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났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어떤 '한 아이'의 탄생



    베들레헴 작은 말 먹이통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말 먹이통이란 가혹함 그 자체다. 포근하기보다는 까슬까슬한 촉감, 엄마의 젖내보다 악취가 더 먼저 그를 맞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아이의 탄생 장면은 ‘비록’ 말 먹이통일지라도 사랑해주는 부모와 경배하는 목동들, 동방의 박사들에 둘러싸인 아늑하고 훈훈한 풍경일 것 같지만 이제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아니 ‘염원’하는만큼 그 풍경이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생명에 대한 축하와 격려의 자리라기보다는 엄혹한 세월의 비바람 속에 ‘생존’의 가능성마저 의심받는 회한과 우려의 자리였을 것이다.





한 아이 : 그들 중 하나(One of them)


   그렇게 그 한 아이는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피난민 신세다.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상황이 예상과는 달리 진행되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 일러준 예언의 기쁨도 잠시, 결국 헤롯의 칼날을 피해 아무도 알지 못하는 타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 명의 ‘메시아 용의자’ 찾기에 혈안이 된 헤롯은 박사들과의 대화를 기준으로 두 살 아래의 핏덩이들을 모두 죽여버렸고, 그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내 품의 아이가 진정한 하나님의 메시아인지 ‘죽음의 화신(化身)’인지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고로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사실, 그것은 이제 입 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그는 한 명의 평범하고도 이름 없는 자로 살아가야 했다. 메시아의 목숨을 찾아 헤매던 ‘승냥이’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에 이스라엘로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고향의 상황은 떠나오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서슬퍼런 권력의 칼날에는 ‘헤롯’에서 그의 아들 ‘아켈라오’로 이름만 바뀌어 새겨져 있을 뿐 살아있는 권력으로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게 아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평범하게 자라나갔다. 

   한 명의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간 그 ‘한 아이’는 배고프면 먹었고, 잠이 오면 잤다. 여느 나사렛 사람들처럼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밤이 되면 쉼 없는 고된 노동에서 오는 피곤에 짓눌려 잠자리에 파묻혔다. 메시아가 태어났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왔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의 탄생을 두고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예언은 한바탕 봄날의 꿈을 꾼 듯 씁쓸한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평범한 민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갔다.

    마치 우리 시대 루시드폴의 ‘평범한 사람’이란 노래가사말이 그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한 아이’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그 어느날이었다. 사람들이 수군수군거리며 어떤 ‘한 사람’ 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저 변방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가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혈혈단신 맨 몸으로 성전과 권력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과 같은 혼란과 번잡한 일들을 일으켜 일상을 무력과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노동으로부터 사람을 소외시켜 자기 몫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죄와 악의 굴레를 영원히 맴돌도록 만드는 이들에 대해 분연히 일어난 ‘한 사람’이라 했다. 그 아이가 본 광경은 생경하면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한 사람’은 당장이라도 잡혀 죽임을 당했을 이야기를 하고 다녔지만, 그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진리를 외쳤다. 한 사람이 의연하게 빛을 밝히니 사람들이 모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켰을 때, 모든 이들이 그 촛불이 있는 곳을 자연스레 쳐다보게 되듯이… 하나둘 그 ‘한 사람’ 곁에 여럿이 모여서 물결을 이루었다. 결국 헤롯 안티파스를 중심으로 한 권력자들도 의심의 눈초리로 세례자 요한을 노려 보았지만, 소요의 위험 때문에 함부로 그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한 사람의 용기로 비춘 불빛은 이제 들불이 되어 타올라갔다.

    그러나 그 ‘한 사람’ 세례자 요한도 별 수 없는 ‘한 사람’이던 것일까? 헤롯 안티파스의 치부를 집요하게 건드린 결과로, 순식간에 목이 베여 쟁반에 담긴 신세가 되었다. 구름 떼와 같이 모였던 무리들은 흩어지고 도망쳤다. ‘한 아이’도 그 무리들처럼 한편으로는 다시 찾아온 패배감과 무력감을 안고 또다시 일상으로 숨어들어갔다. 그 ‘한 아이’도 이름 없이 무력한 ‘그들 중 하나’인 순간이었다.


한 아이 : 바로 그 한 사람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4~15> 


    ‘한 아이’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서는 강력하게 증언한다. 분연히 ‘한 사람’이 잡히고 난 뒤에 ‘한 아이’가 다시 일어났다고 말이다. 세례자 요한과 똑같은 메시지를 들고 말이다. ‘요한이 잡히고 난 뒤’라는 시간의 진술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무력하게 도망친 무리 중 하나, ‘한 아이’가 예수로, 그리고 더 나아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로 세상에 ‘나타나는’ 시점, 그리고 그가 외친 ‘말’은 반드시 몸조심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험한 말을 가지고 그가 등장했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어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 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554쪽


    만약 세례자 요한 이후, 예수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무력을 떠안고 별 일 없이 살았다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못 들었을 뻔하였다. 하지만, “강력하고 집요하게 악의 정신이 지배할 때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인류 속에 고고하게 흐르고 있는 진리의 편에 서서 꺾이지 않고 균형을 잡고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갔다. 하지만, 그도 별 수 없는 ‘한 사람’이었을까. 몇 년동안 사람을 모으고 소동을 피우며 조금은 시끌벅적했지만 세례자 요한처럼, 또 한 명의 권력의 손아귀에 넘겨져 놀아나고 조롱 당하고 모욕 당하며 죽어갔다. 그로 인해 아주 잠깐 새 이스라엘의 희망을 가졌던 이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그의 손이 먹인 양식으로 배를 불렸던 무리들이 ‘야훼의 이름으로’ 그를 직접 처단하는 칼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결과는 그렇게까지 참혹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여느 때처럼 ‘한 사람’을 쳐다보던 무리들은 또 뿔뿔이 흩어졌지만, 단 한 사람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이후에도 등장하고 또 등장했다. 최후의-최초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켜갔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의외의 장소에서 사건은 늘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대 '바로 그 한 사람'으로 살길      

 

    우리는 요즘 아무리 여러 사람이 공들여 탑을 쌓아도 한 사람이 세상을 완전히 망칠 수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사람’의 의미가, 결코 ‘많은 사람’의 반의어가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중요성은 성경 내에서 아주 뿌리깊게 흐르고 있는 정신이다. 물론 여러 사람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끊어지지 않는 세겹줄(전 4:12)의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 또한 원자로서의 ‘한 사람’, 근원으로서의 ‘한 사람’을 뺀다면 세겹줄은 아예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주변에도 수천명이 모여 있었지만, 단 열두 사람만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해석해주셨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사람(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이 주님을 대접한 것으로 나오는 등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한 사람’의 엄중한 무게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오히려 ‘한 사람’이란 그 자체로서 스스로 온전히 하나이신 분인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 ‘가능성으로서의 온전함’, 또는 ‘온전한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역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갈 소명을 부여 받았다. 그러니 그대, 결코 혼자라고 마음을 놓거나 쓰러지지 마시길 빈다.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어 꿋꿋이 촛불을 켠다면 세상의 어둠은 단 한 순간에 스러져 물러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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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하나님과 같이
-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요한복음서는 분명하고 일관된 어조로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빌립보서와 히브리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찬송시도 요한의 고백만큼 과감하지는 못했다. 요한의 전승을 만든 사람들과 요한의 기자는 유대적 배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왜 유대인들이 보기에 신성모독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예수를 이야기했을까? 요한복음서의 청중들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다는 그들의 고백을 어떻게 경험하고 이해했을까? 

   요한복음 5장 18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고발한다. 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으며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긴 것에 신성모독죄를 물어 그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다. 적어도 요한복음을 쓴 기자의 눈에는 예수가 불경스러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은 확실하다. 물론 이 단락을 두고 L. 마틴은 예수 시대가 아닌 1세기말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반증, 곧 적대적인 주변 세계에서 고발당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수 시대와 요한의 공동체 시대를 넘나드는 요한의 두 차원의 드라마는 요한복음을 꽤 읽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무대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 준수보다도 예수와 하나님의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들 스스로 선뜻 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5장은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치유받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외곽으로 난 길을 걷다 베드자다 연못 돌기둥 근처에 모인 사람들을 보게 된다. 여러 병자 중 특히 한 사람, 한눈에 봐도 그 병세가 오래된 사람을 보고 묻는다. “낫고 싶으냐?” 그는 짧은 물음에 ‘그렇다’는 답변 대신 “물이 동해야 하는데, 나를 넣어줄 사람은 없고…….”부터 시작해 꾹 참았던 말 보따리를 풀 듯 제 사연을 꺼내 보였다. 이에 “일어나 걸으라.”는 예수의 말에 오랜 병고가 무색하게 그는 치유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타이밍이다. 하필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난 때가 안식일이었다. 승냥이 같은 유대인들이 그런 타이밍을 놓칠 리는 없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면 안 된다고 점잖게 훈계를 놓던 유대인들은 치유를 행한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해 예수를 박해하였다(요5:16)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전한다. 

   예수와 유대인들(바리새파)과의 안식일 논쟁은 요한복음서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안식일 논쟁에 대해 공관복음서는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을 천명하며 새로운 정결례에 대한 예수와 예수운동의 삶의 자리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들려준다(막2:23-28; 마 12:5-6; 눅13:10-17; 14:1-6). 그러나 요한의 기자에게 포착된 안식일 논쟁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하나의 빌미일 따름이다. 그는 유대인들만큼이나 타이밍을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그는 안식일을 구실로 유대인들의 입을 빌어 요한복음의 핵심, 즉 요한의 그리스도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식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예수의 답변에 요한복음서의 기자는 유대인들의 상황을 전한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더욱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기 때문이다.”(요5:18) 

   안식일에도 우주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대해 반박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를 근거로 안식일을 수시로 어겼던 예수나 예수의 사람들의 행태야 유대인들에게는 분명 거슬리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예수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 자신과 하나님이 같다고 하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의 기독교인들이야 ‘하나님 아버지’는 으레 자연스러운 호칭이기에 성서 어디든 발견되리라 생각하겠지만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신 32:6; 시 68:5; 89:26; 사 9:6; 63:16)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연과 역사를 초월해있기에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계약을 맺었고 역사 가운데 자신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으며 세계 안의 어떤 존재도 감히 하나님과 같을 수는 없었다. 물론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으로 맺어진 부자관계로 보여주었지만, 질곡의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거듭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유대민족을 흔들었던 위기가 1세기 팔레스타인의 흙먼지 이는 척박한 땅에 다시 찾아 왔다. 이미 지중해 지역을 장악한 로마 제국의 압제가 그들 깊숙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유대민족 내부에는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타락 그리고 가난으로 지속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다양한 형태의 유대교적 갱신운동들이 우후죽순 퍼져가는 때였다. 또 다시 민족의 혼란 속에서 유대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인들이 그러했듯 율법준수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이었다. 유대인들에게 행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와 같이 되는 것은 제일계명을 어긴 명백한 오만이며 악이었다.(2마카 9:12) 

    그러나 일반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지도자 유대인들의 언행에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 멀리 있었고 위태롭고 지난한 삶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보다는 가난하고 소외된 낮은 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먹고 마시고 돌보고 그들을 치유했던 예수. 애끓는 심정으로 그들의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인간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이 그들의 삶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 요한복음 5장에서 보듯, 그것은 오래된 병자에게 먼저 다가가 몸을 낮추어 그를 살피고 말을 걸었던 예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병자의 말에 공감(共感)하고 눈을 맞추며 치유를 했던 예수의 자비(慈悲)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예수 시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한 이들의 생생한 증언과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의 공감과 자비의 경험은 그들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되었다. 

   이제 유대민족의 하나님이 역사와 신앙의 위기 가운데 예수를 믿는 개개인의 삶에서 자신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예수의 눈에서 하나님의 눈을, 예수의 말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투명하게 보고 들었다. 예수와 하나님, 예수와 그들 그리고 예수를 통한 그들과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하나됨의 경험-너의 고락(苦樂)이 내 것이 되고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는 영적인 통찰을 말하고자 그들은 예수를 감히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은 예수였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극명한 차이와 거리를 뚫고 세상으로 들어온 예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불경스러운 발언이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한 그들에게 진정성있는 울림이었다. 율법, 성전 혹은 회당이라는 스크린을 걷어내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내 안의 모신 자들의 말하는 방식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신성모독의 발언은 요한의 사람들의 대담하고도 발칙한 경험의 순간을 의미했다. 

   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우리에게는 닳고 닳아 진부해진 이 교리 조각은 애초 요한의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은 떨리는 고백이었다. ‘예수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경위를 두고 많은 학자들이 유대적이냐 혹은 헬라적이냐 하며 그 근원을 따져 물었다. 책상 앞에 앉은 이들의 수많은 가능성의 범주에서 요한의 예수 고백은 매번 다른 채색을 더했지만 원화를 생동감있게 복원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펄떡이는 심장박동과 고통스러운 환희를 경험한 그들의 고백이 유대세계의 박해와 축출의 상황을 넘어 요한의 신학과 신앙의 역사를 새롭게 기록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이 되는 대담한 고백의 전승자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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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연구소의 회원이시기도 한 김용님 선생은 여성의 시각으로 성서와 신앙전통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부활절에 즈음하여 나무를 화판 삼아 작업하신 작품들을 전시하는 자리가 열립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김용님, 생명나무전

2012. 3.14(수)~19(월) 목인갤러리(서울 종로구 견지동82/ 02-722-5066)

 


 

나무를 깎으며, 예수를 생각하며 

 

 

숲 속에 쓰러진 나무토막들을 깨워 작업실로 불러 들였다.

껍질을 벗기고 상처를 도려내,

한 얼굴을 향하여 깎아나갔다.

 

 

 

내 긴 방황의 막다른 골목마다에서 외마디처럼 부르던 한 사람,

어두운 들판을 서성일 때 불현듯 허기처럼 달려오던 한 얼굴,

내 한 생애가 더듬어 온 한 표정을 나무에 새긴다.

 

 

껍질을 벗은 나무의 속살로부터,

멀고 긴 기다림의 숲으로부터 걸어나오는

한 눈빛,

한 온기,

한 마음을 만났다.

 

  

나무를 만진다는 건,

나무에 어린 햇빛과 바람과 물의 추억을 더듬는다는 것,

먼 옛날의 에덴동산 시절의 나무의 기억 속을 더듬는 것이기도 하리라.

살아있는 것들이 모두 어울려 서로를 축복하며 생명으로 충일했던 낙원,

그 낙원에 뿌리내리고 있는 생명나무에 대한 추억에 젖는다.

 

 

30세까지 목수로서 나무를 다듬던 청년 예수를 생각한다.

나무를 깎고 만지면서 하느님을 묵상하며 지낸 시간들 속에서

그는 나무와 대화를 하며, 나무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았으리라.

 

나무와의 교감 속에서 생명나무의 꿈을 키우며,

생명나무와 한 몸이 되고자, 생명나무로 부활하고자,

그리하여 깨어지고 산산이 갈라진 생명들이 사랑과 조화로 영원한 생명으로 회복되고자

자신을 한 제물로 나무에 매달려 죽을 것을,

오랜 시간 거듭거듭 기도하며 마음을 다졌을까?

 

 

 

그는 나무로부터 생명의 비밀, 생명의 신비를 깨쳤으리라.

한 알의 씨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2000여 년 전의 한 사내처럼

나도 나무를 만지며, 그 오래된 정원의 풍경을 더듬는다.

나무에 서린 구름 한 조각, 햇빛 한 줌, 바람 자락 들이

내 영혼에 말을 걸며, 생명의 불을 놓는다.

 

 

모든 숨쉬는 것들이 성스러움의 추억으로,

재회의 환희로, 처음날의 감격으로,

부둥켜 한 덩어리의 생명으로,

태고적 그 찬란한 기억으로 깨어나는 꿈!

 

 

하여

 

 

“하늘의 평화, 공중의 평화,

땅의 평화, 물의 평화

초목의 평화, 숲 속 나무들의 평화

모든 신들의 평화, 궁극 실재의 평화

모든 것들의 평화, 평화의 평화

그 평화가 우리에게 이르게 하소서“

 

  

김용님 블로그; 연민http://blog.daum.net/etu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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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문서는 2011년 한백교회 성탄절 예배에서 사용했던 선찬 예식서입니다.



20111225일 성찬식

*성찬상 설치

[교회공간의 정 중앙에 테이블을 길게 놓는다. 흰 보를 덮고 그 위에 포도주 잔을 40 여개 놓는다. (증편)을 한 입에 들어갈 수 있게 썰어놓은 접시를 세 곳으로 나누어 놓는다.]


*
사회자의 멘트(김현숙)

오늘은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 기쁜 성탄절에 드리는 성만찬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만찬을 하였던 그 시간은 어떠하였을까? 그 시간에 더 살고 싶은 욕망은 없었을까? 더 좋은 세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아마도 제자들, 여인들, 후견인들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인생의 회한에 젖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만찬의 시간에 삶을 생각하려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탄생과 죽음이 만나는 성만찬을 시작하겠습니다.


1_
여는 의식

단위의 촛불을 성찬상으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여는음악, 위의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짧은 곡: 연주자(박경민,리코더)]
[단위의 촛불을 성찬상으로 가져온다.(양미강)]


2_하늘 뜻 나누기

이어서 양미강목사님의 하늘 뜻 나누기가 있겠습니다.

아가야, 우리 봄을 기다리자[누가복음 1:46-55]”(양미강)

[이어주는 음악1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연주자(박경민,바이올린)]


3_
성만찬을 기리는 시간: 탄생을 생각하며...

낭독
(도홍찬)

너는 기다림이었다.

척박한 팔레스틴에서, 고난의 한반도에서 너는 해방의 메시아였다.

너는 기쁨이었다.

불임의 부부에게, 노산의 어미에게 너는 산고 끝에 오는 환희였다.

너는 황망함이었다.

열정에 사로잡힌 연인에게, 어설픈 신혼부부에게 너는 삶의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너는 슬픔이었다.

가난 속에서, 폭력 속에서 너는 고통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사랑의 맨 얼굴을 너에게서 본다.

누군가는 무심하게 너의 옆에 그냥 서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힘들게 너의 존재를 끌어 안는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내 발견한다.

너의 얼굴은 영원의 순백이 아니라, 애욕과 세파 속에서 골이 깊이 패인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는다.

사랑은 지독한 소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고통의 연단 속에서 삶은 지극히 깊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 우리는 방관하고 삶에서 퇴거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너의 탄생에 부친다.

너의 삶은 고지되거나 예정되어 있지 않다.

불안이 너의 영혼을 좀먹지 않게 하거라.

죄의식 속에서 신에게 기대지 말라.

너는 가능성이고 자유이다.

 

채워도 차지 않는 곳, 도달해도 남는 곳, 만나도 떠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은 당신에게 조용히 말을 걸 것이다.

[이어주는 음악2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연주자(김선우,가야금)]

 

4_성만찬을 기리는 시간: 삶을 생각하며...

낭독(김현숙)

<이것은 김진숙의 기도입니다> @JINSUK_85 김진숙 의 트위터

-열여덟 살,옷 공장, 신발공장, 가방공장, 조선소용접공 대공분실 해고, 징역, 수배, 다시 징역, 장례 치르고 추모사 하다 보니 쉰. 20년 지기가 정리해고 반대하며 129일 매달려있다. 목을 맨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 다시 정리해고 반대하며 올라 와, 울다가 웃다가.

-땅멀미는 서서히 나아가고 있는데 허리가 아파서;; 2.퇴원날짜는 아직 기약이 없어요.

-재키, 자야할 시간일텐데, 여긴 비가 내려요. 크레인에선 아주 작은 빗소리도 크게 들렸는데 창을 열어보고야 비가 오는 줄 알았네요. 재키한테 김장김치를 보내주고 싶단 생각을 자꾸해요.^^

-크레인이 24시간 흔들렸거든요. 바람불면 멀미도 심했구요. 그런데서 살도록 몸이 이미 적응을 해서 이제 정지한 것들을 못견뎌 하는 거 같애요. 사람 몸이 참 희안하면서도 신비롭습니다.^^

-오전에 노사 잠정합의 했습니다.자세한 합의내용은 조합원 찬반투표 과정에서 공개가 될 거 같습니다. 300일 넘게 기다려 오셨는데 몇 시간만 더 두근두근 기다려 주세요.^^

낭독(이종원)

<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 입니다> 누가복음 22.41~45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5_
성만찬

이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성찬상을 중심으로 둥글게 서시기 바랍니다.

성찬 테이블에 둘러선 채 배병과 배잔을 동시에 다함께 그리고 자유롭게 하려고 합니다.

우선 잔을 들으세요. 그리고 양미강목사님께서 건배사를 해주시면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떡 을 집어서 원하시는 분에게 다가갑니다.

우선 눈빛을 나누세요. 그리고 그 분에게 다가가서 속삭이듯이, 위로와 축하의 말을 건네세요. 그런 후에 또 다른 분에게 다가갑니다. 적어도 두 분 내지 세 분을 만나십시요. 다가가면서 상대방에게 떡 과 위로 그리고 축하의 말을 건네세요. 테이블보를 거두어주십시오.

[성만찬이 차려진 테이블보를 걷는다.(김봉숙,최종봉]

[건배사
:포도주와 빵을 들고 성찬의 의미를 되세김(양미강)]

[배경음악: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중주:연주자 (박경민,김선우)]

떡과 포도주 못 드신 분 계신가요? 다 드셨으면 제자리로 돌아가시겠습니다.

이제 오종희 선생님의 낭독이 있겠습니다. 

 

5_성만찬을 마치는 기도: 죽음을 생각하며...

낭독(오종희)

태어나 이 땅을 꾹꾹 밟고 살아가야 비로소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죽어 이 땅 밑에 꾹꾹 밟혀 묻혀야 비로소 전해지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는 이천년 전 당신이 죽음을 거뜬히 초월한 구세주였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당신 앞에 놓인 잔 하나 옮기지 못하는 걸 보면 당신도 비존재의 충격 앞에 그저 순응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오늘 당신의 생일에 죽음을 생각합니다. 보통, 아이들의 돌잔치에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천년만년 영화가 보장된 어느 나라 왕족처럼 아이도 부모도 화려한 드레스를 걸칩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돌잔치는 점점 디즈니랜드 성처럼 반짝거리는 환타지를 닮아갑니다. 부모의 주머니를 털어 안간힘을 다해 몇 시간 동안의 구원을 구매하고 소비 하는 겁니다. 성탄절에 죽음을 말하는 건 그런 유사 구원을 거부하는 최소한의 각성 장치인지 모르겠습니다. 뻑뻑한 삶을 살다 보면 때론 유사 구원도 반짝거리는 환타지도 필요 하건만 당신에게서 만은 다른 것을 원합니다. 당신의 탄생에 죽음을 생각하고 당신의 죽음에 삶을 생각 하겠습니다. 옛날 옛날에 무력한 핏덩이로 태어나 외면 받은 삶을 살다가 권력의 폭력으로 살해당한 당신의 메시지가 왜 아직도 읽혀지고 전해지는지 생각하겠습니다.


너무 높이 고양되어 우리가 이름 부르기도 불경한 신이 아닌 죽임 당한 구세주로서
,

아파하는 자들과 힘없는 자들과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과 함께 기꺼이 상관는 그런 주로 임하소서, 예수여~.

[이어주는 음악 (박경민,리코더)]

이제 테이블보를 다시 덮어주시고 촛불을 다시 단으로 가져감으로서 성만찬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6_맺는 의식

[성만찬이 차려진 테이블보를 닫는다. (김봉숙,최종봉)]

[촛불을 다시 단으로 가져간다. (양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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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거울과 예수의 지팡이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영국인은 인도를 점령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인도를 넘겨준 것입니다. ... 어떤 영국인들은 칼로 인도를 점령하고 보유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틀렸습니다. 칼은 인도를 보유하는데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들을 붙들어 두었습니다. ... 돈이 영국인의 신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수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우리의 비천한 이익을 위해 영국인을 인도에 붙들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들과 교역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그들은 자신들의 교묘한 술책을 통해 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 대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 간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입니다.

『힌두 스와라지』(1908년) 中.


   대영제국의 지배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고취하기 위해 간디는 먼저 인도가 영국에 패배한 이유를 알아야한다고 했다. 그는 패배의 동인(動因)이 동인도 회사의 지배, 즉 영국인들의 물질과 세계 식민화의 야욕만큼이나 이에 부합했던 인도인의 물욕과 협력에 있다고 보았다. 그 원인에서 규명되는바 영국의 지배 권력이 인도인의 협력에 의한 것이라면, 역으로 인도인의 비협력이야말로 영국의 지배를 무력하게 한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그는 비협력, 비폭력의 저항운동을 펼쳤다. 간디에 따르면 ‘진정한 힘은 물리적인 능력이 아닌,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비폭력의 저항은 약자들의 저항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윤리적인 측면까지 아우르는 강력한 형태의 저항인 것이다. 그의 저항 운동은 비단 인도의 정치·경제적인 독립뿐만 아니라 인도의 문화와 사상 나아가 정신적인 측면의 독립까지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항운동의 이면에는 영국으로 대변되는 강압적인 중앙정치권력과 대량생산의 산업문명체제가 얼마나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파괴하는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서려있었기 때문이다. 간디가 역설했던 인도의 ‘자치’ 혹은 ‘자립’이라는 의미의 “힌두 ‘스와라지(Swaraj)’”는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인 개개인의 정신적인 각성과 성찰을 촉구했다. 따라서 무지, 비겁함, 이기심, 나태함, 부정직함을 버리고 인도인의 자발성과 정신적인 자립, 이를 토대로 한 그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마을의 자립이라는 이상적인 현실을 실현하고자 했다. 물론 간디의 봉건적인 사상의 한계와 현실적인 대응방식의 괴리를 두고 시비를 거는 이들도 있지만, 간디가 세계흐름 속의 인도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식민현실에 눌린 민중에게 인간의 고귀함과 내면의 힘을 북돋우며 인도의 혁명과 구원이 별개의 길이 아님을 보여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쯤 되니 1세기 로마 제국의 지배아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민족의 식민지 현실과 갈릴리의 예수운동이 20세기 초 인도의 상황과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역사의 서재 어느 한 켠의 책을 꺼내더라도 반복되는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듯. 당시 지중해 전 지역에 걸친 로마제국의 질서와 통치는 피정복민의 무질서와 파괴를 야기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팔레스타인의 식민지배 현실의 농민의 삶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로마의 대리 통치자들과 예루살렘 지배자들의 수탈은 농민들을 가난과 굶주림의 아수라장으로 내몰았다. 갈릴리의 마을 공동체가 로마제국의 정치·경제적인 제도 속에 유린되면서 이스라엘 고유의 전통문화와 사회 구조는 와해되었다.

   해체되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예수는 로마제국의 질서 앞에서 이스라엘의 계약정신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여 가족과 촌락공동체의 전통적인 삶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예수는 부자들의 착취에 날선 비판을 가했고 부패한 예루살렘에 가차없는 심판을 선언했지만, 주리고 병든 사람들에게 몸소 먹이심과 치유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희망의 온기를 불어 넣었다. 그는 갈릴리의 민중으로 하여금 제국의 질서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확신하며, 정의와 연대의 원리들과 계약전통의 가치를 실천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을 요청했다.
  
   뒤돌아보면 지난(至難)한 역사의 사건들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할 뿐 같은 거푸집에서 찍어낸 듯 그 행태가 닮았다. 연말까지도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접고 새해의 눈을 떴지만 우리 앞에 산적한 현실의 문제는 오히려 한 자나 자란 것 같다. 한반도의 좌와 우, 남과 북의 내적인 갈등과 이에 기묘하게 얽혀있는 주변 열강들의 꿈틀대는 힘겨루기에서 숨쉬기 벅차게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신문 한 자락을 깔고 앉은 칼럼들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새해의 정치·경제적인 구도를 침 튀기며 전망하여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올 한해의 삶도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안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산소마스크로 연명하게 생겼고, 대기업들의 승승장구에 비견되는 서민들의 신음 가득한 사회 경제적인 불만은 극에 달한 듯 보인다. 게다가 일자리 창출과 서민 경제 활성화를 모토로 밀어붙이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이러한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 명약관화하다.

   우리 대다수는 각자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 생존이라는 근본적인 불안으로 시름하면서 우리사회의 마음의 병은 깊어간다. 그러나 더 이상 간디 혹은 예수와 같은 고결하고 맑은 소리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자본 권력의 광기에 편승해 무력한 협력과 안일한 기대를 품었던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고, 보통의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직시하고 연대하여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서로 독려해야한다. 갇힌 소리는 문을 열고, 때 묻은 소리는 몸을 닦고, 덜 자란 소리는 함께 성숙하여 ‘다르게, 다함께’ 하는 소리로 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역사라는 여정에서 간디의 ‘힌두 스와라지’라는 거울을 들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라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우리 안의 깊은 병을 몰아낼 굳은 힘을 발견하고 보통의 우리가 연대하고 상생할 희망의 전거(典據)를 끌어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보통의 우리가 가진 역사의 힘은 종국에는 휩쓸리는 대로 끌려가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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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빠 이야기’ 연구 동향 (1)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모두들 잘 알다시피, 예수가 사형을 선고받는 결정적인 현장에서 예수와 그 운명의 심판대에 잠시나마 함께 서 있었던 인물이 바로 바라빠이다. 오랫동안 교회의 설교 강단에서는 바라빠를 예수의 대속적 죽음의 첫 번째 수혜자이자, 모든 구원받은 죄인들의 실존을 상징하는 존재로 선언해왔다. 바라빠에 관한 최초의 주석이라 할 수 있을 베드로의 성전에서의 설교는 바라빠와 예수 그리스도 간의 아이러니한 운명의 역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그를 놓아 주기로 작정했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그를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행 3:13-15). 악테마이어에 따르면, 이렇게 불의가 버젓이 행해짐으로써 “예수에 대한 최상의 진리가 드러났다. 즉, 비록 죄가 없지만 죄인들이 살 수 있도록 예수는 바라빠와 같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다.”[각주:1]

그런데 정작 신약학자들, 특히 복음서를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연구자들에게 바라빠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적 해석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매우 흥미를 끄는 주제였다. 그렇기에 바라빠에 관한 가장 이른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되는 마가복음 15장 6-15절 본문은 총괄적인 “빌라도의 재판 이야기”(막 15:1-20) 안에서 구분되어 소위 “바라빠의 석방 이야기”로 불리면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다. 이 글은 국내에 거의 소개된 바 없는 바라빠 이야기에 관한 서구 학자들의 연구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기 위한 목적에서 쓴 것이다. 부족한 글이나마 복음서의 바라빠 이야기가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와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래본다. 이번 호의 글에서는 비평적 코멘트는 최대한 배제하고 일단은 정보를 소개하는 데 충실할 것이다. 서구 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결론적인 평가 및 필자의 “바라빠 이야기”론(論)은 다음 호 웹진에 실릴 글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1. 바라빠, 범죄자인가 혁명가인가?

“바라빠라고 불리는 자”(막 15:7). 그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 이외에는 어떠한 자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각주:2] 바라빠 이야기의 역사성에 관한 연구는 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첫째는 그가 저지른 범죄의 성격과 관련하여 그의 정체를 규명하고. 나아가 이러한 정체에 기초하여 이 이야기의 역사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면서 그의 정체를 연구하고, 나아가 이 이야기의 역사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먼저 그가 저지른 범죄를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살펴보자. 7절의 “동료 반도들과 함께(meta. tw/n stasiastw/n), 그리고 “반란 중에”(evn th/| sta,sei)라는 표현은 바라빠의 정체를 분명하게 시사한다. 먼저 등장하는 남성복수명사 ”쉬스타시아스테스“(sustasiasthv")는 긍정적으로는 혁명가, 부정적으로는 반역자 혹은 폭도의 일원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바라빠가 그들 중의 일원으로서, 그 역시 혁명가 내지는 폭도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어 성서에서 ”민란“(개역한글, 개역개정), ”폭동“(표준새번역, 새번역), ”반란“(공동번역) 등으로 제 각기 뉘앙스가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고 있는 ”스타시스“(sta,sij)는 기본적으로는 ‘기립’(stand 혹은 standing)을 의미하고, 영어의 ‘stand’가 그러하듯이 유추적으로는 ‘위치’(‘존재’,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함축적인 의미에서는 정치적인 입장, 특히 대중의 반란적 ‘봉기’, 즉 ‘민란’, ‘폭동’, ‘소요’(행 19:40) 등을 의미한다. 물론 다소 예외적이지만, 의견의 팽팽한 대립, 격렬한 논쟁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행 15:2).

한편, 마가는 바라빠의 명성에 관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데 비해, 마태는 그를 당시에 잘 알려진 자로 묘사한다. 마태복음 27장 16절의 형용사 에피세모스(evpi,shmoj)는 긍정적으로는 ”유명한“ 혹은 ”괄목할만한“ 존재를 수식하는 표현이지만,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에서 ”악명 높은“(notorious)의 뜻을 모두 갖고 있다. 마태는 마가가 소개하는 바라빠가 당시에 유명한 인물이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이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성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라빠가 민란 중에 구체적으로 누구를 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참여한 민란이 로마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정치적 성격의 집단행동이었으며, 살인이 동반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음은 분명하다.[각주:3]

많은 학자들이 이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성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와 같이 로마 지배체제에 무력으로 도전한 위험한 정치범을―아무리 명절과 관련한 특별한 관행이 있었다고 하더라도―군중들이 원한다고 해서 로마 총독이 쉽게 풀어 주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상황은 또한 유대 문헌으로부터 추측되는 빌라도의 초상과도 조화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스(Roger David Aus)는 강력한 어조로 반대의 논거를 제시한다. ”빌라도는 군중의 변덕에 자신이 놀아나는 것을 허용할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거의 폭동에 달할 수 있는 제어 불가능한 반체제 인사를 쉽게 풀어줄 만큼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각주:4]

물론 바라빠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마이어스는 비록 빌라도 시대보다 조금 후대이긴 하지만, 알비누스 총독 시절에 정치범이 사면된 예가 엄연히 있고, 어떤 위험한 인물의 처형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 그보다는 덜 위험하면서 동시에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다른 반체제 인사를 사면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과열된 분위기의 맥락에서 상당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주장한다.[각주:5] 그러나 (대제사장들에게라면 몰라도) 빌라도에게 있어 예수가 바라빠 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는 주장은 복음서의 진술과 전혀 맞지 않다. 만일 마이어스의 주장대로라면, 바라빠가 그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듯이, 바라빠보다 더 위험한 예수와 그의 지지자들 역시 로마군대에 의해 함께 체포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자신을 찾아와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체포는커녕 그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 만큼 정치적 위험인물로서 예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에게는 예수를 반드시 죽일 이유도 그렇다고 반드시 살려줄 이유도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그러나 바라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만일 바라빠 이야기만 따로 떼서 놓고 본다면, 빌라도에게로 올라와서 그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이들은 바라빠의 동료 혹은 지지자일 가능성이 높은데, 빌라도가 그들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협상했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믿기 어렵다.

2. 바라빠, 랍비의 아들인가, 압바의 아들인가?

한편, 바라빠라고 하는 인물의 이름에 주목한 연구들 역시 이 이야기의 역사성에 회의적인 쪽으로 결론이 내려지고 있다. 그것은 바라빠라는 이름에서 발견되는 문학적 · 신학적 의미의 특이함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에 따르면, 바라빠라는 인물의 이름상의 독특성, 그리고 바라빠와 예수를 대조시키는 복음서의 문학적 기법 등으로 보건대, 이 이야기만큼은 원래의 역사적 전승(?)에 덧붙여진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각주:6] 왜 그런지 이유를 살펴보자.

지금까지 거의 정설화된 가설대로, 바라빠는 ‘성’이나 ‘개인이름’이 아닌 ‘부계적 이름’(patronymic), 즉 일종의 별칭으로서,[각주:7] 명백히 아람어인 Bar-Rabba(n) 혹은 Bar-abba에서 파생된 음역으로 인정된다.[각주:8] 먼저 ‘Barabbas'가 ’Bar-Rabba(n)'에서 파생된 음역이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랍비, 즉 선생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며, 결국 ‘저명한 선생의 아들’로서 단순히 ‘선생님’을 존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사람의 아들’이 ‘사람’을 의미하듯이, ‘선생의 아들’ 역시 ‘선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대 문헌들을 보면, 히브리어 ‘ben'과 같이, 아람어 ‘bar'는 ’선생‘으로 쉽게 동일시될 수 있었던 표현인 ’선생의 아들‘과 합성되어 다소 느슨하게 종종 사용되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이틀린(Solomon Zeitlin)이 주장하는 것처럼, ’랍비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70년 성전의 파괴 이후에야 즉, 랍비(적) 유대교(Rabbinic Judaism)[각주:9]가 성립되기 시작한 후에나 비로소 유행했다는 것, 따라서 제2성전 시대 유대교에 속하는 예수 당대에 그런 직함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각주:10] 코헨(Shaye. J. D. Cohen)에 따르면, 랍비라는 말은 “나의 선생님”이란 뜻이며, 본래(프랑스어의 monsieur처럼) 경의를 표하는 호격의 형태였다. 기원후 1세기 전반에만 해도 이 칭호는 대개 학생이 자신의 선생을 개인적으로 부를 때 사용했다(요 1:38). 그러나 70년 전쟁 이후, 즉 제2성전 시대 유대교 체제의 붕괴 이후에는 이 단어의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차 “선생님” 혹은 권위 있는 자리에 있는 지도자(master)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가 서서히 2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러 이스라엘과 바빌로니아에서 방대하고 독특한 문헌, 특히 미쉬나를 창조해낸 유대계 사회의 일원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로 정착했다.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저명한) 랍비의 아들”이라는 개인 이름 외에도 별도로 쓰이는 호칭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바라빠‘라는 별칭이 예수 시대에는 사용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진다. 설령 사용되었더라고 하더라도, 그 이름은 ’랍비의 아들‘이라는 의미 대신에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각주:11]

이와 관련해, 마태복음에서 그 배후의 마태공동체가 자신들의 시대에 아람어 ‘abba'의 번역어로서 ’랍비‘라는 호칭이 일반화되어 사용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는 본문이 있어 주목된다. 바로 마태복음 23장 8-10절이 그것인데, 이 본문에서 예수는 이미 시대를 앞서(?) ‘랍비’라는 전문화된 칭호가 사용되는 상황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이 본문에서 차례로 언급되고 있는 단어들, 즉 8절의 ‘랍비’(r`abbi,,,), '선생‘(dida,skaloj), 9절의 ‘아버지’(pathr), 10절의 ‘지도자’(kaqhghth"), 이 모든 단어가 사실은 아람어 ‘abba'와 그것의 번역어인 ’rabbi'의 대용어로서 예수는 결국 이 중의적인 단어를 통해 그 어떤 누구도 ‘아버지’나 ‘선생, ’지도자’라는 칭호를 얻지 못하도록 했다.

이 전승이 정말로 예수에게서 기원하는 말씀인지 아니면, 마태가 창작해낸 것인지는 규명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마태공동체는 ‘abba' 혹은 ’rabbi'라는 호칭이 일반화되어 무분별하게 적용되는 것을 반대했고, ‘abba'라는 호칭의 특권적 사용을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돌리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데이비스는 이 본문이 랍비적 유대교와 갈등하고 있는 마태공동체의 역사적 상황뿐만 아니라, 랍비적 유대교 성립 이전에 이미 예수가 자신의 시대에 ’bar abba'로 불렸음을 반향하고 있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예수는 하나님을 자신의 시대에 ‘abba'로 개념화했던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어쩌면 ’바르 압바‘라고 하는 별명이 붙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후대의 그리스도교에 의해 ’바르 압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Son of God, Jesus)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데이비스는 주장한다.[각주:12] 다소 지나친 상상력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바라빠”를 예수와 보다 긴밀히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데이비스의 논의는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잠시 여기서 ‘바라빠’의 정체를 탐구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참조점이 되는 마태복음 27장 16-17절을 살펴보자. 흥미롭게도 마태복음의 일부 초기 그리스어 사본과 초기의 번역문들에서 16절 바라빠 앞에 ‘예수’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다. 그는 마가복음에서처럼 단순히 ‘바라빠’가 아니라 ‘예수 바라빠’(VIhsou//n Barabba//n)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인 27:17에서도 역시 '예수 바라빠‘(VIhsou/n to.n Barabba/n)로 지칭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 교회의 변증가 오리겐(Origen)은 이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많은 사본들은 바라빠가 예수라고 불렸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어쩌면 이러한 생략은 옳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를 그는 성서 어디에서도 죄인을 가리켜 예수라는 고귀한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라는 이름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흔한 이름이었는지를 전혀 몰랐던 것 같다. 그러나 고대의 사본을 필사했던 이들이 남겨 놓은 방주에 보면 “내가 마주친 다수의 고대 사본에서 바라빠는 ‘예수’라고도 불린다”는 표현이 발견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후대에 사본의 필사과정에서 점차 삭제되었을 것이 확실하다.[각주:13]

더욱이 사본학적 비평의 원리에 따른다면, ‘바라빠 예수’라고 적혀 있는 사본이 더 오래되었고 원본에 가까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사본학자들은 원문 복원을 위해서 여러 판단 기준들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법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제1원칙은 “lectio difficilior potior”, 즉 더 어려운 독법(reading)이 우월하다는 판단 기준이다. 이 판단 기준은 사본 필사자들이 어려운 표현들을 쉽게 바꾸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것이다.[각주:14]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본문 역시 어쩌면 초기에는 ‘바라빠라 하는 예수가 있었다’로 되어 있었을 것이나, 원시 그리스도인 필사자가 민란을 일으킨 살인자를 감히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예수’라는 단어를 생략해 버렸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는 충분히 설득력 있다.[각주:15] 어쩌면 마가복음의 15:7의 원래 형태 역시 현재와 같은 “o` lego,menoj Barabba/j””(바라빠라고 불리는 자)가 아니라 “VIhsou/n lego,menoj Barabba/j”(바라빠라고 하는 예수)였을 것이다.

바라빠에 관해 선구적인 연구를 남긴 리그(H. A. Rigg)는 마태복음의 바라빠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lego,menoj’(legomenos)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리스어 원문에는 마태복음 27장 17절 하반절이 “ÎVIhsou/n to.nÐ Barabba/n h' VIhsou/n to.n lego,menon cristo,nÈ”“(바라빠 예수냐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냐?)로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의 초기 사본 일부 가운데는 “바라빠라고 불리는 예수냐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냐?”(VIhsou/n to.n lego,menon Barabba/n h' VIhsou/n to.n lego,menon cristo,nÈ)로 되어 있는 사본이 있음을 발견했으며, 이를 통해 ”바라빠라고 불리는 예수“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 간에 완벽한 대립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lego의 수동태 현재분사로서 “레고메노스”(불려지다, 말해지다)는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마 1:16 - VIhsou/j o` lego,menoj cristo,j)에서처럼 직함이나 별명 앞에 붙어 그것을 수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레고메노스가 주로 수식하는 것이 개인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수식하는 것은 이름 대신에 친숙한 비공식적 호칭 내지는 직함(title)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바라빠는 이 죄수의 본명이 아니라, 일종의 별명 혹은 직함 같은 것이었으며, 마태복음의 일부 사본들이 보여주듯이, 어쩌면 그의 본명은 정말 ‘예수’였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압바의 아들 예수’라는 이름은 마가복음이 묘사하는 나자렛 예수의 이미지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만일 우리가 마가복음 15장 6-15절의 본문을 알지 못했다면, ‘압바의 아들 예수’를 영락없이 나자렛 예수에 대한 칭호로 이해할 법도 하다. 랍비적 유대교 시대의 문헌에서 종종 발견되는 ‘랍비의 아들’로서 ‘바르 압바’라면 몰라도, 제2성전 시대 유대교 사회에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갖는 ‘바르 압바’라는 별칭을 찾아볼 수도 없는데, 그것이 하필이면 마가복음에, 그것도 그 별칭을 가진 자의 본명이 ‘예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바라빠의 정체에 관한 논란은 더욱 가중된다.

주지하다시피, ‘abba’(압바), 즉 헬라어로 ‘Αββα’라고 신약성서에 등장하고 있는 단어는 예수와 바울이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했던 말로써, 아람어 ‘אבא’의 음역이다. 마가복음에서 이미 예수는 그의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른 바 있다(막 14:36).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예수 당시에 이 단어를 주로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한 사실에 주목했다. 예컨대,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풀어 번역한 팔레스타인 탈굼(Palestinian Targums)의 창세기에 어린 이삭이 아브라함을 “압바”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22:6, 10). 예레미아스는 “압바”라는 아람어 단어가 유아들의 언어라고 주장하였다.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압바, 나한테 뭘 줄거야?” 하는 식으로 친밀한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와 같은 용어를 굳이 개인 이름으로 사용하고, 또 그런 이름을 가진 아버지를 따른 “Bar-abba”라는 부계적 이름 혹은 별칭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바르 압바 예수”는 대체 어디서 나온 인물인가?

3. 바라빠 예수 vs 그리스도 예수

리그(H. A. Rigg), 맥코비(H. Z. Maccoby), 윈터(Paul Winter), 데이비스(Stevan L. Davies), 메리트(Robert L. Merritt), 오스(Roger David Aus)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바라빠‘ 연구들은 마태복음의 일부 사본에서 발견되는 “예수”라는 그의 이름을 중요한 실마리로 삼아, 사복음서 수난사화에 모두 등장하는 바라빠 (예수)라는 인물이 예수의 무죄함과 결백함을 두드러지게 하는 문학적 장치, 즉 대조인물(foil)로 설정되었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이 학자들은 비록 그들 각자의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즉, 기본적으로는 유월절 사면 관례 같은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바라빠 이야기는 고도의 신학적 의도를 갖고 생성된 문학적 장치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논증하기 위해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을 주목했다. 그 결과 권위를 인정받는 마태복음의 오래된 사본들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의 원문 역시 단순히 바라빠를 바라빠로만 표기하지 않았고, “압바의 아들 예수”로 이해될 수 있는 “예수 바르 압바”로 표기되어 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나아가, 역사적으로 확신하건대, 빌라도의 재판은 실제로 있었지만, 그 재판 중에 그가 두 죄수 중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무리에게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예수의 재판 당시에 바라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별도의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혹 어떤 반란자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재판과 예수의 재판은 무관하며, 오히려 신약성서에서 ‘압바’라는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칭호의 용례를 보건대, 나자렛 예수가 그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예수 바르 압바”로 알려져 있었을 것이며, 결국 바라빠는 나자렛 예수의 정체성의 또 다른 일부로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와 바라빠로 불리는 예수는 동일인물이며, 초기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예수의 ‘도플갱어’(Doppelganger)를 만들어내어 그럴듯한 역사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이 축적될수록 바라빠 이야기가 창작된 역사적 맥락에 관한 가설들도 훨씬 정교해져가고 있다.

바라빠 이야기를 문학적 창작이라고 보는 학자들에 따르면, 마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만든 배경에는 로마제국과 유대교 사이에서 정치적 딜레마를 겪고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삶의 자리가 존재한다. 그들은 로마제국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변호해주기 위해, 결국 유대인들을 희생양 삼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맥코비(H. Z. Maccoby)는 유월절 사면의 이야기가 상상력에 의한 허구에 불과하며 실제로 그런 일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던 리그와 윈터에 동의하면서, 기본적으로는 이 이야기가 예수와 원시그리스도교를 반(反)유대적인 동시에 친(親)로마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변증적 관심에 의해 채색되었다고 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윈터가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이 변증적 이야기가 창작된 역사적 배경을 더욱 세련되게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맥코비는 우선 마가복음의 저자가 군중들을 향해 갖고 있는 모순적인 태도를 주목한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진작부터 예수를 없애 버리고자 했으나, 군중들이 두려워서 그것을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 군중들이 예수를 지지하고 보호했기 때문이다(막 11:18; 11:32; 12:12; 14:2). 그런데 15장 6-15절의 본문에서는 갑작스럽게 군중들의 태도가 돌변하여 예수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맥코비는 이해하기 힘든 이러한 전환의 배후에는 유대인 전체를 정죄하고 저주해온 후대의 그리스도교적 사고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 사후의 시대에 그리스도교회는 예수 죽음의 책임을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만 돌렸을 뿐, 여전히 평범한 유대인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유대인들의 저항과 핍박이 거세지면서 점차 십자가 처형의 책임을 유대인 전체에게로 확대해나갔다는 것이다.

맥코비가 그리고 있는 빌라도 법정과 관련된 역사적 진실은 이런 것이다: 예수 당시의 빌라도 법정 바깥에서는 여전히 다수의 유대 군중들이 예수를 지지하고, 그의 사면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 안에서는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를 지지했던 유대의 평범한 대중들이 예수 사후에는 예수를 잊고 다시 유대교 안으로 돌아가 버렸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교회는 동시대의 유대인 전체를 정죄하는 한편, 과거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 섰을 당시 그의 사면을 요청했던 군중들의 역사적 행적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묘안을 짜냈는데, 그것이 바로 또 다른 예수, 즉 바라빠 예수라고 하는 가공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 가공의 인물인 바라빠 예수는 마치 그리스도 예수와 구별되는 별도의 인물 같아 보이지만, ‘바라빠’라는 직함(title)의 의미를 잘 풀어보면 결국 (그리스도라는 가장 중요한 직함을 가졌던) 예수와 동일인물인 ‘압바의 아들’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그 예수라는 것이다. 결국 맥코비의 논의는 나자렛 예수로부터 분리된 가공의 인물인 바라빠 예수를 통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과거 예수에 대한 유대 군중들의 지지를 역사적으로 왜곡하고, 반(反)유대교적 성향을 더욱 가속화하던 역사적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 이러한 맥코비의 견해는 메리트와 오스에게서도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관된 해석의 흐름에서 이탈하여 획기적인 견해를 제출한 이가 바로 맥클린(Jennifer Maclean)이다. 이전의 바라빠 이야기를 연구한 학자들이 주로 그 이야기의 삶의 자리를 초기 그리스도교의 변증적 상황에서 파악했던 반면에, 맥클린은 이를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기존의 성전 제의를 대체하는 속죄양/희생양 제의가 창안되던 맥락에서 해석하는 일대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맥클린의 연구에 관한 보다 상세한 소개와 평가는 다음 호의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 웹진 <제3시대>


  1. Paul J. Achtemeier, <EM>Invitation to Mark: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Mark with Complete Text from the Jerusalem Bible</EM> (Garden City, New York: Image, 1978), 215. [본문으로]
  2. 막 15:7, 11, 15; 마 27:16, 17, 20, 21, 26; 눅 23:18, 19; 요 18:40. (cf. 행 3:14) [본문으로]
  3. Ben Witherington Ⅲ, <EM>The Gospel of Mark: A Socio-Rhetorical Commentary</EM> (Grand Rapids-Cambridge, UK: Eerdmans, 2001), 391. [본문으로]
  4. Roger David Aus, “The Release of Barabbas Revisited (Mark 15:6–15; Matt 27:15–26; Luke 23:18–25; John 18:39–40),” in <EM>Caught in the Act, Walking on the Sea and the Release of Barabbas Revisited</EM> (Atlanta: Scholars Press, 1998) 139. [본문으로]
  5. Ched Myers, <EM>Binding the Strong Man: A Political Reading of Mark’s Story of Jesus</EM> (Maryknoll, N.Y.: Orbis, 1988), 373-374, 380-382. [본문으로]
  6. 이러한 학자들의 상세한 명단에 관해서는 Brown, <EM>Death of the Messiah </EM>(Vol.1), 819;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Jr., <EM>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tthew</EM> (Vol.1) (London: T&amp;T Clark, 1997), 583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7. 동일한 방식의 이름 용례로는, 바돌로메(Batholomew, 막 3:18), 바디메오(Bartimeo, 막 10:46), 바요나(Bar-jonah, 마 16:17), 바나바(Barnabas, 행 4:36), 바예수(Bar-jesus, 행 13:6) 등이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며, 요세푸스의 저작에서 발견되는 시몬 바 기오라(Simon bar Giora) 역시 같은 용법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8. Adela Yarbro Collins, <EM>Mark: a commentary</EM> (Hermeneia: 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718. [본문으로]
  9. 랍비적 유대교란 명칭은 코헨(Shaye J. D. Cohen)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코헨은 유대교의 역사에서 “랍비 시대”를 70년 전쟁 이후 6세기까지의 유대교를 랍비적 유대교라 명명한다. 이 시대를 대변하는 ‘랍비’는 미쉬나 및 다른 많은 책들, 특히 팔레스틴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만들어낸 특별한 사회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다음의 책을 참조할 것: 샤이 J. D. 코헨/황승일 옮김,『고대 유대교 역사』 (서울: 은성, 1994), 20-21, 315-316. [본문으로]
  10. Solomon Zeitlin, <EM>Studies in the early history of Judaism</EM> (New York: KTAV, 1974), 251. [본문으로]
  11. 브라운 역시 1세기에 ‘선생의 아들’로 해석될 수 있는 ‘바라빠’와 같은 부계의 이름이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아직까진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만일 Barabbas가 Bar-Rabba(n)에서 온 말로서, “랍비의 아들”이라는 뜻이 되려면, Bar와 Rabbas 사이에 ‘r'이 하나 더 있어야 개인 이름이 포함된 부계적 이름(patronymic)이 될 수 있다는 설명까지 덧붙인다. Brown, <EM>The Death of the Messiah</EM> (Vol.1), 799. [본문으로]
  12. Stevan L. Davies, “Who is Called Bar Abbas?,” <EM>NTS</EM> 27 (1981), 261–262. [본문으로]
  13. 브루스 M. 매츠거(Bruce M. Metzger)/장동수 옮김, 『신약 그리스어 본문 주석 (제2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성경원문연구소, 2005), 54. [본문으로]
  14. 신현우,『사본학 이야기』(서울: 웨스트민스터출판부, 2003), 105. [본문으로]
  15. Cranfield, <EM>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EM>, 450; Taylor, <EM>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EM>, 450; Nineham, <EM>Gospel of Saint Mark</EM>, 416. [에반스, 『마가복음 8:27-16:20: WBC 성경주석』, 737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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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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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경실
    2010.06.21 16:4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11월 8일 한숨결교회 열두 번째 예배 메시지

우리에게 여전히 진리가 필요하다면.......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빌라도가 예수에게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요한복음 18:38)
당신들이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8:32)


1. 진리가 무엇이기에?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38절까지의 본문은 “빌라도의 심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서게 되어 그로부터 심문을 당하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 전체에 모두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역시나 이 부분에서 다른 복음서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딱 한 가지만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합니다(23:3).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도 동일한 질문과 답변이 한차례 오고가고, 다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예수가 고발을 당하는데도 정작 자신을 위한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고, 빌라도는 예수의 이런 침묵을 놀랍게 여기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와 빌라도 사이에 최소한 네 차례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까진 공관복음서와 동일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 그런데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말은 너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해 준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냐?”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다시 자신의 질문으로 바꾸어서 빌라도에게 던집니다. 이번에는 빌라도가 답변을 합니다. 누가 심문을 하고 누가 심문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다시 예수를 향한 질문이 됩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유대인도 아닌 내가 니가 유대인의 왕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그리고 또 묻습니다. “니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나한테 재판하라고 넘겼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들이 너를 나한테 넘긴 것이냐?”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뭘 했는지는 말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이 말은 정확히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단순히 세속적인 의미의 왕국에 반대되는 영적인 왕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적인 구조에 대비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왕국은 왕국이되, 지금 여기의 시간대, 즉 세상에 속하는 왕국이 아니라 도래하고 있는 종말론적 시간의 구조 안에 있는 그런 나라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빌라도가 제대로 알아들을 리 만무합니다. 그는 재차 묻습니다. “됐고! 그러니까 니가 왕이라는 것 아니냐?” 예수는 대답합니다. “그래. 맞다. 나 왕이다. 내가 왕이 되려고 태어났고, 왕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증거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내 말을 알아 듣게 되어 있다.” 그러자 빌라도가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하게 묻습니다. “진리가 뭥미?” 예수와 빌라도의 문답이 시종일관 뭔가 엇박자를 내고 있다가 드디어 빌라도가 예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핵심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답변이 없습니다. 예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 답변했을까요? 혹시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침묵했을까요? 오늘 메시지의 초점은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이었고, 나아가 예수의 그러한 진리 이해가 오늘 이곳의 우리 한숨결교회에 어떠한 성찰의 여지를 제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데 있습니다.

2. 정말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던가요?

요한복음에는 진리, 곧 알레떼이아(αλληθεια)라고 하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합니다. 알레떼이아가 신약성서 전체에서 98회 정도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서만 무려 20회나 등장합니다. 바울 서신을 다 합쳐도 44회 정도 나오고, 공관복음서 세 권을 다 합쳐도 7회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얼마나 이 단어를 선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요한복음 어디에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이 진리에 대해 증언하러 왔는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고, 예수가 곧 진리이며, 예수 혹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을 향해 나아가고, 진리로 사람들은 거룩해질 수 있다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런 얘기 갖고는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예외적으로 주목한 만한 진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8장 32절의 “당신들이 진리를 알 것이니, 그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처음 듣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하여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그것이 곧 진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습니까?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이며,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데 정말 그렇던가요? 여러분은 진리를 앎으로 인해 과연 지금 자유롭습니까?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진리를 안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을 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은 충분히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진리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진리는 별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 적이 없습니다. 외려 진리는 우리를 더욱 숨 막히게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진리는 더 이상 가슴 설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간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과 야만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는 진리를 참칭하면서 자유를 억압해온 대표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이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종교에 내재하는 진리와 자유 간의 관계의 역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만큼 무서운 자도 없는 법입니다. 진리를 살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요.

흔히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라고 하면 적어도 ‘참되고 옳은 것’, 더 나아가 그 무엇을 바로 그렇게 ‘참되고 옳게 하는 것’이라는 최소한의 정의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참됨과 옳음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나 기준이 여전히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답이 있을 수도 없는 그것에 대해 역사는 어떤 특정한 것이 진리라고 강요해왔고, 그렇게 강요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구속하고 억압해왔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 진리는 이제 진부한 것이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굳이 기독교 신앙적 맥락에서 진리라고 할 수 있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진리 일반에 대해 더 이상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진리?!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포스트모던 사상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고 나면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고를 대변하는 아이콘은 단연 20세기 최대의 회의주의적 사상가라 할 미셸 푸코가 아닐까 싶습니다. 폴 벤느(Paul Veyne)라고 하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푸코는 죽기 25일 전 가진 대담에서 그러한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대담자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떤 보편적 진리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신은 회의주의자 아닌가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푸코는 너무 일반적인 모든 진리, 시간을 초월한 우리의 모든 거대한 진리를 의심했습니다. 푸코가 겨냥하는 그런 의심스러운 진리의 범주에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때 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각 개인에게 경험된 그런 차원의 실존적인 신앙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닙니다. 차라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원리 위에서 작동하는 초월적인 규범이자 명제가 되어버린 ‘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렇게 교리로서 정착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개념은 세상이 변하고 상황이 달라지고 믿는 사람의 삶의 자리가 아무리 바뀌어도 그 자체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그와 같은 형식으로 믿고 계십니까? 제가 아는 한 이 자리에 그런 교리적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계신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리적 근본주의자를 자처하는 분은 계시지만, 제가 보기엔 결코 근본주의자가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해본 바 교리적 근본주의자는 종교적으로나 신앙윤리적으로 어떠한 자유의 여지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까지 허락하지 않는 철저함을 보여줍니다. 그 철저함이 없다면 결코 교리적 근본주의자일 수 없습니다.

다시 본래의 맥락으로 돌아와서 교조적인 의미 혹은 고전철학적 의미에서 진리를 이해했을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예수의 말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습니다. 예수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개념적 현실에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예수의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매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철학의 진리관을 그대로 따라서, 예수가 말한 진리를 받아들일 경우, 진리란 동일성, 보편타당성, 객관성, 만물의 본질, 영원불변성, 안정성, 초월성....... 뭐 그런 것에 다름 아닌 것일 텐데, 그러한 진리는 언제나 자기 이외의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에, 따라서 다른 존재 내지는 다른 특성이 끼어들 여지를 찾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자유가 허용되고 행사될 공간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결코 양립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우리의 상식 속에 자리 잡은 그런 의미의 진리 개념으로는 결코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말을 틀렸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상식적인 편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전제를 해야 합니다.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즉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같음’의 진리란 그저 맹목적인 순종만을 강요하는 교리일 뿐, 주체적인 혹은 주체 각자의 성찰과 고민의 결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에서 교리적 고백이 무의미한 것은 교리는 주체의 개별적 경험과 상황적 특수성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보편지향적이지 개별지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진보적인 신학자는 진리와 자유의 관계의 위상을 역전시켜, 이제는 “자유가 너희들을 진리하게 하리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절대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무조건적 진리를 거슬러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개별적인 다름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자유에 상대적으로 더 무게를 실어주자는 것입니다.

3. 다시, 진리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면

자, 그럼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진리를 이제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과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런 의미의 진리에서는 결코 자유로움을 찾을 수 없었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는 새로운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진리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에 비해서 정의 내리기가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자유라는 개념입니다. 단순히 억압이나 강제가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자유에서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자유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자유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유라고 하면 개별적인 다름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저마다의 길을 갈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는 서로 간에 다를 수 있는, 아니 다를 수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에 주목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의미의 자유가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적 실천의 차원이나 사상적 신념의 차원 보다는 고용의 자유, 해고의 자유, 투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 통치의 자유 같은 자본주의적 의미로만 통용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더욱 친숙한 자유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같은 것 보다는 말그대로 소비생활의 자유, 즉 원하는 만큼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해줄 수 있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 진리 중의 진리는 ‘자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에서 자본으로 진리가 바뀌는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애써 지금껏 우리가 진리의 개념을 자유의 맥락에서 되살리려 노력했던 것도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열심히 각자 돈 버는 데 더 매진하고, 교회는 그 자본이라고 하는 진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강화하기 위한 모임으로 활용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 한숨결교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앞서 말한 그런 의미에서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고 있는 교회는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특정한 맥락과 상황성에 대한 고민 없이 전통적으로 교회가 신조화한 그대로 예수를 고백하겠다는 것이며, 또한 성경을 교리적으로 해석하겠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모든 역사적, 문학적, 이데올로기적 비평과 재해석을 포기하겠다는 것일텐데, 그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 생각이나 고민 따위는 없이 그냥 교회에서 말하던 그대로 기독교를 계속 믿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제가 단언컨대,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자고 굳이 한숨결교회에까지 나오고 계신 분은 없을 줄로 압니다. 우리가 더 이상 교리적 진리로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말 속에는 각자가 경험한 하느님의 다른 얼굴과 신앙사건의 다른 결들,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역사성과 영토성에 대한 인정, 기독교 내의 다양한 분파와 전통에 대한 인정, 성서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 타종교와 종교 이외의 다양한 문화와 현상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누미노제의 가치,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보편 진리이고 구원의 길이라는 사고의 거부 등을 일차적으로 긍정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단 진리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몸으로나 삶으로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교리적 진리의 차원에서 기독교를 믿고 있는 분은 이 자리에 결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무조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또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획일적인 같음을 강요하는 진리에 반대하여 차이와 다양성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해서, 자본이 약속하는 그런 삶의 자유를 진리로 절대화하는 그런 이들도 아닐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굳이 한숨결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나눌 이유도 없었겠지요.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자유의 가치를 끝까지 옹호하는 사람들이고, 더 나아가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우연히든 아니든) 일치하여 여기까지 모일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다른 이들처럼 역설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의 억압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자유의 옹호가 자본의 자유와 같은 무질서의 자유와 혼동되어 결국 모든 것이 진리일 수도 있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진리라고 한다면 굳이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고 하는 상대주의 내지는 허무주의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라고 하는 가치를 완전히 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린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가치, 혹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어떤 삶의 양식이 갖는 가치를 버리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진리에 대해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한숨결교회를 통해서 교회라고 하는 것 혹은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는 뜻에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진리를 새로운 사고의 빛에서 재해석해보자는 것, 기독교적 신앙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한숨결교회의 맥락에서 우리 나름대로 새롭게 만들어나가 보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이 진리에 대한 예수의 개념 규정이라고 했을 때,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리를 주어로 놓았을 때 술어는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됩니다. 여기서 술어의 시제는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입니다. 진리란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진리는 지금 현재의 차원에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것입니다. 오직 미래의 차원을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고전 『중용』에서는 미발(未發)을 천하의 바탕(本)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알려진 것[기지(旣知)], 이미 발한 것[이발(已發)]은 오직 아직 알려져 있지 않고(미지), 아직 발하지 않는 것(미발)을 근본에 두어야 제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지와 미발로서 진리는 현재에는 아직 없고 오직 미래에만 있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능성으로서 혹은 잠재성으로 엄연히 현실 안에 있고, 현재와 현실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재와 현실에 ‘나아갈 바’, 즉 지향성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진리를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라고 일컫습니다. 풀어 말하면 ‘이것이면서 동시에 그 너머’란 ‘그 너머(미지)에 대한 지향을 근본으로 ‘이것(기지)’을 조율한다는 뜻입니다. 미지는 늘 현실의 바탕에 있고, ‘자유롭게 함’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너머’에 대한 운동적 지향의 가장 포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한숨결교회가 모종의 지향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어 왔습니다. 저는 우리의 지향성을 굳이 찾자면 바로 이러한 미지의 차원에서, 다시 말해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현실 너머의 현실에서 찾고 싶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만들어갈 자유로움에 의해 규정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진리는 실체가 분명한 물질명사가 아닙니다. 추상명사로서 진리라고 하는 주어의 의미는 오로지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술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그 진리라는 것, 결국 우리가 지금부터 앞으로 만들어 나가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리로서의 진리, 우리와 상관없이 과거에 누군가에 의해 이미 확정된 그런 것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진리를 우리 마음대로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진리는 우리를 언제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어떤 것이 참된 자유인지를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미래의 진리를 지향하기 위해 자유로움에 대한 모험을 함께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로서의 진리를 버리는 것만으로는 아직 자유로움에 도달하기엔 부족함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더 적극적으로 무엇을 향한 자유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적극적인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는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누릴 것이며, 그 자유를 누림이 우리에겐 즉각적으로 새로운 진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한숨결교회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에서 진리를 새롭게 알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고, 교회라고 하는 그 이상적 공동체를 새롭게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한숨결교회가 자유의 공동체, 진리의 공동체, 아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그런 미래의 교회공동체가 되어 가기를 꿈꿉니다.

우리가 그러한 꿈을 함께 꾸는 그 순간부터 그 미래는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곧바로 자유인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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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츨링
    2010.01.06 00: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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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 보고갑니다.
    저에게 있어서 '완성형'이라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글이였던것 같습니다.

예술과 예수

김현화
(영국에서 미술치료 공부 중)

일주일간의 무서운 고민을 끝내고 나를 포함한 8명의 졸업준비생들은 각자 계획한 프로젝트에 맞는 장소 결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졸업작품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들은 7주 후에 있을 전시를 앞두고 마지막 프로젝트 작품에 힘을 쏟아야 했다.
 
지름이 족히 10미터는 됨직한 동그란 땅, 그 위에 세워진 원형 가건물이 내게 주어졌다. 프로젝트의 주제나 재료도 고민해야 할 일이었지만, 설치작품을 하려는 나에게 제일 중요한건 먼저 공간을 제대로 읽어내는 일이었다. 작품이 들어설 공간에 아름다운 작품이 놓여지건 보기 흉한 작품이 놓여지건 어쨌든 공간과 같은 울림을 내는 것이어야 한다. 골치 아픈 작품으로 20세기 미술가들을 울렸던 마르셀 뒤샹이나 화장실에서 남자들의 변기를 떼어다 전혀 다른 공간인 갤러리에 갖다 놓을 일이었다. 한 세기 지난 지금의 나는 다른 입장에서 공간을 이해하고, 공간과 작품을 말 그대로 동등하게 대하리라 부푼 꿈을 꾸며 몇일을 가건물 주변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건물 밖을 따라 뱅뱅 돌기를 수십 번, 안팎을 들락날락거리며 안테나를 세워 온갖 소리와 냄새를 감지해보기도 한다. 이 공간에는 어떤 작품이 필요한지, 내가 생각하는 주제와 어느 지점에서 공간이 만나게 될지,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진단하고 타협하기를 시도해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몽골리안의 양모 천막집을 닮은 이곳은 안에 서 있으면 어지럼증을 느끼게 할 뿐, 나를 편안히 작업으로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밀어내는 것이었다. 너무 조용하고 둥글었으며, 한낮 햇빛은 불투명 플라스틱 지붕을 뚫고 한없이 쏟아져 내렸고, 땅바닥은 콩크리트 마냥 단단히 말라붙어 있었다.

어느 작가처럼 통째로 건물을 포장해버리지 않고선 수가 없겠다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일주일 후, 이 공간은 학교와 마을 재활용 센터, 인근 농장에서 모아들인 작품 재료들로 넘쳐났다. 산더미 같은 헌옷과 쓰던 천들, 100그루가 넘는 긴 나무 더미들. 넓은 공간에 대한 부담감과 작업할 수 있는 날이 몇 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에 좋은 작품을 하겠다는 욕심까지 보태져 밖에서 모아들이는 재료는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어쨌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섰고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도 불러 모았다. 공장 작업장같이 되어버린 둥근 건물은 날이 갈수록 사람과 재료와 작업에서 나오는 쓰레기로 뒤덮혀 갔다. 이전에 공간을 채웠던 부담스런 정적은 수다소리에 쫒겨 났고, 말라붙은 땅은 나뭇가지로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루하루를 보내며 내 머리 속과 마음도 수많은 아이디어와 걱정, 피곤으로 범벅이 되었다. 어떻게든 생각의 가지를 쳐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모든 일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가에 힘 빠진 몸을 기대고 초점 없는 눈으로 헝클어진 작업장 안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결국 이런 게 예술이었단 말인가?’. 4년간 문학을 공부하고, 석사과정으로 현대미술사를 전공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돌아다녔었다. 예술이 뭔지 그래도 모르겠어서 영국까지 와서 3년을 또 고생했는데 이 놈의 질문은 끝날 줄을 모른다. 바쁜 와중에 별 도움 안 되는 생각이라며, 그리고 원래 답도 없는 것이라며 혼자 속삭이고는 당장 급하게 작업을 해야 할 넓은 지붕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저 지붕을 어느 세월에 검은 비닐로 다 덮어 씌워 이 공간을 어둡게 만든단 말인가. 너무 밝은 내부를 어둡게 만들고 싶었던 나는 지붕 전체에 검은 비닐을 씌우겠다는 만만치 않은 일거리를 두고 다시 힘이 빠진다.

새가 날아 들어왔는지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뭐하니?”... 할아버지 선생님이 나타나 묻는다. 나는 지붕을 다 덮어 버릴 거라며 검은 비닐 얘기를 꺼내고는 그런데 이 공간을 어둡게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하겠느냐며 그간 쌓인 피로를 그에게 풀어낸다. 그러나 작품 때문에 복잡한 내 심경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는 대형 비닐은 이러저러하게 구하면 되겠고, 지붕 밑둥은 이렇게 마감하고, 바람과 비가 자주 오니 그건 저렇게 처리하자는 둥 온통 비닐 얘기 뿐이다. 아, 예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알아주는 이가 이렇게 없을까. 나는 속으로 한탄을 한다.

그새 말을 다 마친 할아버지는 뒤돌아 서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마지막 말을 던지고 사라진다. “언제든 필요하면 부르기만 해. ‘일’은 내가 할게. 그러니 너는 ‘예술’을 해.”

사실이 그랬다. 3년간 그에게 수업을 받아왔지만 한 번도 그가 작품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굽은 등으로 항상 돌을 나르거나 나무를 패고 있었고, 물건을 실어 나르느라 운전을 하거나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었다. “왜 예술을 하시지 않나요?”

사람들이 내게 물어왔다. 어떤 작품을 만들 건지, 왜 이런 재료를 선택한 것인지. 그러나 대답하기 어려웠다. 처음부터 작품에 대한 선명한 구상이 있었지만, 그렇게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그건 이 공간이 정해진 시간부터 계속 변했고, 나는 도통 그 끝이 어떻게 끝날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 주가 지나면 끝나리란 것만 알뿐, 난 이 공간과 함께 어디로 가는 건지, 작품을 하는 건지 놀이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그저 뭔가를 따라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플라스틱 지붕에 잔 나뭇가지와 잎들이 떨어져 우박소리를 냈고, 열린 문 사이로는 새들이 걸어 들어와 조용히 몇 분을 산책하다 돌아나가곤 했다. 어지럽게 동그랗던 원형 바닥과 벽은 묘한 기운을 내뿜으며 오브제를 위한 완벽한 무대가 되어갔다.

5주 후, 발에 치여 넘어질 정도로 쌓였던 나뭇가지들의 반은 버려졌다. 모아온 옷가지들 대부분은 다시 재활용센터에 넘겨졌고, 땅바닥에 누워있던 나무들은 헌옷과 천으로 옷을 해 입고 딱딱한 땅에 새로운 나무로 심겨졌다. 그리고 밖에서 날아 들어오는 새들이 이상한 나무들과 어울리며 이상한 숲을 만들어냈다. 불투명한 지붕에선 바닥 구석구석까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두 주 지나면 있을 졸업식 때 졸업생들 각자가 생각하는 예술은 무엇인가를 말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두 주가 지나기 전에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웹진에 신학이 아닌 예술에 대한 글을 올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예술에 대한 질문에 대해 운 좋게도 하나의 대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예술과 예수. 이 둘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로 자기를 침묵시키고, 대신 그 공간에 타자를 초대하여, 타자가 자기 목소리를 찾아 스스로 말하도록 하게 하는 일. 자신을 뒤로 물리고, 죽음에 가까운 침묵으로 소리를 낮추어 타자가 타자되도록 놓아버리는 일. 그렇게 해서 끝내는 자신이 타자가 되어버리는 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

나는 이제 예수를 빼고 예술을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아래는 김현화 님의 프로젝트 작품과 작품이 있는 정경을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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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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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3 21:5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예술가 예수.

    자신을 침묵시키고 타자가 타자되게 하는 일... 끝내는 자신이 타자가 되어버리는 일....

    하아. 저도 그런 목회를 하고 싶은데 말이죠..

예언자적 실패의 상상력
―엘리야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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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예언, 예언자

1970년대 중반 출간된 두 권의 저술 김정준의 『정의의 예언자』와 서인석의 『하나님의 정의와 분노』는 연구사적으로 한국 제1성서(구약성서) 학계의 기념비적 저작에 속한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두 권이 모두 예언자 아모스를 다루고 있다. 또한 아모스를 읽는 주요 코드를 ‘정의’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적이다. 당시 독재정권의 국민총동원적 개발주의에 대해 그 발전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하느님의 정의’라는 모티브가 성서 읽기에 개입한 결과다. 아무튼 이후 한국의 비판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모스뿐 아니라 ‘예언자 일반’을 ‘(하느님의) 정의의 사도’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예언운동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성서에 언급된 예언자들의 면모는 하나의 이념적 지형만으로 포괄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특히 「열왕기상」 22장의 미가야 벤 임라와 시드키야(주전 9세기), 「아모스서」 7장의 아모스와 아마지야(왕실 사제)(주전 8세기), 그리고 「예레미야서」 28장의 예레미야와 하나니야(주전 7세기)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와 저항이라는 코드에서만 보아도 한 편은 당대 왕실의 비판자인 반면 다른 한 편은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다.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한 쌍으로 기억되는 존재조차도 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중앙의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고, 복잡한 권력 투쟁과 이념 투쟁의 맥락에서 입지를 형성한 존재였다면, 아모스나 미가 등은 변두리 지역의 농부 혹은 지방 토호 출신이다. 여기에 좀더 다양한 관점을 개입시키면 예언자들의 동질성을 찾아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편, 성서의 예언서들에서 예언자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읽어내는 일 또한 매우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의 대부분은 북왕국에서 활동한 사람들인데, 현재의 성서에 편찬된 양식은 남왕국 출신 사가들의 창조에 가까운 손길을 거치면서 내용이나 형식, 그리고 분류에서 심하게 변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들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더욱 심하게는 다른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혼합되고 심지어 해석에 속하는 새로운 언급들이 마치 원래의 것이라도 되는 양 은근슬쩍 끼어들어오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언서들에서 원래의 예언자나 예언운동을 재건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요컨대 학문적으로 예언, 예언자, 예언운동을 정의내리는 일은, 현재의 학문적 동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서의 예언들을 귀담아 들으려 한다. 그만큼 신앙에서 예언은 중요한 전통으로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여기서 다시, 앞서 언급한 한국의 두 성서연구자들의 성서의 예언 읽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언서를 선별하고, 그것을 연구자 동시대의 문제의식 특히 위기의식과 연계시키는 방식이다. 그것은 과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현재와 대화하기 위한 과거의 읽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일방적으로 읽어내는/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시선으로 현재를 억지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관한 정보를 통한 역사학적 연구 경향과, 현재의 문제의식 간에는 첨예한 긴장이 필요하다. 여기에 역사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은 분리되면서도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얽힌다.
 
그러나 ‘정의’라는 시대 비판적 예언 읽기의 코드는 오늘날, 1980년 5공 정권의 등장한 이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정의’는 시대 비판적 입지로서만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오늘 우리의 개념 속에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87년 이후, 이른바 ‘민주화’ 과정과 지구화 과정에서 ‘개인’과 ‘일상’이 삶의 인식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후, ‘정의’로 표상되는 해방의 문제의식은 그다지 명료한 해방적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게 입증되었다. 개발주의적 총동원 못지않게, ‘정의론’에 기반한 총동원도 삶의 다양성을 억압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정의, 심지어 정의들 간의 상이한 해방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이 가능한 상황이 오늘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언을 읽는 오늘 우리의 대안적 코드를 찾기 위한 탐색이 필요하다. 나는 ‘예언자로서의 예수’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그것은 ‘낯설음’이다. ‘육이 된 신’이라는 예수에 관한 신학적 담론은 ‘신에 관한 친숙함’을 ‘낯설음’이라는 문제의식으로 해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예언자적 독특성은 친숙한 것, 일체의 인습적인 삶의 지혜에 대한 전복적인 도전에 있다. ‘시대를 낯설어함’ 바로 그것이 예수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바로 이와 같이 성서의 예언들에서 나는 시대를 낯설어하는 이미지를 발견한다.
 
1930년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당시 자본주의의 최첨단의 미학을 자랑하는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닐면서 문뜩 자신을 낯선 세계를 방황하는 ‘배회자’로 느낀다. 그 몇 년 뒤 장 뽈 싸르트르는 그의 첫 소설 『구토』에서 어제까지 일상 속에서 무감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되던 것들 하나하나에서 구역질을 하는, 이상한 생리현상을 이야기한다. 불현듯 감지된 세계의 낯섦이 몸을 불편하게 한 것이다. 김수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고, 1960년 초의 역사의 흐름에 대한 불편함을 자신의 몸에서 기억해낸다. 마찬가지로 민중신학자들은 1970년 11월 13일의 전태일에게서 시대를 불편하게 보는 예수에 대한 이해에 문득 도달했다. 바로 이러한 민중신학의 시선에서 성서의 예언을 읽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게 있다. 성서 전통에서 예언자는 거의 남자들의 전통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예언자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출애굽기」 15장 20절의 드보라, 「판관기」 4장 4절과 「열왕기하」 22장 14절, 「역대기하」 34장 22절의 훌다, 「이사야서」 8장 3절의 이사야의 부인이라고 언급된 익명의(가상의?) 예언자, 그리고 「루가복음」 2장 36절의 안나, 「묵시록」 2장 20절의 티아디라 교회의 ‘이세벨’ 등, 여러 명의 여성 예언자들에 관한 정보에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드보라나 훌다 등 주요 인물조차도 묘사가 극히 제약적이고, 티아디라의 이세벨처럼 종종 부정적으로 다뤄진다. 독자적인 이름의 예언서로 기억된 경우는 전무하며, 무엇보다도 ‘성해방’적인 문제에 대한 담론에 대해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예언자들의 담론도 거의 전적으로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언 전통은 오늘 우리에게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측면도 적지 않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성서 전통 속의 엘리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임을 드러내려는 용의주도한 노력을 기울였다. 광야에서 활동하며, 낙타털옷, 가죽허리띠 같은 의복이나 메뚜기·석청 같은 음식을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의 엘리야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것은 「말라기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 관련이 있다.

너희는 내가 호렙산에서 나의 종 모세를 시켜 온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과 규정과 계명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서」 3장 22~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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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변화산에서 예수와 엘리야, 모세

여기서 보듯이 엘리야에 관한 대중적 기억은 ‘종말’과 ‘심판’이라는 전통적 인식 코드와 연결된다. 현재에 대한 강력한 부정(否定)이 대중의 열망으로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대중의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켜 종말에 대한 신앙과 연계시킨다.

이것은 예수가 요한의 운동을 계승했을 때, 대중의 기억 속에서 다시 부활한다. 즉 요한의 부활한 몸이 예수라는 대중적 인식은 ‘엘리야=요한’이라는 대중의 믿음과 연결되어, 예수에게서 엘리야를 떠올리는 연상작용을 낳았던 것이다(마르8,28).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처절한 고통 속에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며 절규하는 고성을 지르며 임종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그 소리가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오인했다고 한다(마르15,34~35). 필경 이러한 드라마적 상상력은 예수와 엘리야를 동일시하려는 욕망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미쳐 만들어진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만큼 예수는 동시대에 부활한 엘리야로 인식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깊이 다가갔음이 분명하다. 예수의 실천은 유대 대중의 민중적 상징체계와 맞물림으로써 강력한 대중 전승의 일부를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 동시대의 대중의 문제인식은 엘리야라는 거의 9세기 전의 인물에 관한 기억과 대화하여, 서로를 해석하는 시선이 된다. 엘리야와 예수, 예수와 엘리야. 그리고 민중신학에서 이것은 ‘예수-전태일’의 해석학적 상호작용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제2성서(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 주류 담론들, 특히 라삐적 바리사이즘은 이러한 엘리야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 담론에 대한 그들의 불신과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예수운동과 유대교 주류 담론간의 갈등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대중적 희망과 엘리트주의적 희망 간의 계급적인 상이한 전망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럼에도 주로 묵시적인 유대교의 문서 텍스트 속에 엘리야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서들 속에 예수와 엘리야가 내적인 연계를 갖도록 내용이 구성된 것은 지식 계층 사이에도 대중적 희망의 체계가 일정하게 스며들 수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이슬람교 문헌에서도 엘리야가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엘리야

그렇다면 역사의 엘리야(historical Elijah)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는 정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이였을까? 아니면 실존의 그와는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변형되어(transfigurated) 기억된 것은 아닌가? 역사의 다윗은 매우 억압적인 시대를 연 장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후대의 야훼 신앙사에서 해방의 상징으로 변형되어 대중에게 기억되었다. 반면 모세는 억압당하는 히브리의 해방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야훼 신앙사 속에 도입된 상징이었음에도, 특히 바울의 텍스트 속에서는 억압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재현되었다. 이렇게 이미지의 재현은 변화무쌍한 양상을 띤다. 그렇다면 과연 엘리야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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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예언자는 오므리 왕조, 특히 아합 왕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다. 오므리와 아합 왕의 시대는 아마도 팔레스티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토만 보더라도, 요르단 동편의 암몬, 그 남부의 모압, 그리고 에돔과 유다 왕국을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고, 북으로 갈릴래아 북부 지역 끝의 ‘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마스커스 왕국과의 국경인 시리아 남부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상부 갈릴래아의 북단의 단과 하솔, 하부 갈릴래아의 므기또와 이즈르엘,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 등에서 오므리-아합 대에 건조된 거대한 왕궁 및 요새가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나 세련미가 당대뿐 아니라 상당한 후대에까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특출나다. 특히 이 도시들에서 발굴된 지하수로나 마구간의 규모는 이 왕조가 얼마가 강력한 위용을 가진 나라인지를 시사한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샬마네셀 3세(Shalmaneser III, 859 BCE~824 BCE 재위)의 비문에는 아시리아의 서방원정군에 맞서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연합군의 주축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며, 파견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마전차 2천 승과 보병 1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숫자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상당한 규모라는 점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필경 아합의 군대는 평지전투에 관한 한 아시리아의 팽창주의를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므리 왕조에 이르러서 팔레스티나 거의 전역을 통제할만한 강력한 왕조가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흔히 다윗-솔로몬 대의 왕국을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최초의 고대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이해의 근거는 단지 성서의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묘사에서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건립했다는 도성의 보잘 것 없는 흔적을 비롯한 고고학적 증거도 그것을 입증해주지 않고, 외국의 비문에는 전혀 언급조차 얻을 수 없을 정도다. 반면 ‘오므리의 집안’은 외부의 시선에서 남북의 왕조를 통틀어 이스라엘 족속들의 나라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오랫동안(이 왕조가 몰락한 이후에까지도) 기억되었다.

왕궁의 고고학적 흔적에서 드러나듯 아마도 비교적 잘 짜인 관료제도가 성립되었던 듯하다. 왕실에서 대규모의 예언자와 사제 집단을 양성했다는 성서의 묘사를 염두에 둔다면, 관료조직은 군사조직만이 아닌, 많은 이데올로그들의 양성 시스템도 포함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은 국가의 발전에 관한 신학적인 체계화 및 대중화가 상당히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페니키아의 왕녀인 이세벨이 아합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승에는 아세벨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다. 그만큼 이세벨의 상징적 이미지는 아합의 정책에서 중요하다. 성서는 그것을 바알과 아세라 신앙과 관련시킨다. 이 텍스트들에서는 이 왕실신앙을 혼합주의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오므리 왕조의 제국적 발전은 다종족 연합체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고대의 국가들이 영역 내의 종족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는지를 과장해서 이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시대 국가들은 군사적으로 영토를 통제 관장할 수 있을지언정, 백성의 경험과 기억을 통제할 수단과 능력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또 군사적 통합조차도 지방에 왕 직속의 관료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실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제국 요소요소에 설치된 몇몇 군사요새 정도가 왕의 직속 부대가 배치된 곳이었고, 각 지방의 구체적인 행정 및 일상은 지방 토호 세력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러니 지방 권력과 중앙 권력 간의 비대칭적 동맹의 결과가 고대의 국가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게 적합하다.

물론 오므리 왕조도 예외가 이니었다. 오므리 왕조의 수도가 둘이라는 점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시사적으로 보여준다. 성서는 사마리아 지방의 성읍인 사마리아를 오므리가 돈으로 사들여서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반면 이즈르엘 성읍은, 나봇의 이야기에서 보듯, 토착민의 땅을 강탈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것은 사마리아 건설이 족속간의 계약 전통에 의해 왕권이 행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 이즈르엘은 왕권에 의한 일방적인 강탈 점유를 통해 구축된 도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최근의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두 성도가 한 편은 보다 이스라엘적인 반면, 다른 한 편은 보다 비이스라엘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요컨대 오므리 왕조는 이중수도를 통해 두 유형의 통치를 시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는 야훼신앙의 계약 군주적 전통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제군주적 전통이다.

앞의 ‘표’에서 보듯 이스라엘의 선후대 왕조들은 예언자들의 지지에 힘입어서 왕위를 획득한다. 그것은 대중과의 계약이 왕권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필경 오므리 왕조도 그러한 예언자적 지원을 기대했을 성 싶다. 그러나 바아사, 지므리 등으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군사쿠데타의 상황에서 예언자의 지지는 그다지 정당성을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오므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 티브니를 주축으로 한 세력과의 내란 상황에 빠진 것은 이러한 예언자적 지지의 약한 정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란을 극복한 뒤, 이러한 약한 정당성은 오므리 왕조의 강점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적인 계약 전통에 덜 의존적인 정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왕조는 보다 자유롭게 강한 전제군주적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모색을 할 수 있었다. 오므리가 아들 아합을 페니키아의 왕녀 이세벨과 결혼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가능했다. 그러므로 아합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즈르엘에 왕궁을 건립하고, 그곳을 전제군주적 통치의 기초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합의 혼합주의’ 정책은 종족 연합에 기초한 고대의 국가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오므리 왕조는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이질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한편, 혼합주의 문제는 좀더 복잡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혼합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왜냐면, 혼합주의의 문제는 한참 후대인 주전 5세기 이후 페르시아에서 귀환한 유대공동체가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몇 세기 간의 내적 투쟁에서 만들어진 신학적이고 종족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을 원리주의적으로 추구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공동체의 이데올로기가 성서 편찬에 개입한 결과, 과거의 역사를 ‘혼합’과 ‘순수’라는 틀로 억지로 짜맞춘 데서 성서의 혼합주의에 관한 논의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함’이란 특정한 시기의 역사적 발견물에 다름 아니다. 즉 혼합적인 것은 ‘순수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개념인데, 실제로 순수한 것은 후대의 발견물이고, 그 시선에서 과거의 역사를 혼합주의적이라고 재해석했다는 얘기다. 다만 수만은 이질성들이 서로 경합하고 때로는 조합되고 혼재하기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삶과 의식은 구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바알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다양한 이질성들이 만나 절충하고 혼재한 요소의 핵심에 있다. 아세라 신앙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야훼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이러한 대전승의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소수 전통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야훼 신앙이 대전통과 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의 사람들은 대전통에 의존하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소수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적합하다.

여기서 오므리 왕조가 페니키아의 바알 신학을 도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면, 오래전부터 지중해 무역 시장 형성에 뛰어든 페니키아의 문화전통은 보다 사적인 소유 개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능력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방임주의적 관점과 어느 면에서 맥을 같이 한다.

오므리 왕조에 의한 ‘국가의 성공’은 이러한 신학적 발전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대대적인 건조물은 모든 백성에게 그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홍보한다. 또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제의는 그 화려한 전례 행사를 통해 성공주의를 찬양한다. 반면 이러한 국가주의적 신학에 도전하는 자들은 국가의 공공연한 억압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들의 담론 또한 침묵의 늪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제 전 사회는 왕조의 찬란한 성공 신화에 온통 사로잡힌 듯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그 속에서 문법화된 성공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이때 엘리야가 활동한다. 왕조의 이러한 성공의 미학이 한참 활기를 띠던 바로 그 때다. 어느 나라를 점령했다는 전령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연일 들렸고, 그 나라에서 보내온 공납물의 행렬이 계속되는 도로 한복판을 거닐면서, 그는 그 화려한 성공에 문뜩 ‘불편함’을 느낀다.

그에 관한 성서의 묘사는 문학 양식상 ‘전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예수에 관한 담론처럼, 서기관적 저술가들의 지적인 매체를 통해 기억된 것이 아니라, 민간전승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간직되어 온  이야기인 것이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대중의 분노와 희망의 언어로 가득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역사의 엘리야’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열왕기상」 17장의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를 보자. 여기에는 왜 그가 대중적 분노와 꿈의 이야기, 그러한 기억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관한 근거가 슬며시 들어가 있다. 여기서 그가 베푼 기적은 작은이들의 매우 일상적인 고통과 관계하고 있다. 다른 예언자들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기적 같은 것이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큰 메시지를 담고 있는 데 반해, 엘리야의 활동은 이념에 채색되지 않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역경과 그것의 극복 과정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과부와 어린아이가 그의 기적의 수혜자로 나온다는 점은 대중적 고통의 극한에 더욱 가까운 곳에서 그에 관한 애틋한 기억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요컨대 엘리야는 아합 왕조가 추진하던 강력한 전제군주제 정책이 대중의 희생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불편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을 동원하여 왕이나 귀족들이 소농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일이 숱하게 일어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대중으로선 땅을 지키는 일이 너무나 버거웠다. 이런 사회에서 과부나 고아는 무수히 양산되기 마련이고, 그들의 생존권은 전혀 보장될 수 없다. 이런 부의 극심한 편중 현상이 국가주의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고, 페니키아식 바알 종교에 의해 미학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엘리야를 통해 대중에게 속속들이 들춰졌을 것이다. 그의 활동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성공한 정도만큼은 그것이 들춰졌다고 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없다.

가르멜 산은 페니키아와 이스라엘 접경지대에 있는 산이다. 또한 이즈르엘 성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요한 요새성읍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양국의 상이한 종교 전통간의 대립이 빈번한 지역이기도 했고, 이 점에서 이 지역의 상징성은 단순한 장소의 점유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넘어선다. 아합과 이세벨은 아마도 이곳에 바알신앙을 기리는 신전을 세웠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야훼신앙이 그 하위에 포섭되어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전혀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되게 하는 장치를 포함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대규모의 승려들이 국가제의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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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가르멜 산 사건 이후 엘리야는 도망자가 된다

그런데 엘리야는 대중을 선동하여 이들을 몰살한다. 성서가 묘사하듯 천 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학살극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실상은 훨씬 소소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이 거사가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벨의 공권력에 그는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유다 남부 네겝 지역인 브엘세바로까지 도주해야 했다.

먼 길을 달음질하느라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더욱 그를 좌절시킨 것은, 그토록 열망해마지 않던 새 세상에의 희망이 좌절된 것이리라. 차라리 죽여 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은, 아마도 엘리야보다 더욱 절망했던 대중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중은 엘리야를 기억하면서 가르멜에서의 실패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의 기억은 엘리야에 관한 전승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가 천사에 이끌려 호렙으로 간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혁명적 거사 실패와 그에 따른 절망에 사로잡힌 상황을 극복하는 대중의 자존적 지혜를 담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호렙 산에 이른 엘리야는 야훼의 계시를 받고자 했다.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갈망하는 자의 몸부림으로 말이다.

그때 엄청난 바람이 휩쓸고 지난다. 모세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과연 야훼의 임재를 체험할 만한 기세다. 그러나 야훼는 거기에 없었다. 이윽고 온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일었다. 이 세상의 최고 지배자이신 야훼의 발소리에 놀란 땅의 요동이기라도 한 양. 하지만 여전히 야훼는 나타나질 않는다. 도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일이 더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갑자기 불길이 치솟는다. 그래, 이제야 말로, 야훼가 나타나시나보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야훼는커녕 송사리 귀신도 보이질 않는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야훼는 바알에게 졌단 말인가? 바알이 더 강한 신이란 말인가? 세상은 악이 지배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민중의 해방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인가! .........

그때였다. 솔바람이 스치듯이, 세미한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슬쩍 건드리고 지나간다. ‘엘리야,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광풍에도, 지진에도, 천길 불꽃 속에서도 없던 신이..., 아 이런, 그렇구나.’ 엘리야는 야훼의 임재가 이렇게 오는 듯 마는 듯 다가오는 것임을 비로소 발견한다. 천지를 진동시킨 혁명적 대사건에서가 아니라, 미세한 일상 속에서 감각 세포들을 살며시 건드리며 다가오는 것, 밖에서 오는 것인지 안에서 발아하는 것이지도 모르도록 다가오는 것. 천지와 자아가 합류하는 곳, 바깥에서 흘러오는 물과 안에서 솟아오른 물이 어우러져 뒤섞이는 곳, 나와 신이 아와 타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합체되는 곳,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하는 것이라고.

대중은 엘리야 이야기를 통해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불편해하는 예언자적 감수성에 공감한다. 동시에 그의 이야기에는 혁명적 이념의 이데올로기가 담고 있는 또 다른 성공주의에 대한 불편함이 스며 있다. 바로 여기에 가르멜 실패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간직하는 대중의 니힐리즘적 지혜가 되살아난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런 시간의 법칙에도 굴복하지 않는 엘리야를 기억하고자 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이러한 믿음은 그가 언젠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소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대중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증폭됐다. 후대의 역사에서 그는 메시아 왕국 도래의 상징으로 기억됐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 왕국이 또 다시 저항의 성공주의에도 물들지 않는 전통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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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불수레 승천 이야기이다.

영웅적 예언자는 없다. 오직 그것을 부정하는 예언자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엘리야, 그는 칼을 든 예언자다. 그는 혁명가다. 그러나 성공한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실패했다. 그리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줄 틈도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긴급히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대중은 바로 그 실패 때문에 괄호 쳐진 후속의 이야기를 채워 넣어야 했다. 성서는 엘리야의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시킨 대중의 기억술의 단초를 보여준다.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실패로 말미암아, 대중에게 실패는 곧 더욱 온전한 성공의 흔적임을 알려주었다. 대중은 엘리야로 말미암는 온전한 성공의 담론을 창조하는 주역으로, 곧 ‘민중’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그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고 그의 뒤를 추종함으로써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사건을 통해 단박에 확보되는 그런 성공의 파노라마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성공과 약간의 실패가 끝없이 교차되는 가운데 되는 듯 마는 듯 만들어지고, 끝없이 지양되면서 펼쳐지는 일상적 사건의 연쇄이다.

영웅은 없다. 메시아도 없다. 그러한 성공의 화신으로서의 ‘영웅/메이사/신의 죽음’에 관한 예언자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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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우
    2009.05.08 11: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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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재밌네요! 좋은 글과 묵상, 감사드립니다.
  2. 이상철
    2009.05.20 02:1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90년대 이후 데리다는 자신의 이론적 성찰 deconstruction을 구체적 영역에서 (종교와 윤리, 정치분야)에서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종교담론을 묶어 편찬한 책이 Acts of Religion(2002)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한마디로 데리다의 종교론을 요약하는 문장이 the messianic, or messiancity without messianism,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데리다는 벤야민과 만나고, 후기 데리다는 그런 의미에서 초기에 그가 레비나스와 대결했던것과는 달리 레비나스를 많이 닮아갑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그런 (후기) 데리다가 떠올랐습니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 엿보기, 관음증,희망,지연, 연기, 미끄러짐...무엇이 적합한 표현인지는 여전히 남겨진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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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예수, 민중의 상징.민중, 예수의 상징』

권진관 지음

동연 펴냄

출간일 : 2009-04-02
정   가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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