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그들은 누구인가?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예언서를 연구한다는 것은 주로 예언자들의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빗대어 그들의 메시지를 분석함을 의미한다.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회정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만 정작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예언자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만 연구하고 책으로만 만났으니 역사 한가운데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몸부림쳤던 치열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용히 잠든 세상을 마구 흔들어 깨워 요동치게 만든 예언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로 하여금 역사 앞에 자신의 몸을 과감히 내던지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 랍비는 1962년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했고, 그의 책은 20세기 성서학의 걸작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예언자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각주:1] 헤셸 랍비는 “신의 파토스”(Divine Pathos)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구약성서의 예언자와 예언서를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파토스의 신이라는 것이고 예언자는 신의 파토스를 몸으로 느끼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신의 말을 전단하는 메신저나 또는 장래를 내다보는 선견자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의 연민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도덕 선생도 아니고 이성을 잃은 광분자도 아니다.


   예언자의 글은 신의 파토스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신의 파토스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자비와 사랑 때로는 실망과 분노와 같은 감정으로 표출된다. 예언자들이 열변을 토했던 것이 바로 신의 파토스다. 예언자는 세상의 불의를 보고 고함을 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예언자에 대한 단순한 접근일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신의 파토스는 역사적/사회 비평 같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이 신의 파토스를 전달하는 예언자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진노가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끊고 있어서, 내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 없다”(렘 6:11).[각주:2]


   신의 파토스를 가장 잘 전달해주는 언어가 바로 시다. 구약성서의 예언의 독특한 점 하나가 바로 대부분의 예언이 시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헤셸 랍비는 예언자는 시인이라고 했다. 예언자라는 사람의 경험은 시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시적 영감으로 여기는 것을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부른다. 예언자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감수성, 정열, 상상력을 부여받았다. 


    중세기 저명한 모세 이반 에즈라(Moses ben Jacob ibn Ezra) 랍비는 “히브리어로 시인은 예언자로 불린다”고 주장했다.[각주:3] 실제로 에스겔은 자신의 예언을 당시 사람들이 시가로 받아들이는데 불평을 토로했다: “그들은 너를,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겔 33:32).


    하지만 예언이 시라는 정의는 일리 있는 말이다.[각주:4] 구약성서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는 신의 파토스는 시라는 문학형식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따라서 예언은 시적 상상의 소산이다. 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시 안에서는 나무들이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는 번영과 향락을 일삼으며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여인들을 바산에서 풀을 뜯는 암소로 비아냥거리면서 하나님의 분노(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사마리아 언덕에 사는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어라.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아, 

   저희 남편들에게 마실 술을 가져 오라고 조리는 자들아, 

   주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맹세하신다. 

   두고 보아라. 너희에게 때가 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갈 날, 

   너희 남은 사람들까지도 낚시로 꿰어 잡아갈 때가 온다. (암 4:1-3, 새번역). 


 이사야는 포로귀환의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주어진 포도주와 젖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사 55:1, 새번역).



 예언자는 시인일 뿐 아니라 설교자요 사회 변혁가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역사의 한 가운데서 신의 파토스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는 화산처럼 폭발하는 격정 속에서도 얼음같이 차고 맑은 냉철한 마음과 눈이 있다. 문익환 목사는 예언자의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설상 나는 죽었습니다.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숨쉬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숨쉬는 건 누구입니까? 

   아아아아 그것은 흐느끼며 휘몰아치는 

   바람입니다. 높아만 가는 

   겨레의 숨소리입니다. 

   벗들이여 

   그 속에서 불꽃 튕기는 눈망울 하나 불쑥 나타나 

   얼음같이 찬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각주:5]  


 예언자들의 마음을 역사 현장에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신의 파토스다. 따라서 헤셸 랍비는 예언자는 지금 역사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정점이었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 50주년을 기념하여 영화로도 나왔다. 20세기의 예언자로 불리는 헤셸 랍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주도했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정의를 실천하도록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예언자의 삶을 사신 또 다른 두 분이 있다. 바로 문익환 목사와 장준하 선생이다.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장준하 선생의 셋째 아들 장호준 목사가 “역사 바로잡기”라는 내용으로 강의하기 위해 시카고에 왔다. 장 목사의 강의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장준하 선생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장준하를 “선생”으로 부르지만, 강연을 들은 이후 그분을 “우리 시대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로 다짐했다. 해방의 신 야훼가 아니라 가나안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출애굽 해방의 역사적 경험으로 초대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그분을 통해 들었던 것이다. 일본제국 시절 부와 영예를 누릴 수 있는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 광복군으로,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절 그분은 돈을 벌수 있는 많은 길이 있었지만 사상계를 출간하여 돈이 아니라 “생각해야 산다!”는 예언자의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었고, 돈 벌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베트남 파병도 반대하셨다. 그분은 파라오의 진수성찬이나(출애굽기 5장) 금 신상으로 표현되는 우상숭배 (출애굽기 32; 열왕기상 12장), 바알숭배에서 드러나는 풍요와 싸우셨던 것이다.  


 지난 2016년 4월 총선이 끝난 후 장호준 목사가 다시 시카고를 찾았다. 이번에는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준 목사와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 선생의 토크 콘서트”라는 대담의 형식으로 문성근 선생과 동행했다. 특별히 이번 대담은 문익환 목사를 예언자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분은 과히 신의 파토스에 따라 자신의 삶을 던진 이 시대의 예언자임에 틀림없다. 시인이면서 목사요 성서학자요 운동가로서 문익환 목사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예언운동”이라고 규정했다.[각주:6] 문 목사는 “예언운동은 해방을 열망하는 억눌린 민중의 힘이 터져 나오는데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각주:7] 문 목사의 예언 운동은 바로 헤셸 랍비가 말하는 신의 파토스라고 생각한다.  


 헤셸 랍비는 “예언자들을 자세히 보면 결국 예언자들과 사귀게 된다”고 했다.[각주:8]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언자가 되게 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신의 파토스다. 우리는 바로 이 신의 파토스의 영감을 받고 그것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역사 한 가운데서 하늘의 파토스를 전하고자 몸부림치는 예언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서울: 종로서적, 1996). [본문으로]
  2. 헤셸의 신의 파토스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Eliezer Berkovits, "Dr. A.J. Herchel's Theology of Pathos," Tradition 6 no. 2 Spr.-Sum. (1964): pp. 67-104. [본문으로]
  3. Shirath Israel (Berlin, 1924), p. 45. [본문으로]
  4. 헤셸, 172 쪽. [본문으로]
  5.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146쪽. [본문으로]
  6.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본문으로]
  7. 문익환, 136쪽. [본문으로]
  8. 헤셸, 머리말, x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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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전쟁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강도떼가 숨어서 사람을 기다리듯, 제사장 무리가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 숨었다가 사람들을 살해하니, 차마 못할 죄를 지었다. ― 「호세아서」 6장 9절

이스라엘 국이 멸망하기 직전의 혼란 상황을 묘사하는 텍스트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수수께끼 같습니다. 세겜 길목에서 제사장들이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세겜’은, 과거 블레셋 군과 사울 군이 싸울 때 양군의 진영이 있었던 저 유명한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기슭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유다국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가고자 할 때 도로가 세겜을 지나가게 되어 있지요. 더 나아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이르는 내륙 대상로가 이 지역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여 ‘세겜 기슭’이란 남에서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으로 혹은 사마리아 성에서 유다 국으로 가는 길목인 셈이지요.

호세아 예언자는 이곳을 통과하는 이들을 제사장들이 살해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통과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남에서 북으로 가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북에서 남으로 가는 이들일까요?

이것을 알아내는 일은 간단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국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분노한 제국의 군대는 끈질기게 저항했던 성읍을 불태웠고 지도자들의 몸둥이를 기둥에 꿰어 성벽에 내걸어 놓았으며, 그곳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해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근 농지를 불살랐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또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한때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국으로 광대한 영토를 병합했던 제국 이스라엘은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겼고 단지 사마리아 성과 그 인근지역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호세아서」는 내용상 1~3장과 4장 이후로 나뉘는데, 1~3장이 이스라엘 국이 아직 번성하고 있던 때를 반영하고 있다면, 4장 이후는 아시리아 군의 침공으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멸망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지요. 앞이 이스라엘의 영토가 방대했던 때였다면, 뒷부분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쪼그라든 때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3장에서는 ‘에브라임’이라는 용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데, 4장 이후에서는 무려 36번이나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大) 이스라엘’이던 시절이 지나고, 왕국 말기에 사마리아 인근의 에브라임 지역만을 통제하고 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겜의 길목이란 남쪽으로 향하는 백성들이 국경을 통과하는 길목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북쪽에서 아시리아 군이 밀고 내려오니 사람들은 세겜을 통해 남으로 피란을 떠나는 것이지요. 살기 위해서, 군대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파괴의 잔혹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제사장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왕의 군대가 아니라 제사장들이 말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왕궁의 녹을 먹던 사제들이었겠지요. 국가가 번영하던 때 연일 정복지에서 온 전리품이 이곳을 통과해서 왕실로 갔고, 봉신국이던 유다국 등의 공납물도 여기를 거쳐 지나갔습니다. 또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해서 시리아로 가는 대상도 이곳을 지나갔지요. 그때마다 막대한 기부금이 왕실의 이름으로 제사장들에게 하사되었습니다. 하여 그들은 이곳의 강력한 종교귀족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실이 몰락할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왕실과 운명을 같이할 것입니다. 그러면 야훼께서 축복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번성케 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고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

한데 백성들이 도성을 피해 남으로 피란을 떠나려 합니다. 사제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세겜 길목을 지키며 그곳을 지나는 백성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해댑니다. 왕실과 성전의 운명을 공유하지 않는 불신실한 이들을 신의 이름으로, 거룩한 이스라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살육을 합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바로 그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그런데 ...... 길르앗은 폭력배들의 성읍이다. 발자국마다 핏자국이 뚜렷하다.”(6~8절)

제사가 신실함의 표상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국란 상황에서 제사에 몰두하며 그것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무참히 죽였던 것입니다. 신정국가 사회에서 제사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이자 미래의 청사진이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와 청사진이 추구하는 것은 ‘풍요’였습니다. 신은 풍요를 주는 분이었고, 제의는 그러한 풍요를 표상하는 방식으로 화려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들을 우월한 계급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바로 이러한 제사종교의 폐단을 비판합니다. 그가 얘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헤세드)‘과 ’하느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엘로힘)입니다. 그것은 풍요나 계급의 신, 그것을 보증하는 격식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과 (위계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선사한 ’출애굽의 신‘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전쟁에서 탈출하려는 이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려는 이들의 행동을 저주하고 그 몸을 죽음의 계곡으로 내동댕이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피비린내 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살고자 하는 노력을 가상히 여기고 그들에게 구원과 해방을 선사하는 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텍스트는 오늘 한국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벌이는 행동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한국에서 교회는 지난 1990년 이전까지는 온갖 번영과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때 교회는 궁핍에서 풍요를 선사한 하느님을 선포했고 그 선포가 실현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그 풍요와 영적 구원을 동일시하는 한국적 교리를 제도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견고한 풍요의 성전 외부로 떨려난 이들을 저주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 이단들, 타종교인들, 성적 소수자들 등이 그들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축복과 저주의 담론을 예배 속에 제도화했고, 그것을 통제하는 관리자, 곧 성직자를 통해 그러한 배타적 성전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풍요의 시대가 가고 환란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자본의 광풍이 사람들을 헤어 나올 수 없는 저주의 늪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국가와 국민은 위기에 처했고, 지구자본체제라는 제국의 질서 속에서 공공 영역이 점점 와해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1990년 이후 저성장 상황에 놓여 있다가 1995년에서 2005년 사이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시민사회는 교회에 대한 신뢰를 폐기했고 심지어 혐오스러워 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발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인 번영신학의 철저한 순응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일상에까지 관철시키는 생활태도와 신앙태도로 무장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실패자에게 무관심하거나 냉혹한 신앙제도로 교회를 재정립하도록 이끕니다.

둘째는 배제주의 이데올로기를 일상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념의 타자, 종교의 타자, 인종의 타자, 계급의 타자, 성적 타자에 대해 무자비한 종교제도를 추구하는 신앙을 낳습니다. 최근 한국교회는 이러한 대열에서 이탈하려는 자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일부 대학교수들을 강단에서 쫓아냈고, 이념의 타자들을 사냥하기 위해 온갖 색깔론을 발명해냈으며, 타종족․기층대중․성소수자 등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풍요의 신학을 재천명하고, 물량적인 축도의 종교로 사람들을 다시 끌어들이려 합니다. 하여 자본주의와 반공주의, 귀족주의, 성직자 중심주의를 추구하는 신앙제도 속에서 사람들을 묶어두려 합니다.

해서 우리는 호세아 예언자처럼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하느님에 관한, 성서에 관한 지식을 왜곡하는 이들과 양보 없는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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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 실패의 상상력
―엘리야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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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예언, 예언자

1970년대 중반 출간된 두 권의 저술 김정준의 『정의의 예언자』와 서인석의 『하나님의 정의와 분노』는 연구사적으로 한국 제1성서(구약성서) 학계의 기념비적 저작에 속한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두 권이 모두 예언자 아모스를 다루고 있다. 또한 아모스를 읽는 주요 코드를 ‘정의’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적이다. 당시 독재정권의 국민총동원적 개발주의에 대해 그 발전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하느님의 정의’라는 모티브가 성서 읽기에 개입한 결과다. 아무튼 이후 한국의 비판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모스뿐 아니라 ‘예언자 일반’을 ‘(하느님의) 정의의 사도’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예언운동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성서에 언급된 예언자들의 면모는 하나의 이념적 지형만으로 포괄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특히 「열왕기상」 22장의 미가야 벤 임라와 시드키야(주전 9세기), 「아모스서」 7장의 아모스와 아마지야(왕실 사제)(주전 8세기), 그리고 「예레미야서」 28장의 예레미야와 하나니야(주전 7세기)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와 저항이라는 코드에서만 보아도 한 편은 당대 왕실의 비판자인 반면 다른 한 편은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다.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한 쌍으로 기억되는 존재조차도 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중앙의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고, 복잡한 권력 투쟁과 이념 투쟁의 맥락에서 입지를 형성한 존재였다면, 아모스나 미가 등은 변두리 지역의 농부 혹은 지방 토호 출신이다. 여기에 좀더 다양한 관점을 개입시키면 예언자들의 동질성을 찾아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편, 성서의 예언서들에서 예언자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읽어내는 일 또한 매우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의 대부분은 북왕국에서 활동한 사람들인데, 현재의 성서에 편찬된 양식은 남왕국 출신 사가들의 창조에 가까운 손길을 거치면서 내용이나 형식, 그리고 분류에서 심하게 변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들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더욱 심하게는 다른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혼합되고 심지어 해석에 속하는 새로운 언급들이 마치 원래의 것이라도 되는 양 은근슬쩍 끼어들어오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언서들에서 원래의 예언자나 예언운동을 재건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요컨대 학문적으로 예언, 예언자, 예언운동을 정의내리는 일은, 현재의 학문적 동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서의 예언들을 귀담아 들으려 한다. 그만큼 신앙에서 예언은 중요한 전통으로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여기서 다시, 앞서 언급한 한국의 두 성서연구자들의 성서의 예언 읽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언서를 선별하고, 그것을 연구자 동시대의 문제의식 특히 위기의식과 연계시키는 방식이다. 그것은 과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현재와 대화하기 위한 과거의 읽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일방적으로 읽어내는/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시선으로 현재를 억지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관한 정보를 통한 역사학적 연구 경향과, 현재의 문제의식 간에는 첨예한 긴장이 필요하다. 여기에 역사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은 분리되면서도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얽힌다.
 
그러나 ‘정의’라는 시대 비판적 예언 읽기의 코드는 오늘날, 1980년 5공 정권의 등장한 이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정의’는 시대 비판적 입지로서만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오늘 우리의 개념 속에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87년 이후, 이른바 ‘민주화’ 과정과 지구화 과정에서 ‘개인’과 ‘일상’이 삶의 인식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후, ‘정의’로 표상되는 해방의 문제의식은 그다지 명료한 해방적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게 입증되었다. 개발주의적 총동원 못지않게, ‘정의론’에 기반한 총동원도 삶의 다양성을 억압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정의, 심지어 정의들 간의 상이한 해방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이 가능한 상황이 오늘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언을 읽는 오늘 우리의 대안적 코드를 찾기 위한 탐색이 필요하다. 나는 ‘예언자로서의 예수’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그것은 ‘낯설음’이다. ‘육이 된 신’이라는 예수에 관한 신학적 담론은 ‘신에 관한 친숙함’을 ‘낯설음’이라는 문제의식으로 해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예언자적 독특성은 친숙한 것, 일체의 인습적인 삶의 지혜에 대한 전복적인 도전에 있다. ‘시대를 낯설어함’ 바로 그것이 예수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바로 이와 같이 성서의 예언들에서 나는 시대를 낯설어하는 이미지를 발견한다.
 
1930년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당시 자본주의의 최첨단의 미학을 자랑하는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닐면서 문뜩 자신을 낯선 세계를 방황하는 ‘배회자’로 느낀다. 그 몇 년 뒤 장 뽈 싸르트르는 그의 첫 소설 『구토』에서 어제까지 일상 속에서 무감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되던 것들 하나하나에서 구역질을 하는, 이상한 생리현상을 이야기한다. 불현듯 감지된 세계의 낯섦이 몸을 불편하게 한 것이다. 김수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고, 1960년 초의 역사의 흐름에 대한 불편함을 자신의 몸에서 기억해낸다. 마찬가지로 민중신학자들은 1970년 11월 13일의 전태일에게서 시대를 불편하게 보는 예수에 대한 이해에 문득 도달했다. 바로 이러한 민중신학의 시선에서 성서의 예언을 읽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게 있다. 성서 전통에서 예언자는 거의 남자들의 전통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예언자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출애굽기」 15장 20절의 드보라, 「판관기」 4장 4절과 「열왕기하」 22장 14절, 「역대기하」 34장 22절의 훌다, 「이사야서」 8장 3절의 이사야의 부인이라고 언급된 익명의(가상의?) 예언자, 그리고 「루가복음」 2장 36절의 안나, 「묵시록」 2장 20절의 티아디라 교회의 ‘이세벨’ 등, 여러 명의 여성 예언자들에 관한 정보에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드보라나 훌다 등 주요 인물조차도 묘사가 극히 제약적이고, 티아디라의 이세벨처럼 종종 부정적으로 다뤄진다. 독자적인 이름의 예언서로 기억된 경우는 전무하며, 무엇보다도 ‘성해방’적인 문제에 대한 담론에 대해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예언자들의 담론도 거의 전적으로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언 전통은 오늘 우리에게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측면도 적지 않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성서 전통 속의 엘리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임을 드러내려는 용의주도한 노력을 기울였다. 광야에서 활동하며, 낙타털옷, 가죽허리띠 같은 의복이나 메뚜기·석청 같은 음식을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의 엘리야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것은 「말라기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 관련이 있다.

너희는 내가 호렙산에서 나의 종 모세를 시켜 온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과 규정과 계명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서」 3장 22~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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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변화산에서 예수와 엘리야, 모세

여기서 보듯이 엘리야에 관한 대중적 기억은 ‘종말’과 ‘심판’이라는 전통적 인식 코드와 연결된다. 현재에 대한 강력한 부정(否定)이 대중의 열망으로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대중의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켜 종말에 대한 신앙과 연계시킨다.

이것은 예수가 요한의 운동을 계승했을 때, 대중의 기억 속에서 다시 부활한다. 즉 요한의 부활한 몸이 예수라는 대중적 인식은 ‘엘리야=요한’이라는 대중의 믿음과 연결되어, 예수에게서 엘리야를 떠올리는 연상작용을 낳았던 것이다(마르8,28).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처절한 고통 속에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며 절규하는 고성을 지르며 임종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그 소리가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오인했다고 한다(마르15,34~35). 필경 이러한 드라마적 상상력은 예수와 엘리야를 동일시하려는 욕망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미쳐 만들어진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만큼 예수는 동시대에 부활한 엘리야로 인식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깊이 다가갔음이 분명하다. 예수의 실천은 유대 대중의 민중적 상징체계와 맞물림으로써 강력한 대중 전승의 일부를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 동시대의 대중의 문제인식은 엘리야라는 거의 9세기 전의 인물에 관한 기억과 대화하여, 서로를 해석하는 시선이 된다. 엘리야와 예수, 예수와 엘리야. 그리고 민중신학에서 이것은 ‘예수-전태일’의 해석학적 상호작용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제2성서(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 주류 담론들, 특히 라삐적 바리사이즘은 이러한 엘리야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 담론에 대한 그들의 불신과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예수운동과 유대교 주류 담론간의 갈등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대중적 희망과 엘리트주의적 희망 간의 계급적인 상이한 전망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럼에도 주로 묵시적인 유대교의 문서 텍스트 속에 엘리야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서들 속에 예수와 엘리야가 내적인 연계를 갖도록 내용이 구성된 것은 지식 계층 사이에도 대중적 희망의 체계가 일정하게 스며들 수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이슬람교 문헌에서도 엘리야가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엘리야

그렇다면 역사의 엘리야(historical Elijah)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는 정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이였을까? 아니면 실존의 그와는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변형되어(transfigurated) 기억된 것은 아닌가? 역사의 다윗은 매우 억압적인 시대를 연 장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후대의 야훼 신앙사에서 해방의 상징으로 변형되어 대중에게 기억되었다. 반면 모세는 억압당하는 히브리의 해방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야훼 신앙사 속에 도입된 상징이었음에도, 특히 바울의 텍스트 속에서는 억압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재현되었다. 이렇게 이미지의 재현은 변화무쌍한 양상을 띤다. 그렇다면 과연 엘리야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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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도표를 클릭하면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오므리 왕조, 특히 아합 왕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다. 오므리와 아합 왕의 시대는 아마도 팔레스티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토만 보더라도, 요르단 동편의 암몬, 그 남부의 모압, 그리고 에돔과 유다 왕국을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고, 북으로 갈릴래아 북부 지역 끝의 ‘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마스커스 왕국과의 국경인 시리아 남부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상부 갈릴래아의 북단의 단과 하솔, 하부 갈릴래아의 므기또와 이즈르엘,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 등에서 오므리-아합 대에 건조된 거대한 왕궁 및 요새가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나 세련미가 당대뿐 아니라 상당한 후대에까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특출나다. 특히 이 도시들에서 발굴된 지하수로나 마구간의 규모는 이 왕조가 얼마가 강력한 위용을 가진 나라인지를 시사한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샬마네셀 3세(Shalmaneser III, 859 BCE~824 BCE 재위)의 비문에는 아시리아의 서방원정군에 맞서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연합군의 주축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며, 파견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마전차 2천 승과 보병 1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숫자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상당한 규모라는 점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필경 아합의 군대는 평지전투에 관한 한 아시리아의 팽창주의를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므리 왕조에 이르러서 팔레스티나 거의 전역을 통제할만한 강력한 왕조가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흔히 다윗-솔로몬 대의 왕국을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최초의 고대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이해의 근거는 단지 성서의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묘사에서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건립했다는 도성의 보잘 것 없는 흔적을 비롯한 고고학적 증거도 그것을 입증해주지 않고, 외국의 비문에는 전혀 언급조차 얻을 수 없을 정도다. 반면 ‘오므리의 집안’은 외부의 시선에서 남북의 왕조를 통틀어 이스라엘 족속들의 나라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오랫동안(이 왕조가 몰락한 이후에까지도) 기억되었다.

왕궁의 고고학적 흔적에서 드러나듯 아마도 비교적 잘 짜인 관료제도가 성립되었던 듯하다. 왕실에서 대규모의 예언자와 사제 집단을 양성했다는 성서의 묘사를 염두에 둔다면, 관료조직은 군사조직만이 아닌, 많은 이데올로그들의 양성 시스템도 포함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은 국가의 발전에 관한 신학적인 체계화 및 대중화가 상당히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페니키아의 왕녀인 이세벨이 아합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승에는 아세벨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다. 그만큼 이세벨의 상징적 이미지는 아합의 정책에서 중요하다. 성서는 그것을 바알과 아세라 신앙과 관련시킨다. 이 텍스트들에서는 이 왕실신앙을 혼합주의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오므리 왕조의 제국적 발전은 다종족 연합체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고대의 국가들이 영역 내의 종족을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는지를 과장해서 이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시대 국가들은 군사적으로 영토를 통제 관장할 수 있을지언정, 백성의 경험과 기억을 통제할 수단과 능력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또 군사적 통합조차도 지방에 왕 직속의 관료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실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제국 요소요소에 설치된 몇몇 군사요새 정도가 왕의 직속 부대가 배치된 곳이었고, 각 지방의 구체적인 행정 및 일상은 지방 토호 세력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러니 지방 권력과 중앙 권력 간의 비대칭적 동맹의 결과가 고대의 국가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게 적합하다.

물론 오므리 왕조도 예외가 이니었다. 오므리 왕조의 수도가 둘이라는 점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시사적으로 보여준다. 성서는 사마리아 지방의 성읍인 사마리아를 오므리가 돈으로 사들여서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반면 이즈르엘 성읍은, 나봇의 이야기에서 보듯, 토착민의 땅을 강탈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것은 사마리아 건설이 족속간의 계약 전통에 의해 왕권이 행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 이즈르엘은 왕권에 의한 일방적인 강탈 점유를 통해 구축된 도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최근의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두 성도가 한 편은 보다 이스라엘적인 반면, 다른 한 편은 보다 비이스라엘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요컨대 오므리 왕조는 이중수도를 통해 두 유형의 통치를 시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는 야훼신앙의 계약 군주적 전통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제군주적 전통이다.

앞의 ‘표’에서 보듯 이스라엘의 선후대 왕조들은 예언자들의 지지에 힘입어서 왕위를 획득한다. 그것은 대중과의 계약이 왕권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필경 오므리 왕조도 그러한 예언자적 지원을 기대했을 성 싶다. 그러나 바아사, 지므리 등으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군사쿠데타의 상황에서 예언자의 지지는 그다지 정당성을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오므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 티브니를 주축으로 한 세력과의 내란 상황에 빠진 것은 이러한 예언자적 지지의 약한 정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란을 극복한 뒤, 이러한 약한 정당성은 오므리 왕조의 강점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적인 계약 전통에 덜 의존적인 정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왕조는 보다 자유롭게 강한 전제군주적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모색을 할 수 있었다. 오므리가 아들 아합을 페니키아의 왕녀 이세벨과 결혼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가능했다. 그러므로 아합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즈르엘에 왕궁을 건립하고, 그곳을 전제군주적 통치의 기초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합의 혼합주의’ 정책은 종족 연합에 기초한 고대의 국가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오므리 왕조는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이질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한편, 혼합주의 문제는 좀더 복잡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혼합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왜냐면, 혼합주의의 문제는 한참 후대인 주전 5세기 이후 페르시아에서 귀환한 유대공동체가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몇 세기 간의 내적 투쟁에서 만들어진 신학적이고 종족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을 원리주의적으로 추구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공동체의 이데올로기가 성서 편찬에 개입한 결과, 과거의 역사를 ‘혼합’과 ‘순수’라는 틀로 억지로 짜맞춘 데서 성서의 혼합주의에 관한 논의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함’이란 특정한 시기의 역사적 발견물에 다름 아니다. 즉 혼합적인 것은 ‘순수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개념인데, 실제로 순수한 것은 후대의 발견물이고, 그 시선에서 과거의 역사를 혼합주의적이라고 재해석했다는 얘기다. 다만 수만은 이질성들이 서로 경합하고 때로는 조합되고 혼재하기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삶과 의식은 구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바알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다양한 이질성들이 만나 절충하고 혼재한 요소의 핵심에 있다. 아세라 신앙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야훼 신앙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이러한 대전승의 주류에서 약간 벗어난 소수 전통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야훼 신앙이 대전통과 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의 사람들은 대전통에 의존하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소수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적합하다.

여기서 오므리 왕조가 페니키아의 바알 신학을 도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면, 오래전부터 지중해 무역 시장 형성에 뛰어든 페니키아의 문화전통은 보다 사적인 소유 개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능력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방임주의적 관점과 어느 면에서 맥을 같이 한다.

오므리 왕조에 의한 ‘국가의 성공’은 이러한 신학적 발전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대대적인 건조물은 모든 백성에게 그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홍보한다. 또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제의는 그 화려한 전례 행사를 통해 성공주의를 찬양한다. 반면 이러한 국가주의적 신학에 도전하는 자들은 국가의 공공연한 억압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들의 담론 또한 침묵의 늪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제 전 사회는 왕조의 찬란한 성공 신화에 온통 사로잡힌 듯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그 속에서 문법화된 성공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이때 엘리야가 활동한다. 왕조의 이러한 성공의 미학이 한참 활기를 띠던 바로 그 때다. 어느 나라를 점령했다는 전령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연일 들렸고, 그 나라에서 보내온 공납물의 행렬이 계속되는 도로 한복판을 거닐면서, 그는 그 화려한 성공에 문뜩 ‘불편함’을 느낀다.

그에 관한 성서의 묘사는 문학 양식상 ‘전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예수에 관한 담론처럼, 서기관적 저술가들의 지적인 매체를 통해 기억된 것이 아니라, 민간전승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간직되어 온  이야기인 것이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대중의 분노와 희망의 언어로 가득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역사의 엘리야’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열왕기상」 17장의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를 보자. 여기에는 왜 그가 대중적 분노와 꿈의 이야기, 그러한 기억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관한 근거가 슬며시 들어가 있다. 여기서 그가 베푼 기적은 작은이들의 매우 일상적인 고통과 관계하고 있다. 다른 예언자들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기적 같은 것이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큰 메시지를 담고 있는 데 반해, 엘리야의 활동은 이념에 채색되지 않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역경과 그것의 극복 과정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과부와 어린아이가 그의 기적의 수혜자로 나온다는 점은 대중적 고통의 극한에 더욱 가까운 곳에서 그에 관한 애틋한 기억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요컨대 엘리야는 아합 왕조가 추진하던 강력한 전제군주제 정책이 대중의 희생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불편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을 동원하여 왕이나 귀족들이 소농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일이 숱하게 일어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대중으로선 땅을 지키는 일이 너무나 버거웠다. 이런 사회에서 과부나 고아는 무수히 양산되기 마련이고, 그들의 생존권은 전혀 보장될 수 없다. 이런 부의 극심한 편중 현상이 국가주의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고, 페니키아식 바알 종교에 의해 미학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엘리야를 통해 대중에게 속속들이 들춰졌을 것이다. 그의 활동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성공한 정도만큼은 그것이 들춰졌다고 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없다.

가르멜 산은 페니키아와 이스라엘 접경지대에 있는 산이다. 또한 이즈르엘 성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요한 요새성읍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양국의 상이한 종교 전통간의 대립이 빈번한 지역이기도 했고, 이 점에서 이 지역의 상징성은 단순한 장소의 점유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넘어선다. 아합과 이세벨은 아마도 이곳에 바알신앙을 기리는 신전을 세웠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야훼신앙이 그 하위에 포섭되어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전혀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되게 하는 장치를 포함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대규모의 승려들이 국가제의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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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가르멜 산 사건 이후 엘리야는 도망자가 된다

그런데 엘리야는 대중을 선동하여 이들을 몰살한다. 성서가 묘사하듯 천 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학살극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실상은 훨씬 소소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이 거사가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벨의 공권력에 그는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유다 남부 네겝 지역인 브엘세바로까지 도주해야 했다.

먼 길을 달음질하느라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더욱 그를 좌절시킨 것은, 그토록 열망해마지 않던 새 세상에의 희망이 좌절된 것이리라. 차라리 죽여 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은, 아마도 엘리야보다 더욱 절망했던 대중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중은 엘리야를 기억하면서 가르멜에서의 실패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의 기억은 엘리야에 관한 전승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가 천사에 이끌려 호렙으로 간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혁명적 거사 실패와 그에 따른 절망에 사로잡힌 상황을 극복하는 대중의 자존적 지혜를 담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호렙 산에 이른 엘리야는 야훼의 계시를 받고자 했다.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갈망하는 자의 몸부림으로 말이다.

그때 엄청난 바람이 휩쓸고 지난다. 모세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과연 야훼의 임재를 체험할 만한 기세다. 그러나 야훼는 거기에 없었다. 이윽고 온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일었다. 이 세상의 최고 지배자이신 야훼의 발소리에 놀란 땅의 요동이기라도 한 양. 하지만 여전히 야훼는 나타나질 않는다. 도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일이 더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갑자기 불길이 치솟는다. 그래, 이제야 말로, 야훼가 나타나시나보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야훼는커녕 송사리 귀신도 보이질 않는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야훼는 바알에게 졌단 말인가? 바알이 더 강한 신이란 말인가? 세상은 악이 지배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민중의 해방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인가! .........

그때였다. 솔바람이 스치듯이, 세미한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슬쩍 건드리고 지나간다. ‘엘리야,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광풍에도, 지진에도, 천길 불꽃 속에서도 없던 신이..., 아 이런, 그렇구나.’ 엘리야는 야훼의 임재가 이렇게 오는 듯 마는 듯 다가오는 것임을 비로소 발견한다. 천지를 진동시킨 혁명적 대사건에서가 아니라, 미세한 일상 속에서 감각 세포들을 살며시 건드리며 다가오는 것, 밖에서 오는 것인지 안에서 발아하는 것이지도 모르도록 다가오는 것. 천지와 자아가 합류하는 곳, 바깥에서 흘러오는 물과 안에서 솟아오른 물이 어우러져 뒤섞이는 곳, 나와 신이 아와 타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합체되는 곳,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하는 것이라고.

대중은 엘리야 이야기를 통해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불편해하는 예언자적 감수성에 공감한다. 동시에 그의 이야기에는 혁명적 이념의 이데올로기가 담고 있는 또 다른 성공주의에 대한 불편함이 스며 있다. 바로 여기에 가르멜 실패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간직하는 대중의 니힐리즘적 지혜가 되살아난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런 시간의 법칙에도 굴복하지 않는 엘리야를 기억하고자 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이러한 믿음은 그가 언젠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소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대중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증폭됐다. 후대의 역사에서 그는 메시아 왕국 도래의 상징으로 기억됐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 왕국이 또 다시 저항의 성공주의에도 물들지 않는 전통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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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불수레 승천 이야기이다.

영웅적 예언자는 없다. 오직 그것을 부정하는 예언자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엘리야, 그는 칼을 든 예언자다. 그는 혁명가다. 그러나 성공한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실패했다. 그리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줄 틈도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긴급히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대중은 바로 그 실패 때문에 괄호 쳐진 후속의 이야기를 채워 넣어야 했다. 성서는 엘리야의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시킨 대중의 기억술의 단초를 보여준다.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실패로 말미암아, 대중에게 실패는 곧 더욱 온전한 성공의 흔적임을 알려주었다. 대중은 엘리야로 말미암는 온전한 성공의 담론을 창조하는 주역으로, 곧 ‘민중’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그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고 그의 뒤를 추종함으로써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사건을 통해 단박에 확보되는 그런 성공의 파노라마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성공과 약간의 실패가 끝없이 교차되는 가운데 되는 듯 마는 듯 만들어지고, 끝없이 지양되면서 펼쳐지는 일상적 사건의 연쇄이다.

영웅은 없다. 메시아도 없다. 그러한 성공의 화신으로서의 ‘영웅/메이사/신의 죽음’에 관한 예언자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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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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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우
    2009.05.08 11: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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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재밌네요! 좋은 글과 묵상, 감사드립니다.
  2. 이상철
    2009.05.20 02:1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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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이후 데리다는 자신의 이론적 성찰 deconstruction을 구체적 영역에서 (종교와 윤리, 정치분야)에서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종교담론을 묶어 편찬한 책이 Acts of Religion(2002)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한마디로 데리다의 종교론을 요약하는 문장이 the messianic, or messiancity without messianism,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데리다는 벤야민과 만나고, 후기 데리다는 그런 의미에서 초기에 그가 레비나스와 대결했던것과는 달리 레비나스를 많이 닮아갑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그런 (후기) 데리다가 떠올랐습니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 엿보기, 관음증,희망,지연, 연기, 미끄러짐...무엇이 적합한 표현인지는 여전히 남겨진 숙제입니다)

기묘한 대칭, 이명박과 여호야킴 그리고 미네르바와 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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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피투성이 남자는 쇠사슬이 묶인 맨발로 예루살렘 거리를 난폭하게 끌려 다닌다. 병사들이 살벌하게 도열하고 있는 광장에 도달하자 또 다시 고문이 시작된다. 형틀에 묶고, 곳곳이 상처투성이인 몸에 다시 칼로 난도질을 한다. 그리고 채찍질이 이어진다. 칼날에 뜯겨나간 피부는 채찍이 닿자 허공으로 핏물이 흩어져 나간다. 고통에 죽을 듯 고성을 지르던 남자의 소리가 사그라든다. 죽은 듯 축 늘어진 몸둥이로 찬물 한 바가지가 퍼부어진다. 가늘게 뜨인 눈을 확인하자 다시 채찍질이 시작된다. 핏방울이 튀어, 형리의 상체를 벗은 몸둥이, 팔뚝,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어 마치 지옥의 사자처럼 보인다. 형틀에 묶인 남자의 몸둥이는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헤어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더 이상 깨어나지 않는다.

‘그가 죽었다. 그가 죽었다. 그가 죽었다.’ 형리가 소리치고, 광장 곳곳에 도열한 병사들 앞의 전령이 백성을 향해 소리친다. 그리고 백성들이 수근대며 어떤 이는 크게 또 어떤 이는 나지막하게 소리친다. 군대의 나팔수가 째질 듯 죽음을 고시하는 음을 내고, 고수들의 난장 같은 북소리가 이어진다. 광장에 운집한 군중 모두에게 그의 죽음은 이렇게 고지된다. 그리고 순식간에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의 목을 잘라 광장에 걸어놓고 시신은 키드론 골짜기에 내던져버린다.

여호야킴 왕이 즉위한 지 몇 달이 안 된 시기에 벌어졌던 한 사건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로 재현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연도로 표시하면 아마도 그가 즉위한 주전 609년 9월부터 이듬해 초 사이에 발생했던 사건이다. 왕은 집권한 직후부터 이렇게 자기를 반대한 자를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어떠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처형당한 남자는 우리야라는 이름의 예언자인데, 그에게 붙여진 죄목은 야훼의 예언자를 참칭하여 왕을 비방하고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을 호도하였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단 네 개의 절(26,20~23)로 압축되어 묘사된 내용에 따르면, 검거령이 내리자 우리야는 이집트로 도주하였고, 왕이 파견한 관리에 의해 압송되어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주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기럇여아림 사람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였다. 그도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으로, 이 도성과 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하였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이, 자기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과 함께 그의 말을 들은 뒤에, 그를 직접 죽이려고 찾았다. 우리야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그러자 여호야김 왕이 악볼의 아들 엘라단에게 몇 사람의 수행원을 딸려서 이집트로 보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우리야를 붙잡아 여호야김 왕에게 데려오자, 왕은 그를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공동 묘지에 던졌다.

이집트 운운하는 얘기를 표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행보는 모세를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던 대중이 그렇게 기억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곧 그에 관한 대중의 기억의 진실은 제2의 모세를 잔혹하게 처형한 왕이 모세, 곧 야훼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해마지 않던 조상이자 영웅을 해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반체제적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이 훗날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집을 만들던 일부 지식인 집단에게 수집되어 간략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선포했다는 ‘재앙’에 관한 신탁에 주목해 본다. 말했듯이 이때는 여호야킴 왕이 즉위한 직후다. 당시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했던 시기다. 결과만 간략히 말하면, 왕국이 처음으로 번영을 구가하였다가 국제정치로 인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때 즉위한 왕인 여호야킴의 정책은 결국 국가를 회복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 이후 20년 만에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그의 정책은 한 나라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으며, 그 변란 중에 백성들이 겪었던 뼈를 깎는 아픔의 직접적인 원인일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겠다. 그로부터 100년 남짓 거슬러 올라가면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번영의 시대가 도래한다. 그때는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패권국가의 하나였던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여(주전 722년), 수많은 유민이 남하하는 일이 벌어졌다. 황량한 산악지대에 위치한 유다 왕국[각주:1]에는 갑자기 인구가 몇 배나 늘었고, 당시의 통치자인 히스키야 왕(주전 727~698년)은 이들을 수용하여 남아돌던 비경작지역을 개간하여 왕실 사유지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아마도 거기서 발생한 수입으로 도성에 왕궁 및 사회적 공공시설을 건립함으로써 부유하던 유휴노동력을 사회적으로 흡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족화하던 귀족은 견제되었고, 대중은 왕실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주체화되어 유다 왕국은 비로소 강력한 왕권제 사회로 정착하게 된다. 국가발전과 계층균형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오늘 한국의 MB 정부의 ‘대운하 정책’이나 ‘4대강 살리기 및 주변정리사업’으로 표상되는 이른바 ‘녹색뉴딜 정책’이 건설규제완화와 부가가치 창출이라는 건설재벌과 실질구매력 있는 부유층에 치우친 정책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위와 같은 히스키야의 정책은 보다 진정한 뉴딜의 고대적 버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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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조형 = 손문상 화백)

아무튼 이때에 유다 왕실은 문서활동이 본격화되었고, 귀족계층으로 이루어진 구관료층 대신 ‘서기관’이라는 신흥관료층이 대두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역사가 쓰이고 왕실신학이 발전하게 된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히스키야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시리아에 의해 히스키야 왕은 사실상 무력화되고 그를 승계한 므낫세 왕(주전 697~642년) 시대에 귀족당파적 반개혁의 시대가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므낫세를 계승한 아몬(주전 642~640년)이 궁중암투에 의해 살해된 뒤, 히스키야 당시 굳건히 왕당파로 편입된 민중세력인 암하아레츠(땅의 사람들)가 주축이 되고 서기관과 왕실사제 층이 가담한 쿠데타로 요시아 왕(주전 639~609년)을 등극케 함으로써, 다시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다. 개혁이 본격화된 기간이 재위 십여 년이 지난 뒤이니 실제로 개혁이 진행된 시기는 채 20년도 못되지만 상당한 성과가 있었음이 고고학적으로나 문헌적으로, 특히 성서 문헌 속에 반영되어 있다.

요시아 개혁은 아시리아에서 바벨로니아로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구조가 변동하던 이행기에, 하여 팔레스티나에 우연히 찾아온 권력의 공백기에 전개된다. 한데 이집트가 아시리아와 공조하기 위해 북진하는 과정에서 그 노선에 포섭되지 않는 요시아의 유다 왕국을 공격하여 왕을 처형함으로써 이 개혁은 다시 위기에 빠져든다. 이때 민중당파에 의해 옹립된 여호아하스(주전 609년)는 폐위되어 이집트로 압송당했고, 친이집트적 귀족당파가 옹립한 여호야킴(주전 609~598년)이 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와 아시리아 연합군은 주전 604년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갈그미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하여 바야흐로 바벨론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우리야의 재앙 선포는 바로 이 시기 직전인 609/8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 시기에 여호야킴은 친이집트 노선과 반개혁주의-귀족주의 노선으로 집권한 정부의 상징적 우두머리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책이야말로 위기에 놓인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중세력의 반대가 격렬했음은 당연한 일이겠다. 우리야의 신탁은 바로 그런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여호야킴 왕은 요시아의 정치가 위기를 초래했다고 믿었고, 자기의 정치가 위기를 타개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다고 확고하게 믿었던 듯하다. 또 귀족세력을 위시한 보수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지지했다.

한데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세력의 견해가 타당한지를 진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반대 견해를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왕은 즉위하자마자 반대주장을 펴는 이들의 상징적 존재 하나를 처벌함으로써 자기의 단호함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예레미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개혁지지파인 서기관세력의 비호 덕이었다(“예레미야는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보호하여 주었으므로, 그를 죽이려는 백성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6,24). 아무튼 왕은 반대를 설득하기보다는 처벌함으로써 자기의 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이명박 정부를 그런 점에서 주목한다. 민주적 개혁의 시대는 지났다. 한국의 민주적 개혁은 성공적인 것도 있었고 위기를 초래한 것도 있었다. 아무튼 대중의 다수는 더 이상 민주적 개혁에 우호적이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내적으로는 그의 보수주의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책에 대한 강력한 반대와 관련이 있고, 외적으로는 지구적 제국 시스템의 균열로 인한 위기다. 최근 그것은 지구적 자본의 위기로 표출되고 있다. 생산능력을 압도하는 소비욕구로 충혈된 세계를 구축한 자본이 초래한 위기다. 그리고 그런 위기에 취약한 나라들부터 위기는 표출되고 있으며, 한국은 바로 그러한 위기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의 하나다.

당연히 정부의 위기 대응 정책은 중요하다. 시민운동권과 학계에서 다양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사회의 집합행동과 넷공간에서의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는 것은 위기의 강도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겠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의견들의 다수는 정부의 전략이 파국에 직면한 사회를 더욱 위기에 노출되게 한다는 문제제기들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이러한 반대에 대해 위협하고 처벌하는 방식을 고수했고 점점 더 강화하고 있다. 또한 자기들 식의 전략을 적당한 대화나 설득의 공론 과정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위기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말이다. 하지만 실은 이들이 밀어붙이는 전략은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는 본래부터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실용’이라는 정부의 자기 원칙은 실종되었다. 또한 반대를 양산하고 있다. 반대를 강압적으로 대했던 여호야킴의 전철을 정부는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재앙을 불러오는 진짜 이유임을 증언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여기서 나는 익숙한 표현인 ‘남왕국 유다’, ‘북왕국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않고, ‘유다 왕국’, ‘이스라엘 왕국’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전자는 유다가 남쪽에 위치하고 이스라엘이 북쪽에 위치한 나라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리적인 친절함이 있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마치 팔레스티나에 두 개의 나라만 존재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점에서 유태 중심주의를 함축하는 표현인 셈이다. 이는 오늘날 팔레스티나 지역의 주인이 역사적으로도 유태인이라는 날조에 가까운 역사관에 무의식적으로 공조하는 문제를 내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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