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평화와 안보를 위한 기독교인의 발걸음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미국의 여성 윤리학자 샤론 웰치 (Sharon Welch)의 책 ‘진정한 평화, 진정한 안보Real Peace, Real Security: The Challenges of Global Citizenship (Fortress Press, 2008)’는 평화에 관한 다양한 이론과 실천을 간략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웰치는 특정 국가에 속한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계 시민인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면 종교적, 윤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국제 사회가 인류에 대한 범죄를 막거나 벌할 수 있을까 (1)”라는 신학적, 윤리적 화두로, 이 작지만 힘있는 책의 서문을 연다. 쉬운 화두가 아니다. 특히 이 화두는 단순히 지적인 활동으로써의 평화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사색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 생각의 변화, 그리고 영성의 변화와 함께, 타성에 젖어 생각해 왔던 종교의 가르침과 하느님에 대한 생각까지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인류에 대한 범죄란, 넓게 보면 인간에 대한 폭력이고, 구체적으로 보면, 전쟁과 인종 학살, 집단적 성폭행이나 군위안부 같은 전쟁 범죄를 가르킨다. 구체적인 전쟁 범죄들은 인간의 폭력성이 환경에 따라 집단화, 광폭화되어 나타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인간의 집단적 폭력성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평화를 위한 근본적인 문제들 또한 해결할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또한 아니다. 웰치는 이 제3의 길이, “우리 인간이 잔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비심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공감력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란 사실을 묵상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2). 윤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 잔인함의 DNA를 지니고 있는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선과 악을 구별하거나,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존재는 아니란 것이다. 충분히 선을 선택하고, 선을 만들어갈 능력이 있는 존재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약자와 타인에 대한 폭력과 잔인함은 “절대선”과 “절대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착각에서 시작된다. 제3의 길의 여정은, 아군을 절대선으로 포장하고, 적군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며,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조를 진리삼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구조적인 폭력과 인류에 대한 폭력적 범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다 (100).


    웰치는 국제 사회에서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를 만들어 가기 위한 세가지 노력을 소개한다: 평화 유지 (peacekeeping), 평화 만들기 (peacemaking), 평화 건설 (peacebuilding)이다 (8). 평화 유지는 인종청소나 대규모 전쟁에 국제 사회가 즉각적으로 개입하여, 인류에 대한 폭력 범죄를 막는 것이다. 평화만들기는 전쟁이나 분쟁에 개입된 두 국가나 집단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 평화조약이나 협상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여기서 UN이나, 미국,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이 중재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평화건설은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진행중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장기적인 구조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이 노력은 평화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사회구조, 즉 무력분쟁, 경제적 착취, 그리고 정치적 소외계층 등의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와 노력을 담고 있다.


   평화유지, 평화 만들기, 평화 건설은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주로 UN 평화 유지군이 개입하는 “평화 유지 (peacekeeping)”는 강대국의 이익이나, 분쟁 주변국들 사이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분쟁 초기 개입이 늦어져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보스니아 전쟁이나, 르완다 학살, 수단 다푸르의 인종청소, 시리아 전쟁은 모두 초기 개입이 늦어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이 많았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특히 현대전은 내전이나 시민전이 아니라, 다국의 이익이 개입된 국제전임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일어 나고 있는 지역의 국가 자주성을 이유로, 국제사회는 초기 개입을 꺼린다. 국제 사회의 군사적 개입을 위한 윤리적 가이드 라인은 R2P로 알려진 “Responsibility to Protect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의무)”이다. 대량 학살이나, 대규모의 전쟁이 임박했을 때,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통해서, 인류에 대한 범죄를 최소화하거나 막는 것이다. 그러나 분쟁 지역의 정부가 개입을 반대하거나, 인종 청소나 대량 살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때, 국제 사회의 개입은 어렵다. 또한 국제 사회의 군사적 개입은 서구 국가들의 신식민주의와 윤리적 우월감의 남용이란 비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더불어 기아와 인종차별, 종교적 박해, 성차별 등등 서서히 진행되는 학살적 폭력을 막는 국제 사회의 물리적 개입은 거의 불가능하다. 평화 유지는 분쟁을 해결한다기 보다는, 물리적 분쟁을 일시적으로 막아서 분쟁 당사자들이 대화하고, 장기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하기 위한 공간을 만든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40).

  
   21세기에 들어 평화 만들기는 단순히 국가간의 평화 협정 뿐만 아니라, Track 2 Diplomacy (민간 외교)로 알려진, 다양한 시민, 종교 단체 간의 평화 운동과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 각 분야의 시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류는, 문화적 이해와 종교의 다양성에 관한 이해, 서로의 고통에 대한 진실성 있는 공감의 장을 형성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평화 협정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각 국의 정부 지도자들이 다양한 시민 단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한 민간 외교는 여러면에서 정치적 구속력을 갖기가 힘들다. 비근한 예로, 한-일 정부 사이에 비밀리에 추진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10억엔 배상은, 두 정부가 힘으로 밀어붙여 정치적 구속력을 갖게 된 비윤리적 행위이다. 한-일 민간 단체들과 종교단체들이 그동안 원폭피해와 군위안부 문제 등을 포함하여,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묻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온 역사를 철저히 무시한 정치적 결정이다. 하지만 한-일 협정이 의식있는 많은 시민 단체를 결속시켜, 반대 운동을 전개시키게 만든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민간 외교를 무시하고는 진정한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평화 건설은 장기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평화실천 운동이다. 사회 불평등과 불만 등,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미리 알아채고, 해결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비폭력적 방법으로 분쟁에 대항하는 사회적 힘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반목과 분열 관계에 있는 사회 구성원들과 국제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변화 시키려는 제도적 장치와 실천이 요구되며, 과거의 실패를 분석하여 새로운 전략과 실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평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평화 운동을 시작하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서로를 믿어주고 격려하는 공동체 형성이 크게 도움이 된다. 평화란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가 실현된 사회, 분쟁이 폭력이 아닌 대화와 비폭력으로 해결되는 사회를 의미하며, 그러한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평화 운동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세가지 실천들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여러가지 사회/평화 운동들을 통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양한 종교들이 축적하고 있는 평화에 대한 지혜, 인내와 함께 적극적으로 용감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 그리고 구조적 폭력과 전쟁에 고통받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 같은 덕목이 평화를 위한 제3의 길을 비춰줄 수 있는 빛이 될 수 있다. 이 제3의 길은 또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의 (self-righteousness)”에서 해방되고, 적군이나 힘을 가진 억압자들을 “악”으로 규정하는 행위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사회적 갈등과 반목, 국제 사회의 폭력 행위와 전쟁 등을 보며, 웰치의 책이 갖는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사드 (THAAD)배치에 비폭력적으로 반대 운동을 전개하는 성주 군민들을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강정 마을 해군 기지 반대 운동 때에도,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 운동 때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 때에도, 세월호 진실 규명 운동 때에도 던졌던 질문이다. 우선 웰치의 입장에서 사드 배치만을 놓고 보았을 때, 한국 정부와 미국의 결정은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 세계 평화에 위해를 가할 비윤리적인 결정이다. 왜냐하면 북한을 절대악으로 규정하여, 한국 정부가 가지고 있는 오만함,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평등과 사회 불만을 어설프게 숨김과 동시에, 미국이 가지고 있는 세계 패권주의와 우월감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는 국제 사회에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미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중국, 러시아의 불만을 고조시켜, 대화와 공감을 통해 평화를 만들려는 세계 시민들의 노력을 억압하고 있다. 북한이 일으키는 공포감이 적극적인 비폭력 운동을 통해, 대화와 공감을 통해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과 희망보다 더 큰 것일까? 더구나, 사드 배치를 통해 고통받을 사람들과 계속된 군비 경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세계 민중들의 목소리를 듣고, 공감하려는 평화의 정치보다, 군사 무기를 통해 이루려는 평화가 더 값진 것일까?


    사드는 미국의 록히드 마틴 (Lockheed Martin)사가 개발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다. USA Today에 의하면 록히드 마틴은 2011년에만 약46.5 억 달러 어치의 무기를 전세계에 팔아치운, 전쟁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얻고 있는 무기회사다.[각주:1] 모든 전쟁은 자본가들의 이익이 걸린 사업이다. 미국의 전쟁 영웅 스메들리 버틀러 (Smedley Butler)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미 1932년에 “전쟁은 사기다 (War Is a Racket)라는 책을 통해, 미국이 관여한 모든 전쟁이 소수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지불하는 사기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이 사기는 소위 말하는 소수의 내부자들이 공모하고, 각본을 짜서, 대중에게는 평화와 안보라는 이름으로 상영하는 사기극이라, 외부자들은 그 전말을 알기가 힘들다. 사드는 누구를 위한 평화이며, 누구를 위한 안보일까? 기독교에서 “항상 깨어있으라”는 가르침은, 소수의 내부자들이 주장하는 평화와 안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외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화 운동은 끊임없는 자기 비판과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의에서 벗어나고, 사드 배치와 같은 결정을 한 정치 지도자들까지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보듬으려는 노력까지도 포함한다. 웰치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평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으로써,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생겼다. 강정에서, 밀양에서, 평택에서, 서울 시청 광장에서 만난 많은 일반 시민들과 평화 운동가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성주 군민들은, 정부의 결정을 규탄하지만, 그 결정을 한 정치가들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성숙한 의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치인들이나 경찰, 주요 언론사들은 이들 시민 운동가들을 ‘빨갱이들’, ‘전문 시위꾼들’, ‘북한 동조세력들’로 부르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집시법 위반으로 벌금을 물리는 것을 본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어쩌면 광야에서 ‘회개하라는 (정책 결정자들에게 자기비판과 성찰을 하라는)’,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해도, 예수를 죽여도, 광야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지난 2000년 동안 끊어지지 않은 것이, 평화와 정의를 향한 기독교의 지혜이고, 힘이고, 열망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usatoday.com/story/money/business/2013/03/10/10-companies-profiting-most-from-war/19709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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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느님, 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 국가안보와 두려움의 상관관계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영어 단어 security는 한국어로 안전, 보안, 안보 등으로 문맥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요즘 미국에서 한국 관련 기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security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 개성 공단을 폐쇄하고, 미국의 록히드 마틴사가 제조한 사드 (THAAD)시스템을 들여오려고 하는 한국 정부. 이 틈을 타서, 국제적 문제아인 북한의 핵 위협에서, 자국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위대의 지위를 격상하려는 일본. 한반도에서 커지는 미국의 군세력을 자국 안보의 위협으로 보고 경제적,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는 중국. 그리고 침묵하는 북한.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미국 사이에 세계 평화는 고사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지한 대화와 협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이들 국가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안보의 정의도 군사무기와 힘을 바탕으로 한 영토 수호와 자국 국민들 보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박근혜, 김정은, 시진핑, 오바마가 가진 세계 안보와 평화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만약 21세기 교회와 기독교의 역할이 곽퓌란 (Kwok Pui-Lan)과 요그 리거 (Joerg Rieger)가 “종교를 정복하라 (Occupy Religion)”는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치와 경제 시스템의 현상유지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미국의) 강한 군사력에 의지한 대한민국 국가 안보라는 시스템에 어떤 자극을 가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반 기독교 사상가인 시모니 웨일 (Simone Weil)은 security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안전 (security)은 영혼이 본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안전은 영혼이, 짧은 순간이나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공포나 테러의 무게 아래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비록 영속적인 공포는 잠재적 상태만으로 존재해서, 그것의 고통스러운 효과는 거의 직접적으로 경험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질병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영혼의 준마비 상태이다 (Simone Weil, The Needs for Roots, 1952).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웨일은 반전 운동가는 아니였지만, 두 개의 세계 대전을 경험하면서,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열렬히 비난하였다. 특히 이들 전쟁이 노동자 계급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식민지 민족의 삶을 수탈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렇다면 공포와 테러에서 자유로운 안보/안전은 군사력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성 어거스틴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단순화시켜 생각해 보자. 세속적 왕국이 하늘의 왕국을 대신하지는 못 하더라도, 지상에서 평화와 질서를 지킬 의무가 있다. 외부의 침략으로 부터 영토와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킴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세속 왕국의 지배자가 해야할 의무이다. 비록 어거스틴이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 예방적 전쟁을 허용하기는 하였지만, 상대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란 공포심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도 동의하듯, 어거스틴에게 있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며,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후의 수단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빠른 시일 내에 끝내야만 한다.  


         전쟁은 인간의 공포심을 먹고 사는 괴물이다. 전쟁의 승패는 이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포심을 적절히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전쟁 당시 1.4 후퇴 때, 자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트루만 대통령은 국가 비상상태를 선포한 후에, 공산당에 의해 아시아가 무너지면 미국도 안전하지 않으며, 이는 곧 미국이 하느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자유도 없는 국가로 전락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공산당을 악마와 동일시 하며, 국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한 것이다.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 또한 사실 확인조차 되지 않은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 때문에 시작되었다. 인류의 반을 말살시킬 수도 있다는 대량살상 무기에 대한 공포감은 이라크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사담 후세인도 사라지고, 대량 살상 무기도 이라크에 없다는 것이 확인 되었지만, 이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전쟁은 항상 시작하는 것보다 끝내는 것이 더 어렵다—사실 전쟁의 후유증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그러므로 현대의 평화 운동가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 자체가 평화 운동이며,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전략과 정치, 경제 환경 조성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불평등, 무역 불균형, 국가 간 경제 제재 등 갈등의 근원을 파악해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근원을 해소해 나가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갈등 상황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전 세계 여성 평화 운동을 연구한 영국의 사회학자 신시아 코번은 반전운동은 공포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표현한다. 그 비유는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전쟁 그 자체가 일반 여성들의 삶에 가하는 해가 너무 크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일어난 일본군 위안부, 미군과 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하는 지역들의 성폭력과 조직화된 기지촌 성매매, 전쟁 중의 집단 강간, 여성 군인들에 대한 성폭력, 여성 군인들의 업적 비하 외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와 딸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 등 여성들이 몸으로 정신적으로 겪을 수 있는 전쟁의 폐해는 상상 이상인 경우가 많다. 적국의 여성들을 공격하는 일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적에게 공포심과 무력감을 주는 비열한 전술이다. 여성이 겪은 전쟁 폭력은 전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려지는 경우가 많고, 알려진다 하더라도, 사회나 국가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피해 여성들을 위로하고, 사회 화합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하는 예가 거의 없다. 정신대 피해 여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일본과 협상한 대한민국 정부, 내전 기간 동안 집단 강간을 당한 보스니아 무슬림 여성들의 기념비 건립을 거부하는 세르비아 지역 주민들과 정부. 이들은 모두 여성들에게 그 영혼 깊숙히 공포와 테러를 심어주어서, 준마비 상태로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예이다.  


          코번이 방문하고 인터뷰한 여성 반전 단체들이 전쟁의 공포심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단체들은 전쟁과 군사화가 약속하는 평화가 인간 사회의 공포심을 기반으로 한 거짓이며, 알 수 없는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란 공포심에서 벗어나, 함께 반군사화 운동, 군비감축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말 그대로 국제 정치가 남성중심의 힘과 공포의 논리에서 벗어날 때, 지속 가능한 안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Cynthia Cockburn, From Where We Stand, 2008. 한국어로는 평화학자 김엘리가 번역한 것이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의 다양한 단체와 학자들이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미군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내놓고 있다. 그 연구들 중 하나가 과연 미군이 사용하는 군사 행동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또한 국제 안보에 기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래전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dnt)가 이야기한 것 처럼 폭력은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이 힘을 잃기 시작할 때, 그것이 두려워 다른 집단들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계속 복종시키려 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Hannah Arendt, On Violence, 1970). 아렌트의 논리대로 라면, 더이상 힘을 가진 집단이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미국은 제국으로써, 초강대국으로써의 힘을 더 빠르게 잃기 시작한다. 사회 윤리학자 샤론 웰치 (Sharon Welch)또한, 다양한 사례 연구를 들면서, 미국이 테러리즘에 대한 공격을 빌미로 제개한 군사행동은 군사적으로 윤리적으로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Real Peace, Real Security, 2008). 미국은 군사행동을 통해 오히려 반미정서를 전세계에 퍼뜨렸으며, 이슬람 국가 (IS)같은 급진적 테러집단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괌, 사이판 등의 태평양 섬들과 호주를 잇는 거대지역은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중요한 군사지역이다. 중국의 군사력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끊임없이 이 지역에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명문을 찾고 있다. 이번 북한의 핵실험에 이례적으로 재빠르게 대응하며, 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 사드시스템 배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는 군사 폭력을 통해 세계패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양새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결국 일반 한국시민들이 미국의 군수업체들과 한국의 건설업체들에게 ‘안전함이 보장되지 않는’ ‘안보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인간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세상에 무관심해져서, 정작 두려워 해야할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불합리한 제도와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Silent Cry, 2001). 우리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한국 정부와 미국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두려워 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우리의 공포심을 바탕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북한의 핵이 두렵다. 그러나 한국이 가지고 있는 핵, 원자력 발전소 뒤에 숨어있는 핵, 핵무기 개발을 정당화하는 극우보수주의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핵이 더 무섭다. 그리고 한국의 안보는 이미 세월호가 물 속에 가라앉을 때, 정신대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며 한일협상이 이루어졌을때, 이제 할머니가 된 생존자들에게 죽기 전에 일본을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애국어머니연합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사용자 중심의 노동법을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강요할 때, 등등의 순간에 끝났다. 국가안보는 국경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몸과 마음을 정치적, 종교적, 성적위협, 재난과 재해, 경제적 억압과 착취, 성차별 등으로 부터 지키는 인간중심의 안보가 되어야 한다. 국가가 자국민들을 지킬 능력도, 지킬 마음도 없을 때, 또는 지킴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더이상 국가안보는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 중심의 국가 안보를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정의의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도 상상하기 어렵다. 심판의 칼을 든 하느님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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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런 안보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바울이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그대로 갇혀 있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황제에게 보낼 때까지 그를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 「사도행전」 25장 21절

통치가 절정에 이르던 기원전 22년 헤롯 왕은 항구도시를 대대적으로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본래 항구가 있던 자리가 아닙니다. 항구로 사용하기엔 해안이 너무 깊었지요. 굳이 그런 곳을 선정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선물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10년쯤 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그는 안토니우스의 지지자였습니다. 한데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에서 승리하고 안토니우스는 자결을 했지요. 그의 통치에서 최고의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처세술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인물 헤롯은 놀랍게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할 때 그를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원로원에 의해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았고,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헤롯은 팔레스티나 지역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여 헤롯은 로마의 새 통치자에게 충성스런 봉신국 왕임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지요. 이 도시는 바로 그런 이유로 건설된 것입니다. 과거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시이저)의 양자로 입적되었을 때 그의 이름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되었지요. 이 이름을 따서 항구도시는 ‘카이사리아(가이사랴)’로 명명되었습니다. 요컨대 이 도시 건설은 헤롯 정부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항구도시는 ‘단지 충성심’ 때문에 지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최대의 무역항을 꿈꾸었습니다. 페니키아 인들이 건설했던 작은 도시는 이제 지중해 동부를 대표하는 거대도시로 탈바꿈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국제무역항이 필요했습니다.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이집트를 잇는 뱃길의 중간 기착지 말입니다. 또한 로마와 아라비아반도를 잇는 동서간 국제무역에서도 지중해 동단에 위치한 항구의 필요성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남쪽으로 50여 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욥바라는 오래된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엔 여긴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이 차지 않게 작은데다 이스라엘 성향이 너무 강해서 국제도시가 되기엔 적절치 않았습니다.

한데 문제는 이곳은 항구가 들어서기엔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수심이 너무 깊은데다 파도가 거센 탓에 선착장을 만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해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상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은 강제로 쫓아냈고, 부역에 동원하였습니다. 수심이 깊은 곳에 나무로 거대한 곽을 짠 다음에 콘크리트와 돌을 부어 수심을 낮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센 풍랑을 맞으며 60미터에 달하는 방파제를 건설하게 합니다. 하루아침에 살 곳을 빼앗긴 이들이 목숨을 걸고 이 위험한 노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바닷가에 살지만 바닷사람이 아닌 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건 난해한 건축에 동원된 것입니다.

언덕빼기에는 신전을 건립하여 여러 종족의 사람들이 각기 자기들의 방식대로 바다의 신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착장에 이어지는 지하에 거대한 창고를 건조하여 신속하게 수하물이 선적, 하적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국제무역항은 손색없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왕궁이 있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주민들은 왕궁, 경기장, 원형극장, 수영장, 공중목욕탕 등의 건설에도 동원됩니다. 자기들이 살던 터에 왕족과 귀족들의 공간이 들어섭니다. 또 그이들이 마실 식수를 대기 위해 멀리 갈멜 산에서 9킬로나 이어지는 도수교를 건설했습니다.

여기에 건립된 헤롯 왕궁의 면모에 대해서는 당대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찬사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헤롯에 대해서 그토록 극한 언사로 비난해마지 않았던 그가 왕궁을 보고는 너무나 아름답다고 내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카이사리아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로마로 연결되는 국제적 ‘관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국의 권력이 유입되는 곳이며, 또 팔레스티나 통치자의 권력이 공고히 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헤롯 사후, 팔레스티나의 통치권을 장악하고자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로마로 갔던 이들은 이 도시를 통해 나갔고 성공했든 실패했든 이 도시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또 로마 황제의 대리인으로 팔레스티나의 총독이 되어 부임한 이들은 이곳 관저에서 지냈고, 영전하든 좌천하든 임기 이후 이곳에서 떠났습니다. 헤롯의 손자였으나 헤롯에 의해 척살당한 집안의 장손인 아그립바 1세는 이곳을 통해 로마로 떠났고, 칼리굴라의 죽마고우로서 대권을 손에 쥐고 팔레스티나로 귀환할 때 이 도시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이 도시는 팔레스티나의 권력의 핵심이었고, 그 배후에는 로마 황제가 있었습니다. 즉 이곳은 로마의 정치적 식민주의의 관문인 것입니다.

또한 이곳은 부의 중심지입니다. 황제의 재가로 이곳에서 특권을 쥔 이들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국제무역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이 도시는 동부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큰 재화가 형성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 풍요로움은 이곳을 발판삼아 처세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여 비잔틴 시대에 인구 10만이나 되는 거대도시로 발전하기까지 합니다. 즉 이곳은 로마의 경제적 식민주의의 관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가능한 항구도시를 위대한 국제무역항으로 만들어낸 원천적 자원은 바로 원주민들의 땀과 피였습니다. 그들의 노동과 목숨이 기반이 되어 이 도시는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집을 빼앗기고 빈민지역에 거주하는 하층민이 되거나 떠돌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 이 도시에서 성공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 원주민들의 고통과 죽음을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탐욕을 가지고 이 도시로 들어오고 탐욕을 가지고 이 도시를 살아가며 탐욕을 배우며 이 도시를 떠나갑니다. 반면 거의 아무도 도시의 제일 밑바닥 층에 화석이 되어 묻힌 원주민들의 몸을, 영혼을, 고통을, 삶과 죽음을 발견해내지 못합니다.

나는 여기서 안보론을 떠올립니다. ‘안보’는 통치자의 언어입니다. 통치자는 그 사회와 자신의 안전의 공통분모를 찾아 안보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명명된 안보는 어떤 것과도 거래될 수 없는 절대적 위상을 지닙니다.

헤롯에게 로마는 안보의 핵입니다. 로마에 적대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전 팔레스티나 사회를 몰락하게 할 것입니다. 해서 그는 로마 황제를 기리는 도시를 건립합니다.

한데 그곳이 항구이어야 할 이유는 안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발전의 논리이지 안보의 논리가 아닙니다. 한데 이곳은 항구가 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무리한 사역을 위해 전 주민을 희생시킵니다. 한데 그 결과는 자기 자신과 주변의 세력에게만 이익을 줄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안보와 발전논리가 교묘하게 결합하면서 극단의 비대칭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탐욕스런 안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탐욕스런 안보의 한 예가 최근 강행되는 강정의 해군기지입니다. 이 해군기지의 명분은 원래 남방 해역 안전과 해저자원 및 해양수송로 보호에 있었습니다. 한데 그것이 갑자기 대북 안보 문제로 둔갑했습니다. 

이것은 본래 미국의 대(對)중국 아시아 방위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아시아 방위전략이 영구주둔거점을 확보하는데서 순환배치로 전환되면서 중국에 대한 광역의 포위망을 순환거점 확보를 통해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안보 문제가 한국 국민의 안보로 둔갑한 것입니다.

여기에 지난 정부가 추진하다 중단된 것을 현 정부가 갑자기 추진하는 것은 총선용 색깔론의 혐의가 짙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규모 건설사업이 거대자본들의 이익과 맞물려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통치자와 지배권력의 탐욕이 안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데 바로 이런 안보론의 제일 큰 문제는 ‘구럼비의 눈물’을 망각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폭파되어 산산조각나고 있는 구럼비 바위처럼, 통치자들의 탐욕스런 안보론은 주민들과 그곳 물과 뭍의 생명체와 비생명체들 모든 것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산산이 흩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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