결되어 공간의 전체, 그 세상을 다 채워야 제 역할을 하게 된다. 폴락의 벽지엔 시작도 끝도 구분할 수 없는, 분열되고 파괴된 세상이 존재한다. 한때 폴락은 한쪽 벽에 자신의 작품을 두고 대형 거울로 반사시켜 그림으로 공간 전체를 채우는 실험을 했었다. 자신이 의도했던 핵폭탄 시대의 미술이 그의 드립페인팅이었고, 그 기법을 통해 빠져나올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는 세상의 전체적인 파괴와 몰락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보는 사람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한 게 아니라 묵시록의 벽지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는 요청이었다. 그의 드립페인팅이 삼차원적인 깊이를 추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묵시록의 붕괴된 공간은 세상과 사물의 삼차원적인 특징을 상실한 곳이기 때문이다. 로즌버그는 그의 명성에 어울리는 직감적 통찰력으로 그런 그림을 묵시록의 벽지라 부른 것이다.


    핵폭탄의 묵시록이 지배하던 냉전시대 초기에 치열했던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시각적 경쟁을 포함했다. 핵폭탄 실험 직후 하늘까지 치솟아 오르는 죽음의 버섯구름을 찍은 사진은 즉각 공개되어 환상과 공포의 분위기를 경쟁하듯 키워나갔다. 폭탄은 히로시마에서 이미 터졌고, 묵시록은 더 이상 미래형 종말론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핵폭탄 실험을 기록한 사진들은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묵시록의 드라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이런 묵시록의 이미지가 냉전의 도구이자 무기였다면, 폴락의 미술작품도 그런 시각에서 볼 수는 없을까?

    냉전시대 미국정부가 미국의 우월성을 알리기 위해 문화예술계를 전략적으로 지원해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미키마우스에서 뮤지컬까지 미국의 대중문화가 전 세계가 갈망하고 향유하는 자본의 보편적인 문화가 되기까지 CIA와 같은 기관의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비밀은 아니었지만, 그 구체적인 정황은 냉전시대의 기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잭슨 폴락의 추상표현주의까지도 그런 전략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폴락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부각시키는데 미국정부의 비밀스런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이 사실은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적인 미술로 홍보되고 부각되는 과정과 냉전체제의 치열했던 경쟁의 단면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상식과 실용을 중요시 했던 미국사회에서 20세기 초반 유럽의 추상적인 예술은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다. 폴락의 드립페인팅은 미국 회화의 전통이 아닌 유럽의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 미국적이라 할 만한 특별한 내용은 없었고, 그가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가로 부각되는 과정도 불분명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이념전쟁이라는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해지는 면이 있다. 추상표현주의는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맛서는 자유진영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소련의 리얼리즘이 통속적이고, 소재의 제한이 많았고, 사회주의 이념의 통제를 받는데 반해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미국의 예술은 표현의 자유와 작가의 자율성이 자본주의의 속성 안에서 절대적으로 보장받는 예술이라는 논리였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자유’였다. 미국에는 자유가 있고 소련에는 통제가 있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CIA에선 당시 극단적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던 추상표현주의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폴락의 그림이 미국의 실용적 진취성과는 거리가 먼 유럽의 데카당스와 허무주의를 대변한다는 비판이 있었어도 ‘자유’라는 깃발 아래 미국적인 것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이런 전략 아래 폴락은 미국적인 작가가 되어야 했다. 언제부턴가는 폴락에 대한 설명으로 ‘와이오밍 주 출신의 카우보이’란 수식어가 붙어 다니며 그를 시골 출신의 토속적인 미국작가로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의 작품의 크기를 미국서부의 거대하고 광활한 공간을 재현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여기서 새로운 질문을 해보자. 폴락의 작품을 CIA에서 주목한 이유를 리얼리즘과 추상주의의 이념적 대립이 아니라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냉전의 묵시록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냉전이 묵시록의 이미지 전쟁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CIA에서 본 것은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자유로운 작가정신이 아니라 버섯구름의 사진보다 더 큰 묵시록의 암시가 아닐까? 사진의 리얼리즘보다 추상화의 암시가 묵시록의 드라마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강박증을 증폭시킬 수 있고, 냉전의 승리는 그 초조함에 달려있다고 보지는 않았을까? 답은 어디서도 찾을 없다. 폴락의 작품을 보고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위에서 참고한 로즌버그의 글은 그의 유명한 에세이 “The American Action Painters"(1952)이다. 냉전시대 CIA와 미국 예술계의 관계에 대해선 Frances Saunders의 연구가 독보적이다 - Who Paid the Piper?: CIA and the Cultural Cold War. CIA가 비밀리에 지원한 것은 잭슨 폴락만이 아니라 Willem de Kooning과 Mark Rothko와 같은 동시대 미국작가들이 대상이었다. 폴락의 인터뷰 Jackson Pollack: Interviews, Articles, and Reviews란 책에 실려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이 지배하던 냉전시대 초기에 치열했던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시각적 경쟁을 포함했다. 핵폭탄 실험 직후 하늘까지 치솟아 오르는 죽음의 버섯구름을 찍은 사진은 즉각 공개되어 환상과 공포의 분위기를 경쟁하듯 키워나갔다. 폭탄은 히로시마에서 이미 터졌고, 묵시록은 더 이상 미래형 종말론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핵폭탄 실험을 기록한 사진들은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묵시록의 드라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이런 묵시록의 이미지가 냉전의 도구이자 무기였다면, 폴락의 미술작품도 그런 시각에서 볼 수는 없을까?

    핵폭탄의 묵시록이 지배하던 냉전시대 초기에 치열했던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시각적 경쟁을 포함했다. 핵폭탄 실험 직후 하늘까지 치솟아 오르는 죽음의 버섯구름을 찍은 사진은 즉각 공개되어 환상과 공포의 분위기를 경쟁하듯 키워나갔다. 폭탄은 히로시마에서 이미 터졌고, 묵시록은 더 이상 미래형 종말론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핵폭탄 실험을 기록한 사진들은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묵시록의 드라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이런 묵시록의 이미지가 냉전의 도구이자 무기였다면, 폴락의 미술작품도 그런 시각에서 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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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9 : 묵시록의 영웅 트럼프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한국에서 요즘 많이 쓰는 ‘집단적 지성’이란 말을 접하면서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의심을 품은 적이 많지만 나 역시도 그에 대한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트럼프 대통령’이란 상상하기조차 싫었던 말을 듣게 되면서 깨졌을 때까지는 말이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예선전을 이기도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 나는 그 마저도 인정하기 싫어 뉴스 읽기를 거부했었다. 그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뉴스를 미국의 어떤 정신의 몰락과 내가 아는 묵시록의 한 페이지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의 충격도 그의 당선 소식이 준 충격과는 비길 수 없었다. 세상의 예측은 다 틀렸고, 미국의 경제와 정치의 내막을 가장 잘 알 것 같았던 뉴욕 타임스의 Paul Krugman도 자신이 미국을 잘 모르고 있었노라 고백을 하고 말았다. 지난 한국의 총선과 영국의 Brexit도 그랬다. 왜 빅데이터와 SNS의 개명된 시대에 그렇게 많은 돈과 기술을 투자하고도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그 개명된 시대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작동한 것일 수 있다. 어쨌거나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탄식하는 일은 모두에게 남겨진 몫이 되었다.  


    나는 미국의 선택을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없다는 종말론적인 심정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으니 정반대의 극단적인 수를 던져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문화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였다. 동성애 결혼 문제에 대한 법원의 진보적인 판결이 나오고 다수의 미국인이 이런 결정을 지지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다른 진보적인 이슈들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는 것으로 보였다. 오바마케어라 불리는 국가가 관리하는 의료보험 제도도 보수주의자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면서 진보적인 색체의 정치가 주류로 정착되는 듯했다. 그에 따라 보수권 내에서도 새로운 정치권의 스펙트럼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찾아나가려 한다는 느낌도 받았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그게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개표 직후부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 시골의 가난한 백인남성들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외되고 주류사회의 변화를 받아드릴 수 없었던 그들이 정치적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것이 반란이었다면 그 의미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는 과거 어느 대통령 후보보다도 더 많은 81%의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나온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그 뿌리가 근본주의에 있고, 근본주의는 19세기 미국의 전천년설의 묵시록을 수용한 사람들의 신앙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지난 웹진의 글에서 다룬바 있다. 그들의 신앙이 정치화 된 시기를 1970년대 말이라고 흔히 얘기하는데, 나의 입장은 그 현상을 미국역사 전체에서 찾아야 하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한 용어로 묵시록이란 개념을 여기서 쓰고 있다. 70년대 말 복음주의 신앙의 정치운동화가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성공하게 된 이론적 배경에는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과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만남이 있었다. Frederick Hayak에서 Milton Friedman까지 ‘자유’라는 개념을 화두로 삼아 세상의 가치를 자본주의의 가치로 바꿀 꿈을 꾸고 있던 신자유주의에겐 유권자가 필요했고, 정치적 플랫폼이 필요했던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인들에게 ‘개인의 자유’만큼 매력적인 용어는 없었다. (60년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 이후 비대해진 국가권력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암묵적 적그리스도로 보았던 근본주의 신앙과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자본의 자유를 추구하던 세력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신앙운동이 바로 미국의 뉴라이트(New Christian Right)운동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들의 타협적인 도덕관에 맛서는 순혈의 ‘도덕적 다수’라 불렀다. 그들의 세계관은 미국의 묵시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몰락은 그 세계관의 토대였고, 세상은 적군과 우군으로 구분되었고, 적을 대하는 자세는 언제나 폭력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세계관은 청교도 이후 미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으로, 현대 미국의 종교와 정치는 이 세계관이 신자유주의 세계관과 만나 변신한 형태, 곧 70년대 후반 근본주의 개신교의 ‘도덕적 다수’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등장해서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는 비극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 없이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성공한 이데올로기가 늘 그렇듯이,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그 테두리의 밖은 상상도 하기 힘들게 되었다. 성공한 이데올로기는 일상과 접목된 보편의 철학이 된다. 철학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반민주적인 철학이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자본가와 기업인에 의한 절대적 지배를 꿈꾸고 승자와 패자로 사람을 구분하는 도박의 철학이다. 그 철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상을 움직이는 현실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현실을 이길 수 있는 건 비판이 아니고 혁명뿐이다. 그리고 모든 혁명은 주된 텍스트는 묵시록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그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선택한 신자유주의 철학에 의해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판의 대상이 될 신자유주의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미래를 모르는, 아니 미래가 없는 묵시록의 혁명이 아니었을까.


    좀 더 현실 정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트럼프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한 이유는 진보적인 이슈들을 수용하는 사회분위기에 저항하는 면도 있고,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철저하게 밖으로 내몰린 현실에 대한 왜곡된 표현이라는 면도 있다고 해야 하겠다. 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트럼프라는 인물에게서 찾아야 한다. 실제 트럼프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한 유권자들은 많지 않았다. 소외된 백인들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분노의 정치를 공공연히 말하는 트럼프에게서 그들의 아바타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도 없었고, 전통적인 도덕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았고,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었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았던 세속의 인물인 트럼프를 보수 기독교인들이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묵시록이란 주제에 맞는 간명한 설명 하나가 가능하다. 그들은 트럼프를 묵시록의 영웅으로 본 것이다.  


    트럼프의 세계관은 묵시록에 기초한 것이다. 세속화된 그의 묵시록에서 종교적인 언어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은 없었지만, 세상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근본주의 묵시록의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세상을 선과 악이란 이분법으로 이해했고, 미국이라는 선과 테러라는 악의 두 축의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싫어했다. 세상의 선과 악이 너무나 분명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설명은 과거의 정치, 행동이 아닌 말의 정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선을 실천하기 위해서 폭력은 불가피할 수도 있었다. 세상은 무질서와 테러의 위험 앞에서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고, 지금이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그의 선언에서 진리와 예언을 읽은 사람은 의뢰로 많았다.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웃어넘길 수 없는 현재의 시간에 대한 진단이고 묵시록의 예언이었다.  


    <Waiting for Armageddon>은 10년 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끝낼 아마겟돈 전쟁이 곧 일어난다는 묵시록을 믿는 약 5천만 명 정도라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을 주제로 하고 있다 (Youtube에서 볼 수 있음). 비교적 편견 없이 그들의 신앙과 입장을 다룬 영화로, 묵시록의 신앙이 개인적인 믿음을 넘어, 곧 파괴되어 없어질 세상에 대한 인식이 정치화되어버린 현실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의 현상으로, 선택된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한 순간에 하늘로 사라지는 휴거를 믿는다. 그 순간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환란을 겪게 되고, 예루살렘에서 재림예수가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최후의 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 천년왕국을 일으킬 것으로 믿는다. 이 묵시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를 현실의 일부로 이해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장르가 미국 영화의 대표적 장르로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묵시록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가 오천만 명이 되고, 그들이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세한다는 게 미국의 현실이다. 


    트럼프가 선과 악을 넘어선 니체적인 영웅이라면 무리가 있을까. 자신의 삶이 전통적인 종교의 선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는지 그에게 악이란 개념도 종교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윤리를 넘어서 묵시록의 결단을 요구하면서 대통령이 됐다. 동성애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전통적인 도덕관이나 가치관의 회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웃에 담을 쌓고자 했고, 불법채류자들에게 가혹해져야 한다고 했다. 모든 국가는 한국은 한국의 문제이고 위대한 미국이 망하기 직전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고, 완전히 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는 협박도 있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립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현대 정치의 공식은 그에게 불필요했다. 암울한 공포의 디스토피아적인 비전만으로도 대통령이 되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은 묵시록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묵시록의 영웅은 재림예수일 필요도 없고 적그리스도일 필요도 없다. 세상의 몰락을 상기시켜주고 그에 합당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니면 몰락의 사실을 자신의 말과 제스처로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런 영웅이 되기 위해 트럼프는 종교적일 필요도 없었고,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신학의 본질은 이미 미국적인 것으로 미국의 정신 속에 녹아져 있었다.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는 21세기에 많지 않다. 트럼프는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묵시록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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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8 : 미국의 세대주의 신학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미국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의 정서에 작용하는 분열증 같은 것 때문이다.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진보와 실용과 기술을 앞세워 나라를 발전시켰지만 아직도 가장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나라로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종교제도에 구애받지 않는 세속정치를 상상했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정치화된 종교와 종교화된 정치다. 종교의 정치가 뜻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등장한 억지가 도날드 트럼프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분열증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 갈등이 우리가 흔히 아는 과거에 집착하는 종교의 보수성과 실용적인 가치를 앞세우는 정치의 대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의 지배적인 종교성향은 실용을 앞세우는 정치와 마찬가지로 미래지향적이다. 청교도들의 시대 이후 미국은 미래, 아니 하나님의 미래를 준비하는 나라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 내용을 이 글에선 묵시록이라 부르고 있다. 과거의 진리보다 미래의 예언에 의해 움직이는 정서적 성향은 미국의 정신을 특징짓는 요소다. 이를 증명하는 예는 청교도 신학과 독립의 선언, 개척시대의 논리 등에서 찾을 수 있고 최근에는 9.11 이후 미국의 사명을 재천명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묵시록의 신학은 미국의 사명과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찾는 역사의 원동력이었다. 미국정서의 분열은 미국의 정치와 종교, 더 나아가 철학과 신학이 서로를 멀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의 종교와 정치는 과거와의 단절을 덕목으로 인식해 왔다. 과거에 얽매이는 종교는 유럽으로 충분했고, 미국은 유럽과 세상의 미래가 되어야 하고 신학은 이를 예시해야 했다. 신학적으로 이 문제는 예언의 문제였고 구체적으로 천년왕국의 문제였다. 희랍시대 이후 서구사상의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중세의 신론도 근대의 인식론도 아닌 고대의 종말론이었다. 이것은 신학의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최근의 서구사상이 종말론을 되찾은 것은 막장으로 치닫는 정치에 대한 환멸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종말론적인 사유가 미국의 역사에서 배양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사유는 언제나 종말의 시제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인식으로 시작한다. 천년왕국으로 환원되는 종말론은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긍정적인 면이 많은 현상이었지만, 그 미래는 환란과 전쟁과 심판을 수반하는 것으로 떨림과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예수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전후관계를 따져 구분되는 전천년설과 후천년설 또는 무천년설 등의 용어들은 19세기 미국 기독교를 통해 신학적인 역사이해로 발전했다. 특히 전천년설은 신학의 범위를 넘어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에서 통용되어 온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그 어떤 이론보다 더 크고 실제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예수의 재림과 돌아온 구세주의 구조와 논리는 미국 묵시록의 원형이었고, 묵시록과 그 상상력은 미국적인 사상의 무의식을 형성했다. 역사적으론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19세기 말 미국이 주도한 세계 선교운동의 동기가 되었고, 20세기 미국의 근본주의 그리고 복음주의 신앙의 신학적 모태였고, 미국 대중문화와 산업의 가장 큰 동기의식으로 작용해왔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미국에 가장 많다는 사실은 그 결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인인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성향의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의료보험과 같은 빈곤층에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국가제도를 반대하고, 총기규제를 반대하며, 거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을 옹호하고 숭배하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또 최근에는 지구의 온난화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본주의 속 인간의 삶이 그 원인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왜 이들은 보수주의 이념도 아니고 기독교 신앙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슈들로 뭉쳤을까?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예가 있다. 1970년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회적 파장이 컸던 <All in the family>라는 TV 시트콤의 주인공 알치 벙커(Archie Bunker)가 바로 그런 보수주의자였다. 뉴욕의 부둣가 하역장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하던 벙커는 개신교 백인 외에는 모든 인종을 싫어하고, 당시 인기가 없던 닉슨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딸과 사위에 대항해 억지 주장을 펼치면서 언제나 큰 웃음을 자아냈다. 왜 자신도 가난하게 살면서 부자들에게 더 세금부담을 지우는 걸 반대하냐고 사위가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은 아직도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부자라서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면 부자가 되고 싶은 자신의 의지를 꺾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했다. 나도 부자가 되는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자들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의외로 흔하게 접할 수 있다. 가난한 내가 이웃의 부자와 크게 다르지 않고 노력만 하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게 되기까지 미국의 자본주의가 벌여온 자본친화적인 의식개조 작업이 있었지만 여기서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자본주의가 곧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는 자유를 뜻하고 자유는 곧 미국이라는 입장으로 국민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반대나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나 총기규제 반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 설명은 자신의 이익과는 상관이 없는 입장을 지지하게 만드는 종교적인 차원을 담아야 하고, 미국에서 그 설명은 종말론적인 세계관, 구체적으로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에 의거한 역사의식으로 가능하다. 


    전천년설을 다루기 전에 19세기 초반 미국의 상황으로 잠시 들어가 보자. 그 시대 미국은 이전 역사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기독교 교리의 해석과 새로운 종교운동과 실험의 공간이었다. 독립전쟁을 이기고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영토 확장을 위해 서부로 눈을 돌렸다.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의 모든 땅이 미국에 주어진 운명이자 권리란 주장이 등장했고,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서부로 이주하는 행위를 개척의 정신 또는 미국 정신의 실천으로 보는 시각이 퍼졌다. 원주민들에게는 성스러운 조상의 땅이었지만 개척자들에겐 문명의 손길을 기다리는 황무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부로 진출할수록 기존 교회나 교단의 영향력은 미치지 못했다. 교리를 지키는 교회가 없다는 것은 교리의 통제력도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초반 미국의 영토가 본격적으로 확장되면서 교회나 국가제도의 힘이 덜 미쳤던 지역에서 영적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것은 교리나 교회를 넘어선 성령운동이었고, 이 운동은 믿는 이들에게 영적인 거듭남을 요구하는 성령중심의 기독교를 등장시켰다. 영적인 부흥(Spiritual revival)이란 개념이 등장했고, 이를 도모하는 부흥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무엇으로부터 영혼을 부흥시킨다는 말일까? 황무지의 광활한 공간에서 부는 성령의 바람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종교적 교리와 의식은 낡은 관습에 불과했다. 텐트 부흥회는 구원이 세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한 중생의 체험만으로 확신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원은 언제나 마지막 날의 문제였고 성령의 바람은 그 징표였다. 부흥집회는 마지막 날 중생과 구원을 위한 최후의 결단을 요구했다.


    성령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19세기 초반의 미국역사는 황무지에선 내가 내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 개인주의가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세계복음화의 열풍이 불었던 시기는 미국이 제국으로 발돋움 하던 바로 그 시기였다. 온 세상의 복음화가 드디어 가능하다는 믿음에는 제국주의 체제가 이를 가능케 한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깔려있었다. 이제 미국이 나서서 세상을 무지와 낡은 역사에서 구원하겠다는 제국주의적 발상과 믿지 않는 세상을 그리스도와 문명의 빛으로 구원하겠다는 발상은 비슷한 세계관에서 출발했다. 미국이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인식은 미국역사의 보편적인 잠재의식이라 할 수 있고, 세상이 곧 심판의 날을 맞는다는 종말론은 청교도 시대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말 미국의 세계복음화 운동은 예수 재림과 천년왕국 사상으로 무장한 묵시록에 그 특징적 요소가 있다. 


    영적인 운동에서 종말에 관한 새로운 예언이 빠질 수 없다. 신의 새로운 예언을 받았다는 몰몬교가 등장했고, 몰몬교도들은 성경의 에덴동산이 미국에 있었다는 증언까지 하면서 새로운 낙원을 꿈꾸었다. 예언에 의거한 종말의 공동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윌리엄 밀러는 예수 재림의 연도를 선언 하고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모아 종말운동을 펼쳤다. 뉴욕의 오나이다(Oneida)공동체는 마지막 시대에 결혼과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성관계를 허용하는 파격적인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일 교회와 같은 환란과 아마겟돈의 예수 재림설을 주장하는 종교공동체들이 등장했다. 전통적인 교리나 이를 수호하는 교회가 배제되고, 성령의 바람이 이끄는 부흥운동이 가져온 또 다른 변화는 여성들이 종교지도자들로 등장하기 시작한 일이다. 교리적 학습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만이 기준이 되었을 때, 쉐이커스(Shakers)와 안식일(Adventist)과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의 공동체에서 여성 지도자들이 등장해 공동체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와 같은 19세기 미국의 종교현상들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할 수 있다. 개척지라는 상상 속의 빈 공간에서 미국인들은 성령을 만났고, 성령은 억압적인 교리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했고, 그 자유는 종말론이라는 교리의 종결자를 통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은 세상의 마지막을 예비하고자 했던 청교도들의 종말론적 사명을 물려받았지만 중요한 신학적인 차이가 있다. 청교도들은 그 사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면,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은 인간이 그 일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이 스스로를 돕는 선택과 결단과 회심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에만 초점이 맞춰진 청교도들의 칼빈주의는 신학적 소설에 불과했다. 19세기 초반 부흥운동의 신학적 기반을 닦은 피니(Charles Finney) 같은 이들은 청교도들과는 전혀 다른 신학과 인간이해를 갖고 있었지만 미국의 종말론적 사명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강력한 입장을 견지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회심의 결단 이후 완벽한 성화의 길을 갈 수 있고,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켜 종말을 준비할 수 있다는 후천년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미국 개신교의 지형을 바꾸고 세계 복음화의 신학으로 등장한 것은 영국의 존 달비(John Nelson Darby)가 체계화시키고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꽃을 피운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이라 불리는 후천년설과 상반된 재림설이었다.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찰스 하지나 그 후 보수 장로교 신학을 대변했던 메이천 같은 이들도 비성서적이고 위험한 면이 있는 신학이라고 했을 정도로 비판도 많았지만,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미국 개신교의 종말론적 정서를 밑바닥에서부터 재정비했고, 묵시록이란 장르를 미국문화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만들었다. 이 묵시록을 미국의 신학으로 완성시킨 사람은 스코필드(Cyrus Scofield, 1843-1921) 목사였다. 그가 편집하고 해석을 단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은 세대주의 신학을 20세기 세계선교의 현장에 전파하는데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판매되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성경책이다. 달비의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보급될 당시 미국의 개신교인들에게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은 새로운 이론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계에 의존하는 산업화 시대가 만드는 갈등과 신의 창조질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다윈주의 그리고 성경의 비평론 등은 세상이 진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망해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예수의 재림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이라는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만들었다. 달비는 믿는 사람들이 재림 전에 세상의 환란을 피해 공중으로 사라진다는 휴거설과 함께 적그리스도와 싸우는 최후의 전쟁과 환란과 심판의 날 그리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세상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종말론의 정서가 깊은 미국에서도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정치에서 종교, 문학에서 문화까지 아우르는 묵시록의 상상력을 제공한 것이었다. 전천년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며 지켜봐야 했고, 모든 전쟁은 아마겟돈의 관점에서 지켜봐야 했다. 비대해진 국가권력은 악한 일을 꾀할 세력으로 견제해야 했고, 이스라엘은 예수의 재림이 올 때까지 존재해야 했다. 전천년설에 의해 설득된 미국의 교인들은 이런 마지막 날의 사명을 한 명이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 믿었다. 19세기 후반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은 세계선교에 뛰어들었고, 한국에 미국의 개신교가 들어온 배경에는 이런 재림과 종말의 묵시록이 있었다. 


    한국에 온 1세대 선교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드와이트 무디의 영향을 받았고 전천년설을 믿었다. 무디가 주도한 세계 선교운동은 이전 피니(Charles Finney)가 주도했던 후천년설에 의거한 부흥운동과는 달리 세상의 복음화가 단기간에 끝나야 한다는 급박한 종말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당시 무디가 활동하던 시카고에 초기 한국선교에 큰 공헌을 한 선교사들을 배출한 맥코믹 신학교가 있었다. 19세기 후반 맥코믹은 장로교 신학교였지만, 무디의 영향을 받고 전천년설과 부흥운동에 심취해 해외선교에 뛰어든 학생들이 많았다. 미국 교회사에서 무디와 맥코믹 신학교의 관계는 부각되기 힘든 것이지만 한국의 초기 개신교 역사에선 매우 중요한 신학적 연결고리가 된다. 무디의 영향을 받는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스코필드의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은 한국에서 언더우드와 게일 선교사에 의해 번역 되었다. 맥코믹 출신 소안론 (William Swallen) 선교사는 스코필드가 제작한 세대주의 역사이해를 정리한 도표 <Rightly dividing the word of truth>를 한글로 번역했고, 길선주 목사는 이를 변형시켜 <말세도>라는 이름으로 그의 부흥회에서 종말을 설명하는 자료로 삼았다. 소안론은 또 대표적인 전천년설의 이론가 R.A. Torrey의 <What the bible teaches>를 한국어로 번역을 하기도 했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피어선(Arthur Pierson) 선교사는 다수의 저작으로 세계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무디와 함께 19세기 부흥운동의 묵시록적인 전환을 이끌어냈다. 그가 사망한 후 한국의 미국선교사들은 힘을 합쳐 <피어선기념성서학원>을 한국에 세워 그의 정신을 따르고자 했다.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의 교육을 맡으면서 전천년설의 신학을 가르쳤다. 초대 학장이 된 마포삼열을 필두로 소안론, 방위량(William Newton Blair),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 등은 모두 전천년설을 신봉했던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고, 이들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언젠가 맥코믹 신학교 출신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들의 출신 지역을 살펴본 적이 있다. 대부분 시카고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서부로 불리던 그 지역에서 새롭게 부는 성령운동에 감화되어 회심하고, 마지막 날 최후의 순간까지 영혼을 구한다는 심정으로 선교에 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전천년설 신학이 지금은 정당한 비판을 받고 있어도, 그 어떤 자유주의 계열의 신학보다 영향력이 컸던 미국적인 신학이었고 아직도 미국의 정신문화에 그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20세기 미국의 근본주의 신앙으로 이어졌고 현재 미국 개신교의 주류라 할 수 있는 복음주의 신앙의 한 뿌리를 형성했다. 미국 묵시록의 20세기 판이라 불릴 수 있는 이 신학의 대중성은 1970년 할 린지(Hal Lindsey)의 책 <The late great planet earth>를 통해서 드러났다. 수천 만권이 팔린 그 책은 휴거와 환란과 적그리스도와 아마겟돈의 예언이 곧 이루어질 것이란 경고를 했고, 냉전시대에 걸맞게 이스라엘과 소련은 마지막 날 예언의 중심에 있었다. 놀랄만한 책의 판매부수는 새로운 종말론에 목말라하는 미국인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최근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린지가 아직도 마지막 날의 예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린지의 뒤를 이어 1990년대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Left behind>라는 책의 시리즈도 휴거와 환란을 주제로 삼아 경이로운 출판기록을 세웠다. 전천년 종말론의 시대적인 배경으로는 냉전이라는 정치체제가 존재했고, 그 시대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목사는 전천년설을 믿었고 19세기 부흥운동의 깃발을 이어받았던 빌리 그래함 목사였다. 


    세대주의 신학만큼 미국적인 신학은 없다. 산업화와 진화론이 의미하는 실용과 기술에 맛서 전근대적인 억지를 부리는 보수주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천년주의 사상을 근대적이고 기술적인 방식으로 해석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세대주의 신학에서는 근대학문의 분류법과 수치화된 계산법을 도입해서 성경을 이해하면서 역사를 ‘세대’로 나누고자 했고, 성경의 의미를 텍스트의 상호성이라고 할 만한 개념을 도입해 ‘관주성경’을 유행시켰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Dispensational modernism세대주의 모더니즘>이란 책은 세대주의 신학도 성서비평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만큼 그 시대의 일반적인 과학정신을 반영하는 신학적 사고를 하고자 했다고 전한다. 세대주의 신학은 성경이 일관되고 유기적인 통합성을 지닌 말씀이기 때문에 예컨대 성경 한 부분의 의미는 다른 곳에 감추어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부분을 참조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자유주의 신학이 그 의미를 역사적 배경과 맥락으로 제한한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역사적 인식과 의미는 시대정신의 일부로 모두에게 중요했지만, 세대주의 신학이 성경의 예언을 통해 종말로 향하는 시대의 진리를 읽고자 했다면,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묵시록을 역사적 상황에 대한 기록이나 그 시대의 신학적 또는 신화적 상상력을 드러낸 것으로 보기 일쑤였다. 20세기 개신교의 시한부 종말론 사건들은 대게 미국의 세대주의 신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 사건들의 폐해는 여기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고, 세대주의 신학 또한 충분한 비판을 받아왔다. 다만 그 신학이 미국에서 신앙운동으로, 독특한 세계관과 역사의식으로 발전되어 온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미국의 묵시록이란 관점에서 세대주의 신학은 미국의 종말론적 정서를 19세기 후반의 시대정신 속에서 개량하고 구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간에 시작이 있고 목적과 끝이 있다는 게 기독교 서구문화의 시간관이라면, 그 끝이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의 시간은 단순히 시간의 끝이 아니라 이루어진 시간을 말하고 이것은 다시 시간의 본질을 뜻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시간이 (하이데거에서처럼) 존재의 문제 또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 신의 존재를 의미한다. 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시간이 종말론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 시간의 문제는 메시아적 시간이라는 종말론의 시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 시간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끝이 가까운 시간이 아니라 이미 끝난 시간 아니면 세상의 종말이 선고된 상태에서 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부활로 이미 시간의 시제가 혼탁해진 상태에서 회개와 중생과 같은 시간의 앞뒤 경계를 흐리는 개념을 도입하고 의인과 악인까지 한때 부활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 이미 대본이 나온 그 드라마의 전편(Prequel)이라면 시간의 경계만이 아니라 모든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 드라마가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일념으로 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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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7 : 헤겔의 미국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18세기의 유럽과 미국


    미국역사에서 내가 아는 제일 재미 있는 사건 하나는 역사책에서 ‘제퍼슨과 무스’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는 18세기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썼고 3대 대통령을 지낸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미국의 대사로 불란서에 거주하고 있었다. 제퍼슨은 큰 무스 한 마리를 사냥해 뿔까지 있는 상태에서 박제해 불란서로 보내라는 주문을 미국에 했다. 18세기의 운송수단으로 한겨울에 거대한 무스를 박제해 불란서로 보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나, 제퍼슨은 지속적인 요구를 했고 마침내 뜻을 이뤘다. 박제된 무스는 자연학과 지질학으로 18세기 유럽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부폰(Comte de Buffon)에게 보내졌다. 부폰은 지구의 역사를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연구했던 학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결과 그 역사가 4,000년이 아니라 75,000년이란 새로운 주장까지 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찰스 다윈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진화의 이론을 펼친 학자였다. 제퍼슨이 평소 알고 지내던 부폰에게 미국의 무스를 보낸 건 그의 우정을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우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부폰이 자신의 저술 <자연사>에 신대륙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기술했고, 그 내용은 부폰의 명성에 걸맞게 미국에 대한 유력한 이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부폰은 미주 신대륙의 토양이 유럽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았고, 그 증거를 동식물의 퇴행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즉 같은 동물이라도 미국에서 낳고 자란 동물은 연약하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동물도 그 땅에선 점차적으로 기운을 잃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 후 미국의 퇴행성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론으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같은 입장에서 미국을 연구한 결과물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부폰의 영향을 받은 드포우(Cornelius De Pauw)란 학자는 동식물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만일 유럽인들이 미국에 가서 살게 되면 몸과 마음이 연약해지고 정신적 활기를 잃는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과 행복추구라는 이념을 기초로 한 역사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자 했었던 제퍼슨에게 당시 유럽의 이런 미국론은 어처구니없고 근거없는 분석에 불과했다. 이를 반박하고 바로잡는 건 미국을 사랑하는 건국의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말이나 글로 부폰과 같은 대학자의 오류를 바로잡는 건 어렵다는 판단을 했을까, 그는 단번에 미국 자연의 왕성함을 보여줄 물증을 찾았다. 그가 떠올린 게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명물인 거대한 사슴과의 동물 무스였다. 박제된 무스를 받았을 때 부폰의 표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웃을 수밖에 없는 해프닝이었지만 당사자들은 진지한 학문의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불란서에서 귀국한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에 대한 기록’(Notes on the State of Virginia)이라는 미국의 자연과 정치제도를 알리는 기념비적인 책을 썼고, 그 내용의 상당한 분량을 부폰의 논리에 대항할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자료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데 할애했다. 그는 오히려 미국의 자연환경이 자신이 경험한 유럽보다 훨씬 났다고 판단했지만, 그 판단은 결국 습관적인 것이란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제퍼슨은 그 책의 불어판까지 낼 정도로 미국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 미국 특히 버지니아의 뛰어난 자연과 건국의 정치적 실험의 정당성을 유럽에 알리고자 했다.   



    부폰은 왜 과학의 이름으로 미국에 대한 황당한 주장을 했을까? 그의 저술엔 상당한 분량의 지구에 대한 지질학적 고찰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의 생각을 요약하면 미국의 환경이 퇴행적인 이유는 기온이 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미국의 땅은 늪지대가 많았고, 그런 지형에서는 생명의 진화가 더디거나 퇴보한다고 생각했다. 그 땅에서 태어난 원주민들은 게으르고 지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생식기까지 작았다는 주장은 당대 최고의 자연학자의 주장이라 믿기 힘들지만 그 논리만은 일관성이 있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미국에 오래 살다보면 환경의 영향을 받아 퇴행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두포우의 주장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미국에서는 부폰이나 드포우 같은 학자들이 만들어낸 18세기 미국론을 주로 반미주의(Anti-Americanism)의 시작이라고 본다. 신대륙은 열등하고 미국은 결국 망할 나라라는 생각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식민주의적인 세계관을 반영했지만, 부폰 자신은 과학만을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훗날 자신의 미국론이 틀렸다는 고백까지 했었다.  


    (반미주의의 역사와 사상적 배경은 여기서 다룰 것은 아니지만, 미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개념에 대한 문제만을 제기하자면, 시대나 사안에 따르는 ‘반미’는 언제나 있을 수 있지만 ‘반미주의’라 지칭할 만한 이념의 역사가 실제 미국 밖에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반미주의란 개념은 미국 내에서 만들어진, 미국의 선민의식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입장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대립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선민의식을 고수하려면 이를 부정하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미국을 적대시하는 세력들이 왕권주의, 공산주의, 테러리즘 등의 이념의 탈을 쓰고 도사리고 있다는 인식은 미국역사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를 반미주의라는 용어로 묶는 행태는 20세기의 일이었다.) 


    대통령 후보시절 오바마는 시골의 가난한 백인들이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소외되고 왜곡된 세상인식을 갖게 되었고, 국가의 정책으로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총과 근본주의 신앙에 빠진다는 말을 해 엘리트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얼마 후 미국 남부에서 활동하는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라는 록밴드는 오바마를 은연중 비판하는 “God and Guns”라는 곡을 냈다. 가사가 재밌다. God and guns/Keep us strong/That’s what this country/Was founded on/Well we might as well give up and run/If we let them take our God and guns. 


    18세기 유럽의 미국론을 반대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제퍼슨과 같은 미국의 학자들과 남미의 가톨릭 성직자들이었다. 제퍼슨이나 그와 함께 건국에 앞장섰던 매디슨 또는 먼로 같은 인물들이 건국의 이념과 백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면, 남미에는 17세기부터 원주민들의 학살을 막으려는 노력을 해온 예수회 신부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클라비에로(Francisco Javier Clavijero) 신부가 있었다. 그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그들이 만든 문명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 모두 계몽주의 사상에 익숙했었고, 그들의 논쟁은 이성적인 판단을 추구했고 또 상대에게 요구했다. 제퍼슨은 부폰의 논리를 정치적인 것으로 공격하지 않았고, 다만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언급하며 부폰의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클라비에로 역시 드포우와 같은 유럽의 학자들의 무지를 이성의 차원에서 나무랐다. 18세기 유럽의 학문을 유럽중심주의나 식민주의 또는 제국주의의 산물로 읽는 건 정당하고 옳을 수도 있지만, 의심과 해석과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20세기 학문의 산물이다. 


    유럽인들은 왜 신대륙에 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 관심은 영토 확장과 식민지 지배의 욕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극 관심은 유럽의 정체성과 역사의식과 실존적인 차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1492년 신대륙 발견에서 출발한다. 당시 유럽은 성경에 기초한 지리와 역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륙이 발견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땅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생명체들까지 살고 있었다. 그 땅이 어떻게 생겨났고, 사람들이 어떻게 그곳에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실존적 고민으로 발전했다. 신학에 의존한 유럽의 세계관 속에 새로운 세상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신대륙 충격은 수많은 신학과 신화 그리고 철학과 과학의 상상과 해석을 낳았고, 신대륙은 근대유럽의 정체성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계몽과 이성의 시대라 불렸던 18세기까지도 그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데카르트와 코페르니쿠스가 대표하는 근대유럽의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은 그 충격이 만든 결과라 말할 수 있다. 


    그 충격의 신학적인 차원도 간략한 설명이 가능하다. 서구기독교에서 진리의 시간은 언제나 과거형이었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성경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온전히 신의 영역, 계시의 영역, 즉 묵시록의 영역이었다. 신대륙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한 사람들은 당연히 신학자들이었다. 많은 유럽인들은 교회에서 설명해주지 못했던 신대륙에 대한 이해를 중세의 예언서들에서 찾았고, 마침내 묵시적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묵시록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 새로운 시대는 과거의 법칙들이 와해되는 시간이었고, 새로운 방법, 새로운 실험, 새로운 가치들이 등장하는 시간이었다. 교권이 억제할 수 없는 상상력과 새로운 지식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7세기 자연과학이 그 산물이었고, 유토피아라는 개념과 그에 대한 열망이 종말론적 묵시록과 함께 등장했다. 


    16세기 유럽의 지식인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분류해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원주민들을 직접 목격한 스페인의 선교사들 중심으로 중세의 전통적인 존재의 구분법 - 신과 천사와 인간 그리고 동물과 식물 – 가운데 원주민이 속한 곳이 어딘지 묻는 것이었다. 원주민들도 유럽인과 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이후에도 그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란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그 이유를 마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계몽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설득력이 있는 답이 필요했다. 18세기에 등장한 유력한 설은 그 차이가 기후와 토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역이 다른 사람들이 기질과 성향에서 차이가 있고, 그 이유가 토양과 기후의 조건 속에서 결정된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환경이 사람의 성향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은 사실 오랜 역사가 있는 것이지만, 서양에서는 기독교 신학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등장한 세상의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의 일부였다. 부폰을 중심으로 ‘자연사’(Natural History)란 당시로선 모순적인 개념이 등장한 것도 그때였다. 지구의 역사가 교회에서 가르쳐준 것과 다르다는 주장은 지질학이라는 과학의 이름으로 나왔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에게나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부폰에게 신대륙의 사람들이 뒤떨어진 이유를 그 땅이 습한 기운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 동식물의 성장발육도 더디고 동물들의 지능도 낮고 오히려 퇴행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제퍼슨이 미국은 습하지 않을뿐더러 습한 것과 열등하고 퇴행적인 것은 도데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부폰은 왜 신대륙의 습도가 높다고 생각했을까? 신대륙에 큰 홍수가 있었기 때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아는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게 만든 홍수는 단 하나, ‘노아의 홍수’였다. 그러나 부폰이 언급한 홍수는 노아의 홍수가 아니었다. 왜냐면 노아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고, 그 이후 인류의 역사는 이미 성경에서 기록되고 서양에서 물려받은 역사밖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대륙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선 또 다른 홍수가 있어야 했고, 부폰은 제 2의 대홍수가 있었다고 믿었다. 오래전 바다와 육지의 경계는 지금과 달랐고, 육지의 지층에 바다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은 부폰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건 ‘대홍수’라는 개념이다. 홍수로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는 건 서구역사에서 매우 익숙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 신화적 개념으로 신대륙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18세기 과학과 신학이 모호하게 연결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결국 그 홍수 때문에 신대륙의 기온이 습하고 되었고, 그 때문에 미주의 땅과 정신이 퇴행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었다.

 

    신대륙에 사람들이 살게 된 연유에 대한 많은 가설이 지금까지도 존재하지만, 근대 초기에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설명이 하나 등장했다. 16세기 초 스페인 출신 성직자로 남미에서 선교사로 있으면서 원주민들의 인간성을 증언하고 스페인 군인들의 참혹한 학살을 고발했던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가 제시한 설이었다. 원주민들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중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10개 지파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인간적으로 다뤄 기독교로 개종 시킨다면 이는 예수가 재림하는 마지막 날을 예비하는 길이고, 서구세계가 구원받는 길이라 믿었다. 라스카사스는 원주민들의 언어와 관습 속에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믿었고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이후 남미의 스페인 선교사들은 라사카사스를 따라 이 이론을 유럽에 소개했고, 미국의 백인들 중에서도 이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의 이론을 지금 보면 유럽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황당한 식민주의 이론이지만, 이를 통해 원주민들을 이 학살이 아니라 개종의 대상임을 켜야 할 분명한 이유를 제공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신대륙과 원주민들의 발견은 그에게 예언의 완성, 곧 새로운 하늘과 땅에 대한 계시가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 계시와 구원의 드라마는 원주민들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었다. 라스카사스의 이론이 맡았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신대륙에 살고 있던 새로운 인간들의 존재를 유럽의 세계관 속에서 설명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사라진 지파라는 논리는 유럽의 지식체계 밖에 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사람들의 존재를 유럽의 입장에서 설명해주는 유용한 이론으로 쓰였다. 하다못해 일본인들의 정체가 이스라엘의 사라진 지파들이라는 설까지 비교적 최근 책으로 나올 정도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Joseph Eidelberg, The Japanese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내리기 이미 100년 전에 미국의 종말론적인 사명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라스카사스의 논리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헤겔의 미국


    미국에 대한 헤겔의 언급은 주로 그의 <역사철학강의>에서 나온다. 18세기 부푼과 드포우는 신대륙과 미국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해는 근거 있는 것으로 19세기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고 헤겔까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이 헤겔의 철학에서 중요하진 않더라도 그의 역사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역사철학의 묵시적인 차원의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헤겔의 <역사철학강의> 그의 글 중에서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역사’란 개념이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땅과 연결되어 설명되기 때문에 그의 편견과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에 용의한 면이 있어서 오랜 시간 헤겔철학의 입문서로 여겨졌던 책이다. 이 글에선 그 책 앞부분‘역사의 지리적인 바탕’이라는 장에서 나오는 미국에 대한 언급만 살펴보겠다. 하지만 대상이 헤겔이기에 그를 미국이라는 상황과 연결짓는 배경설명이 빠질 수 없다. 19세기 유럽의 제일 중요한 철학자이지만 그만큼 제국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을 옹호하는 철학을 했다고 욕을 먹는 철학자도 없다. 그러나 헤겔 이후의 서양의 철학은 모두 헤겔과의 대화 속에서 나왔다. 사회적인 관계를 앞세우는 다양한 맑스주의 전통의 철학에서 인간의 개인적인 차원을 다루는 실존주의까지 헤겔을 싫어할 수는 있어도 헤겔의 영향에서 벗어나긴 힘들었다.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전통을 세운 듀이와 퍼어스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에는 1989년 이후 동구권의 몰락으로 이념의 역사가 끝났다는 논쟁과 함께 헤겔이 다시 학자들만이 아니라 언론에서까지 회자되기도 했다. 자본주의 세계화의 등장과 함께 부쩍 늘어난 역사의 종말이나 묵시적인 역사의 이해에 대한 연구에서 헤겔의 철학은 빠지지 않고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신학에서 보자면 헤겔이 없는 성서학을 생각할 수 없고,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였던 성부와 성자의 관계 즉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공해 준 사람도 내 생각엔 헤겔이었다. 여기서 헤겔을 다루는 이유는 헤겔 자신이 미국에 대한 언급을 했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역사의 종말이라는 묵시록의 내용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철학에서 미국이 중요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이 역사의 철학이고, 그 철학에서 역사는 이미 완성된 종착점에 다다른 상태였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유럽의 의식 속에 등장한 신대륙이 그의 철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헤겔의 역사철학의 중요한 부분을 먼저 살펴보자.  


    헤겔철학의 가장 큰 공헌은 그의 역사철학에 있었다. 하지만 역사철학이라는 말 자체는 모순적인 면이 있다. 철학은 합리적인 전체의 통합성을 추구하는 것인데, 역사는 비합리적인 우연과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사건들의 연속이 아닌가? 헤겔은 철학이 역사의 시간을 다루려면 그 내용은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도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의미는 역사가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이를 증명하는 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역할이란 말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헤겔만의 강력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명한 변증법은 역사의 합리성을 논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역사는 합리적일뿐만 아니라 발전하고 완성과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역사에 끝이 있다는 가정이 어떻게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가정이 될 수 있을까. 역기서 ‘절대’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철학이 다루는 합리적인 이성은 상대적인 우연에 시달리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현대에서 용납되지 않는 용어이지만, 헤겔에게 ‘절대’(Absolute)라는 게 없으면 신학과 철학은 일상의 혼란 가운데 표류하게 된다. 역사가 합리적이란 말은 절대적인 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말과 같다. 역사 속에서의 이성이 바로 그 유명한 헤겔의 정신이다. 역사는 ‘정신’이 스스로의 절대성을 찾아나가는 정신의 역사였다. 헤겔에게 역사의 출발으로 정신이었고, 또 역사의 끝은 정신이 절대적인 자기의식을 회복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헤겔은 자신의 시대가 바로 그 역사의 종말의 시대로 이해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헤겔이 역사의 끝과 자신의 철학이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들이 다양하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표현도 헤겔이 아니라 헤겔의 역사철학 해석으로 유명했던 코제브(Alexander Kojeve)와 니체 같은 이들의 해석이었지만 헤겔의 개념으로 흔히 쓰이고 있다). 


    헤겔에게 역사가 정신으로 시작한다는 말은 역사가 자연을 극복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말과 같았다. 헤겔이 왜 자연과 역사를 구분하고 세계사를 자연을 극복한 정신의 역사로 이해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역사철학강의> 서론에 나온다. 그의 입장은 18세기 계몽주의 학자들이 “유행”처럼 추구했던 자연 속에서 이성을 찾고 신을 찾는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작업은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에서 신을 찾는 것이었다. 역사의 선악과 굴곡진 모습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하여 악의 문제가 신의 섭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헤겔은 이 사실을 증명하는 길을 역사 속에서 활동하면서 화해와 통합으로 갈등의 역사를 치유하는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대신 자연은 새로운 것이 없는 시간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역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모든 시간이 헤겔의 역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은 모든 민족의 삶 속에서 동일하게 존재하고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헤겔의 역사는 정신으로 시작하지만, 그 정신의 활동은 국가라는 제도를 통해 드러났다. 또 국가는 뛰어난 인물 (헤겔의 표현에 의하면 ‘세계사적인 인물’)들에 의해 이끌어지기 때문에, 유럽처럼 정신이 올바른 괘도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곳이 있는가 하면, 정신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고 따라서 역사의 발전이 더디고 이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민족도 있고, 집단으로 모여만 살뿐 역사 이전(Prehistory)의 자연과 같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집단도 있다. 예컨대 원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역사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이식의 수준이 합리성에 이르지 못하는 야만의 시대가 지나야만 역사가 시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역사는 정신을 통해 발전하고, 현재는 과거보다 더 성숙한 정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를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헤겔에게 정신의 역사는 유럽과 그 이전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에서 제대로 발전을 했고,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역사를 통해 완성된다고 이해했다. 그 정신의 원리는 자유였고, 유독 서구의 역사 속에서만 자유의 개념이 발전했다는 헤겔의 입장은 19세기 유럽이라는 그의 시대적 한계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 역사는 이제 끝이 났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과거형이다. 헤겔의 철학이 닫힌 구조를 갖고 있다거나 전체주의적이라 비판하는 이유는 그의 역사철학에 과거의 역사와 그 역사가 끝나는 현재만 있을 뿐, 내일이나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헤겔은 미국이라는 난제를 만난다. 신대륙이라는 미국을 그의 역사철학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와 과거를 품은 현재밖에 없고, 철학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영원한 현재에 대한 관심뿐이다. 그래서 헤겔은 미래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을 ‘미래의 땅’이라 불렀다. 미국이 미래의 세상을 주도할 것이란 의미가 아니었다. 헤겔의 역사관에서 미국은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래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유가 재밌다. 헤겔에게 신대륙이란 개념은 단지 새롭게 발견된 대륙이란 의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신대륙 자체가 유럽보다 지질학적인 나이가 어리다 믿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모든 것을 미성숙한 것으로 이해했다. 미국의 땅과 동식물만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원주민들도 그렇다고 보았다. 모든 게 작았고 약했다. 동식물들은 맛도 없었고,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등장하자마자 그 모습에 기가 눌려 몰락하기 시작했다. 헤겔이 미국을 다룬 건 <역사철학강의>의 앞부분 “역사의 지리적 바탕”이라는 장에서였다. 미국은 지리적인 땅일 뿐 정신의 역사에 이르지 못했다. 당시 의견이 분분했던 미국이 경제나 민주적인 제도는 성숙하지 못한 유럽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미국은 역사 정신의 무대인 국가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왕정체제를 선호했던 헤겔에게 미국의 민주주의는 성숙하지 못한 시민들의 망상적 실험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기서 헤겔이 제시했던 성숙한 국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 매우 특이하다. 농민들이 개척할 땅이 풍부하지 않아 도심으로 그들이 몰려들어야 했고, 계층 간의 구분이 첨예화 되어 긴장상태가 조성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과 긴장 가운데서 정신이 살아나 (헤겔식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인간이 자연의 삶을 영위할 수 없고, 경작할 땅이 부족하고, 계층 간의 긴장이 고조 됐을 때 정신의 역사가 시작한다면, 헤겔의 철학이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자유주의 체제의 태동과 연관이 있다는 의심은 정당한 것이다. 


    ‘미래의 땅’이란 표현을 생각해보자. 역사는 현재로 끝났기 때문에 더 발전된 기술과 이념과 문명의 미래는 없었다. 역사의 미래는 없고, 더 나아가 헤겔의 미래는 (연속적인) 역사가 없었다. 미래에 역사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땅’이라고만 했을까. 땅은 역사 이전의 상태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지 않은 묵시록의 미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미래를 주로 땅과 흙의 상태로 표현한 현대문화의 장르는 Post-Apocalyptic이다. 영화로도 유명한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대표적인 Post-Apocalyptic장르의 소설이다. 묵시적 대재앙의 사건으로 세상의 역사가 끝난 인류의 미래는 잿빛 하늘과 땅으로 표현된다. 미래를 화려한 문명이 아니라, 죽은 땅이 다시 살아나 자연이 회복되고 다시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간주하는 건, 그 장르 작품들의 흔한 주제설정이다. 헤겔은 미국의 미래를 잘못 이해했지만, 그의 논리 즉 역사가 끝난 이후는 다만 역사 이전의 자연 곧 땅의 시대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논리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국은 20세기 서구문명의 중심이 되었고, 세계사적인 국가가 됐지만 그 힘은 역사를 끝낼 각오와 힘, 곧 묵시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자신이 그런 미래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인류에게 남은 미래가 그런 미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헤겔은 인류의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지만, 그의 과오가 메시아주의나 그와 상응하는 다가올 무엇인가를 논하는 철학보다 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래를 다가올 내일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문명의 의미가 파괴된 땅과 자연으로의 회귀라면 19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상상력에 더 적합한 진단이었는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철학자로서 헤겔의 문제는 전체성, 통합성, 절대성을 표방하는 타협 없는 철학의 교리적인 확신에 빠져 이를 지켜내려 했던데 있었다.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을 절대 교리의 철학으로 통합시켜 신학과 예술을 포괄하는 철학을 꿈꿨던 헤겔의 자만심도 한몫을 했다. 

    헤겔은 분명히 자신의 철학이 역사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사의 시간이 앞으로도 더 지속되는 걸 부정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역사가 끝난 상태는 어떤 것일까. 철학이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현재적이고 영구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절대와 보편을 성취한 헤겔의 철학과 유럽역사의 영광은 계속되는 것일까? 역사는 더 이상 진보하지 않고 이제 남은 건 유럽 밖의 깨달음이 늦고 진화가 더딘 국가들이 유럽을 서서히 따라오는 것뿐이라면, 그건 미래가 아니라 유럽역사의 현재가 진행 중인 상태를 말한다. 전쟁을 예를 들자면, 한쪽의 절대적인 우세로 대세가 이미 기울었고 승전까지 선언된 상태지만 작은 전투는 계속되는 상황이 비슷한 경우일 수도 있다.  


    헤겔은 마지막 전쟁이나 묵시적인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헤겔이 불란서 혁명이 공포의 테러 체제로 변하는 과정을 묵시적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좋아했던 나폴레옹이 예나(Jena)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이를 역사를 바꾸는 마지막 전쟁이었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미래의 예언은 철학이나 역사철학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헤겔을 묵시적으로 읽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완성되고 끝이 난다는 생각만큼 본질적으로 묵시적인 것은 없다. 헤겔이 철학을 역사의 끝에서 영원한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보았다면, 그 철학은 재림이나 천년왕국이나 최후의 심판과 같은 개념들을 쓰지 않더라도 묵시적인 학문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 그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에 만약 미래가 있다면 퇴보적인 의미밖에는 가질 수 없다고 그의 생각에서 묵시록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헤겔에게 신대륙은 귀찮은 존재였다. 이제 역사가 완성되는 마지막 시점에 그 발전과 전개를 설명하는 논리의 선명함을 퇴색시키는 성가신 땅이었다. 귀찮은 것은 생각하기 싫은 법, 헤겔은 신대륙을 생각과 사유의 영역 밖의 존재로 내몰았다. 그러나 헤겔에게 생각 밖의 영역이 있을 수 있을까? 정신이 절대적인 자기의식으로 모든 것을 통합하고 녹여내고 이해한 시대가 열렸는데, 생각 밖에 무엇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정신으로 완성되는 헤겔의 역사는 현재에서 끝나고 이미 완성된 역사는 미래가 필요 없다. 헤겔은 신대륙과 미국을 미래의 땅이라 선언했다. 여기서 미래가 절대적인 사유를 추구하는 철학의 영역 밖에 있고, 역사는 이미 끝난 것이라면 미래는 헤겔이 말했던 Pre-history가 아니라 Post-history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묵시 이후 (Post-Apocalyptic)한 땅이 되고, 19세기 유럽에 관한 헤겔의 진단과 선언은 묵시록에 속하게 된다. 


    헤겔은 인류의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지만, 그의 과오가 메시아주의나 그와 상응하는 다가올 무엇인가를 논하는 철학보다 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래를 다가올 내일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문명의 의미가 파괴된 땅과 자연으로의 회귀라면 19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상상력에 더 적합한 진단이었는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철학자로서 헤겔의 문제는 전체성, 통합성, 절대성을 표방하는 타협 없는 철학의 교리적인 확신에 빠져 이를 지켜내려 했던데 있었다.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을 절대 교리의 철학으로 통합시켜 신학과 예술을 포괄하는 철학을 꿈꿨던 헤겔의 자만심도 한몫을 했다. 



ⓒ 웹진 <제3시대>



    (참고도서) 


    제퍼슨과 무스의 일화를 중심으로 18세기 유럽의 자연사 연구와 미국담론의 연구물로 Lee Alan Dugatkin의 [Mr. Jefferson and the Giant Moose: Natural History in Early Ameirca]란 책이 있다. 책의 표지그림이 흥미로워 글 앞부분에 삽입했다. 제퍼슨과 부폰에 관한 일화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는 1900년도에 출간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제퍼슨의 입장을 편집해 알파벳 순서대로 모아놓은 책인데, ‘기후’(Climate)와 연관된 글들을 참고했다. 18세기 이후 신대륙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을 다룬 것으로 잘 알려진 책은 1955년 스페인어로 처음 출간된 Antonello Gerbi의 [The Dispute of the New World: The History of a Polemic, 1750-1900]이다. 라스카사스가 신대륙 원주민들의 고난을 기록한 책은 [A Short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이다. 스페인의 남미정복 역사를 유럽과 타자의 만남이라는 개념으로 이론화 한 대표적인 저술은 Tzvetan Todorov의 [The Conquest of America]란 책이다. 헤겔의 <역사철학강의> 영어판은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Sibree 번역의 [The Philosophy of History]. 헤겔과 미국의 관계를 내게 처음 소개해 준 글은 20세치 초 스페인의 철학자 Jose Ortega y Gasset이 쓴 “Hegel and America”란 글이었다. 그 후 비슷한 연구는 남미에서 해방철학을 추구해온 Enrique Dussel과 같은 이들이 제삼세계의 입장에서 진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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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6 : 총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시카고가 속해있는 미국의 일리노이 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총기를 공공장소에서 소지할 수 없는 유일한 주였다. 다른 주들은 총이 눈에 띄지 말아야한다는 단서가 따랐지만 누구나 쉽게 허가 받을 수 있는 총을 차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리노이 주의 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은 이유는 총으로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도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한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최근 총기산업의 로비단체들의 소송으로 여러 주에서는 대학의 강의실에도 총을 소지하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일리노이 주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새로운 법안을 만들면서 예외조항을 포함시켰다. 학교나 도서관 같은 곳은 예외로 인정해 주었고, 다만 금연사인과 비슷한 총기금지 안내판을 출입구에 부착하도록 했다. (교회는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예배시간에 총기소지를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나처럼 학교 건물로 출근하는 사람은 하루에도 여러 번 총의 형상을 보게 되었다. 총기소지가 금지된 건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밖의 세상은 총이 허용된 공간이란 사실을 의미한다. 그 효과는 총에 대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고, 총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금연사인이 흡연을 막지 못하듯이 총기반입을 금하는 안내판이 총을 합법적으로 안주머니에 소지한 사람이 학교건물에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다. 미국 대도시의 고등학교에서 총기유입을 막기 위해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서 등교하게 만들고, 총을 소지한 경비원들이 교내를 순찰하는 건 흔한 일이다. 모든 학교의 교실에 경찰서와 연결된 카메라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듣게 된다. 총이 없는 사람들에게 총기금지 안내판의 효과는 암시작용에 있다. 총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는 일차적인 암시가 있지만, 그 암시는 총에서 끝나지 않는다. 총의 목적이 생명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최후의 암시가 빠질 수 없다. 그런 암시가 통치의 수단이라면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람을 수동적이고 순응적으로 만드는 수단은 없을 것이다. 그 총이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지 상관없이 총은 언제나 죽음을 암시한다. 그 자체로 공포와 복종을 유발하는 힘이 된다. 이런 총의 현상은 미국적인 삶의 일상이고 역사의 일부다. 미국의 군사문화의 기초를 이루고 미국의 묵시록을 현재형으로 만드는 요소다.  




    미국 밖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설명하기 힘든 것, 그렇다고 미국 내에서도 합리적인 설명이 어려운 것이 바로 미국의 총기문화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대형 총기난사 사건은 더 강력한 총기규제를 요구하지만, 규제를 반대하는 세력도 그들의 논리를 굽히지 않는다. 실제로 이 문제만큼 미국을 갈라놓는 이슈는 없다. 총기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총이 흔하기 때문이고, 총기 보유율이 높은 이유는 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미국사람들이 왜 총을 좋아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설명이 유럽의 신대륙 발견과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온 역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에선 이론이 없다. 서구의 근대란 시기는 식민지를 통해 이루어낸 것이고 식민지 지배는 총과 무기를 통해 가능했으며, 그 시기는 또 총과 무기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시기였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미국은 총으로 만들어진 나라다. 극단적인 표현으로 들리지만 그 내용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를 미국의 입장에서 간략하게 설명해 보자. 미국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유의 나라이고, 예외적인 운명을 타고난 나라다. 이 자유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키고 보존해야 할 이념이었다. 총은 자유를 상징하고 대변할 뿐만 아니라, 광야와 같은 악한 세상에서 자유를 지키는 수단이었다. 신이 인간에 부여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총이기 때문에, 총이 지켜내는 것은 인간의 자유만이 아니다. 신의 자유를 지키고 실현하는 역할까지 한다. 이런 총에 관한 이해의 변증법은 미국적 사유의 본질적 단면을 보여준다. 여기에 묵시적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선과 악의 단순한 구분, 예외적인 선택과 사명을 부여 받았다는 자기이해, 그리고 특히 미국에서는 자유란 내용없는 개념이 총이란 종말의 무기를 위한 자유로 쉽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흔히 미국사람들은 주입식 교육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총에 대한 지식은 예외일 것이다. 미국 사람들만큼 총에 대한 아는 게 많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가끔 총하고는 거리가 먼 대도시 출신의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총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 나를 놀라게 하는 때가 있다. 물론 나에게만 ‘방대한 지식’이지만 그들에게는 미국의 역사와 문화의 한 부분일 뿐이다. Browning, Colt, Remington, Winchester, Smith & Wesson등의 총을 만드는 회사들은 그 브랜드 가치는 여느 일류기업 못지않다. 미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은 그 시대의 총이나 무기와 함께 기억되는 경우도 많다(서부시대의 레밍턴 라이플과 콜트.45, 2차 대전의 카빈소총, 베트남 전쟁의 M-16 등). 그 이유는 그 순간들이 주로 전쟁의 순간들이었던 사실도 있지만, 기본적인 총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총을 중심으로 사건을 이해하게 만드는 면도 있다 (따라서 총기 사고가 나면 어떤 총이었나, 누굴 암살한 총은 어떤 총이었나 등에 높은 관심을 갖게 된다). 흔히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서부시대의 신화를 만들고 총과 폭력의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하지만, 이는 미국의 총기사랑에 대한 표면적인 설명밖에는 되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의 총기문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논란의 대상이다.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백인들이 땅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백인들에게 총기소유는 필수적이었다는 설명이 있다. 서부로 영토를 확장시키던 시기엔 법보다 총이 앞섰기 때문에 총기보유율이 높아졌다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18세기 미국 백인들의 사망하면서 유산으로 남긴 물품의 목록을 조사한 결과 생각하는 만큼 일반인들이 총을 많이 보유하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다. 미국의 총기문화가 영화산업이 흥행을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입장도 있고, 총기산업의 로비가 총을 자유와 권리의 문제라 주장하면서 이 총기문화를 지속 유지시킨다는 분석도 있다. 


    대통령 후보시절 오바마는 시골의 가난한 백인들이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소외되고 왜곡된 세상인식을 갖게 되었고, 국가의 정책으로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총과 근본주의 신앙에 빠진다는 말을 해 엘리트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얼마 후 미국 남부에서 활동하는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라는 록밴드는 오바마를 은연중 비판하는 “God and Guns”라는 곡을 냈다. 가사가 재밌다. God and guns/Keep us strong/That’s what this country/Was founded on/Well we might as well give up and run/If we let them take our God and guns. 




    미국의 평범한 백인들의 정서를 잘 대변한 이 곡에서 ‘신’과 ‘총’은 항상 함께 한다. 가사가 비판하는 내용의 배경에는 신을 버리고 다문화주의를 선호하며 미국을 세속사회로 만든 자유주의자들이 이젠 총까지 빼앗으려 한다는 위기의식이 담겨 있다. 가사는 미국이 ‘신’과 ‘총’의 바탕 위에 세워졌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은 평범한 백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다. 그들의 삶속에서 신은 위대하고 총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총기문제는 자신들이 만든 문제가 아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지소유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협박조의 내용이다. 어디로든 떠날 때 총은 들고 떠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미국의 역사에서 신의 존재와 총의 현실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총의 신학사


    미국에서 총은 신학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신학은 묵시적인 것이고, 미국의 묵시록은 총을 제외하고 설명될 수 없다. 미국에서 그 신학의 역사는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한다. 메이플라워란 배에서 육지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 총을 들고 내렸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미국정신의 뿌리가 되는 ‘메이플라워 서약’으로 유명한 그 배엔 상당한 양의 총과 무기가 실려 있었다. 그들에게 마귀가 들끓는 광야에서 믿을 건 총과 하나님밖에 없었다. 광야에서 에덴을 개척해야 할 선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었고, 땅을 마련하기 위해 총은 필수였다. 17세기 청교도들에게 주일은 총을 드는 날이었다. 늑대와 원주민들의 공격을 퇴치시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교회에 올 때 총은 의무적으로 소지해야만 했다. 예배를 드리는 마을회관에는 전망대가 있었고, 교회는 무장한 보초가 지키던 요새였다. 예배 중에도 총을 옆에 두고 유사시에 발사할 수 있어야 했다. 말 그대로 Ecclesia Militans(군사적 교회)였다. 죄와 마귀와 상징적인 싸움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 총을 든 군사적 조직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였다. 그런 군사적인 장치가 필요할 정도로 원주민들의 공격이 빈번했는지 묻을 필요는 없다. 그런 보안조치 때문에 원주민 공격을 사전에 예방했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인들이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원주민들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청교도들은 이 분쟁을 신에게 부여받은 사명을 실행하려는 선택받은 백인들과 이를 막으려는 불신의 원주민들 사이의 분쟁으로 이해했고, 총과 무기로 원주민들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청교도 교회 내에서는 총기 사용과 훈련이 강조되었고, 총의 선함과 정당성은 설교를 통해 재확인되기도 했다. 청교도들이 총과 무기에 집착한 이유로 원주민들과의 분쟁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원주민들에 대한 이미지와 스스로를 사악한 세상에서 공격당하는 약자이고 피해자라는 인식도 무시할 수 없다. 원주민들을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다는 아말렉 족속으로 보는 시각은 오랜 역사가 있는 청교도들의 수사였다. 그들이 건설하려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원주민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계시의 완성이었다. 청교도들이 생각한 원주민은 신학적 상상의 산물이었다. 미국의 종말론적 사명의 드라마에서 조역을 맡아 광야에서 실체 없이 떠도는 이스라엘의 적, 그리고 최종적으로 총에 굴복하여 땅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청교도들에게 총은 신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고, 그 사명은 최후의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후의 역사에서도 미국의 예외적인 정체성은 총과 무기를 매개로 유지되었다. 미국역사의 무의식에서 총은 신의 편에 서있는 미국이 신의 정의를 집행하도록 내려 받은 선물이었고 축복의 상징이었다. 그 선물의 현재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장 앞선 무기를 보유해야만 했다. 그 관점에서 냉전시대는 선택받은 미국과 무신론자들의 싸움이었고, 냉전에서 이긴 건 신의 승리였고 무기의 승리였다. 신과 무기는 분리될 수 없는 미국정신의 양대 근원이었다. 군사적 우위를 다른 나라에게 내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군사정책의 기초가 바로 거기 있다고 할 수 있다. 군사적 우위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신의 축복, 미국의 예외성, 미국이 받은 사명의 근거가 없어짐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자유의 개념은 평등하지 않고, 언제나 예외적이다. 총은 그 자유를 가능케 하고 지키는 도구였다. 청교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자유는 미국에 부여한 신의 선물이었고, 자유는 신의 속성에 속한다. 그렇다면 총은 인간의 자유만이 아니라 신의 자유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God and Guns’가 담고 있는 미국적인 정서의 깊이 있는 차원의 논리다. 미국의 군사주의와 근본주의는 언제나 같은 목표를 지향해 왔다. 미국의 예외주의는 군사적이고도 신학적인 자기이해다. 군사문화를 정당화 하고 완성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은 근본주의 신학이었다. 십자가 군병이란 표현 같이 복음전파를 군사적 용어로 설명해 온 19-20세기의 역사가 이를 증거한다. 미국의 군사주의와 근본주의가 함께 공유하는 또 다른 것은 최후의 국가가 되기 위한 종말론적 세상이해다. 마지막 전투까지 이겨야 한다는 각오는 미국의 군사주의만이 아니라 미국의 종말론적 종교집단들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대량의 총을 확보해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면서 종말의 주역이 되고자 하는 예를 1970년대 짐 존스가 이끄는 인민사원이나 1990년대 FBI와 혈전을 벌인 데이빗 코레쉬의 다윗파 등에서 볼 수 있다. 미국의 주류 기독교가 폭력과 전쟁을 자유의 이름으로 용납해 온 역사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군사주의와 청교주의가 만들어 낸 것은 전례 없는 총의 문화만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폭력의 문화다. 총을 수용하는 만큼 폭력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또 총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폭력적인 강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내가 옳다는 생각과 정의가 내 편이라는 생각으로 정당화 된 폭력은 가혹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총기규제의 논란에서 늘 제기되는 질문은 총이 문제인가 아니면 사람이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한쪽에선 총기소유를 제한해야 사고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총이란 기계적 물체가 아니라 총을 이용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반박한다. 오히려 총을 공개적으로 소지하고 다닌다면 사고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한쪽에선 폭력과 살생의 문제로 보고, 다른 쪽에선 자유와 권리의 문제로 본다. 그러나 문제는 총을 가진 사람, 즉 총과 사람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다. 내가 총을 드는 순간 나와 세상의 관계는 바뀐다. 총은 생명을 해치는 목적이 있고, 그 총을 든 사람은 그 목적을 가능성으로 부여받는다. 생명을 순간적으로 끝낼 수 있는 총의 힘은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만든다. 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생명의 세계는 궁극적인 객관화의 대상, 즉 총기를 겨눌 타깃이 된다. 이분법적인 발상의 극치라 할 수 있겠다. 총을 통해 나는 생명을 결정짓는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자아를 이루고, 그 자아는 기계적인 것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서구인간의 오랜 욕망이 극적으로 실현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총은 생명을 해치는 기능밖에는 없고 총을 갖는 것은 생명을 순간적으로 끝낼 힘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존재를 추구했던 서구적 인간의 이상이 바로 그 힘의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차원에 의해 실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할 수 있다. 18-19세기 미국을 관찰한 사람들은 미국사람들을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인간’이라 규정하는 예가 많았다. 그 새로운 인간을 통해 세상이 바뀔 것이란 예언도 흔했다. (그 미국인에게 총이 중요했다는 관찰은 많았어도, 그 총으로 미국인이 만들어졌다는 분석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나온다). 광야로 여기던 땅에서 살아남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총은 어느 순간 수단이 아니라 (많은 미국인들의) 존재의 중심이 되었다. 어쩌면 이 총의 존재론이 타인과 담을 쌓고 이루어내는 서구적 개인주의의 종착점인지도 모른다. 총의 정의와 총의 폭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서부시대의 유산으로 풍자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미국의 종말론적 사상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부영화 High Noon(정오)에서 최후의 결투가 일어나기 전 마을의 교회에서는 “영광, 영광, 할렐루야~”가 퍼져 나온다. 신의 정의가 승리할 것이란 암시와 곧 모든 게 끝난다는 암시를 동시에 전해준다. 총의 묵시록을 가장 잘 드러내는 건 서부영화다. 서부시대와 총에 대한 환상적인 신화가 서부영화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심어졌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에 총과 폭력, 정의와 신에 대한 정서적 기초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부영화는 20세기 미국영화를 대표하는 장르가 될 수 있었다. 청교도들의 선악관과 총기에 대한 신뢰와 묵시적 세계관이 19세기 중반의 서부개척 시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질서가 무너지고 악이 판치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 총잡이 영웅이 나타나 최후의 총싸움을 벌이는 묵시적 드라마의 구도는 서부영화의 전형적인 서사다. 총으로 죽고 총으로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폭력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막에서 총에 맞아 죽는 악인들에게 죽음이란 부활이나 구원이 없는 묵시적인 죽음이다. 서부시대의 신화가 미국의 신화가 된 이유는 그 묵시록의 신화를 관객들이 이미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화면 속에서 재현되는 드라마를 적극 수용할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총기소유자들에게 왜 총이 필요한지 물으면 자주 듣게 되는 응답이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해 군사적으로 저항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불의의 공격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법에서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고 싶어서, 종국에는 총밖에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등의 총을 위한 변명을 구체적으로 듣게 된다. 모두 현실적이지 못한 환상적인 발상이지만 그 피해는 너무 크다. 총으로 최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지만, 총은 그 최후를 앞당긴다. 묵시록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 웹진 <제3시대>



    (참고) 


    청교도들이 주일을 어떻게 지켰는가에 대한 내용은 Alice Morse Earle의 The Sabbath in Puritan New England (NY: Charles Scribner's Sons, 1896)라는 책을 참고 했다. 총을 들고 교회에 가는 그림은 George Henry Boughton의 ‘Early Puritnas of New England Going to Worship’(1872)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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