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 현대 기술 문명을 둘러싼 타락과 상승의 변증법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임청하’에 대한 추억

지금은 홍콩영화의 열기가 사그라졌지만, 90년대 내내 홍콩영화의 파워는 한류열풍의 원조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했었다. 쟝르상의 특성으로 홍콩영화를 분류할 때, 80년대 중,후반이 ‘영웅본색’류의 홍콩판 조폭영화들이 르네상스를 이뤘던 시대라면, 90년대 후반은 중국으로 할양되는 홍콩 젊은이들의 잿빛미래를 감각적 영상으로 담아냈던 왕가위 감독 시대라 할 만하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90년대 전반기의 홍콩 영화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쟝르가 바로 현란한 액션과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무술사극이었다.

필자가 당시 중국무술 사극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배우 ‘임청하’때문이었다. 얼음장과 같은 차가움과 중성적 매력까지 지녔던 임청하는 80년대 학생운동권(주로 PD계열 남학생들)의 영웅이었던 로쟈룩셈베르그의 서늘한 관능미를 연상시키며 나로 하여금 그녀의 열열한 매니아가 되게 하였다. 내가 임청하를 처음 만났던 영화가 바로 ‘신용문객잔(이혜민 감독, 1992)’이다. 이 영화는 임청하, 장만옥, 양가휘 등 90년대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배우들이 함께 등장하여 화제를 모았던 영화였고, 이후 등장하는 무술사극 열기에 기름을 부었던 영화라는 측면에서 기억에 남을 만 하다.

사막가운데 위치한 용문여관을 무대로 극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은 서로 다른 매력을 지녔던 임청하의 서늘함도 아니고, 장만옥의 농염했던 백치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용문여관의 주방장이 지녔던 기술, 특별히 양의 각을 뜨던 얼치기 주방장의 현란한 칼솜씨이다.  

동양에서, ‘기술’은 어떻게 ‘도’로 상승하는가?

영화 ‘신용문객잔’을 보고 4년이 흐른 뒤에 나는 철학과에서 개설되었던  <장자>강독에 참여한 바 있다. 함께 책을 읽던 중에 <장자>, ‘양생주’에 등장하는 포정이 소 잡는 이야기를 접하고는, 불현듯 잊고 지냈던 용문여관의 주방장이 떠올라 나 혼자 비디오 가게에서 테잎을 빌려 주방장이 양을 잡는 장면만 몇 번이나 돌려봤던 기억이 있다.

백정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손, 발, 무릎, 어깨를 모두 이용하여 소를 잡았는데, 뼈와 살을 발라낼 때의 칼쓰는 소리가 마치 옛 선인들의 음악소리 같았고, 그 동작 역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절도에 맞았다고 한다. 이를 본 문혜군이 “소잡는 기술이 어떻게 해서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하고 물었더니, 포정이 대답하기를; “제가 즐기는 것은 ‘도”입니다. 도는 기술보다 위에 있습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는 눈 앞에 놓여있는 소를 보는 데 급급했지만,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저는 마음으로 소를 만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손을 놀립니다”  

위의 예는, 동양적 사유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도’가 어떻게 기술에서 시작해서 ‘도’의 경지로 상승하는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소를 봐도 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3년이 지나자 비로소 소 전체가 눈 안에 들어왔다고 포정은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소를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손을 놀릴 때도 눈의 감각이 아닌 마음으로 놀린다고 말한다. 확실히 서양의 영, 육 이원론과는 다른 사유다. 물론 물적 축적에 따른 질적 승화를 언급하는 변증법적 논리학이 영과 육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서양적 해법으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적 사고는 몸이 점차 대상과 합일되는 과정에서 마음의 테두리(범주)를 해체하고, 사물을 향해 여과 없이 투신해 가는 동양적 합일의 개념과는 그 발상이 다른 듯 하다.

다시, 근대를 묻다

지금까지 동양적 전통에서 기술이 도의 경지로까지 승화되고 있음을, 우리는 <장자> ‘양생주’에 등장하는 포정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에 반해, 서구 정신사에서 기술은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

근대는 인간의 전 영역을 합리화하는데 성공한 시기였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합리화되면서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였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가 합리화되면서는 봉건제가 물러가고 자유와 평등을 특징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사회운영의 기본원리로 등장하였다. 인간은 최종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마저 합리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비신화화와 비종교화를 언급하고는 마침내 신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근대가 선물한 명절 종합선물세트와 같다. 생산물의 확대를 위해 과학과 기술이 사용되고, 생산관계의 개선(노동력 확보)을 위해 근대는 봉건제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선포하고 급하게 이를 앞당긴다.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자본주의의 생존방식인 소비의 미덕을 찬양하고 향락에 대한 동경을 부추기기 위해 자본은 신마저도 저 높은 곳에서 끌어내려 살과 땀냄새 나는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뒹굴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상에서의 삶은 (신에 의해) 긍정이 되었고, 필요와 need를 추구하는 우리의 탐욕은 현대 시민사회의 덕목 중 하나로 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이 모두가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술책들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근대(성)의 프로젝트에 대해 조밀한 분석을 시도한 집단이 있었으니, 흔히 ‘비판이론’(Critical Theory)으로 알려진 프랑크푸르트 학파이다. 기본적으로 맑스의 세례를 받은 이 그룹의 대표적 인물들로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유명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있고, 21세기 기술복제시대의 미학이론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발터 벤야민, 맑스와 정신분석을 연결하고자 했던 마르쿠제 등이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라 할만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비교적 덜 활동적이지만, 현존하는 철학자중 가장 잘 팔리는 위르겐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2세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 기술은 어떻게 (근대와 맞물려) 타락하는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그들의 논지를 끌어오기 위해 사용했던 ‘비판이론’은 관념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 시대 물화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실증주의(positivism)’에 대한 비판이다.[각주:1]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이러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기획되었다.

우선 그들은 두 종류의 이성에 대해 논한다. 하나는 봉건제의 압제와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반성적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도구적 이성으로 자연에 대한 기술적 조작과 통제를 그 목적으로 한다: “이성은 스스로를 보편적 주체로 서게 함과 동시에……이성은 자기 보존을 위해 세계를 제어하는 계산적 측면도 갖는다.”[각주:2] 도구적 이성의 견지에서 보자면, 자연(대상)은 오로지 ‘얼마만큼 인간에게 쓸모 있는가?’로 평가된다. 계몽의 변증법 저자들은 이를 전체주의적 논리라고 꼬집는다.[각주:3] 

도구적 이성이 말하는 전체주의적 논리는 타자를 전유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동일성의 논리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 그리고 성숙의 과정을 지탱하는 뼈대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는 대상에 대한 끝없는 착취를 통해 자기 존재가 증명되는 원칙이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착취와 그 다음 착취의 대상으로의 이동은 환유적 연결고리로 이어져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간 것은 사과이고, 사과는 맛있고,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긴 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른 것은 비행기”이다. 이 문장에서 의미란 없다. 단지 문장이 끊이지 않고 대상이 바뀐 채 계속 이어지는 것이 의미라면 굳이 의미일까. 자본주의는, 맛있는 건 바나나-긴 건 기차-빠른 것은 비행기로 계속 (환유적 연결고리를 따라) 의미가 미끄러져 가듯, 그 착취의 대상이 자연이건, 인간의 노동력이건, 인간의 감정과 꿈까지도, 하물며 (반자본주의적이어서)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것들까지도 자기증식의 욕망 안으로 빨아들이는 강력한 의지이며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근대의 프로젝트에서 기술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맹아들이 싹틀 수 있도록 하는 토양을 제공하였고, 산업혁명 이후 자본의 급작스런 팽창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을 가능케 했으며, 현대에 이르러 기술은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을 구현하는 마법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기술은 급기야는 원본과 복제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오히려 복제가 원본을 대신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평가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리틀리 스콧 감독, 1982)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replicant 생산을 모토로 탄생한 타이렐사의 복제인간 레이첼처럼 말이다 (그녀는 다른 복제인간과는 달리 어릴 때 기억이 입력되어 있어서 자신이 진짜 인간이라 믿는다). 이렇듯 기술이 발전할수록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더 모호해지고,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 조차 검증 받아야 하는 시대, 이를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 세계라 말한다.

에필로그: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문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발생한 기술이 (혹은 기술의 부산물들이) 이제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에게서 고안된 것들이 그 칼날을 우리에게로 향한 채 다가오는 전혀 새롭고 낯설고 불안한 경험을 인류는 최초로 하고 있다.[각주:4]

새의 깃털을 모아 밀랍으로 붙힌 뒤 날개를 만들어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이카루스처럼, 인간은 한쪽에는 최첨단의 테크놀로지로, 다른 한편은 자본의 논리로부터 흘러나오는 욕망이라는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비상하고 있다. 다이달로스가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이 밀랍을 녹여 떨어질 것을 경고 했으나 이카루스는 계속 태양을 향해 고도를 높힌다. 신화에 의하면 이카루스는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것에 도취되었다고 말하지만…글쎄…, 점점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이카루스도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불안이 시작되고 그 불안으로 인해 영혼이 잠식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비상을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현대 기술문명의 현재와 미래가 이카루스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냥 이 비상을 멈추고 추락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물론 자본의 달콤한 논리와 속삭임이 추락하는 우리를 그냥 놔두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에잇! 그냥 눈 질끈 감고 추락해버리자!! 그리고 나서 우리가 무엇을 다시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빠른 선택이 아닐까? 이 불쾌와 고통의 반복강박을 계속 반복하는 것 보다는 말이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의 하강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런지….

ⓒ 웹진 <제3시대>

  1. “부르주아 사회는 동일성에 의해 지배된다. 그것은 다름을 추상적인 양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계몽에 있어 수나 궁극적 일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환상이 된다. 근대 실증주의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하여 지워해버린다”- M. Horkheimer and T. Adorno, Dialectic of Enlightenment (New York, 1972), 7. [본문으로]
  2. Ibid., 83-84. [본문으로]
  3. “계몽사상의 경우, 계산과 효용의 원칙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의문시된다….그에 대한 정신적 저항은 단지 그 힘을 강화시킬 뿐이다. … 또한 이 같은 신화에 반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항세력이 어떤 신화를 제시할 경우, 이러한 신화조차 계몽적 이성의 용해적 합리성의 원칙에 굴복하고 만다. 계몽주의는 전체주의적인 것이다.”-Ibid., 6. [본문으로]
  4. 한스 요나스는 기술문명에 대한 윤리적 논의를 하면서 “공포의 발견술”을 언급한다: “완전히 새로운 양태의 권력과 이러한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한 양식들을 예속시킬 수 있는 선과 악의 규범에 관해서 전통 윤리학은 아무것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우리가 고도의 기술과 함께 들어서게 된 집단적 실천의 처녀지는 윤리 이론에 관점에서 보면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미개지이다. …… 무엇이 윤리의 나침반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심상치 않은 상황의 변화, 위험이 미칠 수 있는 전지구적 범위, 그리고 인간의 몰락 과정에 대한 징조를 통해서 새로운 윤리적 원리들이 발견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공포의 발견술’이라고 명명한다.” – 한스 요나스, 『책임의 원칙』 (이진우 역, 서광사), 5-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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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탈로스의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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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그 무렵에,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창세기」 6장 1~4절

이 텍스트는 한 편의 수수께끼 같다. 하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 그랬더니 ‘인간’의 수명이 줄게 되었다고 한다. 무슨 소린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의 아들들과 결혼했다면 사람에게 좋은 일인 듯한데, 그 결과는 뭔가 잘못됐다는 분위기다.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다음 말은 한술 더 뜬다. 느닷없이, 그 이후 거인족이 살게 되었는데, 이들의 정체는 하늘의 아들들과 땅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이라고 한다. 황당하다. 이런 종족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보면 탄탈로스라는 이가 나온다. 그는 시피루스라는 나라의 왕이었고 대단한 자산가였다. 어느 모로 보나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그는 신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제우스는 종종 그를 신들의 잔치에 초대한다. 신만이 마시는 술(神酒)을 먹으며 신들과 담소를 나눈다. 그는 신과 같은 반열로 올라간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신주(神酒)에 취해버렸다. 잔치 속에서 그는 자신이 신이 된 착각에 빠진다. 다시 사람의 세상으로 내려가기가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그는 땅으로 내려와 땅의 논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사람의 음식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 사람의 진실에 진지해져야 한다. 속으로는 ‘이 얼마나 허망한 짓인가’ 라며, 조소로 가득한 마음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탄탈로스는 신의 권력을 흠모하며, 신의 잔치의 영원한 손님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욕망은, 그로 하여금 사람의 진질을 귀담아 듣지 못하게 하였다. 실상, 그의 ‘돌아섬’은 육체 밖으로 나가려는 욕망의 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는 세상에 대한 외면을 통해서 자신이 정말 그러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자기는 남들과는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가치로 사는 존재라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궁궐이 신의 잔치마당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하여 이번에는 그가 신을 초대한다. 신들을 위한 향연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초대된 순간만을 향유할 뿐인 손님의 자리가 아니라, 잔치의 영원한 향유자인 주인의 자리에 앉고픈 것이다.

성대한 잔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것으론 양이 차질 않았다. 그에겐 모든 것은 한갓 세상의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최후로 그는 비장의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바로 ‘자기의 아들’이었다. “이 얼마나 숭고한 잔치상인가? 누구도, 이만한 향연을 주최할 순 없으리라.”

그러나 이것이 그의 추락의 계기였다. 그의 상승 욕망은 결국 그를 타르타로스라는 ‘지옥’같은 곳으로 인도한다. 목까지 차는 물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목이 말라 고개를 숙이는 순간 물이 마르고, 눈앞에 과실이 열려 있는 데도 배가 고파 손을 뻗치는 순간 멀리 사라져버리는 그런 곳이다. 끝없는 욕망의 공간이며, 결코 충족되지 않는 고통의 공간이다.

Honoré Daumier 작 <Tantalos>(1842)

탄탈로스는 끝없는 상승 욕망의 노예가 된 자를 상징한다. 그는 남보다 우위에 있는 자기를 즐기고자 했으나, 그것이 다른 이들이 밟고 있는 같은 땅 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가치를 실현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망각한 존재다. 그는 다른 이들의 삶과 가치를 무시하고서만 실현되는 욕망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것이 신의 권력이라고 믿었다.

신의 권력이 확인되는 잔치의 손님이 된 자화상을 그린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잔치가 생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을 위한 잔치를 주최한다. 그러나 그가 초대한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의 권력이었다. 이 욕망을 위해서는 무엇을 대가로 지불해도 좋았다. 그리고 그 끝은 자기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것이 타르타로스, 곧 끝없는 욕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다시 「창세기」 4장의 텍스트로 돌아가 보자. 1절에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람의 딸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딸들이 누구냐,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 그들이 어떻게 됐느냐 등에 대해선 이 본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이 본문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그 무언가에 관련된 주역은 바로 ‘하늘의 아들들’이며, 여기서 ‘사람의 딸들’은 단지 하늘의 아들들로 나오는 존재의 소행과 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부가적인 조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들’(베네 하 엘로힘)에서 ‘아들’이라는 말은 물론 혈연적인 자녀라는 뜻에 국한되지 않는다. 직역하면 ‘~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천사일 수도 있고, 악령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 천사건 악마건, 이들은 인간의 어떠한 성향과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들’은 어떠한 성향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일까?

본문에 따르면 행위의 주체인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취했다고 한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행한 이 일의 요체는 ‘욕망’에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욕망’이라는 성향의 존재들이다. 이들이 욕망한 것은 ‘땅의 가치’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들이 추구한 것은 ‘땅의 가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이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하늘의 가치가 아니라 땅의 가치였다는 것이겠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라는 자의식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했다. 자신의 욕망의 실현이 곧 하늘의 가치와 맞닿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치 하늘의 지혜를 알려고 ‘선악과실’을 먹은 아담의 ‘착각’처럼 말이다. 요컨대 이들은 아마도 탄탈로스처럼 신을 사모하는 방식을 신의 권력을 욕망하는 것으로 표현했던 존재들인 것 같다.

이 내용은 3절의 내용과 바로 연결된다. 즉 ‘하늘의 속한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결혼한 결과, ‘거인들’의 탄생했다는 것이다. 2절의 내용, 즉 사람의 수명이 120세로 줄게 되었다는 말은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자연스런 논리의 흐름을 깨뜨리고 있다. 그러니 먼저 3절을 보고, 뒤에 2절이 끼어든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좋은 독서방식이다.
본문에서 ‘거인’은 ‘힘’으로 표상되는 존재다. 즉 이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힘’이었다. 신의 권력을 추구한 결과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탄탈로스처럼, 본문의 욕망의 결론은 ‘힘만이 생존의 논리’인 존재들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수명이 줄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여기서 ‘사람들’은 1절의 ‘사람들의 딸들’과 동일한 대상이 아니다. 앞의 구절이 ‘하느님의 속한 자들’에 대응하는 하나의 수사어로 쓰인 것이라면, 여기서는 ‘인간 일반’을 가리킨다. 인간에게 ‘하느님의 숨’이 120년밖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의 초점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한계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데 강조점이 있다. 즉 욕망의 대가는 창조의 생명력을 상당부분 손실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해봤자, 120년밖에 살지 못하는 것을 ......”이라는 냉소인 것이다.

이 텍스트는 「창세기」 처음부터 계속되는 일련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과정은 신의 권력을 추구하는 욕망의 대가로 세상은 더욱 죄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 모방 욕망’은 ‘인류 문명의 발전’과 대응하고 있고, ‘죄’는 ‘고통’과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끝없이 탄탈로스의 잔치를 벌이면서, 그것의 발전에 도취한다. 그것이 마치 신의 축복의 증거이기라도 한 양 말이다. 그것이 마치 신의 반열에 이른 인간 자아상의 확인인 양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바로 도정에서, 본문은 그러한 대단치도 않은 인간의 호들갑이 길어야 120년에 불과함을 냉소하고 있고, 나아가 이러한 인간은 욕망의 쳇바퀴 속에 갇혀 반복되는 고통과 절망을 체험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역사의 이 비밀을 알아낸 인간은 이 욕망의 쳇바퀴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한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기다림’의 요체인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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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도, 당신 호흡의 열매입니다’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아직도 어렵다. 아무리 돌이켜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 중에도 있다. 차를 몰고 가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종종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은 전율을 동반하는 것들이다. ‘용서는 결국 다 잊는 것’이라는데, 난 아직 멀었나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두렵고 부끄러워진다. ‘그동안 조금도 성숙하지 않았단 말인가!’ 언젠가 읽었을 때에도, 오늘 다시 읽어도 이 말씀은 여전히 어렵다.

마음 한 가운데서부터 ‘기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기도를 하는데 명치끝으로부터 아주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솟구쳐 오르는걸 느꼈다. 분노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머릿속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목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에 비로소, 용서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은 것 같다. 용서는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것임도. 기도를 마치고, 다시 본문을 읽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던 사람들, 침 뱉고 조롱하는 사람들, 그토록 많은 은혜를 입고도 예수를 ‘강도’라고도 하고, ‘반역도당의 수장’이라고도 하는 ‘바라바’와 맞바꾼 어리석은 유대인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너나 구원해 보아라!’ 하고 빈정거리던 사람들, 어리석고 천박한 식민지 노예들끼리 서로 죽이고, 욕하고, 침 뱉는 장면을 지켜보며 로마시민의 우월감을 느꼈을 백부장들과 병사들. 제비를 뽑아서 그분 입으신 옷들을 나누어 가진 지독한 군인들.

이 모든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 그렇다. 그분은 용서마저도 아버지께 맡겨버렸다. 용서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용서해주시도록 기도하셨다. 바로 예수님의 방법이 아닌가!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하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맡겨버리셨다. 간음하여 돌에 맞아 죽을뻔한 여인을 구해주시고 물으셨다. ‘너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모두 갔습니다’ ‘나도 너를 용서한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단 한사람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죽어야만 했던 그 여인을 향해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그분이다. 그런 예수님도 이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잔인한 로마인들을 놓고서는 아버지께 맡기신다. 마치 깔데기를 통해 걸러져 나온 진액처럼, 주님의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새로이 해석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도, 하나님 당신의 호흡으로 생명이 된 열매들입니다” 치유의 지점이 아닐까? 그들 또한 하나님의 입김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바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아닌가!’

이라크의 한 기자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며, 죽어가는 아이들과 여인들을 지켜본 뒤 쓴 글이다.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아버지 위대하신 하나님! 혹은 아브라힘, 무싸, 아이싸의 위대한 알라여! 어떤 사람들은 정말 더러운 영혼을 지녔습니다. 당신께 기도합니다. 이 참상을 목격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 전에,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건, 그들의 피부가 어떤 색깔이건,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부어주소서! 그들은 모두 같은 세상, 이 거대하면서도 작디작은 세계의 시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릅니다. 자기들이 ‘단 하나의 민족, 인간이라는 종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웃을 용서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이것은 결코 계명 또는 의무가 될 수 없다. 칸트는 ‘사람의 행위의 윤리성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복한 정도에 의존한다’고 그의 윤리학에서 거듭 말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윤리적인 것은 항상 ‘너는 해야 한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느슨해진다면, 그 삶은 자연 비윤리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행하시지 않았다. 사랑도 용서도 결코 명령될 수 없다. 그것들은 항상 마음 전체를 요구한다. 혹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또는 목사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나 자신에게도, 사랑 받고 용서 받는 대상에게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타율적인 것은 윤리적 행동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독일의 설교자 ‘헬무트 틸리케’가 전한 이야기 하나를 인용해야겠다. 레마르크가 쓴 세계1차대전에 관한 책, ‘서부전선의 적막’의 한 장면이다. 한 독일군이 적군과 접전을 벌이다 포탄으로 패인 구덩이로 뛰어내렸다. 그는 거기서 영국군 하나를 보았다. 깜짝 놀라 총을 겨눴지만, 잠시 후, 영국 군인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영국군인의 상처가 독일군인의 마음을 녹인 것이다. 그는 먼저 자기 물병을 꺼내 부상병에게 마시게 했다. 영국군인은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 다음, 자기 옷에 달린 주머니를 열어 달라고 손짓했다. 그가 그 주머니를 열었을 때, 그의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봉투가 떨어졌다. 영국군인은 죽기 전에, 그 사진을 다시한번 보기 원했던 것이다. 독일군인도 그 사람의 손에 들려진 사진 속 영국군인의 아내와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처음 이 둘은 서로 싸우는 적이었다. 죽든지, 살든지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가 구렁텅이에 누워있는 이 부상당하고, 방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의 가족사진을 보았을 때, 그의 눈에 이 영국군인은 더 이상 원수나 무기를 소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두 차원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결국 두 차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쪽은 살기를 띤 군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한 존재’이며 ‘인격’인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가르침의 극단적인 자기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신께서 보시는 시선이었다. 그분은 늘 그랬다. 지금 주님을 향해, 침 뱉고, 조롱하고, 때리고, 모욕을 주는 ‘이 일들’을 하고 있는 저들도, 다른 한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호흡으로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 ‘예수의 목적’ 아니었던가! 진흙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에게서 진흙을 닦아내 밝고 윤기 나는 얼굴과 눈빛을 보신 분이다. 그래서 삭개오도 만나주셨고, 문등병자도 만져주셨고, 간음한 여인도 변호해주셨던 것이다. 내가 귀하듯, 저들도 귀하다.


여중생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김길태라는 사람의 얼굴을 버젓이 드러내고,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어떤 사람을 여과 없이 보여준 방송국 카메라는 너무 저속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말장난으로 ‘초상권이 존중받거나, 존중받지 않을 조건들’을 나열하는 경찰의 대변인은 비열했다. 그를 용서하는 몫은 일차적으로 피해자의 가족들이며, 광의의 범주에서 온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나쁜 놈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고, 사회에서 매장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가진 사람들의 갈증을 해결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카메라는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피의자’의 모습을 보며 조롱하고 있었다. 더러운 영혼들!

난 이제부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영혼들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심했다. 용서와 사랑은 결국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용서받아야할 수많은 기억들과 사랑받고 싶은 갈망을 위무해줄 것이다. 하긴, 진정으로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운 사람이라면,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행위도 자기 의지만을 쫓아 함부로 지껄이고,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형폐지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를 주었는가?"
그러자 사형찬성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을 창살아래 가두어 둘 권리를 주었는가?"

다시 또 사순절 한복판에 섰다. 황지우의 시 한 편을 덧붙인다.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 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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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네번째

풋내기 목사가 준비하는 하늘뜻펴기
- 잃은 사람들을 찾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교회의 사명은 어디에 있을까요?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나라의 운동을 지속하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한 것이고, 이들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기선교”라 이름 붙인 한국교회의 선교 풍조는 외국에 가서 적당히 관광을 즐기면서 형식적인 전도를 하는 것이거나 배타적 신앙관 속에서 타문화에 대한 이해나 존중 없이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심히 무례한 종교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잘못된 방식의 선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점은 실제로 많은 교회가 제 몸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제와 세상을 향한 봉사도 실은 제 몸을 불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기에 교회가 존재해야할 본래의 모습은 자꾸 사라져 가는 듯 보여 안타깝기만 한 상태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해 최소한의 생존은 해야 하고, 바울 사도의 말대로 일꾼이 삯을 받을 수도 있지만 끝까지 자비량 선교를 하였던 사도들의 뜻을 살펴볼 때 양적 교회 성장에 매몰된 한국교회의 모습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타인을 위한 존재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아야 합니다. 그 정신에 비추어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만이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참으로 역설적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가 자신을 내어 줌으로 부활하셨듯이 말이죠.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이들의 모임인 각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며 참된 선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 것이 이번 하늘뜻펴기입니다.


향린의 창립정신과 복음서(3)
향린의 선교 - 잃은 사람들을 찾아
요나 4, 9- 11 ; 루가복음 19, 1-10

작년 한 해 향린교회는 선교비로 1억 6천만원 가량 사용하였고, 선교비는 총 결산의 약 28퍼센트의 구성비율이었습니다. 1994년 10월 교회갱신 실천결의문의 13번째 과제인 ‘적어도 예산의 30% 정도를 선교비에 할당하도록 한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향린교회가 선교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지난 15년 동안 남북화해와 동북아 평화, 한미군사동맹 철회를 위한 평화통일 선교,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해치는 전쟁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성차별, 소수자 차별반대 등의 인권선교, 농촌교회와의 농산물 직거래, 생태기행과 아나바다 운동 등의 생명환경 선교, 독거노인 목욕봉사, 반찬 만들기, 노숙인과 도시빈민을 위한 복지선교, 민주화에 역행하는 제도와 정책에 맞서 싸우고 교회의 비민주적 구조를 바꾸는 민주화 선교, 민중교회 지원, 1인 1사회단체 후원, NGO 기구들, 이웃종교들과 연대하는 에큐메니칼 선교를 해왔습니다. 목회자와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고 있고, 교회의 예결산을 공개하고 있으며 더 투명한 재정운영을 위해 지금 복식부기 방식을 연구 중입니다. 또한 지역사회 발전과 교회의 지역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교회 건물과 시설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출석교인 500명이 넘으면 분가하도록 하는 분가선교는 아직 논의 중에 있고, 장기적으로 사회선교센터를 세우는 것도 유급 사회선교간사를 두어 준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사회/선교부가 준비하고 있는 향린선교 정책 토론회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어린이/청소년 교우를 합쳐 700명이 넘는 우리교회의 선교활동을 보면 정말 다양하고도 참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1992년 공동의회 자료집부터 2009년 공동의회 자료집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두께가 점점 두꺼워 지고 있음을 볼 때, 향린의 선교와 활동이 더욱 다양하고 활발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마도 처음 교회를 창립했던 이들의 입체적 선교, 또는 입체적 교회라는 뜻이 지금까지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입체적 선교/교회라는 창립정신은 교인들의 삶 전체를 선교에 헌신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과 생활을 일치시키며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의 전선에 나서게 한다는 말입니다.[각주:1] 비록 향린교회 초기와 같이 교인 전체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자기 직업을 통해서 선교하는 일은 교인규모가 커지고 사회가 복잡하고 다원화 된 이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향린교회의 교인이 되어서 전 삶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정신은 오늘날도 살아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선교활동을 위해 향린교회에서는 11개 신도회, 8개의 각부위원회, 7개의 평화나눔공동체, 3개의 소모임, 구역모임 7개, 선교부 산하 5개 위원회, 사회부 산하 4개 위원회, 예배부 산하 3개 부서, 교육부 산하 5개 부서, 장기발전위원회, 당회, 공동의회, 제직회, 목회운영위원회, 향린공동체협의회 등등 59개의 모임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떤 모임은 1년에 한번 모이지만 어떤 모임은 월 1회, 또는 매주 모이는 모임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새 교우가 ‘미친 척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의 저자 A. J. 제이콥스처럼 향린의 모든 모임에 참석해보겠다고 큰마음을 먹는다면 한 10년은 꾸준히 다녀야 향린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루가복음을 탄생시킨 공동체는 마르코 공동체보다는 훨씬 규모가 크고 다양성을 담보하던 공동체였습니다. 루가는 열두 제자뿐 아니라(6:13 이하) 70인의 제자를 언급하고 있으며(10:1 이하) 이들이 모두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뽑힌 대표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들만 모두 82명이었으니 루가공동체는 아마도 59개의 모임이 있는 향린교회보다 더 큰 교회였을지 모릅니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방인 지역의 한 변두리에 모여 작은 소종파를 이루었던 마르코 공동체와는 달리 루가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난, 어쩌면 로마에 터를 닦고 있었던 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 공동체였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섞여 있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었으며, 열두 사도와 칠십인 대표와 같은 지도자들과 라오스라고 불리는 평신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루가복음서 저자는 경건한 유대전통의 그리스도교 계열에서 만든 예수의 어록을 읽었고, 이방인과 소외된 계층이 그리는 예수의 복음이야기인 마르코 복음서도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전에 자기가 들었던 예수 이야기와 이미 읽은 모든 이야기들을 가지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정확히 정리하여 한 로마관료에게 보냅니다(루가 1:3).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이제 더 이상 “어느 한 구석”(행 26:26)에서 일어난 불분명한 스캔들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의해 모든 사회 계층을 꿰뚫고 들어가며 다른 민족, 인종 및 계층의 벽을 뒤흔드는 생명력 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가는 제일 처음 유대인인 세례요한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야기로 끝을 냅니다. 우리는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같은 저자의 것임을 이미 알고 있고, 그래서 신학자들은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붙여서 루가-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 사회에 하느님 나라 운동이 펼쳐진 것처럼, 이제 이후 제자들과 평신도들을 통해 이방 세계가 변화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해방과 평등 경험에서 비롯된 이 공동체에 부자들이 동참하고, 로마 사회에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떼거리들이라는 의심을 받았던 상태에서 이 사회에 가치 있는 요소를 제공하는 공동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하여 이제 루가는 예수 사후 그 운동을 이은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온 세계에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로마시민들이 좋은 황제로 기억했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만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보다 훨씬 더 낳은 평화를 만드는 나라임을 증명해보이고자 했습니다.

선교를 교회의 핵심으로 삼는 향린교회와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정체성을 찾아갔던 루가 공동체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닮아 있습니다. 향린교회 구성원들이 교양 있고 주체적 안목을 가진 신앙인들인 것처럼 루가 공동체도 중상류층 이상의 교양인들이 쓰는 헬라어를 쓸 줄 알면서 주변 세계와 자신들을 성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사회적 환경에 대한 ‘현실적’인 해석을 하고, 그에 따른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 향린의 선교를 되짚어 보면서 루가 공동체의 경험을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천신학자들은 흔히 교회의 역할을 보통 복음의 선포인 케리그마, 교육, 봉사, 친교 이렇게 네 가지로 봅니다. 이 중 ‘봉사’로 번역된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뜻하는 단어로 흔히 일반교회에서는 교회 내 봉사를 뜻하는 것으로 말들 하지만, 실상은 세상을 향한 봉사와 섬김을 뜻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물론 세상을 향한 선교의 기지가 되기 위해 교회 내적인 것도 잘 추슬러야 함은 당연합니다. 교회가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인식이 필요하고 자신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며 백번 맞붙어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의 경구처럼 외부와 내부 모두를 살필 줄 알아야 적절한 선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쌓아온 민주정신을 이렇게 저렇게 실험하면서 실수도 하고 또 부족하지만 나름의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그 10년을 ‘잃어버린 십년’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정권을 잡은 지금, 역사는 오히려 거꾸로 흘러 후퇴해 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 국민들의 잘못이 큽니다. 투표권을 가진 우리 국민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가진 게 많고 그럴 듯한 학벌이 있고 힘이 있어 보이는 부자들이 나라 일을 잘 볼 것이라고 믿고 있고, 일부는 돈이면 다된다는 생각에 물들어 지금의 대통령과 여당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세계의 경제적 위기가 갈수록 심해지는 이 때에, 정부와 여당은 계속해서 5~20%만을 위한 정책을 펴면서 나머지 80-95%가 죽어나가도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산층들조차도 미국시민이 되려고 미국으로 가서 애를 낳는 원정출산이 유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부는 중산층에 들지 못하는 가난하고 어려운 국민들에게는 관심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1980년에는 전쟁에서 외국의 침략에 맞서 자국민을 보호해야할 군인이 국민을 폭도로 몰아 죽이더니, 2009년에는 국민을 보호하고 생명을 지켜줘야 할 경찰이 국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죽였습니다.

머리 속에 삽만 들은 지도자가 국정 운용의 기조를 ‘실용주의’로 잡아 성과와 효율만 내세우고, 군인이 정권을 잡고 무식하게 독재를 펼치던 시절의 ‘하면 된다’라는 군대식 사고로 국정을 운영하려고 하기에 모든 정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을 경쟁의 소굴로 몰아넣고, 언론과 한 통속이 되어 나쁜 거짓말을 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이라도 하면 사진 찍고 누명 씌워 끝까지 잡아들여 감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치 못하고,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그렇기에 조세희 작가는 오늘날 한국에서 행복해 하는 자는 도둑 아니면, 바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린 지난 70-80년대를 통해서 독재자의 말로를 보았고, 그들의 권력이 누구의 피땀을 착취한 것인지 온 몸으로 느끼고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시대를 역행하는 이 시기에 권좌에 있는 자들의 권력을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루가공동체는 로마대제국 안에 살고 있지만 로마의 황제가 마치 자신들이 신인 양 제 맘대로 하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루가복음서가 쓰이기 전의 로마를 다스리던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자신을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한 첫 번째 로마황제였는데, 유대인의 세금을 따로 거두기 위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90세 노인조차도 바지를 내리고 할례를 받았는지 조사하는 악독하고 교만한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의 귀족들에게 암살당하였고, 루가는 이렇게 교만한 황제의 죽음 속에서 “권세 있는 자를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루가 1:51-52) 하느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로마가 워낙 거대한 권력이기에 직접적인 정면대결은 못했지만 예수의 시험이야기에서 마귀를 로마황제의 모습으로 상징화하고, 사도행전 12장 20절 이하에서는 헤롯 아그립바가 자신을 신격화 시켰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루가공동체는 정치적 권력이 신성화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공격합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셔서 그 어른을 존중하고 그 어른의 삶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며칠 동안 명동성당에서 퇴계로까지 줄을 서서 조문하였습니다만, 그의 삶을 진정으로 되새기는 길은 그분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와 역사를 위해 촛불을 들거나 남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눈을 기증하시고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장기기증을 했다는 데, 그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되살렸던 예수의 불꽃을 계속해서 되살리는 길이 진정한 추모입니다. 루가공동체는 사도행전을 남기면서 바울의 순교를 적지 않습니다. 그가 우상처럼 떠받들어질까 염려한 것입니다.[각주:2] 오히려 하느님 나라 운동이 왕성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으로 사도행전이 마치는 뜻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산헤드린 앞에서 선교 금지를 당한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 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행 4:19-20) 이렇게 말하고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 주께서는 우리의 조상이며 주님의 종인 다윗의 입을 빌려 성령의 힘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인들이 떠들어 대고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의 그리스도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이 들고 일어나고 군주들이 함께 작당하였다.’”(행 4:24-26) 후에 다시 산헤드린이 이들을 호출하자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 5:29)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선교를 실행하려고 하는 향린교회는 이 정부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른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데 향린교회는 왜 촛불 들고 거리로 나갑니까? 다른 교회들은 장로님이 대통령 되셨다고 한 마음이 되어 좋아하는데 향린교회는 어찌하여 설교시간마다 MB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합니까? 다른 교회들은 은혜로운 복음성가와 찬송가로 노래하고 교회도 크게 짓고 목회자들을 많이 두어 온갖 편의를 제공하는데 왜 향린교회는 좁고 낡은 건물에서 어려운 국악찬송을 부르게 하고 평신도들을 설교까지 하게 하는 불편함을 감수합니까? 그것은 사람보다 하느님께 좀 더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보다 하느님의 말을 듣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바른 길로 가고, 그리스도교가 예언자적 종교가 되어 사회에 정의의 외침이 살아나게 하기 위해 향린교회는 화살촉과 같은 역할 즉, 민족문화의 수용, 교회 민주화, 그리고 평화와 통일, 생명과 인권선교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더욱 투철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해 내야 합니다. 향린교회의 존재의의는 바로 이러한 선교적 사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향린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넓고 큰 품을 가져야 합니다. 루가는 예수와 함께 처형되는 두 강도를 구별합니다. 한 강도는 로마병사처럼 예수를 조롱합니다만 다른 강도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예수의 무죄를 변호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장면을 통해 루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회심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루가 23:40-43). 심지어 그리스도교를 거절하는 사람도 루가에게 있어서는 잠재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혹시 압니까? 누가 압니까? 이명박 장로님도 회개하실지~.

루가는 바리새인들을 구별해서 볼 줄 압니다. 루가복음서의 전통적인 논쟁에서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로 그려지고 있지만(루가 11:37-54), 루가는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바리새인도 알고 있습니다(행 5:35 이하). 우리가 생각하는 답답한 보수적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중에서도, 또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분명 향린의 정신을 흠모하고 거기에 따르고자 하는 분들이 많이 있고 생길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 못 들어오게 하지만(루가 9:51이하), 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루가 10:25-37)과 감사하는 신앙(루가 17:11-19)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비판하는 대형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분들도 계시고, 하느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자진해서 나서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잃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루가는 정부와 권력자들을 묘사할 때도 구분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이는 악한 놈일 뿐이고(루가 3:19 이하), 예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루가 13:31 이하)일 뿐이고,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임을 알면서도 사형집행을 하는 폭군(루가 23:4, 14, 22)일 뿐이지만, 총독 서기오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접하고(행 13:4-12)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바울에 의해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향린교회의 구성원들 중에는 상당한 학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근대화 과정을 겪지 못한 탓에, 성공한 모든 이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된 것으로 알고 그들을 일거에 부정적으로 판단해 버리기 쉽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다는 것을 향린교회에 오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청년은 자기 친구를 교회에 데리고 오면서 “존경할 만한 어른을 보려거든 우리교회에 와 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전문성과 성실성, 바른 생각, 진정한 실력으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관료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러한 지도자를 키워야 합니다. 루가 공동체가 그러했던 것 같이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바로 향린교회의 선교 현실이고 가능성이고 잠재성입니다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선교의 핵심은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루가는 예수님의 선교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에토스인 예수 그리스도 휴머니즘을 발견합니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 죄인들 그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인간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잃은 사람들 당시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소외당하고, 때로는 여론에 의해 매도당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눕니다. 우리는 잃은 은전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지, 선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방법은 어때야 하는지 정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루가-행전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세례요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으라”(루가 3:11)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후원하라고 소수의 부유한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세례요한의 말을 듣는 이들은 ‘오클로이’ 즉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이 말은 속옷 두 벌을 가지고 두 사람이 공유하며, 먹을 것도 여러 사람이 함께 소유하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함께 서로 어깨를 기대어야만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루가-행전의 후반부의 주인공인 바울은 에페소의 장로들에게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나의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장만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 왔습니다.”(행 20:33-35) 이 말씀은 부자들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신이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면 부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고별연설은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자신의 경제적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바울은 경제적 독립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위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생계유지를 할 수 있었으나, 그 권리를 희생합니다.  즉 그는 부양받기 위하여 일하기보다, 오히려 주기 위해서 즉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일하였고, 그럴 때만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여야 할 의무가 있으며, 욥바와 다비다는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음으로써(행 9:36-43) 좋은 모범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단순히 돈 많은 세관장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식민지 지배 상황에서 세리들은 로마의 중개인 역할을 하면서 폭리를 취하기 일쑤였기에 세관의 우두머리라면 그런 혐의에 노출될 확률이 거의 100%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캐오가 남을 속여먹었다는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8절에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을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오히려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부자였고 세관장이었기에 매도를 당했던 자캐오가 오늘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구원을 얻었고, 예수는 그동안 소외된 삶을 살았던 자캐오를 방문하고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그로 하여금 나눔의 기쁨을 맛보게 함으로써 살 맛 나게 만들어 줍니다.

세례요한의 충고, 바울의 연설, 자캐오 이야기가 이루어 낸 선교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수평적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산주의(Communism of Love)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나누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남의 노동에 의해 자신의 경제생활이 가능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부자 될 권리를 포기하고 남에게 주기 위해 노동합니다. 그리고 부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모두가 구원을 이루는 선교에 동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하느님 나라의 가족이 됩니다. 이것이 루가가 꿈꾸던 선교였고 이상이자 목표였던 것입니다. 

개개인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돕는 실존적 차원에서의 선교이든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만 고통을 지우는 구조적 모순을 깨뜨리는 선교이든지 이 모두가 지향하는 바는 바로 모두가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일 것입니다. 향린교회에 오신 분들이라면 모두 그런 세상을 꿈꾸며 그런 세상을 이루도록 도전할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청남 수련회에서 사회적 기업에 대해 함께 공부했던 것, 지난 주 우석훈 선생을 모시고 강의를 듣고 토론했던 것 모두가 그런 노력의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장기와 재능과 물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각양의 모양대로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쓰실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땡전뉴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괘종시계가 9시에 가서 “땡”하고 울리면 제일 첫 소식이 전두환 씨의 소식이었기에 땡과 전두환 씨의 성을 따서 땡전뉴스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땡전뉴스에 나오는 전두환 씨의 호는 “오늘”입니다. 언제나 뉴스에서 오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어쩌구 저쩌구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그의 아내 이순자씨의 호는 다들 아시겠지만 “한편”이었지요. 그럼 이명박 대통령의 호는 무엇일까요? 제가 최근 한겨례 21을 읽고 안 사실인데 이명박 대통령의 호는 “한때”가 아닐까 합니다. 지난 1년간 이명박 대통령이 쏟아낸 말들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도 한 때 기업해봐서 안다.” “나도 비정규직 노동자로 출발해 최고경영자가 된 터라 태생적으로 노동자 프렌들리다.” “나는 여러분 환경미화원의 대 선배다.” “나도 질문자 나이 때 황학동에서 일용직 노동일을 했다.” “나도 학생 때 학생회장 하면서 데모를 했다.” “가난의 대물림은 끊어야 한다. 내가 산 증인이다.” “나도 한 때는 여러분처럼 노점상인이었다.” “나 자신이 한때 철거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디 가서든지 “나도 한때는”이라는 말을 늘 하고 다닙니다.

우리가 선교의 현장에 서야 할 때 가장 주의할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나도 한 때는 무엇 무엇 해봤다~”. MB처럼 한 때에 무언가 해 봤다고 떠드는 사람은 거의 현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주의해야 할 단어는 “앞으로”입니다. “지금은 좀 어렵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 하겠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과거와 대비해서 지금은 좀 어렵고 미래에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한 때 잃은 사람을 찾아 선교를 했다고 지금 잃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분명히 말합니다. 지금 잃은 사람을 찾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도 거의 찾아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루가복음 9장 23-24절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한번 더 읽겠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 잃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제 목숨을 잃는 사람 즉 미래에 목숨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 목숨을 잃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한 때”나 “앞으로”가 아니라 매일 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때 십자가를 졌던 사람입니까? 앞으로 질 사람입니까? 아니면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까?

하느님은 요나 같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와 하느냐? 이 땅 조선반도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수백만이 되고, 뭇생명들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하여 이 땅을 아끼지 않겠느냐?”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돈에 휘둘리지 말고 오히려 불의한 재물로 사람을 살리시오.
가난하더라도 떳떳함을 잃지 말고
부자가 되더라도 하느님 두려운 줄 아십시오.
고통 속에서도 넘치는 평화를 맛보고
눈물 속에서도 그리운 자유를 누리시오.
매일 그대들의 자리에서 예쁜 사람꽃 하나 피어나게 하시오!


ⓒ 웹진 <제3시대>


  1. 『향린40년사』, 79p. [본문으로]
  2. 사도행전 14:11이하에서 군증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생각했을 때, 바울과 바나바가 당황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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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해방: 세포에서 공동체까지』

지은이 : 찰스 버치, 존 캅
옮긴이 : 양재섭, 구미정
출간일 : 2010년 4월 6일
펴낸곳 : 나남출판
쪽수 : 568쪽
값 : 3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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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0차 월례포럼 안내

   저항과 포획의 서사 : 기독교신여성의 성ㆍ사랑ㆍ결혼

▣ 강의개요_

안녕하세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입니다. 4월을 마지막주를 맞아 제130차 월례포럼을 엽니다. 이번 월례포럼에서는 1920년대를 전후해 형성된 다양한 혼인담론을 통해 기독교신여성의 삶을 재구성하려 한 한 연구를 소개하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번 포럼을 통해 발표되는 연구에서는,

(1) 1920년대 생산된 혼인담론의 성격과 특성을 검토하고,

(2)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을 바라보는 한국기독교의 두 시선을 검토한 후,


(3) 독신여성의 길을 선택한 김활란, 결혼과 이혼을 주체적으로 결정한 박인덕, 가부장적 윤리의 경계를 넘나든 나혜석이라는 세 기독교신여성의 삶의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이들이 가부장주의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포획당하는 지점들을 검토하려는 기획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강사_ 이숙진

성공회대 초빙교수, 본 연구소 운영위원 

▣ 일정_ 4월 26일(월) 오후 7시~9시

▣ 장소_ 한백교회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 우체국 신한은행 사이 골목 50m)

▣ 문의_ ☎ 02-363-9190, yminjung@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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