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토핑에서 민중신학까지–신은 명사일까 동사일까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세탁소 일을 두어 달 정도 했던 적이 있다. 세탁소에 처음 일하러 갔던 날 이것저것 일을 배우다가 어색한 단어 하나를 들었다. ‘배깅’이란다. 대충 bagging쯤 되겠거니 하고 이해했고 세탁물 포장하란 이야기인 줄이야 알아듣긴 했는데, bagging이라니 bag이 동사라도 된단 말인가 싶은 느낌.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현상이 부지기수다. 피자 토핑(topping) 같은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말일 터이고, 요즘 한국에서도 건설회사들이 하우징(housing)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모양이다. 교통 벌금이 두 배가 된다는 말을 doubled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럴 듯 하다. 작년 미국 대선 관련 기사를 읽다 보니 back이라는 말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트럼프 지지자를 두고 those who back Trump 뭐 이렇게 쓰는 식이다.

   그래도 이런 단어들은 영어 사전을 뒤지면 동사로서 쓰는 경우가 있다고 나오긴 한다. 그런데, 식품점에 장을 보러 갔더니, 야채를 쌀알 비슷한 모양으로 잘라놓고 파는데, 포장에 Riced라고 써 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싶은 느낌. 아마 한국어로 직역하면, ‘쌀한’ 혹은 ‘쌀된’쯤 되려나? 그러니까 대강 이런 이야기가 되겠다. 명사나 형용사가 그대로 동사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언젠가 서울시가 I seoul you라는 홍보문구를 내밀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은 적이 있었는데, 위와 같은 상황을 깔고 보면 이해가 전혀 안 가지만도 않겠다. 물론, 그래서 저 문구에서 정작 ‘seoul’이 뭔 뜻인지가 아리송하다는 게 문제겠지만. 


  2. 

   Bag, house, rice 같은 말을 저렇게, 명사를 그냥 동사같이 쓸 수 있다니까, 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본다면, 이런 용례를 God이라는 단어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물으려니 속에 뭔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은, God, 즉 신이라는 말은, 어쩐지 굳이 따져 본다면 명사를 동사같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동사를 명사같이 써야 하는 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분들도 아마 이런 이야기에는 동의를 할 것이다. 인간이 신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물론 ‘성서’나 ‘교회의 전통’ 등을 통해 더 많이 파악을 할 수 있다고도 하겠으나, 그것을 감안해도 결국은 ‘불가능’이긴 마찬가지다. 그 말은 곧 신에 대한 이해를 ‘명사’적인 방법으로 할 경우 그 ‘명사’의 내용을 완벽히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도 되지 않겠는가. 필자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최근에 내신 책 제목마따나, 신은 ‘알 수 없는 분’인 것이다.

   그러나, 명사로서의 신이 ‘알 수 없는 분’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사건에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고 실제로 많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아니, 종교와 신앙이란 것 자체가 바로 그 ‘어떤 사건을 두고 그 사건에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행위’의 집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집적된 행위들을 성찰해 가면서, ‘신’이라는 ‘명사’의 내용을 완벽하게는 불가능해도 더 많이 채우게 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신’이란 단어의 1차적 의미에 가까운 품사는 명사라기보다는 동사가 아닐까 싶은 것이고, 명사로서의 신은 그런 동사의 집적에서 명사의 요소를 뽑아내고자 할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3. 

   신이라는 단어가 동사를 명사같이 써야 하는 말이라면, 당장 직면하는 현실은 그 ‘동사’가 정말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사건에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할 때, 그 ‘어떤 사건’이라는 것이 정말 제각각이고, 그 제각각의 내용이 쉽게 타협이나 조정될 수 있는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제각각 중에서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리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가능한 한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리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이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하면서 어떤 국면에서는 전자가 나타나고 어떤 국면에서는 후자가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필자는 굳이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전자를 고르고 싶긴 하다).

   그런데 만약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릴 수 있다면, 그 때 그 ‘맞는 것’이 되는 ‘동사’로서의 신은 인간에게 ‘모범’이 되는 그런 ‘동사’일까. 일단 이 글은 ‘그리스도교인’ 대상이니까 ‘그리스도교’ 안에서만 이야기해 본다면, 그 ‘그리스도교’에서, 신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라는 ‘예수’는, 더도 덜도 아닌 정치범 사형수다. 게다가 그는 생전에는, 그 당시 신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라는 ‘율법’이나 ‘전통’을 두고, 그런 것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든 나는 이렇게 이야기할래 그게 맞어라고 뻗댔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예수’를 두고 묻는 적절한 질문은, 흔히 생각하곤 하는 이런 질문이 아닐 수 있다. “예수가 신이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닮을 것인가” 혹은 “예수가 신이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오히려 그런 질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런 질문 아닐는지. “예수가 신이라면, 정말 ‘저런’ 예수가 신이라면, 도대체 ‘신’이란 건 뭔가? 아니, ‘저런’ 예수를 신이라고 하는 세상이라면, 대체 그 세상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건가?” 즉, 예수를 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모범’이나 ‘절대자’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예수를 ‘신’이라고 밀어붙임으로써 세상을 당혹스럽게,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당혹과 난감을 풀어내기 위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도록 강제하는 일이라는 뜻도 되겠다.

   이런 예수 이야기의 양상에서 ‘신’을 이야기하는 데 대한 지혜를 빌어온다면, ‘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해답’일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이고 ‘출발’일 것이다. 또한, ‘신’을 이야기한다고 어떤 ‘권위’나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직 그 이야기하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의 삶에서의 ‘사건’에 다가가서, 자신의 출발점을 잡아내고 그것을 자신 스스로 얼마나 밀어붙일 수 있을까를 이야기할 수 있을 뿐. 그리고 ‘권위’나 ‘보장’이 없으니, 그 밀어붙임이 낳는 빛과 그늘에 솔직해야 할 뿐. 또한, 자신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닐 터이므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맞닥뜨리는 것을 감당해야 할 뿐.


   4. 

   민중신학 연구자 중 한 명인 필자의 사견은 방금 말한 것과 같은 방식의 신 이야기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신학 중 하나가 민중신학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두고,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학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면, 즉 ‘구원을 주는 존재’라면, 이 지점에서 나올 수 있는 적절한 반응은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기보다는 “아니 그런 게 구원이에요? 그럼 도대체 그런 구원을 왜 받아야 해요?”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구원이라고, 그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다”라는 말의 뜻이리라. 나는 이 자본주의 혹은 이 민주주의 세상에서 잘 살고 있으니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따로 구원이 필요없겠다 싶은 사람들에게, ‘잘 산다’는 것이, 그래서 ‘구원이 필요없다’는 것이, 착각일 뿐이라고 밀어붙이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것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다”라는 말의 효과라는 것이다. 이 말을 출발점으로 하여 조금 더 나가 본다면, 그런 ‘잘 산다는 착각’이야말로, ‘사람’이 ‘강도’를 만나게 되는 세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지금은 어떤 종류의 ‘잘 산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을 일단 권력의 자리에서 막 떨구어 낸 시간이다. 아마도 6주 정도 지나면, 저런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할 것 같아 보인다. 이른바 ‘정권교체.’ 뭔가 ‘진보적’인 일들을 할 거라는 정권이 들어선다는 ‘정권교체.’ 그 ‘정권교체’가, 다른 종류의 ‘잘 산다는 착각’을 재생산하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도, 민중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권력을 잡든지 간에, ‘강도 만난 사람’ 앞에서 당혹해 하고, 그 당혹을 출발점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내라는 강제를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갈 때까지 가 볼 수밖에.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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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근대의 문턱에서 스피노자는 중세의 미몽과 대결한다. 중세의 신은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의 대체물이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 인간은 필멸의 두려움으로 신을 찾는다. 종교는 기복과 불멸의 희망을 선포하는 장치이다. 신이 절대 인격자가 되고, 종교가 구원의 방주가 될수록 인간은 비참해진다. 인간은 스스로 원인(自由)이 되지 못하고 예속된 삶을 살 뿐이다. 스피노자는 인격신을 거세하여 신에게 자연이라는 제 이름을 돌려주었다.

 

 

탈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중세의 미망에서 해방되었는가. 어떤 사람은 신을 내동댕이쳤고, 누구는 더욱 집착한다. 또 다른 이들은 새로운 신을 발명한다. 세속화된 종교적 의례는 일상이 되었고, 위안의 담론은 넘쳐난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비참은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렌즈를 통해서 묻고 싶었다. 부유하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꿈꾸고, 기다리고, 노동하며 살아가는가. 그대들의 신은 어디 있는가? 
 

 


 

 

 


 

 

 

도홍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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