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 없는 바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어 멸망시키시고, 그들을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셨으니, 죽은 그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사망한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26장 14절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제국 이후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사회를 엮는 가장 중요한 고리는 ‘폴리스’였습니다. 이 고대 제국 시대의 폴리스들은 대체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왕성한 국제교역을 매개로 서로 연동되어 있었습니다. 배는 육로를 통한 운송보다 수십 배나의 운임비를 절감할 수 있었고, 또 비교적 안전하며 또한 대량수송을 가능하게 했지요. 하지만 그만큼 배를 소유하고 운용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해서 지중해를 오가는 국제무역의 시대는 부자들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활짝 연 것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었습니다.

이제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는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였고, 바다를 이용할 줄 아는 이는 성공을 얻는 신의 축복을 받은 자였으며, 바다는 온갖 생기의 원천이었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면 그 시대의 세계화는 ‘바다화’였고, 그것은 도시들의 폴리스화를 통해 구체화되는 것, 바로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과 더불어.
 
제국 내의 여러 식민국가들도 이런 바다화, 폴리스화의 대열에 앞 다투어 나서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유대의 경우, 내륙 한 가운데 있고 고지대에 입지한 도시 예루살렘까지도 폴리스화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세계화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폴리스화란 폴리스간 국제무역을 위해 사회적 제도들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입니다. 폴리스간의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정향된 각종 교육, 스포츠, 패션 등이 활성화되며, 국제어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어법들이 유행처럼 번져나갔고, 그리스풍의 외래어들이 범람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대의 대세처럼 보였습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일부 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배층들은 이런 바다화-폴리스화의 대열에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알 수 없는 사고로 침몰한 천안함 병사들 46인의 장례식이 지난 4월 29일에 치러졌습니다. 전국에 분향소가 39개나 설치되었고, 군부대 내에도 220개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날은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되었으며, 전국 관공서에는 조기가 계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전 10시에 1분간 사이렌 소리에 맞춰 추모묵념시간이 있었고, 공중파 방송은 장례식을 생중계했으며, 공영방송은 추모모금방송을 편성하기까지 했습니다. 원인 불명의 사고로 죽은 군인들에게, 그것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대단한 국가적 애도가 시행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사망한 병사들은 ‘전사자’가 되었고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북한은 사실상 무력도발의 가해자로 규정된 것입니다. 하여 통일부장관은 타국외교관에게 대북관계를 재고하라는 내정간섭까지 서슴치 않습니다. 당분간 대북 지원 및 교류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되었고, 응징의 방법을 둘러싼 논의가 공론의 장을 주도합니다. 그리고 외국 언론들은 한국만의 이 뜬금없는 신냉전주의적 행보에 의아해 합니다.

그 수몰된 병사들이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군이 공식으로 발표하고 대통령은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실상 정부는 구조에 그다지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죽음으로 방치되었는데, 죽음이 확인된 이후 느닷없이 ‘열렬한 기억’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그네들의 생명을 기억하고자 하지 않았지만, 죽음은 열렬히 기억하고자 합니다. 국가는 살해 방조자였지만, 그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전 국민의 가슴 속에 부활하게 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국민이자 군인인 이들의 생명은 국가가 지켜야 할 공적인 생명이 아니었는데, 그 죽음은 ‘공적인 죽음’이 된 것입니다.

그런 이상한 결정의 주역인 청와대 지하벙커 모임은 부랴부랴 안보관련 위기관리센터로 급조되었습니다. 이는 지난 정권 때 존속했던 기관을 폐쇄했다가 다시 재건한 셈이지요. 하지만 이 급조된 기관이 하는 일이 바로 ‘죽음의 국가화’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정부가 진정 관심을 기울인 것은 대북정책이라기보다는 경제관련 위기관리 정책에 있었습니다. 큰 틀에서 얘기하면 이 정부가 치중한 것은 세계화 경제정책이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구체적인 전략은 ‘전 국토에 대한 토건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북문제는 이러다 할 기조 없이, 지난 참여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데 몰두하는 듯이 보였을 뿐입니다.

이런 생각의 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이 사건 직후 청와대 지하벙커에 모여 긴급한 대책을 숙의했습니다. 부랴부랴 대북위기관리 모임을 급조했지만, 그것은 장기적인 안보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안보정치를 중심 기조에 의해 도구화할 우려가 농후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현 정부의 정책적 중심 기조는 ‘전국토의 토건화’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이 죽음의 국가화는 북한을 적대적 대상으로 재구축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최근 위기에 처한 4대강 사업 등, 전국토의 토건화 정책에 대한 반대의 여론을 다른 곳으로 환기시키리는 데 있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늘 그렇듯이 냉전주의적 안보논의를 이용해서 정권안보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국가는 종종 국민의 죽음을 도구화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위기에 처하도록 방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천안함의 병사들은 바로 그런 전형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시민도 그럴 수 있지만 군인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쓸모없는 생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장이 소모품으로 이용할 뿐인 그런 대상에 불과합니다. 즉 자본주의적 생명력을 인정받지 못한 이들을 국가의 생명관리체계는 결코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른바 ‘천안함의 용사들’은, 국가가 그 죽음을 독점해 버리자, 이른바 ‘영웅’으로서 대단한 칭찬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생명으로보다는 죽음으로서만 이용가치가 있는 존재들로 전락해 버립니다. 우리의 생명권력은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고 삶과 죽음을 도구화하고 있습니다. 하여 권력의 시선에서 저들의 삶뿐 아니라 특별한 우대를 받는 죽음도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존재에게 부활은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영혼이 포박되어 있는 한 말입니다.

다시 성서로 돌아와 봅시다. 바다화-폴리스화의 주인공들은 도시들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도시 문화의 적극적 주역입니다. 그들은 부유하고 학식 있으며 지체가 높은 이들입니다. 훌륭하고 멋들어진 옷차림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세련된 말투로 사람을 대합니다. 그들이 가족은 교양 있고, 자녀들은 아름답고 건강합니다. 그들의 삶은 그 세상에서 의미가 넘칩니다.

그뿐 아닙니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그들에게 죽음 또한 예사스럽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시신을 유기함으로써 내버려지는 몸이 아닌 존재, 무덤에 안장되고, 숱한 장신구 등이 썩어 사라져버린 몸을 상징적으로 대리하는 존재, 그런 이들의 죽음은 끊임없이 산 자들의 기억 속에 잔류합니다. 무덤을 보며 사람들은 그이를 기억하고, 제사의례를 통해 그이를 기억하며, 그렇게 기억한 이야기 속에서 회자됩니다. 하여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이들이 묻힌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때에 그의 몸이 부활할 것입니다. 바다의 제국, 그 세계 질서 속에서.

그런데 한 익명의 예언자는 도리어 종말의 때에는 그런 이들, 기억에서 오래도록 남겨진 이들이 모두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아울러 그네들의 도시, 바다화의 권력에 사로잡힌 도시는 모두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죽음, 버림당하고 이용당하는 죽음들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이사야서」 26장 18~19절)

버려진 생명이 다시 되살아나는 꿈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아래, 바다화-폴리스화의 대열에서 체제에 의해 존재를 빼앗긴 이들의 부활, 이것이 그 시대 묵시적 예언자들이 외친 새 세계의 꿈입니다.

천안함의 생명들이 국가에 의해 버림받은 곳, 그 주검이 도구화된 곳, 리워야단의 권력, 저 물의 권력이 존속하는 바다는 생기가 없습니다. 한데 예언자는 꿈꿉니다. ‘그 날, 리워야단이 생명을 다하는 그 날’(27장 1절), 생명을 파괴하는 도시들이 잿더미가 되는 날(25장 2절), 주님은 죽음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25장 8절)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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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와 하라!
: 데리다로 신학하기를 위한 서론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시카고 통신: 여기는 시카고…


시카고는 전미 최대의 신학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되는 고장이다. 시카고 지역의 가장 큰 신학적 특색은 초교파적으로 구성된 11개의 신학교가 연합체(ACTS: The Association Of Chicago Theological Schools)[각주:1]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ACTS에 속한 신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어느 학교에서든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노스웨스턴대학, 로욜라대학, 드폴대학, 위튼대학, 시카고대학 등에 있는 종교학, 철학과와도 연관을 맺어 필요에 따라 언제든 수강이 가능하다.[각주:2]

ACTS에 소속된 학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Mainline진영(진보적)의 학교와 Evangelical 진영(보수적)의 학교, 그리고 천주교 학교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ACTS에 소속된 전임 교수는 400여명, 학생은 3천 여명, 1년에 개설되는 강의는 총1000여 강좌에 육박한다. ACTS는 또한, 11개의 멤버 학교 외에 Zygon Center (Religion & Science), LGBT Center (Queer theology), Christian-Muslim Studies, Christian-Judaism Studies, Center for Study of Black theology, Center for Study of Korean Christianity 등 신학과 각 분야 연구를 위한 10여 개가 넘는 센터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쟝르와 주제를 넘나드는 신학적 대화와 공방이 일년 내내 현기증 날 정도로 펼쳐지고 있다. (갑자기 제가 시카고를 홍보하는 약장사가 된 느낌이네요)

그러나 이토록 풍부한 신학적 토양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한인교회의 현실은 너무나도 척박하다. 대부분 70년대 말 80년대 초 중반에 이민 온 세대가 시카고 한인교회들의 주된 회중들이다. 본토보다 더 강한 반공의식, 더 철저한 가부장제도를 바탕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그러한 (한국) 전통의 고수가 한인교회의 identity가 되어버렸다. 70~80년대 한국교회의 정서가 그립다면 시카고 교회에 한 번 방문해 보기를...

특별히 요 근래 시카고를 대표하는 몇몇 대형(?) 교회들이 (30년 가까이 시카고 이민 1세대를 목양했던) 1대 목회자들의 은퇴 후, 2대 목회자로의 transition과정에서 혹독한 교회분쟁에 휘말려 있는데, 이 과정에서 시카고 한인이민교회의 고질적 문제들이 불어져 올라오고 있다. 필자도 그 교회 중 한곳에서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는데, 교회분쟁 과정에서 30년 이민 생활을 함께했던 교우와 친지들끼리 순식간에 편이 갈려 서로를 비방하고 저주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이러한 시카고 한인 교계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도모하는 기획 (인터뷰)기사를 시카고에 있는 한 기독언론사에서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다. 첫 회가 시카고 보수적 진영의 신학교를 대표하는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목사의 인터뷰였고, 두 번째 차례로 시카고 진보신학교에 속한 인물 중에 어쩌다 필자가 선정되었다. 인터뷰의 내용은 최근 진보 진영 기독교 윤리학의 동향과 시카고 한인 교회를 위한 기독교 윤리적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기자가 질문을 하면 이에 답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인터뷰 기사 밑에 달린 보수진영 사람들의 댓글에서 발생하였다.[각주:3](아래에 댓글 일부를 소개한다.)

케리그마님: 목사님 말씀 중에 신의 다차원적인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가 없군요
흠흠 님:  이상철 목사님은 동성애, 이슬람의 테러에 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유일신자님: 타자의 윤리에 포커싱하다 보면 윤리적 기준이 상실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말씀으로 바로 알고 경험으로 바로 믿자는 것이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데 혹시 이 의견에 코멘트가 있으신가요?

 
난 지금 이 댓글들에 댓글하기 위하여 30분이 넘게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의 퇴행적 보수주의와 현실 세계에서 진행되는 자본과 테크놀로지의 결합,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탈경계/해체적 사유들이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리는 이 분열된 21세기 사회속에서 신학은/교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글이 끝날 무렵 난 위에 있는 저 괴물같은 질문들에 대해 답을 달수 있을까?

혜자, 장자에게 길을 묻다.

지난 ‘웹진 22호’에서 ‘동양적 전통에서 기술이 어떻게 도의 경지로까지 상승하는가?’를 설명하면서, <장자> ‘양생주’에 등장하는 포정이 소를 잡는 이야기를 소개한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장자>의 첫번째 장인 ‘소요유’에 나오는, 대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혜자와 장자의 대화를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나 있는 곳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똥나무라 부르오, 그 줄기는 흙투성이어서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그 작은 가지들은 뒤틀려 있어서 자를 댈 수도 없소.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소."

 장자가 말하였다.
 "지금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그것이 쓸데가 없다고 근심하고 있소. 어째서 그 곁을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 노닐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지 않소? 쓸데가 없다고 하여 어찌 마음의 괴로움이 된단 말이오?

혜자는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위나라의 재상까지 올랐던 실용주의 정치가였다. 그가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도대체 쓸모가 없다고 푸념하면서, 은근히 장자의 사유가 지닌 비현실성과 허황됨을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자는 ‘그 나무 아래서 노닐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라’는 말로 응수한다. 장자 특유의 무위자연에 입각한 현실논리를 비트는 답변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장자의 대답은 현실주의자인 혜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절대 수긍이 가는 답이 아니다.

혜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장자가 말하는 가치란 세상 안에서, 현실세계에서 운영되는 원리가 아닌, 세상 밖의 질서이다. 무한질주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느림을 이야기하고 탈속적인 이상을 언급하는 장자의 괴변에 혜자는 아마도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것은 장자도 마찬가지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현실원칙에 매여 학대하느냐고, 왜 그렇게 갑갑하게 세상 속에 갇혀있냐고 하면서 혜자를 이해 못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장자와 혜자는 서로 다른 대척점에 서있다. 장자에 의하면 혜자는 세상 안으로만 수렴되는 존재이고, 혜자에게 장자는 세상 밖으로만 발산되는 존재다. 혜자는 세상 안에 갇혀있다는 측면에서, 장자 역시 세상 밖에 갇혀있다는 측면에서 둘은 내용은 다르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운동을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닮았다. 

둘의 대립은 기독교적으로는 초월과 내재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철학적으로는 주관과 객관/ 내용과 형식이 어떻게 화해될 수 있는가에 대한 오랜 물음이기도 하다. 둘의 갈등은 또한 무속의 견지에서 보면 시간과 공간이 지니는 한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육체와 이제는 육체를 벗어난 혼이 더 이상 육체에 스며들지 못해 구천을 떠돌며 육체와 대립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애초부터 소통보다는 불통이, 통일보다는 차이가 삶을 지배하였던 운영원리 아니었나싶다. 그렇다면 신학은 이런 불통과 차이에 대해 어떤 답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시대에 답했던 신학의 대응들

20세기 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How to explain what happen to you?’, 즉 ‘신학적 대상(what)’과 ‘신학적 방법(How)’에 대한 문제였다. 지난 20세기는 실로 야만과 광기, 그것에 맞서는 투쟁과 싸움이 신학적 긴장의 원천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근대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었던 신정통주의신학, 20세기 초반 발생한 미국의 경제공항은 자본주의의 패단에 대한 신학적 문제제기를 일으켜 Social Gospel운동으로 이어졌다. 2차 대전은 신학적으로 많은 물음과 고민을 던져주었던 사건이었다. 서구신학은 아우슈비츠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은 악에 대한 문제, 인간의 고난에 대한 문제, 그리고 신에 대한 물음에 있어 전면적인 도전과 이에 걸맞는 새로운 답변을 신학자들에게 요구하였다.

2차 대전 이후 지속된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정치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기독교와 맑시즘과의 대화를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인간해방과 자유, 사회정의를 위한 포괄적 물음으로 번져나갔다. 이는 구체적 context에 기반한 신학적 답변을 낳았는데, 흑인신학, 여성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 소위 ‘눌린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들이 소중히 발굴되어 진지하게 이야기되기에 이른다. 20세기 말 불어 닥친 냉전의 종식과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자본의 전 지구적 승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이에 대한 신학적 응전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남겼다. 이상에서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난 세기는 사태와 진상에 대한 분명한 이슈와 선명한 대책을 요구하는 신학적 글쓰기를 요구했고, 이런 까닭에 당대의 문제의식들에 대해 (어느 입장에 서있든) 신학적으로 ‘무엇을(what)’ 과 ‘어떻게(how)’를 밝히는 것이 급선무였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 세기는 그 어디에도 신학이 가야 할 바가 전시대처럼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21세기 (자본과 결합한)테크노피아 세계속에서 우리의 치열했던 신학은 점점 생기와 긴장을 잃어가고 있고, 테크노피아에 길들여져 그 안에서 기쁨을 얻는 ‘행복의 신학’ 만이 만개하고 있다. 그 결과 본래 신학이 붙들고 있었던 시대와의 대립과 긴장은 시대착오적 발상이 되어버렸고, 이러한 정황 속에서 신학하는 우리는 다시 신학함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신학, 다시 답하라!

앞서 언급했던 시카고의 여러 연구기관 중 Religion & Science분야를 다루는Zagon Center가 있다. 매 학기 월요일 저녁Zagon에서 주관하는 세미나가 열린다. 2006년 봄학기 때 ‘Religion & Ethics’이란 과목이 개설되었는데,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과학자(혹은 종교학자)들이 펼치는 종교무용론을 다루면서, 이러한 주장들을 오히려21세기 새롭게 등장한 ‘종교현상’이라 결론지으며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남겼다: 과학과 종교의 활발한 통섭으로 인한 존재와 기원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 전 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자본의 일방적 전횡과 그로 인한 (이념적, 지역적, 문화적) 장벽의 제거는 21세기 삶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변화된 종교상황 속에서 지금 시대 신학적 methodology의 문제는 ‘what’과 ‘how’ 가 아니라, ‘왜 (why)’의 문제, 즉 (21세기형) 신학함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교회 문을 열고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신앙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였고, 신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계속 그 물음을 갖고 씨름하였는데, 그래서 어느 정도 나름의 대답들이 확립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왠 새삼 정체성 타령인가? 라고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는 신학자와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왜 선포하는가?/쓰는가?’의 문제이고, 신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왜 읽는가?/듣는가?’이며, 일반인(크리스챤이 아닌)들에게 있어서는 ‘왜, 한국의 기독교가 개독교인가? / 그것은 정확한가?’ 의 문제이다. 총체적으로 ‘왜 우리는 신학하는가? 왜 우리가 신앙인인가?’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최첨단의 테크놀로지와 합리성이 만개하는 시절에 이런 질문은 너무 나이브하고 신비적이지 않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암흑의 시대였던 중세에나 가능했던 질문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합리와 효용과 속도가 강조되는 시대에 왠 종교적 신비? 하지만 너무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교적 신비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기심은 시대와 문명이 발전하고 진보할수록 퇴색하는 것이 아니라 더 확고하게 그 가치가 빛을 발하고 있다.

신학, 데리다를 초대하다

이 대목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신비주의를 전시대와 같은 현실로부터의 이월(도피) 내지 영적 황홀경에 대한 동경으로만 몰아가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신비주의란 저 피안의 세계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의 가치는 신학적 도그마와 신앙고백적 환상이 무엇이고, 그것이 과연 실재하는가에 대한 몰두가 아니라, 어떤 ‘메시아적인 것 a messianicity’[각주:4]이 나를 떠다니게 하고, 나를 한곳에 정주하지 않게 하며, 나를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 ‘메시아적인 것’에 휩싸인 우리는, 체제가 완성한 메트릭스(예: 신자유주의, 일방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영광의 신학, 뉴타운, 빨갱이….등)를 향해 침 한번 “찍!” 뱉으며 딴지를 거는 우리이고, 혹은 그(것)들을 상대로 너무 격렬하지 않게 “놀고들 있네!” 혹은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읊조리면서 살짝 비열하게 비웃어 주는 우리이며, 또는 절정을 구가하는 무소불위한 현 자본주의체제에 흠집을 내기 위한 위험하고 불온한 상상을 하고, 그것을 스멀스멀 감행하고 도발하는 우리이다. (데리다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유령처럼 말이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지금까지 필자가 독해한) ‘a messianicity without messianism’[각주:5] 속에 숨겨진 음모이고, 그 음흉한 속삭임이 지금 우리를 유혹한다.

ⓒ 웹진 <제3시대>


 

  1. 아래주소를 클릭하면 ACTS 홈페이지로 연결됩니다. http://www.actschicago.org/ [본문으로]
  2. 특별히, 데리다와 레비나스에 관한 미국내 권위자들이 시카고에 몰려있다. How to read Derrida로 유명한 도이처 교수(노스웨스턴 철학과), 미국내에서 데리다의 후기 저작들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는 마이클 나스 (드폴대 철학과), 최고의 레비나스 권위자라 평가받는 페이퍼 젝(로욜라대 철학과), 그리고 미국내 인문학도들 사이에서 여신처럼 추앙받는 사회철학의 대가 누스바움(시카고대)까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학자들이 시카고 시내에서 30분내 거리에 몰려있다. [본문으로]
  3. 기사에 대한 내용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chi.christianitydaily.com/view.htm?id=184373&code=pd [본문으로]
  4. 시카고 신학교의 Ted Jennings 교수는 2005년 출판된 그의 저서 Reading Derrida/Thinking Pual (CA: Standford Univ, 2005))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을 전횡적 합리주의에 대한 의식적 ‘딴지 걸기’ 내지는 ‘무화 하기’로 읽어낸다; “데리다는 법의 테두리를 넘어선 정의와 경제적 원칙을 넘어선 선물, 그리고 환대와 호의에 대한 그의 해석에 있어 메시아주의가 아닌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해석의 중요성을 언급한다.”(163) 이에 대해 좀 더 상상하자면, 이는 현실 논리에 대한 장자식 대응과도 관련이 있다. 개똥나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장자와 혜자의 인식, 즉 합리주의를 대변하는 혜자는 개똥나무의 무용론을 주장하지만, 오히려 장자는 개똥나무가 제공하는 그늘에서 낮잠 자는 것을 유토피아(메시아적인것)라 받아치면서 자본의 현실적 실용 논리를 무너뜨린다. 이 대목에서 장자적 사유와 데리다의 해체가 만나는 접점을 가늠해 볼 수있는데, 김형효 선생의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1999, 청계출판사)이 이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다. [본문으로]
  5.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by anidjar (NY: Routledge,2002), 56 &#10;: 데리다의 전기사상이 언어적 전회를 통한 서구형이상학 전반에 대한 다시보기(해체)를 시도한다면, 후기 데리다는 이를 바탕으로 각론으로 들어가 종교적, 사회적, 윤리적 이슈들에 대한 적용을 감행한다. ‘a messianicity without messianism’은 데리다 후기철학을 대변하는 구절이다.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에 대한 오해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윤리적 함의를 말하는 것은 녹녹치 않은 작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리다는 오랜 세월을 돌아 그의 생의 마지막 얼마를‘메시아적인 것’이 어느 때 도래하는가? 그리고 ‘메시아적인 (것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신학적 물음앞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바울을 다시 독해하고, 죽은 맔스를 다시 되살리며, 레비나스와도 화해를 하게 되는데… 이상은 필자의 논문 주제이기도 하다. (아직은 배움이 짧아 변변하게 말할 것이 없지만, 차차 공부가 되어지는 것을 보며 이 공간을 통해 성과와 미흡한 부분들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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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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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14 16:0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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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카고의 교회. 신학담론장의 그 간극이
    아찔하게 느껴지네요.

    헌데 데리다를 전유한 '메시아적인 것'의 개념에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말씀하신 " ‘메시아적인 것’에 휩싸인 우리는, 체제가 완성한 메트릭스(예: 신자유주의, 일방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영광의 신학, 뉴타운, 빨갱이….등)를 향해 침 한번 “찍!” 뱉으며 딴지를 거는 우리이고, 혹은 그(것)들을 상대로 너무 격렬하지 않게 “놀고들 있네!” 혹은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읊조리면서 살짝 비열하게 비웃어 주는 우리이며, 또는 절정을 구가하는 무소불위한 현 자본주의체제에 흠집을 내기 위한 위험하고 불온한 상상을 하고, 그것을 스멀스멀 감행하고 도발하는 우리"

    라는 이야기는 오히려 오늘날의 후기자본주의의 명령인 "네 멋대로 해라"와 곧장 조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체제를 오히려 유지하는 냉소적인하어떤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데리다에게 메시아적인 것이란 언제나 한 사회를 정초하고 있으면서 또한 파괴하는 어떤 사건이자 존재론적인 차원이 아닌지요. 그런면에서 그것의 도래, 혹은 유령의 귀환은 서술하신 것보다 훨씬 더 그 "존재에서부터" 위협적인 어떤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것은 존재이자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유령) 더욱 무서운 것이겠지요.

    저도 벤야민을 요즘 공부중이라 앞으로 이어지는 연재가 무척 기대가 됩니다. 꼼꼼히 읽으면서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2. 이상철
    2010.05.15 02:5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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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지적입니다. 그 이유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후기구조주의 계열의 학자들(사실 그 누구도 자신이 후기구조주의학자라고 말한 사람은 없지만) 을 향한 비판의 주된 내용이 바로 기명님이 지금 거론하신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이성에 의한 이성의 자기비판 내지 자기 갱신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하버마스 같은 사람들이 지니는 문제제기와도 일맥상통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버마스는 들끓는 이성애(理性愛)를 바탕으로 탈이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딴지를 걸지요. 기명님의 댓글은 현대사상계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논쟁의 핵심을 잘 지적한 것이고, 이 문제는 앞으로도 우리들에게 계속 남아 유령(?)처럼 떠돌것입니다.

    푸코가 니체를 읽고 나서 단 하나의 니체주의, 정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력한 니체주의가 있다는 생각에 반대했다지요. 다종의, 다성의 니체를 상정할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데리다 역시 그런 인물이 아닐까 싶네요. 데리다는 (지금까지 제가 읽은 바로는) 단 한번도 메시아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로 상징되어져서 무언가를 정초지으려는 집단, 구호, 인물, 생각…등등을 완곡하게 거부합니다.

    ‘메시아적인 것’이란 기명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 (……)을 파괴하는 사건’이라는 지적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론적인 차원’이라는 지적에는 언뜻 동의할 수가 없네요. 데리다에 의하면 그 존재론적인 확신이 역사상 등장했던 수 많은 ‘메시아주의’로 환원되어 광기로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명씨의 지적처럼 이런 주장이 후기자본주의의 명령인 “네 멋대로 해라”와 조응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본인의 후기철학으로 갈수록 실천적, 윤리적 덕목을 많이 드러내면서 적극적으로 후기자본주의가 양산한 모순들과 구체적으로 대결합니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데리다를 변호하자면 기존의 Ontology of Being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베르그송, 들뢰즈로 이어지는 Ontology of Becoming, 즉 ‘사건의 존재론’ 계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글쎄요, 데리다가 이 부분에 동의를 할 지는 모르겠네요. 워낙 Ontology에 대해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였던 인물이라...

    결국, 문제는 So What? “데리다가 우리 삶에 갖는 효용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천 개의 데리다가 등장을 합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 자기가 읽은 데리다를 말하는데, 솔직히 말해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자꾸 미끄러지네요. 하버마스는 이런 핑계로 답변을 유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유랑하며 살래? 그 따위로 살지 마!’라고 비난하는데......저 역시 당분간 그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좋은 지적에 감사드리며…또 뵙죠.
  3. 지나가는 과객
    2010.05.17 17: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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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차적으로 이상철 님의 글보다는 기명님의 글이 좀 더 데리다의 종말의 개념을 더 잘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많은 부분 데리다의 종말의 개념은 한편으로는 로젠쯔바이크 계열의 구속사 역사 철학에 대한 반대에 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후기 숄렘과 벤야민의 메시야적인 것을 따라 가지요. 제가 보기에는 데리다와 벤야민의 입장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종말론적 역동성을 가지는 기표에서 역사의 체제와 모든 고착된 것을 찢고 갈라버리는 힘이 나온다는 점에서 둘은 모두 유사합니다. 로젠쯔바이크가 구원의 별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상징 자체가 안정적으로 재해석을 거쳐 발전하는 소위 시오니즘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폭력의 가능성이 열리는 그 어느 곳에서나 텍스트는 현실을 찢어 버리는 힘이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데리다와 벤야민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신비주의적 언어관에 있지요. 데리다에게서는 결국 여백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사유의 무정형의 문체적인 힘 자체가 상징 자체의 메시야적 전개가 전혀 예측 불가능한 - 결국 부정신학적 역동성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벤야민에게서는 전혀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즉 순수 언어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 지점에서 벤야민은 이 지점에서 신의 창조물 자체가 모든 신의 정신적 언어로 이루어졌고 하기에 그 메시야적인 것은 실재로 신의 순수 언어가 드러나는 지점이지요. (벤야민의 미메시스에 대하여, 언어에 대하여)에 보면 많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점에서 기명님이 말씀 하시는 것처럼 데리다의 입장을 존재론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풀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명님의 의도가 이것은 아니겠지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진부하지만 언어 신비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어떤 면에서 제가 보기에는 적어도 이상철 님께서 말씀 하시는 이죽 거림 보다는 점 더 강한 그 어떤 무엇- 즉 역사의 계기에서 스스로를 산종하다가 메시야적 계기를 불어넣고 다시 체계에 갇히지 않고 사라지는 그러한 역사의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헤겔적인 새로움이 기실 변증법의 포로에 불과하다면, 데리다에게서 메시야적인 것이란 변증법을 넘어서서 그 여백에서 변증법을 조롱하고 그 예측불가능성 속에서 사라지는 것에 가깝습니다. 기표가 차연을 통해서 영원히 지연되는 의미의 껍데기만을 지속적으로 산출해내는 것 처럼, 역시 메시야적인 것은 하나의 기표일 뿐이고 이 지점에서 그 일어난 메시야적인 것 역시 단순히 껍데기로서 이후의 전혀 새로운 산종에 자신을 양도하는 것이죠.
  4. 이상철
    2010.05.20 20:4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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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제시한 과객님의(기명님도 포함) 발언에 동감을 표합니다.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 에 대한 과객님의 해설은 제가 접했던 많은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해설 중에서도 손꼽 을 정도로 이해하기 쉽고 분명한 언어로 쓰여진 글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종잡을 수 없는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이해에 중요한 나침반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과객님의 해석을 아래에 따라 적어봅니다.

    -‘역사의 계기에서 스스로를 산종하다가 메시아적 계기를 불어넣고 다시 체계에 갇히지 않고 사라지는 역사의 새로운 것’,
    -‘메시아적인 것이란 변증법을 넘어서서 그 여백에서 변증법을 조롱하고 그 예측 불가능속에서 사라지는 것’,
    -‘메시아적인 것은 하나의 기표일 뿐이고 이 지점에서 그 일어난 메시아적인 것 역시 단순히 껍데기로서 이후의 전혀 새로운 산종에 자신을 양도하는 것’


    우선, 제가 원글의 말미에 ‘메시아적인 것’에 대해 다소 거칠게 툭 던지며 글을 끝맺은 것에 대한 변명을 할 필요를 느낍니다. 두 분의 경우는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방법론적인 측면을 강조한 반면, 저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해체적 태도(?)에 더 포커스를 두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다가오는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은 운동의 매뉴얼이라기 보다는, 한 순간도 정주되지 않는 운동 지향성입니다. 그 지향성을 현실에서 드러내는 저의 태도를 과객님은 ‘이죽거림’ , 기명님은 ‘네 멋대로 해라’류의 냉소라고 지적하시며 그것보다는 ‘더 강한 그 어떤 무엇’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데 일면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메시아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온, (과객님의) ‘더 강한 그 어떤 무엇’, ‘역사의 계기’, ‘변증법’ 등등의 용어가 일정의 시간과 공간을 거친 인간적인 大地를 항상 의식하고 전제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입니다. 다시 말해 과객님이 전개한 내용의 근저에는 하이데거류의 인간, 즉 자기 스스로를 현실을 향해 내던지고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인간이 있고, 세계를 그 인간 중심으로 해석해 내려는 끈질긴 의지가 내재되어 있지 않나 하는 점이죠. 이 부분은 데리다가 항상 경계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은 멈추지 않는 의문과 의심에 휩싸인 그 무엇이 아닐까요? 중심은 비어있어야 중심입니다. 누구나 그곳을 잠시 차지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그곳에 정착할 수 없는 헛헛함. ‘메시아적인 것’이란 그 헛헛함의 환유인 셈이죠. 저와 경로는 약간 달랐지만 과객님께서도 본인의 글에서 이러한 점을 강조하셨다고 봅니다: ‘다시 체계에 갇히지 않고 사라지는 역사의 새로운 것’, ‘그 예측 불가능속에서 사라지는 것’, ‘이후의 전혀 새로운 산종에 자신을 양도하는 것’.


    결론적으로, ‘메시아적인 것’이란 현실의 담론 너머 가능성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설사 어떠한 정의와 규격안으로 매몰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해도, 그것은 단지 우발적 사건의 예로 기록되어진 후에 다시 괄호 밖의 가능성으로 퇴각하는 존재입니다. 현실의 논리와 법칙을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의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근거로 대지에 깃발을 꽂고 휘날리며 영토화하려는 음모...이 모두가 '메시아적인 것'이 취하는 영토화에 대한 히스테리한 반응의 덕목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메시아적인 것'은 우리 인식밖의 알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또한 전제합니다. 그것은 우리 밖에 엄연히 존재하는 타자의 형태로 우리 현실을 향해 독설을 퍼붓고, 주문을 걸고, 용기를 주며, 다시 무소의 뿔처럼 가라고 속삭입니다. 그것을 데리다는 달리 표현할 분명한 말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다가 ‘메시아적인 것’이라 끄적이지 않았을까? 엉뚱한 상상해 봅니다. 이야기가 장황하게 흘렀내요.


    기본적으로 데리다의 글쓰기 스타일은 무척 독특하죠. 제가 한글 번역본, 영어본, 불어본을 비교하면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불어본은 미국친구들의 도움을 받고). 마치 어렸을 때 했던 놀이 중 ‘말 전달하는 게임’을 연상시킵니다. 처음 읽고 전달했던 문장이 마지막 주자에 이르러서는 그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이 되어 생산이 되죠. 데리다의 글들과 번역본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농담처럼 천 개의 데리다가 존재한다고 허탈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데리다의 작품에는 철학적 글쓰기의 특징인 논리적인 면이 많이 생략되어 있고, 반대로 문학작품처럼 수사적이고 반복적이며 많은 아포리즘과 단편들이 글을 뒷바침합니다. 이런 이유로 데리다 읽기는 많은 오해와 오독을 동반합니다. 번역과정에서는 말 할 것도 없구요. 어쨌든 저의 데리다 오독에 대해 의견을 내주시고 제안을 해주신 기명님, 그리고 과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5. 과객
    2010.05.21 05: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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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답글 감사드립니다. 저는 딱히 진보 신학 진영에 속해 있다고 하기는 힘듭니다만, 많은 부분 소위 민중 신학 진영이 진정으로 민중 지향적이기를 기대해봅니다.
  6. 한수현
    2010.05.21 12: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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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철님의 좋은 글과 댓글들에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몇자 더한다면,
    메시아니즘에 대한 관점에서만 본다면, 데리다는 벤야민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벤야민과 숄렘이 비슷하다면 그래도 데리다의 a messianicity without messianism은 이상철님의 의견과 같이 역사적 계시에 대한 기억이나 메시아적 형태를 반대하는 것 같습니다 (Marx & Sons). a messianic era라기 보다는 only the messianic interruption of the present (to come)만을 강조하는 데리다는 그런의미에서 벤야민의 revolutional messianism과 다르지 않나 봅니다. 오히려 벤야민은 아감벤에 가깝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며, 벤야민의 '순수 폭력'이나 메시아니즘은 아감벤이 더욱 가깝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철님의 '이죽거림'을 단순히 냉소나 후기자본주의의 주요경향인 'individualism'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아감벤이 말했던 'a possibility not to be'의 통찰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현시대에서 메시아니즘을 말할때, '끊임없는 요청'(저에게 데리다는 이럴때가 많습니다.) 이나 '기다림'에서 벗어나 개인으로 부터 시작되는 현실에 대한 자발적 부정은 역사의 종말이나 변혁, 또는 혁명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또다른 대안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후기 자본주의의 '개인주의'가 문제인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개인주의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의마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상철님의 이러한 '이죽거림'은 오히려 현실에 대한 타인과의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을 오히려 가능하게 하겠지요. 이러한 힘이 아감벤이 말한 community나 네그리가 말한 multitude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댓글을 쓰다보니 이상철님이 이미 다 말한 내용들이군요. 다음글도 기대하겠습니다.


 [신간] 창조성과 세계의 상대성 (Neukirchener Verlag, 2010년)

저자: 전 철 (Chul Chun)
출판사: Neukirchener Verlag
출간일: 2010년 4월
추천사: Prof. Michael Welker

Paperback - ca. 288 Seiten
ISBN: 978-3-7887-2352-1
Preis: ca. 34,90 €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를 협력하는 전 철 박사가 하이델베르크 대학 신학부 미하엘 벨커 교수와 위르겐 휘브너 교수의 지도 속에서 2007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신학부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이 저서로 출간 되었습니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유럽신학의 지평 안에서의 화이트헤드 사상을 신학적으로 본격적으로 다룬 비판적 신학 연구서이자, 유럽 화이트헤드 연구의 권위자인 지도교수 미하엘 벨커 교수의 교수자격 논문이기도 한 [하나님의 보편성과 세계의 상대성](1981)을 출간한, 120년된 신학 전문 출판사라고 합니다.

전 철 박사의 연구는 화이트헤드 자신이 초기 사상(1915-1922)에서부터 깊이 성찰했으며 이후 현대사상과 신학적 사유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창조성(creativity)과 상대성(relativity)의 문제가, 화이트헤드의 전체 사유 안에서 어떻게 발생되었고 발전되었는지를 계보학적으로 밝혀내고 조직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주요한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를 통하여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화이트헤드의 사유가 어떠한 의미와 한계를 지니는지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자 시도 하였습니다.

이 연구를 지도한 지도교수인 미하엘 벨커 교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 교수이며 독일전통적인 신학과 화이트헤드와 니클라스 루만 등등의 현대신학을 종합하여 포스트모던의 현실을 대면하는 신학적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잘 알려진 책으로는 하나님의 영(대한기독교서회, 1995)과 종말론에 관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대한기독교서회,2002)이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국제학술원장을 역임한 후 현재는 국제학제간 신학연구소 소장으로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을 위하여 출판사 주소를 링크합니다.

출판사 주소 http://www.nvg-medien.de/index.php?cat=110&bid=602.352

이 저서는 화이트헤드 연구 분야(Whitehead-Forschung)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할 것입니다. 특히 이 저서는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화이트헤드 사유의 근본 동기에 대한 발생사적인 이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 저서는 아직은 미비한 “과정철학”과 “과정신학” 연구 분야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저서는 기독교 신학과 자연과학, 자연철학, 현대철학, 그리고 종교철학 간의 학제간 소통과 연구 논의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분야에 관심을 지닌 독자들과 연구자들이 이 저서를 주목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미하엘 벨커 교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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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다섯번째

풋내기 목사가 준비하는 하늘뜻펴기
- 땅위를 걸으시는 하느님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한국의 근현대사 100년의 세월을 돌아볼 때, 겉으로 한국은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현대화에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무척이나 급박하고 빠른 사회변동 속에서 한국인들은 차분히 자기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내면을 성찰할 줄 아는 개인을 찾아보기 어렵고 아직까지도 가족, 학연, 지연 등 연고주의와 각종 권위주의 아래 각각의 사적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개인의 생존을 추구하는 모습이 만연합니다. 요한복음서를 읽다보면 한편으로 로마와 유대의 이중의 박해 속에서 고생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한마음이 되어 똘똘 뭉친 요한공동체의 자신감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하셨기에 예수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안에 예수가 계실 수 있었듯이, 요한공동체는 자신들이 예수의 사역을 이어감으로써 자신들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자신들 안에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요한공동체는 자신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만이 세상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의 세상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일 겁니다. 경쟁과 폭력이 난무한 세상에서 사랑의 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리석음에서 바로 하느님을 봐야 하고 자신이 바로 땅 위를 걸어 다니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몸소 체현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설교를 마지막으로 풋내기 목사가 준비하는 하늘뜻펴기는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다음에는 계속 이어서 실수투성 목회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향린의 창립정신과 복음서(4)
땅 위를 걸으시는 하느님
예레미야 31, 31-34 ; 요한복음 14, 6-14

[독립교회의 정신과 삼일 독립운동]

2006년 가을에 저는 <예수말씀과 공자말씀>이라는 성서공부반을 개설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와 공자의 대화라고나 할까요? 2000년 동안 켜켜로 쌓인 교리와 교회의 덧칠을 걷어내면 피폐해진 조국의 백성들의 아픔을 껴안은 뜨거운 가슴과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품은 한 젊은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청년 예수이지요. 쏜 살 같은 변화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고리타분하다는 일체의 편견을 버리고 순수하게 귀를 열어 놓으면 평생 몸으로 배우며 삶으로 고민했던 한 어른의 지혜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공(孔) 선생의 어록집 논어(論語)입니다. 공자 선생께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의 나이를 칭할 때 쓰는 두 글자가 대부분 여기에서 왔지요. 열다섯을 지학(志學)이라 하고, 서른을 이립(而立)이라 하며, 마흔을 불혹(不惑)이라하고 오십을 지천명(知天命) 또는 지명(知命), 예순을 이순(耳順)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공자의 일생을 표현하는 말에서 나온 것들입니다(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論語』 「爲政」4.) 이런 것들을 나누고 있는데 우스개 소리를 잘하시는 노경선 집사께서 자신이 상담을 해보니까, 이 “공자의 말이 다 거짓이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흔이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마흔살에도 마음을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람들이 숫하게 많다는 것이지요. 예순이 되면 귀가 순해진다고들 하는데 즉 마음이 넓어져서 관용의 정신이 생긴다고 하는데, 가는 귀가 먹어 잘 들리지 않는 분들은 많아도 오히려 옹졸해지는 사람들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져서 서른이 되어도 독립하는 청년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노경선 집사님의 분석이었습니다.

향린교회의 네 가지의 창립정신 중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정신은 독립교회의 정신입니다. ‘독립교회’란 어느 교단에도 가입하지 않은 교회를 뜻합니다만, 전 ‘스스로 서는 교회’라고 더 넓게 풀어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민족의 분단이 고착화되고 전쟁이 일어나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교회가 민족의 정신적 각성을 촉구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기는커녕 싸움과 분열만을 일삼고 있었기에 향린교회는 독립교회로 남아 교권싸움에서 어느 파에도 휘둘리지 않는 제3자의 입장을 견지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초기의 교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향린이라는 평신도 교회를 창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쌍수를 들고 찾아와서 입적했다. 싸움 없는 교회, 아무 파에도 가담하지 않는 교회, 딸라의 배경도 없고, 선교사의 콧김도 없는 교회, 따라서 교역자라는 무관제왕도 없는 순수한 평신도의 교회, 이거야말로 한국적 교회가 아니겠는가![각주:1] 

‘독립’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딸라의 배경이나 선교사의 콧김에도 휘둘리지 않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아 ‘홀로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든 민족이든 스스로 홀로서지 못하는 노예의 삶을 산다는 것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짐승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35년간 바로 살았으나 죽은 삶, 목숨만 붙어있는 거지같은 식민지 백성의 삶을 살았습니다.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길 것 같은 그 능욕의 시절을 경험하였습니다. 올해는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0돌을 맞는 해입니다. 90년 전 서울과 평양 등 전국에서 “조선독립만세”, “왜놈과 왜놈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정부를 세우자”, “조선은 조선 사람의 것”, “자유와 평등 만세” 등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며 길거리로 조선의 모든 민중들이 뛰어 나왔습니다. 

3․1 독립운동은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식민무단통치에 맞선 다양한 반일민족해방운동이 한 물결이 되어 터져 나온 성난 파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3․1 독립운동은 독립을 위해서 전쟁도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국내외무장투쟁조직을 지원한 비밀결사운동, 독립을 하려면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교육문화운동, 식민지 경제수탈에 맞서 농민․노동자들의 생존권 수호투쟁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약소민족자결권선언이라는 국제적 변혁분위기에 맞춰 식민지 사회가 보여주는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모순을 없애기 위한 전 인민의 노력이 분출된 운동이었습니다. 구한말 계속된 의병 투쟁과 그리스도교 민족주의자들의 주체적인 자주독립정신이 3․1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일본 자본가와 매판 자본가의 착취와 압박 속에서도 근근이 견뎌온 일부 민족 자본가들은 물질적 후원을 하였으며, 근대적 교육기관과 교회를 통해 배출된 교사․학생 중심의 일반 지식층과 식민지 예속 경제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상인․노동자․농민들의 지지는 확실한 대중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삼천만 동포가 하나 된 3․1 독립운동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바로 “독립”없이는 참다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90돌을 맞는 3월 1일, 오늘 우리는 진정 주체적이고도 참된 삶이 무엇인지,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서의 탁월성]

요한복음서는 “땅 위를 걸으시는 하느님” 즉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삶” 무엇이며, “참된 삶”이 가능한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서가 탄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요한복음서 내에 등장하는 예수께 사랑을 받던 제자(13:23)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전통적으로는 사도요한이라고 알려졌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품안에 계셨듯이(1:18), 유일하게 예수의 품 안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13:23) 그래서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옆에 예수와 가장 닮은 모습으로 그려 넣습니다만, 사실은 예수의 사랑받은 이 제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 살았던 상당히 지적인 인물이었으며, 아마도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의 곁을 끝까지 지켰으며,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이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요한공동체에겐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람이 요한복음서의 저자라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습니다(21:24). 

이 사람은 공관복음서를 다 읽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는 예수와 그의 운동인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이 사람은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이야기로는 자신의 공동체를 이끌기엔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자 한자 적어나가기 시작합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요한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씁니다. 예수는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대로 세례요한이 이사야 예언자의 글을 인용하여 예언한 구약의 성취로서의 메시아나(마르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거나(마태오), 역시 구약의 성취로서 세계사에 우뚝 솟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인물(루가)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하느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하느님,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빛 중의 빛이며, 이 세상의 죄악을 없애시는 분이시며, 목마름이 없는 살아있는 물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선한 목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붙일 수 없는 온갖 수사와 호칭으로 예수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요 10:30, 17:11, 21). 이것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전도서 5장 1절)는 말씀처럼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은 천지보다 큰 것인데, 어느 누가 인간을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느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조차 금지하고, 그의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는 유대인들에게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이다”라는 선언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사렛 도당에 대한 저주문”을 그들의 기도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서 저자는 당대의 모든 유대인의 사유와 인식체계를 뛰어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요?

[종교적 욕망과 신앙]

오늘 제가 나누려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왜 요한복음서는 육체적인 혈통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사렛 촌 동네의 한 목수의 아들을 감히 하느님이라고 부르는가? 왜 로고스가 사륵스가 되었다 곧 말씀이 살(肉)이 되었다고 말하는가? 이것을 통해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바늘로 수십 번 찔러도 아프다는 소리하나 하지 않는 바위와 달리, 한곳에 머물러 한 평생을 사는 식물과 달리, 땅만 쳐다보고 기어가는 네발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하늘을 향해 사유하는 머리로, 두 발로 움직이는 행동으로, 민감한 감수성으로 지구상에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성인이 되어 이 문명사회에서 제 스스로 서려면 보통 3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서른이 되어서야 섰다(三十而立)라고 말했지요. 현대사회에서도 부모 곁을 떠나 자립하여 주체적인 인간이 되려면 서른은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태어나 부모의 돌봄을 받고(유아기 0-5세), 학교에 들어가고(유년기 6-12세), 사춘기(13-19)를 지나 청년이 되고 곧 사회에 적응하는 성인이 되는데 30년이나 걸리는 거지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충분한 영양이나 정서적 돌봄, 지적 자극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삶은 넘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타인 의존적 삶을 살거나 심한 경우 우울증에 노출되고 자기 파괴적 삶을 살게 됩니다. 성인기를 지나 장년기, 노년기를 거쳐 죽음을 맞이합니다. 누구나 두, 세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평생을 살고 그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그 삶의 여정에서 신앙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향린교회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또 하느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어떤 방식으로 여러분은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을 말하며, 하느님께 부르짖습니까?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성숙한 성인이 되는데 신앙생활은 어떤 도움이 되는지요?

제가 만난 상당수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은 자신들 내부에 가득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이거나, 삶의 고뇌와 어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크고 안락한 침대역할을 하는 이였습니다. 프로이트가 비판한 대로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한 때 자신이 사랑하고 무서워하던 유아기 때의 육신의 아버지를 이상화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과 상황이 안 되서 행복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신을 만들어서 그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말하는 포이어바흐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종교인을 저는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망, 여러분의 욕구, 여러분의 자기보존 본능을 충족시키고 만족시키기 위해 하느님을 찾고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상처가 회복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그것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잘못된 이기적 욕망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그 욕망의 추구는 형제와 이웃, 그리고 공동체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십억의 돈방석에 앉기 위해 바로 다른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 도시재개발업자들의 욕망을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욕망의 극대화로서의 종교는 역사 속에서 제도와 의식, 율법 등을 만들어 이제는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그 종교 때문에 피폐한 삶을 사는지 보아서 알 것입니다. 그래서 제 후배 중 한명은 제게 교회보다 술집 많은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술집은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반면 교회는 인간의 정신을 망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 비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 친구는 교회는 다니는데 참 사람은 괜찮아. 기독교인인데도 괜찮은 사람이라 말이지. 허 참.” 

[참 인간]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이제 인간다운 인간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면 어차피 인간이 하느님을 들먹이면서 하는 모든 말 곧 신학이라든지, 신앙고백적 언어는 사실 모두 인간의 말일 뿐이라는 것을 요한은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은 새로운 창조이야기인 요한복음서를 쓰면서 거꾸로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기억해 냅니다. 요한복음서 10장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10:35).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은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욕망 덩어리일 뿐인가? 요한은 예수라는 한 인간을 통해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타인을 이용해 먹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종과 여인과 제자에게 군림하며 부려먹는 주인과 남자와 선생이 있는 반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기는 친구도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13장). 심지어 친구를 위하여 목숨도 버리는 그런 사랑도 있음을 말합니다(15:13).

욕망에 휘둘리며 타인에 의존적인 인간이 아닌 참된 것에 주체적으로 서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이웃 종교인 불교의 선가(禪家)에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스승(祖師)을 만나거든 스승을 죽여라.”(殺佛殺祖) 부처에게 의존하고 스승에게 의존하는 마음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인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 하느님의 인간성 즉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고귀한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자기 비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공동체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나 메시아로만 인식했던 초기의 제자들에 비해 참된 삶, 영생이 무엇인가를 물었던 니고데모처럼 정치사회적 안정만을 통한 행복추구보다 더 고차원적 삶, 위로부터 거듭나는 얼로 가득하게 솟아나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언어로는 얼나로 솟나는 삶을 고민합니다. 물로 씻어내는 정화의식을 통해 지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 죄를 짓고 용서받는 죄의 순환을 끊고 사랑과 기쁨 가득한 혼인잔치처럼 축제를 통해 적극적인 선을 이루려고 합니다. 가나의 포도주 기적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상징하는 성만찬 의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며 진정한 참된 하늘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예언자와 구원자로 부르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완전히 썩어 부패한 죽음의 동굴에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말합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계 공동체들이 중시했던 조직과 규칙, 제도와 종교의식을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평화와 화해와 유연성을 주는 자유로운 성령의 바람을 말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솔솔솔 예기치 못하게 불어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의하면, 이전에는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을 따라야 했지만 앞으로는 마음 판에 직접 하느님께서 새겨놓은 그 음성을 따릅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하느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예레미야 31:34). 이것이 새로운 약속이고 우리가 제2성서를 신약(新約)이라고 부르게 된 경위입니다. 그래서 거대한 성전 건물을 때려 부숴도 참 성전인 양심은 사흘 만에 살아납니다.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육해공군은 때려눕힐 수 있지만 한 인간의 뜻은 빼앗지 못하는 것입니다(子曰: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論語』 「子罕」 25.).

[자유인으로 사는 것!]

홍근수 목사님의 파송사는 향린교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고, 홍 목사님은 향린을 떠나시며 은퇴설교의 제목으로 이 파송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루터의 책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시면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인간이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곧 하느님으로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적 자유를 가지고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녹아들어있는 유교(儒敎)에서는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엄청난 수행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자유란 사변이성적인 지식과 경험 축적적인 지식이 쌓여서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황에 꼭 들어맞는 적실한 행동이 나오는 것(不思而得, 不勉而中)을 말합니다. 공자는 그의 나이 70이 되어서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從心所慾不踰矩). 유교의 길은 사람사이의 관계(禮)를 바르게 설정하기 위해 개인의 인문학적 수양(仁)을 강조하는 윤리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일어난다는 깨달음 즉 연기(緣起)를 통해 일체의 집착과 탐욕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이 사건이 저 사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는 같은 것의 양면일 뿐, 인간의 단견으로 구별 짓고 차별을 두는 것은 모두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타마 싯달타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고 깨달은 자, 즉 붓다가 되어 열반적정의 경지에 들게 됩니다. 불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직시함으로써 참 자유를 누리는 깊고 넓은 심리학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럼 우리의 주인공 요한은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나요?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주체적으로 서는 인간이 되기 위해 요한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34-35) 요한공동체 내에는 세례요한을 스승으로 모셨고, 예수도 그의 계승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적통을 중시하는 사람들, 이방인의 대표였던 사마리아인들, 유대교 회당에 여전히 적을 두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며 눈치를 보는 사람들, 회당을 박차고 나와 떳떳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강경파들, 베드로로 대표되는 조직과 제도를 중시하는 사도계 제자들, 그리고 애제자를 통해 예수의 이야기를 전수받았던 이들, 예수의 죽음 이후 부활한 예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기 어렵다는 합리주의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자본으로 덧칠한 거대 로마제국의 맘몬신이었고, 시시 때때로 맘몬의 사탄적 세력은 로마제국의 조직과 권력을 이용해 공동체를 위협하고 인권을 유린하였습니다.

내적으로 분열의 소지가 높았고, 외부에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없애려는 사탄의 세력이 분기탱천할 때, 요한공동체는 “서로 사랑”함으로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랑의 이름으로 자칫하면 자신의 기준과 방식대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식을 말하기도 합니다(己所不欲, 勿施於人.).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적극적 윤리의 길은 생존하기조차 버거운 이들, 지적인 배움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험난한 길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심리적 깨달음은 가족과 사회적 책무와 현실세계의 복잡한 관계를 몸으로 체험해야 하는 고달픈 삶속에서는 너무도 요원한 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좀 부족한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약점과 아쉬운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준다면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서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인간, 그리고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그 곳에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기도하신대로 하느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처럼 요한공동체도 하느님과 예수 안에 있어 서로 완전히 하나 되는 길이라 믿었던 것입니다(17:20-26).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세상에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일을 요한공동체는 해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한국의 대다수의 교인이 그러한 것처럼 하느님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이 세상에서도 모자라 저 세상의 공간도 차지하려는 욕심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향린교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과 종교적, 대사회적 행위를 통해 유익을 얻고 그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는지, 성숙이 있는지, 서로 사랑이 있는지, 주체적 인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자유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제 성인이고 향린공동체도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기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살리며 지구공동체를 죽이는 길과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온생명을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12:24). 여러분들이 예수의 말씀에 주체적으로 선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셨던 그분에게 제대로 배웠다면,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세상조차도 사랑하셔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땅 위를 걸어 다니는 하느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가 악합니다. 사탄의 세력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악법이 우리를 조여오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기간 동안 예상치 못한 고난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그러니 너희도 세상을 이길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너희는 내가 없어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이제는 너희가 땅위를 걸어 다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신의 친구가 되기 위해 인간의 친구가 되십시오.
사유하는 신앙인, 기도하는 노동자로 거듭 나십시오.
인간의 불완전함을 기억하되,
새 하늘 새 땅을 가슴에 품고, 노력하는 인간이 되십시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세상을 이기신 주님처럼 세상과 싸워 이기십시오.

ⓒ 웹진 <제3시대>

  1. 향린 40년사 87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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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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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가면 과연 애국자가 되는가?


이원필
(독일 보쿰(Bochum)에서 미술사 공부 중)

마리아(Maria)와 토비아스(Tobias)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3월 말쯤이었다. 독일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 아는 형님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독일인이 있다고 해서 내게 소개시켜준 두 사람이다. 자신이 외국인인 것을 이해해주고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현지인, 모든 유학생이 가장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독일에서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소위 탄뎀(Tandem)이라고 불리는 독일인 회화 파트너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탄템의 의미는 쌍방이 상호적이라는 것 즉, 배우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내가 독일어를 상대방에게 배우면 나는 상대방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유학생은 많은데 비해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독일인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이기 때문에 언제나 극심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속에 있는 것이 바로 탄뎀 파트너이다.

많은 유학생들이 바라는 탄템 파트너에 더해서 보수까지 있는 한국어 과외 선생님(?)자리를 어떻게 마다할 수 있으랴, 너무나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토비아스에게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으며 업무 때문에 한국에도 몇 번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한다. 토비아스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아들과 여자친구 덕분에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한국 여행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한다. 독일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독일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의 부부를 드물지 않게 만나게 되는데 이들 중에서 한국어에 관심 있고 배우려고 하는 독일인 남편을 보기란 경험적으로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런데 아직 결혼도 안 한 독일인 남성에다가 그의 어머니까지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외국어로 그것도 능숙하지 못한 외국어로 모국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새로운 것이어서 사실 걱정이 되었다. 괜히 걱정이 된 나머지 첫 만남에서 내 독일어가 서툴기 때문에 영어와 섞어서 설명해도 괜찮겠느냐고 양해까지 구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 정도의 공부를 위해 나름 내용적으로도 그리고 제대로 된 독일어를 구사하기 위해서 준비를 해가지만 막상 두 사람 앞에서 이것 저것 설명하다 보면 나의 독일어는 구문론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는 단어들의 나열이 되기 일쑤고 독일어만의 독특한 발음을 제대로 발음 못해서 더듬거리며 일련의 분절음들을 내뱉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특히 독일어의 ‘r’발음은 한국인에게 꽤나 어려운 발음인데 말하고자 하는 마음만 급하고 아직 단련되지 못한 입술로 ‘r’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하려 할 때는 항상 말더듬이가 되곤 한다. 마음이 급한 것은 항상 올바른 문장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리라. 마치 독일어 수업에서 독일인 선생님이 문장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외국인 학생에게 “Ganzen Satz!”(완전한 문장)라고 다그치는 것처럼.

유학생–되기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압도적인 다수어와 다수적 문화에 대면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유학생은 민족 별로 일종의 문화적 게토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다수적인 것과의 대면의 강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유학생–되기의 주체는 어느 정도 분열증적인 양상을 갖는 것 같다. 다수적인 것에 대면해서는 마치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말더듬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을 만나게 된다면 반대로 자신의 문화적 게토에서는 위축되었던 자신을 위한 일종의 보상으로써의 다소 과장된 몸짓을 취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내가 아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의 조언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독일 사회와 문화에 통합되도록(integrieren) 노력하라. 분열되는 주체를 다수적인 것으로 통합하라.

독일 사회의 주목을 끌기에 유의미한 규모를 이루지 못한 한국인 유학생 사회와 달리 독일 내의 터키계 이주민 문제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지난 몇 년 새 인종차별 문제로 몇 번의 폭동의 일어나는 등 다문화 사회의 홍역을 치르고 있는 이웃나라 프랑스에 비해 덜 극적이긴 하지만 독일 역시 지난 수십 년간 계속되어온 터키계 이주민 문제에다가 근래에 들어 고조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져서 그들만의 물티쿨티(Multikulti: 다문화 사회의 독일식 표현) 문제를 겪고 있다. 터키의 3대 도시가 이스탄불, 앙카라, 베를린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약 200만 명의 터키계 이주민들이 독일 전역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언어는 정확한 터키어도 독일어도 아닌 터키어와 독일어가 혼합된 것이라고 한다. 언어적으로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터키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독일인들의 태도는 지난 독일의 과거로 인한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조언과 같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어느 정도의 한도까지) 인정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독일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언어와 사회적인 측면 에서 독일 사회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수적인 것으로의 통합이 단지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으로만 남으며 끊임 없는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프라하에 살았던 유태인 카프카가 독일어로 글을 쓸 수도 없으며, 독일어 외의 다른 언어로 글을 쓸 수도 없으며, 어떤 언어로도 글을 쓸 수 없었던(들뢰즈/가타리) 이유와 무언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물론 유학생은 이주민과는 다르다. 통합 역시 일시적인 것이며 언젠가는 통합을 유지하거나 본래의 그것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유학생–되기의 중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성과 간(間)존재적인 성격 때문에 유학생은 더욱 독일어도 한국어도 아닌 중간의 어떤 것으로 말할 수 밖에 없으며 양자 사이에서 분열적인 상황에 처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단지 외국 사회, 문화로의 통합의 실패 혹은 포기에 대한 보상적 반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정원이 딸린 독일의 평범한 가정집에서 마리아와 토비아스와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고 가끔 식사도 같이하는 시간만큼은 내가 어느 정도 독일 문화에 통합되었음을 느낀다. 동시에, 그들의 썼다기보다는 그린 것에 가까운 한글 글씨, 한국어의 된소리와 복모음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위안을 얻으며 독일어에 대한 부담을 잠시 덜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유학생–되기의 과정은 본래적인 것(한국적인 것)을 어느 정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체득하기를 소망하지만 결국 소망에 다다르지 못하고 본래적인 것에 불가피하게 끌려가는 자신을 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본래적인 것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임을 언제나 다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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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미강
    2010.05.15 08:2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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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합니다. 원필 선생, 화이팅 입니다. 좋은 친구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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