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의 종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관한 신학적 문제제기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의 뜻은 무엇일까? 카인은 아벨을 죽였고(「창세기」 4,8),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죽일 뻔 했다(「창세기」 22,10).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고 노래한다(「사무엘기상」 18,7). 성서 속의 이 무수한 살인들은 정당한 살인인가? 십계명의 살인 금령은 어떤 살인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가장 일반적인 경우인 누군가를 고의로 죽게 하는 행위가 그 첫째일 것이다(「민수기」 35,21). 한데 더 나아가서, 오래전 부족동맹 시절의 이스라엘 때부터 유래했던 ‘피의 복수’를 통한 살해(vendetta, 「민수기」 35,25)도 부당한 살인에 해당한다. 또한 ‘명예살인’ 전통(「창세기」 38,24)도 금지되어야 할 살인이었다.

요시아 왕(재위 641~609 BCE.)이 법을 반포할 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대중에게 알아듣기 쉽도록 만들어 포고한 십계명[각주:1]에서 ‘살인 금지령’이 담고 있는 구체적 내용은 필경 이런 함의, 고의 살인, 피의 복수 살인, 명예살인 등의 금지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살인죄를 엄단하고자 할 때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과실치사 범죄자는 죽임을 면해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피의 복수로부터 구출해주는 것이다.(「신명기」 4,41). 또한 가해자가 명료하지 않은 살해의 경우, 그 사건을 둘러싸고 가문 간에 벌어질 수 있는 피의 복수를 막는 것도 필요했다. 하여 공식으로 그 사건은 누구도 책임이 없음을 공시함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을 예방하고자 했다.(「신명기」 21,1~9). 반면 존속살해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했다.(「신명기」 21,18~21).

여기서 보았듯이 ‘살인하지 말라’는 법령은, 간단한 듯하지만, 실은 그 내막에는 여러 가지 고려할 것이 있었다. 요시아 정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위에서 본 것처럼, 십계명의 간단한 문구와는 달리, 법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엔 여러 변수들을 함께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훨씬 더 복잡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이 계명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계명과 더불어 신중하게 고려해야 것들은 어떤 것일까?

당연히 누군가를 죽게 하는 일은 불행한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 이의가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물론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는 결코 관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존엄사’의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낙태’의 문제도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나아가 사람들과 인격적, 감성적 친밀성을 교류하는 반려(伴侶) 존재의 생명권의 문제도 제기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반려동물과 반려식물, 그리고 최근에는 인조인간을 의미하는 안드로이드(Andriod)의 생명권[각주:2] 등이 고려의 대상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자살’도 오늘의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자살을 ‘공격성이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가해진, 일종의 전도된 살해’라고 말했다.(「슬픔과 우울증」 in 『무의식에 대하여』) 또한 교회는 훨씬 이전부터 ‘자살’을 ‘자기 살해’의 관점에서 보면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금령을 어긴 행동으로 간주했다. 이런 자살 반대 교리 탓에 가톨릭이나 개신교 성직자들이 자살자들의 장례미사 혹은 장례예배를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아니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자살에 대해 적대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성서의 ‘살인 금령’에는 자살 문제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서에 묘사된 대표적인 자살의 예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적에게 죽임당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사무엘기상」 31,4). 삼손은 블레셋 신전을 무너뜨려 무수한 블레셋인들과 함께 그 돌무더기에 깔려 죽었다(「사사기」 16, 29~30). 또한 예수운동은 처음부터 무수한 순교자들과 더불어 발전했는데, 순교자 신앙은 권력에 의한 타살을 자발적 죽음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자살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자살들이 살인 금령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이스카리옷 유다의 자살(「마태복음」 27,5) 같이 성서가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자살도 있지만, 그때에도 자살은 그이가 지은 죄의 당연한 귀결이지 자살 자체를 살인으로 간주하여 비난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성서에서 자살은 살인 금령과는 무관했다.

자살을 살인으로 해석하여 자살 자체를 ‘잘못된 행위’로 비판했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지도자는 5세기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였다. 그는 자살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음을 강변했던 것이다. 

한데 그가 자살을 비난한 맥락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정치적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출신이지만 로마 황제와 로마 교회를 위해 일한 사람이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도나투스파 교회들이 로마 교회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지역의 반로마 기조와 결합되어 열렬한 대중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요컨대 이른바 도나투스 논쟁의 내막에는 로마에 의해 혹독한 착취를 당하고 있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프리카 지역 대중의 반로마 감정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때 열광적 도나투스파 사제들은 순교를 불사한 반로마 항쟁을 부추겼고, 무수한 대중이 이에 호응하고 있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 사제들이 주장한 순교를 자살이라고 격하했고, 자살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가 아니므로 신의 구원을 결코 받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로마 제국과 교회는 도나투스 운동과 그 대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을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수의 자살 반대론은 도나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공격의 의미를 넘어서 신학적 일반론으로 격상되었다. 하여 이제 자살 문제는 자기 살인으로 해석되었고, 자살자는 교회의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리는 잘못 자리잡은 교리다. 이 교리는 정치적 야바위에 다름 아니고, 그 대가로 자살의 사회적 현실은 망각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여 교회는 자살을 단행한 사람들의 고통, 자살할 만큼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는 대중의 고통을 대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각주:3]

하여 이제 신학은 자살에 대해 다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망각해 버린 그 현실을 탐구하고, 그 속에 담긴 대중의 고통을 대면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 유다국의 요시아 정부가 십계명의 살인 금령을 이야기할 때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자살의 문제를, 그리고 교회가 망각하고 폄훼했던 자살의 문제를 보다 현실감 있고, 깊이 있는 통찰을 담은 신학으로 발전시켜 내야 한다.  

더욱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자살률이 단연 1위다. 요컨대 자살은 한국사회의 살인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에 속한다. 그러니 자살을 신학화하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인 것이다.

먼저 경제활동인구인 15~64세의 경우 자살자의 비율이 우리나라는 OECD 평균의 2배, 65세 이상은 4배나 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이를 좀 과장하면 자살은 개개인의 자기 살해 현상을 넘어서, 사회적인 집합적 충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좀 큰 맥락에서 사회의 추이를 살펴보자. 1980년대는 민주화의 열망이 전 사회를 휘몰아쳤다. ‘1987년’은 민주화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실현되어 가는 가능성,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질서가 중요하게 작동하였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시간이다. 하지만 그 10년 후인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난폭하게 휘말려 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모두의 평등’, ‘모두의 행복’이라는 집단적 가치가 유효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때 우리사회를 뒤흔든 것이 이른바 ‘부자 되기 열풍’이었다.

이제 전 국민은 ‘부자 되기 경제학’, ‘부자 되기 심리학’에 몰두했다. 사람들은 노동과 휴식 시간 가리지 않고 갖가지 재테크에 열을 올렸고, 모든 여력을 있는 대로 다 가동하여 스펙 쌓기에 전념했다. 남들이야 어찌되든 자기 자신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열망이 사람들의 생각을 장악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서바이벌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MB 정권의 탄생은 그러한 부자 되기 열풍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제 도덕도 가치도 필요 없고, 단지 부자가 될 수 있는 길만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 5년 사이 이러한 열풍은 절망으로 전도되었다. 그 미친 서바이벌 게임을 거친 뒤 사람들은 공포감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현재를 살아갈 힘도, 노후를 기대할 희망도 몰락했다. 비정규직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 일터에서 퇴출되는 것에 대한 공포, 가족해체의 공포, 질병의 공포, 빈곤의 공포 등등, 온갖 공포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생존에 대한 ‘공포’다. 사회는 공포에 민감해졌다. 그러자 사회적 공포감에 기생하는 시스템이 발전한다. 매스미디어는 각종 안보 파산의 공포를 유포시켰고, 보험사는 건강과 재산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고, 심리상담가들은 정신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으며, 종교는 세계 파멸의 공포감을 유포시켰다.

공포는 존재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자살 증후군은 바로 이런 ‘서바이벌의 종언’과 함께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하여 자살은 곧 ‘사회적 타살’의 결과이며,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저주의 사회는 ‘생명 파괴의 세계’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 웹진 <제3시대>

 

 

  1. 요시아 왕이 법을 반포할 때, 열 개 계율의 묶음인 ‘십계명’을 처음 반포하였다. 법은 문서 형식의 통치 체계를 수반하는 것인데, 대중은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대중에 대한 법의 통치를 실효성 있게 실현하기 위해 간명한 형태의 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문으로]
  2. SF 영화의 고전인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는 안드로이드의 생명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3. 교회의 자살 금지 교리는 자살한 자에 대한 야만적인 시신 훼손의 관행을 야기시켰다. 이에 대하여는 게르트 미슐러(Gerd Mischler)가 쓴 『자살의 문화사』를 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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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

어거스틴을 벗고 루터를 넘어…

왜 바울신학에 다시 귀기울이는가?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여행을 계획할때 당신은 무엇을 제일 먼저 고민하는가? 장소인가? 아니면 날짜인가? 장소를 먼저 고민했다면 아마도 당신은 가고 싶은 어떤 곳이 먼저 생겼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소개를 받았거나, TV 프로그램에서 보았거나, 아니면 문득 옛날에 가보았던 어떤 곳이 참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날짜가 먼저라면? 아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싶어서 가장 쉬기 쉬운 날짜를 고민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부라는 길도 여행과 비슷한 면이 있다. 때로는 공부할 소재가 명확해서 마치 장소를 먼저 선택하는 여행과 같이 될때도 있고 이곳 저곳 마땅히 갈 장소를 고르다가 날짜에 맞는 좋은 장소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바울서신을 공부하게 된 것은 위의 두가지 상황이 차례로 생겼기 때문이다. 원래는 역사학이나 조직신학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원을 가게되고 자연히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신약신학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성서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교를 할때도, 목회를 할때도. 당시에는 대학원 이후 (필자는 학부 신학과 출신에 신학대학원까지 한국에서 공부했다.)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성서라도 잘 공부하는 것이 좋을것이라는 그야말로 막연한 생각으로 전공을 선택했다.

    대학원 생활이 반넘을쯤 다른 신학대학원을 다니던 학부 동기를 만나 우연히 책 한권을 소개 받게  되었다. 도서출판 시공사에서 출간된 E. P. 샌더스가 쓴 [바울]이라는 200 페이지 정도의 책이었는데, 이 책으로 인해 바울서신을 내 공부의 주제로 결정했고, 유학까지 결심하게 되었다. 단순한 생각으로 선택했던 대학원 전공이 평생의 학문에 대한 주제를 찾는 계기가 되었고 지루한 박사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 것이다. 앞으로 연재하게 될 바울신학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바울서신을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난 후 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나의 학문적 수행을 차례로 소개하는 형식이 될 것이다.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서, 그럼 왜 나는 이 웹진의 귀중한 지면의 몇 페이지를 차지하고 앉아서 이 길다면 긴 바울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보자. 나는 바울신학이 앞으로 상당한 시기동안 현시대 사회와 상당한 연관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신학자들의 책이 출간되면 교회나 신학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그 책들을 사서 보고 토론하던 시절이 있었다. 불트만이나 틸리히등이 살았던 시대에는 신학이 사회의 통전적인 삶과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에 귀기울이던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소위 포스트 모던이라는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모든 관심들이 한방에 사라졌다. 서점에서도 신학책들은 인문학중에서도 구석으로 밀려났고 자기개발도서나 유명설교자의 책들이 신학분과의 리더역할을 자처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신학이 다시 금의환양하는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앞으로의 신학자들의 몫이다. 몇해전이었다. 필자가 공부하는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이웃에 위치한 Lutheran School of Theology라는 학교를 갔다가 시카고 인근의 에반스톤이라는 도시에 위치한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대한 공고문 앞에 한참을 서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컨퍼런스의 제목은 단 한단어 '루터'였다. 물론 그 밑에 여러 주제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미국의 종합대학의 인문학 컨퍼런스의 제목이 그저 '루터'라는 것은 현상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느껴졌다. 첫째로, '루터'라는 이름만으로 몇일간의 컨퍼런스를 개최할 정도로 '루터'와 현시대의 상관성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 지식들이나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컨퍼런스에 참여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학회는 노스웨스턴 종교학과가 중심이 되어 이끄는 것이었지만 노스웨스턴의 국제규모의 학회중 하나로 개최되는 것이었기에 단순한 종교적 관심을 넘어서는 여러 이슈들을 다루고 있었다.

    왜 신학에 이리도 관심이 생긴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원인중 하나로 들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와 리버럴리즘이 역사의 종언, 즉 더이상 진보할 수 없는 인류의 완성이라는 후쿠야마의 사자후가 완전한 구라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를 공언하고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 그 순간에, 세계는 전쟁과 테러, 기아와 경제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마치 911 테러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을때 안보국 국장이 나와서 말한 "Sorry, we failed you." (죄송합니다. 다 우리 잘못입니다.-의역-) 라고 말한것 처럼 이제 세계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계의 강대국에 왜 이시대가 이렇게 되었는가 질문하고 있다.

    만약에 현재의 자유시장경제체제 안에서 지금의 세계 위기에 대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면 신학은 편안하게 뒷방에 앉아서 신앙서적이나 뒤적이면 되겠다. 그렇지 않다면 신학은 새롭게 대두되는 여러 대안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어려더라도 현대 사회에 대한 윤리적 가치정도는 구축해야한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역사의 흐름을 본다면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기독교 담론이 정치화되거나 교회 밖에서 구체화 되었을때 얼마나 폭력적이고 몰상식할수 있는지는 가깝게는 미국의 부시행정부가 일으킨 소위 이라크 성전이나 멀게는 십자군 정쟁등에서 확실히 나타난 사실이다. 영국의 식민정책과 미국의 인종차별 정책의 사상적 뒷받침이 된 것도 성서와 신학이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의 뿌리가 실은 성서에도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였다. 과연 성서안에서 우리가 다른 종교나 사상과 차별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비전을 생산할 수 있을까? 필자는 바울신학에 대한 재고를 통해서 신학이 생산할 수 있는 비전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고 그 여정을 이 글의 독자들과 함께 할 것이다.

    지금까지 앞으로 떠날 여행을 목적을 생각해 보았다. 목적지는 미래를 위한 비전이고, 그 과정중에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과 1970년대부터의 바울신학의 한 귀퉁이에서 점점 크게 울려퍼지고 있는 목소리들을 살펴볼 것이다. 필자는 바울 서신에서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적 위기에 대한 상당히 적절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감히 덧붙이고 싶다.

 

스탠달이 바울신학에 미친 영향

    모든것에는 시작이 있다. 나는 바울신학 여정의 시작을 크리스턴 스탠달 (Krister Stendahl)이라는 학자로 시작하고 싶다. 하바드 대학의 교수로서 스웨디쉬 교단의 감독으로 깊은 신학적 통찰을 가졌던 그는 자신의 이전에 있었던 근대 바울신학의 흐름에 방점을 찍고, 새로운 바울이해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젖었던 사람이었다. 

    한 평범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 한 사람이 접근하여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불쌍한듯 평범한 이에게 말한다. "형제님 당신은 죄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죄인임이 틀림없으니까.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심판에 잔뜩 겁을 먹은 이에게 전도자는 말한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께서는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셔서 구원의 길을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이미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 한순간에 죄인이 되었다가 살아난 평범한 이는 교회를 향해 발걸음을 돌린다. 필자는 이러한 구원론에 대해 통채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라면 그 이전에 살았던 기독교를 몰랐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복잡한 답안이 주어지기 시작한다. 연옥이라는 둥.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둥. 하지만 만약에 위의 이러한 구원에 대한 말들이 바울에 대한 오해라면?

    스탠달은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에 조금이나마 접근하기 위해서는 바울서신을 읽기전에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론 그에게는 서구인이었지만) 하나의 거대한 전제를 벗겨버릴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바로 "죄의식"이다. 필자가 고등학교때 읽었던 바울에 대한 책중의 한 표현이 기억난다. "10할 타자는 없다.” 무결점의 야구선수가 없듯이 죄없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하나님앞에 모두 죄인이다. 오직 우리의 죄인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율법으로 구원받을 것이 라고,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은 다 틀렸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우리는 의인으로 하나님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가면,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은 없으며, 교회 밖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거대한 하나의 구원론이 기반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서신이다. 여기에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를 예수를 믿는 종교로 바꾸어 버렸다!"고 비판한 하르낙의 불만이 있고, 니체의 비판이 있다.

    인간은 죄인이며 바울은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바울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과 루터를 읽고 있는 것이라고 스탠달은 말한다. 최초의 서구적인간인 어거스틴은 자신의 영적 기록(고백록)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저술한 최초의 서구인이자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어거스틴은 자신의 질문 “대체 어떠한 근거로 한 인간이 구원을 얻는가?”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의 이신칭의를 인간 개인의 죄의식에 대한 해답으로 해석했다.[각주:1] 사실 어거스틴 이전의 기독교 기록들에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언급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 믿기만 하면 되는가? 믿음은 행위라는 것을 수반하지 않는가? 어거스틴 이전에 이러한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스탠달은 그 이유가 초대 교회시절에는 바울의 의미를 잘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바울에게 칭의의 문제는 모든 인간 개개인의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열린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바울의 의견이었음을 이해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탠달은 바울의 서신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터나 어거스틴의 콘텍스트에서 이해된 바울이 아니라 바울이 살았던 콘텍스트에서 바울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과 루터에게 해결해야할 문제는 인간 개인의 죄와 구원의 문제였다면 바울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방인 선교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정작 바울이 말하였던 율법을 행함에 대한 비판은 유대교의 할례와 음식법등의 문제였지 인간 개인의 노력을 통한 구원에 대한 존재론적 비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각주:2]

    유대인들이 거절하고 로마인들이 십자가의 형틀에 죽여버린 예수가 부활하여 자신이 메시아임을 확증하였음을 믿은 바울. 그가 고민했던 것은 과연 이 부활한 메시아의 의미가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였다. 예수를 거절하였으니 유대인들은 심판받을 것인가? 로마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으니 심판받을 것인가? 유대교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오랫동안 기독교는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고 이방인들중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실것이라고 바울이 믿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질문들이 바울이 고민했던 것이고, 바울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 것이 그의 삶이자 저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나 스탠달은 개신교 핵심 교리의 뿌리인 로마서의 핵심은 3-5장이나 6장의 구원론이 아니라 9-11장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유대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고, 미래에 대한 바울의 신앙을 드러낸 9-11장이 로마서를 이해하는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선교사인 바울에게 당시 메시아 공동체와 유대 회당의 관계는 중요했는데, 9-11장에서 바울은 결국 이 두공동체가 하나님의 계획속에 함께 공존할 것이라고 말한다.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것인데 스탠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때가 되면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말할 뿐이다.”[각주:3]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정의가 아브라함의 약속에서 부터 계속 유대백성과 함께 했고, 이제 이방세계로 메시아 예수를 통해 열려졌고 그 사건은 단순히 인간 개인의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기에 이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고 선물이였던 것이다.

    스탠달은 바울신학의 새로운 해석을 위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의 기준을 제시했고, 이는 현재까지 학자들에게는 논쟁의 이슈로 또한 후학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개종이라기보다는 부름 (Call rather than Conversion)
    사도행전의 바울의 체험은 개종사건이라기 보다는 이방인 사도로의 부름받음이다. 내러티브의 구조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을 부르는 사건들과 비슷하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면서도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바울의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사울의 이름이 헬라지방에서 바울로 발음되는 예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즉 사울에서 바울로의 이름의 변화는 종교적 정체성의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바울은 유대교전통의 선진자였고 그의 책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도래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를 거절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고 구원의 약속을 이룰것이다.)

    용서라기보다는 의인됨 (Justification rather than Forgiveness)
    불트만의 유명한 명제인 ‘신학은 인간학’은 적어도 바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흔히 의인됨과 용서받음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놀랍게도 바울서신에서 용서라는 단어는 단 한번 (롬 4:7)에서 발견되며 이또한 시편 32편의 인용이다. 용서라는 것은 용서받을 것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이 용서받아야할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언뜻 쉬운 질문인듯 하지만 실상 텍스트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나’라고 표현되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행한다. 그러한 자신을 보는것이 절박하고 괴롭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행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안의 죄이다. (롬 7:20) 바울이 인간을 상황이 죄아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 전통적으로 메시아의 도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를 쟁취하거나 세상이 완전히 타락했을때 이루어진다고 묵시전통에 서술되어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드러나심과 함께 시작됨을 말했는데 의인됨은 메시아에 대해 충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지 용서받음의 문제가 아니다. 바울의 죄악된 세상을 말할때 그는 세상의 만연한 죄악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지 용서받아야할 개인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닌것이다.

    죄라기보다는 약함 (Weakness rather than Sin)
    바울에게 죄가 큰 문제가 아니었다면 과연 왜 바울은 그의 많은 서술에서 자신의 괴로움과 부족함을 토로하며 힘들어 했을까? 서신들을 살펴보면 사도로서 바울은 자신의 과업을 충실히 행하지 못했다고 생각될때 즉,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힘들때 자신의 부족함을 토로했다. 결국 죄에 대해 괴로워하기 보다는 자신의 약함을 고민했던 것이고 그 약함은 자신의 사역속에서 오는 여러 고난들이지 개인적인 차원의 성찰이나 영적인 죄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통합보다는 사랑 (Love rather than Integrity)
    바울의 칭의가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맞춤형 계획이라고 해서 바울이 구원의 문제를 타인의 입맛에 맞게 생각했다면 오해이다. 여러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바울이 노력했을 지라도 바울에게 믿음보다 소망보다 사랑이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바로 사랑이 바울이 생각하는 기독교신앙의 정수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스탠달은 이때의 사랑이라는 것은 세금을 내는 행위와 비슷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공공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지만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행위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세금으로 정부가 뭘할지는 일단 예외로 해두자.)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이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공공을 위한 삶, 그것을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그 행위를 하는지도 잘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는 감정도, 인식도, 판단과도 다른 하나의 삶의 방식이며 이것이 메시아에 대한 충성, 즉 신앙의 결정체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모든 타인을 향해 열려있어야 한다.

    보편적이라기보다는 독특한 (Unique rather than Universal)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바울의 공동체 이전에 수많은 이방인 공동체들이 있었다. 바울은 로마에 가보기도 전에 로마의 교회들에 편지를 보냈다. 바울의 생각이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여러 다른 생각을 가진 독특한 공동체들이 있었을 것이다.


    짧게나마 스탠달의 다섯가지 기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스탠달의 기준들은 바울신학에 대한 이전까지의 연구들에 괄호를 치고 바울의 선교적 상황에서 바울서신을 새롭게 읽을 것을 학자들에게 종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바울을 연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후대의 학자들은 New Perspective라고 명명하였다. 다음 웹진에서는 소위 뉴페스팩시브라 불리우는 연구에 학문적 엄밀성을 부여한 E. P. Sanders라는 학자를 소개할 계획이다. 샌더스나 제임스 던, N. T. 라이트, 나노스, 캠밸, 엘리엇등의 학자들이 이름이 이미 익숙한 독자들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웹진의 글들을 통해서 개괄적으로 새관점주의를 정리하기 보다는 그들의 독특성을 살펴보고 나름의 비판적 해체와 수용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바울에 관심있는 분들의 열독을 기대해본다.

ⓒ 웹진 <제3시대>

 

  1. Krister Stendahl,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Fortress Press, 1976), 16. [본문으로]
  2. 스탠달은 소위 어거스틴과 루터의 introspective conscience(자아 성찰적 의식) 라는 것이 전형적인 서구적 생각이고 이는 바울과는 상관이 없는 인간관이라고 보았다. Ibid., 18. [본문으로]
  3. 로마서 20:25-26참조. Ibid., 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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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3.07.04 21:0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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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배우고 갑니다. 앞으로 진행되는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2. 한수현
    2013.07.06 08: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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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번 글을 겹쳐서 씀으로 해서 여러 오타가 있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이상철목사님 격려 감사합니다....
  3. 꾸도리
    2016.10.19 07:0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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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러니깐 스탠달의 제안(?!)에 기본적으로 동조하며 새로운 바울 읽기를 시도한 이들이 마지막 부분에 열거해주신 사람들이고, 이들을 묶어서 "새관점학파"로 부르는건가요?^-^
    혹 연재 가운데 논의가 허락하신다면 왜 요즘 많은 철학자들(예컨대, 아감벤이나 지젝)이 바울에 관심을 갖는지도 짚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한스
      2016.10.28 17:0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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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관점 학파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새관점에 관한 글, 샌더스와 제임스 던에 다루었습니다.

      철학과의 연결은 스티븐 무어에 대한 웹진을 참고하시면 될 듯 합니다.

 

무제

 

이미 나는 헛헛한 웃음을 뱉어 내고 있었다.
입안 가득 세멘 가루는 날카롭고 미지근한 대기는 성처럼 도시에 쌓인다.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얼마나 누굴 기다렸으며 얼마나 안락한 관계를 좋아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찰나의 공포감이다.
그리하여 나는 도시의 모든 물체다.
터지고 메워진 눈으로 너를 조망한다.
너의 표면에 저장된 수많은 사건들을 알고 싶지 않다. 허공을 짓누르는 지리한 시간들도 가늠하고 싶지 않다. 누구의 욕망과 누구의 분노에 얽힌 불빛의 이면을 파헤치고 싶지 않다.  단지 그냥 너를 본다.
거친 너는 눈 없이 나를 보고 손 없는 나는 너의 거침을 인정한다.
의지 없이 던지는 시선 끝에 나를 보는 네가 있을 뿐이다.

내게 요구하지 마라.
계절과 공간의 명칭을 요구하지 마라.
색깔과 나라의 명칭도 요구하지 마라.
켜켜이 쌓인 표면에 너의 아름다움과 나의 웃음이 있을 뿐이다.
이름 없는 내가 너의 바닥에 부딪혀 튕겨지고 부서진다.
그게 우리의 언어다. 스며들지 않는 우리의 설레는 관계다.

 


 

 

오종희 作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 [사진에세이]는 한백교회 사진동아리 '눈숨' 회원들의 작품을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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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V)
: ‘실재(the Real)’에 관하여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세계철학사’(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철학연구소 著)와 ‘수학의 정석’(홍성대 著)

대학 신입생때 이런 저런 철학사책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때는 흔히 빨간책이라 불리던 요한네스 힐쉬베르거가 쓴 <서양철학사>를 많이 읽었다. 철없던 시절 묵직했던 그 책을 허리춤에 무슨 훈장마냥 끼고 다니며 허세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하나를 더 꼽자면,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철학연구소’에서 간행한 10권짜리 <세계철학사>였다. 중원(출)에서 출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 다 훌륭했으나, 필자는 후자를 더 좋아했다. 대부분의 철학사책들이 관념론적인 입장과 서양철학사 위주로 기술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소련에서 나온 철학사책은 맑스와 레닌의 후예들답게 유물론적 전통에서 기존의 철학사를 비판했을 뿐 아니라, 책 전체에서 동양철학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 신.구약 개론시간에 역사비평학을 배우면서 성서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균열이 생기며 충격과 동시에 묘한 흥분을 느꼈던처럼, 소련에서 나온 <세계철학사>는 그런 의미로 내게 다가왔었다. (문득,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은 어떤 철학사책을 읽는지 궁금해지네…)
예나 지금이나 철학사책을 처음 넘기면 으레 고대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순서가 먼저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떻게 운동하는가?’ 등등의 주제가 먼저 소개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시도했던 그 무렵 등장했다는 수많았던 철인들의 발언을 접하며, 나는 철학에 대한 흥미를 채 느끼기도 전에, 그들이 토해내는 친절하지 않은 개념의 홍수에 치여 질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는 잠시 책을 덮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처음부터 책을 펼쳐들고는, 또 다시 휘청거리다 덮고, 다시 펴곤 하던 행위를 반복했었다. 마치, 새학기가 시작되면 수학 정석책 처음부분인 집합편과 방정식부분을 반복하다 보면 그 부분만 손때가 묻어 빛이 바랬던 것처럼, 내가 읽었던 철학사 책의 고대 그리스편과 칸트와 헤겔편이 그랬다.


너무나 오래된 질문, 실재!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현대철학의 논의 역시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모두 그들 사상의 근거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끌고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고대그리스 자연철학을 요약하는 상징적인 문구가 있다. ‘일자(一者)와 다자(多者)논쟁’이 그것이다. 일자측을 대표해서는 파르메니데스가 나오고, 다자측의 대표선수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변화와 운동을 강조했던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달리, 파르메니데스는 확고부동한 일자의 존재를 신봉했으며, ‘세상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something) 있는가?’라는 문구는 파르메니데스 이후 서양 관념론을 대변하는 아포리아가 된다. 그 something 을 둘러싼 해석의 역사가 서양철학의 시작이었고, 그 something을 서구철학에서는 실재라 부르기로 공식적으로 합의하였는데, 아마도 그 공인 시기는 플라톤 이후가 아닐까 싶다. 화이트헤드가 ‘서구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각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젝의 실재에 대한 언급에 앞서 전체 철학사의 지형속에서 실재론의 기원, 전개과정 등을 언급함이 마땅한데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솔직히 말해 그만한 깜양도 안되고. 비록 전체 실재론의 역사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이 글에서 적어도 본격적으로 지젝의 실재를 언급하기에 앞서 칸트의 실재에 대한 논의는 잠시 짚고 넘어가려 한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칸트의 실재(물자체)는 현상과 절연되어 있는 반면, 지젝이 말하는 실재는 현상 곳곳에서 출몰하는 그 무엇이다. 라깡식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그물을 찢고서 섬뜩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인 것이다. 실재를 타자로 번역하면 그 의미는 더 확 다가온다. 칸트의 타자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있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그대이고, 지젝이 말하는 타자는 내 안에 있는 타자, 즉 ‘그대가 곁에 있어도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씹어먹고 갈아먹어도 여전히 우리를 허기지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젝의 실재를 언급하기에 앞서 칸트의 실재를 언급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칸트와 지젝 모두 실재를 언급하였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실재에 대한 상이한 발언은 후에 전개되는 주체에 대한 논의, 그리고 본인들의 신학과 윤리학에 대한 서술에 있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실재

전체 철학사의 흐름속에서 통상적으로 칸트가 성취한 업적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닐까 싶다. 빛으로 이어졌던 무한(신)과 유한(인간)사이 통일성을 깨뜨렸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현실(경험)의 영역과 우리가 알 수 없는 경험 밖의 영역을 갈라 그 경험 밖의 영역을 칸트는 물자체라 칭하였다.
물자체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50m 밖으로는 수영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고 가정하자. 고작 50m 수영하고 돌아온 한 인간이, 50m를 수영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수평선 너머 수십 km를 수영해야 닿을 수 있는 어느 지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 담화는 맞는 것일까? 칸트는 기존의 서구 형이상학이 저지른 오류를 이런 식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상상속의 그대(실재)를 둘러싼 짝사랑이 결국 서양정신의 역사였다면?” 칸트는 정직하게 그 물음에 대해 ‘Yes”라 시인하였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실재)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과 도착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이므로, 이제 그만, 그 변태적 행위를 중단하자! 이제 그만, 현실의 사태에 대한 규명에 있어 신의 은총과 신의 자비가 아닌, 불완전하고 미흡하지만, ‘나의 경험과 판단과 인식에 입각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직한 것 아니냐?’며 칸트는 그 동안의 서구정신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인간은 칸트에 의해 줄 끊어진 연이 되었고, 하늘에 떠있던 연과 땅에서 연을 날리던 소년.소녀와의 일체감은 종료되었다. 하늘에 떠 있던 연이 물자체였는지, 땅에서 연을 날리던 그 소녀,소년이 물자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제 둘은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만나서는 안 되는 운명이 되었다. 신화상에서 존재하던 에덴 이후의 삶과 바벨 이후의 삶이 칸트에 의해 일상에서 섬뜩하게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여기까지가 필자가 좋아하는 칸트씨입니다)


칸트의 반전

하지만 서구정신에 대해 이처럼 가열찬 칼부림을 감행하던 칸트는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는 도덕률이 빛난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본인 주장에 대한 첨삭을 시도한다. 칸트는 현실의 사태를 진단함에 있어 계시의 음성이 아닌, 인식의 틀, 즉 범주(예:양, 질, 관계, 양상)의 보편성을 끌어들인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우리가 흔히 초월적이라고 할 때, 플라톤이 말하는 급격한 이원론에 바탕한, 현실을 초월한 어떤 영역을 지칭하는 경우에만 ‘초월적!’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플라톤류의 초월은 급격한 초월인 경우이고, 약한 의미의 초월도 가능하겠다.
예를 들어, 북한의 카드섹션을 상상해보라. 얼마 전 CNN뉴스에서 북한 관련 뉴스를 보는데,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수 만명의 북한 인민들이 모여 카드섹션을 하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주제는 주로 사상적인 것으로 사회주의 우월성, 내지 반미, 반일, 김일성.김정일 우상화, 김정은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현실을 초월한 모습이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능라도 경기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북한인민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는데, 그것은 분명 조금 전 카드섹션에서 보여준 보편적 주체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일사 분란했던 대열이 와해되고 산종되면서 흩어지는 개별적 주체라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수많은 군중이 완벽한 카드섹션을 연출하려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인원과 도구에 대한 계산, 인물들의 위치설정과 구성원 전체의 정확한 타이밍 포착 등이 필요하다. 어떤 강력한 보편성이 그 카드섹션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보편성을 어기는 개별적 존재가 등장할 때 카드섹션은 망가지게 된다. 보편적 게임의 원칙과 그 보편성에 입각해 수 만명의 인민에 의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연출되는 카드섹션! 우리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기운에 대해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또한 다른 의미의 초월적 영역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칸트가 비록 그간의 서구형이상학 특유의 초월적 이성에 대해 용도폐기를 선언했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사건과 증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망(범주)을 설치했다 함은, 개별주체에게 인식일반에 대한 보편적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카드섹션을 지배하는 보편적 룰과 같은 초월적 기재에 대한 인정을 뜻하는 것은 아닐런지! 바로 이 지점이 칸트의 이율배반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결국, 우리의 감각적 인식너머의 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던 칸트는 그 경험적 인식의 엄격함을 마련하는 단계에서 범주의 영역, 즉 라깡적 의미의 상징계를 설정하였고, 비록 물자체로서의 실재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할 지라도, 약한 의미의 초월적 룰에 대한 재소환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여전히 칸트는 서구 초월철학의 강력한 자기장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결과, 칸트는 ‘초월’씨의 앞문을 멋있게 박차고 나왔지만, 나중에 소리도 없이 그 집의 뒷문으로 슬그머니 다시 기어들어가는 궁색한 모양새의 칸트가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본인이 훼손한 실재에 대한 보충과 첨삭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호기 어렸던 칸트 초기 실재론에 대한 궁색한 미장센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면 칸트에 대한 몰지각하고도 예의 없는 발언일까?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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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상철
    2013.07.29 23:3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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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 링크시킨 지젝과 촘스키의 설전을 지켜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사실 촘스키의 지젝을 향한 공격과 그리고 지젝의 대응은 그닥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전에 하버마스와 리오타르의 그것처럼 모던과 포스트모던 논쟁,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중세) 실재론과 유명론, (고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라이토스로 이어지는 서구 정신사의 지리한 논쟁을 다시 재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의 논쟁이 진부한 소재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이어서, 촘스키여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네요. 지젝과 촘스키에 기대어 우리의 과거를 다시 한번 반추해 보겠다는 의미, 지젝과 촘스키에 역시 기대어 미래를 예단해 보겠다는 의지... 이런 기운들이 섞이면서 게임이 완료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소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이런 논쟁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곳에서 있다보면 어느덧 (혁명을 향한) 비등점으로 향하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앙자의 논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깔려 있는 듯 합니다. 양적 축적에 따른 질적 승화라는 변증법적 논리학의 기본 공식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고, 이러한 논쟁들을 통해 이완되어 버린 우리네 머리와 가슴에 다시 현실에 대한 변혁을 담은 이야기들이 계속 재생산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백만,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그렇게 거듭 이어지다보면 어느순간 '빅뱅'이 우리에게 몰려들어 올것입니다. 요한복음 한 처음에 등장하는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백만스물세번째만에 우리에게 일어난 '양적축적에 따른 질적전환의 찰나를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터진 감동과 전율, 감격과 감사의 방언!'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저는 더 맹렬히 지젝과 촘스키가 싸웠으면 합니다.
  2. 이상철
    2013.07.31 01: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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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촘스키의 지젝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지젝의 대응이 화제네요. 둘 다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에 등장하시는 분들인데, 이렇게 싸우시면 논란해요~ ㅋㅋ
    아래에 관련 기사 링크시킵니다.

    http://www.openculture.com/2013/06/noam_chomsky_slams_zizek_and_lacan_empty_posturing.html

    http://www.openculture.com/2013/07/slavoj-zizek-responds-to-noam-chomsky.html

 

강의 취지_

사람은 ‘앎’과 ‘함’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살아간다. 역사-문화적으로 그리스도인이란 ‘느낌’이 없는 집단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느낌은 감정적인 것(동감이나 공감 같은)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다. 감각적 느낌이 없는, 감각적 느낌으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서가 메말라버린 집단이 그리스도인 아닌가?
결코, 성서적[히브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성서적인 것으로 이데올로기적[교리적]으로 변조하여 그리스도인의 몸을 봉인하고, 그 봉인을 바탕으로 사목-권력(상징-권력)을 강고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감각’이다. 감각은 ‘살’(sa.rx)의 운동이고 이 감각운동이 없는 신체는 죽은 것이다. 이 난장-마당에서 묻는 물음은 간단하다. 인간의 원-생명(archi-zoe)인 하느님의 루아하에는 감각적인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감각적 쾌락과 정신적 기쁨은, 살의 쾌감과 종교적 법열은 구분될 수 있는가? 감각적인 미적 정서의 확장과 심화는 무한한 하느님의 원-생명의 또다른 선물이 아닌가?
첫 번째 난장-마당에서는 <<히브리성서>>를 음란하게 훔쳐 읽는 시선들을 늘어놓을 것이다.
두 번째 난장-마당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열정(passion)과 예수의 수난(passion)을 화-쟁(和-諍)시킬 것이다.
이 과정은 결국 예수가 말한 ‘기쁨’(“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을 정신-신체적으로(psycho-somatic)으로 강렬하게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강사_ 이정희(목사/백석대학교 기독교문화예술학부 강사)

일시_ 2013년 7월 7일, 14일(매주 일요일 2회), 오후 2~4시

장소_ 안병무홀(한백교회당)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과 2번 출구. 두 출구 사이 골목 50미터, 좌측 건물의 1층)

공동주관_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한백교회
문의_ 02-363-9190, 010-4944-2019(정용택 연구원), 010-3043-5058(유승태 연구원), 3era@daum.net

수강료_ 1회당 5,000원(한백교회 교인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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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김진호
개강 2013년 6월 28일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 7시30분 (8강, 120,000원)
강의큐레이터(쿠쿠) 김윤동
 
강좌취지
기독교는, 특히 개신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없는 종교의 하나이고, 가장 문제적인 종교의 하나이다. 혹자는 기독교는 시효가 만료되고 있는 종교라고까지 말한다. 하여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중증 위기의 종교다. 그러므로 위기에 대한 근원적인 점검 작업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이 강의는 위기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그 핵심 교리들에 대한 비판적 신학의 문제제기들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1강  책의 종교, 성경의 정치학
2강  유일신의 종교
3강  예수 담론과 식민주의
4강  바울 담론과 식민주의
5강  공격적 시오니즘의 종교
6강  자폐적 교회주의의 종교
7강  마초이성애주의의 종교
8강  일요일의 종교
  
참고문헌
매 강의마다 강의안 배포
 
강사소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서강대학교 수학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아름다운재단 배분위원 역임
주요 저서로 『반신학의 미소』, 『예수의 독설』,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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