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기념비를 세우라
: 차별금지법 논란에 즈음하여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우리말 성서에서 ‘회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콰할’(qahal)은 칠십인역성서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에클레시아’(ecclesia)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에클레시아’는 제2성서(신약성서)에 나오는 ‘교회’의 원어다.
한데 「출애굽기」 16,9의 용법에 따르면 ‘콰할’은 모세의 법 앞에 모인 백성을 뜻한다. 이 구절은 형식상 국가 이전 시기 광야의 유랑자들이 야훼가 내린 법을 통해 법공동체가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법공동체는 (떠돌이 사회의 상상이 아니라) 국가형성의 상상이다. 떠돌이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복잡한 사회적 집단이 되었을 때, 이들을 묶어내는 양식이 곧 법의 반포인 것이다. 하여 법의 반포는 그 법이 포괄하는 공동체의 안과 밖을 나눈다. 즉 다양하고 복잡한 전통과 관습과 역사를 가진 이들을 일괄하여 법의 일원으로, 곧 법의 ‘안’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 나라의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하고, 나머지를 ‘밖’으로 배제하여 이방인이 되게 하는 이분화의 형식이 바로 국가에서 법의 효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치적 집단이 법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비로소 국가다운 국가가 되었다는 시금석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누가 그 공동체의 일원인가의 문제다. 즉 법은 누구를 ‘안’으로 포함하는가의 문제가 국가 형성의 핵심적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다국의 멸망 이후, 그곳에서 일어난 재건공동체가 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누가 법공동체의 일원인가’를 둘러싼 논의를 살피고자 한다. 여기서 유다 재건공동체는 과거 유다국이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 유배되어 끌려간 자들의 일부가 반세기 이후부터 돌아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귀환자들이 속속 돌아왔다. 바벨로니아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먼 곳에서 오려니 나이든 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고 혹여 용기를 내어 길을 떠난 이들도 험한 여정에서 쓰러졌다. 하여 기어이 고향 땅 유다로 무사히 돌아온 이들은 대개 청년들이었다. 경험이 많지 않지만 열정은 넘쳐나는 이들이다.
이들은 전에 왕족 혹은 귀족 집안의 자제였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던 이들의 자손이었다. 해서 그들은 꿈꿨다. 그 땅에 무사히 돌아오면 다시 주인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루아침이 유배민으로 전락하여 고생고생하며 살아가는 종의 신세가 아닌, 땅의 주인이 되는 삶, 인생역전의 꿈이다. 
한데 그들이 당도한 꿈의 땅 예루살렘은 폐허가 된 채 버려진, 아무도 살지 않는 땅, 불에 탄 잿더미와 무너져버린 벽돌, 무수한 잡초만 가득한 ‘죽은 도시’였다. 그들을 환대해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없었다. 고국 땅에서 주인이 될 줄 알았던 귀환자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폐허가 된 담벼락을 보수하고 잡초를 치워 가까스로 살 집을 마련했고, 겨우겨우 끼니를 잇는 절박한 생활고에 꿈이 자리잡을 곳은 없었다. 몇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귀향한 사람들, 새 나라에 대한 꿈에 한가득 부풀었던 그들은 번번이 절망하고 말았다.
그중 한 귀환집단이 있었다. 예수아 제사장과 즈루빠벨 총독이 이끄는 귀환자들이다. 이들의 지도자들이 황제가 준 기금을 가지고 와서 그 날이 곧 도래할 거라고 부추겼을 때, 그들과 앞서 귀환했던 이들, 그리고 그 지역의 일부 토착민들은 힘을 내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지었다. 성전이 세워지면 야훼가 보살펴줄 것이라고, 하여 영광의 시간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전이 세워졌어도 야훼의 영광은 보이지 않았고, 비루한 현실은 여전했다. 게다가 때만 되면 몰려오는 약탈자들은 성전이 세워진 뒤 더 기승을 부렸다.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났다. 다시 큰 규모의 귀환자들이 돌아왔다. 지도자는 느헤미야 총독, 페르시아 황제의 관리였다는 자다. 그는 황제가 준 기금과 유배민 공동체에서 수거한 기금, 그리고 귀환민들로부터 징수한 기금을 모아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가까스로 성벽이 세워지니 이제 더 이상 약탈자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성벽은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곳이 다름 아닌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멀리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서 보내온 기부금과 기부물품이 쌓이기 시작했고, 성전 제사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제사장들의 권위는 다른 성소들의 권위를 압도하게 되었다.
식민지가 된 이후 유다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성읍이 되었던 미스바(예루살렘 북족의 13킬로의 성읍)도 예루살렘에 밀리게 되었고, 남쪽으로 30킬로 떨어진 성읍 벧수르도 예루살렘에 복속되었다. 하여 느헤미야는 이제 영토다운 영토를 다스리는 총독이 되었다. 그 주(州)의 이름은 ‘예후드’였다.
예후드 주에서 느헤미야 총독은 강력한 분리주의 정책을 취했다. 식민지 이후 이 지역은 한동안 사마리아에 복속된 하위의 정치단위였었다. 또 사마리아 못지않은 강력한 정치세력이던 암몬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하여 느헤미야는 분리주의 정책을 통해 사마리아와 암몬으로부터 실제적으로 독립된 자치구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에스라 제사장이 황제의 재가를 받아 이곳으로 파송되었다. 그는 예후드 주의 백성을 결속시키는 법을 반포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법은 ‘성전에 계신 야훼께서 주신 율법’이라는 것이다. 이제 느헤미야의 분리주의는 하느님의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최초로 백성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통합시키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전 제사도 비슷한 통합의 기능을 하지만, 그것은 제사 드리는 그 순간에야 효력을 미친다. 한데 예후다 영토가 넓어지자 모든 이가 제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된 데다, 제사는 연중 불과 몇 회만 시행될 뿐이다.
반면 율법은 성전까지 오지 않아도 백성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자의식에 매어 있게 할 수 있다. 마을마다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하는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이 예배와 교육은 매 안식일마다 시행되었다. 법은 이렇게 제사보다도 예후다의 백성을 더 촘촘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안식일마다 마을에서 천명되는 율법에서 핵심은 ‘누가 예루살렘 성전공동체 예후다의 백성인가’라는 문제에 있다. 이때 에스라의 율법은 백성이 아닌 이를 규정함으로써 백성인 이들을 포용하는 형식을 지녔다.
누가 법의 백성이 아닌가 하면, 첫째로 이방인이 그렇다. 심지어는 이방인과 결혼하는 이도, 그이들의 자제들도 이방인이다. 강력한 배타주의다. 이방인과 결혼 중인 이들까지 강제로 이혼시키고 한 편을 국외로 추방하는 조치가 내려질 정도로 고강도의 폐쇄주의다.
둘째는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고자’는 배제의 대상이다. 왜 하필 ‘고자’라고 표현했을까? 추측컨대 ‘생산을 할 수 없는 성(性)’이라는 점이 고자 속에 담긴 핵심 논지였을 듯싶다. 왜냐면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가 혼혈의 위험으로부터 피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것이라면, 고자 배제의 원리는 깨끗한 피의 백성이 번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자 배제’ 원리 속에 함축된 것은 ‘생산하는 성’만이 진정한 ‘법의 내부’라는 주장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생산 없는 성’을 왜 하필 ‘고자’라고 했을까? 아마도 남성 중심사회에서 불임 여성을 거론하는 것보다는 불임의 남성을 얘기하기 위해, 불임 남성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자’가 배제의 대표집단으로 거명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느헤미야-에스라 식의 이러한 분리주의와 순혈주의는 유대주의적 성전공동체를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부상하게 했고, 하나의 사회적, 종족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주체화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한데 문제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 체제는 누군가를 강하게 차별하는 배제주의적 사회를 만들어냈다. 하여 이 체제를 실행하기 위해 이웃 족속과 결혼했던 이들을 강제로 갈라놓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성에 대한 사회적 처벌을 제도화했다. 결국 소수자에 대한 배제를 제도화함으로써 그 사회는 성립했던 것이다.
이제 오늘 우리 시대 얘기를 해보자. 최근 다시 차별금지법안이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상정되었다. 북한 미사일 사태에 시민사회가 정신이 온통 쏠려 있는 중에 이 차별금지법 문제는 개신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있다. 기독교계 매체들 가운데 몇 개 빼고는 거의 전부가 차별금지법에 대해 일방적 비난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해서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 표출된 여론은 반대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해묵은 물음이 제기된다. 왜 개신교계는 그토록 차별금지법 반대에 열을 올리는가? 말할 것도 없이 반대의 핵심은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 문제에 있다. 수많은 반대 주장에 들어 있는 공통된 불만은, 이 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죄라고 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니 이게 가당한가라는 주장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인 이들은 반성서적이고 반자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성서적이라 함은 성서가 동성애자를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반자연적이라 함은 생식 없는 성은 부자연스런 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억지다. 성서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텍스트가 단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그 텍스트가 동성애와 무관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 또한 있으므로 그것으로 성서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주장은 자명하자 않다. 설사 반대한다는 해석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서의 모든 주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니, 불과 몇 개 텍스트에 불과한 것을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지나치다. 가령 성서가 월경하는 여자를 불경하다고 하고, 그 기간에 그녀가 눕는 자리, 앉았던 자리에 닿는 것까지도 주변의 모든 사람을 부정타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교회도, 어느 목사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또 고기를 먹을 때 피까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반복하는 교회는 없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선 주일 점심 식사로 선지국이 나오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동성애 같은 몇 개 요소만은 성서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성서 문구조차도 동성애 반대 논지가 불명확하니, 억지 부린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반자연적이라는 주장도 그렇다. 자연적이라는 것을 다수자의 선택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단지 다수자에 속하는 이들이 낯설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종종 다수자의 폭력으로 드러나곤 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소수자든 다수자든 그 선택이 주변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차별금지법은 인권법이다. 인권법은 소수자라 하여 차별받지 않는 권리에 관한 법이다. 소수자든 다수자든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한, 그 선택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한데 소수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낀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소수자들은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그런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바로 차별금지법인 것이다.
하여 차별금지법 같은 인권법은 다수의 동의를 요하기보다는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인권 개념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법제화되는 것이다. 즉 차별금지법은 그 사회가 국제적 인권의 관점에서 얼마나 성숙한 인격을 갖추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차별금지법 논란은, 우리 사회가 누구를 법공동체의 일원으로 삼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국제적으로 격조 있는 사회가 될 것인가 아닌가의 기로에 선 논란이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은 한국사회를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국제적 인격을 결여한 사회가 되게 하려는 일에 앞장섰다.
다시 성서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사야서」 56,4~7는 느헤미야-에스라가 주장하는 법공동체의 폐쇄적 개념에 대항하고 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

주장인즉슨, 이방인이나 고자라는 이유로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은 안 된다는 얘기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그 사회의 질서를 반하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이방인과 성소수자는 그 사회로부터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구절은 당시 예후다 지역의 지배적 법률인 에스라의 법의 배제주의에 대항해서 제기된 하느님의 차별금지법인 셈이다.
이 성서 구절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성벽 안에서(곧 야훼의 법 공동체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는 표현이 주목된다. 누가 우리 사회, 우리의 법공동체의 일원인가?를 둘러싼 논의에서 차별당하는 소수자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 야훼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부활에 관해 상상해본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부활은 몸이 난도질당한채 죽임당한 이들이 그 마지막 때에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어 일어서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몸의 부활 모티브는 그 살해당한 이들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신체가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활은 몸의 복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하여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그들, 곧 소수자이기에 차별받았던 이들이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사건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차별당하고 죽임당한 소수자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벌인다. 그것이 바울 사역의 핵심이기도 하다. 곧 그것은 하느님의 차별금지법의 바울식 실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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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31 22: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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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감합니다^^ 멋지십니다 ㅎㅎ
  2. 참된 목자를 찾으며
    2013.06.05 06:4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이분 목사님 맞나요??
    성서적으로 동성애가 죄라고 딱 집어 얘기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법이란 불법한 자.. 죄인.. 을 위해 있다 하고 '아비를 치는 자.. 살인한 자..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라고 해서 동성애를 죄라 하고 있거든요. 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가 동성애자를 죄인 취급하거나 혐오한다는 뜻이 아니라 글 쓰신 분이 성경을 들먹이시기에 나도 인용을 해본 것 뿐이구요.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로서 어려움을 겪다가 빠져나와 참된 행복을 맛보고 있는 사람들을 알기에 다른 동성애자분들도 이들과 같이 되면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 것도 행복의 기준에 대한 차별로 느껴진다면 죄송하구요.
    본론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전공도 정확히 모르는 분이 '법'에 대해서는 알고나 계실까 싶고 이렇게 분석과 해석력이 부족하신 분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제대로 이해는 하신 걸까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정죄하고 차별-배척하자는게 아니라 '동성애 합법'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문제점 그리고 '차별금지법'에 따른 역차별과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는 것.
    즉 '사람'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법'의 부실에 대한 반대인데, 마치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국제적 품격에 못 미치는 사람인 양 표현하신 것이 목사님으로서의 품격과 자질에 의심이 가네요..
  3. 위의 분
    2013.06.19 00: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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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동성애 같은 몇 개 요소만은 성서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성서 문구조차도 동성애 반대 논지가 불명확하니, 억지 부린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라고 본문이 말하는 게 뭔 말인지 모르시나 보군요.

    법의 부실을 논하기 전에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편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는 성찰의 능력부터 키워 보시길 권합니다.

기묘한 대칭, 이명박과 여호야킴 그리고 미네르바와 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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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피투성이 남자는 쇠사슬이 묶인 맨발로 예루살렘 거리를 난폭하게 끌려 다닌다. 병사들이 살벌하게 도열하고 있는 광장에 도달하자 또 다시 고문이 시작된다. 형틀에 묶고, 곳곳이 상처투성이인 몸에 다시 칼로 난도질을 한다. 그리고 채찍질이 이어진다. 칼날에 뜯겨나간 피부는 채찍이 닿자 허공으로 핏물이 흩어져 나간다. 고통에 죽을 듯 고성을 지르던 남자의 소리가 사그라든다. 죽은 듯 축 늘어진 몸둥이로 찬물 한 바가지가 퍼부어진다. 가늘게 뜨인 눈을 확인하자 다시 채찍질이 시작된다. 핏방울이 튀어, 형리의 상체를 벗은 몸둥이, 팔뚝,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어 마치 지옥의 사자처럼 보인다. 형틀에 묶인 남자의 몸둥이는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헤어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더 이상 깨어나지 않는다.

‘그가 죽었다. 그가 죽었다. 그가 죽었다.’ 형리가 소리치고, 광장 곳곳에 도열한 병사들 앞의 전령이 백성을 향해 소리친다. 그리고 백성들이 수근대며 어떤 이는 크게 또 어떤 이는 나지막하게 소리친다. 군대의 나팔수가 째질 듯 죽음을 고시하는 음을 내고, 고수들의 난장 같은 북소리가 이어진다. 광장에 운집한 군중 모두에게 그의 죽음은 이렇게 고지된다. 그리고 순식간에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의 목을 잘라 광장에 걸어놓고 시신은 키드론 골짜기에 내던져버린다.

여호야킴 왕이 즉위한 지 몇 달이 안 된 시기에 벌어졌던 한 사건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로 재현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연도로 표시하면 아마도 그가 즉위한 주전 609년 9월부터 이듬해 초 사이에 발생했던 사건이다. 왕은 집권한 직후부터 이렇게 자기를 반대한 자를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어떠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처형당한 남자는 우리야라는 이름의 예언자인데, 그에게 붙여진 죄목은 야훼의 예언자를 참칭하여 왕을 비방하고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을 호도하였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단 네 개의 절(26,20~23)로 압축되어 묘사된 내용에 따르면, 검거령이 내리자 우리야는 이집트로 도주하였고, 왕이 파견한 관리에 의해 압송되어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주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기럇여아림 사람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였다. 그도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으로, 이 도성과 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하였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이, 자기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과 함께 그의 말을 들은 뒤에, 그를 직접 죽이려고 찾았다. 우리야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그러자 여호야김 왕이 악볼의 아들 엘라단에게 몇 사람의 수행원을 딸려서 이집트로 보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우리야를 붙잡아 여호야김 왕에게 데려오자, 왕은 그를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공동 묘지에 던졌다.

이집트 운운하는 얘기를 표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행보는 모세를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던 대중이 그렇게 기억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곧 그에 관한 대중의 기억의 진실은 제2의 모세를 잔혹하게 처형한 왕이 모세, 곧 야훼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해마지 않던 조상이자 영웅을 해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반체제적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이 훗날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집을 만들던 일부 지식인 집단에게 수집되어 간략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선포했다는 ‘재앙’에 관한 신탁에 주목해 본다. 말했듯이 이때는 여호야킴 왕이 즉위한 직후다. 당시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했던 시기다. 결과만 간략히 말하면, 왕국이 처음으로 번영을 구가하였다가 국제정치로 인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때 즉위한 왕인 여호야킴의 정책은 결국 국가를 회복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 이후 20년 만에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그의 정책은 한 나라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으며, 그 변란 중에 백성들이 겪었던 뼈를 깎는 아픔의 직접적인 원인일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겠다. 그로부터 100년 남짓 거슬러 올라가면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번영의 시대가 도래한다. 그때는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패권국가의 하나였던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여(주전 722년), 수많은 유민이 남하하는 일이 벌어졌다. 황량한 산악지대에 위치한 유다 왕국[각주:1]에는 갑자기 인구가 몇 배나 늘었고, 당시의 통치자인 히스키야 왕(주전 727~698년)은 이들을 수용하여 남아돌던 비경작지역을 개간하여 왕실 사유지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아마도 거기서 발생한 수입으로 도성에 왕궁 및 사회적 공공시설을 건립함으로써 부유하던 유휴노동력을 사회적으로 흡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족화하던 귀족은 견제되었고, 대중은 왕실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주체화되어 유다 왕국은 비로소 강력한 왕권제 사회로 정착하게 된다. 국가발전과 계층균형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오늘 한국의 MB 정부의 ‘대운하 정책’이나 ‘4대강 살리기 및 주변정리사업’으로 표상되는 이른바 ‘녹색뉴딜 정책’이 건설규제완화와 부가가치 창출이라는 건설재벌과 실질구매력 있는 부유층에 치우친 정책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위와 같은 히스키야의 정책은 보다 진정한 뉴딜의 고대적 버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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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조형 = 손문상 화백)

아무튼 이때에 유다 왕실은 문서활동이 본격화되었고, 귀족계층으로 이루어진 구관료층 대신 ‘서기관’이라는 신흥관료층이 대두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역사가 쓰이고 왕실신학이 발전하게 된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히스키야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시리아에 의해 히스키야 왕은 사실상 무력화되고 그를 승계한 므낫세 왕(주전 697~642년) 시대에 귀족당파적 반개혁의 시대가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므낫세를 계승한 아몬(주전 642~640년)이 궁중암투에 의해 살해된 뒤, 히스키야 당시 굳건히 왕당파로 편입된 민중세력인 암하아레츠(땅의 사람들)가 주축이 되고 서기관과 왕실사제 층이 가담한 쿠데타로 요시아 왕(주전 639~609년)을 등극케 함으로써, 다시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다. 개혁이 본격화된 기간이 재위 십여 년이 지난 뒤이니 실제로 개혁이 진행된 시기는 채 20년도 못되지만 상당한 성과가 있었음이 고고학적으로나 문헌적으로, 특히 성서 문헌 속에 반영되어 있다.

요시아 개혁은 아시리아에서 바벨로니아로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구조가 변동하던 이행기에, 하여 팔레스티나에 우연히 찾아온 권력의 공백기에 전개된다. 한데 이집트가 아시리아와 공조하기 위해 북진하는 과정에서 그 노선에 포섭되지 않는 요시아의 유다 왕국을 공격하여 왕을 처형함으로써 이 개혁은 다시 위기에 빠져든다. 이때 민중당파에 의해 옹립된 여호아하스(주전 609년)는 폐위되어 이집트로 압송당했고, 친이집트적 귀족당파가 옹립한 여호야킴(주전 609~598년)이 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와 아시리아 연합군은 주전 604년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갈그미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하여 바야흐로 바벨론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우리야의 재앙 선포는 바로 이 시기 직전인 609/8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 시기에 여호야킴은 친이집트 노선과 반개혁주의-귀족주의 노선으로 집권한 정부의 상징적 우두머리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책이야말로 위기에 놓인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중세력의 반대가 격렬했음은 당연한 일이겠다. 우리야의 신탁은 바로 그런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여호야킴 왕은 요시아의 정치가 위기를 초래했다고 믿었고, 자기의 정치가 위기를 타개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다고 확고하게 믿었던 듯하다. 또 귀족세력을 위시한 보수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지지했다.

한데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세력의 견해가 타당한지를 진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반대 견해를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왕은 즉위하자마자 반대주장을 펴는 이들의 상징적 존재 하나를 처벌함으로써 자기의 단호함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예레미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개혁지지파인 서기관세력의 비호 덕이었다(“예레미야는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보호하여 주었으므로, 그를 죽이려는 백성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6,24). 아무튼 왕은 반대를 설득하기보다는 처벌함으로써 자기의 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이명박 정부를 그런 점에서 주목한다. 민주적 개혁의 시대는 지났다. 한국의 민주적 개혁은 성공적인 것도 있었고 위기를 초래한 것도 있었다. 아무튼 대중의 다수는 더 이상 민주적 개혁에 우호적이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내적으로는 그의 보수주의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책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관련이 있고, 외적으로는 지구적 제국 시스템의 균열로 인한 위기다. 최근 그것은 지구적 자본의 위기로 표출되고 있다. 생산능력을 압도하는 소비욕구로 충혈된 세계를 구축한 자본이 초래한 위기다. 그리고 그런 위기에 취약한 나라들부터 위기는 표출되고 있으며, 한국은 바로 그러한 위기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의 하나다.

당연히 정부의 위기 대응 정책은 중요하다. 시민운동권과 학계에서 다양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사회의 집합행동과 넷공간에서의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는 것은 위기의 강도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겠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의견들의 다수는 정부의 전략이 파국에 직면한 사회를 더욱 위기에 노출되게 한다는 문제제기들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이러한 반대에 대해 위협하고 처벌하는 방식을 고수했고 점점 더 강화하고 있다. 또한 자기들 식의 전략을 적당한 대화나 설득의 공론 과정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위기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말이다. 하지만 실은 이들이 밀어붙이는 전략은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는 본래부터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실용’이라는 정부의 자기 원칙은 실종되었다. 또한 반대를 양산하고 있다. 반대를 강압적으로 대했던 여호야킴의 전철을 정부는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재앙을 불러오는 진짜 이유임을 증언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여기서 나는 익숙한 표현인 ‘남왕국 유다’, ‘북왕국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않고, ‘유다 왕국’, ‘이스라엘 왕국’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전자는 유다가 남쪽에 위치하고 이스라엘이 북쪽에 위치한 나라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리적인 친절함이 있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마치 팔레스티나에 두 개의 나라만 존재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점에서 유태 중심주의를 함축하는 표현인 셈이다. 이는 오늘날 팔레스티나 지역의 주인이 역사적으로도 유태인이라는 날조에 가까운 역사관에 무의식적으로 공조하는 문제를 내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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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달리야의 꿈에서 위기를 보다
- 재앙을 넘어서는 길에 관한 신학적 역사적 상상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 재앙

재앙에 관한 설(說)들이 난무했다. 쌀을 제외한 곡물자급률이 5%를 넘지 못하는 우리 현실에서 국제곡물가격의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낳는다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Agriculture+Inflation) 재앙설은 더 이상 남의 얘기일 수 없다. 환경에 관한 각종 재앙 시나리오들에 낯설어하는 이는 이젠 없을 정도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2008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상승하는 유가 소식을 접하면서 에너지 재앙설 또한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국제기축화폐라고 할 수 있는 달러화의 붕괴 가설에 관한 책 몇 권이 번역 출간되면서 그런 것도 치명적 재앙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에 난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가능성들과는 다소 다른 시나리오로 구성된 재앙이 우리는 사납게 덮쳐버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에서 시작한 미국발 금융위기가 낳은 경제재앙. 이미 그 파괴력이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현장들에서 현실화되고 있지만, 아직은 시작일 뿐이다. 그것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우리의 존재 조건들을 무참히 짓밟아 버릴지, 불길한 예측들이 난무한다.

많이 개선되긴 했어도 미국경제에 대한 의존성이 여전히 큰 상황에서 미국발 재앙은 우리에게 남다른 위기로서 다가온다. 특히 가계부채가 무려 660조가 넘는 부채과다현상은 매우 치명적이다. 경기침체로 인한 채무불이행사태가 속출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가계수지가 적자인 가정이 거의 30%에 달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온 바 있다.

이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의 상하향 분해 추세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고, 특히 빈곤층의 크게 늘었으며, 상류층의 부가 크게 증가하는 현상이 현저한데, 최근의 경기침체는 이러한 사정을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소득 양극화 문제는 최근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기의 요소다.

한국의 MB 정부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감세와 규제완화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법인세와 소득세 인하, 종합부동산세의 사실상의 폐지 등, 그리고 수도권 규제완화, 출자총액 제한제 폐지, 금융ㆍ산업 분리의 폐지 등이 추진 중이다. 또한 공기업 민영화, 지상파방송의 민영화, 한ㆍ미 FTA 같은 고강도 세계화 정책 등에 대해서도 강력한 시행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박정희식 성장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시장근본주의를 결합한 위기대처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득양극화를 크게 심화시켰던 국민의정부나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들보다 훨씬 더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령,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가운데 조세부담율이 가장 낮은 한국사회에서 감세정책을 펴고, 역시 가장 낮은 사회안전망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할 국가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다면, 이 위기요법이 초래할 계층분화의 방향이 어떨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설사 이러한 정책이 투자를 활성화시키고 경기부양 효과가 있어 낮은 성장률의 문제가 해소된다고 해도 성장 혜택의 분배를 공정하게 할 의지가 정부에게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미 불공정 게임룰이 제도화된 터에, 배분할 ‘파이’가 커지든 안든 양극화는 심화될 것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어느 경우든 양가적인 면이 있듯이 재앙 또한 위기인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평소라면 좀처럼 시행할 수 없는 근원적인 개혁을 드라이브할 수 있는 순간이 도래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감한 정책이 때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 경우 당면한 재앙은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징조가 되어버릴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MB 정부의 위기관리 전략은 심히 우려스럽다. 우리는 바로 이런 우울한 교훈을, 하여 우리를 비판적으로 점검할 안성마춤의 사례를 성서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2. 선택
   
그 때에 주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그들이 너에게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어디를 가든지, 염병에 걸려 죽을 자는 염병에 걸려 죽고, 칼에 맞아 죽을 자는 칼에 맞아 죽고, 굶어 죽을 자는 굶어 죽고, 포로로 끌려갈 자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나는 이렇게 네 가지로 그들을 벌할 것이다. 그들을 칼에 맞아 죽게 하며, 개가 그들을 뜯어먹게 하며, 공중의 새가 그들의 시체를 쪼아먹게 하며, 들짐승이 그들을 먹어 치우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서」 15장 1~3절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고한 재앙 시나리오는 그대로 실현되었다. 바빌로니아에 의해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된 것이다. 두 번의 침공(주전 597년 여호야긴 왕 때; 주전 586년 시드기야 왕 때)으로 거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불타 사라졌고, 수많은 농촌마을 또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무려 85%의 거주지가 역사에서 사라졌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급부상한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은 한때 인구가 일만오천 명에 이르는, 요시아 왕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가 되었으나, 전란 후 오랫동안 그 십분의 일인 일천오백 명을 넘지 않는 소읍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농촌의 경작지들은 거의 쑥대밭이 되었고, 대다수의 주민들은 유민이 되어 타지역으로 이주하여 마을은 거의 비어버렸다. 유대 지역은 이후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한 채 버려진 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심각한 재앙이 기회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이 정복되고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눈알이 뽑힌 채 바빌로니아 중원으로 압송되어 구금됨으로써(「열하」 25,7) 유다 왕국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물론 바빌로니아는 이 지역을 직할통치지역으로 삼지 않았다. 그보다는 대중의 지지를 쉽게 받을 수 있는 토착인사를 통치자로 위임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보다 안정된 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은 정복지역에 대한 이런 방식의 체제재편을 선호하였다.

유대 지역의 통치자로 위임된 이는 ‘그달리야’라는 사람이다. 그는 사반의 손자이며 아히감의 아들이라고 한다(「열하」 25,22). 사반은 요시아 개혁 당시 사관 등 요직을 역임한 인물이고(「열하」 22,8),1) 그의 아들 그마리야와 손자 미가야는 반개혁의 시대인 여호야김 왕 때에 반왕당파인 개혁파의 주요 인사로, 종종 왕에 반하는 필화사건을 일으킨 급진적 인사인 예레미야를 음으로 양으로 비호하곤 했다(「예레」 36,11~20). 그리고 사반의 또 다른 아들이자 그달리야의 부친인 아히감 또한 개혁당파의 핵심인물이었다(「예레」 26,24). 요컨대 이 가문은 요시아 개혁을 지지하는 유력한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시아 개혁은 왕당파와 민중세력(‘암하아레츠’)이 연대하여 귀족세력을 위축시키는, 이른바 ‘위로부터의 개혁’이다. 그 이전까지 유다 왕국은 고대 팔레스티나에서 약소국으로 국가발전이 매우 더뎠던 나라다. 인구도 적었고 토양도 척박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왕권제로의 제도화도 뒤쳐진 후진국이었다. 오므리-아합 왕 치하의 이스라엘 왕국의 봉신국이 된 기원전 9세기 초 이후 왕권은 조금 더 발달하게 되지만 여전히 주변정세와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이후 왕당파와 귀족간의 본격적인 정쟁이 계속되었고, 약소국이 대개 그렇듯이 이 정쟁은 주변의 나라들이나 제국들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힘의 균형이 깨지곤 했다. 이 과정에서 유다 왕국의 여러 왕들이 궁중 암투로 살해되거나 감금되어 명목상의 왕위만을 유지하는 등,2) 왕권은 여전히 잘 확립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열왕기」에는 이러한 정쟁 과정에 ‘암하아레츠’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있다.

동시대 문헌들의 용례에 따르면 이 용어는 비하적으로 표현되건 아니건 ‘농민 일반’을 개략적으로 지칭하고 있다.3) 한데 제1성서(=구약성서)에서 사용된 17회 중 식민지 시대를 다루는 2회4)를 제외한 15회가 유다 왕국의 정쟁과 관련된 텍스트에서 사용되고 있다.5) 다시 말하면 유다 왕국 역사와 관련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암하아레츠는, 무정형적인 농민 일반이 아니라, 정치세력화한 농민세력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시아 왕을 즉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큼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하는 농민세력을 가리킨다.  

요시아 왕은 이들을 지지세력으로 삼아 과감한 개혁정책을 편다. 농민의 몰락을 억제하고, 이미 몰락한 이들을 보호하는 조치들이 과감하게 시행된 것이다. 땅의 소유권을 옮기는 것에 대한 금령(「신명」19,14), 고리대금과 악랄한 부채 회수에 대한 금령(24,6‧10~13‧17), 정의로운 재판 강조(16,18~20), 뇌물수수 금령(16,18~20), 정량화된 도량형(25,13~16) 등이 이 개혁의 주요 내용들인 것이다. 이는 정치세력화한 농민세력을 가정할 때, 이들이 요시아 정부에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는 가정을 할 때 가장 타당하게 설명되는 조치들이다.

다시 그달리야로 돌아가자. 그는 이러한 민중적 개혁의 관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인물이다. 통치자로 위임되자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빈민화된 주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식량을 배급해준다(「예레」 39,10; 40,10). 또한 그가 도읍으로 삼은 미스바는, 전란 중 파괴되지 않은 성읍으로, 바로 이러한 민중주의적 정책에 안성마춤인 도시다. 과거 지파동맹 시대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성읍으로(「사사」 20,1), 그의 민중주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줄 만한 전통이 살아있는 고도(古都)이다. 그리고 유다 왕국에서 그러한 민중적 전통을 대변하는 또 다른 읍락인 아나돗 출신의 명망가 예레미야(「예레」 1,1) 또한 그달리야를 지지하고 나섰다(「예레」 40,6). 뿐만 아니라 세겜, 실로, 사마리아 같은 오래된 지파동맹의 전통을 간직한 또 다른 지역 출신 인사들도 그의 체제 속으로 속속 귀의하고 있었다(「예레」 41,5).

재앙을 맞아 모든 생산기반이 붕괴된 상황에 놓인 사회에서, 지도자 그달리야는 이렇게 대중의 자생력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펴고자 했다. 엘리트집단을 강화함으로써 붕괴된 체제를 재건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중사회의 활력을 통해서 체제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 꿈은, 그의 비전은 한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구왕족 출신의 군부인사였던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이 그를 암살한 것이다(「열하」 25,25). 이스마엘이 보기에 그달리야의 꿈은 그토록 불온해보였던 모양이다.6)

지도자를 잃어버린 체제는 동시에 그 꿈도 잃어버렸다. 그달리야에게로 귀하한 구왕국의 귀족들은 그가 죽자 어찌할지 몰라 허둥댄다. 그들은 예언자들에게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도 그렇게 한 듯하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우리가 이집트로 가서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을 리가 없소. 이것은 틀림없이,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우리를 바빌로니아 사람의 손에 넘겨주어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거나 바빌로니아로 잡아가도록 하려고, 당신을 꾄 것이오.
―「예레미야서」 43장 2절 하반부~3절

 이 텍스트는, 그달리야의 정책을 계승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갈등하고 있다. 하나는 ‘이집트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미스바로의 길’이다. 미스바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달리야의 비전이고 대중의 꿈이다. 대중과의 공존을 강조하는 것이고, 함께 식탁을 나누는(「예레」 41,3) 평등주의 사회의 지향을 담고 있다. 반면, ‘이집트로의 길’은, 오래된 모세 설화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출애굽한 대중이 미래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꿈으로 회귀하고픈 퇴행적 갈망을 상징한다. 바로 ‘풍요에 대한 노예의 꿈’이다. 주인들의 풍요로운 식탁을 꿈꾸며 자기들도 그 자리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 바로 ‘이집트로의 길’인 것이다. 또한 전자가 대중의 삶에서 시작하는 정치를 시사한다면, 후자는 누가 누리든 어떻게 나누어지든 풍요 그 자체에 주목하는 정치를 암시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스바와 이집트를 지향하는 두 길, 혹은 그달리야와 이스마엘로 나뉘는 두 길은 역사인 동시에 정치에 대한 상징이다. 어떤 정치가 진정 야훼의 길이며, 어떤 정치가 진정 야훼의 백성이 꿈꾸어야 할 길인가. 바로 이 선택 앞에 우리는 지금 서 있다.

결국 그달리야가 죽은 이후, 예레미야 같은 이의 간곡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남은 지도자들은 예레미야 등을 볼모로 하여 이집트로 간다.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이 길이 바빌로니아의 보복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바빌로니아가 재앙을 상징한다면, 바로 재앙을 벗어나는 길은 과거 회귀적인 퇴행적 꿈, 풍요주의/발전주의를 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얘기다. 그 길로 예레미야를, 대중을 강제로 끌고 간 것이다.

3. 위기를 보는 시선


재앙에 대한 MB 정부의 대응책은 어느 길을 택하고 있는가. 어느 길로 시민을 인도하려 하는가. 지난 20년간의 민주주의적 기조를 뒤흔들면서까지 강권을 휘두르며 대중을 이끌려는 그 길은 어디인가. 그토록 절박하게 그들을 부르는 그들 식의 유토피아는 어디인가. ‘이집트’인가 ‘미스바’인가.

내가 만난 한 경제학자와 또 한 명의 목사는 내게, 나의 이야기 라인을 따라 선택의 문제를 고려한다 해도 ‘미스바로의 길’은 단지 ‘도덕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충고를 하였다. ‘미스바로의 길’이란 결코 현실 속에서 재앙 타개책으로 검증되지 않은 방식에 불과하다고. 반면 IMF 식의 구조조정이 추구했던 신자유주의나 박정희 식의 성장주의는 위기를 해소한 방식임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MB식 성장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표준은 재앙을 대처하는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방식이라는 주장이다.

한데 과연 그런가. 1990년의 ‘워싱턴 컨센서스’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의 정치학, 그 시장근본주의적인 정치경제학은 국제무역을 자유화하고, 이를 제약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며, 금융의 국제적 이동의 자유를 절대화하고, 공공적인 것을 민영화하는 등의 기조에 따라 세계은행(WB)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는 국가들의 개발정책을 강제하였다. 그런데 이런 개발정책은 과연 재앙에 대처하는 국제표준이라고 해도 무관한가.

1990년대 말 지구를 휩쓴, 특히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지역을 휩쓴 외환위기는 이러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국제적 실험의 장이었다. 그리고 세계은행은 1999년 새로운 발전모델을 제시한다.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할 만한 이 모델의 기조는 시장근본주의적 개발정책은 세계의 빈곤화를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또 다른 지구적 위기를, 재앙 위의 재앙을 초래하였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하여 시민사회의 빈곤화를 억제하고 빈곤화된 대중의 회생 프로그램을 통해 저들을 다시 시장으로 진입하게 하는 방식의 새로운 개발모델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세계은행그룹 내부에서 제시된 것이다. 2006년 노벨상을 수상한 그라민 은행이 거둔 마이크로크래디트 운동의 성과는 전체 운용기금의 97%를 제공한 국제 금융기구 등의 개발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세계 각 곳의 시장주의자들과 거대자본들이 운용하는 연구기관들은 막대한 기금을 투자하여 빈곤화된 대중의 시장진입을 위한 프로그램의 가능성에 대해 조사 연구를 시행하였다. 요컨대 IMF식의 신자유주의적 표준은 더 이상 국제표준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하며, 오히려 작은자들의 회생프로그램이 오늘의 시장이 선호하는 표준적 지위를 획득해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미스바와 이집트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의 정부를 돌아보고, 그것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묻는 자리로 돌아가자. 나의 관심은 시장이 선호하는 선택의 적실성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문제의식을 낭만적 도덕성으로 폄하하는 신자유주의적 독선에 대해 반론을 펴고 싶었을 뿐이다. 나의 관심은 오늘의 재앙을 보면서, 재앙 위의 재앙을 막는 선택에 관한 신학적 판단 혹은 해석에 있다. 나는 그 해석의 준거를 말하기 위해 요시아 개혁을 경유해서 미완으로 끝난 그달이야의 비전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쳤다. 미스바의 길은 요시아 개혁과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달리야를 통해 정책적 실험에 돌입한 방식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빈민의 회생에서 몰락한 국가의 회생을 꿈꾸는 한 지도자의 비전을 통해 역사화된 것이다.

이스마엘의 암살로 이 실험은 미완으로 끝났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예레미야와 대중을 강제로 이끌고 이집트로 갔다. 그것이 결국 재앙 위의 재앙이 되었는지, 역사학은 그것을 판단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학은 그것에 판단을 내린다. 그것은 야훼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를 통한 그달리야 에피소드에서 ‘야훼의 길’은 명백하게 미스바를 향하라고 권고한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 빈민의 희망은 곧 야훼의 희망인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주]

1) 최근 이 시기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충실한 학자들은 유다 왕국에서 처음으로 왕실의 역사가 기록되던 시기를 히스기야 왕 시절이거나 요시아 왕 시절로 본다. 바로 그 시기에 사관, 즉 왕실 이데올로기를 펴는 역사서술 책임자의 위상은 대단히 중차대하였을 것이다.

2) 아하시야 왕(「열하」 9,27)은 이스라엘 왕국에서 벌어진 예후 쿠데타 때에 살해되었고, 그의 부인이자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었던 오므리의 딸인 아달랴가 남편 아하시야 사후 권력을 장악했으나 궁중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살해된다(11,16). 이 쿠데타로 즉위한 요아스도 피살되었으며(12,20), 그의 아들 아마샤도 정변으로 희생되었다(14,19). 이렇게 유다 왕국이 이스라엘 왕국의 봉신국이 되면서 발달된 왕권제에 관한 관념이 도입되고,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국제관계 망 속에 흡수되면서 연속된 네 명의 통치자가 정변으로 죽임을 당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또 그를 승계한 아사랴(웃시야)는 「역대기하」 26장 19절에 의하면, 사제들과의 갈등 이후 문둥병자가 되어 평생을 밀실에 갇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궁중암투의 상황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까지 네 명의 통치자는 명껏 왕으로 재임하였지만, 그 이후인 아몬부터 마지막 시드기야까지 6명의 왕중, 여호야김을 제외한 모든 왕이 정변으로 죽거나 전사하거나 제국통치자에 의해 볼모로 끌려가야 했다. 요컨대 선진적 왕권제가 도입된 아하시야부터 마지막 시드기야까지 15명의 왕 중, 네 명을 제외한 모든 통치자가 불의(不意)의 최후를 맞았다. 

3) 무지랑이 농촌 대중을 가리키거나, 지주 혹은 씨족장 등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을 가리킨다.

4) 「느헤」 7,6; 「에스겔」 12,19.

5) 「열하」 11,14・18・19・20; 21,20・24; 23,30; 24,14; 「역하」 23,13・20・21; 33,25; 36,1; 「예레」 11,9; 52,25.

6) 여기서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 하여 부연하면, 그달리야는 바벨로니아에 의해 위임된 통치자이지만 그렇다고 그는 식민주의자이고, 이스마엘은 자주파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유다 왕국이 선진화되면서, 왕실은 끊임없이 국제관계 속에서 체제를 해석하면서 발전하였다. 왕국 말기만 하더라도, 정부 내에는 친 아시리아-친 이집트 노선의 세력과 친 바벨로니아 노선의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정쟁을 벌였다. 말했듯이 그달리야는 친 바빌로니아 세력이었는데, 아마도 이스마엘은 친 에집트 세력인 듯하다. 한편 고대의 제국들은 점령지역에 봉신국 지도자를 위임했지만, 이들 봉신국 지도자들은 제국에 무조건 충성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마큼 제국의 영향력은 촘촘하지 못했다. 사실상 봉신국 왕들은 제국에 반기를 들지 않는 한 영토에 대한 거의 자율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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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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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달훈
    2013.09.04 17:0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신학과 역사의 끝없는 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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