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달리야
민족이냐 민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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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

‘민족’이라는 사회적 결속체는 역사적으로 대개의 경우 종족보다 커다란 범위에서 형성되며, 이러한 결속을 보증하는 정치제도적 장치는 종족적 혈연성 범주보다 훨씬 복잡한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국가는 많은 경우에 민족과 쌍개념을 이루는 역사적 실체다. ‘국가’가 영토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유지하는 제도적 통치형태로서, 기본적으로 폭력수단을 통한 강제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민족이라는 것이 소수에 의한 자원의 전유 및 그러한 전유를 위한 폭력 수단의 독점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 결속체로서 역사적으로 형성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민족은 상징의 공유 및 문화적 동질성을 결속의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즉 문화적 상징적 유대가 없다면 민족은 형성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동질감이 작은 공동체의 범주가 아닌 민족처럼 거대한 공동체적 범주로 형성되는 데는 문화적 상징적 소통기재를 거대 영역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국가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이러한 민족-국가를 통한 사회적 결속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는 민족-국가적 결속의 정당성을, 역사적 필요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초역사적 당위성의 차원에서 사고하게 한다. 즉 민족-국가는 선재적(先在的)으로 주어진 것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현존하는 민족-국가에 대해서 문제시하더라도, 그는 민족-국가의 결속의 초역사적 정당성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논지를 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의 주장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족-국가가 이런 것인 한, 민중문제는 항상 잠재되어 있게 된다. (물질적이든 상징적이든)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으로 인한 배제의 문제를 둘러싼 이해의 차이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때로 소통 불능의 상황, 즉 긴장과 갈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단순한 일탈적 반항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민족-국가의 초역사적 당위성의 코드를 다른 형태의 민족-국가의 코드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전자의 형태로 나타난 민중운동을 전정치적(pro-political)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변혁적 저항(political resistance)이라고 할 수 있다. 군주국 후기 및 식민지 시대 이스라엘의 경우, 이러한 재코드화는 ‘남은 자’ 사상과 ‘신정통치’ 사상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러한 재코드화의 실현은 항상 변혁적인 것으로 구현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개는 민중적 의제가 반영된 역사적 타협물을 탄생시키곤 했다.

여로보암 1세에 의한 군주국 초기 시대의 반다윗-솔로몬 혁명은―비록 민족적 동질감이 아직 매우 허술하던 때임에도―반국가적인 지파동맹 시대의 비전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민족-국가로 구현되었다. 한편 요시아 개혁의 경우는, 민중적 저항의 에너지를 중앙정부가 개혁의 동력으로 활용하여, 이른바 ‘위로부터의 혁명’을 이루어낸 사례다. 두 경우 다 민중적 동기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족-국가의 코드화에 대한 위기의 요소였다. 반면 전자는 ‘기존의’ 민족-국가의 코드화의 재형성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후자는 (창조적 재해석을 통한) 연속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모두 기존의 코드화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문제의식의 공유라는 인식론적 지반을 같이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민족-국가’라는 결속의 코드 자체를 변형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이 장에서 다룰 게달리야 이야기는 정치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민족주의’와 ‘민중문제’를 둘러싼 왕국 말기의 복잡한 논쟁의 컨텍스트를 이해해야만 정당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다. 여기에도 ‘민족-국가’라는 코드는 전제사항이다. 단 그것의 구체성을 둘러싼 상이한 입장이 갈등을 빗고 있다. 편의상 한편을 ‘민족-국가-민중’의 코드화로서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을 전통적 ‘민족-국가’론이라고 하자.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엉뚱한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을 텍스트 자체는 교란시키고 있다. 여기에도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는데, 왜냐하면 텍스트 저자의 관점과 게달리야의 관점이 요시아 개혁의 승계자라는 점에서 입장이 공유되고 있다. 반면, 게달리야와 대비되는 인물인 여호야긴은 그 반대편에 있다. 그런데 텍스트는 오히려 여호야긴에게 더 우호적인 반면, 게달리야는 냉정하리만큼 담담하게 기술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민족-국가’라는 전통적 코드의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룰 때 해명될 수 있다고 본다. 아래에서는 바로 이 점을 초점을 두고 게달리야에 얽힌 역사를, 특히 민중적 관점에서 복원하고자 한다.

2

요시아 개혁은 이스라엘 역사 및 야훼 신앙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다. 유다 왕국 말기와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서 이런 개혁적 역사신학 운동은, 성서의 본격적인 대단위 편찬이 이 개혁의 신학화 작업과 관련이 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야훼신앙사의 지성사적 차원을 풍부하게 채웠을 뿐 아니라, 위기 극복의 사회적 비전을 추구하는 하나의 실천적 대안 운동을 구축하기도 했다. 우리가 관심 갖는 왕국 말기와 식민지 초기의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요시아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 세력을 억제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동맹을 맺은 세력은 다양한데, 특히 우리는 성서에 ‘암하아레츠’라고 표기하고 있는 민중세력도 그 중에 하나다. 그리하여 요시아 개혁은 ‘위로부터의 민중적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시아 개혁이 어느 정도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을 무렵 갑작스런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고 만다. 그것은 에집트 제26왕조가 들어서면서 잃었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펴고, 이 과정에서 바빌론과 메대 군의 동진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출병을 하게 됨으로써 야기된 사건이다. 요시아 정부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바빌론-메대 연합군과 동맹을 맺으며 개혁을 펼쳤는데, 에집트의 팽창주의는 그러한 요시아 개혁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므기또라는 천험의 요새를 통해 요시아는 에집트 군의 출병로를 가로막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전사였다.

이런 갑작스런 사건은 유다로서는 중대한 위기였다. 아마도 이 시기 예루살렘 궁중에는 비상한 사태가 벌어진 모양이다. 요시아의 장자인 여호야킴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여호아하즈가 즉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즉위에 개혁파, 특히 암하아레츠가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정(北征)에서 실패한 느고2세는 여호아하즈를 폐위시켜 본국으로 끌고감으로써 자신의 실패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자기의 지지자들로 유다의 조정을 개편하고자 했고, 그 소임을 맡고서 즉위한 자가 바로 여호야킴이었다.

이후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 왕으로 이어지는 유다의 조정 내에는 크게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지속적인 정쟁을 벌였다. 친에집트파가 그 하나이고, 친바빌론파가 다른 하나다. 여기서 전자가 전통적 귀족주의를 고집하는 세력이라면, 후자는 요시아 개혁의 광범위한 지지세력으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전자가 수구파라면, 후자는 개혁파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후자는 어느 정도의 스팩트럼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대체로 민중적 편향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여호야킴과 여호야긴 치하에서는 친에집트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시드키야 왕 시절에는 전기에는 친바빌론 세력이, 후기에는 친에집트파가 정국을 주도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킴 시절 가장 대표적인 재야 급진파 인사였던 것 같다. 그는 왕의 강력한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비판의 소리를 드높였다. 아마도 이 시기 그의 명망이 크게 상승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요시아 왕 시절 개혁의 주도세력의 하나이던 힐키야 대사제의 아들이었다(「예레」1,2; 「열하」22,4․8). 동시대에 유력한 사제 가운데 동일한 이름의 사람이 두 명 있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예레미야서에는 살룸이라는 그의 삼촌이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요시아 개혁 당시 핵심세력의 하나였던 여예언자 훌다의 남편이다(「예레」32,7; 「열하」22,14). 즉 예레미야는 요시아 개혁을 주도했던 사제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요시아 개혁을 지지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요시아 말기 피상적인 개혁에 그치고 마는 현상을 간파했고 그것을 비판했다(「예레」4,3이하; 8,4~7). 그는 요시아가 죽은 직후 암하아레츠가 주동하여 일으킨 정변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사건으로 인해 즉위한 여호아하즈가 강제로 폐위당한 것에 그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너희는 죽은 왕(=요시아) 때문에 울지 말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오히려, 너희는
 잡혀 간 왕(=여호아하즈)을 생각하고 슬피 울어라.
 그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한다.
  ― 「예레」 22,10

여호야킴 왕에 대해서는 항상 그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고, 심지어는 왕의 시해를 충동하기까지 했다(「예레」22,13~17). 그래서 그는 수차례나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고, 그때마다 그를 후원하는 일단의 고위층 인사들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곤 했다. 그의 후원자들은 주로, 사반이나 악볼처럼, 과거 요시아 개혁의 주도세력을 형성하던 인물들의 후손들이었다. 게다가 예레미야서 36장 11~32절의 예레미야 필화사건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 급진파 인사의 과격한 발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시드키야 왕 시절,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는, 왕의 국정자문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드키야 정부가 후기에 친에집트 편향을 띠자 강력한 정책 비판을 가한다. 한번은 시리아-팔레스틴의 6개국(암몬, 모압, 에돔, 띠르, 시돈, 유다)이 예루살렘에 모여 반바빌론 연합전선을 모의할 때, 그 회의장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당대의 유력한 사제의 하나였던 하나니야와 논쟁을 하면서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27~28장).

이상과 같은 예레미야의 활동의 초점은 국가가 바빌론에 우호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우리가 길게 그에 관해서 주목한 것은, 그의 활동이 당시의 친바빌론자들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당시 바빌론이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공지된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빌론과 싸운다는 것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자주적 주권정부가 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지만,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예레미야의 판단으로는 그 전쟁은 전혀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가 더 중요시한 것은, 전쟁의 승패에 대한 판단 문제가 아니라(어쩌면 친바빌론 파의 일단의 세력은 이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빌론 치하든 아니든, 민중적 개혁에 정부가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식량을 대대적으로 반출하고, 백성을 강제동원하는 식의 정책을 중단하는 것은 개혁의 전제 조건인 것이다.

결국 시드키야는 반란을 일으키고, 끝내 예루살렘은 정복당하고 불타 없어지고 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다. 또 수많은 촌락과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인근의 여러 성읍들의 파괴의 흔적들이 고고학을 통해서 발굴되었는데, 그 참화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만큼 처참한 잔해를 볼 수 있다.

바빌론 당국은 유다 같은 작은 지역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여전히 강력한 저항을 펼치고 있는 띠로와 시돈을 정복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그 후원세력인 에집트를 제압하는 데 그들의 서방원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러니 친바빌론 입장의 유력인사에게 위임통치를 맡긴다면, 이 사소한 지역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 그달리야였다.

그는 유다의 가장 유력한 가문의 하나인 사반 가문의 후손이었다. 이미 보았듯이 이 가문은 친바빌론 노선의 세력 가운데 가장 유력한 가문이다. 또 그달리야는, 라기스에서 출토된 한 인장에 의하면, 시드키야 당시 군부 지도자의 하나였던 같다. 즉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실재로 그의 정부 내에로 과거 유다 군의 잔존 세력이 속속 투항해 왔음이 분명하다(「예레」40,8). 정국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그의 직위는 아마도 총독이 아니라 왕이었던 것 같다. 성서는 그의 공식 직위를 한번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41장 10절의 ‘왕의 딸들’이라는 표현이나 41장 1절의 ‘왕의 장관’이라는 표현은 문맥상 그 왕이 게달리야를 지칭할 경우에만 자연스러운 진행을 나타낸다. 아마도 텍스트 저자들은 그가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게달리야는 바빌론으로부터 왕으로 위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재로 바빌론의 입장에서, 총독부라는 새로운 관리기구를 설치하는 것보다는 왕권을 승계하는 것으로 할 때, 가장 손쉽게 이 지역을 안정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게달리야(Gedaliah)는 자신의 새 도읍을 미스바로 정했다. 이것 또한 유의미하다. 예루살렘을 이미 잿더미가 됐으니 도읍으로 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여러 대안이 나올 수 있는데, 그는 그 중에서 미스바를 선택했다. 우선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이니, 위치상 적합했다. 그밖에 요새도시들은 필시 바빌론 군에 의해 거의 완파됐을 터이니 예루살렘과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 가운데 그는 왜 하필 미스바를 택했을까? 그런데 독자들은 이 지명이 매우 익숙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이 곳은 지파동맹 시절 유명한 성서가 있는 곳이다(「판관」20,1~3; 21,1~8; 「삼상」 7장; 10,17).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미스바는 국가로 이행한 뒤,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게달리야는 옛 전통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정부의 특징이 드러난다.

더욱이 정황은 개혁을 펴기에 매우 유리했다. 구왕족 치하에서 귀족노릇하던 많은 이들이 처형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 주인 없는 토지와 재산이 매우 많았던 것이다. 토지와 재산의 재분배가 가능했고, 이는 자신의 가문이 그토록 추구했던 신명기 개혁의 핵심 사안이기도 했다. 국가 경제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이 엄청난 국난은 동시에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인근 지역으로 피난갔던 유민들이 속속 돌아왔다. 그것은 그의 모종의 개혁정책의 대가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정부의 참여했음이 분명하다. 단, 그가 노령이었고, 여호야킴과 시드키야 당시 숱한 고초를 겪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건강상태는 퍽 좋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정책 자문역을 활발히 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게달리야의 정부가 채 꽃을 피우기도 전, 그는 측근 장교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주범 이스마엘은 구왕족의 방계친척으로, 아마도 다윗 혈통이 아닌 자가 왕이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는 게달리야가 민족을 바빌론에 팔아먹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민족-국가의 자주권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던 열광적 민족주의 당파에 속했던 귀족 출신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배후에는 유다 지역에서 도망해서 목숨을 건진 그 당파에 속한 인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에는 이 망명인사들을 보호하고 있던 암몬 왕 바알리스가 있었을 것이다.

3

본문의 내용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 텍스트에서 여호야긴 왕에 대한 아련한, 그러나 애틋한 기조의 기억을 남긴다. 마치 거기에서 희망의 단초가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는 포로로 끌려갔지만, 37년간 수감된 이후에는 바빌론 왕과 더불어 식사하고 후대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슬쩍 지나가는 듯한 문투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마감하는 부분에 나온다는 사실은 결코 지나쳐버릴 수 없는 암시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여호야긴이라는 인물은 불과 3개월간 등극했다가 제대로 왕권도 휘둘러보지 못한 채, 바빌론으로 유배된 인물이지만, 유다의 적어도 한 당파에 의해서 정통적인 유일한 왕처럼 여겨졌었다. 그의 삼촌인 시드키야가 그를 이어서 왕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반대파들은 여호야긴이 유일한 합법적 왕이라고 생각했고, 게달리야가 그 뒤를 이어 임명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당파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시드키야나 게달리야가 바빌론에 의해 임명된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주적 주권을 갖지 못한, 아니 오히려 주권을 외세에 양도함으로써 왕이 된 인물들이라는 혐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충분한 개연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시하는 여호야킴 왕도 외세인 에집트에 의해 위임된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여호야킴이나 그의 아들 여호야긴의 정통성도 의심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텍스트의 저자는 이 정파와는 대립적 입장에 있던 신명기 학파의 일원이다. 그러니 이들은 시드키야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게달리야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신명기 개혁 정신의 입장에서 볼 때, 시드키야처럼 별 성과 없는 통치자에 비해, 게달리야는 분명 뚜렷한 공적을 가진 인물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텍스트가 게달리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여호야긴을 합법적 왕으로일 뿐 아니라 희망의 전거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족-국가’라는 코드가, 신명기 학파든 귀족당파든 간에, 그들 모두에게 공지되고 있었던 전제사항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국가란 ‘다윗의 왕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다른 이가 왕권을 승계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재코드화인 것이다. 재코드화가 이루어지더라도 허용 가능한 코드화는 다윗의 혈통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훗날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만들려는 일련의 노력도 이러한 유다인들의 이해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다. 그것은 역사적 정당성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초역사적 상징성을 더욱 필요로 한다. 그 통치자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실천을 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징화된 정당성 메커니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유다인의 민족주의라는 늪을 헤어 나오지 않는다면, 그 텍스트의 정황에 허우적거리며 야훼신앙의 의미를 재현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텍스트가 사건을 읽고 있는 정황을 해체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게달리야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물론 영웅 만들기의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그를 선택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역할을 간소하게 묘사하고자 했던 텍스트의 의미화 전략을 밝혀냄으로써, 야훼신앙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를 시도하는 우리의 시좌는 ‘민중의 눈’이다. 즉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데, 장애가 되었던 하나의 요소인 유다 민족주의를 거두어 냄으로써, 민중적 읽기 전략을 더욱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듯이, 성서 읽기 또한 시간의 대화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이 텍스트 읽기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 시각을 민중의 눈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재현할 수 있는 한, 모세사건이나 예수사건은 바로 그러한 눈으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와 성서와의 대와가 바로 그 지점에서 더욱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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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에큐메니칼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최근 우리는,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판에서 두 개의 굵직한 뉴스를 받아 들었다. 하나는, 새로운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 총무로 노르웨이 출신 신학자이며, 에큐메니칼 운동가인 올라프 F. 트베잍 목사가 한국교회가 추천한 후보자를 제치고 피선되었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단체의 2013년 차기 총회(10회) 장소가 사도바울이 회심한 곳으로 알려진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제치고, ‘부산’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두 사안은 지난 8월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에서 함께 다루어졌다.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여기에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었으며, 그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해서는 관심 밖이다. 다만, 투표가 있기 전,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까지 교회협의회(KNCC) 회장 자격으로 제네바를 방문했다는 뉴스를 접한 터라, 그와 국내 주요 교단 지도자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가는 자못 궁금하다. 최초의 한국인(혹은 아시아인) 총무 배출의 기대도 컸을 것이고, 더하여 차기총회 유치라는 성과를 기대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절반의 성공이다. 걱정은, 사분오열을 넘어 수만여 개신교회가 각각의 하나인 듯 존재하는 한국교회 풍토에서 과연 ‘에큐메니칼 총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을까. 준비과정에서 빚어질지도 모를 여러 형태의 상황 예측이 비단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겐 절반의 성공이었을지 모르나, WCC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차기 총무와 총회 장소 결정 사이에, 공통적으로 이 운동이 끌어안고 있는 고민과 열망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총무 올라프 목사는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대의 조직과 신도수를 보유하고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내의 다양한 교파들, 특히 에큐메니칼 운동 참여에 미온적이거나, 참여를 거부해온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들과 대화와 관계증진을 추진할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교회’야말로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이 네크워크가 지역교회 현장(local church-grass root)까지 닿아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교회들’ 사이에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어 보인다고 지적한다. 2천 년대에 들어서며, WCC는 ‘와이드 에큐메니즘’의 가치를 내걸고, 로마가톨릭, 복음주의권(Evangelical), 심지어 성령운동(Pentecostal) 교회들과의 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심지어 미국 내에서 이들 교회들의 성장은 괄목할만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성장을 나타낸 곳 또한 이들 교회들이다.

냉전 해체 이후, WCC가 표방하던 여러 진보적 가치들이 퇴색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위기를 맞이한 듯 보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무기력’이 하나의 보기라 하겠다. 운동의 새로운 추진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에큐메니즘은  한국 상황(context)에서 이해되는 범주보다 훨씬 다양하고 넓다. 당장, 조직신학과 선교학, 기독교윤리학, 성서신학/해석학, 실천신학까지 전 분야에 걸쳐져 있다. 이를 기껏해야 진보적 기독교운동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고 보면, 에큐메니칼을 표방하는 교회들조차 그 범주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보수적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에큐메니칼을 여전히 이념적 차원에서 이해하며, 그 활동들을 ‘좌경’으로 분류한다. 그뿐인가 심지어 종교다원주의 운동으로 매도하며,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이들도 있다. 참으로 편협하다. 선출된 신임 총무의 말대로, WCC는 보다 강하고, 풍부하고, 넓어지는 방향으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 연대와 선교를 위한 지평을 확장해 나갈 것이다. 때문에, 부산에서 열릴 차기 총회는 역대 가장 큰 규모의 세계교회 모임이 될 것이라 예측된다. 개최지 결정 후, 중앙위원회 대표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와 관심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한국교회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성장을 이루었다. 그 성장의 저변에 복음주의 교회와 성령운동 교회들의 중추적인 역할이 있었다. WCC는 한국교회의 사례를 통해, 대화를 위한 여러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한국교회가 벌여온 통일을 향한 다방면의 노력과 화해의 증언들을 수집할 기회가 될 것이다.”

또 하나,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그것’이 있다. 성령운동 교회로 분류되는 순복음교단(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이 정식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순복음교회가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자신들의 교회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는 알려진바 없다. 다만, 몇 차례 조용기 목사 주도로 국제적인 에큐메니칼 세미나와 프로그램이 개최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그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와이드 에큐메니즘’을 통해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확장과 안정을 추구하려는 WCC의 열망이, 차기 총무와 총회 장소 결정 모두에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본론이다. 이 뉴스가 목사인 나의 사역과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애초에 ‘에큐메니칼’이라는 단어 자체부터 와 닿지 않는다. 아무리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려 해도, 좀처럼 이해되지도, 이해를 시킬 수도 없다. 이러다가 영원히, 이 단어는 진보적 교회운동, 예언자적 참여운동과 동의어 수준에서, 저들이 구호로 사용하는 단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념어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정죄를 위한 하나의 기준어가 되거나!

매번, ‘에큐메니칼’을 주제로 한 대화나 세미나의 결론은 ‘교회 현장 속으로’이다. WCC도 마찬가지이다. 늘 ‘Go to the grass root, share with the local church'를 외친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사실, 우리는 매주일, 아니 매일, 설교를 하거나 성도들과 대화하면서, 성경공부나 각종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면서 부지불식간 이 운동의 여러 주제들과 마주치고 있다. 교인들은 여전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궁금해 한다. 왜 교회는 분열되었는가? 이를 궁금해 하고, 각 교파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 이해는 다분히 피상적이다. 심지어 자신이 속한 교파에 대한 이해나 관심도 식어가고 있다. 어느 상가교회 간판을 보니 교회 이름 밑에 이렇게 써있다. ‘우리교회는 사당동 총신대학교가 속한 교단의 교회입니다.’ 맙소사!!! 교인 중 한 사람이 내게 한 말이다. “사람들이 요즘은 성당이 훨씬 더 쿨(?)해 보인대요. 그 쪽 교인수가 늘어나는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이 짧은 문장 안에도 어떤‘에큐메니스트’가 들으면 두세 번 정도 탄식할만한 단어들이 있다. 뿐만 아니다. 현장 안에는 여전히 ‘전도’와 ‘선교’가 혼재되어 있고, ‘해외선교’와 ‘세계선교’가 아무 성찰 없이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문화선교’는 기껏해야 ‘경배와 찬양’ 주위를 맴돌며, 대형마트 문화센터와 비슷한 제목의 강좌들에 ‘신앙’이라는 단어가 덧붙여져 교회당 외벽에 나부끼고 있다.

기왕에, 2013년 WCC 총회가 결정되었으니 말인데, 난 정말 에큐메니칼 운동이 먼저 내 안을 관통하고, 우리 교회와 성도들 속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굳이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표방하는 여러 주제들이, 다양하게 설명되고, 실천되어서 하나의 건강한 교회운동으로 ‘흐름’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에큐메니칼’이라는 ‘거대한(?)’ 단어로부터 교회협의회, 총회, 노회, 교회, 현장(grass root)으로 나아가고,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다양한 활동들이 목사들과 선생들을 통해 ‘에큐메니칼적’으로 해석되어, 노회, 총회, 교회협의회로. 나아가 연합과 일치로. 종국에 요한복음 17:21과 에베소서 4:4-6 말씀에 이르기를 바라는 바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한복음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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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들먹거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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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각주:1]
(향린교회 부목사)

2008년 12월 30일 오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의 할머니는 1911년생이시다. 그러니까 자그만치 98년이나 사시다 하늘로 가셨다. 무학(無學)이기에 무지몽매하지만 악착같이 살았다. 그러나 인생 내내 가난은 면치 못했고, 토속신앙을 오래도록 간직하다가 암 걸린 셋째 딸의 눈물어린 전도로 여든 살이 훌쩍 넘은 말년에 교회에 다니셨던 할머니였다. 나는 귀한 맏손자였기에 할머니께 귀여움을 많이 받으며 자랐고, 또 할머니랑 친하게 얘기도 나누고 흰머리도 뽑아드리고 귀지도 파드리곤 했다.

할머니는 TV를 보시며 언제나 중얼거리셨다. “참 좋은 세상이다~ 방안에 앉아서 세상 팔도를 다 보니 말이다.” 내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런 것들이 움직이냐”며 마냥 신기해 하셨다. 언젠가 한번은 어머니가 나에게 와서 하소연을 하신다. 네 할머니는 너랑 친하니까 네가 잘 말씀드려보라고~. 밤새 콩을 고르시다가 12시가 넘어서야 주무시는 어머니가 한번은 일이 많아 늦게 자서 피곤하다고 할머니께 말씀하신 모양이다. 그러니까 할머니 왈 “겨울은 밤이 긴데 왜 피곤해~” 어머니 왈 “밤이 길어도 12시 넘어서 자면 잠을 잔 시간이 얼마 안 되니까 당연히 피곤하죠?” 할머니는 이해를 못하신다. “겨울은 밤이 긴데 왜 피곤하지? 겨울은 밤이 긴데 말이야.” 이런 할머니의 쇠뿔 같은 고집과 우격다짐으로 나의 어머니는 고된 시집살이를 하셨다. 또 한 번은 옆 동네에 마실 다녀오시고서는 한 마디 하신다. “한태네 집에 갔더니 시계에서 뻐꾸기가 나와서 울더라. 근데 뻐꾸긴 산에서 울어야지 집에서 우니까 영 이상하드라.”

화투 치는 것을 워낙 좋아하셔서, 삼태기를 찾으며 “사쿠라가 어디 갔냐?”라고 말씀 하시던 분! 네 장씩 짝을 맞추며 홍단 청단 비약 똥약 등등이 있는 ‘민화투’를 치시다가 ‘고스톱’이라는 것이 동네에 들어오자 혼자서 세 패를 만들어 놓고 고스톱을 연습하시던 분이셨다. 일제 시대에도 일본순사들과 둘러 앉아 화투를 치셨다고 얘기를 해 주시곤 했다. 한국 전쟁 난리통에 피난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 왔는데 이불 속에 총알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는 이야기며, 중공군이 내려와서 무서워 방안으로 숨었는데 중공군은 부엌을 둘러보고 흐트러진 신발을 나란히 정리해 주고 떠났다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어깨너머로 들은 풍월로 숙영낭자전을 외우셨고, 황국신민서사를 일본말로 하시던 기억도 난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일산 쪽으로 가다보면 마두(馬頭)역이 나온다. 할머니는 말머리 동네에서 태어나 거기서 사시다가 혼인하여 딸 둘을 얻고 남편과 사별한 후 나의 할아버지에게 재취를 하셨다. 우리 집은 교하니까 말머리에서 차를 타고 30분이면 오는 거리이다. 평생을 경기도 고양/파주의 한 지역에서 보내신 것이다. 9살에 3.1 독립만세 운동을 겪었을 것이고, 35살까지 일제치하에 살다가, 전쟁과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다 겪으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배움이 없었기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모르고 그저 살기 위해 살았을 뿐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문덕이가 초등학교나 들어가는 것을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우리 문덕이가 대학가는 것이나 보고 죽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니 내가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아 증손자까지 보시고, 하늘이 주신 수명을 다하고 돌아가셨다. 교회를 나가던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 제사에서 절을 안 하자 “저 망할 놈이 나 죽어도 제사 한 번 안 지내 주겠구먼!” 하시던 분이 내가 목사가 돼서 차를 타고 가면 “하느님,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죠! 차에도 계시죠. 그저 우리 문덕이 우로 가나 좌로 가나 앉으나 서나 늘 함께 해 주십사” 하시며 옛날 무당 불러서 굿하면서 손을 빌던 그 모양 그대로 기도하시던 분이셨다. 큰 글자 찬송가를 하나 사 드렸는데 그것을 달달 외우시며 특히 502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를 좋아하셨던 할머니셨다. 그렇게 교인이 된 어느 날 할머니의 딸들-나에겐 고모님들-이 찾아와서 이것 저것 물으셨다. “교회에 나가니까 어떠냐? 좋냐?” “뭐라고 기도하냐?” 등등 그런데 할머니의 대답이 가관(可觀)이다. “기도하지. 늘 너희들 위해서 기도해. 하느님 들먹거리면서 말이야”

1911년부터 2008년까지 촌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남편에게 대접 못 받는 대신 며느리를 구박하며 삶을 살아냈던 한 여인의 인생에서 교회는 어떤 의미일까?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 속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름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만 굴절되고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 세속사회로부터 칭찬이 아닌 비난을 함께 받아온 한국 교회는 이 땅의 민중의 삶에 무엇으로 기억되는 걸까? 방안에 앉아서 전 세계의 소식을 듣고, 숲 속의 뻐꾸기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과학시대에 종교는 무엇일까? 일제 식민지의 수치의 역사와 민족분단의 고통과 아픔 앞에서 그리스도교는 무엇이었나?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하느님 들먹거리며 기도하고 있다. 강단에서 목사들이 또 하느님 들먹거리며 열심히 외치고 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이시여!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들먹거릴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하느님을 들먹거리기 전에 구구절절한 한 인간의 삶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구질구질 맞은 그 삶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 바로 거기서 그 자리에서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하느님을 들먹거릴 때 과연 나의 신앙은 무엇일까?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앞에서, 그리고 나와 너 사이에서, 우리들의 신앙은 무엇일까?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시끄럽다며 물 한 바가지 퍼서 끼얹는 극성쟁이 할머니가 왠지 보고 싶다. 나지막하게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문덕아, 이리와 앉아라. 이 할미랑 얘기 좀 하자. 오늘이 며칠이냐? 초닷새라고? 으응~. 그래, 그래. 사람은 자기 얘기도 하고, 남 소리도 듣고 그러며 사는 게지. 이리 오렴~” ⓒ 웹진 <제3시대>

  1. 하느님 발길에 채여 산다는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하느님 발길에 채인 것이 자유라는 역설을 참으로 깨달을 날이 오기를 꿈꾼다. 하늘과 땅은 사랑하지 않는다(天地不仁)는 노자(老子)의 말과 한 걸음 물러나야 진정한 자기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退步就己)는 일본의 선승(禪僧)의 경구 그리고 전도서 5장 1절의 말씀 “하느님께 무엇인가 바치겠다고 너무 성급한 생각을 하지 말고 조급하게 입을 열지도 말라.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 매일 중얼거리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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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09.10.20 21: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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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가을 회원강좌> 역사로 읽는 성서 II

부족사회와 군주제사회 야훼신앙의 역사


• 강의 구성

제1성서(구약성서)의 기초가 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유다 왕국 말기인 히스기야 왕 혹은 요시아 왕의 왕실 서기관들에 의해 왕국의 역사 편찬의 일환으로 저술되었다. 그러므로 유다왕국의 역사와 제1성서의 많은 부분은 내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유다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 그리고 군주제 이전 시대인 부족연합사회의 여러 설화들로부터 왕국 역사의 큰 빚을 지고 있다.

이 강의는 팔레스티나의 두 군주국과 그 이전 부족연합사회의 역사와 제1성서를 함께 공부함으로써, 야훼신앙의 뿌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 강의 구성

첫째 마당(10.22) |  유다의 역사의 시작
둘째 마당(10.29)  |  다윗은 존재하였는가?
셋째 마당(11.5)   |  이스라엘 왕국
넷째 마당(11.12)  |  유다 왕국
다섯째 마당(11.19) |  예언자들
여섯째 마당(11.26) |  부족동맹에서 왕국으로의 역사


강사_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당대비평』 편집주간, 한백교회 담임목사 역임
                  『예수의 독설』 『반신학의 미소』 『예수역사학』 등

• 교재_매 시간 배부

• 참고자료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J. M. 밀러 & J.H. 헤이스 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W. 슈니디윈드 저; 에코리브르)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I. 핑컬스타인 저; 까치)

• 일 시: 2009.10.22~11.26(매주 목) 저녁 7:30~9:30

• 장 소: 한백교회당
        (5호선 서대문역 1또는 2번 출구, 신한은행-우체국 사이골목 30미터. 좌측 안병무홀<1층>)

• 수강료: 6만원(이 강좌는 회원강좌이므로 CMS 후원 신규 신청자와 기존 후원자는 무료입니다.)

• 신청방법: 02-363-9190으로 전화하시거나 yminjung@chol.com으로 신청 메일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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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가을 일반강좌>

전철의 [과학신학] - 21세기 과학시대를 대면하는 신앙

• 일자 : 2009년 10월 20일-11월 24일 (6강)
• 장소 : 서울 서대문 안병무홀
• 시간 : 오후 7시

강의일정/개요 (클릭하면 세부정보가 제공됩니다)

 | 10월 20일 1. 과학과 신학 - 자연학과 신학의 관계
 | 10월 27일 2. 근대적 과학정신의 거장 -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 11월 03일 3. 물질에서 마음으로 - 베이트슨의 정신의 생태학
 | 11월 10일 4. 지식과 지혜의 두 전승 - 몰트만의 자연신학
 | 11월 17일 5. 물리학자에서 신학자로 - 폴킹혼의 과학신학
 | 11월 24일 6. 헤겔, 백두, 루만의 변증법 - 미하엘 벨커의 창발성신학
 |
 | 신학동네 참고자료

• 강의목적 : [과학신학] 강의는 21세기의 과학시대에 있어서 신학은 어떠한 방식으로 신학적 세계상을 구축하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과학을 통해서 제시되는 자연학적 지식은 신학에 어떠한 의미를 미치는지를 여러 사상가들의 사유를 검토하면서 추적하는 것이 이 강의의 과제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강의는 화이트헤드, 베이트슨, 폴킹혼, 몰트만, 그리고 미하엘 벨커의 과학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그간의 성과들을 점검하려 한다.

이 강의는 우리의 중요한 논쟁거리인, 창조론과 진화론, 마음과 물질, 태초와 종말, 그리고 자연과학의 시대에서의 신앙과 신학의 근본적인 지위를 성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 저자소개
전 철 | 한신대학교 신학부와 대학원(Th.M)을 졸업하였다. 한신신학연구소, 한국신학연구소, 기장신학연구소를 거쳐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미하엘 벨커 교수의 지도하에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개념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받았다. 현재는 한신대 외래교수이며 신학동네(http://theology.kr) 운영자이다.

• 수강료_ 6강 6만원 (수강신청 ☎ 02-363-9190, yminjung@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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