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방문 답사기
: 거리의 몰락, 기억의 종말, 그리고 MB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7월 한달 간 한국을 방문했다. 2년 만에 찾은 조국은 정권이 바뀌어 있었다. 용산에서는 사람들이 불타 죽어갔으며, 전 정권의 대통령은 현 정권의 표적수사에 심한 모멸감과 자괴감에 빠져 자살했다고 누군가 내게 귀띔해 주었다. 내가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기간에도 방송법이 국회에서 한 바탕의 볼거리를 제공하며 통과되었고, 쌍용자동차 사태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살한 전직 대통령의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도 가보고, 용산참사가 일어났던 그 서글픈 건물에도 가봤는데 사람들은 모여있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이 정도의 메머드급 사건들이 줄줄이 터졌더라면 뭔 일이 일어나도 벌써 일어났을텐데. 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무일 없다. 그래, 우리는 이제 그렇게 아무일 벌이지 않아도 꾸역꾸역 살 수 있게 되었다. 잘된 일이다. 하지만 한번 물어나 보자, 그 동안 무엇이 달라진걸까? 내가 서울에 와서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이었다.

로보트 태권 V, 광화문 사거리에서 길을 잃다

과연, 서울은 달라져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현 대통령의 서울시장시절 업적이라는 청계천을 잠시 둘러보고 찾은 인사동은 현대와 고전이 조화된 어울림으로 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고전과 현대 그 어느 것 하나 살아남지 않은 동떨어짐으로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세계화된 거리 인사동, 그곳 스타벅스 매장 간판은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쓰여져 있었다. [스 타 벅 스 커 피] 라고 말이다. 전통을 고수하려는 그 피맺힌 절규와 숭고함에 하마터면 눈물이 날뻔했다.

인사동을 끼고 있었던 피막골은 도심정비 사업때문인지 정리중이었고, 창경궁부터 시작해서 인사동 윗길을 지나 광화문으로 이르는 고즈넉한 그 길도 공사중이었다. 광화문 사거리는 무슨 광장을 조성한다는 팻말이 크게 붙어있었는데 머지 않아 완공된다고 한다. 지금쯤이면 완성이 되었으려나. 광화문광장 조성공사를 보며 광장 콤플렉스에 걸려있는 현 정권의 마스터베이션 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은 왜일까? 이렇듯 내가 살짝 돌아본 서울은 온통 파헤쳐져 있었다. 도시전체는 뉴타운 열풍으로, 대학은 경쟁력 있는 대학을 모토로, 거리 거리는 세계화된 도시에 걸맞게 요소요소에 스타벅스와 멀티플렉스 극장을 배치시키며 발빠르게 공사중이거나 그 변신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서울을 돌아보고 난 제주도로 내려갔다. 부모님이 그 섬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제주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3학년이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왔다. 30년 만에 찾은 제주도 역시 변해 있었다. 관광코스를 개발하고, 해안을 따라 도로를 조성하며, 한라산 산간에 골프장을 건설하여 관광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야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도심은 30년 전과 비교 할 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지 2학년이었는지 확실히 기억은 안 나는데, 김청기 감독의 ‘로버트 태권 V’를 보러 갔던 극장이 여전히 남루한 채 보존되어 있었다. 그날 ‘로보트 태권 V’를 보고 하늘을 날아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표준전과와 동아전과를 사러 갔던 동네 어귀 ‘남문서점’도 그대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자식들에게 표준전과나 동아전과 한 권 사주는 것으로 부모님들의 1년 사교육비 지출이 끝이 났던 말도 안 되는 세상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저녁 먹고 나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했었는데, 술래가 손등에 이마를 대고 주문을 외우던 건물 대문 위엔 ‘제주소방공사’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그 곳은 아직도 영업중이었다. 아버지에게 ‘제주소방공사’ 끝에 붙어있는 ‘공사’가 ‘한국방송공사’ 끝에 붙어 있는 ‘공사’와 같은 것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뭐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웠다.

아버지가 나를 가끔 데리고 갔었던 다방이 도심 한가운데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친구분과 계란이 떠 있는 쌍화차나 다방커피를 드셨고, 내게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시켜주셨다. 난 그곳에 있었던 커다란 어항 속 금붕어 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여행 기간 중 밤길 제주를 걷다가 발견한 불이 켜져 있는 30년 전 그 다방의 간판이 왜 그리도 나의 마음을 환하게 하던지. 다음날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거리의 몰락, 기억의 종말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조국의 무엇이 달라진걸까?  2년 만에, 아니 미국으로 유학간 지 5년 만에 찾은 서울의 무엇이 달라진걸까?  거리가 달라졌다. 동네가 변해 있었다. 정권이 바뀐 것 보다 내가 놀던 동네와 내가 활보했던 거리가 달라졌다는 것이 내게는 더 어색했다. 무작정 ‘그때 그 거리를 기억하십니까? 그때가 좋았죠’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 큰 거리로 나가야 하고, 더 큰 세상으로 진출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씁쓸한걸까?

거리와 동네가 사라지고 달라진다는 것은 이름이 없어지고 기억이 상실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제 예전 거리의 이름과 옛날 동네어귀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회상하는 것에 대해 낯설어하고 불편해한다. 그곳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미끄러져 들어가 앉은 피막골에서 가뿐 숨을 몰아 그날의 전과를 과장하며 마시던 막걸리와 석쇠 위에서 구워지던 고갈비를 이제는 그 거리에서 먹을 수 없다.

인사동의 혹은 신촌의 어느 선술집에서 김광석이나 해바라기가 불렀던 노래들을 낮게 읊조리는데, 한 친구가 ‘지금이 그런 사랑타령이나 하는 노래를 부를때냐? 너 같은 뿌띠 부르조아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며 나를 몰아친다. 나도 열 받아 ‘변혁에 참여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면 안 돼냐구. 혁명이 식어버린 심장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면 난 기꺼이 빠지겠다’며 고래고래 티격태격 각자의 진정성을 알아달라고 우겨대던 철없고 유치했던 그 시절! 그때의 거리와 그 당시 동네가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서 함께 놀던 사람들까지도. 그래서 불안하다.

혹시, MB가 민중들이 지니는 기억의 매커니즘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마다 4월과 5월 그리고 6월이 되면, 거리와 광장에서 출렁이며 메아리 쳐졌던 민중들의 율동과 함성 안에 감추어져 있는 봉기의 기억과 그 기억의 반복이라는 매커니즘을 말이다. 그것이 지니는 파괴력을 성실히 학습한 후 그것에 대처하는 자세를 MB가 이미 터득한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가 우선적으로 민중들이 지닌 기억의 연쇄고리를 하나씩 절단하기로 작정을 했고, 그 잘려나간 지면을 잘 다지고 정리하여 새로운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새롭게 조성된 광장과 거리에서 제한적으로 뛰어 놀게 하고, 폼 나게 단장된 동네에서 세계시민이 되어 촌티내지 말고 세련되게 그 문화를 향유하라고 다독이고 있다면 말이다.

다시 보자, MB!

점점 발전하는 터미네이터나 에어리언처럼 MB정권은 많은 실험과 시행착오와 학습을 거쳐 이제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트랜스포머와 같이 진화한 정권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한국 방문 기간 내내 스멀스멀 올라와 기분이 엿 같았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MB 정권을 향해 실소와 비웃음, 격멸에 찬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한 달 가까이 그가 다스리는 땅을 밟으면서 그의 진정성을 느끼며 그가 결코 호락 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깨닫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원칙과 소신을 강조했는데, MB는 노무현보다 훨씬 더 자신의 원칙과 소신에 철저하다. 노무현이 걸어갔던 정치·문화적 행보와 경제적 측면간의 행보가 갈지자였다면, MB는 정치, 경제, 문화적 정책 어느 것 하나 흔들림 없이 수미일관 하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전혀 동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MB는 노무현 보다 훨씬 더 자신의 원칙과 소신에 철저하다. 무엇보다 이 정권이 악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깨우고 부추긴다는 점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뱀과 같다. 우리의 ‘이드’와 우리 ‘에고’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MB에게, 당신의 리비도에 충실해도 괜찮다고 국가가 그것을 보장하겠다고, 그러니 당신의 욕구를 구태여 ‘슈퍼 에고’를 작동하여 다스리려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해주는 MB의 속삭임 앞에 우리가 모두 못 이기는 척하면서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우리를 멈춰 서게 했고 모이게 했던 ‘민주’와 ‘통일’, 우리를 춤추게 하고 고함지르게 했던 ‘평등’과 ‘인권’, 우리를 울게 하고 웃게 했던 ‘정의’와 ‘자유’라는 강력한 ‘슈퍼 에고’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 하나하나의 기억이 서려있는 우리의 거리와 광장과 동네를 MB가 집요하게 파헤치고 뒤엎어 고쳐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사들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욕망의 눈덩이를 끊임없이 증폭시켜야 한다는 압박이 MB정권을 유령처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뉴타운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어 사람들의 ‘이드’을 한껏 부풀리고, ‘영어공교육’이다 ‘특목고’다 하면서 자식들을 볼모로 부모로서의 ‘에고’에 어떻게 하면 충실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차라리 표준전과와 동아전과 하나로 자녀교육이 모두 해결되던 우리 부모 세대가 더 행복했는지 모르겠다). 세계화된 경제시스템 아래에서 전통적인 고용정책과 경제운영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기업마다 구조조정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면서 노동시장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경제가 살아난다. 그러니 언제 잘릴지 모른다. 미리미리 자기 앞길, 자기 밥벌이 잘 챙기고 미래를 위해 긴 안목으로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잠시 한눈 팔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러니 열심히 뺑이쳐라. 그래야 살아남는다. 명심하란다. 그것이 이 시대의 정언명법임을.

에필로그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악몽에서 깨어난 느낌이다. 이명박이 다스리는 땅에 내가 없다는 안도감과 이명박이 다스리는 땅을 내가 떠나있다는 면목없음이 널을 뛰는 요즘이다. 몇 년후 내가 돌아갈 때쯤이면 서울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로보트 태권 V’는 지구를 잘 지키고 있을까? 제주에 있는 ‘남문서점’과 ‘제주소방공사’는 무사할까? 우리가 정말 대단한 놈을 만난 것일까? 별것 아닌데 내가 너무 오바하나? 어쨌든…

두 눈 똑바로 뜨자.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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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양
    2009.09.08 14:4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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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목락" "기억의 상실" 대단히 묵직한 화두입니다. 이번 한국 방문이 아마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정신이나 이념보다는 물질적 풍요를 위해 내 달리는 한국의 현실을 꿰뚫는 화두인 것 같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우트 : 자명한(doubtless) 것을 의심(doubt)하라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다우트(doubt)’.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의 제목이다. 유명한 연기파 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플린 신부 역)과 메릴 스트립(알로이시스 수녀 역)이 열연했다는 것이 무색하게도, 올해 초 개봉했던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그러니 이 영화가 ‘망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블로그나 여러 인터넷 글들을 살펴보니 그 반응이 흥미롭다. 마치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 일종의 합의가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본 영화평들의 공통점을 요약하면, 애초부터 잘못된 믿음에 근거해 누군가를 의심(doubt)하던(유죄를 확신하던) 원장수녀가 결국 자신의 확신을 회의(doubt)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청년부 사람들과 이 영화에 대한 인상을 함께 이야기했을 때 나왔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대다수 사람이 이 영화를 읽는 방식에 일종의 ‘합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꼭 ‘오버’는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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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은 의심할 필요 없이 자명해(doubtless) 보이는 ‘교훈’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라는 단어를 ‘삶’이라는 단어로 바꿔 보면,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수용하고 있는 삶의 전제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는지, 그리고 그 전제들을 성찰하지 않는 것이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지 사유할 수 있는 단초를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플린 vs. 알로이시스, 당신은 누구에게 끌리는가?

이 영화의 스토리 전개를 끌고 나가는 주된 동력은 한 카톨릭계 학교에서 벌어지는 주임신부 플린과 원장수녀 알로이시스의 갈등과 대립이다. 이들의 갈등은 새내기 수녀 제임스가 자신이 목격한 플린 신부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원장수녀에게 고백하면서 수면 위로 부상한다. 제임스 수녀는, 수업 중 도널드 밀러를 사제관으로 불렀던 주임신부가 도널드의 속옷을 사물함에 갖다 놓는 것을 목격하고 원장수녀에게 이를 이야기한다. 도널드가 사제관에 다녀온 후 ‘겁에 질린 듯 이상한 자세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술냄새가 났다’는 의혹 혹은 의견도 이야기에 덧붙여졌다. 제임스 수녀의 말을 듣고 ‘이제야 확실한 것을 잡았다’고 확신한 원장수녀는 주임신부를 ‘권력형 아동성추행범’이라 단정 짓고 그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임신부가 ‘설마 이렇게 좋은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을 만큼 타인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말과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반면, 원장수녀는 주임신부와 대조적으로 말과 행동이 차갑고 권위적인, 한마디로 ‘비호감’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의심을 증명할 ‘직접적’ 증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도 않는다. 비호감 원장수녀가 ‘증거’도 없이 호감형 주임신부를 몰아붙이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기본 얼개이다. 원장수녀의 ‘쥐몰이’같은 공격에 질린 주임신부는 마치 자신이 큰 양보를 하듯 학교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학교를 떠난 주임신부는 더 좋은 직위로 ‘승진’해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원장수녀는 “나에게 (믿음에) 회의가 생겼다”는 절규를 한다.(그녀는 ‘진실은 승리한다’는 믿음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결부시키고 있었던 듯하다.)

이 영화는 절묘한 대사의 배치와 장면 구성으로 인물들의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으므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의 느낌을 도저히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정식화하는지를 보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정식화하는 가장 흔한 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편들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방식은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의 갈등관계에서 어느 쪽이든 한쪽이 ‘옳은 편’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영화의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 영화는 원장수녀의 의혹을 정당화해줄 증거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원장수녀는 터무니없는 의혹을 진실인 양 여기며 엄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인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블로거들이 자신의 영화해석을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오버랩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쉽게 확인된다. 한 블로거는 미네르바 사건과 용산참사를 예로 들며 이명박 대통령과 경찰 등이 보이는 행태를 원장수녀의 그것과 동일시하고 ‘도덕적 확신범’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했던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는 한국 보수세력의 터무니없는 태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편들기’가 실패하는 지점

그런데 사실 영화에서 제시된 ‘불충분한 증거’를 문제 삼는다면, 의혹을 제기한 원장수녀만 비난할 수는 없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의혹의 당사자인 플린 신부도 자신의 결백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보이는 몇몇 태도는 그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원장수녀의 면담 요청으로 학교를 방문한 도널드의 어머니(밀러 부인)를 보고 긴장하는 장면, 알로이시스 수녀가 플린의 예전 교구 수녀에게 그에 대해 묻기 위해 전화를 했다는 말을 듣고 ‘왜 주임사제가 아니라 수녀에게 전화했냐’며 흥분하는 장면, 알로이시스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다그치자 ‘수녀님도 죄를 지은 적 있으시죠?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라고 딴소리 하는 장면 등이 그 예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나 플린 신부나 모두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우리는 명확하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편드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도 쉽게 정당화될 수 없는 읽기 방식인 것은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영화를 다시 살펴보면, 이 영화는 오히려 애초부터 특정한 이를 편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이 영화가 은유와 생략을 무수히 나열하는 방식으로 장면들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원장수녀와 제임스 수녀의 대화, 원장수녀와 주임신부의 논쟁, 원장수녀와 밀러 부인의 대화 등에서 대화의 주체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명확하게 지칭하기를 회피하며 끊임없이 은유적인 표현과 암시들을 나열한다. 가령,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의 혐의가 ‘권력형 아동성추행’임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밀러 부인도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는 식이다. 오히려 자신의 결백을 정돈된 언어로 명확히 지칭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알로이시스가 플린에게 두는 혐의는 더 짙어진다. 때문에 이 영화 속의 대화들은 의미를 고정시키고 의사소통을 순조롭게 하기보다는 모호함만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들의 대화나 표정, 몸짓 등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의 경향성 안에 포섭된다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의미의 공백을 만드는 방식으로 서사가 구성되나, 영화를 보는 이는 그 공백을 채우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해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를 채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편들기’를 하게 된다.

‘호감=진실’ vs. ‘비호감=거짓’ 구도 뒤틀기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영화가 초반 장면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호감 vs. 비호감’과 ‘옳은 것 vs. 그른 것’의 배열을 의도적으로 교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앞부분은 알로이시스와 플린의 갈등이 시작되기 전 이들이 각기 어떤 캐릭터인지를 묘사하는 데에 치중하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 교차하며 두 인물에 대한 묘사가 대립되는데, 두 인물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기 전까지 전개됐던 장면에 편의상 이름을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플린의 강해>-<등교 시간>-<교실>-<수녀들의 식사>-<학생 식당>-<교실>-<농구장>-<신부들의 식사>. 이러한 배열 이후 알로이시스는 자신과 플린의 대립을 ‘진실 대 거짓’의 구도로 보고 플린이 은폐하고 있는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표독스럽게 몰아간다. 반면 플린은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진실의 자리에 있고 알로이시스가 거짓의 자리에 서 있다고 항변한다. 아마 위에서 이야기한 장면들 중 <신부들의 식사> 장면이 없었다면 플린의 시각으로만 이 영화의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별 문제가 없었을 수 있다. <신부들의 식사> 장면은 핏물 흐르는 고기를 탐욕스럽게 먹으며 뚱뚱한 모녀에 대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플린과 두 명의 나이든 신부를 담고 있다. 장면 배치 속에 호감=플린, 비호감=알로이시스의 순서를 분명하게 지켜오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 장면은 분명 이물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이물질 같은 장면 때문에 우리는 ‘부당하게’ 누군가를 편들지 않고도 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로이시스 수녀가 부당한 의혹을 전제로 한 신부를 괴롭혔으나, 결말에서 플린 신부가 오히려 승진이라는 보상을 받고 알로이시스는 자신의 확신에 회의를 품게 된다고 보는데,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플린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엇이 ‘사실’인지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서로 자기가 옳다며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한쪽의 주장에 쉽게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이 진실일 가능성은 거의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무서운 상상을 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플린은 이곳저곳 자신이 옮겨온 곳마다 거기서 따돌림 당하기 쉬운 아이를 보호하는 척하며 사실은 성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권위적이지 않고 사교적이며 언변도 좋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윗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평소 비호감이던 한 수녀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플린이 성범죄자라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 사람들은 그 수녀를 더 미워하게 되고 나아가 그녀를 학교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플린을 지지하는 사람이 바로 ‘나’일 가능성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공감의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죽임의 질서’

<신부들의 식사> 장면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가 이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에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우리가 내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들은 우리에게 내면화된 ‘선호’ 또는 ‘공감’의 체계와 칼로 자른 것처럼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가 옳다고 굳게 믿고 했던 행동들을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아보면 그다지 일관성 있지도 않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지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일관성 있게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우리의 ‘올바른 행위들’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플린 신부의 시선을 빌려 현 정권과 보수세력의 아집과 편견을 비판하며 그들을 ‘적’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이 내면화한 아집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위들은 이 사회 보수층의 ‘아집과 편견’을 옹호하고 있다. ‘뉴타운’과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혹은 정책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같은 편’들은 광우병에 반대하며 ‘미친소, 너나 처먹어’라는 공통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말을 따라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기도 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지못미’를 부르짖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편’들이 마치 용산참사는 ‘그런 일이 있었나’ 생각하는 듯 조용하다.

이 글의 논지를 이해하는 이라면, 지금 용산참사를 언급하는 것이 단순히 용산참사 현장에 나가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할 것이다. 또한 이 글의 목표가 현 정권과 보수세력의 편에 서서 그들에 대한 비판에 반비판을 하거나,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에게 편드는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도 이해할 것이다. 요점은, 상대가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을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세대, 계급, 이념적 성향의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사람마저 그에 대한 추모 의례에 참여했던 것을 돌이켜볼 때, 세대, 계급, 이념, 이해관계 등을 기준으로 나뉜 ‘적’은 ‘나’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적과 동지의 명백한 대립이 은폐하는 ‘공감의 체계’, 그 공감의 체계가 있기 때문에 작동하는 ‘죽임의 질서’, 그리고 죽임의 질서에 ‘공모하는 자로서의 나’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까지 이르지 않는 한 ‘참사’는 계속될 것이다.(‘참사’의 의미는 여러분 각자가 채우시라. 우선 나는 그 자리에 ‘이명박 정권’을 두겠다. 바꿔 말하면, ‘이명박 정권’은 ‘적’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참사’(=사건)이다.)

결론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가 자신의 패배에 절규하는 장면을 보며 통쾌함을 느낄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서사를 모호하게 하고 교란하는 그 지점에 착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굳게 믿는 ‘편들기’의 기준들이 어느 지점에서 교란되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 우리가 죽임의 질서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 구원과 해방의 과정인 것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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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열매실
    2009.07.22 17: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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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어내려 가면서 "공감"이 갔다, 안 갔다 했는데,
    "마지막에 엘로이시스가 자신의 패배를 절규하는 장면"이라는 지점에 와서는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본 바로는, 엘로이시스의 마지막 대사는
    "나는 너무 의심스러워!"였던 것 같습니다.
    (명확하진 않지만 그런 뜻이었다고 봅니다.)
    여기서의 의심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이 말이 많은 것을 내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이 어떤 사람의 편에 섰느냐에 따라서
    엘로이시스 자신의 확신이 될 수도 있고
    플린 신부의 행동일 수도 있고, 둘 다 일수도 있겠지요.
    심각하게 말하면 옳고 그름, 윤리와 비윤리 혹은
    자신이 절대화하고 있는 신앙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엘로이시스 비호감, 플린 호감이라는 구도도
    내키지 않습니다.
    겉보기에 냉정하고 완고한 종교인 같지만
    적어도 엘로이시스는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고자 했고
    자기 나름의 정당한 절차를 밟으려 했습니다.
    플린 신부에게 직접적으로 물었고, 아이의 어머니에게 충고했으며
    플린 신부의 직설적인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서 해야 할 바를 한 것이지요.
    플린 신부가 부드럽고 따뜻하고 원장 수녀에 비해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 중요한 식사 장면'에서 보듯이
    비만하지만 단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기가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는 약자처럼 보이지만, 남자의 특권인 강론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왜 신부에게 묻지 않고 수녀에게 물었느냐고
    따지기도 하고, 너는 죄 지은 것이 없느냐고 강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신부들의 회의를 통해 영전해 갑니다.
    하지만 그의 영전이 그의 결백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로 인하여 엘로이시스의 "의심", 그리고 관객인 저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제 생각엔 감독이 비교적 이 두 상반된 인물의 됨됨이와
    사건의 전개 과정을, 그 어느쪽의 편도 들지 않고
    공평하게 전개시키며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편을 들고 공감하는 건 관객의 자유겠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를 어느 한 사람의 승리로 읽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결국 "인간의 의심"에 관한 영화이고
    진실에 관한 영화이고, 더 나아가 과연 그 진실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용산도 마찬가지겠지요.
  2. 유승태
    2009.07.22 21: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열매실님께..

    답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다 써놓고 보면 꼭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열매실님께서 이야기해주신 것들의 대부분은 저도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열매실님께서 '문제화'해주시니 이렇게 더 해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군요.

    제가 보기에, 열매실님은 제가 '영화의 메시지를 어느 한 사람의 승리로 읽'고
    있다고 보셔서 그것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글은 기본적으로 '대다수가 플린에게 공감한다'는 전제(혹은, '상상')에서
    논의를 시작했으니 이 전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아마 그 뒤에 이어진 논의가
    대부분 수긍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알로이시스의 패배' 운운한 것이 제 생각이
    아니라 플린의 시선을 통해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저는 오히려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제가 문제 삼고 있는 건 왜 다수의
    사람들이 플린에게 쉽게 감정이입하고 그에게 공감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감상하냐는
    것이지요.

    <신부들의 식사> 장면을 언급한 것도 플린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이들이 많다고
    생각해서 언급한 것일 뿐입니다. 사실 열매실님이 동의할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제 생각에도 알로이시스가 '비호감'으로만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점점 눈이 멀어가는
    연배 높은 수녀님을 돌봐드리는 행동이라든가 제임스 수녀에게 냉정한 듯하면서도
    그를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은 보기에 따라 '비호감'이 아닐 수도 있지요. '비호감'이라는
    표현도 플린에게 공감하는 많은 이들이 다양하게 표현한 것들을 제 나름 요약한
    것일 뿐입니다. 제게도 알로이시스는, 물론 끌리지 않는 면이 더 많았지만, 나름
    공감도 가고 이해도 되는 인물입니다.

    다만 열매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알로이시스를 '그녀는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서
    해야 할 바를 한 것'이라고 보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한백교회
    청년들과 이야기할 때 나왔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이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아니, 꼭 그런 식으로 해야 해?' 이 질문이 나온 건 알로이시스에게
    공감이 가지 않아서이기도 했을 것이고, 알로이시스가 '객관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플린과 권력을 두고 다투는 '욕망'도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플린과 알로이시스가 서로 상석(?)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 장면이
    이 점을 드러내는 좋은 장면일 것 같습니다.)

    플린과 마찬가지로, 알로이시스를 '우리편'으로 여기는 것도 문제가 많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플린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거나, 알로이시스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게 아니냐는 거지요. 이 지점에서 약간 비약이 있긴 했습니다만,
    우리가 당파성을 전제하고 사안이나 사태를 보려 하는 태도 때문에 서로의 '적대'를
    무화시키는 '공감의 체계'는 쉽게 가시화되지 않고, 이 때문에 '죽임의 질서도'
    작동할 수 있다는 거지요.

    때문에 저는 이 영화가 '인간의 의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감독이 의도했든 안했든, 이 영화는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에 우리의 정치적 '습속'이 배어나오고 있음을
    이 영화는 사고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물론 여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사실 마지막 장면에서 일종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 강인하고 자기절제의
    화신 같았던 알로이시스가 왜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렸는가 생각해보면,
    바로 앞 장면의 대사를 볼 때 그녀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 은폐와 속임수의
    달인 같던 플린이 학교를 떠남으로써 그의 유죄를 인정하는 행동을 이끌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플린이 일종의 승진을 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믿던 신의 '정의'가 관철되지 않는 학교 밖 세계의 권력을 감지하면서
    무기력과 절망감에 "I have such a doubt!"라는 절규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플린에 대한 알로이시스의 의심이 명확하게 규명된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플린에게만 의심이 깊어질 특별한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알로이시스의 의심이 '허구'로
    밝혀지는 것으로 읽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용산에 대해서도, 개인적 차원에서의 반성이 있었든 어떻든 그건 제가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일 것입니다. 다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용산참사를
    둘러싼 '사회적 행위'의 의미를 어떻게든 규명하고 그것이 개인적 차원의 확인되지
    않는 반성만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죽임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나는 그 작동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닐까 반성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답글이 주저리주저리 또 길어졌네요. 이 답글 때문에 오히려 논쟁거리만 더
    확대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영화평 밖에서 영화평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단번에 완성된 제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

한사람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놓고도 정부는 “테러리스트다, 떼쓰는 폭도들이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말도 안되는 모함이라는 것을 너무 잘안다. 고 이상림 씨는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계속 성경 필사를 하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가족 모두가 그렇다. 다른 희생자들도 장사를 하거나 평범한 생활을 하던 시민들이었다. 벌써 두 달 넘게 가족들이 빈소를 지키면서 버티고 있다. 얼마나 힘이든가? 그런데도 가족들은 이대로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누구보다도 강경하다. 그들은 분명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가 없다. 자기 부모들의 참 죽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가족들이 장례를 미루며 투쟁하는 것은 고인들의 명예회복이기도 하지만 고인들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이번 희생으로 나머지 재개발지구 세입자들이 다시는 이러한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고인들의 희생을 모든 세입자들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의 지리한 싸움은 그 분들의 죽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재개발이 진행되면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입자들이다. 그 지역은 상가라 대개 권리금이 따라 붙는다. 그리고 인테리어에도 적잖게 든 비용은 모두 무시된다. 단지 2천만원 정도의 이사비용만 지급된다. 그리고 가해지는 용역들의 무차별한 인간 모독과 폭력, 이런 것들이 세입자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이다. 가족들은 정부가 발표하는 터무니없는 모함을 딛고 자신들의 부모와 남편의 죽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가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제거하신 제물이요 동시에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의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찾았듯이 예수의 제자들, 가까이서 따르던 갈릴리 민중, 여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덧 씌워진 죽음의 이유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중을 선동하는 폭도, 정치적 정복을 꿈꾸는 유대인의 왕, 로마의 정치범, 신성모독자, 성전난동자.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일 수 없다. 그들은 사랑하는 스승의 죽음의 참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찾아낸 의미는 “단번에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신 분” 이었다.

예수께서 단번에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셨다는 말을 한국교회는 주술적으로 이해한다. 마치 주문처럼 이 사실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우리의 존재가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단번에 제물이 되신 예수의 신적 마술은 그 주문을 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컴퓨터에 걸려있는 비밀번호처럼 새 일을 불러들이는 주문으로 작용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드리대면 하늘에서 신비한 변화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이런 천박함, 이런 맹랑함은 예수를 한낮 도깨비나 부뚜막 귀신 정도로 추락시킨다.

어떻게 한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죄를 도말할 수 있는가? 누가 반문할지 모른다. 왜 목사님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자연스럽게 고백하고 믿는 바를 흔들어 놓으려고 하십니까? 바로 그 당연한 믿음 때문에 기독교는 역사하고는 상관없는 종교, 민중의 아픔과 무관한 종교, 한낮 종교로, 주술로, 자기 욕심을 합리화하고 극대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교회가 취해있는 그 주술의 요소를 거두어 내야지만 신앙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의 민중들은 예수가 가르치신 세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모두가 존중받는 나라, 걸인, 병자, 장애인, 이방인 차별로 한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이 당당한 주인으로 서는 나라, 다시는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나라, 그 꿈에 벅찼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를 펼치기 전에 그분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죄 몫으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예수가 가르쳐주신 그 나라는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 나라는 자신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 나라와 자신들의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 그 갭이야 말로 바로 ‘죄’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분의 죽음이 단번에 모든 죄를 도말했다고 외치는 그 고백은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해야 예수의 십자가가 거룩한 죽음이 되겠는가?
 
죽음 자체는 말이 없다. 더구나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 어떤 메시지를 남길 여유가 없다. 그냥 억울함과 고통을 남기고 사라질 뿐이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천군천사가 하늘 문을 열고 내려와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그냥 말없이 초라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제물이었다고 하는 고백은 무엇인가?

그가 살아계실 때는 “그가 하려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셨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서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끝장나 버린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 안에 새롭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죽음의 세력 앞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이고 단번에 완성된 것이다. 그들은 단번에 모든 악의 세력을 묶고 승리하신 결과를 본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에서 세상의 모든 눈물과 아픔이 단번에 완성된 제물로 드려지는 결정적인 제사를 본다.

그 제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동일한 아픔이 있는 현장에서 예수의 몸을 찢고 그의 피를 드리는 제사는 행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실지 아닐지 그 결과를 모르는 긴장된 제사는 아니다. 이미 단번에 결정적인 제사를 받으셨던 하나님의 판결이 선행된 제사일 뿐이다.

예수의 죽음 자체는 거룩하지 않다. 그냥 평범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죽음의 거룩한 죽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 그 죽음 안에 숨어있는 거룩한 뜻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마치 아들, 딸의 구속을 통해 처음에는 망설이던 어머니들이 최고의 투사가 되는 것처럼 십자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모든 인류가 가진 죄를 도말시키는 거룩한 죽음이 되게 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세상 어디이든지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는 곳에 모든 아픔을 단번에 도말 시키는 거룩한 제사로 기능하게 해야 한다. 십자가는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 능동과 수동은 도치된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피로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힘입을 뿐이다. 신앙의 능동이 빠지면 한낮 주술이 되지만, 수동이 빠지면 그것은 단지 제 자랑일 뿐, 신앙이 되지 못한다. 히브리서는 단번에 완성된 제사를 말하지만 마지막 장 결론 부분에서 주님께서 완성하신 제사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우리들이 드리는 찬양의 제사로 마감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실상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곧,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선행과 친교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히 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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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 대하여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 사무국장)


성직자나 수도자가 그 신분을 버리고 세칭 ‘환속’했을 때, 우리는 보통 “옷을 벗었다.”는 표현을 쓴다. 어디 성직자나 수도자만 ‘옷’을 입고 벗겠는가마는, 어떻든 이 표현에는 성직이나 수도직이 하나의 ‘옷’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사실 우리도 옷을 단순히 입을 거리로만 인식하기보다는 지위를 나타내거나 멋을 표현한다고 여기기에 기왕이면 ‘좋은 옷’을 입으려고 한다. 좋은 옷이 어떤 옷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그것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아마도 자기에게 맞는 옷인가 하는 것일 게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알몸의 상태로 와서 자기에게 맞는 ‘옷’을 찾는 과정이며, 종국에는 그 옷의 주인인 육신이라는 옷을 벗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좋은 옷에 열광하는, 이른바 문명사회일수록 동시에 알몸에도 환장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좋은 옷’이라는 포장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의 반영일 것이다. 옷은 아무리 좋아봐야 옷일 뿐이며,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그것은 언젠가 벗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옷을 위해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 옷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옷의 기원과 종착지는 알몸이다.

오늘날에는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이 입는 옷 속에서 청빈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알다시피 그들의 옷이 가리키는 바는 겸허함과 가난이었다. 천주교 사제들이 입는 검은 수단은 자신의 봉헌과 죽음을 의미하며, 수도자들의 수도복에는 청빈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사정은 불교의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스님들이 입는 가사는 본래가 똥걸레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옷을 입다가 떨어지면 기워 입고, 그 다음에 걸레로 사용하다가 더 이상 걸레로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똥을 닦아서 버렸는데, 초기 수행자들이 그런 것을 주워서 기워 입었던 게 가사이다. 역설적이지만, 몇 십 만원을 호가한다는 가사는 본래 무소유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해보면, 아무래도 오늘날 종교인들이 입는 옷은 종교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고 포장해버리는 기득권자들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만 같다. 종교인들의 옷에서 묻어나는 어떤 특권이나 차별성은 종교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는데, 종교인들의 옷만큼 “존재를 배반한 삶”을 잘 보여주는 예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하기는 그렇게 비싼 옷을 걸치고 있으니 옷을 벗어 알몸으로 세상과 만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거룩한 장소에서만이 아니라, 예토(穢土)에서도 ‘신발’을 벗는 겸허한 종교인을 만나기란 이제 영영 틀려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김수환 추기경이 육신의 옷을 벗은 지 한 달이 지났다. 명동성당과 추기경이 묻힌 성직자 묘지에는 그를 추모하는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추기경을 따라서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한 사람이 급격히 늘었고, 천주교회의 예비자들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국장을 방불케 했던 추기경의 장례식에 이어 엄청난 추모예식과 그에 따른 천주교회의 ‘성공’ 소식을 접하고 있자니, 천주교 신자로서 불편한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추기경에 대한 평가는 역사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그를 추도하는 방식이 꼭 앞에서 이야기한 종교인의 ‘옷’과 빼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예의는 과연 지켜질 수 있는 것인가?

정황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추기경의 죽음에 대한 기념은 용산 철거민들이 당한 죽임을 덮는 데 크게 작용했다. 기념은 죽임을 상당부분 은폐시켜 주었다. 천주교회가 추기경의 죽음을 통해서 좋은 이미지를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장례를 성공적으로 조성해가면서, 그리고 그의 죽음을 이용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용산참사를 제거하려는 시도들 앞에서, 용산에서 희생된 철거민들은 점점 빠르게 잊혀져갔다. 초호화판 거대 신전을 짓기에 앞서 정부와 토건재벌과 용역깡패가 철거민을 상대로 벌인 우발적(?) 희생제의는 너무도 쉽게 망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러한 기념과 망각을 통해서 이득을 보는 이들은 누구일 것인가? 그들은 장례식에서 예를 갖춘 다음 뒤돌아 나와서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다.

추기경은 박정희의 장례식장에서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남겼다고 한다. 이 기도문은 추기경 자신을 포함해 ‘옷’을 걸치고 살다가 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기도이다. 우리도 그를 따라서, “이제 추기경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알몸’으로 주님 앞에 선 김수환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드릴 수 있을 것이다. 추기경과 용산에서 죽임을 당한 철거민들은 이제 옷을 벗고 알몸으로 그분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알몸으로 그분 앞에 서 있는 그들의 마음, 우리의 가련한 마음은 아마도 시인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듯
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
이미 끝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
이 시간의 물결 위
잠 못들어
뒤채이고 있는
병 앓고 있는 사람들의

그 아픔만이
절대한 거.” (신동엽의 금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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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차 월례포럼 - 히브리 미학의 모험

1991년부터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에 개최해온 월례포럼이 지난 2일, 117차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주제, 강사의 경력, 관점, 논의방식 등에 틀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왔기에 월례포럼은 제도권 학문의 경계를 넘어 더 깊이 있고 날카로운 통찰을 얻는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월례포럼에서는, 히브리 미학을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어떻게 건축의 양식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1월에 있었던 용산참사에 대한 신학적 비평을 담아내었습니다.

1. 일시 : 2009년 3월 2일 월요일 저녁 7시
2. 장소 :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 출구 옆 골목 30미터, 안병무홀 1층)
3. 주제 : 히브리 미학의 모험
4. 강사 : 이정희 (본 연구소 운영위원)


 << 월례포럼 원고를 보고 싶은 분은 여기를 클릭 !! >>
(참고로, 홈페이지에서 회원가입을 해야 원고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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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몸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갔고, 자기의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은 행위였다.
―「열왕기하」 16장 3절

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왕자를 바치라고 명합니다. 신속하게 의식이 준비됩니다. 지체할 틈이 없습니다. 온 국토를 불구덩이로 만들며 사방에서 시시각각 조여 오는 적군을 몰아내려면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도성 남쪽의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에, 그 성소에 불이 지펴집니다. 순식간에 불꽃이 피어오릅니다. 제단 한복판에 사지가 묶인 채 거의 혼절해 있는 왕자는 몸둥아리를 향해 질주해오는 그 기름 불꽃의 열기에 비명을 지를 힘도 없습니다. 순식간에 몸에 불이 타오릅니다. 온몸에 발라진 기름을 게걸스럽게 핥아가던 불꽃은 곧 아이를, 그 열기와 고통에 꿈틀 거릴 틈도 주지 않은 채 휘감아버립니다.

기름 타는 연기와 살갗 타는 냄새가 잔인한 돌풍을 일으키며 제단 주위를 꽉 채운 군중의 숨결을 자극합니다. 군중은 사제의 푸른 도포자락이 휘날리며 격렬하게 허공을 가르는 춤사위를 봅니다. 아니 차라리 그건 칼날이 된 옷자락이었습니다. 비명인 듯 고함인 듯, 찢어질 것 같은 소리에 사제의 목청이 사정없이 갈라집니다. 아이의 불타는 몸, 그러나 신음으로조차 백성에게 드러내지 못한 고통을 사제의 갈라진 목청이 대신합니다.

아이를 휩싸버린 불의 열기처럼 군중의 가슴에 불이 타오릅니다. 고함을 지릅니다. 발을 구릅니다. 그리고 옷을 찢습니다. 아이의 죽음이 슬프고 분해서입니다. 잿더미가 된 강도와, 주검이 된 어린 자식들이 늙은 아비 어미들이, 저 주검들이 하소연으로 격정에 불타서입니다.

이제 왕이 앞으로 나옵니다. 눈물에 콧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울먹이며 소리칩니다. 적을 무찌르자고 말입니다.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리자고 말입니다. 신께서 아이의 주검을 아셨으니, 이 나라를 이 백성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아하스 왕이 아들을 번제물로 바쳤다는 오늘의 본문을 가상 이야기로 만들어 본 것입니다. 르신 왕의 다마스커스 제국이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국가로 부상한 때입니다. 강력한 경쟁국이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베가 왕도, 페니키아의 두로 왕 히람도 르신에게 굴복하였습니다. 르신은 아시리아의 서진을 막을 계획으로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소국들에게 연합군을 만들라고 압박을 가합니다.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마지못해 연합군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한데 남부 몇 나라들이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아하스의 유다 왕국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르신은 동맹을 맺은 모든 나라들에게 명합니다. 유다를, 마온 족속을, 여왕 삼시가 이끄는 아라비아를 인정사정 보지 말고 한껏 짓밟으라고 말입니다.

왕국의 거의 전역이 잿더미가 됩니다. 동쪽의 블레셋이, 서쪽의 모압과 암몬이 북쪽의 이스라엘이, 그리고 르신의 다마스커스 제국이 닥치는 대로 불지르고 살육하며 도성을 향해 공격해 들어옵니다.

피난민들이 줄을 잇습니다. 갑자기 늘어난 도성 안 백성들이 먹을 식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식량을 공출해올 시골도 이미 사라졌습니다.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괜히 화를 내고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이 빈번해집니다. 민심이 흉흉해집니다. 누군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궁중에서 쿠데타가 혹은 그러한 음모가 있었습니다. 아하스를 축출하고 ‘다브엘의 아들’이라는 이를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이사」 7,6~7). 다브엘의 아들이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두로 왕 히람의 선조인 ‘두바일’이 ‘다브엘’과 동일인이라고 합니다. 하여 ‘다브엘의 아들’이라는 이는 두로 국의 공주가 낳은 유다 왕의 아들이라는 얘깁니다. 아하스의 아들이거나 그의 부왕인 요담의 아들로, 두로 국의 공주가 낳은 이라는 얘기지요. 어쨌거나 아하스는 이 반역 사태를 진압했고, 더 이상 민심의 동요를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약처방을 내놓았던 것 같습니다.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이지요.

번제물은 대개 가축 가운데서 선별됩니다. 하지만 좀더 심각한 상황이 오면 인신제물이 쓰이기도 하는데, 주로 이방인, 노예, 천민의 자식 등이 제물로 선별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쿠데타 음모가 있었고,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왕을 향해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곧 왕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왕자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한 때는 바로 이런 시기였습니다.


희생제물은 그것을 바치는 이들 자신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말했듯이, 희생제물은 위기가 고조될수록 제의를 드리는 이들과 점점 근접한 존재로 선정됩니다. 그리고 가장 근접한 존재가 바로 자식, 특히 아들이었습니다. 곧 아들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이 의례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와 「예레미야서」 등에서 이 인신제사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효력이 있다는 대중의 믿음이 널리 퍼져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구절들이 전쟁와 같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언급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위기시의 극약처방임을 시사합니다. 해서 나는 아하스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의례가 대중을 선동하는 강렬한 효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갈라진 국론은 통일되었고, 그 덕에 르신 동맹군의 침공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아하스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면서 봉신국의 예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긴급한 구호의 신호를 타전했습니다. 3년을 끌던 전쟁(주전 734~732년)은, 아시리아가 다마스커스를 침공함으로써 끝났습니다. 다마스커스 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이스라엘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며 항복하고 맙니다.

결국 아하스의 두 가지 방책은 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인신제사로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고, 국제 외교전을 통해 침공했던 적성국을 완전히 혹은 더 회복할 수 없게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하스는 의도하지 않은 횡재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거의 전 영토가 황폐해지는 상황에서, 수많은 유민들이 남하하여 남왕국 유다로 몰려왔던 것입니다. 아주 빠른 기간 만에 흩어진 인구가 회복되었고, 아니 몇배가 늘었습니다.(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 왕 때에 유다의 인구는 12만 명에 이르렇다고 합니다.) 폐허가 된 땅이 다시 경작되었고, 새로운 경지가 개간되었습니다. 하여 생산성이 높아졌고, 따라서 왕국의 부도 몇 배가 늘어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기 고고학적 발굴물을 보면 유다 왕국은 번영기에 접어든 것임이 분명합니다.

아하스는 아들을 제물 삼아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아들의 불타는 몸은 자기의 고통을 말할 수 없었으나, 사제의 대언을 통해 아하스의 고통을 발설했습니다. 즉 아들의 고통은 침묵으로 가려지고 아비의 고통으로 번안됨으로써, 아비인 아하스는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번영하게 하는 밑거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기원전 8세기의 한 후진국의 군주는 벌써 타인의 죽음을 이용해서 자기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통치 기술을 활용했습니다. 그 이전이나 이후의 수많은 권력들도 이런 방식을 활용하곤 했습니다. 위기가 심할수록 더욱 큰 자극으로 고통을 양산하고 그 고통의 소리를 봉쇄하며 대신 자신의 소리를 더빙하는 방식 말입니다. 그것은 권력에게 성공을 선사하기도 했고, 실패로 귀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은 이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믿음을 대대로 간직해왔음이 분명합니다. 하여 그런 관행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용산의 ‘불붙은 몸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는 세입자의 육체를, 또 누구는 진압경찰의 육체를 화두 삼아 정쟁에 여념이 없습니다. 특히 현 정권은 세입자의 불붙은 몸을 혐오스런 것으로 해석하며 관련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시신을 느닷없이 부검한다고 훼손하기까지 합니다. 시신 훼손은 대표적인 모욕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경찰의 죽은 몸에 자기들의 소리를 더빙하여 커다란 확성기를 연결해 버렸습니다.

필경 현 정부는 지금의 위기를 대단히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재정권이나 할 만한 행태를 도처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특히 희생제물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오염된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인터넷 논객에서 학교 교사까지, 그리고 세입자들의 불타는 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연쇄살인범까지 말입니다. 세상의 분노를 투사시킬 존재를 만들어내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들의 목소리로 더빙해서 말입니다.

현재로선 이러한 계략은 성공을 거둘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든 않든, 불붙은 몸의 소리를 침묵에 빠뜨리고, 권력의 소리로 변조시키는 방식은 결코 야훼의 제사일 수 없음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훼께서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 죄’(「예레」 19,4~6)일 뿐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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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08 05:2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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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스의 "역겨운 행위" (자식 희생제물) 와 현 정부의 "얄팍한 계략"을 (용산 철거민의 희생) 비교한 좋은 글이네요. 아하스의 역사적 상황과 이명박 정부의 역사적 상황이 다르지만, 정권을 유지하는 방법은 유사한 것 같습니다. 아하스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한가지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는듯 합니다. 열왕기하 16장 7절을 보면, 아하스는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나는 왕의 종이며,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반 앗시리아 동맹의 (다마스크스과 북이스라엘) 위기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은 지금 이명박 정부가 반 미국 (북한) 위기에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비록 시대적 상황이 다르지만, 정치적 힘의 논리라는 맥락에서는 비슷한 점이 많네요.

우리가 들은 '워낭 소리', 우리가 외면한 '워낭 소리'
-영화 <워낭 소리>의 흥행에 붙여 띄우는 몇 가지 단상

정용택
(본 연구소 회원)


참을 수 없는 눈물의 가벼움

2009년1월 15일에 개봉한 이충렬 감독의 저예산 독립영화 <워낭 소리>가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관객 수 60만을 돌파했다. <워낭 소리>의 예기치 못한 흥행을 두고, 어느 진보적 인터넷신문에서는 한국 사회의 두 가지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첫째는 우리나라에서도 <원스>나 <워낭 소리>같은 작품성 있는 저예산 독립 영화라면 언제든지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 둘째는 우리가 그간 잊고 지낸 목가적인 전원의 삶, 즉 오염되지 않은 고향산천과 문명의 이기를 거스르며 사시는 아버지와 사람보다 더 의리 있는 소를 기억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따뜻한 심성이 한국인들에게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것, 바로 그런 사실들을 영화가 확인시켜 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시사IN, 2009년 02월 10일).

특별히 두 번째의 이유가 몹시 흥미롭다. 이 영화 한 편의 갑작스러운 흥행 현상을 통해, 한국 대중들에게서 모종의 새로운 인권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권에 대한 전통적인 문법에 따르자면 인권은 소위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문제였는데, 이 영화는 주인공 할아버지를 통해 소와 같은 동물을 인간 자신과 같은 도덕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는 새로운 인권적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로티가 말한 바, 인권이란 소위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를 자신과 같은 도덕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감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인권, 이성, 감성, 현대사상과 인권, 사람생각, 2000).


40년이 넘게 자기 곁에 남아 있는 단 한 사람, 그리고 자기가 곁에 남아 있어주어야 할 단 한 마리와 함께 걸어온 80년 촌로의 인생 위로 눈부신 황혼이 덮쳐오는 라스트신,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음은 자명하다. 사람들의 눈물을 보면서, 그 눈물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동물로 상징되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환대,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종(種)의 한계마저 뛰어넘은 존재 대 존재의 우정 혹은 교감 같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 혹은 향수가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위에서 인용한 로티적인 의미의 '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대중들의 열정의 징후로 해석해보려 한다.

<워낭 소리>와 같은 좋은 영화가 여전히 제작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런 영화가 흥행하게 된 것, 그래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감동을 받은 것,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다 만족스럽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갑자기 슬퍼진다. 한국 사회의 대중들이 이런 영화를 좋아할 만큼 아직 감성이 살아있다, 라는 인터넷신문의 분석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갑자기 슬픔이 밀려온다. 더욱이 평소 TV 모니터로 얼굴만 봐도 토할 것 같았던 대통령께서도 나처럼 이 영화에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라고 전해주는 기사를 읽을 때 그 슬픔은 배가된다.

소의 목에 걸린 방울 소리를 통해 소의 아픔을 듣는 노인의 감성에 깊이 매료되거나, 두 존재 간의 아름다운 우정에 감동하는 이들이 60만 명이 넘었고, 더구나 그 60만 가운데 대통령을 포함한 이 사회의 권력자들이 상당수라고 하는데, 어째서 용산의 희생자들을 향해 대통령과 권력자들은, 나아가 시민사회는 한 줌의 동정 섞인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가? 나는 그들이 이 영화를 보며 흘린 눈물이 나의 눈물과 같다는 단순한 사실로 인해 지금 절망한다. 우리가 정말 같은 종(種)의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워낭 소리>의 소를 향해 드러내는 도덕의 감성이 어째서 용산의 희생자들을 향해서는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로티의 말을 인용하자면,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인종청소를 자행한 세르비아인들의 만행은 그들이 보스니아인을 동물처럼 즉 도덕의식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무방한 곧 '인간 범주' 밖의 존재로 여겼던 집단적인 편견, 그러한 왜곡된 감성(sentimentality)의 산물이지, 저들을 제거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합리적 판단에 따른 인권 유보의 상황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산 철거민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데 집단적으로 공모한 국가권력과 시장질서와 시민사회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우리'라는 자기 귀속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식의 범위 밖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용산 철거민들은 한국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국가적 질서와 시장적 질서, 그리고 시민사회적 질서 그 모두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 말하자면 삼중으로 배제된 비국민/비시민/비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먼저 국가적 질서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생떼나 쓰는' 사람들이 되다 못해 결국 망루에까지 올랐고, 공안(公安)적 논리에 따라 대(對) 테러 진압작전에 의해 주검이 되었다가, 죽어서도 검찰 발표대로 폭력과 방화를 일삼은 범죄자가 된다. 동시에 시장적 질서로부터도 배제되었기 때문에, 40층 이상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용산4구역, 이전에 비해 땅값이 10배 이상 오른 덕분에 돈이 없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부자들에게 그대로 내주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게다가 작게는 용산 구민, 크게는 서울 시민 다수가 동의하고 있는 서울시 재개발 프로젝트에 사적인 동기로 이의를 제기하여 프로젝트 진행에 차질을 초래했고, 나아가 주변 이웃들에게 불편을 주고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는 폭력 시위도 서슴지 않았으니, 인권이니 생존권이니 하는 차원의 알량한 인정(人情) 따위를 시민사회로부터 기대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자. 87년 6월 두 명의 대학생이 고문과 최루탄에 의해 차례로 사망했을 때, 그리고 그러한 죽음에 대해 국가권력이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을 때,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적 인권의 이름으로 궐기하였다. 마찬가지로 2002년 6월 두 소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미군 장갑차 운전병이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시민사회는 민족주의적 인권의 이름으로 궐기하였다. 지난 2008년 촛불항쟁 때는 급기야 참여민주주의와 국민주권에 기초한 아주 구체적인 인권 즉 건강권, 생명권, 행복추구권 등의 이름으로 거대하게 궐기하였다. 그렇게 한국시민사회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지 않았던가? 인권에 대한 존중을 정치적 권리의 쟁취로 연결시키면서, 한국의 시민운동은 성장하고 발전해 왔는데, 왜 가장 인권이 존중되어야 할 상황 앞에서 시민사회는 침묵하고 있을까?

영화의 '워낭 소리', 현실의 '워낭 소리'

억지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워낭 소리>의 소를 향해 작동하던 인권적 감수성이 용산의 희생자들을 향해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면, 대중들에게 용산의 이웃들은 인간 밖의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소와 희생자들의 위치가 뒤바뀌어, 소는 대중들에게 동물이 아닌 인권적 존중과 친밀한 소통의 대상이 되고, 희생자들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 되어 전혀 인권의 보호나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바, 영화 관람의 윤리라고 하는 것은 영화를 통해 체득한 감각을 일상의 윤리적 행위로 반복하는 것이다. 이 반복은 단지 영화적 현실, 디제시스적 공간(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장소) 내로 한정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 계속 반복되어야 하고, 극장 밖 우리의 현실 속에서 반복되어야 하며, 결국 우리 모두를 통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영화의 흥행을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된 한국 대중들의 인권적 감수성의 진정성도 입증될 수 있다. 만일 <워낭 소리> 관람에서 보여준 인권적 감수성의 뜨거운 눈물이 현실에서 반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대중들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며 흘리는 눈물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차마 조우하지 못하였던 소와 인간의 평등한 우정이라고 하는 전원적인 삶 속의 느낌이나 사건을 때늦게 후회하며 그리워하지만, 그럼에도 관객들은 자신이 어떠한 경우에도 지금 여기 도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소와 인간이 교감할 수 있는 그런 실재적인 공간은 언제나 영화 관람의 자리에서만 보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향수와 열망의 조건은 언제나 그 실재적인 것이 현실에서는 부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와 신성을 독실하게 믿고 있지만, 그의 신앙은 예수가 지상에 절대 강림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의존하고 있었다. 만약 예수가 세상에 다시 내려온다면 대심문관은 현실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다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이다. 실재적인 것의 귀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객은 영화관에서 실재적인 것에 마음껏 탐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넘어 소와 같은 타자에게까지 개방된 인권적 감수성의 발휘가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에서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혹은 그런 것이 무의미하다고 믿기 때문에, 대중들은 다만 영화 <워낭 소리> 안에서 그 감수성의 풍경을 거리 둔 채 자유로이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를 향해 인간이 자기의 도덕과 감수성을 뛰어넘은 신뢰와 환대를 보내고, 소와 인간이 종(種)의 차이를 넘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아름답고 이상적인 공간이 현실로 귀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은 영화를 관람하면서 편안하고 느긋하게 타자에 대한 인권적 감수성의 귀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다. 그 반가움의 최종점에 물론 뜨거운 박수와 눈물이 있다. 영화에 보내는 박수와 눈물은 영화에서 본 실재적인 것을 다시 영화 안으로 돌려보내고, 우리는 다시 그러한 실재적인 것을 그리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움을 참을 수 없을 때 물론 영화관으로 다시 가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이 영화는 40년을 함께 살아온 늙은 농부와 소의 관계를 통해 땅과 노동, 나이 듦과 죽음 그리고 특히 인간과 동물의 우정과 교감의 실재성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에 따르면, '워낭'이란 마소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여 단 방울, 또는 마소의 턱 아래에 늘어뜨린 쇠고리를 뜻하는 말이다. 영화에서 워낭 소리는 소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주인 할아버지를 소통시키거나 교감하게 하는 '매개음'이며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자 '메타포'로 일종의 '맥박'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워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소와 노인을 교감시키는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결국 이것은 그들의 관계가 다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고통 공감의 구조, 혹은 사회적 연대의 구조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는 현실의 워낭 소리를 외면하며, 그 워낭 소리에 응답하는 인권적 감수성의 이상적 풍경을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이 아닌 영화 속 판타지의 공간에서 관람하며, '실재'가 아닌 '실재의 효과'를 체험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실재 효과'를 즐기며, 오늘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국가/시장/사회로부터의 고립이나 배제에 대한 불안을 종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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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상품화가 빚는 비극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 연구원)


참혹한 사고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를 보고 ‘기시감’을 말한다. 그리고 ‘그때’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서울의 ‘새로움’을 재현하는 대표적인 공간에서 시간의 역행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니, 역설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뉴(new)-’ 또는 ‘재-’라는 접두사는 ‘부자 되는 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는데, 이번 사고를 통해 서울의 도시공간을 재구성하는 ‘뉴타운’, ‘재개발’ 등의 달콤한 단어들이 사실은 공간의 상품화를 더욱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이 재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그 상품화 과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는 부자 되는 꿈을 꿀 자격을 갖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그 공간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도 다시 확인하게 됐다. 용산참사는, 상품화 기획에 거치적거리는 모든 대상을 곱게 갈아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또는 존재의 자리에서 내쫓아버리는) ‘악마의 맷돌’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튼튼하게 잘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번 사고가 발생한 용산4구역은 도시환경정비사업지역으로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이하, 도촉법)의 적용을 받는 곳이다. 이 법은 2006년 7월부터 시행되기 시작해, ‘뉴타운 열풍’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주목해 봐야 할 점은 이 법의 시행이 ‘재개발’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더 강력한 공간의 상품화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재개발’ 하면 오래된 주택들 헐어 새 아파트 짓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도촉법은, 기존의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이 소규모 블록을 개발 단위로 보았던 데 비해, 광역 단위 또는 복합 자족도시 단위를 개발의 범주로 설정하고 있다. 도촉법은 개발 권역 내의 주거, 상업, 업무 등 생활권을 하나의 세트로 묶어 개발 계획을 먼저 세우고 개발을 진행하게 된다. 도촉법의 적용을 받는 지역은 중소형 아파트 건설의무가 완화되며, 건폐율과 용적률 제한도 대폭 완화된다. 건폐율은 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면적의 비율을 의미하는데, 건폐율이 높을수록 건물을 넓게 지을 수 있다. 따라서 건폐율 완화는 땅값을 올리는 유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용적률은 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물의 연면적 비율을 말하는데, 용적률이 높을수록 고층건물을 지을 수 있고, 그만큼 건물주의 이득이 커진다. 정리하면, 도촉법 적용 지역, 그중에서도 용산4구역과 같이 도시환경정비사업지역으로 선정된 곳은 이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초고층 그리고 중대형 평형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발레리 줄레조는 『아파트 공화국』에서 한국에서 건폐율 및 용적률의 변화와 사회 공간의 차별화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초고층 아파트 단지 건설에 따른 지역의 조밀화는 도시 형태에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조밀화로 전체 가구 수는 소폭 증가하나 가구당 가족 수가 감소해 단지의 전체 인구는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아파트 평수가 커지고 전세가가 급등하면서 기존 거주자 중 극히 일부만 단지에 남고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전 거주자들이 떠난 빈자리를 채우며 상층 중산층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용산4구역에는 40층 이상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도촉법을 통해 건폐율, 용적률, 중소형 아파트 건설의무 ‘규제’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진 용산4구역은 줄레조가 말한 것과 같은 도시 형태 변화를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 인터넷 언론에 따르면, 삼성물산-국민연금 컨소시엄이 개발사업자로 국제업무지구(용산4구역은 그 배후단지 중 하나다.)를 개발하는데, 총 사업비가 28조 원이며, 이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사업비 15조 원의 배에 달한다. 이러한 막대한 사업 추진의 결과, 이전에 비해 이 지역 땅값이 10배 이상 올랐다고 한다.(오마이뉴스 2009.01.23) 이쯤 되면, 이미 평범한 개인, 중산층 의식을 갖고 있으나 그 경제력은 중산층 기준에 미달하는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용산4구역은 들어가기를 상상하는 것조차 과분한 ‘부자들의 꿈’을 재현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초호화 주상복합건물의 현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 자족성을 갖는 광역 단위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도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용산참사는 공간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기획 속에서 ‘부자 되는 꿈’이 좌절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주는 비극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간의 상품화가 한 단계 마무리되고 난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남을 비롯한 서울의 여러 아파트 단지들과 서울 주변 신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가난한 거주자를 폭력으로 몰아내고 거기에 번듯한 건물들을 세우는 역사는 이미 수차례 반복돼 왔다. 어쩌면 진짜 비극의 원인은 이렇게 수도 없이 반복돼 온 폭력의 구조를, 그 구조가 생산한 상품을 아무 느낌 없이, 아니 오히려 즐겁게 소비하는 우리의 심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악마의 맷돌’은, 상품화의 구조는 우리의 무감각 덕에 그렇게 튼튼하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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